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가로 엔터 2층의 빈방 중 하나.
크기에 비해 방 안의 밀도는 낮았다. 흰색의 밝은 벽지에 테이블과 의자 두 개만 덩그러니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건 카메라 앵글 안의 이야기였다. 앵글 밖으로는 조명 기구와 여러 대의 간이 의자, 거기에 이번 촬영을 보기 위해 모인 이들로 가득했다.
그래봤자 촬영의 주인공인 리카와 백설하를 제외하면 다섯 명이 전부였지만.
“박 이사님, 이제 시작해도 될 거 같습니다.”
양상헌의 말에 성필은 정면을 향해 외쳤다.
“리카, 설하. 3분 뒤에 촬영 시작할게.”
오늘은 소녀연맹의 영상 시리즈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의 첫 촬영일이다.
다른 멤버들은 음방을 마치고 와서 힘들 텐데도, 리카의 야심 찬 프로젝트를 응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세트는 이게 다예요?”
“응.”
그리 질문하는 신아름의 말투에는 묘한 안심이 배어 있었다. 사실 그녀는 리카의 영상 촬영을 응원하기 위해 온 건 아니었다.
신아름은 ‘뭐든지 가능한 아름이’라는 시리즈로, 소녀연맹 채널의 예능 중에서는 가장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카가 공공연하게 아름이를 이긴다고 말하니까 걱정이 되는 거지.’
현재 신아름은 ‘얼마나 재밌는지 보자’라는 상태인 것이다.
“쌤 이거 맡아보세요!”
반면 리카는 평온하기만 했다. 대본이 없는 방송임에도 긴장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 무대본이라고 한다면 멘트를 다듬느라 바쁠 텐데도 말이다. 리카는 천상 연예인 기질인 듯했다.
“뭐를?”
리카와 반대로 백설하는 긴장한 티를 냈다. 텔레비전 예능이 아니지만, 아이튜브에 올리면 최소 수십만 명의 사람이 보게 될 것이다.
소녀연맹의 이름을 걸고 제작되는 영상이니 허투루 임할 수도 없다. 그 결과, 백설하는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의 촬영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것이다.
“이거요.”
리카가 백설하의 코 주변에 종이를 팔랑였다.
“향기 좋다. 무슨 향이야?”
“아라쨩 시그니처 냄새예요!”
“어?”
리카가 프래그런스 시향지(試香紙)를 자신의 코 가까이 들이댔다.
“스읍, 아라쨩의 니요이(냄새)……. 살짝 시큼하고 싸한 느낌…….”
조아라가 나는 용처럼 리카에게 달려가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팟!’이란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아라는 리카의 손가락을 꺾어서 시향지를 뺏었다.
“아라쨩 너무 폭력적이야! 폭력적인 여자는…… 아니, 폭력적인 인간은 인기 없어!”
“입 다물어 변태야.”
양상헌이나 성필이 없었다면 ‘입 닥쳐 변태야’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조아라는 얼굴을 붉히곤 다시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나왔다.
이렇듯 리카는 저 시향지로 조아라 놀리기에 맛 들였는데, 원인은 장하양에게 있었다.
얼마 전 라이브에서 시그니처 프래그런스를 ‘시그니처 냄새’라고 말했던 까닭이다.
이후 발언을 수정했지만, 덕분이라고 할까 팬 커뮤니티에서 제발 공식 굿즈로 내달라는 성원이 빗발치듯 들어왔다.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인민이들!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의 첫 방송입니다! 와아아아!”
리카가 신나게 손을 흔들자 백설하도 그 텐션에 맞춰서 신나는 티를 냈다.
보기 조금 안쓰럽다.
리카는 방송 시작 후 여러 멘트를 치다가,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프로그램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왔다.
“아까 말했는데요, 아타시(제)가 멤버들의 소원을 들어줄 거예요! 멤버들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일했고 너무 잘했으니까요! 그리고 사랑받아 마땅한 멤버 1호 우리 쌤!”
“으, 응.”
“쌤 소원을 말해주세요!”
백설하는 속으로 ‘왔다’라고 생각하면서, 미리 준비해왔던 답을 술술 꺼내놓았다.
“음, 내가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오래 했었잖아.”
“그렇죠! 초등학생 때부터 하셨다고 들었어요! 이야, 정말 대선배님이네요! 아타시(저)랑은 연륜이 달라요!”
“…….”
성필이 ‘설하야 촬영! 촬영!’이라고 작게 말하자, 그제야 백설하가 험악했던 표정을 폈다.
“으, 으응. 그으, 그래서어, 내가 학교생활을 잘 못 했거든. 추억이랄 게 별로 없어.”
옛날, 소녀연맹 멤버들이 숙소로 들어가기 전. 성필이 멤버들의 학폭 유무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백설하는 자신이 학교생활을 잘하지 못했으며, 지금까지도 그게 후회된다는 발언을 했었다. 눈물까지 몇 방울 흘리면서 말이다.
“그래서 학생다운 추억을 쌓고 싶어. 가능해?”
“으음, 어려운 소원이네요.”
리카는 턱수염 신사라도 된 듯이 자신의 턱을 가는 손가락으로 쓸었다.
‘리카가 어떻게 할까. 미리 소원을 말하지 말라곤 했지만.’
백설하는 리카의 요청대로 정말 이루고픈 소원을 말했다. 하지만 리카가 어떻게 이루어 줄지는 미지수였다.
‘리카가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내가 바라는 건 있는데…….’
백설하는 학생다운 생활을 바랐다. 즉, 수학여행이라거나 운동회를 해보고 싶었다.
요즘 소녀연맹은 앨범 활동 기간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만약 이 소원이 성취된다면 일하는 동시에 놀 수도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리카도 비슷하게 해주겠지?’
어쩌면 가로 엔터 야유회라던가 단합 대회를 열지도 모른다.
‘아, 그건 좀 아닌가? 어디까지나 아이튜브 콘텐츠니까 멤버들끼리만 나와야겠지.’
그것도 좋다.
같이 펜션에 놀러 가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던가. 커다란 숙소 방에 함께 모여 자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떤다던가.
아무튼 학창 시절의 추억과 비슷한 것을 쌓고 싶었다.
“좋아요!”
오랜 고민 끝에 리카가 해답을 떠올렸다.
“요정, 나와주세요!”
요정(가로 엔터 홍보팀 콘텐츠 기획 담당 양상헌)이 리카의 근처로 다가갔다. 자막으로도 그에 대한 소개가 짧게 나갈 것이다.
“……렇게 해주실 수 있나요?”
리카의 요구를 들은 양상헌이 엄지를 척 들었다. 그가 앵글 밖으로 나가자 리카가 백설하의 손을 잡고 크게 외쳤다.
“소원 수리!”
“어? 어떻게 하는데?”
“쌤의 소원은 접수됐어요! 자, 이제 엔딩곡 부르고 끝내요!”
“15분밖에 안 찍었는데……?”
“오늘은 이걸로 됐어요! 자, 그럼.”
[리카: 안녕 멤버들
설하: 소, 소녀연맹~
리카: 행복하게 해줄게
설하: 소중하니까~
리카: 리카쨩이 이뤄줄게
설하: 사랑받아야 해~
리카: 행복해질 수 있어
다시 일어나자
안녕 멤버들
설하: 소녀연맹~
리카: 뚜비두비 뚜바밥.]
엔딩곡과 함께 리카가 카메라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보이고.
[행복하게 해줄게!]
튕겼다.
[리카쨩!]
* * *
백설하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아래만 바라보았다. 아래, 자신의 허벅지를.
검은색의 매끈한 교복 치마가 보였다.
치마 길이는 충분하건만, 백설하는 치마의 밑단을 잡고 자꾸만 무릎 가까이 끌어내렸다.
치마 따위야 인생을 살아오면서 질리도록 입어왔으나, 이토록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다.
“여러분!”
백설하의 기분과 대비되는 리카의 밝은 목소리. 그에 고개를 푹 숙인 백설하의 얼굴이 더더욱 붉게 달아왔다.
“가로 고등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교실을 재현한 세트장으로 멤버들의 박수가 조촐하게 퍼져나갔다. 그제야 백설하는 고개를 들었다.
벽면에는 교실 풍경을 인쇄한 종이가 걸려 있고, 멤버들은 교실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카메라 방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모두 교복을 입고 말이다.
당연히 소녀(24세)연맹 리더인 백설하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앗! 입학식이라 잔뜩 긴장한 학생이 보이네요!”
리카는 백설하의 뒤로 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작은 자극에도 백설하는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17세에서 19세 사이의 소녀들만이 입는 이 교복이란 물건이 백설하의 신경을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었다.
“안녕, 나는 일본에서 유학 온 이시카와 리카라고 해! 친구는 이름이 뭐야?”
“나, 나느은, 나는…….”
백설하는 달달 떨면서 앞을 보았다. 카메라 옆에 서 있는 성필에게 도움을 구하듯이 시선을 주었지만.
“…….”
성필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우리 친구 많이 긴장했구나! 그럼 자기소개 먼저 하자!”
리카가 백설하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백설하는 더욱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보는 사람이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다.
백설하는 딸기가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겨우겨우 대본을 떠올렸다.
“나, 나는, 백설, 백설하라고, 해. 여, 17살, 1학년…….”
“푸흡.”
백설하가 웃음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조아라는 이미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는 척하는 중이었다.
“특기, 는, 노래부르, 기……. 밴드, 밴드부에…… 들어갈, 생각이야…….”
“와아! 우리 친구는 노래를 잘 부르는구나!”
그 이후로…… 말해서 뭐 할까.
백설하는 입학식, 새 학기 친구와의 만남, 장기자랑이라는 핑계로 온갖 고초를 감내해야만 했다.
교복 치마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본인의 나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 맨정신으로 견디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는데…….’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의 기획 의도에 따라 백설하의 소원은 정직하게 구현되었다.
리카는 아예 학교를 배경으로 한 소녀연맹 자체 예능을 찍기로 한 것이다. 일명 ‘가로 고등학교’라는 제목으로.
‘어째서, 이런 일이, 엄마…….’
멤버들이 번갈아 가며 자기소개와 장기자랑을 끝내고 다음 순서가 왔다.
어느새 MC역이 되어버린 리카는 신나고 흥분해선 큰소리로 외쳤다.
“반장 선거야! 우리 반에도 반장이 있어야 해!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촬영 시간도 한 시간이 넘었다. 이쯤 되니 백설하도 제정신을 어느 수준까지는 유지할 수 있었다.
약 10초간의 침묵.
‘반장 선거면…… 내가 해야겠지?’
멤버들이 가만히 있는 것도 리더인 백설하를 배려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창피하지만, 백설하는 소심하게 손을 들.
“나 할래.”
체육복을 스타일리시하게 허리에 두른 소녀(21세), 신아름이 교실 중앙으로 나와서 선언했다.
“할 사람 없으면 내가 한다?”
“오, 추천도 아니고 자진해서 입후보! 아름이 대단해!”
백설하는 소심하게 살짝 올렸던 손을 아예 내렸다. 그렇게, 가로 고등학교 1학년 1반의 반장은 신아름이 되었다.
“…….”
오직 창피함밖에 남지 않은 소원 성취였으나, 백설하는 자신이 반장이 안 됐단 데서 은근한 섭섭함을 느꼈다.
* * *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 1회 비하인드.]
영상에서는 녹초가 되어 의자에 늘어진 백설하와 그녀에게 다가오는 리카가 잡혔다.
[쌤! 어땠나요? 아타시(제)가 쌤의 소원을 이뤄줬어요!]
[……응.]
[기쁘신가요?]
[……응.]
[쌤 교복 카와이(귀여워)! 사진 찍어야지!]
[찰칵 찰칵]
[반응이 좋으면 ‘가로 고등학교’ 2화도 찍을 거예요!]
[……이젠 아무래도 좋아.]
“이 정도면 리카 씨가 설하 씨 멕이는 거 아니에요?”
양상헌의 진단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성필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본인이 악의가 없단 점에서 더 심하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나중엔 설하가 즐기게 될 지도요.”
성필이 ‘나중’이라고 말한 이유는,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 1화의 조회 수가 80만을 넘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주일도 안 돼서.
어지간한 아이돌 기획 웹 예능 저리 가라고 할 수준이다.
“설하 씨가 즐긴다……. 그런 날이 올까요?”
“예능이니까요. 즐기면서 하면 좋죠.”
“……꼭 원숭이 손 같네요.”
“원숭이 손이요?”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란 작가의 공포 소설이요. 원숭이 손은 소원을 세 가지 이뤄주는데, 그 소원에는 대가가 따라요.”
그렇군.
이뤄주긴 하는데 꼭 원하는 형태로 이뤄주진 않는단 건가. 무언가 희생하는 게 있다는 부분에서, 인간의 욕망이란 등가교환이란 점을 일깨워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 가죽’과 맥락이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건 소원의 대가가 수명이지만, 아무튼.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은 원숭이 손이나 나귀 가죽과 비교 대상인가.’
참으로 두렵다.
“그런데 이건 좀 고민이 되네요.”
양상헌은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의 성공에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이 조회 수가 나온 게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 자체라서 그런지, 아니면 ‘가로 고등학교’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댓글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리카가 멤버들의 소원을 이뤄준다는 컨셉이 독특하면서도 재밌다는 이들도 있고, 가로 고등학교를 더 보고 싶다는 이들도 상당하다.
“상헌 씨, 이왕 교실 세트 꾸며둔 김에 한 회 더 촬영해볼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홍보팀 내에서 얘기해보세요.”
“알겠습니다.”
백설하의 심지가 깎여나갔다는 부작용도 있지만, 리카의 아이튜브 시리즈는 명백히 히트한 것이다.
성필은 양상헌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준 뒤 1층으로 향했다.
“아라쨩은 소원 생각해뒀어?”
“아니.”
“다음 차례는 아라쨩이야!”
조아라는 살인 예고라도 들은 것처럼 영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백설하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보았으니, 리카의 영상에 출연하는 게 껄끄러울 만도 하다.
성필은 소파에서 쉬고 있는 둘에게 다가갔다.
“앗, 박 이사님이다!”
부엉이처럼 고개를 홱 돌린 리카는 손에 들고 있던 투명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치익.
액체가 분사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의 정체가 밝혀졌다. 투명한 향수 용기였다.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겨울 숲과 같은 청량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익숙한 향이다.
“아라 시그니처 프래그런스야?”
리카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츠츠’ 소리를 냈다.
“아라쨩 시그니처 냄…….”
조아라가 리카의 목덜미를 잡아서 소파에 내동댕이쳤다.
“아라쨩 짐승! 난폭해!”
“유언비어 좀 그만 퍼뜨리라고…….”
“이제 박 이사님도 아라쨩 품에 30분 안긴 거랑 똑같은 효과가 생겼어요.”
“아라는 그거 안 뿌리잖아.”
리카가 조아라를 향해 향수를 발사했다.
“이제 커플 냄새네요!”
“……진짜 땅에다가 메다꽂아버릴까.”
“그리고 나도!”
리카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 향수를 뿌렸다.
“아, 머리 아파아…….”
“너무 많이 뿌리니까 그러지. 아, 맞다 아라야. 좋은 소식 있다.”
리카의 장난에 지쳐서 늘어져 있던 조아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거 시그니처 냄, 아니, 이거 향 만든 회사에서 우리 쪽한테 이벤트 제안했어. 지정 매장에서 소녀연맹 시그니처 섬유 향수 구매하면 팬사인회 응모권 주는 거야.”
“와아, 진짜 미치겠다. 나는 뿌리지도 않고 내가 고른 것도 아닌 향수를 그렇게 광고해요?”
장하양의 말실수가 부른 나비효과가 이렇게나 크게 돌아왔다. 단순히 굿즈로 제휴할 물건이 팬사인회 응모 행사로까지 번지다니.
“다들 우리 아라의 향기를 원하는 거지. 그쪽에서도 감명 깊었나 봐.”
“에에, 뭔가 아쉽네요.”
“뭐가?”
“그 회사에서 아라쨩 연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땀이나 머리카락 샘플 보내서 아예 본격적으로 아라쨩 향을 제작하면…….”
“그럼 나 위약금 물고 소녀연맹 나간다.”
“너, 너무해! 아타시(나)를 버리려구?!”
“그 지경까지 가면 더 이상 나 자신으로 못 있을 거 같아.”
“커플 냄새 박 이사님은 어쩌게!”
조아라는 성필을 흘끗 보았다.
“아저씨와의 인연도 거기까지지 뭐.”
“아라야, 그룹 나간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면 어떡해. 나 마음이 너무 아파.”
“맞아! 우리 셋은 같은 체취로 이어진 동료잖아!”
리카는 좌절이라도 한 듯 과장되고 고개를 떨구더니, 곧이어 다른 향수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라쨩이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
리카는 성필에게 또 향수를 분사했다.
“아라쨩이 싫어하지 않도록 제 시그니처 향기로 마킹해드릴게요!”
“리카 그만 좀 뿌려! 그렇게 많이 뿌리면 옷에서 냄새 안 지워져!”
“빨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야, 세탁기에 수십 번 돌려도 냄새 절대 안 지워져.”
“경험자처럼 말씀하시네요. 섬유 향수로 옷 버리신 적 있으신가 봐요. 음, 고깃집에 4시간 동안 있어서 냄새를 지워야 했다던가?”
“그냥…….”
전생에 조아라에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다. 어느 날 성필에게 아이돌 화장 냄새가 난다면서 어찌나 향수를 뿌려대던지.
회귀 전까지 그 옷에서는 향기가 절대 가시지 않았었다. 그 지경까지 갔으니 이미 버린 옷이건만, 조아라는 자신을 만날 때는 그 옷을 입고 오란 요구까지 했었다.
“……상식이잖아. 그런 건.”
“그런가요?”
리카가 뒤바뀐 성필의 낌새를 눈치채기 전, 때마침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의 사장인 조진만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성필은 일이 있단 뜻으로 리카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곤, 아까보다 정돈된 자세로 핸드폰을 귀에 댔다.
“예, 조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박 이사님. 다름 아니라, 결정이 났습니다.]
아, 드디어.
[요청해주신 대로 저희 ‘아틀라스’가 소녀연맹의 해외 투어 기획을 맡겠습니다.]
조진만이 답을 주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24시간이 못 되었다.
회사의 역량과 주어진 시간을 고려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텐데, 조진만도 상당히 급했던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저도 사장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성필은 묘하게 들뜬 눈빛을 리카와 조아라에게 주었다.
“얘들아, 드디어 너희 콘서트 기획 들어간다.”
“오, 벌써요? 그럼 콘서트는 언제인데요?”
“우리 아라, 어째 담담하다? 안 기뻐?”
“뭐, 내가 리카처럼 아저씨한테 점프해서 안기기라도 할까 봐요?”
리카는 벌써 성필의 옆구리에 붙어서 감동하는 중이었다.
“올해 안에는 할 거야. 아마 하반기? 너희들, 일본 데뷔 끝나고도 일이 산더미처럼 있을걸?”
“뭐든 시켜만 주십쇼!”
“그래, 리카. 알았으니까 떨어져. 또 내 옷 화장 범벅으로 만들게?”
“이번엔 안 우는데요!”
“실망스럽군…….”
“난데(어째서)?!”
“그럼요.”
조아라는 콘서트에 흥미가 동했는지 소파 위로 미끄러져 오듯이 성필과 가까워졌다.
“막 내가 춤출 때 불기둥도 쏴줘요?”
“쏴주지.”
“무대 전부 뒤덮을 만큼?”
“얼마든지. 레이저랑 조명도 네 몸이 불탈 때까지 막 쏴줄게.”
“아저씨 나 죽이고 싶어요?”
“저는요 저는요!”
리카는 우주를 몸으로 표현할 요량인지 팔을 활짝 펼쳤다.
“저도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리카 부탁이면 뭐든지.”
“밤하늘을 가득! 가드으윽! 전부 메울 정도로 불꽃놀이 쏘고 싶어요!”
“그건 안 돼.”
“생각이라도 해보시죠?!”
그때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로 엔터의 경비견 리카는 당장 입구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누구세……!”
리카가 순식간에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에 따라 문은 무방비상태가 되었고, 바깥에서 누군가가 닫히려는 문을 붙잡았다.
하지만 바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호, 호홍, 홍…….”
“이번에는 문 바로 안 닫는 거야?”
문 바깥에서 홍연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필은 비 온 뒤의 물구덩이에서 목욕하는 참새와 비견될 만큼 몸을 빠르게 털어 냄새를 지우려 했다.
그리고 굳은 리카를 대신하여 문 앞으로 향했다. 목소리대로, 서 있는 사람은 홍연헌이었다.
“홍연헌 사장님.”
“들어가도 돼요?”
“예, 들어오세요.”
홍연헌은 한 손으로 문을 밀었다. 그러자 무거운 유리문이 이불처럼 펄럭이는 듯 끝까지 밀렸다.
그녀는 문이 열린 동안 여유롭게 회사 안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박 이사님 안녕하세요!”
홍연헌은 커다란 팔로 성필과 어깨동무했다. 성필은 HPT 뮤직 어워드 때가 기억나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친근한 태도에 리카와 조아라가 성필보다 훨씬 더 놀랐다.
“얘들아 안녕. 리카 오랜만!”
“하, 하이(네).”
“하핰, 너희들 재밌다. 왜, 이사님이 이런 대우 받는 거 처음 봐? 우리 친구야 친구. 그렇죠 박 이사님?”
성필은 어릴 적 무서운 형들이 어깨동무하고 골목으로 끌고 들어갈 때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떠신다. 아무리 제가 미인…… 웁.”
홍연헌이 코를 찡그렸다.
“어후, 향수 너무 쌔게 뿌리셨다. 뭔…… 규헌이한테 좋은 향수 좀 사달라고 해요.”
‘싸구려 같다’는 말을 돌려 한 것일까.
성필은 자신의 몸에서 ‘싸구려 같은’ 향이 난다는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외모를 지적당했을 때와 같은 정도의 충격이었다.
“아, 맞다. 이러면 안 되지.”
홍연헌이 갑작스레 성필을 놓았다.
그에 성필은 새장에서 탈출한 새의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이 정말 그렇게 안 좋은지 은근슬쩍 확인했다.
이미 코가 적응해서 냄새 같은 거 느껴지지 않았다.
“음, 규헌이…… 가 아니라, 홍규헌 사장님 있죠?”
“어쩐 일로…… 아니, 약속은 잡으셨나요?”
“아아, 그렇네 그렇네. 죄송해요. 제가 이런 일은 오랜만이라서. 그리구 동생네 오는 거라서 저도 모르게 들떴나 봐요.”
홍연헌은 배시시 웃으면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성필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시지프’ 사장으로서 왔습니다. 공연 기획 담당 부서 인원과 만날 수 있을까요? 소녀연맹의 공연 관련으로 제안할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