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팬사인회!”
리카는 팬사인회가 진행되는 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무대를 세팅하고 있던 매니저 안이상과 김수희가 화들짝 놀랐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괜찮단 뜻으로 한 번 웃고, 무대 위에 롱 테이블의 위치를 맞추었다.
사인회장은 소형 영화관 같이 생겼다. 좌석은 100개가 살짝 넘고 공간 자체가 작아서 팬이 아티스트를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다.
덕분에 사인을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좌석에서 기다리는 이도 소녀연맹을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얘들아.”
오랜만에 팬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는 멤버들의 분위기를, 백설하가 부름 한 번으로 단숨에 가라앉혔다.
그녀는 휴가 내내 잠만 잤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서늘하게 갈려진 기세를 뿜어냈다.
“인민이들이랑 만나서 들뜬 건 이해해. 하지만 오늘 ‘논다’고 생각하지는 마. 이것도 일이야. 피곤한 티, 힘든 티 같은 거 절대 내지 마. 알겠어?”
멤버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신 분들은 앨범을 못해도 10, 20장은 사셨을 거야.”
“그, 그렇게나 많이요?”
“추첨이니까 하나만 사고도 당첨된 분이 계실 수도 있지. 그리고 우리를 만나겠단 마음 하나만으로 수십만 원의 거금을 쓰신 분도 있어. 한 장이든 수십 장이든, 우리를 좋아해서 돈을 쓰신 거야. 사장님이 그러셨잖아, 돈은 마음이라고. 우리도 그 마음에 보답해드려야 해.”
팬이며, 동시에 고객이다.
백설하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멤버들이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가로 엔터 파이팅!”
정해져 있지 않은 마지막 구호에 멤버들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싱글싱글 웃는 표정의 민경섭이 어느새 멤버들과 함께 손을 겹치고 있었다.
“다들 파이팅이 넘치네.”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응응 설하야 안녕. 다들 잠은 똑바로 잤고?”
“넵!”
“설하 말대로, 이미 해봐서 알겠지만 팬사인회는 노는 감각으로 하는 게 아니야. 팬이라서 내가 피곤하고 힘든 것도 이해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팬이니까 피곤하고 힘들어도 더 기운을 차려야 한다.
“팬사인회란 게 기운이 많이 빠져. 팬들을 1대1로 상대하는 거 외에도, 계속 좌석에 앉아서 너희들을 보고 사진이랑 영상도 찍으니까. 그래도 딱 2시간만 정신 바짝 차리자!”
민경섭의 격려에 멤버들이 다시 의지를 다잡았다. 물론, 오로지 비즈니스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겠단 마음만은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녀연맹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팬들과의 만남이니 기대가 안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박 이사님은 어디 계시나요!”
“형? 형은 집에서 쉬고 있지. 토요일이잖아.”
“이렇게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안 오시다니, 너무해요! 옛날엔 저희 행사 있을 때마다 오셨잖아요!”
“그러게, 아저씨 옛날에는 주말이든 연휴든 회사에 와서 우리 보고 그랬잖아. 요즘엔 안 그러네.”
“애정이 식은 거야!”
리카와 조아라의 투정에 민경섭은 쓰게 웃으면서 달래듯 말했다.
“얘들아, 형 못 봐서 아쉬운 건 알겠는데 쉬는 게 당연하잖아. 형은 매니저가 아니라 이사야.”
회사의 비전을 실행하고 사업적 판단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
행사마다 소녀연맹을 따라다니는 건 그의 일이 아니다.
“옛날이야 애정으로 너희들이랑 계속 붙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젠 그러기 힘들지. 쉴 땐 쉬어야 해.”
성필은 매니저가 아니다, 라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다들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오늘 사인회장에 왔을 때도 성필이 없단 소식을 듣고 의문을 가질 정도였으니까.
조아라의 말마따나, 성필은 최근까지도 소녀연맹의 거의 모든 스케줄에 동행해왔다.
“형이 너희들이랑 같이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거야.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형한테 뭐라고 하면 안 돼. 알겠지?”
그저 장난스러운 투정이었는데, 민경섭이 예상외로 진지하게 반응해오자 리카는 당황하면서도 수긍했다.
“하이(네)…….”
그녀는 자신의 뺨을 짝짝 두드리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박 이사님 없이도 팬사인회를 무사히 마칠 거예요! 아타시(저)도 옛날의 제가 아니니까요!”
민경섭은 투지를 불태우는 리카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심 죄책감을 가졌다.
‘형이 케이어스 팬사인회 갔단 거 알려주면 폭동 일어나겠다. 형도 휴일을 자기 맘대로 쓰는 게 당연하긴 한데…….’
* * *
PC방.
라면을 끓이던 알바는 ‘안녕하세요……’라 작게 울리는 소리를 듣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멀찍이 가버린,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모를 소녀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사장님, 걔 또 왔어요.”
PC방 사장은 폰게임을 자동사냥으로 전환하고, 일렬로 늘어선 모니터들 위로 흘끔 보이는 소녀의 정수리를 눈에 담았다.
저 소녀는 PC방 알바들 사이에서도 나름 인지도가 있었다.
일주일에 몇 번 와서 1시간만 충전하고 아이튜브만 보니, 그녀의 행동은 게임이 주목적인 손님들 사이에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맞네.”
PC방 관리 프로그램 화면에는 소녀가 어떤 걸 하고 있는지도 보였는데, 역시나 또 아이튜브였다.
“쟤는 소녀연맹인가 하는 아이돌 영상만 보네. 아이돌이 그렇게 좋나?”
“집에 컴퓨터가 없나 보죠.”
“핸드폰은?”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서?”
“모니터 큰 걸로 바꾸길 잘했지?”
아무튼, 소녀는 어김없이 충전한 1시간을 소녀연맹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을 보는 데만 썼다. 혹은 팬들이 올린 리액션 영상이나 직캠 등을 보며 황홀함에 잠겼다.
‘예쁘다. 멋져.’
김마리아.
새별 보육원에서 지내는 그녀는 컴퓨터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육원에 몇 대 없는 컴퓨터는 대부분 언니 오빠들의 차지이고, 혹시나 자리를 잡더라도 느려서 아이튜브조차 원활히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PC방에 와서 쾌적한 덕질 시간을 보냈다.
[5분 남았습니다.]
이 소리가 들려올 때면 김마리아는 아쉬움에 빠졌다. 그래도 다음에 또 올 수 있으니까, 아쉬움을 느끼기보다 만족을 되새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컴퓨터를 끌 준비를 하던 도중, 김마리아는 평소엔 확인하지도 않던 소녀연맹 채널의 게시글 탭으로 눈이 갔다.
‘와, 이게 뭐야?’
소녀연맹 공식 굿즈의 발매를 알리는 포스터였다. 김마리아는 응원봉이나 다이어리 등, 돈만 있다면 꼭 갖고픈 것들을 눈으로만 음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우스를 내리면서 채널 게시글들을 확인했다. 그러던 도중, 꽤 옛날에 올라온 글에 눈이 박혔다.
‘팬사인회……? 사인회면, 사인을 받는 거야? 소녀연맹을 직접 볼 수 있어?!’
어떻게 참여하는 걸까.
김마리아는 수업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집중력을 발휘하여 글을 읽었다.
가로 엔터 공식 사이트에 응모권 번호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추첨이 된다는 모양이다.
‘응모권? 아, 앨범에 들어있던 그 종이구나!’
김마리아에게 앨범은 매우 고가의 물건이다. 용돈을 야금야금 모아야 겨우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돈을 모으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돈이 생길 때마다 PC방에 가져다 바치니 어떻게 돈을 모으겠는가.
하지만 오빠가 생일선물로 앨범을 주어, 그녀의 소중한 보물이 하나 늘 수 있었다.
‘이게 있으면 할 수 있…… 내일까지?!’
어쩌지. 이젠 PC방에 쓸 돈이 없는데.
게다가 응모하려면 본인 인증 등 여러 절차가 필요했다. 컴맹인 김마리아로서는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인터넷에 ‘소녀연맹 팬사인회 응모법’을 검색해서 읽어보았으나,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컴퓨터로 해본 것이라곤 아이튜브에 검색하는 정도가 전부이니,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라 불리기도 민망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스마트폰도 없다.
“아.”
시간이 다 되자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졌다.
김마리아는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몸을 덜덜 떨었다.
팬사인회라니, 꼭 가고 싶다. 소녀연맹을 직접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
‘하양이…….’
작년 연말에 한구인이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왔었는데, 중간에 장하양도 왔었다.
김마리아는 너무나 놀랐었다. 항상 꿈에 그리던 장하양을 직접 본 건 너무나 행복했지만, 그저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제때 돌아온다던 오빠가 오지 않아 불안했었기 때문이다.
장하양의 공연이 끝나고 넋이 나가 전해주지 못했던 한구인의 선물을 전달할 때, 바로 옆에서 장하양을 보긴 했어도 감히 덕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갑작스런 장하양의 등장은 김마리아가 이성적으로 대처하기 매우 힘든 사태였었다.
만약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팬사인회 꼭 가고 싶어…….’
그날, 김마리아는 저녁에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김마리아의 오빠는 9시가 넘어서야 보육원으로 왔다. 그녀는 오빠를 보자마자 품 안에 폭 안겼다.
“마리아.”
예상치 못한 동생의 환대에 오빠, 김사무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빠, 나 이거…….”
하지만 김마리아가 그의 품에 안긴 건 환대 따위가 아니었다. 오빠에게 부탁하고픈 게 있었기 때문이다.
김사무엘은 동생에게서 팬사인회 응모권을 받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내일 이거 신청해주면 안 돼?”
“……이게 뭔데?”
당연하게도, 김사무엘 또한 동생처럼 컴맹이다.
* * *
김사무엘은 10년 전, 어머니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겼던 순간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흐린 눈발이 거세게 날려서 눈꺼풀을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와중,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겠단 약속을 남기고 사라졌다.
“오빠, 엄마는 언제 와?”
김사무엘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리아가 착하게 잘 지내면 오실 거야.”
그는 고작 8살이었지만 성숙하기 그지없었다.
젊은 여자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게 고되단 것을 알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다.
‘마리아, 내가 지켜줄게.’
동생은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김사무엘의 꿈은 동생인 김마리아가 여느 집의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동생의 행복한 삶만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런 그에게는 단기적인 목표가 있었다.
‘보육원에서 나가기 전, 마리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돈을 모아야 해.’
모르긴 몰라도, 김사무엘 자신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하류 인생으로 살 게 틀림없다. 하지만 동생은 그렇게 살도록 둘 수 없다.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돈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해.’
김마리아는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운 좋게 좋은 대학에 가더라도, 가난에 쪼들리면서 장학금을 타기 위해 젊음만 갈아 넣길 바라지 않는다.
‘마리아가 나처럼 살지 않게, 돈이 필요해.’
그래서 김사무엘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의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도 전부 빼버리고 주 30시간의 노동에 자기 자신을 바쳤다.
모든 건 동생을 위해서다. 동생이 행복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는 거지?’
김사무엘은 잠자리에 누워서 낡은 저가형 스마트폰을 밤이 새도록 만지작거렸다.
그는 인터넷에서 ‘소녀연맹 팬사인회 응모법’을 검색하고 최대한 따라 하려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김사무엘은 마치 평생 컴퓨터와 접하지 않은 80살의 노인과 같았다. ‘신청’ 탭을 찾는 것에만 수 시간이 걸렸으니 말 다 했다.
결국 그는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학교에 와서도 도저히 수업 같은 데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오늘까지랬는데. 꼭 해야 하는데…….’
동생이 직접 부탁한 것이다. 꼭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못난 오빠라서, 이런 것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
김사무엘은 절망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팬사인회 응모를 위해 고군분투하려고 결심하던 때.
“응 너 절대로 팬싸 당첨 못 됨. 양심적으로 앨범 7장 사고 어떻게 당첨되길 바라냐?”
“아 부정 타니까 그만하라고!”
복도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두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백수현과 김채현이었다. 김사무엘은 백수현을 몰랐으나, 김채현은 이름과 얼굴은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자마자 머리에 스파크가 튀었다.
‘맞아, 김채현 쟤 중학교 때도 아이돌 얘기 많이 했었지.’
어쩌면 팬사인회 응모법을 알지도 모른다.
김사무엘은 곧장 김채현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머리를 손으로 살짝 정돈했다.
‘됐다.’
* * *
꺄아악 >_< 어떡해!!!!!!!
사무엘이가 나한테 말 걸었어 ㅜㅜ……!!!
나… 혹시… 이상하게 보이면… 어떡하지? 아니, 사무엘이 나한테 관심이 있을 린 없잖아 ㅡ_ㅡ;;
와… 근데 진짜루 비인간적인 얼굴이다. 내 얼굴 O_O ← 이러케 변해 있겠지?
100퍼 이상하게 보여!!!!!!!!!!!!!!!!!!!!
백수현……! 그래, 날 그렇게 바라봐봐 평생! 그래두 어쩔 수 없자나! 사무엘을 보면 다들 나처럼 된다구! 그건 확.실.해……!
“……!”
김채현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벽지와 천장, 키보드와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와 더운 공기가 무겁게 내리깔린 공간.
그녀는 PC방에 있었다.
김사무엘이 말을 걸었던 순간, 김채현의 머릿속은 옛날 인터넷 로맨스 소설처럼 변해버려서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하는 거야?”
옆에서 들리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김사무엘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옆에 있단 것만으로도 정신이 천상으로 비상하여 신의 권좌 아래 복속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가까이 안 다가왔으면 좋겠다.
김사무엘이 달걀만 한 얼굴이 가까이 있으면 자신의 얼굴이 훨씬 커 보일 테니까…….
“아, 어, 여기선…….”
“야 김채현. 패스 말고 문자로 인증해. 사무엘 얘 패스 무조건 안 깔았어.”
“패스가 뭐야?”
“봤지?”
“…….”
아, 그러고 보니 백수현도 같이 PC방에 따라왔었다. 김채현은 김사무엘이 팬사인회 응모를 도와달라고 해서 온 것이지만, 백수현은 올 이유가 없었다.
야자까지 째면서는 더더욱.
‘그냥 내 핑계 대고 야자 안 하고 싶었나?’
백수현 덕에, 학교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김사무엘과 둘만 있을 수 있단 기쁨도 잠시일 뿐이었다.
물론 김사무엘이 ‘채현이 너 아이돌 좋아하지? 중학생 때도 얘기하는 거 많이 들었는데’라고 말했을 땐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고픈 욕구에 시달렸었지만.
어쨌거나 그와 친해질 기회잖은가. 물론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을 리는 없지만…….
“자, 다 끝냈어. 네 폰에 문자 갈 거야.”
“고마워 채현아.”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였을 뿐이다. 그뿐인데, 김채현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얼빠 아닌 줄 알았는데…… 맞나 봐……!’
그래서 소녀연맹에서도 장하양을 좋아하는 거겠지. 김채현은 새삼스레 자기 인식을 하게 됐다.
“근데 네가 소녀연맹 좋아할 줄은 진짜 몰랐네.”
백수현이 친근하게 말을 붙이자 김사무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아니라 동생이 좋아해.”
“아, 동생분이.”
“앨범을 생일선물로 사줬더니 엄청 좋아하더라. 팬사인회도 오늘까지 꼭 신청해야 한다고 계속 보채는데…….”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사무엘은, 학교에서의 소문과 달리 따스함과 밝음으로 넘쳤다.
“다행이다. 동생이 소녀연맹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네 덕분이야.”
“……응?”
김채현은 ‘혹시’ 하고 생각했다.
‘설마, 사무엘이는 신청만 하면 무조건 팬사인회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김채현은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팬사인회가 얼마나 가기 어려운 것인지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과연, 이야기가 이어지는 시시각각 김사무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 렇구나.”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그의 말투에서 드러났다. 아니, 실망을 넘어서 절망과도 맞닿아 있었다.
동생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단 게 그토록 절망적인 것일까?
“음, 그럴 수 있지.”
김사무엘은 금방 감정을 갈무리하고 미소를 지었다. 계속 실망한 기색만 띠면 김채현이 준 도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게 될 테니까.
“잘은 모르지만, 이런 건 응모하는 거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지? 하하, 음, 하나만 있으면 안 되는구나. 여러 장이…… 그래, 내 동생도 이해하겠지.”
김사무엘은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아까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다시금 김채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채현아, 도와줘서 고맙…….”
“야, 잠만.”
갑자기 백수현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응모권 다섯 장을 꺼내는 게 아닌가.
“너 써.”
김사무엘이 깜짝 놀랐다. 그는 동생에게 줄 선물로 앨범을 사주었기에, 이 응모권 하나가 가진 가치를 알았다.
“아니…… 나? 내가?”
“나 어차피 팬싸 안 갈 거거든. 방구석 1열이라고 하잖아. 딱히 직접 보고 싶진 않아.”
“백수현 너 뭐냐. 왜 응모권을 가방에 넣고 다녀?”
김채현의 합리적인 지적에 잠깐 입을 다문 백수현은.
“아…… 넣어뒀다가 까먹었어. 방금 생각난 거고.”
“응모권을 가방에 왜…….”
“아 그럴 수도 있지! 넌 잃어버렸다고 난리 쳤던 루주 3개월 동안 가방에 박아 넣고도 몰랐잖아!”
“그 얘기가 왜 나와?!”
“암튼 이거 사무엘 너 쓰라고.”
김사무엘은 그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응모권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김채현이 백수현의 손에 들린 응모권을 가로챘다.
“그럼 이걸로 등록할게?”
“어, 어?”
말릴 새도 없이, 김채현은 응모권 다섯 장 등록을 순식간에 완료했다.
김사무엘도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그는 잠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곱씹곤, 백수현을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나중에 내가 도울 일 있으면 꼭 말해줘.”
“걍 필요없는 거 줬는데 뭐. 신경 쓰지 마.”
백수현은 오늘 처음 알게 됐다.
‘고맙다’는 말에 이렇게나 강한 에너지가 있는지 말이란 것을.
흔히 친구들 사이에 하는 ‘고맙다’와는 층위가 다를 정도의 감정이, 김사무엘의 말 안에는 들어가 있었다.
‘사무엘 얘 보육원에 있다지.’
그럼 동생도 그럴 것이다.
김사무엘은 학교에서 소문이 좋지 않다.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고, 교우관계도 원활하지 않다.
하는 거라곤 학교에 와서 멍때리다 가는 것뿐이다. 누군가 호의를 가지고 다가가도 관심 없단 듯 밀어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언행이 그러하니,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도 좋은 취급을 받긴 어려웠다.
하지만 백수현이 오늘 직접 보기에.
‘착한 애네.’
김사무엘은 다정한 사람이다.
‘채현이한테 주려던 응모권이었긴 한데…….’
꾹꾹.
옆구리를 찔러오는 감각에 백수현이 옆을 보았다. 김채현이 실실 웃으면서, 김사무엘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엄지를 척 올렸다.
입 모양으로만 ‘착하네’라고 하는 것이, 마치 강아지를 칭찬하는 태도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 착하다 진짜.’
* * *
“마리아, 잘 다녀와.”
“응 오빠.”
소녀연맹의 팬사인회가 진행되는 상암동의 어느 빌딩 앞. 김사무엘은 다정하게 동생을 안아주었다.
“채현아 동생 잘 부탁할게. 미안해.”
“걱정 마. 진짜 별일 아니라니까. 그냥 2시간 동안 앉아만 있다 나오는 거야.”
김사무엘은 동생이 군대라도 가는 것처럼 도저히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기어코 팬사인회장 앞까지 따라오지 않았던가.
“그럼 나는 앞에서 기다릴게.”
“어. 2시간 뒤에 봐.”
김채현은 김마리아의 손을 꼭 잡고, 팬사인회를 기다리는 인민이들의 행렬에 끼었다.
김마리아는 처음에는 김채현을 경계했으나, 오빠와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곤 모든 무장을 해제했다.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건 오빠였고, 오빠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니까.
“들어갈게요!”
민경섭이 크게 외치자 팬들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정해진 루트를 따라 팬사인회장으로 갈 것이다.
김마리아는 점점 사라지는 오빠의 모습에 불안감을 내비쳤으나, 맞잡은 김채현의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 덕분에 어느 정도 진정할 수 있었다.
“네네, 이쪽으로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민경섭은 건물 밖에서 입장 안내를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때를 놓친 사람이 없는지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들어가려던 순간, 그의 눈에 한 남자가 잡혔다.
불안하게 건물 입구를 주시하고 있는 김사무엘.
‘미친…….’
민경섭이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언제든지 구비하고 다녔으나, 방송국 외에는 쓸 데가 없던 물건.
그가 명함을 꺼냈다.
* * *
“오, 마리아는 5번이네?”
김마리아의 팬사인회 차례는 다섯 번째였다. 팬사인회에서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참여하기에, 뒷줄의 사람은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
그래서 아예 초반에 뽑히길 바라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마리아의 순서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 언니는요?”
“나는…… 짜잔!”
김채현이 표를 펼쳤다. 그러자 당당하게 인쇄된 ‘1’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첫 번째……!”
“응. 아, 좀 부담되네. 99명이 내 뒷모습 보고 있을 거 아냐. 맞다. 마리아는 뭐 물어볼지 생각해왔어?”
“네, 네…….”
보통 팬사인회에 처음 참석하면, 아니. 몇 번이나 참석해도 좋아하는 아이돌을 바로 앞에서 보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그래서 팬사인회 후기를 보면 횡설수설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혹시나 이상한 말이라도 하면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박차기 일쑤다.
“여기 포스트잇 빌려줄게. 앨범에 붙여두면 멤버들이 답을 써줄 거야.”
직접 물어보기 힘든 질문이나, 꼭 대답을 받아야겠단 질문은 포스트잇에 써두기도 한다.
김마리아는 포스트잇을 꼼꼼하게 앨범에 붙이고 무슨 질문을 쓸지 고민했다. 그리고 슬쩍 눈을 돌려 김채현은 무엇을 썼는지 관찰했다.
[하양 언니 때문에 제 인생 망할 거 같은데 어쩌면 좋죠? 책임져주시면 안 되나요? 제가 돈도 벌어오고 집안일도 다 할게요 제발.]
“…….”
김마리아는 평범하게 ‘취미가 뭐예요?’를 적었다.
“다 썼어?”
“네……. 저기, 언니 거기 쇼핑백에 뭐 가져오신 거예요?”
“이거? 소련이들한테 줄 선물이야. 이거 봐라?”
김채현이 알이 없는 안경을 꺼냈다.
“이거 하양이한테 씌울 거야! 하양이가 이거 써주면 꼭! 꼭! 꼭! 사진 찍어줘! 알겠지?”
“네, 넵!”
김마리아는 오빠에게서 빌려온 스마트폰을 꼭 쥐었다. 그녀도 안경을 쓴 장하양은 꼭 보고팠다.
“시작하겠습니다!”
매니저들의 외침과 함께 경호 인력도 소녀연맹의 곁에 붙었다.
“갔다 올게!”
김채현은 사인을 받는 첫 번째 팬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무대 위로 올라가 첫 차례인 리카의 앞에 앉았다.
“아앗! 또 오셨네요!”
“리카 언니 저 기억하세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으면서 꺅꺅 새된 소리를 질러댔다.
“네네! 저번 팬미팅이랑 저희 데뷔하기 전에 버스킹에 와서 쿠키 주셨던 분!”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그리구 또 선물 가져왔어요!”
김채현이 쇼핑백에서 강아지 귀 머리띠를 꺼내 리카에게 주었다. 리카는 즐겁게 머리띠를 받아서 머리에 썼다. 그리고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소 지었다.
“어떤가요!”
“꺄아아아악 너무 귀여워!”
“아타시(저)는 안 귀여워요! 예쁘다구요!”
“너무 귀여워어어어어!”
“카와이(귀여워) 금지!”
“저, 리카 씨. 사인하셔야죠.”
“……아앗!”
매니저 안이상의 지시 덕분에 리카는 뒤늦게 본분을 떠올리고 펜을 들었다.
“헤헤, 죄송해요.”
“잠깐만요!”
“하이(네)?”
“한자로 적어주세요!”
“앗, 마카세테구다사이(맡겨주세요)! 이시, 카와, 리, 카!”
벌써 첫 차례인데도 팬들의 자리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다들 리카의 귀여움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그건 김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팬사인회가 이런 거구나.’
직접 동경하던 아이돌과 만나서, 마치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받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김마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곤 주먹을 쥐었다. 분명 무대에서 진행되는 대화를 들으면 긴 것 같은데, 자신의 차례가 찾아오는 건 너무도 빨랐다.
“올라가실게요.”
김마리아는 겨우 세 칸의 계단도 벌벌 떨면서 올라갔다. 그리고 쭈뼛쭈뼛 걸어서, 소녀연맹 중 첫 차례인 리카의 앞으로 왔다.
리카의 앞에서, 계속 서 있었다.
“……앉으세요!”
“아, 아, 네, 으, 네!”
김마리아는 선생님에게 호통이라도 들은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노(저기), 앨범.”
“아, 아아, 아, 네……!”
김마리아는 보물처럼 품에 안고 있던 앨범을 리카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리카는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팬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귀여움을 마음껏 발산했다.
“몇 살인가요! 아니, 아타시(제)가 맞춰볼게요! 으음, 12살! 맞나요? 맞죠?”
김마리아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에?”
울었다.
“에엑?!”
소녀연맹 최초 업적.
팬을 면전에서 울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