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
뭐지?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케이어스 팬이라고 했…….’
……긴 했는데.
‘그냥 하는 말 아니었어?!’
성필이 케이어스의 팬이란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으레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보통 방송계에서 아이돌을 만나면 ‘와, 팬이에요’라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팬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냥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와, 너 많이 예뻐졌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란 것이다.
‘진짜 팬이시라고? 팬사인회에 올 정도로?!’
성필은 앨범을 수십 장은 샀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팬사인회에 당첨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박 이사…….”
“처음 뵙겠습니다. 하하, 직접 보니까 더 좋네요.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김민주는 그의 의도를 순식간에 알아챘다.
이곳은 팬사인회장이다. 설령 아는 사람이 사인회에 왔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친분을 드러낼 수는 없다.
애초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팬사인회에 올 리도 없지만, 어쨌거나.
팬들은 김민주가 성필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더 친근한 태도를 보이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게 틀림없다.
‘그래서 모른 척을…….’
그렇다면 김민주도 그에 맞춰줘야 할 것이다.
각 멤버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은 1분 내외. 그중 10초가 벌써 지나갔다.
김민주의 뒤에 서 있는 매니저가 한껏 당황하면서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한 번 심호흡하고, 아까 전의 팬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넵! 케이어스의 비타민 과즙미 뿜뿜 민주입니닷! 저도 직접 보게 돼서 너어무 반가워요!”
“반대로 했는데요?”
“……네?”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이잖아요.”
“아…… 하하, 그러네요! 아,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입에 잘 안 익네요.”
“그렇죠. 방송에도 잘 안 나오시니까요. 예능 촬영이 힘든 건 알지만 저는 조금 아쉬워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와는 달리 김민주는 경악하고 있었다.
팬사인회까지 왔으니 보통 팬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성필의 태도는 진실로 케이어스를 사랑하는 팬의 것이었다.
적합하진 않은 비유지만, 김민주는 마치 불륜을 위해 남편을 속이고 약속 장소에 온 사람과 만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녀연맹도 있는데 이런 데 오셔도 괜찮나……?’
역으로 생각해서, 정호환이 소녀연맹의 팬사인회에 갔다면 김민주는 기분이 확실히 나쁠 것이다.
애초에 정호환 정도 나이에 아이돌 팬사인회에 갈 이유가 없긴 하지만…….
“뷔라이브 자주 켜주시면 좋겠어요. 아, 강요하는 건 아니고요! 5분, 아니, 3분 만이라도 좋으니까요.”
“저어…… 는 라이브를 켜도 뭐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른 멤버들(진소유 제외)은 잘하던데.”
“저는 그냥 민주 씨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요즘은 어떻게 사는지만 들어도 좋아요.”
어떻게 지내는지만 들어도 좋다, 라…….
그럴 수가 있을까? 아이튜브로 생각하면, 좋아하는 아이튜버가 본인 근황만 말한다면 질려서 금방 다른 영상을 볼 것이다.
‘그래도 뭐, 회사에서도 라이브 자주 켜라고 하니까.’
성필의 말대로 일상 이야기만 해도 된다면, 김민주도 조금은 부담 없이 팬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 시간 있으면 켜볼게요.”
“네, 감사합…….”
“지나가실게요.”
어느새 1분이 지나갔다. 그 사실에 김민주는 살짝 놀랐다.
그녀는 30번째 팬이 지나갈 즈음 해서 갑자기 집중력이 낮아졌었다.
팬들과 대화를 해도 시간이 안 지나가는 것 같고, ‘이 이야기는 전에 했었지 않나’라며 괜히 혼자 찔리고, 자신의 반응이 무미건조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성필과의 대화 도중에는 시간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파이팅!”
“파, 파이팅…….”
다음 차례, 인데 아직 성필의 옆 팬이 비키지 않았다. 아까 김민주가 껄끄럽게 여겼던 중국인 팬이었다.
그 팬은 진저에게 자꾸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진저도 팬에게 맞춰주곤 있으나, 자꾸만 눈동자가 굴러가면서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지나가실게요.”
진저 뒤의 매니저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팬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고 진저의 답을 듣기까진 일어나지 않겠단 듯,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지나가실게요!”
이제 매니저가 아니라 경호 인력까지 투입되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은 팬의 뒤로 와서 그녀를 옆자리로 보내려 했다.
“200만 원 썼는데 30초도 더 못 있어요?!”
적반하장으로 그 팬이 화냈다.
진저의 뒤에 서 있던 매니저는 익숙한 투로 핸드폰을 꺼내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혹시 나중에 KS 엔터가 팬을 홀대했단 루머가 돌더라도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매니저가 경호원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팬에게 물리적인 제지를 가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 빨리 좀 지나가요.”
“저 사람 뭐야?”
“계속 중국어 쓰던데.”
“매너 좀 지키지.”
좌석을 가득 메운 팬들이 언어로 된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자 매니저의 말에도 꼼짝 않고 있던 그 팬은 얼굴이 붉어져선, 손에 쥐고 있던 선물을 테이블에 쾅 던지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비상구를 통해서 나가버렸다.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종이백이 내던져지자 진저는 깜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진저, 괜찮아? 안 다쳤어?”
진저의 뒤에 있던 매니저는 종이백이 폭발물이라도 되는 듯 잽싸게 가져가서 아래로 숨겼다.
“네, 네, 괜찮슴미다.”
“알겠어. 죄송합니다. 지나가실게요.”
매니저가 성필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있었지만,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대처하는 솜씨가 예술적으로 빨랐다.
성필은 최애인 진저의 차례란 것에 느끼던 기쁨도 사라지고, 옅은 짜증을 가지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많이 놀라셨죠? 괜찮으세요?”
“예, 저는 괜찮슴미다.”
“다행이네요. 박성필이요.”
진저는 앞선 팬에게 집중하던 동안에도 성필의 목소리를 캐치했었다.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는 건 상대하는 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성필의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그일 거라고 확신했었다.
“이름만 써드림미까?”
“아니요, 성까지요.”
“알겠슴미다. ……저, 좋아해주셔서 감사함미다.”
“어떻게 케이어스를 안 좋아하겠어요.”
“그, 그렇슴미까. 사실, 팬사인회를 한단 얘기를 들어도 실감이 안 났슴미다.”
진저는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조심스럽게 써 내려갔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다른 팬들보다 조금 더 정성을 들여서.
“저희를 좋아해서, 직접 시간을 내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100분이나 있단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아니, 다른 멤버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함미다. 하지만 제가…….”
진저는 섬뜩했다. 이런 이야기를 팬에게 해도 되는 건가?
팬사인회에서 이토록 진솔하고 깊은 말이 오가도 괜찮을까? 하지만 도저히 자신의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저는 성필을 한 명의 팬이 아니라 박성필 이사로 보고 있었다.
“제가, 저한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저는 진저 씨가 최애예요.”
사인을 쓰던 진저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팬사인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성필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사인만 바라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 와서 노력하는 모습,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워라밸!”
“……감사함미다.”
진저는 짙은 미소와 함께 사인을 끝마쳤다. 장장 1분에 걸린 사인이었다. 이 정도면 쓰는 게 아니라 그린 것에 가까웠다.
“지나가실게요.”
성필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자, 진저는 그보다 더한 활기참으로 양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음 차례.
“뭐야, 진저가 최애인 분이시네.”
진소유가 피식 웃으면서 성필을 반겼다. 방금 옆에서 오고 갔던 대화를 들은 것이다.
“어쩌나, 최애 차례가 지나서요. 섭섭하시겠다.”
“저 소유 씨가 최애예요.”
“……?!”
바로 옆에 있던 진저가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으로 진소유는 박수까지 치면서 깔깔댔다.
“아, 그거죠? 그룹이 최애고 차애는 누구누구다. 그거?”
“하하.”
“성함이?”
“……?!”
이번에는 성필이 날벼락을 맞은 듯 놀랐다. 그는 케이어스 멤버들이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팬사인회에서 친분을 드러낼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방금 진저와의 대화를 들을 정도면 이름도 귀에 들어갔을 텐데…….
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구나.
“박성필이요.”
“음?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진짜 모르나 보다.
하긴, 성필은 진소유와 직접적으로 말을 섞은 적이 없다. 진소유에게 성필은 일상 속의 풍경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소유 씨는 말투도 살짝 덜 벼려진 느낌이네.’
사람에 따라선 무례하게 느껴질 만한 발언도 서슴지 않고 한다. 이게 진소유의 기본적인 태도이긴 하고, 훗날에도 여러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SNS 공식 불통왕. 업계인들에게서 평가도 그다지 좋지 않음. 이런 여러 딱지가 붙어 다니는 게 진소유다.
팬사인회 후기에도 ‘소유가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나 봐요 ㅠㅠ’ 같은 글이 올라오는데, 친절함도 크게 없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성필로 삼행시 해볼게요.”
“……네?”
“운 띄워주세요.”
“아, 어, 박!”
“박성필은.”
“성.”
“성기네.”
“……?!”
성필은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눈빛으로 진소유를 추궁했다.
충격받은 건 성필만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매니저는 놀란 것을 넘어서 아예 공포에 떨고 있다.
“다음 안 말해줘요?”
“저, 소유 씨…… 그, 방금 한 말…….”
“뭐가요? 성기네?”
“…….”
“아, 아아.”
진소유는 그제야 자신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이해했다.
“‘성기다’ 모르세요?”
“……아! 성기다, 아! 그거였구나.”
“뭐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요.”
진소유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사인을 마무리했다. 삼행시를 생각하느라 중간에 손이 멈춰서 꽤나 늦게 됐다.
“지나가실게요.”
“어, 아직 다 못 했는데.”
중간에 ‘성기다’로 시간을 끄느라 삼행시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성필은 엉덩이를 떼면서도, 그녀가 어떤 삼행시를 하려 했을까 못내 궁금했다.
“다음에 또 봐요.”
그때 진소유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팬사인회에서 스킨십은 필수적인 게 아니며, 아이돌에게 강요하거나 부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이돌이 먼저 제스처를 취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네, 다음에도 올게요.”
“약속.”
성필은 그녀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자리를 옮겼다. 비록 삼행시는 듣지 못했지만, 진소유와 하이파이브를 했으니 만족스럽다.
다음 차례.
“안녕하세요, 에리카 씨.”
사쿠라바 에리카.
“네, 오늘 기다리시느라 많이 힘드셨죠?”
오늘 케이어스 팬사인회는 예정보다 30분 밀려서 시작했었다.
때문에 회장 밖에서 줄 서 있던 팬들이 꽤 불만을 드러냈었는데, 에리카는 그 일을 묻는 것이다.
“아니에요. 에리카 씨 보는데 좀 기다릴 수도 있죠 뭐.”
“그런 마음가짐 가지시면 안 돼요. 기다리느라 힘들면 힘들었다, 이렇게 확실하게 표현을 해야죠. 자, 해보세요!”
에리카는 다소곳이 허리를 펴곤 성필의 말을 기다렸다. 마치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준비를 마친 여자친구처럼…….
‘뭐야 이거.’
사람은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존재였던가? 자세만 고쳤는데도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다고?
‘전생에도 겪었지만 대단하다…….’
조금은 어색한 티를 냈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에리카는 성필이 자리에 앉자마자 친밀감 형성을 끝내버린 것만 같았다.
마치 팬사인회에 10번은 온 팬을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기…… 기다리…….”
“으응? 뭐라구요오?”
“아 못하겠어요……!”
성필이 수줍은 소년처럼 얼굴을 가렸다. 에리카는 기쁨이 잔뜩 담긴 웃음을 터뜨리면서 사인을 마쳤다.
“요즘 힘든 일은 없으시죠?”
“힘든 일요?”
“얼굴에 근심이 많아 보이셔서요.”
“무슨 ‘도를 아십니까’예요?”
이럴 수가. 스스로 대화를 주도하다니.
다 컸다 에리카!
“음, 그냥 뭐, 회사 다니고…….”
“와, 회사원이시구나. 야근 많이 하세요?”
“야근은 일상이죠.”
“심하다. 제가 상사분 대신 욕해드릴까요? 여기에 그분 얼굴 떠올리세요.”
에리카가 성필의 옆에 있는 허공을 막 더듬었다. 성필은 무의식적으로 그곳에 홍규헌의 얼굴을 그렸다.
그 순간.
“야 똑바로 살아!”
에리카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성필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자, 에리카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라도 화나고 힘들단 생각이 들면 오늘을 기억해주세요. 성필 님 옆에 저희가 항상 있을 수는 없지만, 노래로라도 용기가 되어 드릴게요.”
에리카가 주먹을 내밀자, 성필은 홀린 듯이 그녀의 주먹에 자신의 손을 맞추었다.
“굴하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가요. 함께요.”
박성필, 성불.
* * *
케이어스 팬사인회의 마지막은 컴백곡인 ‘가이아’의 무대로 마무리되었다.
무대 장식 없이 행해지는 퍼포먼스는 음방이나 콘서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으나, 중요한 건 배경이 아니다.
케이어스, 그녀들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단 것이다.
‘역시…….’
케이어스의 컴백곡이 바뀌었단 사실을 깨달은 뒤, 성필은 그녀들에 대한 애정이 점점 식어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팬사인회에도 응모하지 않을까 했지만, 아까우니 일단 신청했다. 그리고 당첨됐다. 그러고도 수십 번을 고민하고 온 것이다.
‘와보길 잘했어.’
케이어스의 사인을 받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누군가 다시 케이어스를 좋아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성필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무대를 이유로 들 것이다.
‘물론 공연 의상이 아니고, 배경도 평범한 무대지만.’
그렇기에 케이어스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케이어스는 데뷔부터 커다란 짐을 진다. 아니, 그건 KS 엔터의 모든 아이돌들이 져야만 하는 짐이다.
KS 엔터는 한국 아이돌의 시작이자 아이콘이며 가장 거대한 엔터사이다. 그리고 KS 엔터의 모든 아이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메인 프로듀서인 정호환 이사님이 붙었다는 거.’
정호환은 존재 자체가 KS 엔터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KS 엔터에서 데뷔하는 아이돌은 모두 정호환의 분신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심지어 케이어스는 이름도 KS(케이에스)와 유사성이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KS 엔터가 자신의 모든 정체성과 기술을 집약하여 만든 아이돌 그룹인 것이다.
아이돌 팬들은 KS 엔터의 아이돌에게서 그들 자체의 개성보다 회사의 입김을 더욱 진하게 느낀다.
따라서, 케이어스 자체의 자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케이어스는 그러지 않았어.’
케이어스는 KS 엔터의 이단아였다. 그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마다 아티스트적인 면모를 갖추고 개성을 마음껏 발산하게 된다.
‘KS’ 자체가 브랜드인 공간에서, 그녀들은 ‘케이어스’로 남을 수 있었다.
각 멤버가 솔로로 앨범을 내고 프로듀싱에 일조하는 것으로,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넘어선 힘을 창조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정호환 이사님의 전략이지만…….’
회귀하고 그와 대화하면서 알게 됐다. 미래에 케이어스가 연출할 아티스트십은 전부 정호환의 전략이었다.
케이어스를 좋아했던 이유가 실은 연기에 지나지 않았단 것을 알았던 그 순간, 성필은 이미 그녀들에게서 마음이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남아 있어.’
성필이 케이어스를 좋아했던 이유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녀들은 현시대 아이돌의 흐름과는 정반대에 서 있다. 현대의 아이돌이 서비스업으로서 보다 더 낮은 곳으로 임하는 반면, 케이어스는 우상을 위한 계단을 오른다.
팬들이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희생과 노력. 고통스러워도 내색해선 안 되고. 욕을 먹어도 웃으며. 귀여움받기 위해 애교를 떨어야만 한다.
팬은 소비자의 권리라는 사슬로 아이돌을 묶어서 바닥에 끌어내린다.
성필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게 시대를 빗겨나간 바람이란 것을 알아도.
‘나는 손에 닿지 않는 아이돌을 바라.’
이미 낡고 닳아빠진 개념이지만, 성필은 천상에서 드높게 빛나는 우상을 바라고 있다.
케이어스처럼.
그녀들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이쁨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럽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보길 바라기에 무대에서 보여줄 뿐이다.
그녀들은 팬이 즐비한 객석에서 유리된 채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아티스트, 퍼포머로서, 그녀들의 작품과 퍼포먼스만으로 열광을 끌어낸다.
‘나중에 케이어스는 팬사인회 이벤트를 아예 없애버리지.’
그녀들은 진정한 우상으로 발돋움하여, 더는 팬이 붙잡을 수 없는 위치로 올라간다.
지금도 그 편린을 볼 수 있다.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케이어스는, 사인회에 올 만큼 열성적인 팬들의 환호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정해진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수행하려 할 뿐이다. 그녀들은 그 어떤 팬에게도 아양 떨지 않는다.
‘아이돌이 팬의 아래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이렇게까지 노력하잖아.’
그녀들은 우상으로 남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러니, 그 노력에 손을 더하고 싶은 것도 이상한 마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 순간 객석에서 환호가 일어났다.
에리카가 중앙 포지션으로 나와 객석으로 윙크를 날렸기 때문이다. 어떤 무대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애드리브며 팬을 향한 애교였다.
윙크의 방향이 자신에게 향해 있던 건, 성필의 착각은 아니겠지.
“…….”
성필은 진저를 보았다.
그녀는 환호가 일어나는 게 케이어스의 퍼포먼스가 대단해서라고 생각하는 듯, 여전히 정면만 응시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춤을 추는 중이다.
‘……이제 정말 진저 씨뿐이야!’
* * *
월요일 출근.
“월요일 좋아. 월요일 좋아.”
성필의 괴기스러운 노래에 민경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형 진짜 월요일 좋아해요? 진짜 쉬는 것보다 회사에 오는 게 좋아요?”
“쉬는 것도 좋지. 회사도 좋고.”
“세상 사람들이 다 형 같았으면 주5일제도 안 생겼을걸요. 뭐, 휴일은 잘 보냈어요?”
케이어스의 팬사인회가 어땠냐는 질문이다.
“그냥저냥 잘 보냈지. 넌 휴일에 고생 많았다. 팬싸 어땠어?”
성필은 주말에 있던 소녀연맹의 팬사인회의 내용을 민경섭에게 상세히 보고받았다.
사실 보고랄 것도 없는데, 둘은 석세스 엔터에서부터 여러 팬사인회를 기획하고 직접 통제하기도 했던 터라 척하면 척이었다.
그렇게 1분도 안 되는 상세 보고가 끝나고, 민경섭이 갑자기 열띤 흥분을 드러냈다.
“저 진짜 비주얼 미친 사람 봤어요. 고등학생이라던데 와, 돌았어요. 형도 직접 봐야 했는데.”
“하양이 급이야?”
“네, 남자 하양이? 그래서 명함 줬어요.”
“뭐?!”
다짜고짜 명함을 돌려?
아직 가로 엔터는 연습생을 양성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물론 소녀연맹의 데뷔까지는 초창기 멤버로 열심히 해나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소녀연맹이 있으니까.’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하면서 연습생도 같이 받는 건, 가로 엔터의 능력으로는 무리다.
하지만 성필은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리카의 동생인 유우토에게 명함을 돌린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뭐래?”
“생각 없대요. 제가 제발 명함만 받아달라고 해서 그것만 가져갔어요.”
민경섭이 이렇게나 열정적일 정도라면, 비주얼이 말도 안 되긴 하나 보다.
“근데 형,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 지금 연습생들 받아서 우리 애들 4년 차 들어갈 즈음 데뷔시키는 게 베스트야.”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들을 모으고, 그녀들을 데뷔시키기까지 2년에서 3년의 연습 기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가로 엔터의 사정이 받쳐주지 않아서 1년으로 당겼을 뿐이다.
만약 남자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킨다고 하면, 소녀연맹처럼 빠른 기간 내에 이루어져서는 안 되리라.
“그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지.”
“가장 중요한 건…… 비주얼팀이죠?”
회사마다 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A&R은 음악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비주얼팀은 보이는 모든 것을 담당한다.
그룹의 비주얼을 담당하는 팀이 단독으로 존재한다는 건 큰 의미가 있으며, 아이돌 기획적인 면으로 보아서도 일관성을 유지하여 전체적인 퀄리티를 끌어올려 준다.
물론 작은 회사에서 단독으로 갖추기 힘든 부서이긴 해도, 성필과 손혜빈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우리 애들을 위해서도 비주얼팀은 필요하지. 지금은 나랑 혜빈 누나가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긴 한데.”
둘 다 비주얼 관련으로는 전공자가 아니다. 그들의 막연한 기획을 여러 곳에 외주를 주어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을 선택해왔을 뿐이다.
“여러 측면에서 회사를 확장해야지. 사장님도 곧 채용을 시작할 거라고 하시니까.”
“여기 처음 왔을 땐 텅 비어 있었는데.”
민경섭은 1층 홀을 천천히 훑었다.
“곧 북적거리겠네요.”
“그러게. 잘돼서 다행이다.”
“저한테도, 형한테도요.”
민경섭은 일을 위해서 떠나가고, 잠시 후 자리를 교체하듯 조아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민경섭이 앉던 자리로 와서 다리를 꼬았다.
“뭔데, 갑자기 스타일리시한 컨셉 잡았어?”
“아저씨, 케이어스 팬사인회 갔다면서요?”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성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라는 이미 알고 있어. 실언이더라도, 단 한마디 거짓말도 허용되지 않아.’
성필은 전생에서 얻은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그녀에게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어떻게…… 알았어?”
“진저가 알려줬어요.”
마치 서로 모르는 사이란 것을 과시하듯 정면만 보고 있던 조아라는, 갑자기 성필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성필을 흘기는 그녀의 눈빛에는 언뜻 경멸의 감정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진저한테 들었을 땐요, 나 놀리나 싶은 생각도 했거든요. 케이어스의 팬사인회잖아요? 앨범 10장 20장으로는 턱도 없을 텐데, 아저씨가 거길 갔다고? 아니, 당첨될 수야 있겠죠. 그런데…… 우리 팬사인회 날에 갈 거라곤…….”
조아라가 미소 지었다. 기뻐서 짓는 미소는 아닐 것이다.
“근데 진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