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그래 진짜다.”
성필은 당당해지기로 했다.
딱 처음만.
“그런데 아라야……. 나도 너희가 케이어스 신경 쓰는 거 알아. 그런데 이젠 크게 자격지심이라거나…… 느낄 수준은 아니잖아. 소녀연맹도 케이어스에 뒤지지 않는 그룹이야. 아니, 옛날에도 말했지만 너희가 훨씬 대단해! 당연히 난 너희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성필은 죄라도 지은 듯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러니까 나도 팬사인회에 크게 가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 근데 우연찮게 당첨이 됐어……. 그리고 케이어스 보러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다른 기획사는 팬사인회를 어떻게 연출하는지? 그런 걸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또…… 나도 휴일엔 나 하고 싶은 거 해도 되잖아……. 휴일이잖아…….”
“아니 아저씨.”
옆에서 황당하단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필은 ‘아 말 잘못했나 보네 큰일 났다.’라고 생각하며, 사죄를 구하기 위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랬더니 보인 건, 오히려 미안한 기색을 띠는 조아라였다.
“너무 미안해하는 거 아녜요? 나도 아저씨 쉬는 날인 거 알아요. 쉬는 날에 뭘 하든 아저씨 맘이잖아요.”
“어?”
“걍 놀리려고 한 말인데……. 왤캐 비굴해요? 내가 다 미안하게.”
조아라는 성필의 등을 팍팍 쳤다.
“어깨랑 등 펴요. 장난치러 와서 괜히 기분만 찝찝해졌네.”
“…….”
왜 비굴하냐고?
* * *
[조아라: 나 방금 버스에서 내림 ㅋㅋㅋㅋㅋㅋㅋ]
[조아라: 아 ㅁㅊ 반대편임;;]
[조아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아라: 하 방금 신호 바꼇네]
[조아라: 왤캐 운 없어 나만 ㅠㅜㅜ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아라: (단무지가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
성필은 연속해서 다섯 번이나 울리는 톡 알림음을 듣곤 ‘또 아라네’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톡을 보내는 사람은 조아라밖에 없다.
또한 하루 내내 톡을 하는 사람도 그녀뿐이다.
[성필: 휴일인데 고생 많다 어떡하냐 ㅠㅠ]
“…….”
뭐라고 더 보내야 하나?
조아라와 사귄 이후, 성필에겐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그건 바로 톡을 주고받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톡을 보낼 때마다 적게는 4개에서 10개까지 연속해서 보낸다. 그에 비해 성필은 한두 개가 전부다.
주고받는 언어의 양이 다르다.
‘이러면 좀 미안한데…….’
그래서 성필도 없는 머리를 쥐어짜 내서 톡의 양을 늘리려고 하는데, 그게 굉장히 고통스럽다.
회사에서 기획안을 검토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어째서 조아라는 저렇게나 톡을 한 번에 많이 보내는 걸까.
[성필: 밖에 많이 추워?]
결국 성필은 바깥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 나름 괜찮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날린 뒤 핸드폰을 덮어두었다.
“……성의가 없나?”
아니다. 아니야. 할 말이 없는데 괜히 지어내는 게 더 이상한 거다.
성필은 아직도 젊은 여자친구를 대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분위기에 밀려서 사귀긴 했으나, 톡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기가 빨려서 피로가 더해진다.
그는 찝찝한 기분으로, 아까부터 보고 있던 여자 아이돌의 직캠을 재생했다.
“와, 미쳤다 진짜.”
성필은 모니터에 눈을 들이박을 듯했다.
‘어떻게 춤선이 이러지? 춤을 오래 배운 것도 아닌데. 진짜 몸이 타고났어.’
그는 최근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에게 꽂혔는데, 그 이유는 퍼포먼스의 기세 때문이었다.
이 그룹의 무대를 보면 한 명만 유독 눈에 띄는데, 그녀의 춤이 성필의 마음을 사로잡듯 했다.
성필의 아이돌 감수성이 극대화되고 황홀경에 사로잡히려던 즈음.
[까톡!]
연달아 톡 알림음이 떴다.
성필은 영상을 멈추고 다시 톡을 확인했다.
‘또 의미 없는 얘기들…….’
이런 톡을 주고받는 게 재밌는 건가? 성필은 매일, 매시, 매분 그녀에게 보낼 톡을 고민하느라 탈모까지 올 지경인데.
조아라는 고작 몇 분 만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이도 생겼다.
성필은 기계적으로 마지막 톡을 훑었다.
[조아라: 오빠는 뭐 해?]
그리고 기계적으로 답을 채워 넣었다.
조금의 거짓말과 망설임도 없이.
[성필: 응 ㅎㅎ 여돌 직캠 봐.]
그리고 이틀간, 성필은 조아라와 톡을 하지 못했다.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묘사해야 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 * *
“고맙다 아라야, 그렇게 말해줘서…….”
“뭐요?”
“휴일은 내 맘대로라는 거…….”
“뭔…… 당연한 거잖아요. 내가 뭐라고 아저씨한테 간섭해요. 아님 내가 간섭해줬으면 좋겠어요? 계속 뭐 하는지 물어보고?”
성필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조아라는 낄낄 웃었다.
그녀는 성필과 자신의 관계성을 농담의 요소로 써먹는 것을 좋아한다. ‘날 뭘로 봐요?’, ‘나한테 뭐 느끼나?’ 등등…….
조아라는 성필이 이런 류의 농담을 듣고 당황한다고 생각하지만, 성필은 당황하기보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전생과 현재가 겹쳐져서 말이다.
“근데 아저씨. 우리 곧 일본 데뷔잖아요. 휴가 끝내면 ‘팅글’ 안무도 받고 연습도 하고 뮤비도 찍고, 또 콘서트 준비도 하고?”
“왜, 긴장돼?”
“우리가 하려는 게 현지화 전략이잖아요. 일본에 우리 그룹 색깔을 맞추는 거요.”
“우리 아라 현지화 전략이란 말도 알아?”
“네네, 머리 텅텅 빈 내가 그럴듯한 한자어 쓰니까 많이 놀랐나 보네요.”
“아, 아냐, 그렇게 생각 안 해…….”
조아라는 자타공인 소녀연맹 독서왕이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독서를 싫어한단 것이다.
‘한 이사님처럼 되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고 했지.’
조아라는 한구인처럼 지적 역량을 쌓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매일 붙든다. 그 결과, 소녀연맹 내에서도 박학다식을 자랑할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쫌 걱정되는 게…… 일본 아이돌들 있잖아요? 나도 영상을 몇 개 찾아봤는데요.”
일본 아이돌들의 기괴하고 이상한 춤을 올려둔 영상들이었다.
아이튜브에는 그런 식의 비교 영상이 많다. 당연하게도 비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춤추는 거 아니죠?”
“퍼포먼스는 한국에 맡기지.”
“아, 다행이다.”
애초에 웨벡스는 케이팝 아이돌인 소녀연맹을 마음에 들어 해서 매니지먼트를 맡은 것이다.
그들이 소녀연맹을 일본식으로 프로듀싱하는 건 본말전도일 것이다.
“근데 일본 아이돌들은 왜 그래요? 걔네들도 하려면 잘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 스트릿 댄스 강국이잖아요.”
조아라는 스트릿 댄스에 매진했던 과거, 그리고 현재도 댄스 대회 영상을 자주 찾아보았다.
그래서 일본에서 스트릿 댄스가 성행하며 수준도 높단 사실을 알았다. 대회에서 입상하는 경우도 많고, 해외의 팝스타들이 안무를 맡기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런 나라의 아이돌은 춤이 왜 이상한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 일본은 아이돌의 개념이 우리나라랑 좀 달라. 우리나라에서 아이돌은 ‘음악하는 사람’이지만, 일본은 그렇지가 않거든.”
네트(Net) 아이돌이나 그라비아 아이돌, 아키바 아이돌과 같은 단어가 일본 아이돌의 특성을 대변해준다.
만약 한국의 문화도 일본과 같았다면, 인방(인터넷 방송) 아이돌, 아이튜브 아이돌, SNS 아이돌 같은 단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라비아 아이돌은 뭐예요?”
“조금…… 신체가 드러나는 화보를 찍는 분들?”
“맥심 같은 거요?”
“너 맥심을 알아?!”
“패션 잡지 랭킹에 계속 올라오길래 봤어요.”
아무튼, 일본에서 아이돌이란 개념은 능력보다 외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은 아이돌의 음악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미디어 활동이 중요해. 예능이나 라디오, 잡지, 화보 출연 같은 거. 음악은 아이돌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수단이지 정체성은 아니거든.”
그렇다고 음악이 아예 변방인 건 아니지만, 일본 아이돌은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예능인과 같은 위치에 있다.
이는 한국 아이돌이 음악인으로 분류되는 것과는 큰 차이이다.
“그래서 춤이나 노래도…… 우리나라 연습생들처럼 전문적으로 몇 년 동안 훈련받은 사람이 적어. 왜, 서바이벌 프로에서도 일본인 출연자들이 자기들의 강점은 ‘매력’이라고 했었잖아. 그게 변명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거든.”
두 나라가 생각하는 아이돌의 개념이 다르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한국에서는 노골적으로 일본의 아이돌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우리도 일본에 맞추려면 걔네들처럼 행동해야 해요? 그라비아 찍는다던가?”
“안 찍어! ……나중에 인기 생기면 화보집은 찍을지도 모르겠다.”
“수영복?”
“안 찍는다고! 어? 혹시 찍고 싶어?”
“음…….”
조아라는 자신의 수영복 사진집이 서점마다 들어서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아직 나한텐 허들이 좀 있네요. SNS에 올리는 거면 몰라도요.”
“SNS에 올리는 것도 허들이 높을 텐데.”
“암튼, 우리가 거기서 인기 있을 수 있어요? 일본에서 원하는 아이돌이랑 다르잖아요.”
“너희는 케이팝 아이돌이니까. 원하는 게 일본 아이돌이랑은 또 다른 거지.”
“으음, 그렇구나.”
조아라는 어딘가 후련해진 표정이었다.
“우리가 하던 대로 하면 된단 거죠?”
“그렇지. 우리 아라가 하던 대로, 프로페셔널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면 돼.”
어쩌면 조아라는 일본 데뷔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아이돌에게 바라는 게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아니라면, 조아라가 바라는 아이돌로서의 모습과는 상당히 동떨어지게 될 테니까.
“아 근데 그거 들었어요?”
“뭐?”
“유이 언니 스타일리스트 그만둔대요.”
“……응?”
설마.
김형선 스타일리스트의 갑질과 모진 업계를 버티지 못하고 벗어나려는 건가?!
“어, 어디서 들었어?”
“신아름이 가르쳐 주던데요. 신아름 걔 유이 언니랑 패션 얘기 자주 했거든요. 얼마 전에 들었대요. 아저씨한테는 말 안 해줬나 보네요?”
“그러게…….”
하긴, 요즘 김형선네 스타일리스트 팀과 만날 일이 없기는 했다.
위계적으로 보자면 이유이는 아직 초보 딱지를 겨우 뗀 스타일리스트일 뿐이니, 그녀가 팀을 나간단 사실을 성필에게 알려줄 필요를 못 느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유이 씨랑은 나름 인연이 있는데.’
그녀가 번호를 가르쳐주고 만날 약속을 잡았던 것을, 성필이 데이트 신청이라 착각하고 온갖 치장을 다 했었다.
심지어 현생에선 쓰지 않았던 그루밍(남자 화장) 기술까지 총동원해서 말이다.
‘유이 씨 덕분에 소녀연맹 스타일링도 잘 해결해왔고…….’
여러모로 좋은 파트너였다.
물론 그녀의 꿈이 디자이너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언젠가 스타일리스트 업계를 떠나 디자이너로 넘어갈 것이란 사실도 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떠난다고 하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아마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아저씨 뭔데. 유이 언니 간다니까 슬퍼요?”
“슬프지.”
“역시 데이트 신청인 줄 알고 약속 자리 나갔던 사람답네.”
“됐다. 넌 이해 못 하겠지. 동업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슬픔을…….”
“송별회 한 번 해요.”
“무슨 송별회야. 그냥 따로 만나서 선물이나 드려야겠다.”
“역시 유이 언니한테 마음 있죠?”
“없어! 그냥 떠나보내기엔 아쉬운 인연이잖아.”
“말하는 거 봐……. 진짜 송별회 없어요?”
“……그 정도 관계는 아니지 않나? 우리 회사 차원에서 사람을 모아서 송별한다는 건 좀…… 오버 아닌가?”
“누가 회사 차원으로 한대요. 그냥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가?”
“그래요.”
“그러다가 나 혼자만 가면…….”
“에이 씨, 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요. 최소한 나랑 아저씨는 있으니까 쪽팔리진 않죠?”
* * *
“유이야, 너 진짜 우리 업계를 빛낼 인재야. 진짜 갈 거야?”
이유이는 김형선의 술주정에 하하 웃기만 했다. 김형선은 벌써 1시간째 가지 말라면서 온갖 회유를 하는 중이었다.
아니, 회유가 아니라 어리광이었다.
“팀장님 그만 좀 하세요. 좋게 보내는 자리에서 왜 자꾸 이래.”
“야! 넌 유이랑 함께했던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냐?! 이렇게 잡아줘야 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거라고!”
팀원들의 만류에도 김형선은 이유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유이는 그녀의 술주정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비록 한때는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날을 세웠던 시기가 있었으나, 이젠 가족이나 다름없이 된 것이다.
‘소녀연맹 덕분에.’
소녀연맹을 맡고 나서, 아니.
성필을 만나고 나서 이유이의 스타일리스트 인생이 바뀌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디자인을 할 줄 몰라도 되지만, 디자이너는 스타일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신념으로 스타일리스트가 되었으나, 인생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난의 시간 속에서 고민만 씹던 와중, 이유이는 성필과 만나게 됐다.
‘박 이사님 덕분에 이런 대접도 받고…….’
최근 1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던 건 온전히 성필과 가로 엔터의 덕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비록 떠나가지만, 소녀연맹과 일했던 세월은 언제까지나 이유이의 보물로 가슴 한편을 차지할 것이다.
“아이고 머리야…….”
김형선은 술집을 나오자마자 이유이의 옆에 매달려 숙취를 호소했다.
“유이야, 잘 가. 가서도 잘 살아…….”
“네, 언니두요. 잘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얼……. 옛날에 자꾸 모나게 굴어서 미안…….”
“저 진짜 다 잊었다니까요.”
“고마워……. 너 박 이사님도 한 번 봐야 할 텐데. 그분 덕에 너랑 이렇게 친해질 수도 있었고, 소녀연맹도 띄웠잖아. 다시 생각하니까 우리 유이 아주 용이네 용. 디자인계로 못 보내!”
“하하, 네, 그러게요. 박 이사님도…….”
보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직접 보자고 하는 건 오버 같다. 그리고 이유이가 쌓은 건 그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가로 엔터 전체와의 유대였다.
‘나 같은 말단 스타일리스트가 팀을 나간다고 가로 엔터 분들한테 꼬치꼬치 알릴 수는 없으니까…….’
나중에 소녀연맹과 성필, 손혜빈 정도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면 될 터이다.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기프티콘이라도 같이 보내면 되겠지.
그것으로 가로 엔터와의 관계도 끝나는…….
“가로 엔터 분들 한 번 부를까?”
“네?!”
“어디 보자, 손 이사님 번호가…….”
“아, 안 돼요! 안 그러셔도 돼요!”
“왜?”
“미안하잖아요!”
“아…… 미안? 야, 솔직히 소녀연맹 디자인 의상들 우리 유이가 다 신경 써줬는데! 가로 엔터도 생각이 있으면 만나러 오겠지!”
“그건 일을 받았으니까 한 것뿐이잖아요!”
“아하, 비즈니스였다?”
“네, 네. 거래처에서 사원이 하나 나간다고…… 상대가 따로 모여주진 않잖아요…….”
“유이야.”
“……네.”
“비즈니스 앤드(And)?”
“패, 패밀리.”
“그래. 돈 같이 버는 사람들끼리는 패밀리야.”
김형선이 기어코 전화를 걸었다. 이런 밤중에 전화를 받는 손혜빈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리고 이유이의 소식을 듣더라도 말로만 아쉬움을 표할 뿐이겠지.
‘안 오실 거라니까요…….’
* * *
다음 날.
“유이 씨 흑기사로 제가 나섭니다! 빨리 잔 채워어어어엇!”
민경섭의 근처로 매니저 안이상과 김수희가 다가와 축하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에 당한 것을 갚겠다는 듯, 매니저들은 민경섭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민경섭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주, 막걸리, 맥주를 한가득 채운 대접을 원샷했다.
그는 흑기사라고 했지만, 그냥 자기가 마시고 싶어서 폭탄주를 마신 것뿐이었다.
“으어!”
술 한 대접으로 몽롱해진 눈빛의 민경섭이 이유이를 보곤 허리를 팍 숙였다.
“유이 씨, 정말 감사했습니닷!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아욧!”
“네, 네…….”
“자자, 제 잔도 받으세요! 축하주!”
이유이는 두려워졌다.
먹으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폭탄주를 원샷한 민경섭이 어떤 축하주를 줄지 상당도 안 된다.
“자, 디자이너가 되셔도 잘하실 거예요.”
그런데, 민경섭은 딱 소주 반 잔만 채워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아직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민경섭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유이는 소주를 홀짝이면서 가게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직장인들이 회식하러 자주 올 법한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 그중 하나를 가로 엔터가 하루 대절했다.
오로지 이유이를 위해서!
은색의 고기 굽는 테이블이 가득한 가게 곳곳에는 가로 엔터와 김형선네 스타일리스트 팀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더 가져와! 아니, 다 가져와!”
맥주를 물처럼 들이키는 조아라. 그리고 소녀연맹 멤버들이었다.
놀랍게도 소녀연맹도 이유이의 송별회에 나와준 것이다. 이유이를 보자마자 슬픔에 눈물을 흘렸던 리카를 시작으로, 그녀는 모든 멤버들의 감사 인사를 들었던 참이다.
“적당히 드세요.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안 드셔도 돼요.”
“아, 네.”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성필의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한구인이, 또한 이유이의 옆엔 손혜빈이 있었다.
이사진들이 이유이의 옆에 자리한 것과는 달리, 홍규헌은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붙잡혀서 모진 고초를 당하는 중이었다.
“사장님 애교 보여주세요 애교!”
만취한 백설하가 다음 날 수치심으로 죽고 싶은지 홍규헌을 닦달했다.
“야, 백설하. 적당히 해라.”
“아, 죄송합니다…….”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
“아하하하하하캌카하핳하카핰!”
“이 더하기 이는 귀요미!”
“어허헠! 저, 저 죽어요! 죽을 거 같, 그만, 제발……!”
만취한 홍규헌도 다음 날 수치심으로 죽고 싶은 듯했다. 주변에서 소녀연맹 멤버들이 자꾸만 띄워주니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다섯 명이 번갈아 술을 돌렸으니, 취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유이 씨, 그럼 바로 다른 회사 가는 거예요?”
손혜빈이 이유이의 잔을 채워주면서 물었다.
“아, 아뇨. 취준생 되는 거죠……. 포트폴리오 만들고, 대회 같은 데도 작업물 내보고…… 네.”
“오, 그럼 나중에 잘되면 프리랜서 디자이너로도 활동할 수 있는 거네요? 대회에서 막 엄청 상 타고 그러면요.”
“아뇨, 프리랜서는…… 돈을 별로 못 벌어요. 회사를 차리지 않는 이상은요. 설령 팝스타들 옷 만들어줘도 이름값이 거의 안 생기거든요.”
“네? 진짜요? 왜요?”
“한 사람만을 위한 옷이고, 그 사람이 주가 되는 옷이니까요. 디자이너로서는 큰 경력이 아니죠.”
“아…… 디자이너의 세계도 혹독하네요. 그럼 본인 이름은 어떻게 알려요? 무조건 브랜드 디자이너가 돼야 해요?”
“패션쇼를 열어야죠. 유명 잡지에 디렉팅되거나요.”
이유이는 자신감 없는 손길로 술잔만 훑었다.
“하하…… 그럴 돈은 없지만요…….”
“음, 나중에 패션쇼 여시면 꼭 불러주세요. 보러 갈게요.”
“넵, 감사합니다.”
술자리가 진행되는 와중, 이유이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필과 손혜빈이 굉장히 친하단 것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했다.
어깨를 감싸거나 손을 만지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아, 그렇겠네…….’
같은 직장에 서로가 좋은 상대이니, 연분이 안 생기는 것도 이상하리라.
이유이는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두 분 사이가 되게 좋으시네요.”
“음? 아, 저랑 성필이요?”
손혜빈은 성필을 물끄러미 보더니.
“성필아, 이제 인정해야겠다. 우리 사이에 몇 년 동안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단 거.”
“없었어.”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니까.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우리, 확실히 하자.”
“몇 년 전부터 확실했어.”
“하긴, 너 내가 SMS 엔터로 옮길 때…….”
성필이 소주병을 곤봉처럼 역으로 쥐자 손혜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 항상 궁금했는데,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 이사님은 모르셔도 돼요.”
“……그렇습니까.”
“한 이사님, 그렇게 섭섭하단 눈빛으로 바라봐도 안 넘어가요. 저 말고 혜빈 누나한테 써 봐요.”
“어우, 난 바로 말해주 성필아 병 내려. 그거 무기 아니야.”
두 사람의 대화에 담긴 맥락만으로도 어떤 일이 있었는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 저는 두 분이 사귀는 줄 알았어요.”
“그냥 오래 봐서 많이 친한 거지,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에요.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단 거 전부 거짓말이라니까요.”
“그건 성필이 네가 나랑 둘이서만 술 먹는 걸 병적으로 기피해서 그래. 얘 회사 처음 들어왔을 땐 저랑 술도 자주 마셨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일이 바쁘니까 그렇지! 누나 진짜 나 놀리는 거 좀 그만해…….”
“쏘리.”
처음엔 가로 엔터에서 송별회를 열어준다기에, 이유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괜히 김형선이 던진 말 때문에 가로 엔터에 부담을 준 게 아닌가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직접 와보고선 깨달았다. 가로 엔터가 진심으로 이유이에게 감사하고 있단 것을.
소녀연맹의 자체 의상 디자인은 거의 대부분이 이유이의 손에서 나왔다. 사실상 그녀는 소녀연맹의 의상 비주얼 디렉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내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던 거구나.’
어느 팀을 떠날 때 이만한 대접을 받을 정도라면, 자신도 1년간 꽤 열심히 살아온 게 아닐까.
이유이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슴을 점점 채워 올라오는 용기를 느끼면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와중.
“근데 유이 씨가 떠나시니까 아쉽네요. 혹시 저희 회사에 비주얼 팀으로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이유이의 입술 사이로 소주가 뚝뚝 새어 나왔다. 성필의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그 내용은 걸러 듣기가 힘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제야 이유이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앉은 세 명의 이사들.
왜 하필 이들이 이곳에 앉았는지…….
“하, 하하…… 다큐예요 예능이에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유이가 당황한 웃음을 흘리면서 장난스레 물은 순간.
“다큐요.”
성필이 즉시 답을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