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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58화 (258/760)

258화

정지음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전.

리카는 더는 작업만 지속하긴 힘들 것 같아서 기분 전환을 도모했었다.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이야! 휴식은 이걸로 끝이야!’

리카의 기분 전환이란 한구인의 수업이었다. 그는 휴가 기간임에도 배움을 바라는 리카를 보곤 감동하더니, 경리 권아인을 쏘아보길 그만두곤 수업을 준비했다.

권아인은 상사가 자리를 비우자 평소보다 더 싱글벙글하여 업무에 몰두할 수 있었으니, 둘 다에게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으리라.

“리카 씨, 어떤 걸 배우고 싶으십니까?”

“음악이요!”

한구인의 음악사 강의는 후기 낭만파를 마지막으로 끝났었다. 이후로는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성필이 곧장 록의 흥기로 넘어갔었다.

“아타시(저)는 작곡가니까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해요!”

“모처럼의 휴식이잖습니까. 굳이 자기 계발 시간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요!”

한구인은 리카의 작곡가적인 열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의 클래식 수업은 후기 낭만파에 이어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낭만파는 음악인 동시에 극(劇)이었습니다. 악극(樂劇)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음악에는 이야기가 있었죠.”

“아이돌의 세계관처럼요!”

“예. 복잡하고 감성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뛰어넘으려 했던 고전파보다는 구조가 단단하지 않았습니다.”

낭만파는 여전히 시대의 조류였으나 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점점 생겨나게 되었다.

“근본이 없는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죠. 리카 씨, 이사도라 덩컨을 아십니까?”

“아라쨩한테 들었어요!”

최초로 창작 무용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안무가, 현대에 존재하는 모든 댄서의 스승이라 칭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불멸의 업적을 달성했던 세기의 무용수조차 낭만파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극(Drama)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음악의 감정의 환희라면서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섞인 악극(樂劇)은 무의미하다고 말했었죠. 그리고 이러한 불만에서 음악사상 가장 혁명적인 조류이자 가장 견고한 체계이며 가장 정렬된 음악적 방법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고전파의 체계를 넘으려고 했던 낭만파가 또 다른 체계를 불러온 거네요!”

“그렇습니다. 음악의 역사란 항상 반복되는 법인 거 같습니다.”

한구인은 수업에 열렬히 참여하는 리카를 대견한 듯 바라보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게 바로 쇤베르크를 시조로 하는 12음주의입니다.”

한 옥타브 안에 존재하는 12개의 음을 중복하지 않고 열을 세우는 것이다.

7개의 음만으로 예를 들면,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중복하지 않고 조합과 재조합을 거듭하여 파트를 채우는 것이다. 이게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야말로 질서의, 질서에 의한, 질서를 위한 작곡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극단적이네요!”

“그렇습니다. 자유롭고 개성적이던 낭만파를 저물게 한 건 극단적인 질서와 체계였습니다. 어쩌면 장르를 융합하는 게 특성인 아이돌의 음악도, 미래엔 장르 음악과 같이 특정한 형태로 굳을 수도 있겠습니다.”

리카는 한구인의 수업을 들으면서 작업에 대한 고민은 저 멀리 날려버렸다. 강의실 안, 리카에게 남아 있는 건 오로지 지혜에 대한 욕구뿐이었다.

수업이 마무리에 접어들자 리카가 오늘 배운 내용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작곡가들은 대단해요. 항상 완전히 새롭고 더 나은 걸 만들잖아요!”

“더 나은 건 없습니다.”

“네?”

“12음주의 음악들이 낭만파 음악보다, 낭만파 음악이 고전파 음악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진화한 거잖아요?”

한구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진화가 아니다’라고.

“저는 계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습니다.”

“하지만, 12음주의랑 낭만파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낭만파가 없었으면 12음주의도 없었겠죠. 정반합(正反合, 헤겔 변증법에서 논리 전개의 삼 단계)입니다. 세상 모든 창조물은 과거로부터 살을 덧대거나 뺀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움을 위해선…….”

리카는 그다음 말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깨달음을 담은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토대가 필요해요……!”

“맞습니다. 아무리 재능 있는 이들을 독방에 모아두고 수백 년을 토론시켜도, 토대가 없이 12음주의를 창조해낼 순 없을 겁니다.”

자기 자신의 세계를 퍼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말라버린 광산을 더 깊이 팔 게 아니라, 새로운 광산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맞아요!”

“리카 씨?”

리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선 나올 것도 안 나와요!”

그녀는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곤, 최전방 수색대 출신인 한구인에게 경례를 했다.

손바닥이 보이고 각도 흐트러져 있어서, 한구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기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경례였다.

“아타시(저), 자아 찾기 여행 시작합니다!”

“아, 예.”

“세상 모든 걸 배우고 돌아올게요!”

그렇게 리카가 떠나가고, 한구인은 강의실에 홀로 남았다. 그는 수업 내용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수가 될 걸 그랬나?’

왜 이렇게 가르치는 게 재밌을까. 아니면 소녀연맹 멤버들이라서 가르치는 게 재밌는 걸까?

어쩌면 리카처럼, 한구인 자신에게도 자아 찾기 여행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 *

성필은 남몰래 가지고 있는 습관이 있었다. 바로 멤버들이 근처를 지나갈 때 숨을 참는 것이었다.

그녀들에게선 항상 샴푸나 린스, 향수 향이 난다. 그런데 성필이 그녀들의 향을 맡고 ‘좋다’라고 생각하면, 33살이 된 입장에서 인생이 끝장났단 생각이 들 것만 같다.

항상 멤버들의 외모로 주접을 떨지만 향기를 좋다고 생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성필 스스로가 규정한 한계였으며 양보할 수 없는 기준선이었다.

“맡아보세요.”

그런데 그게 지금 끝날 듯하다.

장하양은 손목에 향수를 뿌린 뒤 성필을 향해 내밀었다.

“이게 그거야?”

“네. 페로몬 향수요.”

얼마 전 숙소에 있었던 일인데, 백설하가 페로몬 향수를 주문했다. 요즘 아이튜브에 시도 때도 없이 광고하는 것이었는데 호기심에 샀다는 모양이다.

당연히 들킨 그 날, 백설하는 신아름에게 가루가 되도록 놀림당했다. 대체 누구를 홀리려고 페로몬 향수 같은 걸 주문하냐고 말이다.

‘그, 그냥 호기심으로 산 거야. 별로 좋지도 않네…….’

백설하는 그렇게 말하며 향수를 공용 비품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하양이 회사에 들고 와서 성필에게 맡아보라고 하고 있다.

“꼭 내가 해야 해?”

“네. 남자시잖아요. 정말 그런 게 있는지 궁금해요.”

“그런 거?”

“DNA로부터 오는 끌림? 페로몬이라잖아요.”

당연하지만 페로몬 향수 같은 건 사기다. 애초에 후각적으로 이성에게 끌리는 건 사회적으로 습득한 지식으로 인한 것이니까.

향수는 전혀 인간에게서 나는 향이 아님에도, 이성이 향수 냄새에 끌리는 게 그 증거다.

사람들이 향수를 뿌리고 다니며 그게 경험적으로 축적되니, 향만으로도 이건 여자 향이다, 남자 향이다란 생각이 들게 되어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성필은 이런 자신의 지식을 열렬하게 어필했다. 그러자 장하양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부끄러우세요?”

“스읍, 하아, 스읍, 하아.”

성필은 ‘부끄럽냐’는 말을 반박하기 위해 장하양의 손목에 코를 박을 듯이 가져가서 마구 숨을 들이켰다.

“음…….”

“어때요?”

“그냥 좋은 향이다 싶은데?”

“DNA로부터 오는 끌림은 없으세요?”

“왜 그 말에 집착하는 거야.”

“그게 이 향수 캐치프레이즈거든요.”

백설하는 그 캐치프레이즈에 당해서 페로몬 향수를 사버린 건가.

확실히 대학에서 광고를 배운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 백설하와 같은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 이사님은 향수 뭐 쓰세요?”

“딱히 정해둔 건 없어. 떨어졌다 싶을 때 잡지에서 광고하는 거 하나씩 사고 그래.”

“향수는 그거죠? 이성을 유혹하려고 뿌리는 거. 누구 유혹하시려구요?”

“그것보다는 패션의 의도가 강하지. 사람마다 자주 입는 스타일이 있잖아. 그 종류라고 하면 이해가 돼?”

“거짓말하지 마세요. 누구 유혹하려는 거예요.”

“답정너네.”

“저라구요……?”

“어?”

“‘답은 정해졌어, 너’의 줄임말 아니에요? 같은 회사 아이돌한테…….”

“아니야 그런 뜻 아니야!”

장하양이 손을 활짝 펼쳤다.

“농담! 아하하, 이사님 당황하는 거 너무 웃겨요.”

“네 미래가 걱정된다…….”

연애 금지가 풀려서 장하양이 저 외모를 마음대로 휘두를 때가 온다면, 그녀의 아래에 쌓인 구애자들의 시체가 백 단위는 우습게 쌓일 것이다.

마치 가로등 아래에 타서 쌓인 부나방들의 사체처럼…….

“하양아, 휴가인데 회사 너무 자주 오지 않아?”

장하양은 페로몬 향수를 손목에 뿌리면서 언뜻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하하, 회사 말고 갈 곳도 없는걸요.”

참으로 씁쓸한 대답이다.

어릴 때부터 여가를 제대로 보낸 적이 없으니, 자유가 주어져도 무엇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 와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 보면 저도 쉰다는 게 느껴져서 좋아요. 저만 놀고 있잖아요. 뭐랄까, 카페 안에서 창밖으로 비 맞는 사람들 보고 있는 느낌?”

“그게 재밌어……?”

“아니요.”

성필이 아연하게 되묻자 장하양이 정색하면서 곧장 ‘아니요’라고 했다. 부정이 너무 빨라서 성필이 당황할 지경이다.

“아, 혹시 이사님 제가 불쌍하세요?”

“응?”

“휴가를 받았는데도 어디 놀러 가지도 않고 있잖아요.”

“뭐…… 불쌍하다기보다는 안타깝지.”

장하양은 향수 뿌리기를 마치고 향수병에 뚜껑을 닫았다.

“그럼요…….”

“이사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리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다짜고짜 성필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차 태워주세요!”

“어? 응? 갑자기? 어디 가는데?”

“엘릭 오빠 작업실이요! 방금 지음 오빠 수업 마쳐서 겨우 시간 낸 거예요!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다구요!”

요즘 리카는 정지음에게서 작곡 강의를 듣느라고 시간이 많이 없다.

성필도 구경을 간 적이 있는데, 정지음은 무슨 선문답 같은 것을 던져둔 뒤 리카를 뒤에서 가만히 감시하기만 했다.

수업이라는데, 대체 무슨 수업인지 알 수 없는 게 특징이었다. 정지음은 선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야간 자율 학생 감독 선생님에 가까웠다.

“엘릭 씨는 왜?”

“배울 게 있으니까요! 아타시(저)는 모든 작곡가들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더 강해질 거예요! 흡성대법이에요!”

“이젠 라노벨이 아니라 무협도 읽는구나.”

“드라마로 봤어요!”

“저기, 리카.”

장하양은 달아오른 분위기와 달리 차분히 리카를 불렀다.

“박 이사님도 스케줄이 있으신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면 실례잖아.”

“아, 그런가요. 그렇네요…….”

리카의 어깨가 시무룩 쳐졌다. 하지만 그때, 성필이 격려하려는 듯 리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왜냐하면 우린.”

“앗!”

성필의 사인을 받아들인 리카가 팔을 사선으로 번쩍 들었다. 그러자 성필도 팔을 들어서 그녀와 팔을 교차했다.

허공에 두 사람의 팔로 이루어진 X자가 만들어졌다.

“실버타운 메이트!”

“실버타운 메이트……?”

마치 짠 듯이 절도 있는 포징에 장하양이 아연실색하며 되물었다.

“하이(네)! 박 이사님이랑 저는 실버타운 메이트예요! 실버타운까지 우정을 이어가기로 약속했어요!”

“친구계약서 3조로 추가됐어.”

“왜요……?”

“많은 일이 있었지.”

얼마 전, 성필이 장난으로 리카에게 ‘비즈니스 친구’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리카가 노발대발하면서 그럼 에리카와의 ‘토모다치 관계’는 뭐냐고 되물었다.

성필은 감히 에리카를 깎아내릴 수 없었고, 에리카보다 리카가 더 친한 친구인 게 확실했으므로 ‘비즈니스 친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관계가 필요해졌다.

그렇게 실버타운 메이트가 만들어진 것이다.

“같이 양로원도 들어가는데 차라고 못 태워주겠어. 리카, 가자!”

“하잇(넵)!”

“하양아 다녀올게.”

성필과 리카는 왁자지껄 떠들면서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

왜 성필이 직접 가지? 매니저 팀은 이럴 때 필요해서 있는 걸 텐데…….

장하양은 뚱하니 연습실 바닥에 몸을 뉘었다.

“심심해.”

정확하게는, 이제 심심해졌다.

장하양은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가 자신의 손목을 코로 가져갔다. 가볍게 손목에 덧씌워진 향기를 맡곤 낮게 숨을 내쉬었다.

‘설하 언니, 또 사기당하셨네.’

장하양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세워진 페로몬 향수병을 바라보았다.

“페로몬 향수는 무슨.”

혹시나 했는데 역시 사기였구나.

장하양은 볼일이 사라진 연습실을 나와서 휴게실로 향했다. 2층 난간 쪽을 따라가던 도중, 매니저팀 세 명이 가로 엔터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장하양은 살짝 놀랐다.

‘매니저분들 안 계셨구나.’

난 또 설마 했네…….

‘리카가 매니저분들 계시는데도 박 이사님 끌고 간 줄 알았네.’

* * *

차 안에서, 성필은 문득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가 싱글싱글 웃는 리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마음이 맞았는지 그녀도 성필 쪽을 보았다.

“앗! 저희 동시에 서로 본 거 맞죠?”

“어. 근데 리카, 회사에 다른 매니저들 없었어?”

성필도 얼떨결에 리카의 기세에 밀려 따라오긴 했으나, 생각해보면 엄청난 자원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성필은 무려 이사니까 말이다. 아무리 가로 엔터의 유일한 소속 그룹 멤버더라도 성필을 운전기사로 부릴 수는 없다.

물론 성필이 실버타운 메이트 운운하면서 먼저 따라나서긴 했지만.

“모르겠는데요?”

“몰라? 모른다고? 매니저 대기실도 안 보고 나한테 온 거야? 하아, 넌 이사를 뭘로 보는…….”

“박 이사님이랑 같이 가고 싶었는걸요!”

“그럼 어쩔 수 없지. 가자!”

“실버타운 메이트!”

차 안은 둘이 힘차게 내지르는 구호로 가득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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