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이유이는 주차장에 들어선, 아버지가 선물해준 벤츠의 최신 모델을 애물단지처럼 바라보았다.
‘아빠도 참.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그녀가 스타일리스트가 된 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스타일리스트 업계에서 나오길 강요했었다.
그냥 강요만 있지는 않았다. 나오기만 한다면 자동차든 뭐든 원하는 건 전부 사주겠다고 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스타일리스트 업계의 고단함을 알고, 딸이 그곳에서 빠져나오길 바랐던 것이다.
“에휴.”
이유이는 아버지가 두고 간 벤츠의 보닛을 퉁퉁 두드린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이 사는 층으로 향했다.
‘이런 여유는 오랜만이네.’
스타일리스트일 때는 매일이 전쟁 같았다. 고객에게 알맞은 의상을 코디하는 것부터, 아티스트를 따라다니는 것까지.
스타일리스트는 직업의 특성상 고객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일도 많지만 기분이 상하는 일도 적지 않다.
스타일링에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본인의 기분을 풀기 위해 꼬투리를 잡아 갈구는 건 끔찍하다.
‘그땐 아빠 말대로, 진짜 뛰쳐나올까도 생각했었는데.’
막상 스타일리스트 일을 그만두고 보니 다 추억이었다. 만약 바로 디자이너 업계로 갔었다면, 이런 밑바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싫어하는 말이지만, 젊었을 적의 고생은 전부 인생의 자양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묘한 쓸쓸함을 지니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맞아주는 이가 있었다.
“콩순아 잘 있었어?”
원형의 로봇청소기가 뽈뽈 거리면서 현관 복도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이유이는 청소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휑한 복도를 걸었다.
‘엄청 넓구나. 휑하고.’
스타일리스트로 일할 때는 이 적막과 공허를 느낄 새도 없었다. 매일 자고 일하러 가고 들어와서 다시 자고 일하러 가고의 반복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없어지니, 자신이 얼마나 적막한 공간에 살아왔는지 새삼스레 느껴진다.
그녀는 혼자 쓰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은 거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이제 디자이너가 돼야지. 꿈이니까.’
남들이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유이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이뤄버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돈에 연연하기보다 자아실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아실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브 생로랑 같은 디자이너가 돼서…….’
그러려면 일단 디자이너로 브랜드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 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인정도 받고, 여러모로 험난한 날일 것이다.
일에서만큼은 집안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언젠가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거나, 이유이 자신만의 브랜드를 론칭할 것이다.
“……시작하자.”
이유이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직접 인테리어한 감성적이고 따스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널찍한 작업용 테이블 위에는 오직 스케치북과 팬, 물감 등 그림에 필요한 것들만이 존재했다.
잘 사용하지 않는 고가의 태블릿과 모니터는 저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다.
이유이는 자리를 잡고 앉아 스케치에 몰두했다. 그녀의 심상 안에 존재하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옷을 그려…….
“어?”
비율이 이상하다.
모델이 9등신이 아니다.
이유이는 실수라 여기고 지우려 했지만, 이내 자신이 왜 그렇게 그렸는지 깨달았다.
‘이거, 아라 몸이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소녀연맹 멤버들을 고려하고 옷을 그리던 것이다.
이건 디자인이라기에도 뭐하다. 옷을 위한 스케치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스케치였으니까.
‘이상적인 체형으로 그려야지.’
하지만 어쩐지, 모델 체형으로 그리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옷에 대한 착상도 소녀연맹을 위한 옷을 그릴 때보다 더뎠다.
‘하아, 너무 익숙해졌나 봐…….’
사람을 먼저 떠올리는 버릇은 좋을 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
이유이는 머리라도 식힐 겸 이탈리아판 ‘보그(Vogue)’를 찾았다. 책장에는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의 보그도 함께 있었다.
또한 몇 년 동안의 보그가 전부 존재했다. 세계의 패션 업계 사람들이 성전(聖典)처럼 읽는 책이니, 디자이너 지망생이라면 교과서 공부하듯 구비해 둬야만 한다.
“…….”
그런데, 옛날에는 황홀한 심정으로 읽었던 보그도 지금의 이유이에겐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유이는 자신이 병이라도 걸렸나 의심해야만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 이사님?’
이유이는 바로 받는 대신, 그가 어째서 전화를 주었을지 예상해보았다.
‘지금 나랑 박 이사님은…….’
업무적으로도 엮이지 않은 완벽한 타인이다. 그런 사람이 전화를 줄 이유라면, 혹시…….
“여…… 보세요?”
[유이 씨, 잘 지내세요?]
성필의 목소리는 이전에 만났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일을 그만두니까 시간도 많아서요, 하하…….”
[다행이네요. 아니, 다행이 아닌가. 죄송해요, 취준생이랑 대화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빨리 바빠지길 바랄게요!]
이유이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유이 씨, 혹시 히다카 후쿠요 아세요?]
“네? 어…….”
안다.
당연히 안다.
일본 패션 산업의 부흥을 이끈 인물 중 하나이니, 모를 수가 없다. 또한 80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알죠. 그분이 왜요?”
[그분이 한국 어바이비 매장 통해서 연락을 해왔는데, 유이 씨를 보고 싶으시대요.]
“……네? 그, 그분이 왜요?”
이유이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하이 패션 시장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서양의 전유물인 명품 브랜드가,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일본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유이의 취업 희망국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히다카 후쿠요의 브랜드 또한 그녀가 바라는 회사 중 하나였다.
어바이비, 그리고 명품 브랜드 ‘후쿠요 히다카’.
[유이 씨가 ‘아라베스크’ 컴백 때 어바이비 옷들 수선해서 무대 의상으로 만드셨잖아요. 그걸 보곤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셨대요. 그, 나이가 있으셔서 직접 한국으로 오시진 못하고. 유이 씨가 일본으로 가시기만 하면요.]
“……어? 어어? 이, 이거 꿈…… 아니죠?”
히다카 후쿠요.
‘알렉산더 맥퀸’, ‘입생로랑’, ‘코코 샤넬’처럼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디자이너가 이유이와 만나고 싶어한다.
[축하드려요 유이 씨.]
진심이 담긴 성필의 축하에 이유이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 맬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취준생 탈출하실 수도 있겠어요.]
* * *
여행 외의 목적으로 일본에 오는 건 처음이다. 여행을 왔을 때도 설렘과 행복이 가득했지만, 동경하던 디자이너와의 만남을 위해 오다니.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 고마워 소련이들아…….’
덕분에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됐다.
이유이는 떨리는 심정으로 어바이비의 본사 앞에 섰다. 색색의 블록을 십수 층 쌓은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건축물.
그곳의 입구에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이유이를 에스코트했다. 목적지는 본사의 최상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히다카 후쿠요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듯,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의 복도가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복도 끝에 난 커다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리가 무섭게도 떨렸단 사실을 고백해야만 하리라.
‘이 문 너머에 히다카 후쿠요가 있어. 나,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세기의 디자이너가…….’
이유이는 손잡이를 쥐고 힘껏 밀었다. 육중한 문이 소음도 없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보인 건, 굽은 등의 노인이었다.
그는 입구를 바라본 채 의자에 앉아 원단을 자르는 중이었다. 가위를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거대한 붉은색 톤의 방을 채웠다.
이윽고, 노인이 가위를 내려두고 이유이를 바라보았다.
“자네인가.”
놀랍게도 노인, 히다카 후쿠요는 한국어를 구사했다.
빼빼 말라 가죽만이 남은 것 같은 얼굴, 그 안쪽에 형형히 빛나는 눈빛.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던 이유이는 일본어로 준비하고 있던 인사도 잊어버리고, 한국어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예, 예, 제가 이유이…….”
“내가 디자인한 옷을 조각내고 덧붙여서 아이돌에게 입힌 사람이.”
“…….”
이유이는 바닥을 살폈다. 다행히,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이제 기절해도 안심이야.’
욕먹고 쓰러질 준비 완료!
‘예상은 했어…….’
히다카 후쿠요 같은 사람이 이유이의 무엇을 보고 본사로 직접 부르겠는가.
어바이비의 옷으로 소녀연맹의 무대 의상을 연출해서? 고작 그것을 보고 이유이를 높게 평가할 리 없잖은가.
그녀가 했던 일은 디자인이 아니며 고작해야 재단사의 수준인 것이다.
‘사과하자.’
사과해서 히다카 후쿠요에게 사죄하자. 그나마 허리를 숙여야 일본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품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다.
“멋지더군.”
천천히 허리를 숙이던 이유이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하니 칭찬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 이거…….”
히다카 후쿠요가 태블릿을 들어 이미지를 하나 보여주었다. ‘아라베스크’ 컴백 무대 당시 조아라가 입은 옷이었다.
“이 세로줄 스웨터.”
가격은 989,000원.
만약 어바이비가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감히 무대 의상으로 고르지도 않았을 고가의 옷이다.
“원래는 꼬리뼈까지 내려오는 길이였지. 그런데 이걸 가슴 아래에서 잘라 크롭으로 연출할 줄은 몰랐네. 보디라인이 드러나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차라리 배와 허리를 드러내는 쪽이 더 매력적이더군.”
후쿠요 히다카가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아라베스크’ 컴백 무대 때 신아름의 의상이었다.
“그리고 이 스윔슈트.”
어바이비, 원피스형 수영복으로 가격은 500,000원. 일반적인 원피스형 수영복과 달리 민소매가 아니라, 소매가 손끝까지 오는 게 특징이었다.
“아예 소매를 잘라냈더군. 그래, 스윔슈트인데 소매가 있는 게 이상하긴 하지. 내가 놀랐던 건 수영복 위에 8부 바지를 입혔던 거였네. 이렇게 보니 전혀 수영복 같지가 않군. 넥라인에 어바이비 로고를 잔뜩 박아둔 게 원인이긴 하겠지만…… 나는 실패한 디자인이라고 봤었거든.”
그 뒤로도 후쿠요 히다카는 이유이가 손을 봤던 옷을 열거하면서, 어떤 점에서 그가 영감을 받았는지를 장장 30분 동안 이야기했다.
이유이는 너무나 기뻐서 열병이 온 것만 같았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자신의 능력을 칭찬해주는 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마치 몸살에 걸린 기분으로 바그너의 음악에 휩싸인 듯 황홀함을 느끼던 도중.
히다카 후쿠요가 태블릿을 끄고 이유이를 응시했다.
“어바이비의 디자인 최종 결심은 내가 맡는다네. 하지만 온전히 내 몫은 아니야. ‘후쿠요 히다카’의 디자이너 팀이 함께 심사하지.”
어바이비는 대중적 상업 브랜드이지만, 그 디자인을 심사하는 건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 팀이다.
“‘후쿠요 히다카’에는 특색별로 나눠 총 다섯 개의 팀이 있네. 자네가 원하는 팀으로 갈 수 있게 해주지. 물론, 자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그로써 이유이의 황홀경은 정점에 달했다.
무려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 팀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온 것이다. 심지어 브랜드의 창시자에게!
이유이는 손끝은 물론 입술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히다카 후쿠요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에 대해 알아봤어. 파리 의상 조합 학교 출신이라지. 나는 파리에 좋은 기억은 없어. 80년대에 내 이름으로 패션쇼를 열었는데, 몇몇 인간들이 날 보고 바나나라고 놀리더군. 아시아인이 디자인한 옷은 입으면 안 된다고도. 그래도, 인재를 길러내는 능력 하나만큼은 알아줘야겠어.”
“인재…… 인가요? 제가?”
“그렇다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우리 팀에서 능력을 증명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자네만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날도 멀진 않겠지.”
함께 해주겠는가?
히다카 후쿠요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는 데까지의 거리는 6m 남짓이었다.
이유이가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기만 한다면, 그녀의 인생은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물들 것이다.
그녀는 한 발자국씩 히다카 후쿠요에게 다가갔다.
‘이렇게나 빨리 디자이너가 되다니…….’
꿈만 같다.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축복만 내려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온전히 하늘의 도움만은 아니리라. 이건 이유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대가이다.
전부…….
‘……박 이사님을 만난 덕분에.’
이유이의 머릿속에 소녀연맹이 아른거렸다. 그렇지만 그녀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녀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히다카 후쿠요 앞에 이르렀다.
“감사, 합니다.”
이유이는 그의 손을 잡았다.
* * *
“일단.”
이사 회의.
홍규헌은 가로 엔터의 사업 전략에 대한 비전과 진지함을 한껏 담아서 선언했다.
“가로 엔터의 비전을 이해하고 발맞춰 걸어갈 수 있는 미래형 인재였으면 좋겠어.”
“오케이. 4년제 이상 졸업 시각디자인 전공 그래픽 프로그램 운용 가능한 사람으로 뽑으면 되죠?”
“……응.”
손혜빈의 간략한 정리에 홍규헌이 시무룩한 티를 냈다.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의 성장과 더불어 회사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는 비주얼팀과 A&R, 그리고 신인개발부에 부여됐다.
“그런데, 스펙 맞춰서 지원하는 사람보다 조금 더…… 이쪽 업계에 포부와 열정과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포부와 열정은 몰라도 ‘관심’은 금방 해결될 거예요.”
비주얼팀 직원이 들어오면, 손혜빈은 그에게 아이돌 세계관 카피, 앨범 아트 카피, 뮤직비디오 컨셉 비주얼 카피, 의상과 스타일링 카피, 무대 연출 카피, 타 회사 브랜딩 카피만 주야장천 시킬 생각이었다.
신입이 소녀연맹과 관련된 일을 맡는 건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 즉, 강철처럼 쉴 새 없이 담금질 된 후일 것이다.
“누나, 이번에 들어오는 직원들한테는 좀 부드럽게 대해줘. 재호 씨한테 했던 것처럼 하면 다 도망가.”
A&R팀의 이재호는 담금질을 너무 심하게 당했는지 사람의 성격 자체가 변해버렸다.
“재호 씨가 어때서? 사람이 밝아져서 보기 좋기만 하구만.”
“…….”
이재호는 소녀연맹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활기차게 ‘호우우우!’란 감탄사를 내지르곤 한다.
손혜빈은 그가 밝아져서 좋다고 하지만, 성필은 내심 과거의 그가 그리워지곤 했다.
아무튼, 성필은 홍규헌이 냈던 장황한 의견에 대한 답을 냈다.
“사장님. 포부와 열정이란 건…… 소녀연맹에 애정을 가지는 사람이란 뜻이죠?”
“그렇지. 되도록 그런 편이 좋을 거니까.”
그건 성필도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팬심만큼 아이돌의 이미지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도구도 없으니까.
“유이 씨가 비주얼팀으로 오셨으면 딱이었을 텐데. 아쉽네요.”
“박 이사가 잘 좀 설득해 보지. 그런 거 박 이사 특기잖아.”
“어바이비 창업자한테 직접 불려간 사람을 제가 어떻게 설득해요…….”
모르긴 몰라도, 가로 엔터보다 훨씬 대우가 좋을 게 틀림없다. 게다가 이유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분야니, 그녀의 만족도도 더욱 높을 것이다.
“왜. 정호환 이사한테 러브콜 받았던 정지음도 꾀어냈으면서.”
“그건…… 저랑 지음이가 쌓은 인연이 워낙 깊었던 덕분이죠.”
“사장님.”
그때 잠자코 있던 한구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 채용 공고를 영상으로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영상?”
“예. 옛날에 티비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제작되었던 예능을 보면, 기획사 자체를 메인으로 두고 찍은 것들이 몇 있었습니다. 가로 엔터도 짧게 그런 형식으로 영상을 찍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상은 예능용으로 코믹하게 만들되, 중간중간 가로 엔터의 비전이나 소녀연맹의 정체성 등을 드러내면 좋을 것이다.
한구인은 그리 주장했다.
“일리가 있네요.”
성필이 동조하자 한구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런데 그런 예능들은 대표나 사장이 인지도가 있어서 제작될 수 있던 거예요. 저희 사장님은…….”
물론 리카의 ‘자정의 인터뷰’ 덕에 인민이들 사이에선 인지도가 있었지만, 영상에 주역으로 등장할 만큼 높은 영향력은 없다.
“그렇습니까…….”
“어, 그럼 이건 어때요? 우리 애들이 면접관으로 나오는 거요. 소녀연맹의 정체성에 맞춰서 면접자들 심사하고, 사장님이랑 내가 면접관으로 꼽사리 끼는 거요.”
“꼽사리…….”
홍규헌은 저렴한 언어 구사에 잠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손혜빈의 생각 자체는 괜찮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럼 면접자들은 진짜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이야?”
“아뇨. 당연히 사람들이 찾아볼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연예인이어야죠. 소녀연맹 채널 구독자 수도 많으니까 나오려는 아이돌이 꽤 있을걸요.”
그 말을 듣자 성필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케이어스가 출연할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녀들이 나오면 조회 수는 보장될 터였다. 또한 엔터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찾아볼 것이고 말이다.
“음…… 박 이사는 어떻게 생각해?”
“일단 홍보팀에서 의견 교환을 하고, 다시 논의하는 쪽이 나을 거 같아요.”
“오케이, 그건 그렇게 하자. 한 이사, 잘 말해줬어.”
한구인이 쑥스러운 듯 슬쩍 미소를 띠었다.
“채용 공고를 신세대 감성에 맞춰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
“박 이사 뭐.”
“아뇨, 사장님이 신세대란 단어를 쓰시는 게 조금 이상해서.”
“나도 곧 30대야. 늙었어.”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는 용기!
하지만 성필은 그게 고까웠다. 아직 30살도 안 됐으면서 늙었다니. 그럼 성필 자신은 할아버지인가?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양해를 구하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유이 씨?’
이걸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업무 전화라면 바로 받는 게 예의겠지만.
‘아마 감사 인사겠지?’
이유이는 소녀연맹의 자체 의상 디자인을 맡은 덕에 어바이비, 혹은 명품 브랜드인 ‘후쿠요 히다카’에 입사할 가능성이 열렸다.
아니, 히다카 후쿠요를 직접 봤을 테니 이미 입사했을 수도 있다.
“받아도 돼.”
사정을 설명하니 홍규헌이 흔쾌히 허락했다.
“네, 유이 씨.”
[박 이사님, 저 지금 가로 엔터 앞인데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금요? 아, 네, 어떤 용무신데요?”
[저, 저, 저번에 주셨던 제안…… 가로 엔터 비주얼 팀으로…….]
잠시만요.
음소거를 해두고도, 성필은 얼떨떨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건 다른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유이가 어바이비 쪽에 안 들어가기로 한 거야?”
“모르겠어요.”
“걔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했…… 아니다. 우리끼리 말해봤자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직접 회사 앞으로 행차할 정도이니 보통 의지로 온 건 아니겠지.
홍규헌은 이유이를 회의실로 부르라고 했다. 잠시 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유이는 움찔거리는 걸음으로 회의실에 다가왔다.
술이라도 마셨나 의심될 만큼 떨리는 모습이었다.
“유이 씨, 전화로 주셨던 말씀은…….”
성필이 그녀에게 질문을 하기도 전.
그녀는 뚜껑을 덮어둔 냄비가 임계점을 넘어 내용물을 뿜어버리듯이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면목 없다는 거 압니다! 그래도, 그래도 다시 기회를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유이는 히다카 후쿠요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햄버거와 피자 중 어떤 것을 먹을까. 이런 경우, 어느 한쪽을 택하고 주문하기 직전에 진정한 자신의 마음에 눈뜨게 되곤 했다.
혹은 파리와 이탈리아 중 어떤 곳에 유학을 갈까. 이유이는 공항에 서고 나서야 이탈리아가 아니라 파리에 가고 싶단 결심을 굳혔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연맹을 맡고 싶습니다! 가로 엔터에 꼭 들어오고 싶어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소련이들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모습을요! 저도 거기에 손을 보태고 싶어요! 꼭, 반드시!”
가장 최근으로 따지자면 1년도 더 전, 스타일리스트로 고된 나날을 보내던 중.
그녀는 성필을 보고서 아이돌의 자체 의상을 디자인하고 싶단 욕망을 깨닫게 됐다.
이유이는 이것이 자신의 결점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욕망을 깨닫는 게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늦다.
하지만 깨닫고 난 후에는 뒤를 신경 쓰지 않는다. 1년 전 성필을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지금도.
“연봉 협상, 필요 없습니다!”
이유이, 필사즉생의 자기 프레젠테이션 시작!
“제 급료는 무려 열정이니까요! 열정과 경험! 그리고 여러분이 인정해주신 디자이너로서의 능력! 하지만 나중엔 제 능력에 맞는 급료로 돌아오리라고 믿습니다!”
“…….”
실수했다!
“아, 아니더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3개월 수습 기간 동안 30만 원만 받고 일해도 괜찮습니다!”
“…….”
“아하하하, 농담 농담! 6개월 뒤!”
“…….”
“오케이, 제 열정의 유통기한은 1년 이상이에요!”
이유이는 자신의 열정이 얼마나 가파르고 거친지 알리기 위해서인지,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백을 붕붕 흔들었다.
그러자 핸드백이 팍 열리면서 안에 들어있던 게 공중으로 비산했다. 곧, 바닥에 여러 가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퍼졌다.
“…….”
이유이가 우물쭈물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웠다. 이사들도 자신의 자리까지 날아온 화장품이나 티슈, 휴대용 충전기 등을 주워서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사들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유이는 창피함에 고개도 못 들 정도가 됐다.
“크흠.”
홍규헌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유이에게 다가가 다정히 손을 잡았다.
“저희 회사에 지원해주셔서 감…… 일단 나중에 이야기해요. 분위기도 이렇고.”
“……네.”
이유이, 가로 엔터 비주얼 팀으로 입사 희망!
* * *
“유이 씨, 후회 안 할 자신 있겠어요?”
간단한 입사 면접이 끝나고, 성필은 이전보다 훨씬 진지한 어투로 이유이에게 물었다.
“소녀연맹이 마음에 들었단 건 이해해요.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걸 보고 싶단 것도요. 그런데 추억에 매몰돼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도 못 할 짓이에요.”
성필의 말에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힘이 있었다.
그도 전생에선 매니저 역할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꿈을 쫓지 못했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국엔 후회 속에서 토사구팽당했었다.
버림당하기 전까지, 성필은 ‘나도 내 꿈이 있지만, 이런 삶도 나쁘지 않아’라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었다.
“혹시 가로 엔터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속한 곳이 없어서 쓸쓸하다거나, 아니면 꿈으로 나아가는 게 불안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마음 바꾸세요.”
“이사님.”
성필의 사려 깊은 걱정과 언뜻 위협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이유이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자신의 순수함을 그대로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저는 ‘후쿠요 히다카’ 입사도 거절하고 온 거예요. IT업계로 따지면 네이버를 걷어차고 온 거라구요. 제가 그냥 불안해서 온 걸로 보이세요?”
성필도 굳혔던 얼굴을 펴고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
“와 진짜네!”
신아름이 다짜고짜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이 언니이이이!”
그리고 이유이를 향해 날아가듯 달려 품에 안겼다.
“아름아!”
“언니 진짜 우리 회사에 와요? 매일 볼 수 있어요?”
“아직은 몰라. 방금 면접 끝났어.”
“팀장님 유이 언니 오는 거 맞죠?”
성필은 픽 웃으면서 이유이를 보았다. 신아름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애정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건지.
“유이 씨, 정말 후회 없죠? 가로 엔터 들어오면 매일 애들이 귀찮게 할지도 몰라요.”
“넵, 제가 어떻게 소련이들 놔두고 가겠어요.”
성필은 그녀와 악수를 청하며, 아까 내뱉지 못한 말로써 이 면접의 끝을 선언했다.
“환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의 손을 잡자마자 이유이는 1년 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1년 전, 앞뒤 가리지 않고 성필에게 번호를 따냈을 때처럼.
그녀의 눈에는 꿈만이 보였다. 비록 그때와는 방향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빛나는 꿈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유이, 가로 엔터 비주얼 팀으로 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