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웨벡스 사무소로부터 카와이 베이스 곡을 의뢰받은 후, 리카의 작업은 차도랄 게 없었다.
성필과 어울려 다니면서 기분 전환을 하여도, 아직까지 이룬 게 없단 압박감만 강해질 뿐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리카는 회사 1층 홀의 소파에 앉아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백지나 마찬가지인 작곡 프로그램 노트를 보자면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다.
‘모오 무리(더는 무리야)……. 머리 좀 식혀야겠어…….’
가로 엔터에서 한가한 직원을 찾아 수다를 떨려던 계획은, 갑자기 리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소리로 인해 정지되었다.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때, 손에 쥔 걸 놓는 거야.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내면에 집중하는 거지. 리카, 이미 네 안에는 세계가 갖추어져 있어. 그 세계 안에서 네가 원하는 걸 찾는 게 중요해.’
작곡가인 정지음의 충고.
‘사람은 원하는 걸 이룰 수 없을 때 선택해야 해요. 뭔가를 더 받아들일 거냐, 아니면 내 손에 지닌 걸 버려야 할 거냐.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거든요. 받아들여서 추진력으로 삼거나, 버려서 몸을 가볍게 하거나.’
예술가인 이수림의 이야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안 풀릴 때는 환경을 차단하고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란 방법론을 제시한다.
“…….”
리카는 엉거주춤했던 자세를 완전히 일으켰다. 그리고 노트북을 들곤 보컬룸으로 향했다.
백설하가 평소 보컬을 연습하거나 멤버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는 이 방 안에는, 신시사이저 하나와 의자 몇 개,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리카는 좁고 어두운 보컬룸 안으로 들어와 책상에 노트북을 두었다. 일부러 불은 켜지 않았다.
‘곡을 완성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해! 그때까지 내 친구는 작곡 프로그램뿐이야!’
그렇게 리카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스스로 외부와의 환경을 차단한 까닭일까, 그녀의 작업에도 차도가 생겼다. 억지로나마 작곡하고 있자니 곡이 완성되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물은.
“지가우(틀려)!”
리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망이 그녀의 가슴 속을 후벼파기 전, 리카는 다시 작곡 프로그램을 붙잡고 작업에 매달렸다.
다른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다.
‘나는 프로니까!’
프로는 기한 내에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클라이언트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한다. 동시에, 결과물이 자신의 기준에도 들어맞아야 한다.
작업을 끝내지도 못하고 한눈팔 정신 따위는 가질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보냈을까.
리카는 어느 순간 놀라운 것을 깨닫기라도 한 듯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막지 않으면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올 것처럼.
‘나, 혹시.’
손바닥 사이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토록 절망적인 감각에 파묻혔는데 어째서 웃음이 나올까. 어쩌면 웃지 않곤 버틸 수 없기 때문일까.
‘재능이 없나……?’
* * *
“리카는 어때?”
손혜빈의 물음에는 걱정이 한껏 담겨 있었다. 그녀는 솔로 가수일 시절에는 프로듀싱에 몸을 담갔으니 리카의 처지에 공감할 만도 하다.
노력을 이어가도 원하는 게 나오지 않는 감각. 손혜빈은 리카가 그 진흙탕 같은 상황에서 상처받진 않을지 걱정했다.
“요즘 통 얘기를 못 나눠봐서 모르겠어.”
“힘들겠지?”
“당연히 힘들겠지. 곡 의뢰를 받은 거잖아.”
가로 엔터 내부 인원에게 곡을 보여주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리카는 자주 자작곡을 성필과 정지음에게 들려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둘은 리카를 둥가둥가 천장 높이 띄워주었다.
하지만 웨벡스 사무소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웨벡스는 클라이언트야. 리카를 믿고, 리카한테 기대하는 게 있어서 일을 맡겼어. 리카도 의뢰란 단어에 담긴 무거움을 아는 거겠지.”
작곡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단 건 기쁜 일이다. 또한 그녀가 이토록 진지한 것에 성필은 새삼스레 감동하기도 했다.
“근데…….”
손혜빈은 여전히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리카 너무 작곡에만 몰두하는 거 아니야? 수능 앞둔 고3 같잖아.”
몰두란 말도 가볍다. 리카는 자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에 가까웠다.
“너무 완벽주의인 것도 안 좋은데. 걔 지음이랑 작업물 공유도 안 하고 있다면서?”
“내 생각인데, 작업물에서 자기 비중을 늘리고 싶은 거 같아.”
“아, 비중…….”
세상에는 마법이 실존한다.
바로 ‘아이돌’이라는 단어다. 어떤 예능(藝能) 직업 앞에 아이돌을 붙이기만 하면, 사람들은 격이 한 단계쯤 내려간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돌 래퍼.
아이돌 작곡가.
아이돌 댄서.
아이돌 가수.
아이돌 모델.
아이돌 배우.
그 결과, 아이돌의 창작물은 오랜 시간 저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건 아이돌과 기획사의 탓도 있었다.
창작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곡 크레딧에 이름을 추가한 전례들이 있던 것이다.
“그러게. 어차피 기획사에서 힘 써준 거 아닌가 하는 말 나오면 리카도 속이 쓰리겠네.”
“그래서 더 폐쇄적인 걸 수도 있어.”
곡의 크레딧에는 작업에 큰 비중을 차지한 사람의 이름부터 먼저 들어간다. 예를 들어 ‘편곡: 정지음, 이시카와 리카’와 같은 식이다.
‘지음이는 우리 회사 뮤직 프로듀서니까 리카의 작업물에 도움을 주는 게 이상하진 않지.’
정지음은 리카가 만들어왔던 곡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사실상 둘은 파트너나 마찬가지로, 리카가 밑그림을 그리면 정지음이 디테일을 완성해왔다.
“이번에도 평소와 같은 방식을 쓰면 리카의 이름이 뒤로 밀릴 거잖아.”
작곡: 정지음, 이시카와 리카.
편곡: 정지음, 이시카와 리카.
“그걸 바꾸고 싶은 걸 거야.”
‘작곡: 이시카와 리카, 정지음’으로 말이다.
“리카도 그런 걸 신경 쓰는구나.”
“누나, 방금 그 발언은 리카를 머리에 든 게 적은 가벼운 애라고 말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
“하지도 않은 말 지어내는 거 보니까 네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야?”
“지가우(아냐)!”
“소(그래).”
리카는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관련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전에 진행했던 음악사 강의에선 대한민국 아이돌의 역사가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었다.
그 내용 중에는 창작 능력을 지닌 아이돌도 있었다.
‘남자 아이돌에 비해 여자 아이돌의 창작력은 저평가되니까.’
‘아이돌이 창작을 할 수 있나?’라거나, ‘어차피 회사에서 다 해주는 거 아니야?’란 의심이 만연했던 시기.
자기 증명 욕구가 가득했던 몇몇 남자 아이돌들의 기여로 아이돌 또한 프로듀싱 능력을 가질 수 있단 사실이 인식되었다.
덕분에 현재에 이르러선, 작곡이나 작사가 아이돌의 아티스트십을 증명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여자 아이돌은 그런 경우가 드물지.’
있더라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창작력이 있다고 알아주며, 그 결과물을 기다려주는 여자 아이돌의 수는 손에 꼽는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남자 아이돌은 그룹 활동을 끝내면 메이저 솔로로 재데뷔하는 반면, 여자 아이돌은 창작 활동을 이어가더라도 인디 음악으로 빠지는 사례가 더 많다.
여자 아이돌이 활동의 피로감을 더욱 크게 느껴서 그런지, 혹은 원하는 만큼 사람들이 주목해주지 않아서인지는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누나도 그런 고민한 적 있어?”
“그럼, 있지. 내 노력이 겨우 기사 한 줄 더하는 용도고, 사람들이 크게 알아주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거든. 00년대였잖아.”
아이돌이 창작 능력이 있는가, 아이돌이 기획사를 상대로 자신의 의자를 관철할 수 있는가도 의심하던 시기 속에서, 손혜빈은 꾸준히 자체 프로듀싱을 이어갔었다.
자체 프로듀싱이란 게 기획사의 홍보 수단일 뿐이라 손가락질하는 환경에서 지냈던 손혜빈이기에, 리카의 노력에 더욱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도전이네.”
“응, 도전이지.”
리카가 본인의 능력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도전이자 기회. 그녀는 이 기회를 앞에 두고 전력투구 중이다.
“이런 때일수록 리카한테 더 관심을 가져줘야지.”
“성필아 그냥 내버려 둬.”
“아니, 리카가 말은 안 해도 혼자 끙끙대면서 외로워하고 있을 거라니까. 내가 말 걸어주고 하면 아닌 척 좋아할 게 분명해.”
* * *
리카가 이상하다.
성필은 그 사실을 정지음에게 토로하는 중이었다. 정지음은 마약 쿠션에 몸을 묻곤 성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성필의 토로는 이 말로써 끝을 맺었다.
“리카가 요즘 나랑 놀아주지도 않아…….”
“상심이 큰가 보네요. 클래식이라도 틀어드려요?”
“괜찮아.”
“케이어스 곡은요?”
“좋아.”
케이어스의 데뷔곡이 수백만 원짜리 스피커를 타고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성필은 사우나에라도 들어온 듯 신경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작곡 때문이겠죠?”
정지음의 추측이 맞을 것이다.
조아라에게 듣기로, 리카는 숙소에서도 큰 변화를 보인다는 모양이다. 리카는 항상 조아라의 침대에서 잤었는데, 어느 날부터 본인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했다던가.
‘예술에는 고독이 필요해! 나는 고독 속에서 나의 내면을 관조할 거야!’
라는 말까지 해가면서, 리카는 조아라의 품에서 잠들지 못하고 매일 밤 외로움을 곱씹는다고 한다.
또한 회사에서는 어떻던가.
독 사과를 먹은 백설 공주가 된 백설하를 대신하여, 리카는 그녀의 보컬룸을 독차지한 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끔 성필이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아 가져다주면 ‘안 먹을 거예요!’라 날카롭게 반응하면서, 사춘기 남학생처럼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성필로선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겠지. 그거 말고는 리카가 까칠해질 이유가 없지. 드디어 리카도 아티스트의 기질을 키우기 시작한 거야…….”
“아티스트는 성격이 더럽단 선입견이 느껴지는 발언이네요.”
“지음아.”
성필의 부름은 이제까지와 달리 리카의 쌀쌀함에 대한 섭섭함도, 혹은 불규칙한 삶을 사는 리카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리고 진지함이 담긴 물음이 이어졌다.
“작곡가는 곡이 안 나오면 어떤 기분이야?”
“아…… 곡이 안 나오면요…….”
그 기분을 작곡가가 아닌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견디기가 힘들죠.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거 같다고 해야 할까요.”
“존재 이유?”
“거창하죠? 근데 저는 진짜 그래요.”
회사원이 업무 기한에 맞추지 못했다거나, 학생이 과제를 제때 완성하지 못한 감각과는 다르다.
“제 모든 기량과 마음을 쏟아서 곡을 쓰는데, 쓰는 것마다 마음에 안 들고 실패작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죠. 작곡이 제가 존재하는 이유인데, 그 이유를 충족시킬 수 없는 거예요.”
작곡가란 타인의 인정을 요구하는 직업이다. 설령 자신이 마음에 쏙 드는 결과물을 내놓더라도 평가가 좋지 않다면, 그건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 이유를 위반하는 게 된다.
“아티스트들이 에고(ego, 자아) 의식이 높은 건 그래서인가 봐요. 마음에 장벽을 쳐두지 않으면 너무 괴롭잖아요.”
“그럼 리카는…… 본인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단계라는 거야?”
“저한테 작업물도 잘 안 보여주는 걸 보면 그렇겠죠.”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자기 자신뿐이라잖아요.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던가.”
그렇다면 리카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계속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창작의 고통은 아티스트가 항상 넘어야 할 산으로 존재하지만, 성필은 괴로워하는 리카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정지음은 어조를 쾌활하게 바꾸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다가 어느 순간 빛을 보잖아요. 그럼 갑자기 세상이 확 달라져요.”
그 세상에는 오로지 광명뿐이다.
빛 한 점 잡히지 않던 세계가 갑자기 모두 빛으로 물들고, 어디로 가든지 작곡가가 의도한 것보다 나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때의 감각은 뭐랄까,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하죠. 이해하시겠어요?”
“당첨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저도요. 아, 그럼 이건요?”
정지음은 굉장히 그럴듯한 비유를 생각해냈다는 듯 비식비식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웃긴 모양이다.
“형이 설하 발견했을 때 같은 느낌?”
“오, 느낌이 확 온다.”
“그렇죠.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다’란 기분이요. 확 알겠죠?”
“맞아 맞아.”
“부정을 안 하네……?”
아무튼, 리카는 계속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야 함이 틀림없다. 아니면 어느 정도의 기준점을 잡고 그럭저럭 만족하거나.
성필로선 리카가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지만, 너무 고통스러워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지음아.”
“네.”
“혹시나 리카가 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줘. 리카의 아티스트십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음, 네. 그럴게요.”
라고 답은 했다만, 정지음은 리카가 자기 자신을 가두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정지음 자신도 그렇게 실력을 키웠으니까.
그는 강제적으로 차폐된 세계에서 고스트 라이터로서 작곡을 해왔다. 볼 게 자아밖에 없는 세계에서 정지음은 벼려지고 단련되길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리카에게도 필요한 일이야.’
끝없이 자아의 세계로 침전하는 경험은 리카에게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정지음은 리카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길 바랐다.
* * *
리카는 잠깐 휴식이라도 취할 겸 정지음의 작업실을 찾았다.
정지음의 작업실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먼저, 한구인에게 구걸해서 얻어낸 마약 쿠션이 그 진화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이건 공금 남용이에요! 지음 오빠의 편안함만을 위해서 돈을 쓰다니요!”
“직원 복지야.”
“지음 복지겠죠!”
재무팀에서 직원 복지용으로 시험 삼아 구매한 마약 쿠션은 꽤 큰 반향을 얻고 있었다.
직원들끼리 휴식을 취할 때면 항상 휴게실의 쿠션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그에 따라 몇 개 더 추가로 구비했는데, 그중 하나가 정지음의 작업실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리카, 곡은 얼마나 썼어?”
가끔 리카가 음향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작업실로 올 때면, 정지음은 일부러 작업 관련 주제를 피했다.
하지만 성필에게 리카를 잘 봐달란 소리도 들었던 참이라, 용기 내어 그녀에게 작업의 진행도를 물었다.
“대충요.”
“지금 들어봐도 돼?”
“……아직 미완성이지만, 오빠는 뮤직 프로듀서니까 특별히 들려줄게요!”
들려준다는 것을 보니 리카 자신도 그럭저럭 만족할 결과물이 나온 듯했다.
정지음은 리카의 자작곡을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들었다.
‘생각보다 괜찮게 잘 썼는데?’
역시 폐관 수련을 했던 게 효과가 있던 걸까? 곡이 끝나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좋은데? 이거 베이스로 내가 손봐줄까?”
“그건 안 돼요!”
“어?”
“이 곡은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와 가지를 만들고 싶어요!”
“어…… 굳이?”
작곡, 편곡, 사운드 엔지니어링의 분업이 당연시된 세상에서 홀로 모든 것을 하겠단 건 상당히 오만한 선언이다.
정지음이란 훌륭한 작곡가이자 편곡가가 있는데, 굳이 리카가 머리를 싸매면서 시작부터 끝까지 곡의 모든 부분을 만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정지음의 도움을 받은 것보다 나을 리도 없고 말이다.
“음, 그래. 알겠어.”
하지만 정지음은 리카를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의 창작욕을 존중해주는 것 또한 가로 엔터의 방침이었다. 또한 정지음은 리카가 이 기회로 작곡가로서 더욱 도약하길 바랐다.
‘여기저기 부딪쳐 봐야 아는 것도 있으니까.’
작업실에는 한동안 리카가 키보드를 누르고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만이 차지했다.
그동안, 정지음은 장하양 때문에 눈 떠버린 순정만화 취향을 한껏 탐닉했다. 장하양이 추천해준 ‘유리구두’를 읽고 난 뒤 비슷한 만화들을 섭렵한 결과, 그는 순정만화 매니아가 됐다.
“……오빠.”
그때 리카가 한껏 내려간 목소리로 정지음을 불렀다. 정지음은 만화책을 테이블에 놓고 풀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어, 리카.”
이런 태도 변화는 성필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는 항상 멤버들이 이야기를 할 때면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쫑긋 세우곤 했었다.
그러한 경청이 멤버들과의 관계 형성에 좋은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프로듀서로서 신뢰를 얻은 데도 한몫했단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정지음도 뮤직 프로듀서로서 성필의 그러한 태도를 본받기로 한 것이다.
“저, 작곡을 더 잘하고 싶어요.”
“지금도 잘하는데 왜 그래.”
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오빠처럼은 못 만들어요.”
리카는 정지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 말은 곧 정지음의 모든 테크닉을 전수(傳受)하였단 뜻이다.
정지음이 머릿속으로 방금 만든 곡을 떠올리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리카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거의 비슷한 곡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둘은 작곡 테크닉이나 스타일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그리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메울 수 없는 도랑이 있는 거 같아요…….”
기술적으로는 역량이 비슷해도, 리카는 정지음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우사인 볼트의 몸에 빙의했지만 달리기 성적은 그만큼 높지 않은 상황과 비슷했다.
둘은 작곡가로서의 발상 자체가 다르다.
리카는 그게 작곡가로서의 경험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심 다른 이유도 있다고 추측했다.
예를 들어.
“저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요…….”
작곡을 배우기로 한 것도 성필의 권유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칭찬해주는 게 좋아 계속해서 작곡을 이어나가긴 했지만, 그리고 즐겁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취미 수준에서 그쳐야 하지 않았을까…….
“음.”
정지음은 리카의 고민을 듣더니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을 이어가더니, 갑자기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리카, 여기에 네가 작곡에 썼던 악기들을 써봐.”
정지음은 화이트보드에 네모를 그렸다.
리카는 그에게서 마카를 받곤, 이게 무슨 일인지 싶어 하면서도 착실히 악기의 이름들을 적어나갔다.
“디스토션 준 일렉기타는 뭐라고 쓰나요?”
“그냥 일렉기타라고 써.”
네모 안은 몇 개의 악기 이름으로 채워졌다.
“이번엔 내가 해볼게.”
정지음은 또 다른 네모를 그리고 그 안에 악기의 이름을 적었다. 하지만 리카가 한 것과는 달랐다.
리카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칸에 어긋나지 않도록 마치 목록처럼 악기의 이름을 나열했었다.
하지만 정지음은 네모 안의 여기저기에 악기의 이름을 흩뿌려 두었다.
“잘 봐, 리카.”
그리고 작업을 더 이어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리카의 눈이 점점 놀라움으로 물들어 갔다.
네모가 확장된다. 모서리로부터 선을 연장하여 뒤에 또 다른 네모를 그렸다. 마침내 모든 선이 이어지자 그것은 정육면체가 되었다.
네모가 네모난 방으로, 즉 3차원으로 변했다.
정지음은 자신이 흩뿌려 둔 악기의 이름이 위치한 곳에 악기의 형체를 그렸다. 방 안에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의 공간을 가지게 됐다.
“리카, 악기는 평면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야. 위아래, 양옆, 앞뒤, 육방(六方)에 자신만의 자리가 있어. 그런데 우리 같은 작곡가는 이런 걸 깨닫기가 어려워.”
그들이 보는 건 작곡 프로그램 안에 담긴 노트나 섹션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음악이란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니까.
모든 소리가 나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단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현대음악(현대의 음악, 대중음악이 아니라 음악사조 상에 위치한 현대음악) 작곡가가 아니고서야 이런 걸 고려하진 않지. 너, 나, 우리 작곡가한테 음악이란 극좌표(평면상의 점을 원점으로부터의 거리 r과 시작선과의 이루는 각 θ로 나타내는 방법)니까.”
이어폰과 스피커를 통한 음악에는 거리와 위치만 있다. 즉, 3차원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소리란 입체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감각이다. 시간예술이니까.
“하지만 작곡가들은 소리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어. 오케스트라가 음향 증폭 기술이 있는 현대에도 악기마다 한 명의 연주자를 두지 않는 것도, 음악에 공간감을 부여하려는 의도야.”
공간예술인 회화가 오랜 세월 그림에 시간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시간예술인 음악은 공간을 표현하려고 노력해왔다.
“너랑 내 차이는 이런 인식이야. 테크니컬한 차이기도 하지만 인식의 차이가 크지. 나는…… 그러니까, 내 음악을 연주하는 요정이 있다고 생각해.”
“요정이요?”
“응. 작곡 프로그램에 나타나는 음 하나하나마다 그걸 연주해주는 요정의 오케스트라가 있는 거지. 너희들이 내 곡으로 무대에 설 때도, 나는 그걸 연주해주는 요정들이 있다고 상상해.”
그것은 ‘연주’란 것을 고려하지 않는 전자음악 작곡가들에게는 생소한 감각이며, 어쩌면 필요 없는 감각일 수도 있다.
“리카, 나는 너한텐 이런 인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 겨우 작곡 2년 끄적여놓고 나랑 겸상하려는 것도 좀 기분 나쁘긴 한데.”
“손나(그런)!”
“하지만 나처럼 되고 싶으면, 더 나아가고 싶다면 꼭 필요한 인식일 거야. 곡을 듣는 관점 자체를 바꿔야 하니까. 이게 네가 보고 있던 벽일 거야. 그렇지만, 이 벽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너는 지금보다 더한 좌절에 빠질 수도 있어.”
안 그래도 리카는 웨벡스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곤 며칠 내내 끙끙대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기서 기준선을 올려버리면 리카가 제시간 안에 의뢰를 마칠 수나 있을까?
“네가 보는 벽을 넘는단 건 작곡이란 영역에서 벗어나서 편곡과 믹싱 과정까지 보는 거야. 알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
작곡가, 편곡가, 믹싱 엔지니어, 마스터링 엔지니어가 나누어진 분업 시스템이 있으니까.
“이대로도, 리카가 멋지게 작곡해내면 내가 더 멋지게 매력을 더해줄 수 있어.”
리카도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래서 정지음이 편곡하기 쉬운 방식으로 곡을 미니멀하게 써왔다.
“리카는 톱라이너의 자질이 있어. 그것도 강한 무기야. 멜로디를 찍는단 건 영감과 감각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거니까. 벽을 봤다고 굳이 넘을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왜 그걸 설명해준 건가요?”
“네가 답답해할 거 같아서. 근데 괜히 사서 머리 아플 필요는 없어.”
작곡가라는 영역을 넘어가면서까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작곡가로서의 감각을 버리면서까지, 리카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배우고 싶어?”
더 큰 벽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요’란 답을 예상하고 던진 정지음의 질문에 리카는.
“하이(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그에 정지음이 오히려 당황했다. 보통 이렇게나 겁을 주면 안 배운다고 할 줄 알았건만.
“아…… 리카, 괜찮겠어? 내가 전에 말했잖아. 작업이 막히면 주변을 둘러보는 것보다는…….”
“내면에 집중하는 게 좋다구요?”
“응, 그래. 여기서 뭘 더 배운다는 건…….”
“다른 분도 오빠랑 똑같은 말을 했어요.”
성필의 전 여자친구인 이수림도 정지음과 비슷한 논조로 말했었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다면 손에 쥔 것을 놓아야 한다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계에 막혔을 때는 자극을 받아들이기보다 내면에 침전하는 편이 예술가에게는 더 좋다고 한다.
“그런데 저는 아닌 거 같아요.”
리카는 스스로를 고립시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그건 요 며칠 뼈저리게 느꼈다.
“저는 더 배울래요! 그래서 슬럼프를 극복할 거예요!”
옛날부터 리카는 의욕이 과한 부분이 있었다. 랩이니 춤이니 연기니, 잔뜩 배우다가 탈이 나서 아팠던 적도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르다, 라고 정지음은 생각했다. 그는 리카의 눈에 새겨진 열망을 읽고 다시금 진지하게 물었다.
“나한테 뭘 배운다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단 거 알지? 모처럼 휴가받았는데 전부 다 공부만 하면서 보낼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바라던 바예요!”
무소유란 개념이 있다. 자신에게 담긴 것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것에 눈 뜰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의 수도승들은 극단적으로 자아 개념을 없앰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려 한다.
기독교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신과의 합일을 이루려 한다.
하지만 역으로 자신을 채움으로써 얻게 되는 것도 있다. 리카는 자신이 비움과는 맞지 않는 인물이란 걸, 벽을 마주하고서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배우고 싶어?”
리카는 마지막 질문답게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더 환한 음성으로 답했다.
“네, 배울래요!”
그리고 벽을 뛰어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