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66화 (266/760)

266화

“설하 씨.”

벌써 5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백설하를 데리러, 매니저 안이상이 건물로 들어왔다.

그는 성필을 보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기타 강습이라 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로드 매니저로서 이사를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기분이 절로 전해지는 위축된 태도였다.

“설하야, 잘 다녀와.”

“아, 네…….”

방금 성필이 던진 ‘우리 여행 갈까’란 제안으로 아직도 머리가 뒤죽박죽이지만, 백설하는 관성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렉 기타 강의를 받는 밴드 합주실로 가기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성필의 제안을 곱씹었다.

“설하 씨.”

“네, 네?”

“다 왔어요. 근데 어디 아프세요?”

“아뇨, 아뇨, 안 아파요.”

백설하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속내가 들킬까 봐 일부러 빨리 차에서 내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 항상 그녀의 아티스트적 허세를 충족시켜주던 일렉 기타 무게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탁구공처럼 어지럽게 튀는 정신을 바로 잡은 건 합주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어?”

합주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유선영이 아니라 어느 남자였다.

남자가 있어서 당황한 게 아니었다. 유선영이 일이 있어 대타로 남자 기타리스트가 온단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왔어요?”

브레멘 음악대가 막 결성됐을 무렵, 백설하가 아이돌이라면서 무시하는 기색을 풍겼던 사람이다.

기타를 잡는 데 방해되지 않기 위함인지 겨울임에도 짧은 티를 입은 그의 팔엔, 유선영과 비슷한 모양의 타투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의 정체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안 앉아요?”

언뜻 짜증이 엿보이는 물음에 백설하의 다리는 갈팡질팡하면서도 착실히 그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앉던 자리, 유선영의 맞은편. 하지만 이제 백설하의 앞에 앉은 건 유선영이 아니라, 아이돌을 싫어하는 게 확실한 남자였다.

‘아이돌을 싫어한다고 하셨지…….’

백설하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일렉 기타를 케이스에서 꺼냈다. 그때 합주실의 문이 열리면서 안이상이 등장했다.

“매니저님?”

“오늘은 이사님이 안쪽에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안이상은 머쓱하게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자도 살짝 고개를 숙여 답해주었다.

‘박 이사님, 괜찮다면서 걱정하고 계셨구나.’

성필은 멤버들이 남자와 같은 공간에 둘만 있는 상황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다. 그런 걱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지시였다.

안이상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핸드폰에 집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강수원이에요. 오늘 하루만 맡게 됐어요.”

“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다행이라고 할까, 그는 예전처럼 대놓고 백설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안이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설하는 안심하고 기타를 허벅지 위에 두고 지판을 짚었다.

“저번 주에 선영이랑 연습하던 곡 끝났다고 하던데. 선영이가 정해준 곡으로 넘어가죠?”

“그게, 아뇨, 다른 곡을…….”

“원래 그렇게 말 더듬어요?”

“……네?”

마치 비꼬는 듯한 말투에 백설하는 넋이 나갔다. 잠시 울컥했지만, 말투나 맥락을 빼자면 그냥 질문이었다.

“아니요.”

“그래요. 그런 버릇 안 좋죠.”

백설하는 입술을 꾹 물면서 기타만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그와 안 맞는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 무슨 곡 하는데요.”

“……제가, 이번에 멤버들이랑 합주하기로 한 곡이 있어요.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요.”

연습곡의 명칭을 들은 강수원의 눈썹이 꿈틀댔다.

“중간에 일렉 기타가 두 개 필요한 파트가 있잖아요. 제가 세컨 기타라서 반주하고, 아름이가…… 그, 다른 멤버가 솔로로 들어갈 거예요. 그 부분 연습 도와주세요.”

“제가 도와줄 게 있을까요.”

“네?”

“‘Smells like teen spirit’은 쉬운 곡이잖아요.”

같은 말이라도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어법이 있다. 강수원은 그것을 아주 잘 구사했다.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이 사람의 신경을 아주 살살 긁어놓았다. 아마 그런 태도는 백설하를 무시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마추어 밴드나 학교 밴드부 같은 데서도 단골로 연습하는 곡이에요. 기타도 큰 기교가 필요 없고요. 정말 제가 도와줄 게 있어요?”

“…….”

꽉 다문 백설하의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옛날 같았으면 무서워서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렸겠지만, 그녀는 다른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참자.’

백설하는 화를 참았다.

그녀는 화낸다는 감정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화내지 않는 연습을 해왔고, 그러한 심적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 백설하는 부드러운 천성이 붙었다. 화를 내기보단 참거나 자신의 본심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참아.’

하지만 요즘 들어 그녀는 가슴 속에서 간질거리며 불이 붙는 분노를 자주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소녀연맹으로 활동하는 피로가 쌓여서인지, 혹은 소녀연맹을 향한 악플을 인터넷에서 보아왔던 까닭인지.

그녀는 남몰래 피어오르려는 분노를 무의식적으로 끄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고, 마찬가지로 능숙하게 분노의 불씨를 밟아 꺼버렸다.

“필요해요.”

“선영이랑 연습했던 곡 보니까 그 정도 수준은 아닌 거 같은데. 그냥 혼자서…….”

“단순히 커버하는 정도로는 안 돼요. 저희 채널에 올릴 거니까요. 깊이와 무게감이 있으면 좋겠어요.”

“깊이…….”

백설하의 단호한 요구에 강수원도 더는 태클 거는 것을 멈추었다. 대신 자신의 기타를 잡고 강의할 준비를 마쳤다.

“세컨 기타랬죠. 그럼 기타 두 개 같이 들어가는 부분부터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요. 제가 솔로 파트 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유선영은 자주 백설하의 손가락을 잡고 올바른 위치를 잡아주곤 했었다. 어깨의 위치나 자세도 직접 만져서 고쳐주었으나, 강수원은 그런 접촉 자체를 꺼렸다.

아이돌인 그녀를 배려해서?

“다시.”

아니다.

“다시.”

강수원은 단지.

“왜 못하지?”

아이돌을 싫어하는 것이다.

“하아, 이건…….”

강수원은 집요하게 백설하를 몰아붙였다. 완벽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 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프로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백설하를 괴롭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친절한 설명이 아니라 지적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목소리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뭐.”

혼잣말. 하지만 들으라고 하는 말.

그것에서 강수원의 마음이 다 묻어났다.

아이돌 주제에 기타를 배워봤자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 어차피 팬들에게 아양 떠는 용도지.

그런 주제에 ‘Smells like teen spirit’ 기타 연주에 깊이감을 더하고 싶다고? 오만하기 짝이 없네.

“다시 해봐요.”

깔보는 말투로, 강수원이 한숨을 쉬었다.

“다시…….”

빠드득. 백설하가 지판의 기타 줄을 손으로 꽉 잡았다. 그러자 금속의 실이 지판에 긁히면서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강수원도 말을 멈추고 백설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하게요?”

그는 기다렸단 것처럼 그리 말했다.

백설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치욕감에 일그러진 눈매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역류하려는 하수도를 억지로 막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담아 물었다.

“저기요……. 아이돌이, 제가 아이돌이란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제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태도가, 그쪽 태도가…… 그렇게 싫으세요? 제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아이돌이, 그렇게나, 싫어요?”

강수원은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였다. 그러나 눈동자 안에서는 활발하게 빛이 얽혔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육식 동물과 같았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기독교인을 앞에 두고 ‘넌 예수가 신의 아들이란 걸 진심으로 믿냐?’라고 묻는 사람.

정치 성향이 다른 것을 알자마자 ‘너 그 후보 왜 지지하는데?’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같이, 강수원은 마음속에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

“싫냐고요?”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은 그 대상과의 접촉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혐오란 그런 감정이다.

잦은 교류 속에선 혐오가 일어날 수 없다. 집단이 한 덩이의 균일한 개인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개인마다 다른 삶과 생각을 지닌 인간이란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교류가 있다면 개인과 집단에게 분노할 수는 있어도 집단을 혐오할 수는 없다.

“그렇게 물으면, 싫어하죠.”

하지만 강수원은 아이돌과 만난 적이 없고, 아이돌 음악을 싫어하고, 그렇게 아이돌을 혐오하게 됐다.

그리고 그 아이돌이 아이돌을 싫어하는 이유를 물어오자, 자신의 지론을 마음껏 펼 기회를 맞이하곤 기세등등해졌다.

“이유는 많은…….”

“아이돌이 밴드랑 뭐랑 다른데요?”

백설하가 강수원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심장 안에서는 스스로도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가 감돌았다.

몇 년 동안 삭여온 분노가 한 번에 무의식 속에서 끄집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이돌이 밴드랑 뭐가 다르냐, 고요?”

강수원이 어이가 없단 투로 되물었다.

“다르죠. 밴드가 팬들한테 외모를…….”

신체를.

“어필하는 요소로 삼진 않죠.”

그의 말속에는 아이돌의 성적 어필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가 담겼다.

그에 백설하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아이돌로서의 이미지 관리마저도 잊어버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르다고요? 달라요? 우리도 밴드예요. 악기 연주 대신 춤을 출 뿐이라고요. 그런데, 그 차이인데, 그럼 춤이 천박해요? 춤으로 어필하는 건 천박하고 악기를 쓰는 건 고귀해요?”

그 반박에 강수원은 살짝 당황했다.

아이돌은 악기 연주 대신 춤을 추는 밴드일 뿐이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얼추 타당한 말이지만, 강수원은 곧장 반박했다.

“연주랑 아이돌 춤이 어떻게 같은 선상인데요? 맨살 드러내고 몸 살랑거리면서 어필하는 게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요?”

백설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전 성필에게 들었던 2세대 아이돌의 역사에서도, 걸그룹은 강수원과 같은 논조로 비하당하고 결국엔 섹시 컨셉이 저물게 됐었다.

‘이 사람은 몸을 드러내는 거 자체가…… 뮤지션으로선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백설하 자신의 몸은 무엇인가. 죄악의 덩어리? 무대에 오를 때마다 부르카(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복)를 입어야 만족할까?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는 소리다.

그래서, 백설하는 그의 비난에 맞서 자신도 비난을 쓰기로 했다.

“밴드로 사는 거 재밌으세요?”

“……뭐요?”

“메이저 무대로 나갈 가능성이 0에 가깝잖아요. 이렇게 사는 거 재밌어요?”

강수원이 아이돌의 상품성으로 비난한다면, 백설하도 마찬가지로 상품성으로 비난할 수 있다. 단지 맥락을 틀어서, 록의 낮은 상품성으로.

타인의 선망을 먹고 사는 음악인으로서, 백설하의 비난은 커다란 상처가 될 터였다. 과연 강수원은 발끈했다.

“그건 우리나라 음악시장이랑 대중들 수준이 뒤떨어져서……!”

“그럼 다른 나라에선 성공할 수 있다고요?”

백설하는 강수원이 입은 티에 인쇄된 ‘nirvana(너바나)’라는 글자를 흘끗 보곤 말했다.

“영국이랑 미국 밴드들 좋아하실 텐데요, 록은 철저하게 인종적인 음악이잖아요. 그렇게나 좋아하시는 영미의 록은 전부 백인들 거예요.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백인이라구요. 수원 씨는 평생이 가도 좋아 죽는 록스타, 록커처럼 못 돼요. 백인이 아니니까!”

강수원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끓었다. 백설하처럼.

“알아요? 아시아인은 록스타가 못 돼요! 미국 래퍼 중에 백인이 손에 꼽는 거랑 같다고요! 슬프시겠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우상의 발끝도 못 닿는 건요.”

작게 울린 ‘씨……’란 욕설.

강수원은 백설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고개를 돌리면서 욕을 뱉었다. 그리고 즉시 백설하의 비난에 비난으로 대응했다.

“네네, 그쪽은 참 좋겠네요. 살 좀 까고 엉덩이 흔들면 남자들이 침 흘리면서 좋아해주니까요. 행복해 죽겠네. 나중에 돈 많은 팬 한 명 골라서 취집 가면 인생 완성이네. 춤 같지도 않은 춤 춰서 오타쿠 새끼들한테 돈 긁어모으는 거 아주 부럽습니다.”

백설하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그리고 이에 질 새라 또다시 강수원을 비난했다.

“수원 씨가 갈 다른 록 시장이 있나? 아, 있네요. 일본이요. 그런데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어도 못하는 분이 일본 록 시장에 갈 수나 있나? 가셔도 성공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도 이름 알리는 데 고생하시는 분이?”

“성공하려고 다른 나라 간다고? 하, 아주 지 같은 생각만 하시네요. 딱 음악의 목적이 돈뿐이라는 천박한 생각 잘 들었어요. 그러니까 아이돌들이 해외 다니면서 엉덩이 살랑거리면서 돈 버는 거죠. 그 돈으로 천년만년 잘 사세요.”

백설하는 실신할 것만 같았다.

손발이 저릿해서 피도 통하지 않고, 굴욕감과 분노로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인터넷에서 강수원과 같은 말을 볼 때도 속이 뒤틀리고 몸이 덜덜 떨렸는데, 직접 들으니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했다.

“보니까 아이돌로 뽑힌 이유도 잘 알겠네요. 돈 많이 버시겠어요. 부자 되십쇼. 그냥 역사에 남는 아이돌이 되겠네.”

“이, 이…… 이이……!”

백설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어떻게든 강수원을 상처입힐 말을 찾았다.

지금 말해야 한다. 지금 말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이 상황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면서 찌질하게 이불이나 차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강수원을 화나게 해야만 한다. 지금도 충분히 열이 뻗친 것 같지만, 아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록 화나게 만들어야……!

“설하 씨, 시간 지났어요. 갑시다.”

매니저 안이상이 백설하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기타와 케이스를 대신 챙긴 후, 강수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백설하는 안이상에게 끌려서 억지로 합주실을 나섰다. 그제야 머리가 조금이나마 식었다.

“차에 가 계세요.”

안이상은 백설하에게 기타 케이스를 넘긴 뒤 합주실로 되돌아갔다. 그는 시간이 다 됐다면서 백설하를 끌어냈었지만, 아직 정해진 시간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백설하가 생각하기로, 아마 안이상은 강수원에게 사과하러 간 것일 터다.

만약 강수원의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면 다음 날 기사로 ‘현직 아이돌이 록 밴드 모욕’ 같은 제목의 기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것을 떠올리자 백설하의 머리가 핑글 돌았다.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자 더욱더 머리가 아파졌다.

‘얘들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소녀연맹 멤버들이었다. 백설하는 리더로서 소녀연맹의 얼굴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가 분노를 마음껏 펼쳐버렸다.

참았어야 했다.

‘박 이사님…….’

참아야 했는데…….

“설하 씨, 가요.”

짧은 시간 후 안이상이 나왔다. 그는 괜찮단 뜻으로 미소를 보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백설하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안이상은 그녀의 앞으로 와서 안심시켰다.

“얘기 잘 끝났어요. 걱정 마세요.”

“……죄송합니다.”

“아무 일도 없던 거예요. 그래도 이사님한테는 말할게요. 제가 얘기는 끝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죄송합니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 *

매니저 안이상은 백설하에게 벌어졌던 일을 민경섭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민경섭은 그것을 성필에게 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이뤄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

성필과 민경섭은 응접실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했다.

“SNS에 올라온 글 하나로 이미지가 확 추락한 사례가 많잖아요. 설하가 사과해야 한다고 봐요.”

안이상은 백설하와 강수원의 말다툼 중간부터 녹음을 했었다. 그에 따라 사람을 거치며 이야기가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나마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건 게 맞아요. 이상이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강수원은 백설하를 가르쳐주면서 무시하는 티를 확 냈다고 한다. 지켜보는 안이상이 불쾌할 정도라고 하니, 직접 그 일을 겪은 백설하는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겠는가.

“설하가 과격하게 말한 것도 이해가 가요. 그래도…….”

백설하가 사과해야만 한다.

연예인이란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또한 연예인은 자영업자로 분류되며, 그렇다면 그들은 사업가란 말이 된다.

사업가라면 사업상의 리스크를 줄이거나 없애는 게 당연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민경섭은 노심초사 성필의 답을 기다렸다.

성필도 매니지먼트 경력이 오래됐으니, 이번 사태가 번져가기 전에 불씨를 꺼야 함을 알 것이다.

하지만 민경섭은 성필의 신념을 알고 있다. 성필은 아이돌이란, 아티스트란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설하의 반응은…… 당연한 거야. 누가 자기 직업이 욕을 먹는 데 가만히 있겠어? 오히려 화내지 않는 게 실망스러운 일이었겠지.”

“……그렇, 죠. 하아, 네, 그러네요.”

민경섭은 성필의 이야기가 어느 수준에서 논의되는지 바로 짚을 수 있었다.

‘형은 더 먼 층위에서 보는 거야.’

성필은 백설하와 강수원 사이의 일을 그저 말싸움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대중음악이 욕을 먹는 일은 항상 있어 왔어.”

한국의 대중음악이란 단어의 근원도 실은 경멸이었다. 80년대, 대중이 즐기는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음악이란 뜻에서 만들어진 단어다.

그것이 현재에 와선 일반적으로 쓰일 뿐이다.

“클래식은 재즈를 비하했고, 재즈는 록을 비하했고, 록은 힙합을, 힙합은 일렉트로닉을. 대중음악인 팝(POP)을 욕해왔던 일은 유래가 깊어. 그리고 대중음악가들은 항상 장르 음악가들과 싸워왔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신생 음악을 천대하는 건 일반적인 현상이다. 미국의 장르 아티스트들도 ‘팝(POP)스럽다’를 비하의 의미로 사용할 정도이니까.

“설하도 그런 인식에 대항해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한 거지.”

“맞아요, 아티스트면 참으면 안 되죠. 형 말대로 참는 게 실망스러워요. 아티스트로서요. 그래도요 형.”

일단 가로 엔터는 사업을 하고 있다.

혹여나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위험을 최대한 제거해야만 한다.

“강수원이란 사람이 SNS에 사건을 왜곡해서 글을 쓸 가능성도 있잖아요. 뭐, 아이돌이 록씬을 무시하네. 돈 번다고 유세 떠네. 그런 거 있잖아요. 이런 논란 잠재우기가 힘든 건 형도 알고 있…….”

“알지.”

장르 음악가가 아이돌을 비하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데, 아이돌이 장르 음악가를 비하하는 건 훨씬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비록 백설하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맥락과 이유가 있더라도, 욕먹는 것을 피하진 못한다.

아이돌은 본인의 의견과 생각이 없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니까.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성과 인격이 박탈당하길 요구받는다.

유리 진열장 안에 둬진 인형처럼, 아이돌은 감정이 없어야만 한다. 심지어 그 감정이 분노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설하가 사과하길 바랐을 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 개인 간의 일이니 우리가 개입하는 것도 웃기고.”

“개인 간의 일을 해결해주는 것도 매니지먼트의 영역이잖아요?”

“경섭아. 음악세상에서 아름이한테 있던 일 기억하지?”

김민주와 합을 맞췄던 음악세상의 특별무대. 그것이 끝나고, 신아름은 민경섭과 성필에게 말했었다.

더는 가면을 쓰고 살기 싫다고. 싫은 일에는 당당하게 ‘싫다’고 말하길 바란다고.

“그때 어떻게 생각했어?”

“…….”

“‘아이돌이 뭐라는 거야’란 마음은 아니었지?”

민경섭은 마른세수를 했다.

“진짜 가불기(가드 불능 기술)네…….”

“나도 설하가 그분을 욕한 게 잘했단 뜻은 아니야. 녹음된 거 들으면서도 설마 싶더라.”

설마, 백설하가 음악사 시간에 배웠던 것을 이렇게 써먹다니.

“단지, 사과란 건 설하가 원할 때 해야 한다는 거지. 적어도 설하를 불러서 우리의 의견을 먼저 말하기보다, 상황을 설명하고 설하의 생각을 들어보자.”

“알겠어요. 그럼 설하랑도 얘기해보고 결정하죠.”

“네가 생각한 것만큼 꼬인 상황은 아닐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민경섭은 안이상에게 백설하를 불러오길 지시했다. 그리고 심각한 분위기를 꾸미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꼈다.

이 무거운 분위기가 백설하의 결정에 도움을 되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심은 백설하가 들어오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

겁먹은 쥐처럼 몸을 떨면서 고개를 숙인 백설하를 보고, 민경섭이 어떻게 경직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성필이 그토록 백설하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자고 했던 건, 그녀가 이런 모습일 것을 알아서였겠지. 굳이 민경섭과 성필이 백설하를 다그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가장 걱정했을 건 설하일 텐데…….’

백설하도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타인을 비하하거나 욕하고서 ‘내가 잘했어’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욕이 잘못되었단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리더로서 본인의 잘못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음, 설하야, 그게…….”

민경섭은 매니지먼트 팀장으로서, 백설하가 고를 수 있는 옵션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의 마음에 따라서 가로 엔터가 대응할 것이며, 다른 압박은 없으리라고.

“사과할게요…….”

백설하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과를 결정했다.

“그룹이랑, 또 회사랑…….”

그녀는 대죄를 지었단 듯 성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겁먹은 시선을 그의 목 부근에서 멈출 뿐이었다.

“피해……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또, 제가 잘못했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설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민경섭은 더는 이 공간에 있기가 힘들어서 급히 일어났다.

“형, 제가 가서 그분이랑 얘기해볼게요.”

“응, 수고해.”

“저, 저도 같이 갈게요.”

“그럴래? 일단 그분 연락처 좀 줘. 없으면 합주실이나 원래 기타 가르치던 분…….”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매니저 김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경섭이 들어오라고 하자 김수희가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사님, 밖에 설하 씨 가르치는 기타리스트분이 오셨어요. 사과할 게 있다면서요.”

응접실에 있던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뜨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층의 입구 앞으로 향했다.

‘먼저 사과하러 왔다고?’

백설하는 얼떨떨했다.

이전에 보았던 강수원의 태도라면 절대 먼저 사과를 입에 올릴 것 같지 않았는데. 그도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인정한 것일까?

심지어 이렇게나 빨리?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부드럽게 해결될 수도 있겠다.

‘회사에 폐를 안 끼칠 수도 있어.’

백설하는 회사로 돌아오는 고작 수십 분. 그리고 성필과 민경섭의 논의가 끝나기까지의 한 시간가량. 그 시간을 거의 죽을 것만 같은 압박감 속에서 보냈다.

맹수를 앞에 둔 듯 속이 울렁거리고, 도저히 맨정신으로 있을 수 없을 공포에 떨었다.

자신 때문에 소녀연맹이 피해를 입거나 홍규헌이 화를 내고, 성필이 실망하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면, 백설하는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애걸할 수도 있었다.

‘잘 풀리면, 잘 해결되면…….’

백설하는 응접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성필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었다. 혹여나 그가 화난 채 자신을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멀쩡하게 머리를 굴릴 수 없을 듯해서였다.

아니, 성필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화난 성필을 보게 됐다면, 백설하는 눈물을 질질 흘렸을지도 모른다. 성필이 그런 꼴을 좋게 보아줄 리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일이 해결되기만 하면…… 이사님도 화를 조금이나마 푸실 거야.’

백설하는 그런 기대감을 품으면서 문 앞에 섰다. 그런데 그녀보다 앞서 나갔던 성필과 민경섭이 문을 열자 보인 얼굴은.

“안녕하세요.”

원래 백설하를 가르쳐주던 기타리스트, 유선영이었다. 그녀는 성필과 민경섭을 향해 차례로 인사하고, 가장 뒤에 선 백설하를 보았다.

“설하야, 잠깐 시간 돼?”

“언니? 오, 오늘 일 있다고…….”

“짧은 일이었어. 강의 시간 미루는 걸로 너한테 피해주기 싫어서 대타 부른 거고.”

“어, 네. 그, 어쩐 일로…….”

“용서해달라고 왔어. 수원이 걔.”

유선영의 단어 선택에 백설하는 물론 성필과 민경섭마저도 움찔했다.

“용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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