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케이팝의 글로벌화.
그건 백설하도 익히 아는 현상이었다.
2016년을 기점으로 케이팝 아이돌이 해외에서 달성했던 온갖 성과들이 뉴스 면을 심심찮게 장식하곤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글로벌적으로 성과를 낸 아이돌이 많았지만, 거의 대부분 보이그룹이었다.
‘이상해.’
성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었다.
왜 보이그룹이 걸그룹보다 해외에서 더 반향을 얻고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일까? 3세대 이전 걸그룹에겐 무언가 부족한 게 있었나?
고민 끝에 백설하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팬덤 크기?’
태생적으로 보이그룹은 걸그룹보다 거대한 팬덤을 거느릴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이돌 시장 소비자의 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팬덤에 관한 연구는 ‘광팬(狂fan)’이란 이름으로 서구에서도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에서도 광팬의 주요 성별은 여자였다.
팬덤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위해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입한다.
‘한국에서도 팬덤이 큰 것처럼 해외에서도 큰 팬덤을 만들 수 있었던 건가?’
그럼 3세대 걸그룹이 글로벌화될 수 있던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
백설하가 고민을 끝내기 전, 성필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한령(限韩令)으로 중국 행사와 콘서트가 다 막히자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 아이튜브와 다국적 SNS 등 글로벌 뉴미디어의 유행. 케이팝 자체의 고도 산업화와 음악성 향상. 그리고 프로듀서들의 전략.”
3세대 걸그룹을 창조해낸 프로듀서들은 2세대의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창조물을 내놓았다.
걸그룹은 단순한 욕망과 선망을 넘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걸크러시’라는 이름으로.”
2세대에는 단발적인 퍼포먼스나 솔로 아티스트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아예 그룹에 이식하였다. 아니, 이식이 아니라 더욱 세련되게 진보시켰다.
서구에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걸그룹과 보이밴드의 히트곡은 항상 애인을 향한 사랑 노래였다.
서구 틴 아이돌이 몰락한 후에도 어느 정도 명맥을 이어갔던 일본의 아이돌 또한 로맨틱한 가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케이팝 걸그룹 3세대는 두 조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컨셉을 창조해냈다.
“케이팝 걸그룹의 이 독특한 에티튜드는, 놀랍게도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먹혔어. 그리고 케이팝 소비자의 다수인 여자를 걸그룹의 팬덤으로 끌고 올 수 있었지.”
지금까지 걸그룹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토록 컸던 적이 없다. 3세대를 기점으로, 걸그룹은 글로벌화와 시장 확대를 동시에 이뤄냈다.
또한 그런 성장은 새로운 팬들을 지속적으로 유입시키는 결과로까지 이어져, 케이팝의 성장은 연일 고공행진을 달성하게 됐다.
“아까 설하가 그랬지. 요즘 섹시 컨셉이란 말을 안 쓴다고. 맞아, 걸크러시는 섹시란 말 자체를 없애버렸어.”
걸크러시는 청순과 섹시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걸그룹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로 소비되었으며, 곡이란 그런 이미지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돌의 퍼포먼스에 이목이 모이게 됐다.
걸크러시는 단순히 새로운 컨셉이나 이미지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아이돌을 퍼포먼스를 펼치는 퍼포머란 주체적인 위치에 올려둔 인식의 혁명이었다.
“그러니까 설하야, 네가 걱정하는 건 결국엔 해결될 문제야. 대중과 어머니의 시선 같은 거. 음악사 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언제나 인식은 변화보다 조금 늦잖아.”
힙합이 미국에서 주체적인 장르로 인정받는 데까지는 탄생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얼터너티브 록이 상업적 록 씬을 대체할 구세주로 찬양받는 것에도 수년의 적응 기간이 있었다.
현재의 아이돌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돌 음악이 다 비슷비슷하고, 새롭지 못하고, 음악적으로 수준이 낮다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하지. 아이돌이 해외에서 거둔 성적이 기사로 나오면 국뽕이라면서 놀리는 댓글이 많잖아.”
빌보드에 들어가건 그래미에 진출하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깎아내리려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당장 몇 주 뒤에 그래미에 WTP가 후보로 지명될 텐데…… 오히려 실망이란 기사가 더 많이 보였지.’
음악 부문이 아니라 앨범 아트 부문 후보로 올라갔다면서, WTP의 실패란 기사가 줄을 잇는다.
그런 이들은 그래미에 어떤 분야든 후보로 올라갔단 의미를 모른다.
‘힙합이 창조되고 그래미의 최고상인 앨범상을 받기까지 50년이 걸렸어. 정식 장르로 인정받기까지는 10년도 더 필요했고.’
힙합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장르임에도 그러하다. 그런데도 성필이 현재 사는 시간대에선 아직도 그래미 앨범상을 못 받았다.
그래미상은 보수적이다. 후보 선정권을 가진 위원들이 대부분 미국의 아티스트들이기 때문이고, 또한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만큼 다른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낮다.
그렇기에 그래미는 보수적인 동시에 엄청난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래미의 위원들 자체가 미국의 음악 산업 자체를 대변하는 거물들이기에.
그리고 그런 곳에 어느 분야든 후보로 올라갔던 건, 그리고 케이팝이 탈영토화된 지 5년도 안 되어 후보로 지명되었단 건 엄청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미가 보수적인 전통을 깼단 것이니까.
오직 상업적 기준만을 가진 빌보드보다 훨씬 더 강한 파급력을 지닌다.
“그럼…….”
백설하는 이토록 거대한 수준의 이야기를 듣곤, 성필에게 할 질문을 조심스레 골랐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케이팝이 글로벌화됐든 어떻든, 결국에는 백설하 자신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만 들렸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답이 필요했다.
케이팝이라는 조류에 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배들이 이룬 업적을 등에 업고서 백설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에 성필은 답한다.
“그건 설하 네가 정해야지.”
“네……?”
“너는 뭘 하고 싶어? 뭘 증명하고 싶어?”
“…….”
그건 옛날부터 정해져 있었다.
백설하는 아티스트로 불리길 바란다. 어쩌면 그녀가 아티스트십에 집착하는 건 부모님의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직 부모님의 시선을 바꾸고 싶단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티스트가 될래요.”
백설하의 선배들은 유례없는 크기의 걸그룹 시장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 거대한 선물 속에서, 백설하 또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있었다.
“이사님이 옛날에 말씀해주셨잖아요.”
정규 앨범으로 데뷔하기 전, 백설하가 ‘뮤지션으로 보이고 싶다’는 고민에 대한 답으로 내놓았던 것.
“장르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건 스타 플레이어의 등장이라구요.”
성필은 백설하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다.
“소녀연맹도 그렇게 될 거예요.”
현재 아이돌이 마주하고 있는 비판은 2세대보다 더욱 크다.
2세대는 청순과 섹시란 이분법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국내에서 반발을 샀으나, 3세대 이후에 가해지는 비판은 국내를 벗어나 있다.
글로벌화된 비판이 걸그룹을 기다린다.
“아이돌도 당당하게 아티스트로, 주체적인 퍼포머로 인정받게 할래요.”
한국의 음악 평단이 케이팝을 평가절하시키는 사이, 케이팝 담론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평론가와 학자, 음악 업계의 사람들은 케이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비판도 숨기지 않는다.
미국에서 이뤄지는 주요한 비판 중 하나가 아이돌은 결국엔 주체성 없는 인형이란 것이다. 이미 미국에선 몰락해버린 보이밴드와 걸그룹 산업과 같은 길을 간다면서 말이다.
그들은 아이돌에게 진정성과 태도, 의지를 요구하고 있다. 힙합과 록의 기준을 아이돌에게 들이대면서 비판을 가하는 중이다.
WTP가 그래미에 후보로 지명되는 건, 이 비판을 넘어서는 지점에 섰기 때문이었다.
‘설하의 목표도 그런 비판을 뛰어넘겠단 의지인 거지.’
성필은 진심으로 감탄했고, 동시에 그녀를 응원한다.
“좋네. 좋은 목표야.”
성필의 꿈인 ‘최고의 아이돌’보다 훨씬 더 나아간 목표다.
“그럼 시험 한 번 해볼까.”
“시험이요……?”
성필은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시선을 아래로 힐끔 내렸다. 그러자 백설하의 눈도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의 가슴으로.
“흣……?!”
백설하가 황급히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감쌌다. 부끄럽단 기색을 한껏 보였음에도 성필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백설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어때?”
“뭐, 뭐가 어때요?!”
성희롱이 어떠냔 뜻인가?!
“넌 이런 시선에 어떤 태도를 취할래?”
“……네?”
“네가 아티스트로서 네 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련된 질문이야. 네 생각에 따라 소녀연맹의 스타일링이나 안무 퍼포먼스도 영향을 받겠지. 요컨대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거지.”
“…….”
“몸을 드러내는 걸 상품화로 여기고 부끄럽게 생각할 건지. 아니면 퍼포먼스의 수단으로 여길 건지. 혹은 그저 자기 자신의 표현이거나, 드러내건 말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든지. 여러 대답이 있고 무엇도 정답은 없어.”
일단 현재 백설하의 반응으로 보건대,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부끄럽게 여기는 듯했다.
이건 이상한 반응이 아니다. 백설하는 옛날부터 신체 굴곡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서 박시한 옷을 주로 입지 않았던가.
‘설하는 자기 몸을 긍정적으로 이용한 적이 없는 거야. 자신감이 생길 일이 없었거나.’
어릴 적부터 아이돌 연습생으로 매진했던 그녀에게, 그녀의 몸매란 단지 남자들의 시선을 비정상적으로 모으는 특징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시선을 즐기고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창피한 것으로 생각했겠지.
‘사랑한 경험이 있었으면 달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돌이 연애를 했을 때 ‘우리 누구누구 음악하려면 연애도 해봐야지’라며 실드를 치는 팬들이 있곤 하다.
성필은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데 설하를 보니까, 정말 그것도 일리가 있어.’
인생의 절반은 사랑이라던가. 인간의 감정을 전하는 음악이란 예술에 삶을 걸었다면, 사랑한 경험이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설하는 성필이 던진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소녀연맹의 퍼포먼스를 위해서,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말이다.
“……저, 이사님.”
“응.”
“이, 일단은, 이사님이 빤히 바라보는 건 조, 조금…… 안 좋은 거 같아요…….”
“안 좋아?”
“네, 네. 너무 빤히 보시잖아요…….”
그 말대로, 성필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까부터 시선을 1초도 떼지 않고 있었다.
“어, 미안.”
“말이랑 행동이 다른데요……?”
“응, 아무튼 잘 생각해봐.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아라는 이 문제에 관해선 태도가 확실하니까 얘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다.”
“언제까지 보실 거예요?!”
백설하가 소리치자 성필은 그제야 시선을 뗐다.
“역시 부끄럽구나.”
“1분 동안 어느 부위든 빤히 바라보면 안 부끄러워할 사람 없거든요?!”
“그럼 또 시험해볼까? 익스 이블 같은 옷 입고…….”
“절대 안 입어요!”
익스 이블 같은 무대 의상을 입는다고?
백설하는 당장 부모님과 의절 당할지도 몰랐다. 또한 그녀 자신도 감당할 수 없고 말이다.
그리 당연한 것처럼 화를 낸 백설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나는 내 몸을 어떻게 생각하지?’
숨겨야 할 것?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끝자락엔 섹시 컨셉을 포기했던 2세대 아이돌 제작자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3세대의 선배님들이 이룩해준 퍼포먼스의 폭 확대라는 유산을 누리면서도…….
‘난 부끄러워하는 걸로 끝내도 될까?’
마돈나와 비욘세, 혹은 익스 이블이 본인들의 성적 매력을 비범함과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켜 팝의 정점에 이르렀던 것처럼.
백설하 자신도…….
“옷 구해다 줄까?”
“……그냥 이사님이 보고 싶으신 거 맞죠?”
백설하는 생각했다. 자신의 몸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자랑스레 여기는 날은 아직 멀었다고.
솔직히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티스트니까 음악으로만 평가받고픈 마음도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움짤글 밑에 달린 댓글을 떠올리면, 백설하는 자괴감이 들곤 했다. 이왕이면 몸보다는 노래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그래도.’
백설하는 자신의 가슴 밑을 팔로 받쳤다. 그러자 성필의 눈동자가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래로 향했다가 곧바로 올라온다.
“이사님 방금…….”
“방금은 네가 의도한 거잖아?! 아니,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남자가 이렇대!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남자는 움직이는 물체에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간다고 그랬어!”
백설하가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 시선은 부담스럽지만, 이건 좀 재밌네.’
* * *
“요즘 브레멘 음악대에 소홀하지 않나요 다들!”
소녀연맹 숙소의 저녁 시간, 평화로운 식사 자리에서 리카가 울분을 토했다.
“아무리 휴가라지만 정기 연습에도 안 나오다뇨!”
“정기 연습이 있었어?”
“하양 언니가 제일 나빠!”
리카는 조아라의 어깨에 눈을 파묻고 우는 척했다. 조아라는 그녀의 어리광이 익숙한지 눈길도 안 주고 밥만 먹었다.
“정기 연습 하자고 했었잖아요.”
“그랬던가? 아름이는 들었어?”
“그거 기억 안 나요?”
장하양이 빨래 당번일 때, 그녀가 수건을 개던 와중 리카가 쭈뼛쭈뼛 다가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희 합주하면 기분 전환도 되고 좋겠네요! 음, 시, 시간이 있으면요!’
‘그러게.’
‘아, 그럼 나중에 시간 있을 때라든가!’
‘응, 시간 있을 때 좋아.’
그렇게 애매모호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장하양은 그게 정기 연습과 관련이 있다곤 생각도 못 했다.
“와, 하양 언니 진짜 나쁘다. 순수한 리카 마음 가지고 노니까 좋아요?”
“그렇구나. 미안해 리카.”
장하양이 신속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오히려 리카가 놀라서 부정했다.
“아녜요 언니! 언니는 나쁘지 않아요! 제가…….”
“맞아 리카 네가 더 잘못했어. 사람이 바라는 게 있으면 명확하게 이야기해야지. 그것도 매너야.”
“히도이(너무해)! 휴가라서 언니한테 폐 끼칠까 봐 일부러 조심조심 얘기했던 거라구요! 아타시(저)의 배려를 눈치채지 못한 건가요!”
“그렇구나.”
“흥, 이제 알아도 늦었어요!”
“다음부턴 확실히 말해.”
“…….”
장하양은 따스하게 웃어주곤 리카를 달래면서 연습 시간을 정했다.
연습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신아름은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피했으나, 결국 장하양의 질문 공세에 참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아라 너는?”
“나 감 다 잃었을 거 같은데. 걍 나 빼고 해.”
“드럼이 없으면 어쩌란 거야! 아라쨩 밴드 감수성이 너무 없어!”
“드럼 있잖아.”
“다레(누구)?”
“지음 오빠 불러서 프로그램으로 틀어.”
“그게 어떻게 밴드야?!”
“전자악기 밴드지.”
“그럴 바엔 멤버들 필요 없이 내가 신시사이저로 다 연주하면 되잖아!”
“괜찮네.”
“…….”
“……알겠어 할게.”
“아라쨩 다이스키(정말 좋아)!”
“아 떨어…… 푸핰! 아 얘 미쳤나 봐! 왜 뺨에 뽀뽀를 해?!”
“앗! 혹시 입술이 좋았어?”
“죽인다 진짜.”
장하양은 리카와 조아라의 애정 행위를 관찰하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침팬지는 동성이더라도 우호를 확인하기 위해 키스를 한다. 어쩌면 리카의 행위는 침팬지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인류와 침팬지는 DNA의 99% 이상을 공유하니, 둘의 행동과 그 의도가 비슷하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침팬지는 키스하는 부위가 입술만이 아니라지. 국부도 포함돼.’
피식.
장하양은 입 밖으로 낸다면 조아라에게 농담 영구 통제를 당할 만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계속 웃음을 흘렸다.
‘아, 이건 진짜 재밌는 농담인데. 웃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장하양은 본인의 단점 중 하나가 유머 감각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세간의 인식일 뿐, 언제든지 평가를 뒤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기회를 항상 기다리고 있으며, 지금이 그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양아 괜찮아?”
하지만 장하양은 백설하의 걱정스런 시선을 받자마자, 기회를 포착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백설하를 보자마자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네. 잠깐…… 웃긴 거 떠올라서요.”
“뭔데?”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 말해주면 안 돼? 궁금한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방 방송이 끝나자, 주제는 브레멘 음악대의 다음 연습곡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백설하가 소심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Smells like teen spirit’ 어때?”
얼터너티브 록 밴드인 너바나의 곡이다.
성필의 음악사 시간 때 배웠던 터라 다들 알고 있었다.
조아라만 빼고.
“처음 듣는데.”
“음악사 시간에 배운 건데, 기억 안 나?”
조아라는 곡 이름을 검색해보고도 떠오르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밴드 이름이 니르바나야?”
“너바나야!”
“뭐? 니르바나라고 읽잖아. 스펠링 봐.”
“너바나라고 읽는 거야!”
조아라가 헛웃음을 뱉었다.
“리카. 이거 산스크리스트어로 열반이란 뜻인 니르바나야. 니, 르, 바, 나, 라고 읽는 게 맞거든? 한 이사님 수업 때 졸았냐?”
“존 건 아라쨩이야!”
“하…… 야, 리카 너 내가 맞으면 어쩔래?”
멤버들은 두 사람의 내기를 흥미진진하게 관전했다. 물론 이미 승자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아라쨩이 시키는 거 다 할게!”
“그래? 그럼 나도 그럴게.”
“아라야, 너바나가 맞아.”
장하양이 곧바로 승자를 밝혔다.
“네? 아니, 언니까지 그러면 안…….”
“등신아 너바나거든?”
“……뭐?”
“저, 아라야. 리카가 맞아.”
신아름과 백설하마저 너바나가 맞다고 했다.
조아라는 창피함과 불안함으로 손까지 떨려왔고, 핸드폰으로 너바나를 검색하여 10초가량 글을 읽었다.
“헤헤, 아타시(내)가 맞지?”
리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아라쨩은 내 말 듣는 거야! 일단 오늘 밤에 침대에서 옷…….”
조아라가 의자를 거칠게 끌며 일어나, 강도에게라도 쫓기는 듯 황급히 거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숙소 문이 열리고 쾅 닫히는 소리가 전해졌다.
“……시맛타(당했다)!”
그렇게 브레멘 음악대의 다음 연습곡은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으로 정해졌다.
* * *
브레멘 음악대 합주 연습을 마친 백설하는 이후 기타 강의를 들으러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차 좀 덥혀 놓고 있을게요. 설하 씨는 5분 뒤에 나오세요.”
매니저 안이상은 오랜만에 일이 생긴 게 기쁜지 거의 날 듯이 회사 밖으로 나갔다.
매니저 팀은 소녀연맹이 휴식기에 들어감에 따라 일거리가 팍 줄었다. 그렇다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민경섭이 직원 집중 교육 기간이라 이름을 붙이곤, 매니저 팀의 전문성 향상을 위해 주입식 교육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많이 힘드신가 보네.’
안이상은 매일 대기실에 박혀서 글만 보는 게 일상이었는데, 합법적으로 회사를 나갈 수 있게 되자 기뻐하는 게 한눈에 보인다.
백설하는 그가 말한 5분보다 살짝 더 늦게 나가주기로 했다.
“읏차.”
그때 성필이 자신의 존재를 열렬하게 어필하면서 백설하의 곁에 앉았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응. 자주 나오니까 보기 좋다.”
백설하는 성필이 최근 몇 주 동안 가장 적게 본 멤버였다. 그녀는 휴가란 이름에 알맞게 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주로 잠을 자면서 말이다.
백설하는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지만, 느긋하게 낮잠 자는 것 또한 좋아한다.
“저 보러 오신 거예요?”
백설하 나름 성필을 골려주기 위해 한 농담이지만, 성필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응. 1, 2분이라도 너 보고 싶어서 왔어.”
“네, 네에…….”
‘원래 이런 분이었지’라 생각하면서, 백설하는 소파에 몸을 더 깊이 뉘었다.
“곧 휴가도 끝이네.”
“그으, 그러게요. 좀 아쉽네요. 약간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에요.”
백설하는 잠을 잔 시간이 많았으니 꿈에서 깨어났단 표현이 아예 틀리진 않았다.
“곧 겨울방학이 끝나는 학생처럼?”
“아…… 저는 딱히 방학은…… 감흥이 없어서…….”
“아, 미안.”
“아뇨, 아녜요.”
백설하는 학교생활 자체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없으니, 사람들이 익숙해하는 방학 기분이란 것도 잘 몰랐다.
그녀에게 학교란 2, 3교시를 마치고 조퇴하는 장소 외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가끔 모든 수업을 다 받더라도, 쉬는 시간에 대화할 친구가 없어서 곤란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자는 척만 했는데, 다른 사람에겐 밝히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다. 실제로 자기도 했고 말이다.
“아, 그거 아세요? 아라 곧 운전면허 딸 거래요.”
“응. 안 그래도 자꾸 자랑하더라. 내 차 쓸 생각에 아주 신났던데.”
“빌려주실 거예요?”
“절대 안 빌려주지. 한 이사님 차로 도로 운전 연습 더 하기로 했어.”
성필은 한구인을 동정했다. 운전 초짜를 가르쳐주는 게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 일인지 잘 알았으니까.
운전을 가르쳐주다가 헤어진 커플도 많단 말처럼, 한구인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아라가 면허 따면 차 렌트해서 어디 다녀오고 그래.”
“헤헤, 그럼 좋겠네요. 근데 불안해서.”
“초보자 차 타는 건 불안하긴 하지. 근데 이제 정말 휴가 얼마 안 남았잖아. 뭐 계획 있어?”
“딱히요. 그냥, 아쉽기만 한 거죠.”
백설하는 짐짓 아무렇지 않단 듯 밝게 웃었다.
“다음 휴가 때는 애들이랑 모여서 계획이라도 짜야겠어요. 아쉽긴 하네요.”
“음, 그럼 우리 나중에 여행갈까?”
갑작스레 튀어나온 성필의 제안. 그에 백설하는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어, 그게, 여, 여행이요?”
“응.”
성필이 방금 뭐라고 했지?
여행갈까, 라고 했다.
아니.
‘우, 우리, 여행, 가, 가가, 갈, 갈까……?’
우리, 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