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뭐?”
성필은 깜짝 놀라서 천장만 보겠다는 다짐마저 잊어버리고 신아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신아름은 성필의 반응이 웃긴 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팀장님은 안 그래요?”
이건 장난도 아니다. 신아름이 별다른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한 말일 뿐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아름이 의도적으로 성필을 유혹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팀장님은 안 그래요?’란 대답에는 yes와 no가 존재하는데, no라고 답한다면 아무 일도 없이 끝난다. 그런데 yes라고 답하면?
그 답에 대한 대답으로 신아름은 어떤 말을 생각하고 있을까?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리란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혹은 ‘뭐야, 팀장님 진짜 그래요?’라며 혐오감을 비출 수도 있겠으나, 신아름이 성필을 혐오하기 위해 미끼 질문을 던질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아름이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일 거야.’
그렇기에 성필은 ‘응’이라고 답할 수 없고 그리 답해서도 안 된다.
“뭔 소리야. 내가 왜?”
“쌀쌀하네. 팀장님 남자로서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를 두근거리게 할 수 있단 거잖아요.”
“너 그거 다 미디어에 세뇌된 거야. 남녀가 같은 방에 누웠단 상황은 맥락을 제거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팀장님이 내가 처음으로 한 이불 덮은 남자예요.”
“그래, 그런 문학적인 수사들 말야.”
“아니 근데 진짜 상황 자체가 묘하지 않아요? 오늘 일 회사에 말하면 팀장님 바로 사장실에 불려갈 듯.”
“그만하자. 어머님도 계시잖아. 재미없어.”
“난 재밌는데.”
그리고 이어진 약 5초의 침묵.
신아름은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는지 뒤로 물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성필을 더욱 빤히 바라보았는데, 성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팀장님.”
“응.”
“나 부탁 하나 해도 돼요?”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줄게.”
“쪼금 부끄러운데, 팀장님 얼굴 잘 안 보여서 할 수 있는 부탁이거든요.”
“말해.”
“음, 그, 아빠라고 한 번만 불러봐도 돼요?”
그 순간, 성필의 자괴감과 죄책감이 정점에 이르렀다.
서로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겨우 용기를 짜내 하는 부탁이 ‘아빠’라고 불러보는 것인 애한테, 성필은 대체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인가?
미디어에 세뇌된 건 신아름이 아니라 성필이었다. 신아름이란 이름을 제거하고 그녀에게 여자란 딱지만 붙여 놓고선, 상황적 맥락만으로 자기 혼자 긴장해버렸다.
“왜 갑자기 머리 뜯어요?! 그, 그렇게 싫어요?”
“아니, 가려워서…….”
“싫으면 됐어요. 괜찮아요…….”
“불러.”
성필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신아름은 입술만 꾹 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성필을 항상 팀장님이라 불렀다. 처음 성필을 만났을 때 그가 팀장이었기에 굳어진 호칭이며, 사실상 ‘아빠’란 말의 대체어였다.
타인이 신아름에게 ‘왜 팀장님이라고 부르냐?’고 말할 때마다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우는 건 이런 맥락이 있었다.
신아름의 입장에서는 ‘왜 아빠라고 불러?’란 소리였으니까.
데뷔 전, 신아름이 장하양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장하양이 팀장님이란 호칭을 금지하다시피 했던 까닭이었다.
이 맥락을 모르는 장하양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신아름은 그게 고깝기 그지없었겠지.
“아녜요, 안 해도 돼요.”
“괜찮다니까.”
“……으, 아, 아빠.”
라고 말한 신아름은 새된 소리로 웃더니 얼굴에 손부채를 부쳤다.
“아, 저 진짜 미쳤나 봐요. 팀장님 보고 아빠래. 진짜 안 어울린다.”
“의외로 듣기 좋네.”
“말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에요. 부탁 하나 더 해도 돼요?”
“어, 뭐 딸래미라고 불러줄까?”
“아뇨. 오빠라고 불러 봐도 돼요?”
“엉?”
“아니…….”
신아름은 잠시 머뭇하더니, 그녀가 가지고 있던 한 가지 고민을 고백했다.
“가족…… 이라고 팀장님이 그랬잖아요? 그러면 팀장님이 아빠일까 오빠일까 계속 고민했거든요…….”
“그런 걸 고민했어?”
“이거 중요한 문제예요. 아빠랑 오빠 사이란 건 없잖아요.”
“삼촌?”
“아 삼촌은 뭔 삼촌이에요. 가족 같지도 않구만. 음, 그래서, 오빠라고도 불러보면 감이 좀 잡힐 거 같은데.”
“해도 돼.”
“오, 으, 오빠.”
…….
“아, 진짜 죽고 싶다.”
“너도? 좀 이상하긴 하다.”
“걍 팀장님이 제일 낫네요.”
“그치. 가족이란 게 꼭 혈연적인 호칭으로만 정의되는 건 아니잖아. 친근감 있는 호칭이 최고지.”
“하아.”
신아름은 어딘가 후련한 한숨을 뱉었다.
꽤 오래 대화를 나눈 것인 듯, 창밖에서 들어오던 달빛도 기울어 방 안을 다른 각도로 비추었다.
그에 따라 신아름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달빛을 받은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느슨히 풀어져 있었다.
밖에서 강인함의 가면을 쓰고 다니던 때와는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었다. 이게 신아름이란 인간의 맨얼굴이었다.
성필 자신은 볼 수 없지만, 그의 얼굴도 신아름과 비슷할 것이다.
“팀장님도 언젠가 결혼하겠죠?”
“그렇겠지.”
“그러면…… 우리 집도 안 와요? 명절이나, 음, 달에 한 번씩 오는 거나.”
“걱정을 너무 당겨서 하는 거 아니야?”
“왜요. 합리적인 고민인데.”
“내가 결혼해서 여기 안 오는 것보다, 네가 나랑 멀어지는 게 더 빠를걸. 너도 남친 생기고 결혼 생각할 나이 되면 나랑도 별로 안 만날 거야. 딸들을 다 그렇다더라. 슬프네.”
“저도 결혼하는 날이 와요? 제가 막 사랑하고 결혼하고, 그런 건 잘 안 떠오르는데.”
“올 거야. 그리고 내가 결혼식 때 너랑 팔짱 끼고 신랑한테 데려다주겠지.”
“그걸 왜 팀장님이 해요. 엄마가 해야지.”
“……그러게.”
전생에선 신아름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이렇게나 신아름과의 거리를, 둘 사이에 끼인 가족이란 개념을 공유해 볼 기회 자체가 없었다.
논리에 기반한 협의와 관계 정의가 없더라도, 마음만으로 가족이란 게 전달된다. 그리고 괜히 서로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다 보면 고민만 많아질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성필은 신아름과의 관계를 종잡기 어려웠다. 가족이지만 혈연은 아닌, 이 관계를 남들에겐 어떻게 설명하며 성필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신아름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너무 미래긴 하네요. 어차피 팀장님 최소 6년 동안은 결혼 안 할 텐데. 그 뒤로도 못할 수도 있고.”
“…….”
“왜요?”
“아니…….”
전생에서 조아라와 사귀었을 때가 떠오른다. 신아름은 조아라 이전의 여자친구에게도 그러했지만, 유독 조아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라가 내 단물만 빨아먹고 버릴 거라던가. 애초에 어떻게 띠동갑이 연애를 하냐면서.’
신아름 딴에는 걱정되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또한, 결혼을 생각할 나이에 어린애랑 재미로 연애하는 거 아니라면서 어찌나 볶던…….
“어차피 짝 못 찾을 거면 저랑 결혼할래요?”
결혼에 관해 생각하던 도중 청각으로 결혼이란 단어가 들어오니 성필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근원지가 신아름이란 것을 깨닫곤, 성필은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름아, 결혼은 쉽게 입에 담는 거 아니야. 특히 편의점에서 물건 고르는 느낌으로 말한 건 더 더 아니고.”
어린애들은 살면서 한 번씩 ‘나는 아빠랑 결혼할래’라거나 ‘엄마랑 결혼할래’ 같은 말을 하곤 한다.
그건 부모를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또한 언젠가 가족이란 관계가 끊길 거란 불안에서 나오는 말이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그 세상이 20년, 30년 뒤에 붕괴할 거란 건 너무나도 공포스런 일이다.
비록 20년이란 세월이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세상의 붕괴라는 파국이 찾아오리란 건 공포를 주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왜요. 어차피 팀장님 워커홀릭이라서 40대쯤에 결혼정보회사 등록해서 사랑도 없는 결혼할 거잖아요.”
“그냥 욕을 해!”
신아름도 유아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성필과 만난 지 7년이 넘었고, 그 7년은 가로 엔터에 오기 전의 1년을 제외하고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부성(父性)을 넘치도록 얻을 수 있었던 나날이었다.
즉, 신아름은 성필이란 가족을 얻은 지 고작 6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잃을 거란 지레짐작으로 겁을 집어먹는 게 이상하진 않다.
어린아이가 결국엔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끊어질 거란 걸 깨닫고, 자신이 아는 가장 강력한 사슬인 가족을 이용해서 ‘난 아빠랑 결혼할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왜요, 지금이랑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뭐 어때서요.”
신아름은 성필의 앞에서 결혼을 입에 담는다. 그 유아적인 발상을 듣고, 성필은 그녀가 얼마나 어린지 다시금 깨달았다.
당장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한 이불에 누웠단 사실에 긴장을 느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결혼의 의미는 알아? 부부가 어떤 건지?”
“으음, 팀장님이랑 지낼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지불할 수 있…….”
“뭐라는 거야?! 그딴 생각으로 결혼할 거면 차라리 결혼정보회사 통해서 만나는 게 100배 낫겠다!”
“엄마 깨겠어요.”
“아.”
“농담인데 너무 진심으로 화낸다. 다시 생각하니까 쫌 이상하긴 하네요. 우욱…….”
“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 당장 지워.”
“뭔 줄 알고요. 아, 말해줘요? 지금 이 상황에서 팀장님이 상의 단추 푸는…….”
“그럼 나도 방법이 있지. 나도 상상한다.”
“아 하지 마요! 소름 끼치잖아요! 딸래미 앞에 두고 뭔 상상하는 거야!”
“이제 나 아빠로 확정된 거야?”
“……모르겠어요.”
활달했던 신아름의 기세가 갑자기 식었다.
“팀장님은, 진짜 모르겠는데, 그냥 이대로…… 이대로, 그냥, 계속 이렇게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안 바뀌고.”
차라리 연습생인 채로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그것도 좋았을 텐데.
마치 초등학교로 가기 싫어하는 겨울 방학 때의 유치원생처럼, 신아름이 낮게 읊조렸다.
그에 성필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아름아.”
“네.”
“네가 나를 안 놓는 한은, 나도 널 안 놔. 우린 계속 이대로일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요? 나중에 막 결혼했다면서 우리 집에도 안 오고, 나랑도 안 만나주고 그러는 거 아니죠?”
“응.”
“막 여친이 왜 자기보다 예쁘고 어린 여자 자꾸 만나고 다니냐고 욕하면요? 그럼 여친이랑 헤어질 거죠?”
“…….”
“지금 고민해요?!”
“어, 어, 당연히 여친이랑 헤어지지…….”
미안하다 전생의 아름아.
그래도, 너 때문은 아니지만 헤어지긴 헤어졌으니까 지금의 내 거짓말을 용서해줘…….
“세상에서 우리 아름이가 가장 소중하니까. 뭣하면 양로원까지 가자.”
“양로원 옆방은 리카 거 아니었어요?”
“벌써 실버타운 메이트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네.”
신아름의 눈이 아까부터 끔뻑이는 게 보였다. 시간도 12시를 한참 넘어가니 졸리리라.
성필은 그녀의 어깨를 규칙적으로 쓸어주었다. 그리고 느슨하게 풀린 그녀의 눈동자를 잠이 들 때까지 바라봐주었다.
“아름아.”
“네…….”
“내년도, 내후년도, 10년 뒤에도, 오늘 이날 여기에 올 거야.”
“……헤.”
신아름이 눈을 감고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성필도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방금 신아름에게 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성필에게도 신아름은 소중한 사람이었고, 그건 둘 사이에 형성된 가족 같은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름이 너는 내 뮤즈였으니까.’
아직 3세대 걸그룹의 스타일이 확립되기 전, 성필은 아이돌 문화에 지쳐가기 시작했었다.
더는 걸그룹에 발전이란 없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10년 전이란 말처럼, 한국의 걸그룹도 일본을 따라갈 게 틀림없다.
일본처럼, 판에 박히고 오로지 남자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만 같은 모습의 걸그룹이 양산될 거다.
2세대 걸그룹이 찬란히 밝혔던 빛은 그 자체가 정점이었고 더는 변화가 없을 거다…….
그런 매너리즘 속에서 신아름이 나타났다.
‘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어.’
이런 아이라면, 신아름이라면, 퇴색되어 가는 아이돌계의 빛 속에라도 꼭 세우고 싶다. 그녀가 무대에 서는 걸 반드시 보고 싶다.
아니, 그녀가 아이돌계를 바꿀 것이다.
‘아름아 너는 불꽃이야.’
성필의 닳아버린 아이돌에 대한 사랑에 다시 불을 지르고, 또한 스스로가 세상을 밝게 비출 불꽃이다.
그 불꽃이 자진해서 성필을 떠나가지 않는 이상, 성필이 그녀를 먼저 떠나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성필은 아이돌이란 온기가 없고선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 * *
백설하가 설날에 본가를 방문하자마자 놀란 게 있다. 바로 둘째, 셋째 동생들의 키가 이전보다 훨씬 컸단 것이었다.
“어, 누나 왔어?”
“오하요(안녕).”
둘째와 셋째는 문틀에 철봉을 설치해두고 서로 보조해주며 운동하는 중이었다.
일단 이게 1차 충격이었다.
‘점점 수현이랑 체격이 비슷해지네……?’
그리고 셋째가 일본어로 인사한 게 1.5차 충격이었다. 듣자 하니, 소녀연맹 아이튜브를 보다 보니 리카의 영향을 받았단 모양이다.
‘소녀연맹이 중학생들한테 인기가 있나?’라고 생각해서 물어보았더니, 셋째가 2차 충격을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학교 축제 때 소녀연맹 춤췄거든. 걔랑 말 붙여보려고 소녀연맹 영상 보고 그랬어.”
중학생인데 당당하게 연애를 하려고 해?!
백설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자그마하니 과자나 사달라고 조르던 셋째가 언제 이렇게 커버린 것일까?
‘나, 나보다 더 빨리 어른의 세계로 가버리는 거야?’
아니면 벌써 가버린 거야?!
백설하는 2차 충격을 뒤로 하고 자신의 방을 찾았다. 그리고 3차 충격을 받았다.
“어, 누나 왔네.”
첫째 동생, 백수현이 자신의 방에 있다. 아니, 이젠 백설하의 방이 아니었다.
“내 방이야. 놀랐지?”
“…….”
예상하긴 했다.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 딸이 뭐가 예뻐서 방을 그대로 두겠는가. 하지만 백수현의 방은 백설하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좀 어지럽긴 한데 들어와.”
일단 벽에 붙여진 소녀연맹의 포스터들이 백설하의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항상 회사에서 보던 멤버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다행이라고 할까, 앨범마다 종류별로 포함되어 있던 모든 포스터가 붙어 있진 않았다.
‘앨범을 수십 장씩 사진 않았구나…….’
그랬다면 기쁜 동시에 걱정했을 것이다.
자신의 동생이 소녀연맹에게 애정을 품고 있단 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아이돌을 향한 애정이 아니라,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정열적인 애정을 말하는 것이다.
‘수현이가 이 포스터들로…….’
상상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고 속이 불편해졌다. 동생의 그딴 모습 따위 상상하고 싶지 않았어…….
“엄마 아빠는 만났어?”
“어, 어, 인사드리고 왔어…….”
백설하는 옛날에 자신의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정면의 벽에 걸린 자신의 포스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필 ‘롱 포’ 때의 것이었다.
옆트임과 뒤트임이 있는 정장 재킷에, 배꼽이 훤히 드러난 크롭 셔츠 차림이다.
백설하의 시선을 눈치챈 백수현이 정색했다.
“난 누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소녀연맹 설하를 좋아하는 거야.”
“……뭐라고 안 했는데.”
“설하랑 누나는 달라. 알지?”
백설하든 소녀연맹 설하든,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 포스터들 다 내가 모은 건 아니야.”
“어? 서, 설마 중고로 샀어?! 그러지 마!”
“아니. 채현이가 줬어. 김채현, 옛날에 말해줬지?”
“아, 학교 친구…….”
“걔가 중복 포스터는 나한테 주더라. 덕분에 이렇게 모았지. 내가 소녀연맹에 집착해서 모은 게 아니라고.”
“으, 으응.”
“특히 이 누나 포, 아니, 설하 포스터는 진짜 내가 산 앨범 구성품에서 나온 거 아니야.”
알겠으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누나 편하게 앉아. 왜 그러고 있어.”
“으, 응.”
백수현은 몇 개월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욱 컸다. 고등학교 2학년이니 아직 성장기가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키도 컸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얼굴이었다.
‘점점 선이 진해지네.’
남자답게 변해간다고 해야 할까.
옛날에 본 아버지의 군대 시절 사진을 닮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백설하의 아버지는 헌병이었는데, 그때 사진을 보면 정말 배우 뺨치는 정도로 잘생겼었다.
‘아빠가 장난으로 그러셨었지. 아빠 만나려고 여자들이 트럭으로 줄 섰었다고…….’
장난이나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백수현을 보자니 그런 확신이 더 짙어진다.
“누나 잘 지내?”
“응? 어, 잘 지내지.”
“그렇게 꿈꾸던 아이돌이 됐잖아. 그것도 되게 잘나가는 아이돌. 어때? 재밌어?”
‘재밌냐’는 질문에 바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이돌의 업무나 생활은 여러 방면으로 나뉘고, 그 모든 게 즐거울 수는 없다.
하지만 대체로 재밌다. 힘들고 괴로운 일도 분명 있지만, 이 생활은 백설하가 옛날부터 꿈꿔왔던 것이니까.
“재밌…… 지. 응, 재밌어. 다시 아이돌 되기로 해서 다행이야.”
다행이다, 라고 진심을 담아 미소 지은 백수현.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심각한 기운이 감돌았다.
백설하는 그게 진지한 질문이 나오기 전의 조짐이란 것을 알았다. 백수현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어려워했고, 감추려 해도 외면으로 다 드러나 버린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저, 누나.”
백설하는 여유롭게 백수현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고2면 아이돌 준비하기엔 늦지?”
“너 아이돌 되게?!”
백수현이 백설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백설하가 진정한 듯 보이자 천천히 손을 뗐다.
“조용해. 엄마 아빠가 들으면 어쩌게.”
“미, 미안.”
아직도 부모님이 아이돌을 곱게 보지는 않는구나. 백수현의 방금 발언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아이돌이 되고 싶어? 아니, 왜……?”
“아…… 그, 아직 확실한 건 아니거든. 학교생활 하다 보니까 난 공부엔 별로 재능도 없는 거 같고. 똑똑하질 않아서.”
백설하는 한구인에게 배운 지능과 학업 성적의 상관관계를 들며 반박하려다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공부 외의 분야를 택하려는 사람이 드는 이유가 ‘난 재능이 없어’라면, 그냥 노력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백설하는 추궁하는 대신 성필에게서 배운 경청의 태도를 다듬었다.
“그리고 누나도 알겠지만 난 잘생겼고?”
“……어, 음.”
잘생긴 건 맞는데 본인 입으로 말하니까 위화감이 엄청나다.
“춤이나 노래도…… 물론 연습생분들보다는 못하겠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고. 연습생 되면 열심히 할 거고.”
백수현은 SNS에 본인의 사진, 짧은 안무나 노래 영상을 올리곤 한다. 그 활동을 꽤 오래 해왔는데, 곧 팔로워 수가 1만 명을 돌파할 경지까지 와버렸다.
만약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지원하면 상당히 가산점을 받게 될 요소일 것이다.
“또…….”
백수현이 백설하의 포스터를 보았다.
“멋지잖아.”
그리 말한 백수현은 갑작스레 부끄러워졌는지 크게 웃으면서 말머리를 틀었다.
“그리고 주변에 예쁜 애들도 많을 거 아냐. 응, 그게 제일 크지. 돈도 벌고 인기도 얻고 주변엔 예쁜 애들이 넘치고. 진짜 이런 직업이 어딨어.”
크게 웃으면서 갑자기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건 백수현이 본심을 숨기는 방법이었다.
즉, 백수현이 아이돌이 되고 싶은 진짜 이유는 이전에 했던 말.
‘멋져서?’
백설하는 아까 백수현이 시선을 주었던 자신의 포스터를 보았다. 이제 보니, 다른 포스터와는 다르게 코팅도 되어 있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씻은 후, 백설하는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즐기는 대신 곧장 백수현의 방으로 왔다.
머리를 말리곤 침대 아래에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났을까, 백수현이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누나, 신경 쓰지 마. 옛날보단 낫잖아.”
“…….”
백설하는 이불 위에 앉아 멀거니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릴 진눈깨비 같아서, 백수현은 웃음을 지우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위로했다.
“옛날 생각 하면 지금이 훨씬 낫지. 저번에 누나가 집에 왔을 땐 진짜 폭언이란 폭언은 다 퍼부었잖아. 그러니까…….”
“수현아.”
“어, 응.”
“아이돌이란 게, 그러니까, 여자 아이돌이란 건…… 그런 이미지야?”
‘맨살 보여주면서 남자들을 홀리는.’
‘웃음 팔아서 돈 버는.’
‘춤이랄 것도 없이 가슴이나 엉덩이만 부각하는.’
‘은퇴하면 좋은 시선 받지 못하는.’
‘아양 떠는 게 일인.’
“그렇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
“뭔 소리야. 요즘 누가 그래. 걍 엄마 아빠가 옛날 사람이라 그렇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러기엔, 백설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녀는 리카나 조아라만큼은 아니더라도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을 자주 검색해보곤 했었다.
커뮤니티에 백설하의 이름이 써진 글에 들어가 보면 자주 움짤이 보인다. 무대에서 백설하가 춤을 추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만들어둔 gif.
백설하의 가슴이 크게 흔들리거나 그녀가 골반을 빼는 동작이 움짤의 대부분, 아니, 전부였다.
그곳에 달리는 댓글은 백설하의 머리를 긴장과 두려움으로 어지럽게 만들었다.
‘미쳤다’, ‘가슴 존나 크네’, ‘오우야’, ‘아이돌에 돈 바치는 새끼들=리액션 없는 인방에 별풍 쏘는 애들’, ‘얘 이름 뭐임? 존나 섹스하네 ㅋㅋㅋ’
어느 순간부터, 백설하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백설하의 노래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몸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그녀는 맨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몸이 퍼포먼스의 일부가 아니라, 몸이 백설하란 아이돌의 모든 것이라면…….
“……그럴까.”
“그렇다니까.”
백수현의 위로를 받아도, 백설하는 이 생각을 그칠 수가 없었다.
실은 부모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백설하가 확인하는 건 팬의 반응뿐인데, 실은 대중들이 걸그룹을 보는 시선은 부모님과 같지 않을까?
자신이 아무리 퍼포먼스를 갈고닦아 아이돌 팬들의 호응을 얻더라도, 결국 대중의 시선은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아이돌에게, 걸그룹에게 아티스트란 이름을 붙이는 건 정말로…….’
과분한 걸 넘어서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