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보자마자 ‘악마’란 단어가 절로 나오는 구성이었다. 초회 한정판이 3개나 되고, 일반판도 재킷만 바꿔서 총 10종이라니?
‘이게 일본……?’
성필은 일본에서 걸그룹이 초동 판매량 100만 장을 달성했단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일본을 선망하곤 했다.
저 나라에선 걸그룹이 참 인기가 많구나, 하고.
‘그런데 그 업적을 전부 이런 식으로 달성해온 거냐!’
한국에서 이런 짓거리를 한다면 팬덤 장사 오지게 해먹는다면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니, 확정으로 구성품을 주면 말이라도 않지. 한정 포스터 응모권은 성필도 처음 들어보는 신비로운 판매 방식이었다.
“초회 한정판은 3만 원 이상이고.”
심지어 일반 사양 앨범이 그렇다.
일반 사양이란 사람들이 앨범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형태를 말한다. 투명한 케이스에 재킷 이미지만 간단히 든 그것 말이다.
“일반판은 1,300엔? 이거 우리 애들 데뷔 앨범보다 비싸네.”
성필이 얼떨떨한 것에 비해 손혜빈은 평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누나는 일본에서 활동했었지. 이거 맞아? 일반 사양 앨범을 1,300엔에 팔아도 돼? 구성품도 아무것도 없는데?”
“일본에선 돼. 우리나라는 앨범이 소장 가치를 가지도록 구성품을 많이 넣는 쪽으로 발전했잖아. 그런데 일본은 음악의 가치를 쳐줘.”
한국은 앨범이 몰락하고 디지털 음원 시장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물론 불법 음원 다운로드를 위시하여 발전한 거긴 하였으나, 최근엔 저작권 인식이 강화되어 음원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거긴 음원도 2,500원씩 받고 파니까.”
“비싸네요…….”
“유이 씨, 비싼 게 아니에요.”
“네?”
“우리 애들 노래가 몇백 원 가치밖에 없어요? 스트리밍 한 번에 1원도 안 되고?”
“죄, 죄송합니다…….”
손혜빈은 앨범과 음원 시장의 격변기를 직접 경험한 인물이다. 그녀는 처음 음원 수익 비율을 보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었다.
유통사가 절반 이상을 떼먹고 그것을 작곡가, 편곡가, 가수, 제작사들이 야금야금 갈라 먹는 것이다.
심지어 가수인 손혜빈에게 돌아오는 몫이 가장 적어서, 회사를 상대로 죽도록 화내기도 했었다. 혹시 회사가 자신을 속이는가 싶어서 말이다.
“이건 유통사 횡포라고요! 왜 가수가 제일 적게 받는데!”
“누나, 유이 씨 겁먹었잖아. 그만해. 시장이 그런 걸 우리가 어떡해.”
성필이 간신히 대화의 머리를 앨범으로 돌렸다. 그래, 일본에선 이렇게 팔아도 된단 거지…….
“그럼 이대로 OK해도 되나?”
“웨벡스도 우리 엿 먹이려고 이걸 준 건 아니겠지. 대기업이잖아. 일본 사정에 능통할 텐데, 따르는 게 맞겠지.”
“…….”
성필은 웨벡스에서 보내준 리스트를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한국 패키지에 익숙해져서일까, 이런 상술이 달갑게 다가오지 않는 게 사실이다.
물론 웨벡스도 확신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리라 믿고 있겠지.
‘사업적으로는 웨벡스에 따르는 게 맞을 거야. 우리가 직접 일본 시장을 큰돈 들여 조사하는 게 아니고서야, 그쪽에서 전문적으로 접근해오면 반박할 거리도 없어.’
그래, 사업적으로 그러하다.
그럼 이젠 프로듀싱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유이 씨 생각은 어떠세요?”
성필이 묻자 이유이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침을 꼴깍이는 소리만이 울릴 뿐, 그녀는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유이는 성필의 질문을 듣곤, 스타일리스트일 때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을 느꼈다.
본인이 회사원이 됐단 게 새삼스레 절실히 다가왔다. 그녀는 회사의 임원에게 본인의 의견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저, 제 생각만 말하면요…….”
만약 그녀가 평범하게 입사한 직원이었다면, 방금 말꼬리를 흐리는 것만으로도 이미지에 감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필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패션에 한정해서지만,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닌가.
“투명 케이스로 만드는 일반 사양 앨범 있잖아요. 그건 빼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왜요?”
“그, 손 이사님이 말씀하신 ‘음악의 가치를 쳐준다’는 건 백번 동의해요. 하지만 역시, 저도 케이팝 아이돌만 알아서 그런가 앨범 자체에도 소장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투명 케이스에 재킷만 바꿔서 파는 건 너무 빈약하단 뜻이다.
“그런데…….”
손혜빈은 신입 사원이란 이유로 이유이를 봐줄 생각이 없는지, 그녀의 생각에 곧장 반박을 내놓았다.
“일본 케이팝 팬들 반응을 보잖아요. 그럼 ‘일반 사양이 아니라서 보관하기가 불편하다’는 의견이 꽤 있어요.”
일반 사양 CD를 소장하는 팬들에게, 특이 사양 앨범은 가지런히 정리하기 힘들 것이다. 책장에 차곡차곡 쌓아둔 일반 사양 CD들 가운데서 눈에 확 띌 테니까.
“그런 분들은 일반 사양을 선호할 거고, 판매에도 꽤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요.”
“아뇨, 그게…… 저는 그냥 ‘싸 보여서 싫다’기보다는…… 소녀연맹의 이미지로 생각하면요…….”
이유이의 말투는 압박감 때문인지 살짝 어눌하고 느렸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핵심을 찔렀다.
“데뷔 앨범이잖아요. 소녀연맹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결정하는 첫 장이니까,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일본에서 이렇게 판다니까 이렇게 하자’기보다는, 먼저 어떻게 보일지 생각부터 하는 게…….”
이유이는 버릇처럼 또 침을 삼켰다. 몇 마디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입 안이 다 말라버렸다.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럼 유이 씨가 생각하는 소녀연맹의 이미지는 뭐예요? 아니, 소녀연맹이 일본에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까보다 한층 더 나아간 질문이 나왔다.
이건 소녀연맹의 전체적인 마케팅 전략에 관한 것이다. 감정적으로만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는…….”
그러나 이유이는 미리 답을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조금의 지체도 없이 말했다.
“고급화, 가 좋지 않을까 해요. 그게, 저는 잘 모르지만 일본은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들었어요.”
성필은 이유이의 말에 기운을 실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아이돌이 아티스트로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단계라면, 일본은 아예 아이돌과 아티스트를 분리해버렸다.
아이돌이면 무대에서 실수해도 ‘그럴 수 있지’라며 관대하지만, 아티스트는 실수가 허용받지 못한다. 프로니까.
그 인식을 역으로 틀면, 아이돌은 음악적으로는 프로가 아닌 것이다.
“소녀연맹의 목적은 최종적으로는 아티스트니까, 아예 들어갈 때부터 일본 아이돌과는 다른 이미지를…… 네.”
다른 톤앤매너(Tone&Manner)를 보여야 한다.
아티스트로서의 태도를 말이다.
“그 태도는 음악과 퍼포먼스도 중요하지만, 앨범에서부터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요.”
* * *
“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웨벡스 사무소, 아이돌 관리 2실 실장인 히무라는 지친 낯빛으로 가로 엔터와의 화상 통화를 종료했다.
그 즉시 회의실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거나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실장님. 박 이사님이 점점 일본어가 느시지 않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처음엔 비즈니스 용어를 일일이 통역 받으셨는데.”
소녀연맹 멤버인 리카 때문에 일본어를 배웠다던가. 물론 짧은 학습 기간 치곤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비즈니스 현장에서 통용하긴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실력이 4주간 회의를 거듭하면서 일취월장한 것이다.
“어쨌든, 끝내서 다행입니다.”
“그래요. 다들 고생 많았어요.”
설마 가로 엔터와 앨범 사양과 구성품부터 이토록 갈등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처음 그들이 히무라가 기획한 앨범 구성을 거절했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이건 사업 전략과 관련된 부분인데, 일본 시장에 능통하지도 못하면서 거절해?’
가로 엔터는 음악과 퍼포먼스에만 집중해줄 줄 알았건만. 혹시 웨벡스에게 기선제압을 하려고 일부러 싸움을 거나하고 의심까지 했었다.
하지만 요 4주간, 히무라는 가로 엔터가 진심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타협에 타협을 거듭한, 양쪽의 의견을 절충하여 마침내 낸 결론으로써 말이다.
‘초회 한정판은 A, B 두 버전으로. 특별 DVD가 포함된 스페셜판을 추가. 그리고 이 모든 구성품이 담긴 고가의 마스터 에디션. 가장 바뀐 건 통상판인가.’
멤버들의 이미지에 따라 총 10종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멤버별 5종으로 확 줄였다.
거기에다 일반 사양이 아니라, 가로 엔터에서 디자인할 특별 사양으로 바꾸어버렸다.
심지어 통상판임에도 앨범 재킷에 넣을 게…….
‘멤버 각자의 얼굴이라니.’
얼굴을 그대로 재킷에 인쇄하는 건 솔로 아티스트의 전유물과 같다. 그들의 얼굴 자체가 제품의 신뢰도가 되는 이들 말이다.
아이돌은 보통 멤버 본연의 모습보다는 디자인적 요소로 승부하는 법이다. 하지만 가로 엔터는 그런 일반적인 관례를 거부하고, 아티스트와 같은 재킷 디자인을 제시한 것이다.
“이야,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어떨지 걱정됩니다. 저희가 맡았던 다른 아이돌에 비해 유난 떠는 거 같지 않습니까? 크기가 작아서 자존심을 세우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히무라가 단칼에 그 의견을 거부하자, 그의 비위를 맞추려던 부하 직원이 움츠러들었다.
“우리한테 괜히 간섭하는 게 아닙니다. 가로 엔터는 일본에 진심으로 임하려는 겁니다.”
웨벡스가 맡았던 케이팝 기획사들은 웨벡스의 전략을 전적으로 수용했었다. 웨벡스를 믿기도 했었지만, 돈만 벌어다 준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연출하고픈 이미지가, 갖추고픈 태도가 있는 겁니다.”
일본에서도 케이팝 아이돌은 인지도가 높다. 돔 투어를 도는 아이돌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일본 돔 투어는 톱 아티스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데, 주기적으로 돔 투어가 가능한 케이팝 아이돌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기가 있다. 하지만 비판도 있다.
“적어도, 일본에 돈만 벌러 오는 건 아닙니다.”
케이팝 아이돌들은 마치 관례라도 된 것처럼 일본판 앨범을 발매하고 짧은 활동을 마친 뒤 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것은 마치 수금하러 온 빚쟁이와 같다. 때가 되면 와서 앨범을 팔아버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다.
어떠한 애정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일본 사람들이 케이팝 아이돌을 보고 ‘돈 빨아먹으러 왔다’고 하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마치 할리우드 배우들이 영화를 개봉하면 한국으로 와서 ‘사랑해요 한국’이라고 방송에서 외치거나, 예능에 나와 김치를 먹는 행동과 비슷하다.
케이팝 기획사가 돈이 목적인 걸 비난할 순 없겠지만, 아이돌들의 ‘일본 팬들 사랑해요’란 외침은 듣기에 공허할 뿐이다.
“그런 회사들과 비교하자면, 가로 엔터한테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함께 이상을 지니고 행동하는 동료로서.
히무라는 가로 엔터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 * *
“뭔가 슴슴하구만.”
‘팅글’ 안무 연습을 마친 후, 조아라는 아저씨 같은 말투로 불만을 표출했다.
아직 일본어 레코딩은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팅글의 곡 자체는 같기에 안무를 먼저 받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아라는 최종 컨펌이 난 안무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저씨는 안 그래요?”
“나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아저씨가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생각해요.”
1시간 뒤, 가로 엔터 월말 평가가 시작된다. 홍규헌 포함, 가로 엔터의 이사진과 A&R팀이 모여 완성도를 평가하는 자리인 것이다.
아직 일본 데뷔가 멀었으니, 할 수만 있다면 수십 번도 더 검수를 거쳐야만 한다.
물론 성필은 월말 평가 외에도 주기적으로 연습실에 들어 소녀연맹을 보곤 한다.
“음, 아라 말고 다들 그래?”
멤버 몇몇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아라랑 말 맞추긴 싫은데, 슴슴하단 건 맞는 말 같아요.”
“말 맞추기 싫으면 걍 입 다물어.”
“우리가 해왔던 것들에 비해선 심심한 면이 없잖아 있잖아요.”
“이젠 사람을 걍 무시하네.”
확실히, ‘아니’와 ‘롱 포’, ‘아라베스크’에 비하면 ‘팅글’의 퍼포먼스는 밍숭맹숭한 감이 있다.
애초에 곡 자체가 강렬하지 않으니 안무로 보여줄 수 있는 강렬함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팅글은 강렬한 곡이 아닌데.’
‘팅글’은 가사에도 알 수 있지만, 처음 모험의 길로 나서는 아이돌의 풋풋함과 두려움 가운데 피어오르는 용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아라베스크’ 같은 퍼포먼스를 붙이면 인지부조화가 올 것이다.
“설하는 어때?”
“저는 지금도 좋아요.”
뒤늦게 성필에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백설하는 데뷔곡 투표 때도 ‘팅글’을 찍었었다. 그녀에게는 ‘아니’보다 ‘팅글’이 취향에 더 직격한 것이다.
“숙련도를 높이기보다, 느낌을 살리는 데 집중할 수도 있구요.”
확실히 ‘팅글’에서 더 파고들 건 안무 숙련도가 아니라 풍기는 느낌밖에 없다.
장하양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오죽하면 장하양도 벌써 안무를 완벽히 익혔단 평가를 듣겠는가.
“음, 이상하네. 시안 평가 때는 다들 이게 좋다고 찍었잖아.”
역시 댄서들이 춘 시안과 소녀연맹을 비교하긴 무리가 있는 것인가.
성필은 찝찝함을 지니고 월말 평가를 맞았다. 이번 평가에는 특별 게스트로 엘릭에다가, 비주얼 팀원인 이유이까지 참여했다.
A&R팀 이재호가 참석한 인원들에게 평가지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매의 눈으로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재호 씨, 이번에도 열심히 보셔야 해요.”
“넵! 제 사지를 바쳐서!”
손혜빈이 대견하단 듯 이재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이재호의 집중도가 아까보다 10배는 더 올라간 듯했다.
이젠 다들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에도 익숙해진 터라 별말이 없었다.
“그럼 시작하자.”
홍규헌의 선언과 함께 평가가 시작되었다. 멤버들은 마치 정식 무대에라도 오른 것처럼 사력을 다하여 ‘팅글’을 추었다.
사력을 다했다, 라곤 하지만 그 말에서 풍기는 것만큼의 기세는 없었다.
‘팅글에서 중요한 게 뭘까. 귀여움? 산뜻함? 청량함? 가녀림? 뭘까…….’
메인 프로듀서인 성필마저도 팅글에서 부족한 조각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소녀연맹의 퍼포먼스를 보자면 괜찮은 거 같은데, 어딘가 한 곳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한…….
“음.”
홍규헌이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다른 이들도 평가지를 간단히 채워나가는 게, 이번에도 멤버들이 퍼포먼스를 잘 펼쳤음이 틀림없다.
“……아, 저기.”
그때 성필의 뒤에 있던 이유이가 성필의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리고 그의 귓가로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네, 유이 씨.”
“방금 생각난 건데요, 애들한테 미니 드레스 입혀보면 안 될까요?”
“미니 드레스요?”
“네. 이 춤에 어울릴 거 같아서요. 아니, 그냥 방금 떠오른 거긴 한데…….”
“지금 구할 수 있어요?”
“네. 30분만 있으면요.”
“알겠어요. 김수희 매니저랑 같이 다녀오세요.”
성필은 홍규헌에게 이유이의 아이디어를 전했고, 다들 잠시 더 연습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유이는 30분이 약간 안 되어 다섯 벌의 미니 드레스를 가져왔다. 전부 검은색이거나 흰색이지만, 디자인들이 미묘하게 달랐다.
“얘들아 여기 속바지 챙겨왔으니까 꼭 입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 그, 그렇네, 헤헤.”
이유이는 머쓱하게 의상을 멤버들에게 전달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그녀들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그러자마자 사람들이 탄성을 흘렸다. 주로 남자 쪽의 탄성이 강했다.
“와, 진짜 사람이 달라 보인다. 진작 드레스 입혀볼걸.”
“성필이 너 변태 같아.”
“지금 내 말에 동의 안 한단 거야?!”
“진짜 변태였네.”
그렇게 미니 드레스를 입은 멤버들의 팅글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연습실에 들어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그마한 감탄조차 흘러나오지 못했다.
퍼포먼스가 끝나자 멤버들은 싸늘한 반응에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쭈뼛거릴 정도였다.
“뭐, 별로예요? 반응이 이상하네.”
“볼래?”
조아라는 카메라에 찍힌 팅글 퍼포먼스를 확인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1분 10초 즈음에 이르자 얼굴이 화악 붉어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거 뭐예요?!”
“오.”
“오?!”
뒤에서 영상을 지켜보던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려버렸다. 그리고 영감을 받았는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사장님, 저 ‘팅글’ 전체적인 음정을 낮춰볼게요. 그러고 다시 애들 춰보게 해도 될까요?”
“음정을 낮추면 뭐어, 조금 분위기가 내려가나요?”
“약간 애절한 느낌을 줘 보게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릭이 즉석해서 편곡한 팅글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자, 조아라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포지션을 잡았다.
그렇게 새롭게 거듭한 팅글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는데, 그 결과물을 본 멤버들이 경악했다.
“이게 뭔데요 진짜?!”
팅글에는 관능적이라고 할 만큼 끈적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분위기가 가사와 대비되어 효과가 더욱 컸다.
“아아…… 찾았다. 잃어버린 ‘팅글’의 마지막 조각!”
“아저씨 진짜예요?! 진짜 이 버전으로 가게요? 이, 이거 옷도 이렇게 입고……?”
“와…… 형 진짜 천재예요?”
갑자기 정지음이 엘릭과 뜨겁게 악수했다.
“너도 좋지? 기가 막히지?”
“네! 일렉트로닉 사운드인데 발라드같이 감성적이에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와 진짜…….”
“내가 이 정도 작곡가다.”
성필, 정지음, 엘릭이 칭찬을 이어가자 조아라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팅글’의 안무는 다리의 움직임이 중요시된다. 안무가가 말하기론, 여자는 상체의 움직임이 눈에 덜 띄기 때문에 행위를 부각하고 싶다면 스텝이나 하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군무의 일체성을 살리면서도, 댄스 퍼포머로서의 주체성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스텝과 하체를 이용한 동작을 많이 넣었다던데.
그게 안무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준 것이다.
“유이 언니 이거 맞아요? 우리 드레스 입는 게 진짜 맞냐고요.”
“아라야 대단하다 너…….”
“…….”
이젠 이유이마저 이 파도에 동조하고 있다.
조아라는 어딘가에 있을 원군을 찾기 위해 참석자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한구인이 눈에 띄었다.
그래, 한구인이라면…….
“오.”
안 된다!
벌써 영상을 돌려보면서 감탄하고 있잖은가.
정말 다들 이걸 좋다고 생각하나?
‘그래, 멤버들!’
직접 춤을 추는 멤버들이라면 분명…….
“아라쨩 세쿠시(섹시)!”
“트랙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보컬에 기교를 더 줘도 되겠다.”
“아하하…… 하하……?”
“언니 뭐요. 좋단 거예요 안 좋단 거예요.”
“아니, 모르겠어. 치마는 입은 적이 별로 없어서. 어울…… 리나?”
“어울려요. 저기 팀장님 봐요. 계속 언니 보고 있잖아요. 가서 음흉하게 보지 말라고 말해줘요.”
“아하하.”
“…….”
조아라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훑었다. 현재 이 공간에서 맨정신은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 그런 사명감을 가득 담아 의지의 불꽃을 지폈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이거, 대놓고 드러내진 않아도 섹시함을 부각하는 거잖아요. 가사랑도 전혀 매치가 안 되고. 이게 진짜 우리한테 맞다고 생각해요?”
다음 날.
백설하가 ‘팅글’에 발라드적 기교를 더한 보컬로 가이드 녹음을 진행했다. 당연히 엘릭도 팅글을 더욱 정교하게 편곡했다.
그 결과물을 듣고서, 조아라도 이마를 탁 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미친 게 아니었구나!”
내가 미쳤던 거였어!
그렇다면 휩쓸릴 수밖에 없다.
아니,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타겠다.
이 거대한 파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