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소녀연맹의 휴가가 절반을 넘었을 무렵, 멤버들은 전원 회사로 출근했다.
회의실에 모인 멤버들에게선 겨울 방학 교실 청소를 위해 집결한 학생들처럼 반가운 분위기가 만연했다.
어차피 숙소에서 항상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긴 하지만, 회사에서 보니 또 감흥이 남달랐다.
“다들 휴가인데 불러내서 미안.”
성필이 서류 몇 장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오자 리카가 즉각 야유를 퍼부었다.
“휴가인데 출근시키는 악덕 기업!”
“뭐? 악덕 기업? 너 남은 계약 기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해볼래?”
“지, 진짜 무섭네요.”
“내일부터 리카만 활동 재개한다.”
“손나(그런)!”
오랜만(리카와 헤어진 지 14시간밖에 안 됨)의 해후를 뒤로하고, 성필은 용건을 전달했다.
“곧 팬사인회 시작되잖아. 2주 동안 토, 일에 진행할 예정이고, 한 번마다 100명의 팬들이랑 만나. 예상 시간은 2시간에서 3시간. 아마 2시간 언저리에서 끝날 거야.”
팬사인회는 아이돌에게도 특별한 이벤트다.
아이돌에게 팬이란 인터넷에서 글자로만 존재하는 이들인데, 직접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건 동기 부여 측면에서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
물론 팬사인회는 상당한 중노동이다. 의자에 2시간 동안 못 박힌 듯 앉아서 100명의 사람을 다른 패턴으로 상대하는 게 쉬울 리 없으니.
“이게 대략적인 순서야.”
쓰인 글도 얼마 없어서 몇 초 만에 훑는 게 가능했다. 팬사인회 큐시트를 확인하자마자 조아라가 손을 들었다.
“이번엔 무대 없어요?”
“응. 팬싸랑 토크가 끝이야. 이 토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거든? 대본을 써줄까 아니면 사담으로 할래.”
“사담?”
“너희들끼리 즉석해서 토크하는 거.”
팬사인회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인이다. 그 외의 것들은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대본이 있는 게 편하지 않나?”
“아라쨩 대본이 없으면 무대에도 못 오르는 거야? 아직 아이돌 레벨 낮구나.”
“아저씨 리카 내일부터 활동 재개하는 거 맞죠? 빨리 내 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아라쨩 히도이(너무해)!”
“일단 내일 화천 산천어 축제에 보내서 무대에 올리려고 생각 중이야.”
“최전방?! 이 날씨에 무대에 오르면 얼어 죽는다구요!”
“내일의 리카는 파이팅하고, 대본으로 할지 사담으로 할지 결정하자. 일단 조진만 사장님이 보내주신 대본이 있거든.”
고민하던 기색을 띠던 멤버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조진만이 대본을 써주었다면 결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팀장님?”
그런데 성필은 종이 대본을 건네주는 게 아니라 빔프로젝터를 켰다. 그러자 스크린에 정지된 영상이 하나 떠올랐는데, 그곳에는 조진만과 그 부하 직원이 있었다.
“자, 시작할게.”
영상 매체 특유의 백색소음이 2~3초 정도 재생되고, 조진만이 자신의 가슴에 ‘조아라’라고 적힌 이름표를, 그리고 여자 부하 직원은 가슴에 ‘리카’란 이름표를 달았다.
“…….”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조아라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조아라의 기분도 모른 채 영상 속의 조진만이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조진만: 리카는 오늘 팬싸 어땠어? 시간 꽤 오버했는데 피곤하진 않아? 내 어깨에 기댈래?]
“아저씨 저거 뭐예요 완전 남친 말투잖아!”
[직원: 아타시(나)는 항상 프로페셔널하다구! 그에 비해 아라쨩은 프로답지 못해!]
[조진만: 내가?]
[직원: 요즘 휴가라고 게을러진 거 아니야? 여기 살이 붙었잖아. 아라쨩은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몸무게는 더 많네!]
“안 해.”
조아라가 팬사인회 큐시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 * *
재무팀장 한구인, 그는 올해 들어 가장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 원인은 편집증적으로 굿즈 판매 사이트에 요청했던 매출표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한구인이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겨우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고선 당장이라도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굿즈 발매를 시작하자마자 매출이 억 단위로 찍혔다고?’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 활동 종료를 기점으로 다양한 굿즈의 발매를 기획했었다.
그리고 그저께 소녀연맹 공식 응원봉 발매를 시작으로, 모든 굿즈 판매 사이트에 소녀연맹의 공식 굿즈들을 등록했다.
한구인은 굿즈가 아이돌의 삼신기라고 들어왔지만 얼마나 팔릴지는 가늠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구성품이 풍부한 앨범과 달리 단품 굿즈가 많이 팔릴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단독 콘서트에 응원봉 지참률이 90%가 조금 넘는다지. 그럼 응원봉도…… 총 4,000개 정도는 팔리는 건가?’
하지만 그건 소녀연맹의 콘서트 스케줄이 발표된 이후일 것이다.
굿즈는 가로 엔터의 재정에 도움이 되는 건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이리라.
그런데, 고작 굿즈 발매 이틀 만에 매출이 억 단위로 찍혔다. 1억이 아니며, 2억도 아니다. 그 이상이다!
‘이틀 만에!’
어째서 굿즈가 아이돌의 삼신기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이건 황금알 낳는 거위 수준이다.
심지어 앨범보다 훨씬 제작 단가가 싼데 이만큼 팔렸단 건…….
‘순익 전환이다. 1분기에 가로 엔터는 순익으로 전환되고 정규 앨범 제작비도 전부 만회할 거야…….’
한구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더운 숨을 뱉어냈다.
앞자리에 앉은 경리 권아인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한구인은 알 도리가 없었다. 알았더라도 이 기행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화보집이나 MD, 라이선스와 퍼블리시티가 붙은 사업 수익은 멤버분들께 순수익의 20%가 배분된다.’
멤버 개개인은 이틀 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백만 원을 번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획사들이 OSMU(One source multi use)에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군. 이건, 정말…….’
소녀연맹이란 이름과 얼굴을 붙였을 뿐인데 상품이 비합리적일 정도로 팔려나간다!
한구인은 돈맛을 봐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기쁜 건 멤버들의 정산을 앞당길 수 있으리란 사실이었다.
일본 데뷔와 콘서트 계획까지 끝나면, 그녀들이 첫 정산을 받는 날도 멀지 않으리라. 단순히 정산만 받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부를 손에 쥐게 되겠지.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성공을 거머쥘 자격이 있으십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
“어, 매출 나왔어요?”
한구인은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 뒤를 보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순진무구한 표정의 성필이 서 있었다.
성필은 매출표를 훑더니 작게 감탄했다.
“와, 많이 팔렸네요.”
한구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정도의 성과를 내고도 반응이 겨우 이거라니?
심지어 그다지 기쁜 거 같지도 않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네? 어, 놀랐냐고 하면 놀랐긴 한데. 놀란 것보단 기쁘네요. 성공했단 게 눈이 확 보이잖아요.”
역시, 성필도 기뻐하고 있던 거였나.
단지 감정 표현이 서툰 것뿐이다. 하긴 매출에 억이 찍혔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
“다행이네요, 제작비로 쓸 돈이 생겨서.”
한구인의 등골로 한기가 내달았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신……?”
“제작비요. 콘서트 때 쓸 곡들에 안무랑 퍼포먼스 붙여야죠.”
말도 안 돼.
한구인은 당장이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곡 하나에 안무를 붙이는 것도 시안을 몇 개나 받고, 그 비용은 천만 단위에 이르는데…….
‘콘서트에 쓸 곡들에 안무를 붙여……?’
그럼 그 시안비를 다 합치면, 그리고 최종 선택될 것의 안무비까지 합한다면 대체 얼마가 깨지는 거지?
“아, 아직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숫자로만 존재하는 걸 확인했을 뿐인데.
가로 엔터 법인 계좌에 넣어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게 존재하지 않는 돈이 되었단 말인가? 돈이란 게 이토록 물 쓰듯이 사라지는 거였나?
“어, 한 이사님 설마?”
성필이 한구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분명 어깨 너머로 촉감만이 전해질 텐데, 마치 한기가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아까우신 거예요? 우리 애들한테 쓰는 돈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밖에 없다.
한구인은 매출표에 찍힌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결혼식장에서 사위의 앞으로 딸을 데려갈 때와 비슷한 심정이 찾아왔다.
한구인은 딸과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사위에게 넘겨준다. 손을 뗌과 동시에 딸과 쌓아왔던 추억이 한구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결국 다른 놈한테 보내려고 너를 키웠구나…….’
한구인은 쓴맛이 맴도는 입가를 휘며 부드럽게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멤버분들께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죠?”
한구인은 엔터 사업을 시작하기 전, 아이돌이 평균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게 3년이란 말을 듣곤 내심 이해하지 못했었다.
‘사람을 무대에 세워서 춤추고 노래하게 만드는 게 전부인 사업인데,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일이 그렇게나 힘들다고? 심지어 대형 기획사들도?’
그런데 이제 알겠다.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아이돌 사업이란 건 원래 이렇다.
블록버스터 모델 비즈니스.
시작에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정작 투자한 자본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사업.
그럼에도 도전자들이 가득한 사업.
‘아이돌이 궤도에 오르는 게 3년째라지.’
한구인은 궁금해졌다.
2년 차에 접어든 소녀연맹이 지금과 같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 데뷔가 3년에 이르렀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있을지.
* * *
“남자분이요?”
성필의 귀가 예리하게 목소리의 주인을 감지했다. 방금 말한 것은 백설하다. 위치는 2층 구석의 복도였다.
“네, 괜찮아요.”
성필은 ‘남자분이요? 네, 괜찮아요’란 답이 나올 수 있는 대화의 맥락을 추측할 수 없었다.
백설하의 목소리가 들렸단 기쁨을 느끼기도 전, 성필은 복도 벽에 기대어 온갖 상상을 해야만 했다.
“알겠어요. 네, 네, 들어가세요.”
백설하가 통화를 끝냈는지 그녀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도망갈까?’
……아니, 성필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갈 이유가 없다. 성필은 오히려 복도 모퉁이에 당당히 서서 버티기로 했다.
복도의 모퉁이를 넘어 백설하가 나타났다. 그녀는 우측으로 돌았으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터라 성필을 보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쳤다.
성필도 그녀가 안 멈출 거란 생각은 못 했기에 피할 수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냐. 안 다쳤어?”
“네…….”
백설하는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성필은 그게 통화가 들켰을지도 모른단 걱정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방금 상대 누구야?”
“네?”
“전화.”
“아, 선영 언니요.”
“선영…… 언니가 누구였지?”
“저 일렉기타 가르쳐주시는 강사분이요. 다음 수업에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대타로 다른 분을 구해줄까 물으셨어요.”
“그 대타분이 남자셔?”
“문제가 될까요……?”
옛날에는 멤버들이 혹여라도 남자와 접촉하는 것에 병적으로 대했었지만, 요즘은 성필도 편집증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약 2년에서 3년간 멤버들을 관찰한 결과, 그녀들은 딱히 연애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일이 더 중요하단 마음가짐일 것이다.
“아냐. 기타 배우는 건데 뭘.”
라고 말은 했다만, 성필은 안이상 매니저에게 백설하의 감시를 명령할 예정이었다.
‘설하는 연애 금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격렬하게 반응했었지. 아이튜브로 연애 관련 영상 많이 보고.’
매니저가 바로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다면 교육이란 명목하에 손을 잡고 기타를 함께 짚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하겠지.
“감사합니다.”
“감사해? 남자 강사님이랑 수업받게 해준 걸 감사한단 뜻이야?”
“아니에요! 그런 뜻 아니에요……!”
“장난이야.”
“…….”
백설하는 ‘너무해’란 의미를 담아서 성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성필이 옅게 웃으면서 장난스레 넘기려 하자, 백설하는 팔로 자신의 가슴 밑을 받쳤다.
그 순간 백설하는 보았다. 성필의 눈동자가 매우 빠른 속도로 아래로 갔다가 다시 정면으로 올라온 것을.
“방금 어디 보셨어요?”
“뭐가.”
“눈동자가…….”
“아닌데?”
“사장님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나도 진짜 무의식적이었어 사장님한텐 말하지 말아주라……!”
백설하는 수줍게 웃었다.
“알아요.”
그녀가 항상 받아왔던 시선이며 익숙한 반응이니, 성필이 무의식적이라고 했던 말도 이해가 간다.
정말 웬만큼 의식하고 있지 않은 이상 백설하의 중심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성필의 말마따나 ‘무의식적’이란 단어가 어울렸다.
“너무 심하게 놀리는 거 아니야……?”
“박 이사님도 저 놀리셨잖아요. 둘 다 비슷한 급이죠. 아이돌이 연애 의심받거나, 회사 이사가 아이돌의 어딘가로 눈길을 줬다거나.”
“무게감이 전혀 다르거든? 넌 주변 사람들의 질타는 안 받더라도 난 사회랑 주변 사람들의 비난까지 감수해야 하잖아.”
“하하…….”
하하, 하, 하아.
갑자기 나온 백설하의 한숨에 그녀는 물론이고 성필마저 놀랐다.
“설하야 무슨 일 있어?”
“네? 아, 아뇨.”
“설에 본가에 가서 무슨 일 있던 거지?”
“…….”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성필은 굉장히 눈치가 빠르다.
백설하는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단 듯 무마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 말해주지 않으면 성필이 며칠 내내 따라다닐 게 틀림없다.
‘우리들이 고민 가지고 있는 건 못 보시는 부분이니까.’
그리고 성필이라면 좋은 상담 상대가 되어줄 게 틀림없다. 깊이 숨긴 고민을 이야기할 상대는 성필밖에 없기도 하고…….
“음, 부모님이요, 옛날보다는 확실히 대우가 나아졌어요…….”
아이돌을 한다는 이유로 딸을 1년 동안 찾지 않았을 때에 비하자면, 지금은 명절에 본가에 오는 것도 가능해졌으니.
이젠 아이돌이란 것만으로 백설하에게 욕을 하고 싸우진 않는다.
“그런데 그으…… 곱게 보지는 않는다고 해야 하나요. 대우가 나아지긴 했는데 취급이 좋진 않은…….”
“뭐라고 하셨는데?”
백설하가 이토록 말하기 껄끄러워할 정도라면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성필도 대략 예상이 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백설하의 고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음, 어른들이 흔히 하시는 말 있잖아요. 걸그룹은 좀…… 헐벗고 나온다 같은 말이요.”
아마 백설하는 최대한 순화한 것이리라. 그렇기에 성필은 그녀가 부모님에게 들었던 적나라한 비난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랑 관계가 걱정이야?”
“아뇨, 계속 싸워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 듣는다고 어떻진…… 네, 걱정이에요…….”
백설하가 빠르게 인정했다.
“제가 아무리 팬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아도요,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까요…….”
집 밖의 회사에서 아무리 인정을 받는 가장이더라도, 집 안에서 배우자와 자식에게 경멸당한다면 성공한 삶일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평판과 가정의 인식을 모두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또 사람들도요.”
“사람들?”
“그…… 제가 대중가수이긴 하지만. 대중…… 이라고 하는 분들 있잖아요? 저희 노래를 들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이돌 팬은 아닌 분들이요. 그런 분들의 시선도…… 실은 제 부모님과 크게 다른 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백설하는 아이돌에게 쏟아지는 시선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걱정을 할 만하지.’
인터넷에 여자 아이돌은 고급 창녀니, 잠자리 영업으로 일을 따낸다는 말이 돌아다니는 판국이다. 비록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기에 허언이나 다름없지만, 그러한 말에는 여자 아이돌에 대한 경멸이 짙게 배어 있다.
백설하뿐 아니라 모든 여자 아이돌이 그러한 인식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비치는 아이돌의 광채를 보고 꿈을 품었으며, 또한 남다른 의지로 아이돌이 됐을 터인데.
공공연히 비하되는 아이돌의 처지를 본다면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만도 하다.
“네 부모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음…….”
성필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설하 부모님 세대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신중하게 골라서 나온 말이 이것이었다.
결국 성필도 ‘세대 차이’로 밖에 설명할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백설하는 우울해지려 했다.
세대 차이란 건 다르게 말하면 그 세대가 없어지지 않고선 사라지지 않을 갈등이란 뜻이니까.
하지만 성필의 대답은 세대 차이 같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설하야. ‘싼티 없는 섹시’나, ‘여돌 섹시 컨셉은 수명을 줄인다’거나, 아니면 ‘여자 아이돌은 행사용이다’ 같은 말 들어본 적 있지?”
“네?”
백설하는 성필이 적나라한 단어를 사용하니 어안이벙벙했다. 그가 아이돌에 관해 이토록 직설적인 말을 쓰는 건 어쩌면 처음이 아닐까.
“네, 음, 그, 드, 들어봤죠, 네…….”
“그런 말이 생긴 게 2세대 때거든.”
케이팝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아이돌이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을 확실하게 점령한 한국 아이돌계의 황금기.
수많은 스타들이 아이돌이란 개념을 확립했던 빛나는 시기다.
“그땐 여자 아이돌의 섹시 컨셉이란 게 본격적으로 시험되기 시작했거든. 사실 초창기에는 많이 지양되었어.”
현재의 관점에선 섹시라고 불리기도 힘든 컨셉을 시험했던 1세대 걸그룹들은, 대중들의 환호 뒤에선 수많은 험담과 비난 욕설을 들어왔다.
어느 1세대 걸그룹을 보고 섹스 그룹이라거나 창녀라고 언급했던 공인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사례를 보고도 그런 걸 시도하긴 힘들었지만, 결국은 등장하더라고.”
이는 흔히 ‘삼촌팬’이란 사회적 현상과 맥을 같이했다. 00년 후반부터 2014년까지의 기사를 검색해보면 이 삼촌팬이란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가 계속해서 높아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돌이란 게 학생들의 문화인데 어떻게 경제력 있는 나이 든 남자가 아이돌을 좋아할까? 그 자체로 이상 현상이었던 거지.”
학문적인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질 정도로 성인 남자인 아이돌 팬이란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런 기류에 맞물려 아이돌 제작자들은 걸그룹에 섹시 컨셉을 부여했다. 당연히 남자들이 좋아하리라 생각해서이고, 그 생각은 맞았다.
“이후론 대중과의 줄다리기였지. 기획자들은 조금씩 나아갔어. 과연 한국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선까지 용인해줄까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성필도 2000년대 후반의 한 충격적인 무대를 기억한다.
미성년자가 포함된 걸그룹이 정면을 향해 엉덩이를 살랑거리는 안무를 선보인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 성필은 먹던 밥을 뿜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다.
이런 게 텔레비전에 나와도 괜찮은 거야?
“수위는 점점 높아져 갔어. 팬들의 호응도 있었고 여러 경제적인 효과를 받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비난도 거세져 갔지.”
그 결과 섹시 컨셉은 2014년에 이르러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섹시란 이름으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아이돌 그룹들도 존재했다.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섹시 컨셉도 비범함의 경지에 오르면 예술이 될 수 있단 것의 증명이었다.
마돈나의 섹시함은 창녀란 비난을 넘어설 만큼 대단했고, 미국의 팝이 월드 뮤직이란 타이틀을 얻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녀 이후의 팝스타들은 신체적 매력을 가감 없이 퍼포먼스의 요소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섹시 컨셉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는, 소수의 그룹을 제외하면 솔로 아티스트들 뿐이었다.
“기획자들의 문제도 있지. 수위만 높이면 그 충격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결국엔 인기도 구가할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대중들은 지쳐버린 거지.”
때는 아직 뉴미디어의 영향력이 레거시 미디어보다 크지 않았을 때다.
여자 아이돌의 더해지는 섹스어필은 미디어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룰 만큼 큰 파장을 낳았었다.
그 영향은 대중에게로도 퍼져나갔다.
여자 아이돌에게 창녀촌의 명칭이 붙기도 했고, 사람을 보고 행사용이나 군인용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꺼리지 않았다.
그 결과 자살하는 이도 생겼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비난을 이어갔다.
“설하는 00년대 후반의 아이돌들을 보고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한 거지?”
“네, 네에. 혜빈 언니나…… 소녀 시절이나…….”
“빛나는 아티스트들이 많았지. 그런데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진했었어.”
미디어와 대중들의 본격적인 비난을 마주한 아이돌계는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비난은 아이돌만이 아니라 팬에게도 향했다. 특히 뜨거운 감자와 같았던 ‘삼촌팬’이란 존재가 그러했다.
어떻게 미성년자가 맨살을 드러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할 수가 있느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걸그룹을 좋아하는 거냐. 이게 사회적으로 옳냐.
거기에 대한 팬들의 대답은 잠정적으로 이러했다.
‘섹시하다고 생각하지만 섹스할 대상은 아니다.’
아이돌계가 방향을 튼 것처럼 팬들도 사랑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아이돌, 무대 위의 존재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더는 아이돌이 우러름 받는 존재로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이돌은 ‘돌봄 받는’ 존재가 됐다. 귀여워하고, 응원하고, 지지하고, 애정을 주는 대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비난받지 않으려면 아이돌도 그 위치에 익숙해져야 했다. 아이돌은 사업이며, 사업은 리스크를 줄여야만 하니까.
“2014년에서 2015년에 두드러진 그룹이 몇 있었지. 그분들 컨셉이 어땠는지 알지?”
“네. 청순이었잖아요.”
그래서 백설하도 가로 엔터에 들어올 무렵에는 청순 컨셉으로 데뷔할 줄 알았다. 대세는 청순이었으니까.
팬들이 사랑의 방향을 재정의한 것처럼 아이돌 제작자들도 사고방식을 바꾸었다.
제작자들은 비난을 감수하지 않기 위하여 섹시를 지우고 청순한 걸그룹을 내세웠다. 이는 아이돌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리라 생각되었다.
“1세대도, 2세대도, 결국 정점을 찍었던 그룹은 청순으로 시작했잖아.”
걸그룹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선 성적 매력이 박탈되어 이슬만 먹는 요정으로 보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섹시 컨셉으로 오염되었던 걸그룹 세계가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섹스어필이 없는, 순수하고 올바른 걸그룹으로 돌아왔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육체에 대한 욕망이 비난받는 사회에서 청순은 무엇보다 큰 섹스어필이 될 수 있어.”
“네……?”
“옅은 화장과 순한 얼굴. 화사한 드레스와 교복. 손을 맞잡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눈빛. 담백한 춤. 하늘거리는 치마. 무해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가녀린 몸. 그리고 점점 낮아지는 데뷔 나이. 이게 합쳐져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할지…….”
성필이 대답을 바라는 듯 말끝을 흐리자, 백설하는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섹시 컨셉이라면 천대받아 마땅한 땅 위에 선 청순 그룹의 성장이란 건 그런 의미야.”
결국 방향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물론 그 컨셉 자체로 나쁘단 게 아니다.
대중의 시선에 검열된단 사실 자체가 나쁘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아이돌은 인간일 수가 없었어. 이미지로 소비되어야만 했지. 인간 그 자체가 드러날 수 없어져 버렸어. 그냥 가상의 캐릭터야.”
인간이 아니라 이미지라면, 가상의 캐릭터라면, 그것을 소비하는 데에 대한 윤리적 부담감이 훨씬 줄어든다.
“오로지 하나의 이미지에만 고정되어 그 모습만을 드러내야 하는……. 다른 방향은 욕먹을까 겁이 나서 시도조차 불가능해진 거지.”
사람들이 아이돌이 물의를 빚었을 때 분노하는 정도는 이상하리만치 높다. 그 이유는 아이돌이 ‘인간’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감히 아이돌이 인간성을 드러냈기에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인식의 발로이다.
“2세대가 끝나고 확실해졌어. 걸그룹은 성녀가 아니면 창녀로 불릴 수밖에 없단 거.”
섹시 컨셉으로 가면 비정상적으로 욕을 먹는다. 또한 이미지는 재기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진다.
그렇기에 탑으로 가기 위해선 성녀가 되어야만 했다. 청순함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
1세대의 탑도, 2세대의 탑도 그러했다.
자본을 지닌 제작자들은 섹시란 것엔 눈도 돌리지 않고 청순에만 매진하였다.
“한국이 일본의 10년 전이란 말이 있는데, 알아?”
“아뇨…….”
“내 세대 때는 흔히 쓰던 말이야.”
당시의 아이돌 제작자나 업계인들은 그 말에 여실히 동의하였다.
케이팝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한국의 아이돌은 결국엔 일본을 따라가게 될 것이란 추측이 팽배했다.
일본 아이돌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카와이함(귀여움)이 한국 사회에서도 청순이란 이름으로 굳어질 것이며.
일본 아이돌처럼 직접 만나러 갈 수 있는, 즉 지역형 아이돌이나 지하 아이돌의 등장을 예견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처럼 걸그룹의 소비자 절대다수가 남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처럼…….
“사회적 소수의 오타쿠 문화가 될 거라고 다들 생각했지.”
그땐 성필도 아이돌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케이팝 아이돌이 아시아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기를 구가하는 와중에도, 그들의 후배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너무도 뻔했으니까.
2세대의 끝자락엔 아이돌이 차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지고 표절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서로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고 남의 것을 베끼기 바빴다.
제작자들은 이미 증명된 모델로만 돈을 벌자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증명되었듯 도전이란 욕을 먹고 사라질 뿐이니까.
또한 아이돌들도 자신의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게 어떠한 결과를 유발할지 알기에, 그런 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성필은 아이돌이 서구의 밴드 같은 모습이 되길 바랐는데, 어김없이 일본을 따라가게 되었다.
일본이 미국의 월드 뮤직이란 폭력적인 구분법에 대항하여 제이팝을 창조했으나, 현재는 그 이름이 퇴색한 것처럼.
케이팝도 그리될 것이었다.
“자, 여기까지가 대중의 아이돌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야. 설하네 부모님도 텔레비전으로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보신 거지. 설하한테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저, 이사님.”
백설하는 성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까부터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현재와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게, 현재는 이사님 말씀이랑 다르지 않나요? 섹시란 게, 그러니까 기사에서 ‘섹시하다’란 말을 쓰긴 하지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반응 같은 건 없고……. 섹시 컨셉이란 단어도 거의 안 쓰잖아요. 청순 그룹들이 다수인 것도 아니지…… 않나요? 굳이 따지자면 걸크러쉬가 더 많잖아요.”
“아, 그렇지. 케이팝 아이돌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갔어.”
일본의 카와이한 아이도루(アイドル)나, 버블검 팝을 노래하는 서구의 틴 아이돌과도 다르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
‘그런 머니, 그런 파워. 우린 관심 꺼버린 지 오래’
‘진심 없는 가짜 잘가 잘가, 우아하게.’
“3세대 아이돌이 등장했거든.”
아이돌의 세대를 나누는 건 시간이 아니다. 만약 세대의 기준이 시간이었다면, 현재의 아이돌은 5세대 아이돌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1세대와 2세대 아이돌 사이에는 한국 대중음악이 발라드만으로 가득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발라드 열풍은 1세대 아이돌의 댄스 음악에 지쳐갔던 대중들의 반응이었다. 대중은 리얼리즘적인 가사와 가수로서의 실력을 바란 것이다.
몇 년의 발라드 강풍 속에서 2세대 아이돌이 등장했다. 그들은 아이돌에 대한 대중의 의구심을 모두 지워버리고 음악시장의 정점을 당당히 차지했다.
또한 케이팝이란 이름을 만들어내고 아시아 시장을 점령했다. 그런 업적이 있기에 2세대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3세대 걸그룹의 시작을 알린 이들에게도 이러한 공이 있다.
“설하, 네 선배들.”
“제 선배님들이요?”
“그분들이 혁명을 일으켰어.”
말 그대로, 그들은 혁명을 일으켰다.
3세대 아이돌은 그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케이팝의 쇠락을 부정하듯 거대한 업적을 달성해냈다.
3세대 아이돌의 업적은.
“케이팝의 글로벌화.”
그로써, 한국의 아이돌에 대한 인식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