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60화 (260/760)

260화

리카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면서 실버타운 메이트가 스튜디오를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를 나오자마자 에리카가 낮게, 그리고 아직도 연습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살짝 거친 숨결로 웃음을 깔았다.

“리카랑 사이가 좋으시네요.”

“친구니까요.”

“이제 1년 됐나요?”

“아…… 리카랑 만난 지는 3년 넘었죠.”

“3년! 리, 리카가 미성년자일 때 만나신 거네요? 그렇게 되는 거죠?”

“네. 그런데 괜찮으세요? 연습 때문에 힘드시면 저는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에리카는 성필을 4층으로 안내했다. 심지어 4번 작업실이다. 진저가 성필을 데려와 노래했던 장소와 일치했다.

“듣고 싶은 노래 있으세요?”

에리카는 마치 노래방이라도 온 듯이 가볍게 물었다. 그 가벼운 질문에 성필은 상당한 고민을 거쳐야만 했다.

성필의 우상이던 정호환의 인터뷰를 볼 것이냐, 아니면 케이어스 에리카의 노래를 들을 것이냐 수도 없이 갈등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후회는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에리카 씨가 권해주셔서 온 것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말하는 건 보통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하다. 거절당하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음, 첫 번째 곡은 역시…….’

“‘카오스’요.”

“저희 데뷔곡이네요.”

에리카는 키보드 앞에 앉아 손가락을 조심스레 건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각도를 조정한 뒤 ‘크흠 크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 담배 끊었어요. 방금 건 정말 목 컨디션 확인한 거예요.”

“네…….”

HPT 뮤직 어워드 시상식이 끝난 날. 에리카를 바라보는 성필의 시선엔 다시금 아이돌을 대하는 동경이 자리 잡았었다.

그런데 담배 이야기가 나오자 그 동경이 눈 녹듯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에리카 씨를 존중하기로 했지만…… 역시 잘은 안 되는구나…….’

천사가 지상으로 하강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에리카는 날개라는 아우라를 잃고도 충분히 아이돌리시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성필의 마음속에 그녀를 위한 왕좌는 없다. 아마도.

‘이젠 정말 진저 씨뿐이야……!’

그렇다고 기대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무려 케이어스의 에리카가 직접 불러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어떻게 기대가 안 되겠는가?

“후우.”

성필의 속도 모르고, 에리카는 눈을 천천히 감은 후 마음속으로 강렬한 의지를 다잡았다.

‘진저의 노래를 듣고 우셨댔지?’

그럼 자신의 노래를 듣고는 기립 박수 갈채 오열할 것이다.

‘아이돌에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시라니까.’

이건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하다. 직접 그의 감수성을 확인하고 싶을 뿐.

진저와 승부를 가리겠다거나 하는 유아적 발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승부를 가린다면 에리카 자신이 승리할 게 너무도 자명하니까.

“시작할게요.”

그렇게 막을 올린 에리카의 노래는 상당한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에리카의 능력 자체도 뛰어났으며 그녀가 부르는 건 케이어스의 데뷔곡이었다.

지금까지 수천 번은 더 불렀을 노래이니 실수란 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또한 곡 해석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애초에 이건 케이어스의, 에리카의 이름이 걸린 노래다. 이 세상 누구보다 에리카가 잘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지상에 펼쳐진 걸작이자 아이돌계에 길이 남을 보컬 퍼포먼스. 그것을 끝낸 에리카는 목구멍에 남은 열기를 가라앉히면서, 감정을 잡느라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데.

“와, 진짜 잘 부르시네요.”

“……에?”

성필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박수만 칠 뿐, 눈물 따위는 조금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진저의 노래를 듣곤 울었댔는데?

건반을 짚은 에리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끝나셨으면 저 이제…….”

“안 끝났어요.”

에리카는 일어나려던 성필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다시 의자에 앉혔다.

성필이 당황하자, 에리카는 싱그럽게 찾아올 봄마저도 자리를 내어줄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한 곡으론 아쉽잖아요?”

성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에리카의 호의를 보아 이곳에 왔을 뿐, 리카의 인터뷰를 참관하는 것이 KS 엔터로 온 원래 목적이다.

‘두세 곡 정도 듣고 가도 괜찮겠지.’

그 정도면 에리카도 만족할 것이다.

“그렇네요. 앙코르 외쳐드릴까요?”

“엎드려 절받고 싶진 않아요. 다음 곡으로 앙코르 받을게요.”

그렇게 에리카의 리사이틀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성필의 눈에서 눈물을 빼놓기로 작정했다.

‘안 우셔?’

보컬리스트로서 기교의 한계를 시험하는 곡부터,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기 위해 만들어진 곡까지.

‘이래도?’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10분, 30분, 1시간이 지나도록 성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박수가 전부였다.

‘이래도 안 울어?!’

1시간 10분 경과.

에리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예 건반에 기대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저, 에리카 씨, 힘드시면…….”

성필은 몸이 굳었다.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에리카의 눈동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언뜻 원망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에리카, 씨……?’

사람이 달라 보인다.

에리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만인의 찬사를 받아 마땅한 아이돌이다. 그녀의 인격이나 자애로움은 현재에도, 미래의 업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에리카와 만나 본 사람 중 그녀를 욕하는 사람 따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성필의 눈에 비친 에리카는, 평소 그녀의 모습이나 평판과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아니, 굳이 평소의 그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에리카에게선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는 듯했다.

“저…….”

이런 경우라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다. 성필 자신이 무언가 에리카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단 것이다.

그 이유를 묻기 직전,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박 이사님 엄청 즐거우신가 보네요! 돌아오실 생각도 안 하시고요!]

리카였다.

성필은 다행이란 마음으로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에리카 씨, 저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네.”

에리카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데 모아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러자 머리칼 사이로 번득이던 눈빛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남은 건 봄바람과 같은 싱그러움을 갖춘 에리카의 웃음이었다.

“저도요. 같이 가요. 아, 즐거우셨어요? 중간에 실수는 없었죠?”

“그럼요. 다 완벽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안 울어 안 울어 안 울어 안 울어 안 울어 안 울어 안 울어?

“헤헤, 다행이다.”

에리카가 수줍게 자신의 손바닥을 맞대었다.

둘은 자정의 인터뷰가 이뤄졌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성필은 그곳에 가자마자 뚱해져선 팔짱을 끼고 있는 리카를 보아야만 했다.

성필은 리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검지로 콕콕 찔렀다.

“야, 리카.”

“…….”

“야, 삐쳤냐?”

“…….”

“야야, 리카.”

“…….”

“삐쳤냐니까.”

“화난 거예요! 에리쨩이랑 수다 떠는 걸 너무 좋아하는 우라기리모노(배신자) 박 이사님은 섬세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요!”

“수다 안 떨었어.”

“그럼 한 시간 넘게 에리카가 노래 불렀단 건가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불렀는데?”

“에리쨩 스고이(대단해)?!”

에리카는 쑥스러운 듯 옅게 웃었다.

“정 이사님, 인터뷰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필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활기차게 변한 정호환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아닙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영상 수익의 50%는 제가 보내드린 계좌로 송금 부탁드립니다.”

“다아, 당연하죠오, 네.”

“으하하! 설마 제가 돈을 받겠습니까? 이시카와랑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 나눈 것만 해도 즐거웠습니다.”

정호환과 에리카는 스튜디오를 나서는 성필과 에리카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둘이 나가고, 촬영에 도움을 주었던 인력도 전부 빠져나가자.

“에리카, 뭐가 그리 분해서 그러냐.”

“…….”

에리카는 아까 성필이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의 리카가 떠오를 만큼 뾰로통해져선 시선을 날카롭게 내리깔았다.

“박 이사님이요, 제 노래를 듣고도 안 우셨어요.”

“……음, 요즘 밈인가? 내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뭔가 울어야 하나?”

“진저 노래 듣고는 우셨댔어요. 소녀연맹 아름이가 민주랑 ‘라우더’ 맞춰보러 회사 왔을 때요. 그런데 저는…….”

에리카의 말투는 너무나 처량하여, 처음 그녀를 보는 사람조차 절로 동정심을 가질 것만 같았다. 마치 겨울철에 들판에 홀로 선 얇은 사철나무처럼 쓸쓸함이 한껏 느껴졌다.

“진저의 노래를 듣고?”

진저는 케이어스 내에서 보컬 실력이 가장 떨어진다. 연습 부족은 아니고, 한국어의 발음이 익숙하지 않아 자연스레 보컬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선곡 문제는 아니고? 같은 곡으로 불러봤나?”

“아니요. 저는 모르는 거였어요.”

“어떤 거길래.”

“이사님이 만드신 연습곡이요. 진저네 전통 노래 가사 붙인 거요.”

정호환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곡은 원래…….

“……그래, 울었다고. 박 이사님이.”

“정 이사님?”

정호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에리카는 우울했던 태도마저 벗어던지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는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눈동자를 살짝 위로 치켜올리는 중이었다. 이 간단한 동작에는 평소의 정호환에게서 볼 수 없는 의기소침함이 배어 있었다.

“그 곡을 듣고 울었다, 라…….”

성필은 그 곡에서 무언가를 보았던 것일까.

‘고맙구만, 작곡가로서.’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정호환은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저에게 연습곡으로 주었던 건 원래 케이어스의 컴백곡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물건이었으니까.

‘오늘 이시카와한테 해줬던 충고는, 어쩌면 나한테 가장 필요한 거였을지도 몰라.’

* * *

KS 엔터를 나온 둘은 간단하게 토스트를 사 먹으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리카는 성필이 에리카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냈단 데서 마음껏 질투를 표현했다.

“에리카와의 토모다치(친구) 관계가 실버타운 메이트보다 앞서는 건가요! 오늘 박 이사님한테 실망했어요!”

“어쩔 수 없잖아. 에리카가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중간에 뛰쳐나오는 건 안 되지.”

“이사님, 친구에도 급이 있어요! 그리고 급이 높은 친구한테 더 잘해줘야 하는 거예요!”

“너 엄청 깬다.”

“제 급이 가장 높아요!”

“아닌데.”

“에엑?!”

“학교 친구라거나, 내 다른 친구들은 너보다 훨씬 오래 만났잖아.”

“그으, 그건, 그렇지만요…….”

리카가 풀이 죽자, 성필은 방금의 차가운 말투와는 달리 따스함을 잔뜩 담아서 그녀를 위로했다.

“봐, 어떤 기준으로든 친구에 급을 나누면 이렇게 되잖아. 친구는 다 똑같은 친구인 거야.”

“……그래도 아타시(저)는 친한 친구인 거죠? 에리카보다는 더 가까운?”

“쓰읍, 급 나누지 말라니까!”

“대답해주세요!”

“꼭 해야 해?”

“히도이(너무해)……. 이러다 케이어스 프로듀서팀으로 영입 제안 오면 바로 가실 거 같아요…….”

“아니, 당연히 너랑 더 친하지. 나 에리카 씨랑 존댓말 하는데.”

“그럼 친구 아니지 않나요?”

“토모다치(친구) 맞거든?!”

“바로 반박?!”

간단히 식사를 해결한 후, 둘은 차로 돌아오자마자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다.

리카는 조수석의 차가운 시트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성필의 패딩 주머니에 손을 쏙 넣었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 든 손난로를 휙 빼갔다.

“도둑이다!”

“이런 게 있으면 저한테도 주셔야죠!”

“그렇다고 훔치는 건 너무하잖아.”

“어쩔 수 없네요!”

리카는 다시 성필의 주머니에 손난로를 반납했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조금만 빌릴게요!”

“불편하니까 그냥 가져가.”

“에에, 부끄럽나요?”

“그래.”

“앗, 또 저 속이려는 거죠! 이번엔 안 속아요!”

“진짜 부끄러워서 그래…….”

“에엑?!”

리카가 손을 빼내자 성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띠었다.

“이제 누가 부끄럽지?”

“속았다!”

“정 이사님한테는 많이 배웠어?”

많이 배운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을 배웠다.

“네. 아타시(저) 영감이 마구마구 솟아나요!”

어쩌면, 오늘 안에 곡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 어떤 영감?”

“음, 그럴 기회가 있다면의 이야기지만요. 만약 제가 만들 곡으로 라이브를 하면…….”

그 광경을 떠올린 리카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음 같은 게 아니라, 정말 행복이 담겨 있었다.

“멤버들한테 프릴이 잔뜩 달린 귀여운 레이스를 입히고 카와이한 춤을 추게 할 거예요!”

“……응?”

“설하 언니한테는 분홍색! 하양 언니한테는 하얀색! 아름이는 양 갈래머리에 리본을 씌울 거구요, 아라쨩한테는 특히 더 귀여운 옷을 입힐 거예요!”

“어…… 카와이 베이스도 라이브가 가능한가? 카와이 베이스라도 EDM이잖아.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

멤버들은 하늘에 기도해야만 한다.

리카의 이 의지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근데 정호환 이사님이랑은 무슨 얘기 했어?”

자정의 인터뷰는 소녀연맹의 콘텐츠이기도 하지만, 정호환을 인터뷰한다는 특수성으로 인해 KS 엔터의 도움을 받았다.

추후 촬영 파일이 도착하면 성필도 보게 될 테지만, 리카가 정호환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재밌는 거 배웠어요!”

“뭔데?”

“사람을 화나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아시나요?”

“글쎄. 욕하거나 그런 건가?”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거래요! 그리고 두 번째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