281화
매니저 안이상은 민경섭을 따라 가로 엔터 건물 밖으로 나왔다. 민경섭이 말하길, 인생을 교훈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건물을 나오자마자 민경섭이 어떤 교훈을 새겨주려는지 이해가 갔다.
민경섭은 안이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상아, 봐라.”
그가 손가락으로 성필과 장하양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장하양을 목말 태운 성필을.
“약속을 뇌에서 거치지 않고 하면 저렇게 된다.”
“박 이사님…….”
가로 엔터의 메인 프로듀서, 성필은 장하양을 어깨에 지고 한 걸음씩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의 위에 탄 장하양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었다.
둘 다 부끄러워서 버티지 못하지만, 약속이란 이름으로 이 행위가 자행되는 중이었다.
“박 이사님 이제 시작이라구요! 힘내세요 힘!”
리카가 마라톤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처럼 성필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다른 멤버들은 출발선이자 결승선에서 핸드폰을 들곤 이 진귀한 광경을 남기려 했다.
“미친, 쌀 2.8 포대 들고 한 바퀴를 도네.”
조아라의 감탄으로 장하양의 몸무게마저도 실시간으로 밝혀졌다.
성필이 건물을 반 바퀴 돌았을 무렵, 2층 사무실 창문으로 다른 직원들이 응원해주었다.
“하양아 파이팅! 절대 지면 안 돼! 부끄러워도 버텨! 박 이사님한테 약속의 무게를 가르쳐 줘!”
이유이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면서 열변을 토했다. 다른 직원들도 그녀의 뒤에 모여 옹기종기 창문으로 고개를 뺐다.
비틀, 성필의 걸음이 순간 흔들렸다.
“아아, 박성필 선수 이대로 무너지나요!”
A&R팀 이재호의 외침에, 손혜빈이 그의 옆구리에 바짝 세운 엄지를 박아 넣었다.
그가 헛숨을 들이켜면서 무릎을 꿇었다.
“하양이 몸무게 화제로 올리지 마요.”
“아, 안 말했는데, 요…….”
“‘무겁다’를 연상할 수 있는 말 자체를 하지 말라구요.”
안 그래도 장하양은 실시간으로 부끄러움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려는 중이었다.
성필이 건물을 3/4바퀴 돌았을 때, 2층의 사장실 창문으로 한구인이 얼굴을 보였다. 그는 시종일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사장님, 이거 보셔야…….”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모두의 응원과 부끄러움을 등에 업고, 마침내 성필이 완주했다.
“하양아, 내릴게.”
“……네.”
성필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장하양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러자마자 소녀연맹 멤버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박 이사님 축하드려…… 박 이사님?”
성필은 무릎을 꿇고 바닥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리카가 걱정하여 다가가자, 그는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고는 아무 일 없단 듯 일어났다.
“하양아, 흡, 다친 데는 없, 습, 없지?”
누가 들어도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고르는 목소리였다. 그는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려 노력했다. 힘든 티를 낸다면, 자동적으로 장하양이 무거웠단 소리가 될 테니까.
성필은 그런 티 따위 내고 싶지 않았다.
“박 이사님 죄송해요…….”
처음 성필이 음방 1위 공약에 대해 말했을 때, 장하양은 기뻤다. 그가 과거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단 것이 말이다.
물론 기억해내는 타이밍이 너무 늦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러했다.
먼저 포옹했다. 그때만 해도 좋았다.
‘하양아 수고했어. 음방 1위, 진짜 대견하다.’
장하양은 이미 과거의 노력을 보상받았었다. 음방 1위를 한 뒤 그에게 보라색 튤립을 선물 받았던 때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수고했단 말을 들으니, 장하양은 또 울 것만 같았었다.
다음은 목말이었다.
그리고, 장하양은 우울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어떤 풍경일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성필의 어깨에 탄 순간.
‘흐읍!’
성필이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일어났다. 일단 ‘흐읍’이란 기합부터가 충격이었다.
‘아, 나 무겁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순간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 도망가고 싶었었다.
장하양의 수치는 성필이 가로 엔터 건물을 한 바퀴 돌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다 돌고서도 수치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아냐 아냐 뭐가 죄송해. 어때, 재밌었어?”
“무거, 웠죠?”
“뭐가? 아, 너? 무게가 있는 줄도 몰랐네. 깃털인 줄 알았어. 네가 원하면 한두 바퀴 더 돌게. 아니다. 다섯 바퀴?”
성필의 필사적인 옹호에 멤버들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힘들긴 했나 보다.
50kg이 넘는 바벨을 어깨에 메고 수백 걸음을 걷는 것과 같으니, 건장한 사람이라도 힘든 게 당연하다.
차라리 어부바였다면 균형을 맞추기가 쉬워서 덜 지쳤을 텐데.
“괜찮아요, 이제 더 안 해주셔도 돼요. 그게,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약속 늦게 떠올려서 미안해.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자.”
흡, 다시 숨을 굵고 짧게 들이켠 성필은 일이 있다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리카가 장하양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여자는 가볍다는 거 편견이에요. 50kg가 넘는데 가벼울 수가 없잖아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응.”
장하양은 자신의 무릎 위, 허벅지 아래를 만졌다. 목말을 태우면서 성필이 쥐고 있던 부분이다.
‘어때, 재밌었어?’
성필이 그리 물었었다. 장하양은 대답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부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좋았다. 다신 성필에게 부탁할 수 없겠지만…….
“얘들아.”
한때의 이벤트를 마친 멤버들에게로 민경섭과 안이상이 다가왔다.
“이제 행사 가자.”
4월, 축제의 계절이다.
* * *
“억.”
조아라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다이빙했다.
“얍!”
리카도 조아라를 따라서 그녀의 침대로 다이빙했다. 리카와 조아라가 침대에서 마주 보고 누운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진 눈싸움은 리카가 배시시 웃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라쨩 너무 잘생겼어. 아타시(나)랑 사귈래?”
“싫어.”
“충격! 차임 241번째 달성!”
“슬슬 포기해라.”
“1,0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어!”
“너 그 말 100번째 전에도 했어.”
나무는 찍으면 넘어가겠지.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엄연히 감정을 가진 인격체다.
“아라쨩, 언제 내 마음 받아줄 거야? 나 이젠 지칠 거 같아. 슬슬 잡아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가버릴 거야.”
“누구.”
“아름이?”
“제발 가.”
“아앙 너무해!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아라쨩은 라노벨 주인공처럼 무심하기만 하구!”
조아라가 돌아눕자 리카가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았다.
“돌아버리겠네.”
뒤늦게 들어온 신아름이 혀를 찼다. 침대에서 뒤엉킨 둘을 보자마자 절로 욕지거리가 나온다.
“여자끼리 그러고 싶냐.”
“당연히 아타시(나)도 남자를 안고 싶어! 그런데 숙소엔 남자가 없잖아!”
“뭐래……. 그래서 매일 팀장님 뒤에서 안고 그러냐?”
“에에, 아름이 그런 사람이야?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는 그런? 경험이 얄팍하네!”
신아름이 곱게 접은 외투를 리카의 얼굴로 던졌다. 리카는 그러고도 뭐가 좋은지 헤헤 웃었다.
“둘 다 양말이라도 벗고 침대에 올라가. 진짜 더러워 죽겠다.”
정산받으면 독립을 하든가 해야지……. 신아름은 툴툴거리면서 샤워하러 갔다.
“아름이 엄마 같아. 그치 아라쨩?”
조아라는 대답이 없었다.
“아라쨩? 자는 거야?”
이제 보니 미약한 숨소리가 고르게 퍼지고 있었다. 조아라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든 것이다.
확실히 요즘 스케줄은 피곤할 만했다. 거의 매일 행사를 도니 말이다.
무대에선 서너 곡 퍼포먼스를 펼치고 끝이긴 하지만, 차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아라쨩. 옷은 갈아입고 자야지. 아라쨩.”
리카가 흔들어도 조아라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리카는 홀로 끙끙대다가 묘안을 생각해냈다.
조아라가 외출복을 입고 불편하게 자게 둘 수는 없다.
“내가 갈아 입혀줄게!”
리카는 조아라의 양말을 벗기고 외투도 벗기고 바지도 벗기…….
“미친 리카 너 뭐 하는 거야?!”
“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샤워를 끝마친 신아름이 입구에 서 있었다. 경악하여 입도 다물지 못하고 말이다.
“아름아! 마침 잘 왔어! 아타시(나) 좀 도와…….”
“쌔애애애애애애앰!”
신아름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졌다. 잠시 후, 백설하가 무서운 표정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리카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리카야 솔직히 말해! 네, 네 성적 지향성이 어떻든 우리는 존중할 거야!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멤버들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뭐라는 건가요?!”
“저기 봐!”
백설하는 바지가 반쯤 벗겨진 채 잠든 조아라를 가리켰다.
“리카야 제발 솔직하게 말해줘……. 그럼 내가 방법을 생각해줄게……. 너 혼자 따로 숙소를 잡는다든가…….”
“전혀 방법이 아니잖아요?!”
“아, 아니. 계속 여기서 살게 해줄게!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줘!”
“안 속아요! 그리고 그냥 아라쨩 옷 갈아 입혀주려고 했던 거라구요! 저기 아라쨩 옆에 잠옷도 같이 놔뒀잖아요!”
확실히 리카의 말마따나 조아라의 잠옷이 옆에 준비되어 있긴 했다.
백설하가 해명을 요구하는 듯 신아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매모호한 심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죄송해요. 너무 충격받아서.”
“아름이 너무해! 우린 동료잖아! 순수한 마음을 의심하면 안 되잖아!”
“뭐? 의심하면 안 돼? 너 갑자기 사무실 문 열었는데 팀장님이 잠든 한 이사님 바지 벗기고 있으면 무슨 생각 들 거 같냐?”
“도, 어, 도, 동료…….”
“동료, 뭐?”
“……고멘(미안).”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리카는 조아라의 옷을 마저 갈아 입혀주고, 샤워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옷장을 뒤졌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서 입어 보았다.
전부 어바이비의 것이었다.
“넌 지치지도 않아?”
신아름은 화장대 앞에 앉아 팩을 바르면서 거울로 비치는 리카의 모습을 살폈다.
“아직도 옷 입어 볼 체력이 있네.”
“헤헤, 예쁘잖아! 아름아 이 옷은 어때?”
리카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곤 여러 번 포즈를 바꾸었다.
순백의 블라우스는 팔 부분에 넓은 주름이 져 있어, 리카가 움직일 때마다 새의 날개처럼 흔들렸다.
“바지는 뭐 입게?”
“고민 중이야!”
“…….”
신아름은 팩을 바르다 말고 일어나 블라우스에 어울리는 바지를 골라주었다. 역시나 어바이비의 것이었다.
“와이드 팬츠. 베이지색. 입어봐.”
“이 기다란 끈은 뭐야?”
“허리끈.”
“가라테 끈 같아!”
“패션이야.”
옷을 입은 리카는 연신 감탄했다.
“OL 같아!”
“OL?”
“여자 회사원! 오오, 멋져!”
리카는 전신 거울 앞에서 빙글 돌았다. 그것을 본 신아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리카 너 등!”
“등? 아, 이거?”
리카가 입은 건 블라우스다. 그런데, 등이 파여 있다. 파인 등의 옆으로 넓은 끈이 힘없이 내려와 있었다.
“어, 그렇네? 어쩐지 등이 시원하더라!”
“그걸, 입으려고?”
“이상해?”
“이상…… 하진 않지.”
소녀연맹이 입던 무대 의상들에 비하면야, 등이 파인 옷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일상에서 저런 옷을 입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쉽게 말해서, 과감한 옷이다.
신아름은 리카의 뒤로 가서 블라우스 등을 타고 내려온 끈 두 개를 바라보았다.
“……아, 이거 리본이구나.”
신아름은 리본을 매주었다. 리카의 파인 등을 가로로 잇는 예쁜 리본이 생겨났다.
진심으로 신아름은 감탄했다. 세상 어떤 사람이 이런 디자인을 한 것일까?
리카의 훤히 드러난 하얀 등. 그 중앙을 장식한 리본은 여백에 찍힌 먹처럼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왜 리본을…….
“아!”
“아름이 왜?”
“브라끈 가려주는 거구나!”
“앗! 맞아!”
이럴 수가. 귀찮게 누브라를 사지 않아도 등을 드러내는 코디를 할 수 있다니.
‘이 옷 디자인한 사람은 천재인가?’
만약 어바이비의 창업자인 히다카 후쿠요가 신아름의 생각을 들었다면 쑥스럽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음, 뭐, 그럭저럭…….”
신아름은 스타일리스트라도 된 듯, 리카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패션을 평가했다.
“힐까지 신으면 완벽하겠네. 괜찮다. 사진이라도 찍자. 이대로 벗기 아깝네.”
“다메(안 돼)!”
“왜?”
“사진으로 미리 이 모습을 알리고 싶지 않아! 중요한 날에 입을 거야!”
“언제?”
“……그을쎄?”
“뭐야. 너 이거 입고 어디 가려는 거지? 이미 정해진 거지?”
“지가우(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조아라랑 데이트하려고?”
“잠 좀 자자아…….”
둘이 티격대자 조아라가 침음을 흘렸다.
신아름은 침대에 누운 조아라를 향해 중지를 들곤, 다시 팩을 바르기 위해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리카는 여전히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세이슌다나(청춘이네).’
그야말로 청춘을 상징하는 듯한 차림이다.
‘이 옷이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안심이야!’
리카는 다짐했다.
앞으로 평생 어바이비를 애용하기로.
* * *
5월 초.
과거 성필의 약속이 지켜져야 할 때가 왔다. 리카와 함께 대학 축제에 가기로 한 것이다.
리카는 약속 전날, 잠드는 게 힘들 만큼 기대감에 풍덩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 중학교에서 사귀었던 일본 친구들과의 메시지를 더듬었다.
안타깝게도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었다. 대학생인 친구들과 아이돌인 리카의 사이엔 너무나도 깊은 구덩이가 있었으니까.
다음으로, 리카는 친구들의 SNS를 탐방했다.
‘카페에서 공부……. 동아리 단합회……. 학과 행사……. 학교 잔디밭에서 피크닉…….’
그리고 학교 축제.
리카가 보고 있는 건 미대에 진학한 친구의 SNS였다.
친구는 조각과로, 축제 때 동기들과 힘을 합쳐 일본 화가 호쿠사이의 ‘카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3차원으로 재현해놓았다.
사진 속의 친구는 동기들과 함께 조각을 배경으로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재밌겠다.’
가지 못한 길을 향한, 겪은 적이 없는데도 가슴을 채우는 그리움. 그녀의 기억 속에 없는 향수였다.
대부분의 아이돌이 그러하겠지만, 리카 또한 학창 시절의 추억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리카가 서 있는 무대를 우러러보지만, 리카는 역으로 무대 아래의 일상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행복해.’
멤버들이 있고, 회사 사람들이 있다. 그야 고향이 그립긴 하지만, 리카는 과거로 돌아가도 다시 아이돌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사람들의 일상을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 일본의 친구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길 택했던 자신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길 바란다.
그래서.
‘내일 축제, 기대된다.’
리카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침실로 향했다. 그 순간 톡이 울렸다.
[성필: 리카 미안한데 내일 일이 생겨서 못 갈 거 같아.]
“손나(그런)!”
리카는 즉시 베란다로 나가서 성필에게 통화를 걸었다.
“갑자기 이렇게 취소하시면 어떡하나요!”
[미안, 진짜 갑자기 생긴 일이야. 일본에 너희 쇼케이스 있잖아. 그거 기획이랑 설비, 연출을 직접 눈으로 보고 점검해야 해.]
“그, 그걸 이사님이 직접, 해야 하나요!”
[응, 그게, 우리 회사는 아직 공연 전담팀도 없고. 내가 너희 프로듀서고 그러니까. 내가 직접 보긴…… 해야지…….]
리카는 배신감과 실망감에 치를 떨 지경이었지만, 성필의 목소리에 담긴 미안함에 뭐라고 더 말할 수도 없었다.
“……언제.”
[응?]
“일본에서 언제, 돌아오시나요?”
[저녁에. 아마 7시 8시쯤?]
“기다릴게요!”
[어? 아냐. 애들이나 다른 회사 직원들한테 부탁해 봐.]
소녀연맹도 2주 뒤면 일본으로 향한다. 내일은 그녀들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휴일이다.
그런 날을, 성필을 기다린단 이유로 허비해선 안 된다.
“축제는 밤에도 하잖아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리카, 그건 정말…….]
“기다린다고 했어요!”
[……그래.]
그제야 리카의 어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김포로 오시나요!”
[그렇지.]
“공항 근처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바로 저 태우고 축제로 가는 거예요!”
[알겠어.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 순간, 리카의 뇌리에 끔찍한 생각이 지나갔다. 혹시 자신이 성필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 이사님, 일하고 오시는 거면 피곤하지 않나요?”
[나야 리카랑 노는 거면 언제든지 좋지. 집에 가봤자 아이튜브 보다가 잠만 잘 텐데.]
오케이, 그럼 다 끝났다.
“내일 신나게 노는 거예요!”
[그래.]
“실버타운!”
[메이트.]
“왜 힘이 없나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빨리 주무세요!”
* * *
리카는 신아름의 도움을 받아 코디했던 옷을 그대로 재현했다.
등이 파인 블라우스와 와이드 팬츠, 그리고 힐. 거기에 정체를 숨길 선글라스와 모자까지 완비했다.
“칸페키(완벽)!”
3시에서 4시 사이, 리카는 가방에 노트북을 담고 숙소를 나섰다. 카페에서 성필을 기다리면서 여유롭고 우아하게 작곡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밤 10시.
“손님, 폐점 시간입니다.”
“…….”
리카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유리 벽 너머로 비치는 밤하늘을 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성필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