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이젠 그만하겠어. 가기 싫은 길로 걸어가는 건. 난 골랐어. 미래에 후회하는 건 close up. 보답이 없어도 이 길로 가겠어. 너와 함께면 두렵지 않으니까.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아. 내가 네 귓가로 다가갈 땐.”
‘팅글’ 후반부의 장하양 솔로 랩 파트. 그녀는 마이크를 들고 랩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선, 마치 세상의 축복을 받듯 빙글 돈다.
바닥에 발끝을 박고 피겨 스케이팅 선수처럼. 그러다가 턱, 1.5바퀴째에서 움직임이 멈춘다.
장하양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면서 원망스레 바닥을 바라보았다.
“……다가갈 땐.”
장하양이 끝마치지 못한 구절을 애절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마지막 동작으로, 하늘을 향해 주먹을 힘껏 들었다.
사실상 ‘팅글’의 하이라이트이기에, 그녀가 무대에서 제대로 이 동작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모든 걸 망치는 게 된다.
“……아무것도 막는 게 없을 테니까.”
“하양아.”
성필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가 어깨를 강하게 주물러주었다.
“너무 실망하는 거 아니야? 보는 내가 다 가슴이 아프다. 갑자기 바뀐 안무잖아. 그리고 이거 바닥이 뻑뻑해서 그래.”
아직 데뷔까지 4개월도 더 남았다. 그런데도 장하양은 퍼포먼스를 완성하지 못했단 것에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았다.
“간단한 동작이잖아요.”
장하양은 간단한 동작이라고 했지만, 퍼포먼스를 펼치다가 1초 이내에 두 바퀴를 도는 게 간단할 리 없다.
균형과 위치를 잡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하지만 그건 여러 번의 연습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마쳐야 다른 연습에도 들어갈 수 있어요.”
다른 멤버들은 ‘팅글’과 ‘롱 포’ 그룹 연습을 마치면, 각자 콘서트 세트리스트에 따라 유닛이나 솔로 연습을 한다.
하지만 장하양은 개인 연습 시간에도 팅글을 붙들고 있다.
‘그야 걱정이 되겠지.’
원래도 ‘팅글’의 후반부 솔로 랩 파트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을 단독 퍼포먼스로 펼칠 필요는 없었기에, 장하양의 부담감은 덜한 편이었다.
게다가 장하양은 랩을 배워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과거와 비교해 훨씬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녹음했던 ‘팅글’과 비슷한 수준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롭게 얻어낸 단독 퍼포먼스 기회,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장하양은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하양이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일본어로 바뀌겠죠? 제 랩도.”
“응, 그렇지.”
보컬의 5대 요소 중 하나가 발음이다. 보컬에서도 발음은 중요하지만, 랩에서는 더하다.
알아들을 수 있느냐 아니냐가 래퍼의 실력을 가르는 기준일만큼이나, 발음은 랩에서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발음해야 하는 게 외국어라면 난이도는 더 올라간다.
“제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돼요.”
“오늘따라 하양이가 어리광이 심하네. 옛날엔 무조건 ‘할 수 있어요’라고 했으면서.”
“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아니! 뭐라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어…….”
성필은 연습실 바닥에 앉아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장하양이 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평소랑 다른 거 같아서.”
“곧 일본 데뷔잖아요.”
그제야 성필은 장하양이 왜 의기소침해졌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데뷔’란 것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로 데뷔하기 전, 얼마나 큰 갈등이 있었던가. 몇 개월을 갈아 넣었음에도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보고, 그녀는 얼마나 크게 절망했었을까.
비록 지금은 실력이 훨씬 나아졌지만, 그때의 악몽이 재현될까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미니 앨범이랑 정규 앨범 때보다 더 무서워요.”
“무서워?”
“네. 그땐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이 있단 걸 알았으니까, 조금은 안심했던 거 같아요.”
아이돌은 팬을 위해 열심히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
비록 자기 자신의 기준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팬들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죽을 만큼 떨리는 무대 위에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에 가는 건, 말 그대로 데뷔니까요.”
컴백보다 부담감이 더 크다, 그런 뜻일까.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건 언제나 두려움이 따른다.
심지어 소녀연맹은 다른 케이팝 아이돌과는 달리, 일본 쪽에서 큰 반향이 있어서 진출하는 게 아니다.
아예 ‘일본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지니고 인지도를 쌓기 위해 진출하는 것이다.
“하양아, 일본에도 인민이들이 있어. 앨범을 만 장을 팔든, 아니면 천 장밖에 못 팔든, 인민이들은 너희를 기다리고 또 좋아해 줄 거야.”
“아하하…….”
“그리고 누가 하양이를 싫어하겠어? 진짜, 하양이가 잡지나 텔레비전에 얼굴 한 번 비춰봐. 바로 입덕하지.”
장하양은 불안함이 조금은 가신 듯 아까보다 자연스레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 빛나는 미소만큼 자연스럽게 성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성필은 황급히 상체를 뒤로 뺐다. 장하양의 손이 향하는 게 자신의 얼굴 쪽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
장하양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약간 기울이면서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왜 도망가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성필 자신이 잘못했다고 착각할 만큼 순진무구한 태도였다.
성필이 순순히 원래 자세로 돌아오자, 장하양은 그의 목 주변을 손으로 훑었다. 터틀넥 위를 세심하게.
“목걸이 하셨네요.”
“어, 매일 하고 다녀.”
“음, 그렇구나.”
장하양은 성필의 목 부근을 더듬길 멈추질 않았다. 두꺼운 터틀넥 아래로 목걸이를 찾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양아 플러팅 그만해.”
“가족끼리도 플러팅이란 말을 써요?”
“네, 네가 자꾸 이러면 나를 유혹하는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흐응…….”
“진짜 눈꼴 시려서 못 봐주겠네.”
이제까지 줄곧 성필의 옆에 앉아 있던 조아라가 핀잔을 주었다.
“아예 난 없는 사람 취급해요? 춤 보러 와달라고 해서 왔더니 둘이 뭐 하는데.”
“아하하.”
“그리고 하양 언니가 제일 악질이야. 늙고 병든 아저씨 놀리니까 좋아요?”
“아라야, 나 안 늙었어.”
“또 아저씨도 이러면 안 되죠. 아저씨는 자기 몸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해요.”
“네가 내 부모님이야?”
“하양 언니한테만 물러선…….”
조아라는 조심성을 직접 일깨워줄 생각인지, 거칠게 성필의 목덜미를 쓸었다. 성필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견뎠다.
“와, 어떻게든 하양 언니 플러팅 당하려고 이걸 참아내네.”
“가족끼린 플러팅이란 말 안 써.”
“아저씨, 자꾸 거절 안 하면 아저씨가 나를 유혹하는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조아라는 성필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더욱 민감한 부위로 손을 움직였다.
민감한, 이마로.
과연 성필은 기겁하면서 조아라의 손을 쳐냈다. 그의 눈동자에 새겨진 공포를 읽으면서, 장하양이 의문을 내비쳤다.
“아라야. 옛날부터 궁금했거든. 혹시 박 이사님 머리 소주병으로 때리거나 머리카락에 불 지른 적이라도 있어?”
“뭔 소리예요. 내가 봤을 때 이거 누구한테 당한 거야. 중·고딩 때 일진들이거나 전 여친한테요. 언니 동의?”
“음…… 그럴 수도 있겠다.”
놀라운 통찰력!
“에휴, 진짜 너희들 일본 가면 어쩌려고 그래. 나 괴롭히는 거 이렇게 좋아하면서.”
“주말마다 한국으로 와서 괴롭히고 갈까요?”
“미리 말하는데, 그런 이유론 회사에서 비행깃값 안 줘. 가끔 웨벡스에 일 있을 땐 찾아갈 거야.”
“한국에서 놀고 있지만 마요.”
조아라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섭섭함이 숨겨져 있었다. 미소 짓는 장하양에게도 씁쓸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가운데서 성필만이 평정을 유지했다.
‘나중에 알면 놀라겠지?’
성필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바로, 소녀연맹과 함께 일본으로 가는 것이다.
‘애초에 내가 안 갈 수가 없지.’
가로 엔터는 매니지먼트 팀과 성필을 일본으로 직접 파견할 것이다. 홍규헌은 약 2달, 일본에서의 프로듀싱을 전적으로 성필에게 위임했다.
시간이 있다면 가로 엔터와의 화상 회의로 결정을 내리겠지만, 급박한 상황이라면 성필의 판단이 우선된다.
웨벡스와의 협업을 시작한 첫해이니, 성필이 직접 가서 그들의 스타일을 파악해야만 한다.
물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아름이랑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순 없으니까.’
* * *
케이어스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찾아왔다. 아마 이 순간부터, 케이어스의 멤버들의 멈춘 시계가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SNS에 마음대로 글 올리면 안 된다.”
아침, 케이어스 멤버들이 출근하자마자 매니지먼트 1팀장이 개인 핸드폰을 전달했다.
한 명씩 천천히 그녀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과하리만치 신신당부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민주야, SNS는 개인 일기장이 아니야. 네 고민은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나한테 말해. 아니면 에리카랑 상담하거나.”
“알아요.”
김민주는 데뷔하기 전, SNS 글 하나로 곤란을 겪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질리도록 들었다.
그 때문인지, 회사가 시켜도 SNS에 글을 쓰는 게 두렵기만 했다.
‘신아름 걔는 SNS가 아니라 자기 마이너 갤러리에도 글 썼댔나? 겁이 없나 보네.’
핸드폰을 받고도 무신경한 태도의 김민주를 보고, 1팀장은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으로 직감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란 사실을.
“에리카, 혹시나 인터넷에 익명으로 쓸 때 주의해. 아이피 남으니까, 정 원하면 회사 층 옮기면서 아이피 바꿔가면서 써.”
“제가 무슨 사이트 할 줄 아시구요?”
“2ch나 디씨 같은 거.”
“안 해요.”
에리카도 당연하게 김민주처럼 교육을 받았다. 사이트 로그아웃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본인의 계정으로 게시글을 올렸다가 논란에 휩싸였던 선배들도 있었다.
“소유는…….”
진소유는 핸드폰을 받자마자 셀카 모드를 켜곤 앞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소유 넌 셀카도 자주 찍으면서 SNS에 올릴 사진은 왜 안 보내줘?”
“다 마음에 안 들어요. 사진이 제 외모를 못 받쳐주잖아요.”
“……그렇구나. 빨리 현대 기술이 발전하길 빌게.”
진소유는 가장 걱정이 안 되는 멤버였다. 케이어스 공식 불통왕이라면 별명답게, 그녀는 SNS는 물론이고 아이튜브마저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다.
도저히 현대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생활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진저는…….”
1팀장은 진저의 표정을 보고 흠칫했다. 진저는 어찌나 기대했는지 뺨이 붉게 상기되어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에게 선물을 조르는 딸처럼 말이다.
“진저는…… 내가 걱정 안 해도 되지?”
“당연함미다. 팀과 회사에 폐를 끼칠 마음은 없슴미다.”
진저에게 핸드폰을 넘기면서도 1팀장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핸드폰 받는 걸 좋아하는 걸까?
‘연락처에도 이상한 번호는 없었어. 인터넷 방문 기록도 네이버 연예 뉴스란 빼곤 없었고. 아이튜브는 케이어스나 소녀연맹 관련 콘텐츠밖엔…….’
뭐, 기우겠지.
핸드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단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일 테니까.
1팀장은 핸드폰 수여식을 마치자 손뼉을 한번 강하게 쳤다. 짝, 멤버들의 이목이 모였다.
“케이어스, KS 엔터의 얼굴! 다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과 지적 능력의 보유자란 걸 안다. 너희는 불행한 일을 당한 선배들처럼 안 되길 바란다. 그리고 회식 있을 때마다 핸드폰에 자기 이름만 반복해서 검색하는 선배들처럼 되지도 말고. 웬만해선 디지털 웰빙러로 살아. 알겠지만, 우리는 너희를…….”
“알아요, 믿고 계신 거. 배신 안 할게요.”
에리카의 리더다운 대답에 1팀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렇다. 케이어스는 KS 엔터의 연습생 풀 가운데서도 걸러내고 걸러낸 보석들. 심지어 정호환에게서 직접 인성 검사도 받았…….
‘……을 텐데.’
아직도 셀카로 자신의 얼굴만 보는 진소유 때문에, 기껏 안심시켰던 1팀장의 마음이 다시 심란해졌다.
“에리카, 잘 부탁할게. 혹시 멤버들 중에 안 좋은 일 당하고 술 마신 애 있으면 손목을 분질러서라도 핸드폰을 뺏어.”
“팀장님 저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김민주의 힐난에도 1팀장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에리카, 믿는다!”
“믿어주세요.”
에리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가라테 3단이에요.”
“그 정도면 나한테도 이기겠네.”
“장난이에요. 3단은 사범급만 될 수 있는걸요. 사실 6급밖에 안 돼요.”
그래도 1팀장은 에리카와 싸워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1팀장은 에리카의 인적 사항을 본 바로, 그녀가 여자 가라테 중등부에서 입상하고 승급 심사를 보아 8급에서 바로 6급으로 뛰었단 사실을 안다.
그리고 돌연 재미없단 이유로 그만두었다던가.
“그래, 난 이만 가볼게. 오늘도 다들 트레이닝 열심히 해라.”
1팀장이 나가자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진소유는 여느 때처럼 구석으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가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점이었다.
“에리카.”
“민주야 왜?”
“너 진짜 가라테 했어?”
“응, 초등학생이랑 중학생 때.”
“한번 붙어볼래?”
“에에, 운동선수였던 사람이랑 싸우라구? 싫어. 그리고 다치면 어떡해.”
“아깝다. 너 바로 활동 종료시키고 싶었는데.”
“다친단 건 내가 아니라 넌데.”
김민주와 에리카는 평소처럼 투닥거리면서 각자 할당받은 트레이닝을 소화하러 갔다.
핸드폰을 받았음에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일상 속.
진저만이 필요 이상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는 구석에 앉은 진소유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표현이 딱 알맞았다.
“하아, 하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온 그녀는 커버 위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연락처를 뒤져 하나의 번호를 찾아냈다.
[박성필 이사님.]
옛날에 그와 약속했었다. 핸드폰을 받으면 가장 먼저 연락하겠노라고.
진저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가로 엔터의 채용 공고를 아이튜브 채널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자. 한구인의 이 기발한 생각은 결국 현실로까지 옮겨왔다.
그에 따라 양상헌과 성필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으는 중이었다.
“엔터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모은다, 그런 목적으로는 적합합니다. 입소문도 날 테고요. 하지만 소녀연맹만 나와선 안 됩니다. 홍보팀 회의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알리는 것’ 그 자체입니다.”
양상헌의 지적은 타당했다.
물론 이건 소녀연맹의 자체 예능인 동시에 가로 엔터 채용 홍보이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영상을 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엔터 업계를 빛내는 게스트들이 필요할 것이다. 게스트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부류인 아이돌들이.
“웨이퍼센트 멤버는 어때요?”
성필의 친구인 유하음이 맡고 있는 보이그룹이었다. 옛날에 성필이 대타로 웨이퍼센트의 1일 매니저를 수행하기도 했었다.
“오, 웨이퍼센트를 부를 수 있으면 정말 좋죠. 초동이 10만 장은 꼬박꼬박 넘어가는 그룹이잖아요.”
웨이퍼센트는 팬덤의 충성도가 남다르다. 가로 엔터도 꼭 그들에게 팬 매니지 전략을 배우고 싶을 정도다.
다만, 앨범을 연달아 발매하는데도 판매량이 크게 오르지 않는 것이 씁쓸한 점이긴 하다. 부동층 팬덤이 눈물겨운 판매량 방어를 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제 친구가 웨이퍼센트 맡고 있거든요. 한 번 연락해볼게요. 웬만해선 돼요.”
“알겠습니다. 아름 씨가 포유의 효민 씨랑 인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도 혹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름이 얘기를 들어봐야 알 거 같은데. 한 번 얘기해볼게요.”
양상헌은 메모장에 적힌 웨이퍼센트에는 동그라미를, 포유의 우효민에게는 세모를 쳤다.
“최종적으로는 네 명. 남자 둘, 여자 둘씩 나오면 괜찮겠네요.”
그러곤 갑자기 양상헌이 입을 꾹 닫았다.
“상헌 씨?”
“……이사님, 이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부탁이란 건 아는데요. 케이어스도 섭외가 혹시…… 가능하실까요?”
양상헌은 가로 엔터에 입사하고 나서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어왔다. 바로, 케이어스의 진저가 성필을 위해 가로 엔터로 찾아와 굿즈 세트를 전달했던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규 앨범 컴백 때는 에리카에게 굿즈 선물을 한 바구니 받아 오기까지 했었다.
이 정도면 섭외가 가능한 게 아닐까?
“그거느은…… KS 엔터 쪽으로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케이어스랑 면식이 있는 건 맞는데, 아직 줄이 명확하지 않거든요.”
KS 엔터 콘텐츠 기획팀, 혹은 케이어스의 매니지먼트 팀으로 연락해야 할 것이다.
성필은 리카처럼 정호환에게 다이렉트로 섭외 전화를 돌릴 만큼 간이 크지 않다.
“알겠습니다.”
양상헌은 메모장에 케이어스를 쓰고 체크 표시를 했다.
오늘 회의가 끝나면 그 나름대로 섭외 목록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채우지 못한 인원을 충당하려 여러 기획사에 연락을 돌리겠지.
성필은 웬만해선 자신의 선에서 일을 끝내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사의 명함 빨이 더 잘 먹힐 테니까.
“효민 씨랑 케이어스에서 한 명. 그리고 웨이퍼센트 멤버 하나로 하면…… 남자가 한 명이 비네요.”
“음…….”
그 순간 성필의 머리가 번뜩했다. 그는 즉시 조아라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실로 오라고 했다.
“아저씨 왜요?”
그녀는 방금까지 춤을 추고 있던 듯 머리칼이 땀에 젖어 있었다.
“미안, 연습하는데 불러서.”
“놀고 있었어요.”
조아라의 ‘놀다’는, 정해진 춤 연습 시간을 끝내고 자기고 추고 싶은 춤을 춘단 뜻이었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뭐, 아저씨나 상헌 오빠 옆에 앉아야 돼요? 나 지금 땀 냄새 나는데.”
“나는 꼬박꼬박 아저씨라고 하면서 다른 남직원들한텐 오빠 붙이는 거 열받네.”
“아저씨가 제일 나이 많잖아요.”
성필이 양상헌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그가 자진해서 고백했다.
“차이 안 납니다.”
“……생일은요?”
“그래 내가 생일 더 빠르다. 그렇게 계속 아저씨라고 불러봐.”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그래서 아저씨 나 왜 불렀어요?”
이게 분노라는 감정일까?
성필이 머리 아파…….
“아라 너 시에이스 규영 씨 번호 알아?”
“……내가 규영 선배 번호를 어떻게 알아요?”
“잘 피하네.”
“아직도 그걸 의심하고 있어요?!”
‘롱 포’ 활동 기간 때의 일이니, 이제 10개월도 더 전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솔직히 함정수사 기분 나쁘거든요. 이렇게도 춤을 향한 내 열정을 몰라주나. 춤이 사람이면 벌써 난 결혼까지 했을…….”
“진저 씨랑은 연락할 수 있지?”
“……사람 말 열받게 잘 끊네요. 뭐, 진저 번호는 아저씨도 있잖아요.”
“그래도 네가 더 친하잖아. 친구고.”
친구.
그 단어에 조아라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성필이 무언가 실수라도 했었나 하고 급히 머리를 굴릴 정도로.
“친구…… 네, 뭐, 친구라면 친구죠.”
“너무 싸늘하네. 진저 씨는 너 엄청 좋아하시는데. 네 팬이시라잖아.”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면 나도 무조건 좋아해 줘야 해요?”
“그건…… 아니지.”
아니, 정말 왜 이렇게 까칠하지?
성필은 조아라의 감성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조아라가 진저에게 가지고 있는 질투를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거 예능에 필요해서 그래.”
조아라는 가로 엔터 채용 공고 영상의 기획을 읽었다. 그러더니 낮게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근데, 아저씨가 먼저 걸어줘요. 그러고도 안 받거나 거절당하면 제가 해볼게요.”
“내가? 따로 연락할 사이는 아닌…….”
“아니긴. 진저 최애라면서요. 진저도 아저씨 좋아하는 거 같은데 잘해봐요.”
“아라야 그거 진짜 억지 프레임이야.”
“억지 프레임? 아직도 진저가 준 굿즈 집 안에서 먼지 안 맞게 관리하는 사람이요?”
“됐다, 내가 먼저 걸게. 어차피 진저 매니저님이 받으실…….”
귀신처럼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비즈니스 전화인 줄 알았는데, 액정에 떠오른 건 ‘진저’라는 이름이었다.
조아라는 물론이고 양상헌마저 경악하여 성필에게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했다.
“…….”
“……지, 진저 매니저님이신가 봐. 케이어스는 매니저가 개인 핸드폰도 관리하잖아. 무슨 일일까. 또 아름이 때처럼 아이튜브 예능 촬영 제의인가? 잘됐다. 기브 앤 테이크 하면 되겠어.”
“스피커 폰으로 해요.”
성필은 조아라의 명령에 따라 스피커 모드를 켠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 이사님? 점미다, 진저임미다.]
성필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려왔다. 설마 설마 그녀가 먼저 통화를 걸어올 줄이야.
“네, 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슴미까.]
“네에……. 먼저 연락하신 적은 처음 아닌가요?”
[그렇슴미다.]
“아, 혹시 케이어스에서 하는 웹예능 같은 거 출연 제의예요? 그런 거면 옆에…….”
[약속했잖슴미까. 핸드폰 받으면 박 이사님한테 먼저 연락드리기로 말임미다. 오늘 핸드폰 받았슴미다. 크, 크게 용무가 있는 건 아니고, 안부 전화한 검미다. 일하는 중이시면 끊어도 됨미다.]
양상헌이 경악에 경악을 더하여, 성필이 괴물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았다.
성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조아라에게로 천천히 눈동자를 돌렸다. 맹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원시인의 심정으로.
눈이 맞자, 조아라는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해보라’는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