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의 사장, 조진만. 그는 피곤한 눈길로 무대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어느 발라드 가수의 앙코르를 열정적으로 감상하는 약 2,000명의 관객들. 그리고 그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미 성대의 피로도가 한계에 달했음에도 모든 힘을 쥐어 짜내는 가수.
모든 풍경이 사람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PD님.”
하지만 조진만의 부하 직원들은 그런 가슴 벅참 따위 느끼지 못했다.
“벌써 몇 곡째죠?”
“다섯.”
“앵콜을 다섯 번이나…….”
남들은 새로운 마음을 다잡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볼 연초(年初).
조진만과 그 부하 직원들은 끝나지 않는 앙코르를 피곤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콘솔 앞에 선 그들은 ‘제발 끝나라’라는 의지를 눈빛으로 전하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공연 사업의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전후로, 아틀라스 직원들은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불태우는 중이었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정말 타들어 가 재만 남을 지경이었다.
“아, 끝났다.”
다섯 번째 앙코르가 끝나자 관객들이 다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낸다.
발라드 가수는 피곤한 듯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곤 말한다.
[여러분, 저 이제…….]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앙코르! 앙코르!’. 그에 가수는 허허롭게 웃으면서.
[예,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갑니다!]
부하 직원이 콘솔을 거칠게 내리쳤다.
“여섯 번이라고오……!”
그렇게 공연 스태프들의 퇴근은 더욱 미뤄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섯 번째 앙코르가 정말 마지막이었다.
여기저기서 스태프들의 ‘수고하셨습니다’란 소리가 들리고,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공연장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PD님 진짜 고생하셨어요.”
“어.”
조진만은 부하의 대답을 대강 넘기고 정면만 응시하였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스크린의 엔딩 크레딧. 그곳에는 몇 개월간 이 공연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그중엔 조진만의 이름 또한 작게 한구석을 차지했다. 이곳에 온 2,000명 중 누가 저것을 볼까 싶지만.
“나 한 대 피우고 온다.”
조진만은 관객들의 퇴장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향하여 담배를 한 대 꼬나물었다.
그의 귓가에는 공연에 대한 평을 쏟아내는 관객들의 목소리가 한 아름 박혔다. 대부분 평이 좋았다.
그건 조진만에게 마약과 같았다. 몇 개월 동안 고생한 성과를 마침내 보상받는 돈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동기 부여였다.
직후 이어질 레이스에도 굴하지 않을 의지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게 느껴진다. 다음에도 이런 공연을 만들자…… 그런 의지가 과로로 무너져 웅크린 마음으로부터 새싹처럼 자라났다.
“음?”
그때 조진만의 시야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잡혔다.
그곳으로 초점을 맞추자 오랜만인 얼굴이 보였다.
‘홍규헌 사장님이랑 박성필 이사님.’
조진만은 혹시나 그들이 2층으로 시선을 옮길까 싶어서 담배를 난간벽 아래로 숨겼다. 하지만 그들은 나갈 때까지 조진만을 보진 못했다.
‘우연인가? 하긴, 나를 보러 올 거였으면 연락이라도 했겠지.’
의외다.
설마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일 줄이야. 회사의 사장과 이사가 연인인가…….
‘바람직하진 않군.’
조진만이 무어라 할 건 아니지만, 당장 떠오르는 부작용만 생각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연인인 성필에게 쏟아질 총애. 그리고 둘이 헤어졌을 때 경직되어버릴 회사의 시스템 등.
하지만 조진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곤 곧바로 다른 아티스트를 떠올렸다.
‘소녀연맹.’
조진만은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에 여러 조언을 주었다. Girls’ Union은 콘서트의 세트리스트를 고려하여 곡이 구성되었고, 그 구성을 짜는 데는 조진만의 조언이 주요한 역할을 했을 터다.
‘가로 엔터가 우리 아틀라스에 일을 맡겨줄까.’
소녀연맹 해외 투어.
그 일을 받기만 한다면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금전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해외 투어를 기획했다는 커리어가 회사에 남게 된다. 그 경험은 회사 인원들에게 두고두고 남을 자양분이 될 게 틀림없다.
‘아니.’
그런 이해득실을 전부 배제하고서.
‘내가 맡고 싶다.’
소녀연맹의 콘서트를 연출하고 싶다. 그런 열망이 조진만의 가슴을 꽉 채웠다.
* * *
“공연 어떠셨어요?”
“나는 발라드를 별로 안 좋아해서. ‘잘 부른다’ 같은 느낌밖에 없었어.”
“그래요…….”
홍규헌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성필은 데이트 코스를 잘못 고른 남자친구처럼 풀이 죽었다.
두 사람이 합의해서 보러 온 것이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반응이 미지근하면 실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왜냐, 성필은 즐겁게 봤기 때문이다.
“조금 나중이라도 포유 단독 콘서트로 할 걸 그랬나요?”
“그건 시기상으로 늦은 감이 있잖아.”
‘프로젝트 포유’로 탄생한 1년 프로젝트 그룹인 포유는 착실히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이번 활동 기간이 끝나면 단독 콘서트와 함께 공식적인 해체를 선언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콘서트 또한 조진만의 아틀라스가 기획을 맡았다.
“콘서트 기획에는 못해도 6개월은 걸린다면서? 시작하려면 1월 초엔 조 사장한테 말해야지.”
“그렇죠. 그럼…….”
성필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 조 사장님이 연출하신 공연은 어땠어요? 맡겨도 좋겠다 싶으세요?”
“박 이사 오늘따라 많이 들뜬 거 같아.”
“네?”
“그냥 그렇게 느껴지네. 뭐 좋은 일 있었어?”
“좋은 일…….”
성필은 의식적으로 거부하지만, 무의식은 이미 해답을 내렸다. 그는 오랜만에 무언가 데이트 같은 것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비록 홍규헌은 사장이라 연애 상대로 삼을 수도 없으나, 이 상황 자체가 성필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애들 콘서트 때문에 좀 들뜬 감이 있나 보죠.”
“박 이사는 언제 어디서나 소녀연맹 생각뿐이네. 교사나 유치원 선생이 천직 아니야?”
“그런 미래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공연 연출 물어봤었지. 난 좋다고 생각했어. 중간중간 구성이 좋더라. 지루하지도 않고. 옛날에 발라드 가수 공연을 또 본 적이 있었는데, 그건 진짜 최악이었거든.”
“왜요?”
“쉬는 타임이랍시고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더라.”
“아…….”
사람들이 콘서트에 오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가수의 무대를 보기 위해서다.
물론 콘서트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 VCR 또한 콘서트의 묘미다. 하지만 그런 영상이 호응을 얻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거 다 해버린 뮤직비디오는 관객들에게 피로만 유발할 뿐이다.
“박 이사는 콘서트 같은 거 많이 봤지?”
“사장님만큼은 아닐걸요.”
“내가 뭘?”
“한 이사님한테 들었는데, 사장님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돌 공연 다니셨다면서요?”
“정말 옛날이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플래카드 같은 거 만들기도 했지. ‘오빠 사랑해’ 같은 글자 오려 붙이고. 근데 영상으로 감상한 것까지 치면 박 이사는 못 이기지.”
그건 그럴 것이다.
성필은 어떤 아이돌이든 콘서트 DVD나 블루레이가 발매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달려가서 뜯어보곤 하니 말이다.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겠지만, 확실히 조 사장님이 노련하신 게 느껴져요. 저희가 바라는 규모의 공연도 많이 연출해보셨으니까요.”
“뭣보다 우리 애들이랑 오래 알고 지냈지.”
콘서트 기획에서 작가나 연출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꼽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아티스트에 대한 이해도다.
그 때문에 연출가와 작가는 기획 업무가 들어오면 아티스트의 모든 정보를 몇 날 며칠, 몇 주에 걸쳐서 전부 조사한다. 그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 사장은 ‘롱 포’부터 우리 애들이랑 일했으니까, 이해도가 남다르겠지.”
“그건 확실히 플러스 점수죠. 그럼 바로 연락드릴까요?”
“왜 이렇게 급해. 다른 기획사들 더 찾아보고 회의해서 결정하자.”
“넵.”
조진만이 연출한 공연은 홍규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박 이사, 시간 좀 되긴 했는데 뭐라도 먹을까? 저녁 안 먹고 바로 왔잖아.”
“좋죠.”
“뭐 먹고 싶어? 내가 살게.”
‘뭐 먹고 싶어’란 질문에 성필의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첫 번째, 홍규헌의 배경을 고려하여 파인다이닝으로 간다.
그 결과는?
‘내가 사준다고 정말 비싼 데로 왔네. 박 이사 은근 영악해.’
혹은.
‘뭐 이런 데를……. 박 이사 나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야?’
오케이, 두 번째.
당장 눈에 보이는 근처의 일식집으로 간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롤이나 초밥 세트를 먹는다.
그 결과는?
‘내가 사준다고 했는데도 이게 최선이야?’
혹은.
‘음, 박 이사 입맛은 이렇구나. 이런 거 먹으면서 삶을 살아온 거야?’
오케이, 세 번째.
국밥집.
결과는?
‘괜히 왔어.’
혹은.
‘하아…… 진짜…… 뭐? 아냐, 아무것도.’
시뮬레이션 끝.
“강변북로 왼쪽으로 붙어서 올라가면 맛집 많거든요? 근처에 차 세워두고 걸어서 둘러볼까요?”
“거기 아파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뭐어, 그럴까.”
성필은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둘은 목적지인 동네에 도착해서 맛집 탐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도 평이 좋은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성필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귀신처럼 훑었다. 다행히 홍규헌이 좋아할 만한 정갈한 음식들이 많…….
“난 닭칼국수.”
“네?”
“뭐.”
“아, 아뇨.”
국물 있는 종류를 튈까 봐 안 좋아할 줄 미리 짐작하고 있던 터라, 그녀의 선택에 놀라버렸다.
성필은 회사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 그녀가 입은 코트와 그 브랜드를 패션 잡지에서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600만 원이었지.’
샛노란 단무지 같은 저 코트가 성필의 월급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홍규헌은 국물이 튀든 말든 신경도 안 하는 걸까.
“저도 닭칼국수로 할게요. 보쌈도 시킬까요?”
“박 이사 먹고 싶으면 시켜.”
“안 시킬게요.”
“대짜로 시켜.”
음식이 나오자 성필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또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보자 홍규헌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박 이사, 그거 애들 포토 카드야?”
“네.”
“그걸 왜 가지고 다녀……?”
“사장님 예절 포카 모르세요?”
“뭔데 그건.”
“아이돌 팬 문화인데, 음식 사진 찍을 때 최애 멤버 포카랑 같이 찍는 거예요. 트잇터 예절이라고도 해요.”
“그걸 왜 하는데…….”
“재밌어 보여서요. 저는 SNS 안 하지만…….”
젊은이의 문화에 끼고 싶은 30대 중반의 마음이라고 하면 알아줄까?
성필은 다섯 개의 소녀연맹 포토 카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장님 먼저 드세요. 저는 이거 하고 먹을게요.”
“…….”
좋아, 오늘은 장하양으로 정했다.
성필은 장하양의 포토 카드를 조심스레 세워두고 음식 사진을 찍…….
“음?”
성필에게 톡이 왔다. 놀랍게도 현재 카메라 앵글 안에 든 주인공인 장하양이었다.
[스타그래프에 올리려는데 어느 사진이 더 낫나요?]
셀카 두 개 중 하나를 골라달라는 부탁이었다. 성필은 또 다른 고민에 빠져버렸다.
‘둘 다 예쁜데.’
10초 정도의 고민 후, 성필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둘 중 겨우 하나를 선택해서 말해주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안 바빠. 괜찮아.]
[네. 좋은 밤 보내세요.]
[하양이 너도 잘 자.]
“누구야? 표정 심각해져선.”
“아, 하양이요. SNS에 사진 올릴 건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골라 달래요.”
홍규헌은 뭔가 하고픈 말이 많아 보였다.
“박 이사…… 아니, 아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곤 칼국수를 입에 가져갔다. 성필은 음식 사진 촬영을 마치곤 뿌듯한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하려 했다.
그때 문득 장하양의 포카를 보고 할 말이 떠올랐다.
“사장님 이번에 진짜, 지인짜 고생하셨어요.”
“뭐가?”
소녀연맹은 공식 굿즈 발매를 준비 중이다. 가장 큰 프로젝트인 응원봉부터 온갖 종류에 따른 굿즈 샘플이 가로 엔터로 도착했었다.
그 개수만 백 단위였다.
당연하게도 굿즈를 수십 종류나 낼 수는 없기에 샘플을 골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람 취향이란 게 일치되는 게 아니라, 임원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을 채택할지 논란이 분분했었다.
“굿즈요.”
“아, 그거.”
부하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면 최종적인 선택은 사장에게로 미뤄진다. 그에 따라 홍규헌은 임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참작하여 발매 굿즈를 확정 지었었다.
그녀는 최종 결정 때 종일 사장실에 박혀서 굿즈만 들여다보기도 했었다.
“그때…….”
“그 얘기는 그만하자. 끝난 일이니까.”
그리 말한 홍규헌은 칼국수에 집중했다. 칼과 같은 태도였기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성필은 그녀의 심중을 이해했다.
‘마음이 바뀔 걸 염려하시는 거겠지.’
사장과 독대할 수 있단 건 회사 내에서 커다란 권력의 상징이다. 공적 영역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으니 말이다.
막말로, 성필이 특정 굿즈 업체에게 리베이트를 약속받거나 접대를 받았을지 누가 아는가?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홍규헌에게 감언이설과 설득을 반복한다면?
물론 홍규헌은 성필이 그랬을 리 없다고 믿고 있으며, 그녀가 우려하는 것은 판단 번복 자체일 것이다.
‘그럼 나도 사장님을 도와드려야겠지. 말 끊은 거 미안해하실 테니까 분위기도 풀고.’
그러니.
“사장님도 예절 포카 쓰실래요? 종류별로 준비됐는데…….”
“안 해.”
“개인적으로는 ‘아니’에서 리카 포카가 레전드인…….”
“안 한다고.”
“히도이(너무해)…….”
홍규헌은 싸늘한 말투와는 다르게 느슨한 미소를 보였다.
* * *
다음 날 점심.
성필은 어제 먹었던 닭칼국수가 떠올라 근처의 칼국수집이나 한식집을 검색하고 있었다. 슬슬 점심 시각이 다가오기에 빨리 알아봐야 했다.
“야 성필아. 우리 뭐 먹어? 뭐 먹음? 뭘로 할래? 빨리 정해.”
한시라도 빠르게 결정하지 않으면 손혜빈의 갖가지 정신 공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가로 엔터의 식사는 항상 외식으로 귀결된다. 매일 가게를 옮겨서 먹는 것이다.
‘매일 다양한 것을 먹어야 한다’는 홍규헌의 지론 때문이었다. 옛날, 직원이 적었을 때 비슷비슷한 배달 음식만 먹었던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누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
“매니지먼트 이사가 홍보팀장을 공격한다! 홍보팀, 빨리 나를 지켜!”
홍보팀은 응답이 없었다.
콘텐츠 기획을 맡는 양상헌은 물론이요, 강지혜도 요즘 일의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연맹이 음방으로 확고한 유명세를 굳힌 이후, 셀 수 없는 곳에서 홍보 업무가 쇄도하고 있었다. 그걸 골라내고 기획하는 업무가 쉬울 리가 없다.
“이, 이것만 끝내고 지켜드릴게요…….”
혼이 빠진 강지혜의 답을 듣고, 손혜빈은 미안한지 일을 하러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동안 성필은 식사 장소를 확정했다.
점심 시각, 직원들은 함께 식사를 하러 떠났다. 매니지먼트 팀은 업무가 칼처럼 딱 끊기지 않아서 그런지 따로 식사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도 그러했다.
“아인아.”
식사를 마치고 가는 길, 손혜빈이 경리 권아인을 친근하게 불렀다.
권아인은 띠동갑 이상의 상사를 대하기 어려운지 어색한 미소부터 띠었다.
“한 이사님도 너무하시지 않아? 항상 우리 귀여운 아인이 내버려 두시잖아. 언제 재무팀 합동 회식이라도 하자고 해봐.”
“재, 재무팀 합동이래도 저랑 한 이사님밖에 없는데요…….”
“그럼 더 좋네. 뭔가 재무팀은 한 팀이라는 느낌이 없잖아. 한 이사님도 매일 너 노려보기만 하고.”
“하하…….”
유능한 한구인은 아직도 업무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다. 경리 권아인을 향한 한구인의 질투는 나날이 더해지기만 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손혜빈은 다시 성필 곁으로 돌아왔다.
“아인이가 나를 버거워하나 봐.”
“내가 21살이었어도 누나 보면 겁먹을 듯.”
성필은 손혜빈에게 맞아 쓰라린 등짝을 가지고 회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커피를 한 잔 타서 휴게실을 나오니, 오늘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의 장하양과 마주쳤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응, 하양이 안녕.”
다시 생각하니, 정말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네. 이사님 덕분에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래.”
“아하하, 이사님은 존재 자체로 저한테 힘을 주시니까요.”
“하양이 사회생활 잘하네.”
“사회생활?”
장하양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성필은 당황해서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미소를 띠었다.
“그, 왜 그래?”
“저희…… 가족이잖아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농담이었어! 농담으로 한 말이야!”
장하양의 얼굴이 굳어진 것만큼이나 빨리 활짝 펴졌다.
“저도 농담!”
“……하하.”
“어제 식사도 안 하시고 바로 공연 보러 가신 거예요? 배 많이 고프셨겠다.”
“응? 아니야. 공연 볼 때는 배고픈 것도 잊었지.”
“그럼 집에 가서 드셨어요? 취침 3시간 전에는 공복이 좋다던데.”
“아냐. 공연 마치고 밥 먹었어. 그리고 집으로 와서도 1시 넘어서까지 깨어 있었고.”
“아 1시……. 그럼 공연 보고 밥 먹고 바로 집에 오신 거겠네요.”
“그렇지. 내 건강도 신경 써주고, 고맙다 야.”
장하양은 성필의 감사 때문인지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아, 맞다. 곧 홍보팀한테 들을 건데, 지금 라이브 방송 켜줄 수 있어?”
“지금요?”
“응. 우리가 굿즈 샘플들 왔잖아. 그거 리뷰 좀 해주라. 팬들 반응 보고 싶어서 그래.”
“일인데 해야죠. 부탁하실 필요 없어요.”
“아, 그렇네.”
약 30분 후, 장하양은 홍보팀 양상헌의 도움을 받아 라이브 준비를 마쳤다.
양상헌은 혼신의 힘을 쏟아서 장하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카메라 각도를 찾았다. 결국 성필마저도 감탄해 마지않을 앵글이 맞춰졌다.
“프로시네요, 상헌 씨.”
“영상으로 밥 벌어먹고 사니까요. 프로로서의 감이랄까…… 손나 칸지(그런 느낌)?”
장하양은 두 남자의 기묘한 대화를 들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박스를 응시했다.
박스 안에는 가벼운 종류의 굿즈 샘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곧 장하양에게로 작은 조명이 쏘아지고.
“하양 씨, 라이브 켭니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인민이들.”
라이브 예고로부터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기자가 수천 명 쌓여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곤 상승세가 더욱 가팔랐다.
성필은 쌓여가는 조회 수를 보자, 이미 식사를 마쳤음에도 밥 한 공기는 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군침이 돌았다.
‘우리 애들 진짜 성장하긴 했다.’
영어 채팅이 확연히 늘어난 건 고무적인 성과라 할 만했다.
소녀연맹의 해외 투어에는 미국도 포함되어 있는데, 미국은 수익적인 면보다도 상징적인 면이 강했다.
미국의 몇 개 도시에서 콘서트를 했다, 그런 커리어가 쌓이면 언론에 홍보하기가 매우 수월해진다.
‘나중에 수요 조사도 해봐야겠지만, 미국에서도 목표 관객이 채워질 가능성이 높아.’
꽃길을 떠올리며 만족하고 있던 성필의 귀에 이질적인 단어가 들려왔다.
성필은 눈앞의 장하양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말이 더욱 또렷이 들렸다.
“이건 저희 시그니처…….”
장하양은 소녀연맹의 마크가 새겨진 얇은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프래그런스(향기) 카드다.
소녀연맹이 어느 향수 회사로부터 요청받은 굿즈 제휴의 일종으로, 멤버마다 시그니처 프래그런스를 정하여 카드로 시향(試香)할 수 있도록 했다.
소녀연맹 응원봉의 구성품으로 들어갈 예정인 굿즈인데…….
“시그니처 냄새? 그거예요.”
그런데 장하양이 단어 선택을 실수했다.
그것을 듣자마자 양상헌이 팔을 X자로 교차하면서 ‘그게 아니야!’라고 입만으로 외쳤다.
하지만 장하양은 프래그런스 카드에 집중한 나머지 앞을 안 보고 있었다.
“이건 아라 시그니처 냄새인데.”
장하양이 조아라의 상징색인 파란색 카드를 팔랑였다.
“좀 화아― 하고요. 싸아― 하네요. 아하하, 말로 설명을 잘 못 드리겠어요. 그러니까 아라 시그니처 냄새는 조금 싸한데…….”
양상헌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마른세수했다. 성필도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