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67화 (267/760)

267화

“응, 용서.”

유선영은 습관처럼 벤 미소를 짓곤, 들어와도 괜찮은지 물어보듯 바닥을 보았다. 그러자 문 앞에 선 성필과 민경섭이 길을 비켜주었다.

“감사합니다.”

유선영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백설하가 허락을 구하듯 성필을 보았다.

“선영 씨. 저도 같이 들어도 될까요?”

“아…… 매니저신가요?”

“박성필 이사입니다.”

“아, 네, 이사님. 그러세요.”

백설하, 유선영, 성필은 응접실로 향했다.

‘용서받으러 왔다고? 왜 강수원 본인이 아니라 선영 씨가 대신 왔지?’

유선영에게 백설하는 기타 강의를 받는 고객이다. 푼돈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유선영의 생계에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강수원은 가만히 있는데, 선영 씨가 얘기만 듣고 고객을 놓치기 싫어서 다짜고짜 찾아온 거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백설하는 유선영의 이야기만 듣고 강수원과의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성필이 직접 둘의 대화를 들어야만 한다.

응접실에 자리한 뒤, 성필이 음료가 필요하냐고 물었으나 유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선영 씨. 죄송한데 이 방에서의 대화, 녹음해도 될까요?”

“아…… 네. 와, 신기하네요. 진짜 기획사 같아.”

성필은 테이블 위에 자신의 핸드폰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선영은 부드러운 눈빛을 백설하에게 맞추었다.

“설하야,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 미안하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음 스케줄은 언제야?”

“네?”

유선영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뛰어오기라도 한 듯 숨이 살짝 거칠었었다. 또한 회사로 들어오고 나서도 초조한 티를 감추지 못했었다.

‘사과하러 온 거라서 약간 떨고 있나 했더니.’

성필은 방금 그녀의 말로 짐작할 수 있었다.

유선영은 백설하가 휴가를 받았단 것을 모른다. 백설하는 앨범 활동 기간을 제외한 모든 시기에 착실히 강의를 받으러 갔고, 그건 휴가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 저 지금 휴식기라서 스케줄 없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

유선영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백설하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냈다.

“그으, 그러네요. 말씀드린 적이 없네요. 그래서…….”

그래서, 백설하의 스케줄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시간을 조정하지 않고 대타를 구했던 것일까.

유선영은 그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사과하러 와서 본인의 처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일만큼 추한 것도 없으니까.

“수원이한테 얘기 들었어. 그거 듣고 바로 온 건데, 설하 네가 생각하는 거랑 수원이가 말한 거랑 다를 수도 있잖아. 일단 내가 들은 것부터 말해줄게.”

백설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강수원이 유선영에게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강수원 본인의 발언을 살짝 부드럽게 바꾸었을 뿐, 사건의 전개는 모두 들어맞았다. 즉, 강수원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한다는 뜻이었다.

“직접 사과하러 가라니까 그건 죽어도 싫대. 원체 그런 성격이라 하지만 언젠간 먼저 사과하러 올 거야. 그래도 일단은…….”

유선영이 고개를 숙일 뉘앙스를 보이자 백설하가 기겁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언니가 왜요! 괜찮아요 안 하셔도 돼요!”

“아니야, 받아줘.”

그러고서 유선영은 기어코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백설하는 잘못도 하지 않은 그녀가 사과하는 것을 버티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선영과 강수원은 비슷한 모양의 타투를 팔에 새겼다. 커플 타투이거나, 같은 지향점을 목표로 하자는 뜻에서 새긴 상징일 것이다.

그만한 사이이니, 유선영은 강수원의 잘못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있을 터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 유선영이 말투를 살짝 부드럽게 풀었다.

“설하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너는 나한테 소중한 동생이거든. 일주일에 한 번 기타 배우러 오는 강습생이 아니라.”

“가, 감사합니다…….”

“기타도 열심히 배우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예쁘기까지 하잖아.”

“아, 하하, 하…….”

“솔직히 존경해.”

백설하는 눈동자를 한 군데 고정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자꾸만 천장이나 바닥으로 시선을 옮겨야만 했다.

“널 보면 내가 부끄러워지고 그래. 너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난 뭘 하나 싶어서.”

“저, 저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겸손하기까지.”

“…….”

유선영이 백설하를 존경한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백설하를 우러러보았다.

처음에는 ‘기타를 배우러 오는 특이한 아이돌’ 정도의 인식이었다. 아마 몇 달 지나지 않아서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잘은 몰라도 아이돌은 바쁠 테니까. 과제를 내주고 성실히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기타를 배우는 일반인들도 성실한 경우가 드물었다.

“보통 기타를 배운다고 하면, 그다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적거든. 멋져 보이는 취미란 이유로 시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그런 사람은 쉽게 포기해. 본업이 있는 아이돌이라면 더하겠지. 춤이나 노래 연습하기도 바쁠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백설하는 아니었다.

그녀는 성실했고, 성실함을 넘어 주어진 과제 이상의 성취도를 보였다.

유선영은 그런 백설하를 보면서 느꼈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는구나’하고.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난 뮤지션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으면서도, 너만큼 노력하질 않은 거 같아. 존경해, 정말.”

유선영은 담담하게 백설하 찬양을 늘어놓다가 성필을 힐끔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자꾸만 움찔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존경하는 설하한테 하는 말인데.”

유선영은 다시 백설하를 보았다.

똑바로 마주 보고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수원이 걔가 사과하러 오면, 사과는 안 받아줘도 되니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사과하러 오면요?”

“응. 변명할 생각은 아니지만, 같이 밴드하는 입장으로 봐서도 화가 많은 애야.”

“잠시만요 선영 씨.”

성필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웬만해선 두 사람의 대화를 그대로 놓아주고 싶지만, 방금 타이밍에서 물어봐야만 하는 게 있다.

“수원 씨는 사과하러 오실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러니까…….”

“자기가 잘못한 건 알아요.”

“그렇지만 직접 사과하러 오진 못한다?”

“네. 하하, 제가 다 부끄럽네요.”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알지만 사과하고 싶지는 않다.

그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지만, 성필이 바라는 답은 아니다.

유선영이 처음 찾아왔을 때 성필이 걱정하던 것처럼, 결국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매니저님이…… 아니, 이사님이 걱정하시는 건 수원이가 이 일을 알리는 거죠? 제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수원이는 안 그럴 거예요.”

“……이런 말씀 드리는 건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말씀하세요. 직설적이어도 돼요. 제가 여기 온 거 자체가 용서를 구하려는 이유니까요.”

“물론 수원 씨가 그러지 않으리란 걸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분은 아이돌을 어지간히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강의 대타를 와서 설하한테…….”

강수원은 백설하를 무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기회가 오자 아이돌에 관한 온갖 모욕을 퍼부었었다.

그런 이를 ‘걔는 안 그럴 거예요’란 말 한마디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저도 걔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그리고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는데.”

유선영이 어깨를 과장되게 폈다.

“‘가오’요. 이 나이 먹고 부끄러운데 걔는 가오 빠지는 일은 안 해요. 자기가 당한 일 억울하다면서 SNS에 토로하거나 그런 건 절대요.”

“죄송합니다만, 선영 씨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듭니다.”

“혹시 수원이한테 사과하려고 하셨어요?”

그 물음에 성필과 백설하가 흠칫했다.

“이사님이 뉘앙스가 좀 그런 거 같아서. 물론 걔는 설하가 사과하러 오면 쭈뼛거리면서 받아들이고 ‘저도 잘못했어요’라고 말할 거예요. 일은 그대로 끝나겠죠. 그런데, 그래도 돼?”

유선영이 백설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설하야.”

“……네?”

“왜 사과하려는지는 알아.”

아주 작은 소란이라도 아이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그 위험을 없애기 위해 먼저 욕을 먹었더라도 사과해야만 한다. 백설하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꼭 사과할 필요는 없어. 설하야, 넌 화를 낼 입장이지 어깨 움츠러뜨리고 사과나 구걸할 처지가 아니야.”

“…….”

“너한텐 화낼 자격이 있어. 그런데 네 자존심 꺾어가면서까지 수원이한테 사과하고 싶어?”

백설하는 흥분으로 붉어진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저, 저는…….”

강수원 같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사과하려는 이유는 회사와 멤버들 때문이지, 진심으로 강수원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설하야 사과하지 말자.”

“네?!”

백설하는 화들짝 놀랐다. 방금 말을 한 게 유선영이 아니라 성필이었기에.

“하, 하, 하지, 하지만, 바, 박 이사님은…….”

“경섭이랑 너랑 같이 봤을 때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잖아. 거기서 네가 사과하겠다고 했고. 그런데 이제 마음이 바뀐 거지?”

“…….”

바뀐 게 아니다.

처음부터, 할 수만 있다면 강수원에게 고개 숙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자신이 지닌 직업에 대해 칼날 같은 비난을 맞았는데 왜 먼저 사과하고 싶겠는가?

“정말로…….”

“응.”

“제가 잘못한 거…… 아닌가요? 사과 안 해도 될까요?”

“그래 화낼 때는 화내도 돼.”

“이사님.”

유선영이 의외란 투로 그를 불렀다.

“제 말 믿기로 하셨어요?”

“아뇨. 설하를 존중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필 자신의 능력도.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건 아니니까요. 아까 수원 씨가 본인의 잘못을 알고, 언젠가 사과하러 온다고 했는데. 어떤 근거가 있나요?”

“3일.”

“3일…… 이요?”

“3일 이내에 올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그 시간이 지나고, 이사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수원이가 SNS에 이상한 글을 올렸다고 하면. 제가 수원이 주변인으로 설하를 옹호할게요. 애초에…….”

유선영이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성필의 핸드폰을 곁눈질했다.

“이만큼 녹음이 됐으면, 수원이가 글을 올려도 바로 반박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만약 일이 터졌을 때 선영 씨가 도와준다고 하면 더 빠르게 처리될 수 있겠죠.”

“……그럼 이 얘기는 끝?”

“3일 이내로 알고 있겠습니다. 먼 걸음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왜 제가 갈 것처럼 말하세요.”

“아.”

성필은 무심코 유선영을 클라이언트처럼 대해버렸다.

원래 유선영은 백설하를 보러 온 건데도 말이다.

“설하 걔랑 괜히 말싸움하느라고 기운 다 빠졌겠다.”

백설하는 실시간으로 기운이 빠지는 중이었다.

2시간 전만 해도 분노로 치를 떨었고, 1시간 전에는 불안감에 몸이 떨렸고, 지금은 온몸에 체력이 남아 있지 않은 기분이다.

고작 몇 시간 동안 감정의 낙폭이 너무나도 컸다.

“아까도 했지만, 내가 대신 사과할게.”

유선영은 백설하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녀의 손가락들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받는 사람 마음이지만, 수원이가 사과하러 오면 너무 몰아붙이진 말아줘. 걔 또 지랄할 수도 있어.”

“……언니.”

“응.”

“그거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그분이 왜 저를 그렇게 무시했고 아이돌을 싫어하는지요.”

유선영이 쓰게 웃었다. 꼭 그걸 들어야겠냐는 마음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미소였지만, 백설하의 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니가 대타 맡기실 정도면, 믿으신 거잖아요.”

그런데 돌아온 결과는 참담했다.

강수원은 유선영에게 폐를 끼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어째서…….”

“‘아이돌이 너바나 곡을 연습’했으니까.”

“……네?”

“너한테 무례하게 대한 건 그게 이유야. 걔한테 너바나는 진짜 우상이거든. 참을 수가 없던 거지.”

백설하도 참을 수가 없을 듯했다.

“아, 아이돌이, 너바나 곡을 연습한다고, 그, 그렇게 화를 냈다고요?”

“걔 정신상태 이해해도, 설하한텐 도움 될 게 없을…….”

“들을래요.”

“좀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

“말해주세요.”

백설하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아이돌을 싫어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부모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들, 그리고 강수원.

분노만 하기보다는, 최소한 그들의 심리를 이해라도 하고 싶었다.

“이 시기 한국에서 록을 하고 있으니까.”

유선영이 깔끔하게 해답을 내렸다. 하지만 백설하로선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라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걔는 이 상황을 참을 수가 없는 거야. 속에 항상 화를 쌓아두고 있어. 하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말야. 한국은 아이돌이랑 팝이 메인스트림이고, 장르 음악은 황무지나 다름없잖아.”

록이 세계적으로 광풍을 일으키던 때, 한국에선 군사독재가 이뤄지고 있었다.

저항과 투쟁의 상징인 록을 독재정권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음지에서 근근이 영위되던 록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라며 탄압을 받았다.

“한국은 중국과 비슷하지. 세계적인 록의 전성기에 록을 누릴 수가 없었으니까. 일본과 비교하면 초라하기까지 해.”

그렇기에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록이 향유되던 건 90년대였다.

한국의 록은 뒤늦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홍대의 록씬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못했음에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뒤늦은 전성기이자, 너무도 짧은 전성기였다.

한국 대중음악의 메인스트림은 아이돌과 솔로 팝 아티스트가 차지하게 됐다.

“수원이는 자기가 겪지도 못한 황금기의 향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야.”

유선영은 마치 자신의 손에 기타가 있기라도 한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놀림에는 애환이 묻어 있었다.

“우리의 황금기가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 우리 세대 이후의 록커들도, 정작 황금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황금기의 향수로만 살아가야 할 거야. 지금의 우리처럼. 불쌍하지. 걔네도.”

수원이도.

유선영이 손을 꼼지락거리길 멈추고 활짝 웃었다.

“설하 네가 그랬다면서. 수원이는 백인이 아니니까 록스타가 못 될 거라고. 또 일본에 태어나지도 못했으니까 성공할 수도 없을 거라고. 맞는 말이야. 최후의 록스타도 30년이나 전 사람이잖아. 록씬은 그런 꼴이니까 나랑 수원이가, 한국의 모든 록커가 록스타가 될 일 따위 수십 년 동안, 어쩌면 영원히 없겠지.”

씁쓸하게 끝나는 유선영의 말에, 백설하는 입술을 꽉 문 채 애처로이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떨림을 한 번에 내뱉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선영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짐짓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걔는 그러니까…… 네가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습한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걸. 안 그래도 빛나는 무대에 있으면서 우리 걸 도둑질한다. 이해가 안 되지? 나도…….”

기어코 백설하가 미약한 흐느낌을 새어 보냈다.

유선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 이거,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설하 너 말 잘한다고……. 아니, 농담이었어. 미안.”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난 채 과거의 향수를 쫓는 예술가.

그녀를 바라보는 성필 또한 백설하처럼 슬픔에 잠겼다. 백설하와 같이 대놓고 눈물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유선영을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번에 150석이나 찼어. 큰맘 먹고 큰 곳 빌려서 100석도 안 차면 어쩌나 싶었는데.”

인디 밴드 ‘너티백’의 드러머가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이목을 모으려는 시도는, 안타깝게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도 좀 풀리려나 보다. 야야, 선영아. 이거 봐. 150석이나 찼다니까?”

“응.”

“…….”

그래, 유선영은 이럴 수 있다. 밴드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차분한 성격이니까.

드러머는 타깃을 강수원으로 변경했다. 그의 옆에 착 붙어서 핸드폰에 떠오른 티켓 예매 화면을 얼굴에 들이밀 듯이 했다.

“150석!”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해.”

드러머는 속으로 ‘시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수원이랑 선영이 이 새끼들, 얼마나 크게 싸운 거야?’

홍대 인디씬에서 발악하던 몇 년은 강수원에게도 유선영에게도, 그리고 그들이 속한 밴드에게도 힘든 나날이었다.

그들의 첫 공연에 찾아와 준 사람들은 고작 6명이었다. 그것에 절망하던 일도 잠시, 그들은 꾸준하게 지명도와 팬을 늘려왔다.

그 몇 년의 성과가 이번 공연을 채운 150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성과를 보고도 냉전만 하고 있다니!

‘얘네 헤어져서 우리 해체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겠지……?’

‘너티백’의 멤버들은 아르바이트와 인디 밴드를 병행하면서 생활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미래가 없는 나날이지만 이 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꿈이라는 말이 그들을 비춰주고 있으니까.

비록 남들처럼 견실한 미래를 그리진 못하지만, 현재를 빛내는 것에 만족한다. 음악이란 꿈은 미래에 대한 고민마저 지워버릴 정도로 찬란하니까.

그런데 그 찬란함이 연인의 불화로 깨져버린다니, 상상도 하기 싫다.

“하아, 너희들 그만 좀 화해하면 안 되냐? 벌써 3일째야! 3일째 그렇게 말 안 하고 살기도 힘들겠다! 선영아 네가…….”

유선영이 드러머를 향해 싸늘히 눈을 희번덕거렸다.

“오케이. 난 바람 좀 쐬고 올게.”

그가 꼬리를 말고 합주실에서 나가자, 방 안은 2월의 추위보다도 더욱 서늘해졌다.

강수원과 유선영 중 한 명이 자리를 뜨지 않는 이상 이 끔찍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물론 둘이 이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특히 강수원이.

‘선영이 얘 언제까지 이럴 건지…….’

그래, 자신이 잘못하긴 했다.

순간의 화를 못 참은 것도 인정한다.

언젠가, 언제인지를 모르겠지만, 백설하에게 사과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건 너무하잖아. 화내는 것도 아니고 무시라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남자친구인데, 기타 강습생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게 영 마음에 안 든다.

그렇지만 강수원은 그런 불만을 감히 유선영에게 표출할 수 없었다.

유선영이 이토록 화냈던 적이 없었고, 괜히 자존심만 세웠다간 정말 헤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불상사만은 피해야 한다.

그녀가 곁을 떠나면, 강수원은 음악을 계속해 나갈 용기가 없어질 테니까.

‘그래, 사과하자. 내가 먼저 사과하는 거야. 일단 선영이한테…….’

“수원아.”

“어?!”

강수원은 허벅지 위에 받치고 있던 기타를 떨어뜨릴 뻔할 정도로 기겁했다.

무려 3일 만에 들어본 유선영의 목소리인 것이다.

혹시 화해 분위기인가?

강수원은 희망과 기쁨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앉았다.

“백설하, 기억해?”

하지만 이어진 유선영의 말로, 강수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하가 속한 그룹이 이번에 영상을 하나 올렸거든. 너바나 곡으로.”

“‘Smells like teen spirit’?”

“어. 한 번 봐.”

“내가…….”

평소였으면 ‘내가 그걸 왜 보는데’라며 쏘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특별하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한숨을 뱉으면서도,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받았다.

아이튜브일 줄 알았는데, 유선영이 보여준 건 SNS인 스타그래프에 올라온 글이었다.

[Rest In Peace Kurt Donald Cobain]

RIP 커트 도널드 코베인.

밴드 너바나의 프론트맨으로, 90세기를 상징하는 록스타이며 최후의 록스타라고도 불린다.

백설하의 개인 SNS 계정에 올라온 글은 그를 추모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록은 음악사에 길이 남은 장르이며 한 세기를 뒤덮은 문화의 정점입니다. 현재에도 많은 아티스트분들이 록이란 자리를 빛내주고 계십니다. 록이 쌓은 문화의 탑은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모든 뮤지션은 록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존경을 담아 불렀습니다.

Smells like teen spirit.]

강수원은 그 글을 읽고 잠시 말을 잃었다. 아이돌이, 아니. 대중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이런 글을 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뮤지션에 대해 개인적인 호오(好惡)를 드러내는 건 위험 부담이 있다.

강수원조차도 백설하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괜찮은 건가 이거?’

커트 코베인은 말년에 마약에 중독되었었다. 게다가 한때 양성애자였으며 낙태 찬성론자이기도 하다.

공인 취급을 받는 한국의 연예인이 ‘커트 코베인을 존경한다’라고 하면, 그의 행적을 들먹이면서 욕하는 인간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지금 마약과 동성애, 낙태를 옹호하는 거냐면서 말이다. 물론 논리적인 비약이지만, 그런 비약으로도 욕을 먹을 수 있는 게 연예인이다.

심지어 아이돌은 더할 것이다. 아이돌은 본인의 신념이나 의견을 피력하는 것만으로도 욕을 먹으니까.

그는 홀린 듯이 영상을 재생했다.

3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강수원은 차분하게 소녀연맹의 연주를 들었다.

모자란 부분이 많다.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드럼, 조아라의 실력은 밴드맨인 강수원이 보기에 형편없었다.

그나마 베이스는 반복 리프가 많아서 그럭저럭 보아줄 수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실력이 모자라다. 하지만 신아름의 일렉 기타는 수준이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설하의 보컬이.

‘대단해.’

후렴구, 2옥타브 중반부터 3옥타브 초반을 반복해서 오가는 파트.

그것을 백설하는 무리 없이 소화한다. 심지어 밴드의 보컬리스트가 사용하는 금속성의 긁히는 듯한 보컬마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록의 보컬은 그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며, 강수원도 그러한 기교를 얻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그런데 어떻게 백설하가…….’

아이돌이…….

아이돌이,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커버한다. 팬들에게 아양을 떤단 수준이 아니라, 그들 모두 진심으로 임한다는 게 느껴진다.

백설하의 보컬이 그것을 증명했다.

피가 나는 연습 없이는 웃음거리가 되기 좋은 곡이다. 그렇기에 백설하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피가 나도록 연습했을 것이다.

“어때?”

강수원은 대답하지 않고 글의 댓글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댓글이 ‘RIP’란 글과 함께 합장하는 이모티콘을 붙였다.

외국인들이다.

‘Smells like teen spirit’이란 곡과 너바나란 밴드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이 댓글의 행렬을 보면서 강수원은 말 못 할 황홀함을 느꼈다. 과거의 록스타가 현대로 소환되어 다시 찬양받는 것을 보는 듯, 록의 황금기를 그림자나마 보는 것만 같았다.

“……잘, 하네.”

백설하, 아이돌이 이 곡을 커버한단 소리를 들었을 때, 강수원은 짙은 분노를 느꼈었다.

록의 인기가 식고 몰락의 길을 걷던 시절, 너바나는 이 곡 하나로 록을 부활시켰다. 그로써 너바나는 얼터너티브 록의 시조로서 추앙받았다.

‘Smells like teen spirit’은 마이클 잭슨마저 제쳐버리고 빌보드 차트 1위를 3주 동안 점령했다. 무려 록의 쇠락기에 말이다.

그렇게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는 영원토록 불멸할 록의 아이콘이 되었다.

강수원에게 이 곡과 그에 얽힌 역사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모든 뮤지션은 록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다, 라고?’

그럼 아이돌도 록의 어깨 위에 오른 것일까.

그렇다면 록이 재즈 밴드의 어깨를 타고 올랐던 것처럼, 모든 음악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나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백설하의 글에 흰색으로 비어 있던 하트가 붉게 차올랐다.

“뭐야. ‘like’ 눌러주는 거야?”

“어차피 네 폰이잖아.”

“좋았나 보네.”

“그냥저냥 들어줄 만했어. ……그리고 좋은 일이잖아. 어떤 식으로든 록이 주목받으면. 한 명이라도 더 홍대로 올지도 모르고.”

강수원은 기타를 내버려 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바람 쐬러.”

그 간단한 답에, 유선영은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강수원은 무미건조하게 터덜터덜 합주실을 빠져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10초 동안 고민하는 듯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리고 빙글 돌아 유선영의 앞으로 왔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음에도,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뭐 두고 갔어?”

“……거기, 백설하가 있는 회사 이름이 뭐지?”

그는 인정을 바라고 있었다. 록의 진가를 몰라주는 대중에게 분노하고, 미디어에 분노하고, 시대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아이돌이더라도 세간의 진실된 인정을 받고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록을 적극적으로 소비하진 않더라도, 록의 가치를 알고 있기를 바랐다.

지나간 시대의 망령으로 취급하지 않고 존중해주길, 그는 이 간단한 것을 바라왔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 쌓인 수년간의 분노가 옅어져 갔다.

* * *

응접실 안.

성필은 한 시도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강수원을 보고, 정말 놀랍게도 동정심이 들었다.

‘나이가 20대 후반이라고 했었나?’

사과 한 번에도 이토록 많은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어쩌면 사과한 경험 자체가 적은 게 아닐까.

‘선영 씨가 이 사람은 가오에 산다고 했었는데…… 진짜 그런 거 같네.’

여태껏 주변과 얼마나 잘 섞이지 못한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너바나를 좋아한다니, ‘너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랑받을 바엔 본연의 모습으로 미움받는 게 낫다’란 커트 코베인의 명언을 실천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 그으, 그래서…….”

강수원은 10분 넘게 펼쳐진 횡설수설을 관두고, 무릎 위에 꽉 쥔 주먹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의지를 다잡듯이 점점 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설하는 이미 있는 어이 없는 어이 다 털린 듯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랑 진심으로 말싸움했던 거야?’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뜸만 들이던 그, 강수원이 마침내 말했다.

“미안해요, 설하 씨…….”

“…….”

거기서 더 이어지는 말이 있나 기다려 보았지만, 강수원은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그래.’

백설하는 자신의 나이(24세)를 되새기면서 어른스러움을 가다듬었다.

유선영이 그가 찾아와 사과해도 몰아붙이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까닭도 있지만, 그의 태도를 보니 무어라 더 말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어른은 아이와 진심으로 논쟁하지 않으니까.

“저도 심한 말 해서 죄송해요.”

“……네. 저도요.”

강수원은 그제야 후련해진 듯 굽었던 등을 폈다. 그리고 대화를 끝낼 타이밍을 고민하는 듯 종이컵을 손으로 자꾸만 구겨댔다.

그 틈을 보고 백설하가 물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네? 네, 괜찮아요.”

“왜 갑자기 사과하러 오신 거예요?”

“……설하 씨가 ‘Smells like teen spirit’ 커버하신 거 봤어요.”

“…….”

또, 끝?

대화가 이어지지를 않는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감명을 받았다거나, 록커로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런 이유가 있겠지.

그럼 다음으로 묻고 싶은 건 이제 하나뿐이다.

“저 잘 불렀나요?”

“네.”

이 답만큼은 매우 빨랐다.

무려 현직 록커로부터 받은 인정이다.

백설하는 대화의 끝을 선언하듯 미소를 지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직접 와주셔서 감사해요.”

강수원은 머뭇거리면서도 그녀의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부드럽기만 할 줄 알았던 백설하의 손에서 굳은살이 느껴지자 놀랐다.

백설하의 손끝은 숙련된 기타리스트처럼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웬만큼 기타를 배워서는 이 정도로 변하지 않을 텐데…….

이런 말 아이돌인 제가 전하는 게 여전히 마음에 안 드실지도 모르지만,

“응원할게요.”

백설하가 말했다.

진심이 담긴 응원을 받고, 강수원은 홀린 듯이 말했다.

“네, 저도, 응원할게요.”

여태껏 그에게 아이돌이란 한국 음악계의 저열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그 아이돌에게, 강수원은 백설하와 같이 진심이 담긴 응원을 전했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힘내요. 아이돌로서, 록커로서요.”

아까보다 내려간 목소리에 강수원이 의아해하는 것과 동시에, 백설하가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럼…….”

백설하는 항상 타인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을 피해왔다. 그래서 욕을 먹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웃으면서 끝냈다.

싫은 상대라도 비굴하게 웃어주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이전의 것과 달리 후련함을 담고 있었다.

어른이니까 참아야 하는 게 아니다. 어른이라서 할 말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강수원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라며 적당하게 화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안녕히 가세요.”

백설하는 무조건적으로 타인의 호의만을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는 마주치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 * *

“그럼 다, 다녀올게요!”

백설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허겁지겁 성필의 차를 뛰쳐나갔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그녀의 본가였다.

‘설하가 얘기를 잘 끝내면 좋을 텐데.’

강수원과의 일이 있고 난 후, 백설하는 부모님과 쌓인 감정을 풀고 싶다면서 본가로 데려다주길 요청했다.

성필은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아무래도 옛날이 떠올라 그녀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소녀연맹이 된 후 처음으로 본가에 갔던 백설하는 눈물범벅이 되어서 나왔으니까.

‘30분이나, 어쩌면 1시간 정도 걸리려…….’

3분 만에 백설하가 나왔다.

‘왜?!’

설마,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고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집을 탈출한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 백설하의 표정은…….

“하아, 하아, 하악!”

백설하는 조수석에 들어오자마자 거친 숨을 가득 뱉어냈다. 그리고 겨울 눈을 본 어린아이처럼 상기되어 목소리에 기쁨을 가득 넣어 말했다.

“마, 말씀드렸어요! 부모님한테요!”

“다, 다행이네. 부모님이 뭐라셔?”

“몰라요!”

“……?”

“저, 저는 아이돌인 게 자랑스럽고. 그만두지도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바로 도망쳐 나온 건가?

백설하답다면 백설하다운 행동이다.

하지만 아예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백설하는 부모님이 아이돌을 깎아내릴 때마다 그럴듯한 반박 한 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젠 부모님의 앞에서 ‘아이돌인 게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빨리, 이사님 빨리 가요!”

백설하는 수박 서리를 하다 걸려서 도망가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외쳤다. 덩달아 성필도 급히 엑셀을 밟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계속 피식거리면서 웃다가,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묘한 눈동자로 성필을 응시했다.

“저, 에리카 있잖아요.”

“……갑자기?”

설마, 리카가 KS 엔터에 갔던 때의 일을 백설하에게 일러바친 것일까?

무려 1시간 동안 에리카의 노래를 들었다고?

큰일이다.

“저 사실, 에리카를 떠올릴 때마다 계속 답답했거든요.”

“어, 그래?”

“저희가 자주 라이벌이라고 했잖아요.”

백설하가 수줍게 미소를 띠었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케이어스를 이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라이벌이라고 할 때마다 저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아직도 그래?”

“네. 에리카는 대단하잖아요. 아직도…….”

에리카와 비교하면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다. 에리카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은 인간이니까.

“설하야, 너도 대단해.”

“가슴이요?”

“……?!”

“헤헤, 얼굴 빨개지셨다.”

백설하가 자신의 몸을 농담거리로 쓴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서도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젠 에리카가 있단 게 기뻐요.”

백설하는 유선영의 이야기를 듣고 다짐했다.

이때를 즐기자. 아이돌의 전성기를 마음껏 즐기자.

“케이어스한테 자격지심 가지는 건 관두고 그냥 기뻐하게요. 기쁜 일이잖아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같은 공간과 세대에서 노래할 수 있단 건 얼마나 큰 축복일까.

언젠가 아이돌 문화도 쇠락하는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5년 뒤, 혹은 10년 뒷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 아이돌의 전성기를 살아간다는 건, 비록 역사에 남지 못하더라도…….

“행복한 일이에요. 이 시대에 태어난 건요.”

담담한 자기 고백.

그녀를 바라보는 성필의 눈동자에는 빛이 찍혔다. 거리의 불빛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필은 백설하에게서 시대의 광채를, 빛나는 아티스트의 마음가짐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담담함에서 나와, 나이 어린 패기보다 더욱 농염한 빛을 띠었다.

“이 시대에 태어나서 에리카를 볼 수 있고, 또…….”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백설하가 살짝 부끄러운 낯빛을 보였다.

“우리 멤버들이랑, 박 이사님도 만날 수 있었구요.”

“설하…….”

“아, 눈이다.”

성필 너머의 차창을 바라보던 백설하가 불현듯 외쳤다.

한두 개 흩날리기만 하던 눈은, 어느새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얀 커튼이 밤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오늘이 지나면 거리가 흰 융단으로 덮일지도 모른다.

“예쁘다.”

백설하는 창문을 살짝 열어 눈을 몇 개 얼굴에 맞았다. 하지만 머리칼이 바람에 헤집어지고는 바로 창을 닫았다.

어지러운 머리칼을 정돈하면서, 백설하는 순수하게 웃었다. 그런 백설하를 바라보는 성필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설하야.”

“네?”

“난 눈이 좋아.”

“저도요. 좋을 이유는 없는데 좋더라구요. 어렸을 때로 돌아간 거 같기도 하구요.”

“난 이유가 있어.”

“어떤 건데요?”

“설하 이름에 눈이 들어가 있으니까.”

백설하는 눈을 크게 떴다가, 놀리지 말란 듯이 옅게 웃었다.

“그런 이유로 좋아한다구요?”

“응. 아마 죽을 때까지 눈을 보면 네가 떠오를 거 같아.”

답이 없었다.

답할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죽을 때까지 눈을 보면 네가 떠오를 거다’란 말을 들으면, 어떤 맥락이더라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설하는 코트에 깊숙이 손을 넣고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성필에게 넋 나간 목소리로 대답해주어서 놀림감이 되고픈 생각은 없었다.

“……박 이사님.”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백설하는, 진정했는데도 살짝 떨려오는 목소리로 성필을 불렀다.

“저기, 저번에, 말씀하셨잖아요.”

“뭐가?”

“그게, 여, 여행이요…….”

“아, 그거?”

“저, 저는, 좋아요.”

백설하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더욱 깊숙이 박았다. 그리고 앞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옆에서 답이 들려오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눈들이 흔들렸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시야가 긴장으로 흔들려서인지.

“나도 좋아.”

움찔.

백설하가 용기를 내어 옆을 보았다. 하지만 성필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일본 데뷔 끝난 가을에 회사 사람들끼리 야유회 가는 거 어때?”

“…….”

백설하가 뾰로통하게 바닥을 신발 끝으로 긁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예상했어!’

그러니까 실망하지 않는다.

실망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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