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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62화 (262/760)

262화

위풍당당한 리카의 기세를 보자 성필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작업물은 정말 그의 예상 이상으로 잘 뽑혔다.

점점 더 리카가 우상에 가까워지는 듯해서, 성필은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황홀하기만 했다.

역사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성필에게 끝없는 에너지를 선사했다.

“이사님도 기쁘신가요!”

“응, 기뻐. 행복해.”

“행복하시면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앞으로 난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이 마지막 소원인 걸로!”

“알겠어, 뭔데?”

“금연이요!”

“너 담배 피워?!”

이럴 수가.

에리카도 모자라서 리카까지 흡연을?

정말 망할지도 몰라, 세상이 망할 거야!

“저 말고, 이사님이요.”

“나…… 나?”

“실버타운 메이트잖아요! 이사님이 먼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아예 저주를 퍼부어라 인마.”

* * *

민족의 대명절, 설을 며칠 앞둔 가로 엔터.

1층의 텔레비전 앞에 성필과 신아름, 조아라가 모여 걸그룹의 무대 영상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그냥 무대 영상은 아니고 MR 제거 영상이라는, 몇몇 아이돌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아 씨 노래 저렇게 부를 거면 아이돌 딱지 떼! 왜 무대에 올라서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저런 아이돌은 다 중국으로 보내야 해! 중국에서 립싱크 공연 금지 제한을 먹어 봐야 제대로 하지! 아무리 AR 쓸 수 있는 방송이라지만 공연이라고! 제대로 된 라이브 보컬은 공연 매너란 말야! 이런 영상이 퍼지니까 아이돌이 욕 먹잖아아아아아악!”

“…….”

신아름과 조아라는 며칠 새에 바뀐 성필의 모습에 이미 적응한 듯했다.

조아라는 내기한 대로 신아름에게 만 원을 넘겼다. 성필에게 들키지 않도록 테이블 밑으로 비밀스럽게.

“내 말 맞지? 이 영상 보여드리면 화내신다니까.”

“아니, 너무 과하게 화내지 않냐? 아저씨 어떻게 된 건데. 갑자기 남성 호르몬 폭발하나?”

“조아라, 방금 남자는 폭력적이라고 말한 거야?”

“어, 어?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

“이사님.”

그때 백설하가 일렉기타를 메고 성필의 근처로 왔다. 그녀의 표정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와 같은 기대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정규 앨범에 ‘run’이란 곡 있잖아요. 그거 마지막에 나오는 일렉기타 솔로 연습했거든요. 들어주실…….”

“나 지금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일(아이돌 MR 제거 버전 영상 시청하면서 욕하기).

“나중에 들을 테니까 가 있어.”

“느, 네헤에…….”

오랜만에 회사에 일찍 와서 연습도 했는데, 돌아온 반응이 이런 거라니.

백설하는 성필의 인색하고 차가운 반응에 놀라기도 놀랐거니와, 억울하고 슬퍼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흩뿌릴 것만 같았다.

칭찬받고 싶었을 뿐인데…….

“아앗, 시간이 지났네요!”

그때 어디선가 달려온 리카가 성필에게 붙었다. 그리고 그의 상의 팔 부분을 걷어냈다.

“아 리카 쫌 떨어지라고! 내가 한다고!”

“떽! 가만히 있으세요!”

리카는 성필의 팔뚝에 붙어 있던 파스와 같은 것을 떼더니 새로운 것을 붙였다.

그러자 성필이 이상 반응을 보였다.

“으오, 오, 어윽, 오, 오…….”

괴상한 소리를 낸 성필의 눈동자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아, 설하야. 기타 연습했다고?”

“네? 네, 네에, 네…….”

“와, 대단하다. ‘run’에 기타 솔로 걍 프로그램으로 찍은 거잖아. 어려울 텐데 그걸 연습했어?”

“네, 네, 선영 언니가 도와줘서…….”

“지금 봐도 돼?”

백설하는 얼떨떨해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이냐며 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카가 품에서 작은 박스를 꺼냈다.

[니코틴 패치.]

백설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성필과 백설하는 연주를 위하여 연습실로 향했다. 그 도중에 성필이 사과했다.

“미안. 금연 시작해서 조금…… 감정 제어가 힘들거든. 변명하는 건 아니고, 차갑게 대해서 미안해. 많이 기분 나빴지?”

“아, 아녜요. 저희 아버지도 금연할 때 그러셨거든요. 이해해요.”

“하아, 이게 이해를 바라면 안 되는 건데. 진짜 미안. 미안…….”

아까의 격정적인 성필과 전혀 달라졌다. 오히려 더 얌전해진 것 같기도 했다.

“설하 올해도 숙소에 있을 거야?”

“올해는 아니에요.”

백설하는 어머니에게 아이돌 활동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어머니와 직접적으로 연락은 못 했었다. 할 일은 잘 마치라는 격려인지 뭔지 모를 말만 전해 들었을 뿐.

“본가 가려고?”

그런 백설하가 이번 설에는 본가로 가려는 모양이다.

“네, 네. 그,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부모님이랑 냉전 중일 수는 없으니까요…….”

“잘 생각했어. 다행이다, 설하야.”

“이사님은요? 이번 설에도 본가 내려가세요?”

성필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응, 내려가야지.”

본가에 간단 말은 어폐가 있지만.

‘아니, 아름이네 집을 본가로 치면 되나? 음, 그건 역시 너무 나갔지. 본가란 말은 너무 쑥스럽고…….’

* * *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뵈고, 성필은 신아름의 본가에 도착했다. 신아름과 팔짱을 끼고 대문을 넘어서니 어머니의 반가운 인사가 돌아왔다.

그리고 신아름의 어머니가 송구스럽단 듯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어쩔까요, 지금 보일러가 고장 나서요. 바닥이 워낙 쌀쌀해서 올해는 못 자고 가실 텐데…… 죄송해요…….”

“아녜요 어머님. 어머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음, 보일러가 고장 났구나. 어머님이랑 아름이는 괜찮으세요? 뭐하면 호텔이라도 잡을까요? 설날맞이 호캉스?”

“잘 수 있잖아.”

신아름이 대수롭지 않단 것처럼 말했다.

“안방은 보일러 되잖아. 거기서 다 같이 자면 되지.”

“……응?”

“……어?”

성필과 어머니가 동시에 당황했다.

“걱정 마. 내가 엄마랑 팀장님 중간에 자면 되지? 몇 년 동안 쭉 자고 갔는데 올해만 패스하면 그렇잖아.”

“…….”

아름이랑 같은 바닥에서 잔다고?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신아름의 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게 문제였다. 어머니의 나이는 40대 초반으로, 성필과 신아름의 나이 차이보다 적다.

성필과 신아름의 관계는 남녀라는 프레임으로 가둘 수 없겠지만, 성필과 어머니는…….

‘……나랑 하양이 정도 차이네?’

성필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만약 자신이 장하양과 한 공간에서 자게 될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소속 회사 아이돌이라는 호칭만 떼어낸다면 그다지 거슬리는 부분은 없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지만, 성필과 장하양 사이의 나이 차는 남녀라는 그룹으로 묶기에도 힘들 만큼 커다라니 말이다.

아마 어머니도 그렇게 초연하지 싶지만…….

‘그래도 안 되지. 나랑 한 방에서 주무시면 얼마나 불편하시겠어.’

성필이 거절하려던 때.

“팀장님만 괜찮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돼요.”

어머니가 허락했다.

성필은 당황하여 입만 뻐끔거렸다. 몸에 밴 예의로 ‘아니요 아닙니다’라고 답하려던 때, 성필은 어머니의 눈빛과 태도에 서린 신뢰를 읽었다. 진실로 가족을 대하는 것이었다.

“아름이 말대로 올해만 넘기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방이 좁긴 한데, 어떻게든 자리는 낼 수 있을 거예요.”

성필은 신아름의 어머니로부터 이토록 신뢰를 받는단 게 기뻤다. 또한 자신이 일반적인 세간의 기준으로 사고했단 게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 가족이잖은가.

거의 매달 찾아뵙고, 명절마다 오는, 성필은 신아름의 또 다른 보호자이자 가족이었다.

딸인 신아름이 성필에게 보여주는 애정과 신뢰를 보자면 어머니도 성필을 믿지 않는단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럼 된 거죠? 엄마랑 팀장님 빨리 들어가요. 춥다.”

세 사람은 여느 설처럼 음식을 준비했다. 보통 신아름은 빠져서 핸드폰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이번엔 요리를 돕기로 했다.

“정말 할 수 있니?”

“엄마 나 요리 진짜 많이 해봤어.”

이는 사실이었다.

소녀연맹 숙소의 식사는 멤버들이 직접 준비하는 게 기본적인 규칙이었다.

그녀들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구인이 직접 제작한 레시피북으로 요리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 결과 신아름의 요리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믿고 맡겨. 뭐부터 할까?”

“그럼 동태전 구워줄 수 있을까?”

“나 물고기는 전 부쳐본 적 없는데…….”

“딸, 그냥 가 있어.”

신아름은 짐짝 취급을 받자 승부욕이 더 타올랐는지, 성필과 어머니의 곁을 알짱대면서 무슨 일이라도 더 하려고 했다.

“저 이거 할 수 있어요!”

“이거 소고기야. 태우면 아까우니까 내가 할게.”

“팀장님 왜 내가 태울 거라고 생각해요? 줘봐요.”

태웠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아 팀장님 소리 그만 질러요. 아직 고기 많잖아요.”

“네가 태운 거 100g에 2만 원이었다고!”

“꺄아아아악!”

좌충우돌 설 음식 만들기도 끝이 나고, 세 사람은 꽤 늦은 시간에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만약 신아름이 무리하게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면 더 빨리 끝났을 것이다.

“딸, 이번에는 그거 안 해? 막 달리기하는 프로그램 있잖아.”

“아…… 그건…… 폐지됐어.”

“어쩌다가?”

“인기가 없었겠지 뭐…….”

올해 설에 방영되는 아이돌 육상 금메달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폐지되지 않았다.

단지 신아름이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이 찍힌 것뿐이었다.

‘이번에 새로 생긴 멀리뛰기 종목에서 아름이가 철저하게 졌었지.’

하필 예선 멀리뛰기에서 김민주를 만나버린 신아름은 손도 발도 쓰지 못하고 즉각 탈락해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멀리뛰기 우승은 김민주의 차지가 됐다.

김민주는 멀리뛰기 중등부 전국 신기록 보유자니 당연한 일이다.

“하는데?”

어머니는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이돌 육상 금메달이 방영하는 채널을 찾았다. 그러자 신아름은 어머니의 손에서 리모콘을 격렬하게 뺏으려고 했으나.

[아, 김민주 선수 예선 4라운드에서 압도적인 신기록을 경신합니다!]

관중을 향해 사방에 손키스를 날리는 김민주의 뒤로,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의 신아름이 언뜻 잡혔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팬서비스를 마친 김민주는 신아름에게 달려와 코알라처럼 안긴 뒤 정수리에 키스를 퍼부었다.

신아름의 표정이 안 좋았음을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어머니가 그것을 보곤 미안한 기색을 담아 신아름의 등을 쓸었다. 신아름은 창피함에 못 이기고, 고개만 푹 숙인 채 밥을 깨작였다.

식사가 끝나곤 매년 펼쳐지던 신아름네의 전통 놀이, 고스톱이 펼쳐졌다. 승리는 모두의 예상대로 신아름의 어머니였다.

이어서 어머니, 신아름의 순으로 씻고 마지막 차례는 성필이었다.

“스읍, 하.”

성필은 심호흡한 뒤, 반 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세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오래된 주택 특유의 한기가 그의 피부를 시리도록 찔러왔다.

영하임이 분명한 이 공간에서 샤워를 마쳐야만 한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옷을 벗은 성필은 눈을 부릅뜨고 몸에 물을 끼얹었다.

“아아악……!”

바가지로 온수를 끊임없이 퍼부으며, 추위를 잊기 위해 소리를 질러가면서 몸을 씻었다.

성필은 최단 샤워 기록을 매년 경신해왔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기록을 갈아치운 듯하다.

세면실을 나오자 방 안의 훈기가…….

‘없어!’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했었지.

현재 이 집에서 따뜻한 곳이라곤 어머니의 침실뿐이다.

성필은 거실 바닥에 앉아 챙겨온 스킨과 로션을 바르면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어째서 눕기 전부터 준비를 하냐면…….

‘이거 아닌 거 같은데.’

신아름과 그 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잔다.

처음엔 가족이란 생각으로 흔쾌히 받아들였으나, 정작 취침 시간이 다가오자 성필의 심상은 어지럽게 일그러지기만 했다.

과연 이래도 될까?

같은 공간에서 자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필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아니, 걱정이라기보다 공포라고 불러야 알맞을 것이다.

“팀장님 언제 와요?”

성필이 시간이 지나도 침실로 오지 않자 잠옷 차림의 신아름이 데리러 왔다.

“어, 응. 지금 가야지.”

성필은 신아름과 함께 터덜터덜 침실로 갔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좁은 방의 크기가 훅 다가왔다.

주황색 장판 위에는 오래된 이불이 겹겹이 올라와 있고, 가장 위엔 꽃무늬가 수놓아진 진홍색의 덮는 이불이 있었다.

벽에 붙은 커다란 장롱과 화장대를 제외하곤 방 안을 차지한 가구는 없었다. 그런데도 세 명이 자기엔 비좁다.

‘옛날 시트콤에서 자주 보던 방 같네. 인테리어며 크기며…….’

모녀끼리 잔다면 적당할 크기겠지만, 건장한 성인 남성이 끼니 확 좁아 보인다.

성필은 오른쪽 끝에 앉은 어머니를 보았다. 그녀는 성필보다 먼저 눕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앉아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녀를 계속 앉혀둘 순 없었기에, 성필은 불안을 억누르고 어머니의 반대편 끝에 자리 잡았다.

“불 끌게요.”

신아름이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높은 웃음을 흘리면서 성필과 어머니의 사이에 끼어 들어왔다. 물론 성필보다는 어머니에게 가까운 쪽이었다.

“엄마, 오랜만에 딸이랑 자니까 좋지?”

“어제도 같이 잤잖아. 우리 딸은 숙소에 있을 땐 혼자 자?”

“응. 침대에서 잔다고 했잖아. 음, 조아라랑 리카는 매일 붙어서 지네들끼리 자긴 하는데…….”

“우리 딸 빼고?”

어머니는 딸의 교우 관계가 매우 궁금한 듯했다. 그리고 리카와 조아라가 항상 함께 잔다는 얘기를 듣곤, 혹여나 딸이 잘 어울리진 못하나 싶어 불안을 표출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신아름은 멤버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카가 조아라를 많이 좋아해. 회사에서 처음 만든 또래 친구고…… 옛날부터 많이 의지했나 봐. 그래서 숙소 들어와서도 항상 같이 잤어. 내가 안 친한 게 아니라 둘이 너무 친한 거야. 거의 뭐 애인 사이라니까.”

성필도 신아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멤버들의 입장에서 그녀들의 관계에 대해 들을 기회는 크게 없다.

심지어 그게 신아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희귀성이 더욱 커진다.

“조아라는 리카랑 자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침대가 좁고 더워진다고. 근데 걔는 싫다고 툴툴대면서도 리카 보고 나가라곤 안 해. 애가 워낙 순해 빠져서,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는 것도 잘 못 해.”

항상 조아라를 ‘미친년’이나 ‘재수 없는 년’이라고 부르는 신아름은, 실은 조아라를 상당히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재수 없고 싸가지없는 건 맞는데…….”

“아, 아름아. 팀장님 계신데…….”

“팀장님도 인정하는 거야. 팀장님 인정?”

“아니.”

“봐, 인정하시잖아. 걔 내가 싫어하는 건 다 하고 다녀. 사람 이름 앞에 ‘야’ 붙여 부르고, 사람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내 옷 계속 빌려달라 하고, 하기 싫은 연습 억지로 붙잡아서 시키고…….”

그래도, 그럭저럭 지내줄 만하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는 나쁘지 않다.

그게 신아름의 평가였다.

“리카는?”

어머니는 신아름의 말을 듣기만 하고 가끔 질문을 할 뿐,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신아름을 대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듬뿍 배어 있었다. 종일 신아름의 목소리만 들어도 행복하다, 그런 어머니로서의 따스함이 잔뜩 감돌았다.

“리카는…… 대단한 애지.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성필은 신아름의 평가를 듣고 내심 놀랐다. 그녀가 누군가를 이토록 솔직하게 칭찬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게다가 그 대상이 리카라니?

“착하고, 붙임성도 좋고, 게으르지도 않고. 걔 보고 있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어떻게 저러지 싶은 느낌? 무슨 철인 같아.”

“대단한 애다.”

“그치. 근데 나름 속에서 썩이고 있는 게 많아 보여. 그럴 만한 게, 고향에서 떨어져서 한국에 왔잖아.”

성필의 왼쪽 귀로 이불과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아름이 어머니에게 더 달라붙은 듯했다.

“나처럼 엄마도 자주 못 보고. 걔도 집이 그리울 텐데. 그래서 조아라가 있는 게 다행이지. 조아라가 거의 리카 엄마거든. 맨날 붙어서 자기만 하는 것만 봐도 그래. 어리광 부리고, 달라붙고, 막 ‘사랑해줘’란 분위기 풀풀 풍긴다니까. 아, 생각하니까 화나네. 걔 조아라한테만 ‘아라쨩’이라고 한다? 뒤에 쨩 붙이는 거 걔밖에 없어.”

“쨩…… 이 뭐야?”

“일본인이 사람 이름 뒤에 붙이는 애칭 같은 거. 친한 사람끼리 한다던데,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보기엔 설하가 괜찮더라. 애가 보기에도 착한 거 같아.”

“설하 쌤? 음, 착하지. 리더고 우리 얘기도 잘 들어줘. 근데 사람이 마음이 강하지가 않은 거 같아. 억지로 어른인 척하는 거 같고. 묵직하게 버티고 있기만 하지, 정작 중요할 때 결단 같은 건 못할걸.”

“애가 묵직해 보이긴 하더라.”

“응. 쌤도 힘들 텐데, 항상 우리들 신경 잘 써줘. 우리 무슨 일 생기면 쌤부터 찾아, 그래서. 숙소에 바퀴벌레 나온다거나 무슨 물건이 부족하다거나, 스케줄을 모르겠다거나, 아니면 그냥 힘들다거나…….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

“음, 하양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가득했다. 하지만 신아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밝고 통통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양 언니는…… 아, 이걸 엄마가 직접 봐야 하는데. 사람한테도 막 쎄한 분위기가 풍긴다? 엄마도 그런 사람 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골이…… 엄마?”

어머니가 잠들었다. 곧 규칙적인 호흡이 신아름을 넘어 성필에게도 전해져왔다.

“잘 자.”

쪽. 신아름이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는 소리. 이어서 또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선, 신아름이 어머니를 꼭 껴안은 듯했다.

“팀장님 자요?”

성필은 대답이 없었다.

자는 듯했다.

신아름도 더는 묻지 않고 베개에 몇 번 머리를 비비더니, 가장 편한 베개 위치를 찾고선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

사실, 성필은 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자야만 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은 뒤, 몸을 이완시키면서 잠을 청했다.

최대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의식을 깊이 떨어뜨렸다.

떨어뜨려…… 야 하는데.

‘몇 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필은 눈꺼풀에 드리워지는 잠기운에도 불구하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로 옆에 신아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자. 잘 수 있어.’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다. 잠을 못 자는 이유가 옆에 신아름이 있기 때문이라니.

성필이 두려워했던 상황이 그대로 펼쳐졌다.

그는 신아름이 중학생일 때부터 보아왔고, 전생과 합쳐 항상 그녀를 가족이라고 생각해왔다.

가족이라면 옆에 누웠다는 이유로 잠이 안 올 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성필은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성필이 신아름을 여자로 인식한다.

‘진짜 지랄하지 말라고…….’

성필은 손꿈치로 자신의 눈두덩을 팍팍 때렸다. 자괴감과 죄책감이 밧줄처럼 매듭을 지어 성필의 몸을 꽉 묶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옅은 불안을 느끼긴 했으나, 솔직히 성필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을 줄 알았다.

그야 지금까지 포옹하거나 팔짱을 끼고 손을 잡을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까.

신아름이 중학생일 당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성필로선, 그녀가 언제나 어린애처럼 보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 바로 옆에 누웠단 상황만으로 이렇게나 달라진다고? 심지어 신아름의 어머니조차 같은 방에 있는데?

‘박성필 너 뭐 하는 새끼야. 왜 잠을 못 자는데. 아름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지금 이 마음을 신아름이 안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십중팔구, 아니, 반드시 성필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성필도 자신도 그러했다.

가족, 딸처럼 여겨왔던 신아름이 옆에 있단 사실만으로도 심장에 쿵쾅거려서 잠을 못 잔다고?

비록 성필의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으나, 뇌는 착실하게도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비슷한 상황을 찾아내고 그 상황에 걸맞은 신경 물질을 뿜어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눈을 감기가 힘들다.

“뭐야, 팀장님 안 자요?”

성필이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옆을 보니, 어둠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다가오는 신아름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그의 뒤에는 차가운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 자는데 왜 대답 안 했어요?”

“……자고 싶어서. 너 또 계속 나한테 말 걸 거잖아.”

“나랑 말하는 게 싫어요?”

신아름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곧 둘의 거리는 30cm 이하로 줄어들었다.

신아름은 옆으로 누워 성필을 바라보지만, 성필은 천장만 보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잠이 안 와요.”

“커피라도 먹었어?”

“아뇨.”

신아름이 살짝 어이가 없단 듯 웃었다.

“저도 좀 이상한 건 아는데, 팀장님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봐요.”

“……어?”

“저희 같이 누운 적은 없잖아요. 뭐, 포옹이나 어부바나 팔짱은 꼈어도요. 아니, 전 진짜 진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신아름의 힘 빠진 웃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막상 보니까,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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