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소녀연맹의 일본 컴백 시기는 가로 엔터에서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었었다.
‘언제 소녀연맹을 데뷔시키는 게 가장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논점이었는데, 그것을 쉽게 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홍규헌이 계속된 논쟁을 끝맺고 잠정적인 합의에 도달했으나, 그것도 만족스럽진 않았다.
“웨벡스는 4월을 바라나요?”
홍규헌은 애매모호한 답만 남발하던 성필에게서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왔다. 그렇다고 성필이 한 일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웨벡스가 내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알아낸 것이다.
[저희도 여러 안이 있었습니다만, 굳이 4월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가요.”
가로 엔터의 기본적인 기조는 웨벡스에 따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현지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웨벡스도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가로 엔터가 내놓을 답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5월 말에서 6월 초가 어떨까요?”
소녀연맹의 일본 앨범은 한국에서 냈던 앨범 구성곡의 재탕이다. 완벽히 똑같지는 않고 일본어 개사와 녹음을 더한 것이다.
타이틀은 팅글, 그리고 데뷔 앨범과 미니 1집의 곡들이 들어간다.
“리패키지 앨범이나 마찬가지이니 준비 기간으로 빠듯하진 않을 겁니다.”
5월 말이면 축제 시즌도 마무리됐으니, 가로 엔터도 돈을 최대한 당긴 이후일 것이다.
[7월 초나 6월 말은 어떻습니까?]
히무라가 역제안을 해왔다.
홍규헌은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적인 웨벡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3분기가 시작되니까요?”
[맞습니다.]
회계나 재정적인 이유거나 일본의 방송가 사정에 맞춘 시기일 것이다.
홍규헌이 정했던 시기보다는 느리지만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임원들을 바라보았고 동의를 얻은 뒤.
“알겠습니다.”
시기가 확정되었으니 다음은 세부적인 사항을 합의할 차례였다.
일본 데뷔를 논하는 첫 공식 회의인 만큼 많은 시간이 잡아먹혔다. 단순히 의견 교환만이 아니라, 어떻게 정기적으로 협력을 행할지에 관한 고민도 필요했다.
2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나자 히무라는 물을 마셔도 되냐는 허락을 구한 후 목을 축였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히무라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흘러넘쳤다. 그는 가로 엔터에 1억 엔을 제안하고도 내심 초조했을지 모른다.
과연 소녀연맹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 불안에 휩싸여 소녀연맹을 주시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소녀연맹은 걱정했던 게 손해라고 생각될 만큼 대박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견을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히무라는 굳이 ‘여쭙다’와 같은 극존대를 사용했다. 회의를 마칠 준비를 하고 있던 임원들도 그에게 집중했다.
[리카 씨에게 작곡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카와이 퓨처 베이스 곡으로요. 일본 데뷔 앨범에 넣고 싶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가로 엔터의 전원이 혼란에 빠졌다.
[웨벡스 사무소가 얻은 정당한 권리인 프로듀싱 권한에 입각하여 드리는 요청입니다.]
“……카와이 퓨처 베이스로 말씀이죠?”
[예.]
“저, 이런 말씀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팔립니까? 그런 게 일본에서.”
히무라는 다시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예, 팔립니다. 특히 리카 씨가 직접 작곡하셨다는 타이틀이 있으면 엄청난 화제를 모을 겁니다. 수록곡 하나 늘리는 것 치곤 과분할 정도의 화제를요. 물론…….]
인터넷의 오타쿠들에게서 말이다.
* * *
성필과 정지음은 오늘 배달된 커다란 박스를 커터칼로 찢었다. 그 안에는 직원 복지용으로 재무팀에서 주문한 안락 쿠션이 두 개 들어 있었다.
“형, 이거 걍 바닥에 두면 돼요?”
“응.”
둘은 안락 쿠션에 몸을 묻었다.
“……음, 너무 편해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네요.”
“그치?”
“근데 이거 쓰는 직원이 있을까요?”
사무실이 있는 2층은 직원들의 공간이란 느낌이 강하다. 1층엔 소파가 있는 홀이 있으나 주로 소녀연맹이 사용한다.
그나마 휴게실이 아이돌과 직원들의 공용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휴게실에 옮길까?”
“네.”
“대답해놓고 왜 안 일어나.”
“형도 앉아 있잖아요.”
그야말로 마약 쿠션이다.
“리카는 작업 잘하고 있어?”
“아직 저한테 딱히 가져다준 건 없어요.”
가로 엔터는 웨벡스 사무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리카는 일본 데뷔 앨범이 제작에 들어가기 전까지 카와이 퓨처 베이스 곡을 하나 써야만 했다.
지금도 성필과 정지음의 시야가 닿는 홀의 소파에서 노트북을 딸깍이는 중이다.
“지음아, 내가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건데. 카와이 베이스란 게 인기가 많아? 정확히…… 그, 일본에서 위상이 게 어느 정도야?”
“음, 저도 잘은 모르는데요. 카와이 베이스는 뭐랄까 인스턴트 음악 같은 느낌이 강해요. 진짜 많이 쏟아지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건 없는……. 왜 있잖아요, 아이튜브 뮤직처럼 플레이리스트에 무난하게 담긴 팝송들처럼요.”
“아, 그런 느낌이구나. 인스턴트적으로 소비되는 음악.”
“하지만 어느 장르든 록스타는 있죠.”
카와이 베이스란 조류를 창시한 DJ를 기원으로 하여 몇 명의 인기 작곡가가 있긴 하다.
또한 일본 대중음악계에선 카와이 베이스를 한 장르로서 수용하여 활용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런 움직임은 주로 아이돌을 통해서 벌어진다.
“새 장르를 아이돌이 받아들이는 건 한국이랑 비슷하네.”
“아…… 그렇죠. 그런데 한국이랑 일본은 또 결이 다르지 않아요? 일본의 아이돌은 뭐랄까, 아이돌이란 거 자체가 시장 전반의 융합적인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음악 시장 자체가 아이돌화됐다는 느낌?”
한국 대중음악은 아이돌이 강세인 게 아니라, 시장 자체가 아이돌화되었다.
어떤 강력한 장르가 시장을 점령했다면 몰아낼 수 있지만 시장 자체가 특정 장르가 되어버리면 어쩔 방도가 없다.
과거 미국의 대중음악이 곧 록이었던 시절과 비슷하다. 미국은 그 전통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쳐 대중적인 음악을 ‘팝’이 아니라 ‘팝/록’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 음악이란 뜻의 케이팝이 아이돌을 뜻하게 된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
“그럼 리카가 카와이 베이스 들고 일본에 가면 최신 음악 조류가 되는 거야? 일본 입장에서는 역수입이네.”
“근데 이거 진짜 먹힐 거 같아요.”
“뭐가?”
“리카같이 예쁜 애가 DJ 테이블을 앞에 두고 카와이 베이스 노래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진짜 덕후들 취향 제대로 저격할걸요? 왜, 일본에선 애니 캐릭터가 노래 부르는 것도 인기 많잖아요. 근데 리카는 진짜 살아있다고요!”
“리카는 당연히 살아있지.”
“살아 있는 미소녀가 카와이 베이스를 만든다고요!”
“미소녀란 말 되게 이질감 든다. 그리고 리카는 소녀 아니야.”
“미(美)는 인정해요?”
“리카가 예쁘긴 하지.”
성필이 리카가 앉은 소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리카도 성필을 바라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시선이 맞았나 싶은 순간, 리카가 눈동자를 위로 휙 올렸다. 마치 처음부터 천장을 보고 있었단 태도였다.
‘뭐야, 리카가 나 보고 있었나?’
그리고 그걸 안 들키려고 딴청을 부리는 건가.
성필은 픽 웃으면서 오히려 리카를 빤히 바라봐주었다. 그러자 리카의 이상행동이 시작됐다.
리카는 천장의 구조를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다가, 이내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곤 턱을 괬다.
‘오, 턱 괬다. 엄청 부자연스러워.’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에 턱을 괴다니. 허리가 굉장히 아플 것 같은 자세다.
분명히 불편할 텐데도, 리카는 자신이 성필을 바라보고 있었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했다.
땀을 뽈뽈 흘리고 있는 게 여기서도 보인다.
‘근데 리카가 왜 저러지?’
평소였다면 눈이 마주친 시점에서 웃어 보이거나 달려왔을 텐데. 뭐하러 안 보고 있던 척을 할까?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성필은 고양이처럼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지음아, 나 얼굴에 뭐 묻었어?”
“김이요.”
“야, 너무 옛날 아부잖아. 내가 잘생긴 건 맞는데 너무 속 보이…….”
“못생김.”
“…….”
잠시 후.
“아악! 혀, 형! 나 정강이 맞았어! 정강이 맞았다고요! 이사가 직원 팬다!”
정지음은 아직도 평정을 흉내 내고 있는 리카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숨어 보호를 요청했다.
“리카 박 이사님 좀 말려줘! 못생겼다고 농담 한 번 하니까 나 죽이려고 해!”
“박 이사님 직원 괴롭히지 마세요! 사내 폭력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어요!”
“그래, 리카가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형 남녀 차별주의자예요? 왜 내가 그만 때리라고 부탁한 건 무시하고 리카 말만 들어줘요?”
“리카는 미소녀니까.”
“인정합니다.”
정지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당한 부조리를 인정해야만 했다.
“형 저거 쿠션 작업실에도 들려주면 안 돼요?”
“한 이사님한테 말해볼게.”
“예압.”
정지음은 리카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이제 소파 근처에는 성필과 리카만이 남았다. 성필은 리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뭔가요.”
“리카, 아까 왜 나 보고 있었어?”
“안 봤어요!”
“음.”
“박 이사님 자의식과잉이 너무 심해요! 세상 모든 여자가 이사님을 보고 있단 건 망상이라구요!”
“그렇구나. 미안.”
“에, 사과할 것까지는 없는데…….”
왜 숨기는 거지?
* * *
휴일, 성필이 눈을 번쩍 떴다.
침대에서 잠시 꼼지락거리던 그는 거칠게 이불을 거두었다. 겨울의 한기가 몸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우직하게도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흐흐흥.”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기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 대출을 다 갚은 것이다.
‘전세 계약 끝날 때는 그 돈이 다 내 거다. 나도 이제 빚쟁이가 아니야.’
이제 성필은 인생의 기로에 놓였다.
다시 이 집으로 계약을 할 것인가, 아니면 또 대출을 받아서 더 나은 전세로 업그레이드할 것인가.
이렇게 한 계단씩 밟아 나가다 보면 자신만의 집을 마련할 날도 올 것이다.
‘지금도 서울 밖이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죄다 성필의 눈엔 차지 않는 것뿐이다.
회귀의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전생에 살았던 호화로운 집에 비하면 그가 구할 수 있는 집들은 모두 허름해 보이기만 했다.
‘어떻게 할까.’
성필은 행복한 고민으로 샤워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챙겨 먹으면서는 간단하게 주식을 확인했다.
‘……여기서 몇 년 더 버틸까?’
그러면 정말 서울에 번듯한 집 하나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지금 더 좋은 집으로 가봤자 뭐 좋은 게 있다고. 컴팩트한 게 최고지.’
성필은 운동복에 패딩을 껴입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곤 작게 ‘좋아’를 되뇐 후 집을 나섰다.
‘한 이사님은 계시려나.’
홍규헌, 한구인과 같은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한 지도 어언 2주가 넘었다. 하지만 정작 그 둘과 마주친 적은 손에 꼽았다.
혹시 두 사람이 안 오는가 싶었는데, 물어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안 맞는 것이었다.
‘아니면 사장님이 있을까?’
1층에 내려온 성필은 편지함을 확인했다. 시답잖은 광고 전단을 접어서 가방에 넣곤 진짜 확인해야 할 편지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전기세가 꽤 나왔네. 동네 평균보다는 훨씬 낫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돈이 빠질 구실이 하나도 없는 성필이었다.
‘이제 마지막…….’
송신인 이름이 없다.
앞뒤를 번갈아 확인해도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특징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송신인이 없는 편지,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다.
‘설마 명운이 형이 또 뭘 보냈나?’
우효민이 신아름에게 콘서트 티켓을 보낸 것처럼, 김명운도 성필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일까.
성필은 편지를 개봉했다. 그러자 미술관 초대권이 나왔다.
“진짜 티켓이네.”
혹시 김명운이 성필에게 미술관 데이트를 신청할 리는 없을 테고.
성필은 초대권 외에 다른 편지가 있는지 봉투를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대신 초대권을 자세히 살폈다.
그 즉시 성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수림, 개인전 초대권, 두 장.’
이수림.
성필의 전 여자친구다.
* * *
“카와이 퓨처 베이스요? 맡겨만 주세요!”
리카는 웨벡스 사무소의 요청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일본이, 세상이 카와이 베이스의 신 리카를 인정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 이대로 일본 굴지의 EDM 작곡가가 되는 거야! 기다려라 홍백가합전!’
홍백가합전은 일본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이다. 홍팀과 백팀으로 아티스트들이 나뉘어서 우승자를 가리는 것으로, 시청률은 매년 40%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아, 혹시 올해 소녀연맹도 홍백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홍백가합전은 1년간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아티스트들이 등장한다. 기준은 국적이 아닌 오로지 인기뿐이다.
해외 아티스트들의 등장도 심심치 않으니 소녀연맹에게도 기회가 있다. 특히 일본인 멤버가 있다면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좋아, 열심히 하는 거야!”
리카는 정지음에게 배운 방법을 철저하게 사용했다. 먼저, 자신의 과거 작업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너에게 의뢰를 했다면 네 과거 작업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일단 너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있는 게 중요해.’
그 조언에 따라, 리카는 미니 앨범 수록곡인 ‘플레이리스트’는 물론이요, 음원 공유 플랫폼에 다른 이름으로 올렸던 카와이 베이스 곡까지 전부 확인했다.
자신의 강점을 파악한다, 라는 작업은 곧 커다란 장벽을 맞이했다.
“으와…….”
리카는 본인의 과거 작업물을 듣자 저절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곡을 듣다가 급히 멈추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녀는 곧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발을 동동 굴렀다.
‘멧챠(엄청) 못 썼잖아!’
과거의 자신은 이딴 곡을 만들고선 성필에게 칭찬을 요구했던 건가? 헤실헤실 웃는 낯짝으로?
그걸 또 성필은 칭찬해줬어?!
‘이사님 우소츠키(거짓말쟁이)!’
한탄해서 어떡하겠는가.
리카는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자신의 작업물을 계속해서 들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봤지만, 자신만의 강점 따위는 찾지 못하겠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지음 오빠가 도와줬다는 건데.’
정지음이 없었다면 리카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리카의 생각)밖에 못 됐을 것이다.
즉, 리카가 지금까지 이루었던 모든 성과를 정지음이 있었기에 비로소 빛을 발한 것이다.
‘아냐, 지금의 나는 달라! 나는 성장했어!’
작곡을 2년 가까이 하지 않았던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좋은 곡을 뽑아내는 것 정도야 껌 씹듯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며칠 후.
“무리야아아앗!”
리카는 어느 경지에 도달해버렸다.
학사가 ‘나 이 정도면 내 전공 꽤 잘 아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석사는 ‘난 진짜 아는 게 좆도 없구나’라고 생각한다.
리카는 석사의 단계에 도달한 나머지, 자신의 작업물을 도저히 좋게 평가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게 역사적인 소녀연맹의 일본 데뷔 앨범에 들어가며, 웨벡스가 리카를 콕 집어서 맡긴 곡이라면 더더욱!
“오빠 저는 어떡하면 좋죠!”
리카는 작곡 스승인 정지음에게로 달려가 고민을 토로했다.
“아직 저는 수련이 부족한 거 같아요! 좀 더 작곡 테크닉을 알려주세요!”
“으음, 리카.”
정지음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리카를 달래주었다.
“이젠 테크닉이랄 만한 걸 가르칠 시기는 지났어. 너 스스로 터득하는 게 가장 중요해.”
“직무 유기예요!”
“작곡이 막힌다면 외부에서 찾기보다 내면을 탐구하는 게 중요해. 네 내면에 흐르는 멜로디를 캐치하는 거지. 아니면 트랙부터 써도 좋고.”
“……계속 붙잡고 있으란 뜻인가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곡이 안 풀린다고 외부만 기웃거리면 될 것도 안 되지. 알겠어 리카? 작곡은 예술이야. 그리고 예술에는 포기가 필요해.”
“포기!”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때, 손에 쥔 걸 놓는 거야.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내면에 집중하는 거지. 리카, 이미 네 안에는 세계가 갖추어져 있어.”
“세계!”
“그 세계 안에서 네가 원하는 걸 찾는 게 중요해.”
“결국 안 도와주시겠단 거잖아요?!”
“알았으면 빨리 나가.”
“충격! 가로 엔터 뮤직 프로듀서 직무 유기! 이대로 괜찮은가!”
물론, 정지음은 항상 리카를 도와준다. 그녀가 트랙이나 톱라인 중 하나만 완성하더라도, 정지음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것이다.
문제는 리카가 그 하나마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리카는 정지음의 조언을 새겨듣고는 스스로를 감옥 안에 가두었다. 좁고 어두운 보컬 룸에 갇혀서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왔다.
“……쉴래.”
백설하가 휴가 동안 잠만 자서 리카의 차지가 된 보컬 룸. 그곳에서 나온 리카는 터덜터덜 가로 엔터의 복도를 걸었다.
조아라에게 안겨 휴식이나 취하려 연습실 문을 열었는데, 예상외의 인물이 있었다.
“박 이사님!”
흐릿하게 반쯤 감겨 있던 리카의 눈꺼풀이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를 모두 보여줄 기세로 활짝 올라갔다.
리카는 호다닥 성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연습실에 왜 계시나요? 춤 연습하시게요? 아타시(저)도 보여주세요!”
“생각할 거 있어서.”
성필은 핸드폰을 들고 가만히 서 있던 와중이었다. 리카가 들어왔던 때는 왼손의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기도 했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보다는 성필의 핸드폰에 비친 게 더 신경 쓰였다.
“미술관 가시나요?”
“아, 어, 음, 음.”
“저도 데려가 주세요! 휴가잖아요!”
“아…… 아!”
성필은 품에서 티켓을 두 장 꺼내 리카에게 주었다.
“데이트 신청이네요!”
“아냐. 그거 너한테 줄게. 보러 가.”
“앗, 혹시 이건 선물 짬 처리? 아름이한테도 당했어요! 상대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본인이 보러 가야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가요?”
“……전 여자친구한테 받았어.”
리카의 눈이 아까보다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재결합의 사인인가요?!”
“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에에에에에에엑?! 저희는 매일 죽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박 이사님만 쾌락을 탐하는 꼴은 죽어도 못 봐요! 소련이 해체할 때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해야죠!”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지는데.”
“그건 이사님이 알아서 챙겨야죠.”
“알겠어, 챙기러 갈게. 티켓 내놔.”
“잠깐 잠까아아안!”
리카는 성필에게 티켓을 빼앗기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재, 재결합 사인 맞나요 이거?”
“왜?”
“아니, 두 장이잖아요. 보통은 한 장을 주겠죠!”
“시험이야.”
“하이(네)?”
“애인이 있으면 같이 오고 없으면 혼자 오라는 뜻이잖아.”
“대체 얼마나 꼬여 있는 인간인가요.”
“내 여친 욕하지 마!”
“벌써 결합했나요?!”
리카와 성필은 티켓이 줄이라도 되는 듯 각자 양쪽 끝을 잡고 있었다. 리카는 그것을 유심히 보더니, 티켓 하나를 쥐던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성필은 얼떨결에 티켓 하나를 손에 쥐게 됐다.
“그럼 아타시(저)랑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