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내가? 너랑? 왜? 굳이?”
“재결합하려는 의지가 돋보여서 기분이 나쁠 정도네요. 진심으로 여자분이 박 이사님이랑 잘되려는 것 같나요!”
“아니야?”
“저라면 옛날에 사귀었던 남자한테 소녀연맹 콘서트 티켓을 두 장 보내진 않을 거예요!”
“연애했었어?!”
“예를 든 거예요!”
“……에휴, 나도 알아.”
예술가의 개인전이라 해도 그 사람이 항시 대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필요한 건 그림이지 사람이 아니니까.
초대권 두 장의 의미도 성필이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닌지라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크게 없다.
그럼에도 성필이 이 초대에 응하려는 건, 전생에선 편지를 받은 자리에서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왕 선택지를 다시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잖아. 안 쓰는 것도 아깝지.’
그래, 아까우니까 가는 것뿐이다.
“그럼 한 이사님이랑 갈까.”
“박 이사님. 지금 이사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아시나요. 사람이 있단 것도 잊어버리신 건가요.”
“오케이, 결정.”
성필이 리카를 무시하고 연습실을 나가려 하자 그녀가 등을 콕콕 찔러왔다. 성필은 장난스레 웃으면서 뒤로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 같이 갈…….”
리카가 성필에게 초대권을 내밀었다.
“리카?”
“기대하고 계시잖아요. 혼자 갔다 오세요.”
성필이 멀뚱히 있자 리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초대권을 그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려 했다.
그런데 주머니에 단추가 달려있어서 티켓을 넣는 게 불가능했다. 끙끙대면서 주머니 단추를 풀려던 리카는 포기하고 성필의 코트를 위로 젖히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너 미쳤어?!”
“이사님이 안 받으셨잖아요!”
“그냥 내 손에 주면 되잖아!”
“손잡는 건 부끄럽다구요!”
“내 바지 주머니에 손 넣는 건 괜찮고?!”
“살이 안 닿으니까 세이프에요!”
리카의 기묘한 기준보다 살이 닿기 싫다는 말이 더 충격적이다.
이게 과연 친구 사이일까? 그래, 30대 아저씨랑은 잠시라도 닿고 싶지 않겠지…….
‘리카, 나는 너를 친구라고 믿었건만.’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지 마세요!”
리카가 성필의 정수리를 손날로 톡 때렸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그러자 성필이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리카 너 키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만 보이던 리카가 드디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키는 무려 성필과 4cm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에, 키? 아! 흐흐응, 드디어 제가 컸단 걸 인정하시는 건가요?”
“거인병 아니야?!”
“제 손에 칼이 없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그래서 어떡할 건가요! 받을 건가요 아닌가요!”
“…….”
성필은 리카의 손에서 초대권을 받으려다가 그냥 놔주었다.
“같이 가자.”
“얏타(해냈다)!”
둘은 나란히 연습실을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근데 리카. 모처럼 휴가받았으니까 고향에서 지내는 게 좋지 않아? 스케줄 있을 때만 온다거나.”
“그건 너무 귀찮아요! 그리고…….”
“그리고?”
“……아타시(저)는 프로니까요! 직장을 비울 수는 없어요!”
“리카쨩 스고이(대단해).”
“도젠데쇼(당연하잖아요)?”
* * *
다음 날, 성필은 약속 장소인 숙소 근처의 대로에 차를 대고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15분이 지나도록 리카가 나타나질 않았다.
톡도 보내보고 골목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피워봐도, 리카가 나타날 기미 없이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마침내 약속 시간이 20분 정도 지났을 때.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심하게 눈길을 끄는 분홍색 코트를 입은 리카가 허겁지겁 골목 안쪽으로부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성필은 그녀를 보자마자 어깨를 떡 펴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을 확인한 리카는 성필에게 달려오던 방향을 휙 직각으로 틀었다.
그리고 성필을 우회해서 그의 차 운전석 안으로 들어갔다.
“…….”
부르릉―!
“GTA다?!”
성필은 헐레벌떡 조수석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잠겨 있었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열받는 미소를 띤 리카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카 너 혼나기 전에 빨리 문 열어!”
“그거 아시나요? 아타시(저)는 운전할 수 있어요!”
“거짓말하지 마!”
“아라쨩이 운전면허 공부할 때 옆에서 간간이 봤어요!”
부릉―!
성필의 차가 흐릿한 매연을 쏟아냈다. 당장이라도 차가 출발할 기세였다.
“저를 혼낼 건가요?”
“당연하지! 너 이 문 열리기만 해봐! 머리칼을 전부 뽑아버리……!”
털컥.
차가 급발진할 것처럼 앞으로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안색이 창백해진 성필이 무릎을 팍 꿇었다.
“죄송합니다.”
“맹세하세요!”
“맹세합니다.”
“좋아요!”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성필은 조수석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리카를 끄집어냈다.
“끼에에에에엑!”
“빨리 나와!”
“머리, 머리 빠져요옷!”
“내가 머리 다 뽑는댔잖아!”
“우소츠키(거짓말쟁이)!”
리카는 성필에게 어깨를 붙잡혀 억지로 조수석에 앉혀졌다.
잠시 후,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기운이 쭉 빠졌다. 성필에게 보복을 당한 탓이었다.
“히도이(너무해)……. 아타시(나) 아이돌인데…… 이곳저곳 다 만져졌어…….”
“어깨랑 머리카락을 이곳저곳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혼낼 거야.”
“늦은 건 죄송해요…….”
“차 말야.”
“하이(네)?”
“다치면 어쩌려고. 다신 이러지 마.”
“아, 하, 하이(네)…….”
성필과 리카는 뒤늦게 미술관으로 향했다.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차가 빠지는 속도가 느려, 어쩔 수 없이 주변의 풍경을 구경해야만 했다.
“왜 늦었어?”
“하양 언니가 자꾸 뭘 물었어요. 그래서 저도 할 수 없이 늦은 거예요. 사정도 안 듣고 혼내다니, 이사님은 리더의 자질이 없어요.”
“하양이가 그랬으면 네 잘못이지.”
“이사님 요즘 편애가 너무 심해요! 멤버 애정도로 치면 제가 5위 아닌가요!”
“리카는 항상 내 마음속 1위지.”
“헤에에에엑?!”
“5인 공동 1위.”
“1위는 1위네요!”
가는 길, 리카는 배가 고프다면서 점심을 사주길 요구했다. 점심시간까지는 2시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박 이사님 때문에 아침도 못 먹었다구요!”
“내가 뭐.”
“저는 아이돌이니까 메이크업과 코디도 완벽해야 하잖아요! 일없는 날에 열심히 화장하고 옷 입었으니까 박 이사님 때문이죠! 그러니까 밥 사주세요!”
“돈 줄 테니까 여기서 내려라. 난 미술관 갈게.”
“하양 언니였으면 바로 갔을 거면서…… 진짜 편애예요…….”
“아라가 이럴 때는 그렇게 말하래?”
“……이에(아뇨).”
“맞잖아.”
“……지가이마스(아니에요).”
“너희들끼리 나 조종하는 방법이라도 공유해?”
“어떡해 전부 들켰잖아!”
조금 늦는다고 미술관이 문을 닫는 건 아니니 리카와 함께 근처의 음식점으로 갔다.
어떤 일이든 배를 채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성필도 공복인 애를 데리고 다니면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이사님, 그 전 애인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리카는 후식으로 뽑은 믹스커피를 후후 불면서 물었다. 성필은 우수에 잠긴 눈빛으로 핸들을 잡았다.
“하아, 많은 일이 있었지.”
“별로 안 듣고 싶을지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안 들을래요. 라디오나 켜주세요!”
“어떻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냐면…….”
“남자 연애 이야기 듣는 게 제일 피곤하다던데…….”
* * *
석세스 엔터가 아직 작은 기획사였던 시절. 성필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날임에도 업무를 진행하느라 바빴다.
당장이라도 회사를 뛰쳐나가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키보드를 두드린 지 어언 2시간.
“끝!”
성필은 날래게 가방을 집어 들고 사무실 안의 모든 불을 껐다. 마지막으로 회사 내에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진단한 후 그는 들뜬 마음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내일은 휴일이니까 캔맥주 세 개 마셔야지. 가는 길에 족발 포장하고.’
생각만 해도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건물을 나오던 순간,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잡혔다.
계단 옆에 기대어 땅을 차고 있는 여인.
“이 작가님?”
얼마 전, 석세스 엔터 소속 아티스트의 앨범 아트워크를 맡겼던 화가다. 특유의 강렬한 붓질이 마음에 들어, 성필이 스타그래프 DM을 통하여 연락을 했었다.
“아, 매니저님.”
이수림은 벽에서 등을 떼곤 성필에게 다가왔다.
레몬과 보라색, 투톤으로 염색한 머리칼은 그녀가 예술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리란 막연한 예감마저 들게 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어깨에 얹은 숄은 그녀의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져 있어서 망토와 같이 시선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으나, 자기주장이 강한 몸의 굴곡마저 숨기긴 어려웠다.
성필은 고개를 살짝 저어 상념을 떨쳐내고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었다.
“아, 어쩌죠. 지금 회사 사람들 다 퇴근했는데. 부르고 싶으신 분 계세요? 연락 주셨으면 연락처 드렸을 텐데. 어떤 분…….”
이수림이 성필을 검지로 가리켰다.
성필은 눈은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박히듯이 멈췄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위로, 묘한 웃음을 띤 이수림의 얼굴로.
“매니저님 기다렸어요.”
“기, 기다려요?”
“네. 한두 시간? 이렇게 기다렸는데 다른 일 있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 * *
“그렇게 우린 사귀게 됐지…….”
“뭔가 엄청 많이 스킵했잖아요!”
“그날 바로 사귀었어. 어쩌면 다음 날. 예술가는 정열적이더라…….”
“키, 키스? 벽에 몰아두고 그 자리에서 바로 키스한 건가요!”
“자기 집에 재밌는 슬라임 있다고 놀러 오라더라.”
“그거 다른 사람한테 배운 거였나요?!”
일본에서 성필의 작업 멘트인 ‘슬라임 만지러 올래?’를 듣고 문화 충격을 받았던 리카였다.
그런데 설마 그게 성필이 창조해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니! 혹시 ‘슬라임 만지러 올래’는 한국에서 곧 유행할 작업 멘트가 아닐까?
다들 이 커다란 파도에 탈 수밖에 없는 건가!
“그래서 슬라임 만졌나요?”
“……슬라임이, 있었지.”
“아, 그런 뜻이었군요. 성희롱이네요.”
“우리 추억을 모욕하지 마!”
“그냥 재결합하세요!”
수다를 떨다 보니 미술관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헤어지는 건 어떻게 헤어지셨나요?”
“갑자기 헤어지자더라.”
“……이유는 들으셨어요?”
“방해된대.”
“네?”
“나도 정확한 건 몰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초대권을 확인받은 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른 건 안 보시나요?”
성필은 모든 전시물과 전시관을 무시하고 이수림의 개인전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리카가 당황하여 물었다.
“난 미술에 조예가 없어서. 원래 목적만 달성하고 가려고.”
“저는 미술관은 처음이라 기대했는데…….”
“그럼 리카는 다른 거 보러 가. 나는 수림이 개인전 보러 갈 거야.”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리카는 툴툴대면서 성필의 곁에 붙었다.
이윽고 둘은 이수림의 개인전시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총 15점의 작품이 네모나고 하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방의 모서리를 네 번 찍으면 관람이 끝나는 형태였다. 참으로 심플하고 그렇기에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와…….”
리카는 첫 그림에서부터 압도당했다.
30호 캔버스, 가로 90cm 세로 72cm의 거대한 백지를 넘치도록 메운 에너지의 향연이었다.
그곳에 새겨진 건 사람의 얼굴 같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온갖 흐릿하고 때로는 선명한 덩어리들이 시야를 교란하듯 사방에 퍼져 있어서 형체를 특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야는 확실하게 중앙에 모인다. 마치 캔버스의 외곽이 미끄럼틀이고, 그곳에 탄 물감들이 가운데로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흡입력, 이라고 할 힘이 이 그림에 있다.
“잡지에서 보는 거랑은 전혀 다르네요.”
“그렇지. 그림은 직접 보면 박력에서부터 차이가 있어.”
잡지에 자그맣게 실린 ‘이게 뭐야’하고 지나갈 그림들은, 직접 보면 저마다가 지닌 힘이 있기 마련이다.
성필은 리카와 함께 그림을 하나씩 둘러보면서, 과거 이수림에게 배웠던 것들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림은 급이란 게 없긴 해. 사람마다 취향을 많이 타거든. 감상자의 취향이든 창작자의 취향이든, 어느 쪽이건. 그러니까 아무리 거장의 작품이더라도 울림이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름 없는 그림 하나에 감동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그러면 가격은 어떻게 붙나요?”
“다수의 취향에 맞으면? 음, 나도 되게 학문적으로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아마 미술계의 권위나 인정 같은 게 중요할걸.”
“대중에게 평가받는 게 아니라요?”
“어지간히 유명하지 않으면…….”
성필은 이수림 개인전시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관람자는 네다섯 명 정도에 불과했다.
“대중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까. 미술도 광고가 중요해. 음악이랑 같아. 아무리 좋은 곡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
리카는 마지막 그림 앞에 섰다.
“……그건 슬프네요.”
마지막 그림, 100호 캔버스.
가로 162cm 세로 130cm의 광활한 캔버스 안에 그려진 건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람이었다.
신체를 이루는 모든 부분이 파란색인, 언뜻 보면 그림자와 같을 정도로 데포르메가 심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투명한 하늘과 땅이 자리했다.
푸른빛의 조화는 색깔만으로도 관람객에게 어떠한 감정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다 볼 수 없다는 건요, 슬퍼요.”
“좋은 작품이야?”
“네. 저한테는요. 이 사람 꼭…….”
“그게 마음에 들어요?”
성필과 리카가 깜짝 놀라서 뒤를 보았다.
리카에게는 처음인, 그리고 성필에게는 과거에 수도 없이 보았던 얼굴이었다.
“수림아.”
“성필이, 안녕. 그리고…….”
이수림은 리카를 보더니 머리에 덮듯이 쓴 빵모자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리카를 향해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성필이 너한테 아까우신 분이다.”
“갑자기?!”
“에헤헤, 아타시(제)가 아깝긴 하죠?”
“네가 인정하면 어떡해!”
“사실인걸요!”
이수림은 둘 사이를 가로질러 마지막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성필이 과거에 보았던 것처럼 여유가 흐르다 못내 넘쳐나는 걸음걸이다.
마치 사방으로 산뜻한 색의 물감이 번져가는 듯했다.
“이거요, 성필이에요.”
“어?”
파란 그림자 같은 게 성필이라고?
“100호 캔버스는 대학 과제로밖에 안 써봤는데에…… 갑자기 그려보고 싶더라고. 그래서 그렸어. 어때, 좀 느낌이 와?”
“이게 어떻게 나라는…….”
“닮았어요!”
“…….”
“닮으셨다는데?”
“…….”
눈도, 코도, 입도,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게 흐리다. 있는 거라곤 파란색의 몸체와 배경으로 존재하는 투명한 하늘 혹은 땅뿐.
이걸 어떻게 성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랑 닮게 현실을 묘사하려면 굳이 그림일 필요는 없지. 사진으로도 충분하잖아.”
“나의 뭘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림 그대로야. 느껴 봐.”
“…….”
모르겠다.
이수림은 낮게 웃더니 다시 뒤로 돌아 성필과 마주 보았다.
“보러 와줘서 고마워. 여자친구분도요.”
“여자친구 아니야. 우리 기획사 아이돌이야.”
“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렇구나. 이왕 보러 와준 김에 그림도 사주면 고맙겠는데.”
“얼마야?”
“이건 1,000만 원에 팔려고.”
“절대 안 사지.”
“네 인물화인데 좀 사주라.”
“어딜 봐서 인물화란 거야.”
두 사람의 사이에는 리카가 알지 못하는 인연이 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오래 전일 텐데도, 둘은 어제 재회를 약속한 친구와 같았다.
“결혼은 했어?”
그 질문에 둘을 이어주던 친밀함의 끈이 팽팽하게 조여왔다.
“음, 아니.”
“애인은?”
“없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없어.”
이수림은 하하 웃더니.
“그럼 오늘 우리 집에 슬라임 만지러 올래?”
“잠까안!”
리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수림의 방향으로 몸을 홱 돌렸다.
“너무 뻔뻔하지 않나요!”
“저요?”
“네! 헤어질 때는 ‘방해된다’면서 이사님한테 온갖 치욕과 모멸감은 다 줘놓고서 지금 와서 다시 사귀자니요!”
“저는 슬라임 만지러 올 거냐고 물었는데요?”
“어떤 뜻인지 알고 있어요!”
“성필아, 회사 아이돌한테 우리 얘기를 얼마나 한 거야?”
“오늘 오는 동안만 했어…….”
“방해된다…….”
이수림은 ‘방해’란 말을 곱씹었다.
“그때는 그랬죠.”
“그러고도 박 이사님이랑 다시 만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때 박 이사님은 산사태로 뽑혀나간 나무 같았어요!”
“리카, 상상력 그만 발휘해.”
“미안해.”
이수림이 성필에게 사과했다.
“아냐, 괜찮아.”
“괜찮나요?!”
“저기요, 언니.”
이수림이 ‘언니’라고 부르자 리카는 턱 숨이 막혔다. 그녀가 몇 살인지는 몰라도 리카가 그녀보다 언니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제가 심심풀이로 성필이를 다시 만나려는 이상한 인간처럼 보이는 건 아는데, 그때 저는 필사적이었어요.”
“수림아 왜 리카를 설득하고 있어.”
“계속해보세요!”
“…….”
“성필이는 방해됐어요 정말로. 같이 있으면 너무 행복해서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까요.”
성필과 리카의 얼굴이 동시에 달아올랐다.
“사람은 원하는 걸 이룰 수 없을 때 선택해야 해요. 뭔가를 더 받아들일 거냐, 아니면 내 손에 지닌 걸 버려야 할 거냐.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거든요. 받아들여서 추진력으로 삼거나, 버려서 몸을 가볍게 하거나.”
“버리거나 받아들이거나, 밖에 없나요?”
“네. 아이돌이니까, 아티스트니까 아실 거 아니에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도 결단이 필요하죠. 저는…… 성필이랑 같이 지내면서 꿈을 이룰 자신이 없었어요.”
적당히, 기분 전환할 수 있을 정도로만 행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에서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는 예술가는 200명 내외래요. 저는 그중의 한 명이 됐어요. 아마 성필이랑 계속 있었으면 그저 그런 화가로 남았거나, 아예 일을 그만뒀을 수도 있겠죠. 성필이랑 있었으면 그것도 행복했겠지만, 지금도 행복해요. 그리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고지에 오르니 두고 온 게 떠오른다.
“뻔뻔한 건 알지만, 속만 썩이고 있긴 싫어서, 불렀어요.”
이수림이 성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불렀어.”
그에 성필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카, 다른 데 보고 있을래?”
“에?”
“이야기 좀 하게. 뭣하면 차 안에 히터 틀고 들어가 있어.”
성필은 리카의 손에 키를 쥐여주었다.
“……하이(네).”
리카는 개인전시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성필이 환하게 웃었다.
“미안.”
“아…… 걔 내보내길래 기대했는데. 그렇구나. 그렇겠지. 아직도 산사태에 뽑혀 나간 나무 같은 마음이야?”
“그거 리카가 아무렇게나 말한 거야.”
“왜 거절해? 이제 나한테 안 끌려?”
이수림이 한 바퀴 돌아보았다. 숄의 끝자락이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민들레 씨앗 같았다.
“옛날의 너랑 같은 심정이라고 하면 이해해줄래?”
“바로 이해했어.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응, 열심히 살고, 행복해. 언제 관심 있으면 인터넷에 소녀연맹 쳐봐. 내가 프로듀싱한 걸그룹이야.”
“노래 들어볼게.”
“고마워.”
성필은 이수림의 뒤에 걸린 그림에 한 번 눈길을 주고는, 다시는 보지 않을 기세로 등을 돌렸다. 그는 개인전시실을 빠져나와 미술관 전체를 거닐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리카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30분 넘게 미술관을 돌아다녔지만 리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차 안에 들어가 있나 싶어서 밖으로 나오니, 리카가 입구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리카?”
“아, 오래 걸렸네요! 어떻게 됐나요?”
“차에 들어가 있지 왜 여기 앉아 있어.”
리카가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났다.
“기다렸어요.”
“응?”
“박 이사님 기다렸다구요! 무려 30분이나! 이렇게까지 고생했는데 보상이 없진 않겠죠?”
성필은 당황하다가 힘 빠진 웃음을 뱉었다.
“뭐야. 수림이 따라 해?”
“보상은 돈까스예요! 빨리 가요!”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사줄게.”
“얏타(해냈다)! 그리고 그리고, 그분이랑은 어떻게 됐는지도 얘기해주세요!”
“끝났어.”
“담백해!”
종종걸음으로 차로 향하던 리카가 우뚝 멈췄다.
“이사님 잠시만요!”
그녀는 도도도 미술관 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약 3분 후 다시 나와선 성필의 옆에 섰다.
“화장실 다녀왔어?”
“아뇨, 수림 언니랑 얘기하고 왔어요!”
“무슨 얘기?”
“그림이요, 마지막에 봤던 그림. 그거 나중에 제가 살 테니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옵션을 걸었다고?”
“옵션?”
“……아니다. 그래서 수림이가 뭐래?”
“기다리시겠대요!”
“참나, 어린애 장난에 잘도 어울려주네.”
“뭔가요 그 시니컬한 말투는?! 일이 잘 안 풀렸다고 전 여친을 깔보게 된 건가요! 박 이사님 나쁜 남자예요!”
“근데 그 큰 그림을 어디 걸어두게?”
리카는 손등에 턱을 괴곤 짐짓 생각하는 흉내를 냈다. 그리고 짧은 고민 끝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성필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