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43화 (243/760)

243화

오늘의 가로 엔터 회의 주제는 다들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주제를 올린 성필마저도 오늘 아침까지는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은 내용이었으니.

“박 이사가 그런 말을 했어?”

“……예.”

분명히 말했었다.

비단 장하양의 기억만이 아니라 성필의 기억 속에서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케이블 음방 3관왕 하면 연애 금지 풀어준다’라고, 멤버 전원이 모인 곳에서 말했었다.

비록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는 없었고, 조아라가 남자 아이돌의 번호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서 나온 발언이었더라도.

성필이 그렇게 말했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리카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고?”

“네.”

“리카는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렇다기보다는, 리카가 그걸 기억해내고 멤버들한테 말했어요. 오늘 저한테 정정당당히 요구하더라고요…….”

회의실에 모인 전원의 어깨에 무거운 공기가 얹혀졌다.

사장인 홍규헌과 세 임원들, 그리고 매니지먼트 팀장인 민경섭까지 포함된 다섯 명의 중역들.

그중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1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런 말을…….”

홍규헌이 짐짓 흥분을 띠며 말했다. 조금만 지나면 분노로 바뀔 것 같기도 했다.

“박 이사 마음대로 하면 안 되지. 엄연히 애들 계약서에 연한이 명시되어 있는 내용인데.”

“죄송합니다…….”

계약서에 글자 하나하나 또박또박 적힌 내용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장 멤버들에게 달려가서 ‘미안, 연애는 안 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사 박성필의 이름값이 달린 문제다.

말실수가 나왔다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아니, 주워 담더라도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

성필이 ‘앗, 실수’라며 말을 번복한다면, 앞으로 그가 할 약속에 실릴 무게가 약해질 것이다.

멤버들이 무의식적으로 ‘이 약속도 거짓말 아니야?’라고 생각할 공산이 생기는데, 조직 관리 차원에서 좋은 일이 아니다.

“후우.”

홍규헌은 다운된 기분을 한숨에 흘려보냈다. 그 즉시 민경섭이 말했다.

“안 돼요.”

민경섭의 목소리에는 위기감마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애들은 1년 차에 돌입했어요. 여기서 연애하면 진짜 개박살이 나다 못해서 아이돌 역사에 남을 그룹이 될 거예요.”

“……그렇지. 부정적인 의미로. 물론 애들이 금지 풀어주자마자 남자 찾아다닐 건 아니겠지만.”

아이돌에게 연애란 무엇인가?

인간이니 연애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아이돌 팬은 그 인류의 대부분에 해당하지 않는다.

애초에 대한민국 아이돌의 기원 자체가 일본에서 왔고, 그러한 일본의 아이돌이 세일즈 포인트로 삼았던 게 유사 연애 감정이다.

일본의 아이돌만이 아니라, 보이밴드와 걸그룹의 원형을 만들었던 서구에서도 멤버의 연애는 요주의 문제였다.

요즘에야 영미 걸그룹 중엔 임신하고도 활동하는 이가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영미의 이야기다.

“형이 애들한테 그런 약속을 던졌어도 이행하면 안 돼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이 애들한테 사과하고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민경섭의 요구는 타당했다.

회사가 뒤집히는 한이 있어도 소녀연맹의 연애는 허용해줄 수가 없다.

“몰래몰래 안 들키고 만나면 뭐, 생각이나마 해볼 수도 있긴 한데요.”

손혜빈이 텁텁하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애들이 그만한 요령도 없을 테고……. 하아, 진짜 경섭이 말이 맞아. 성필이 네가 사과하고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해. 이것도 애들이 3년 차쯤 돼서야 입에 오르내릴 일인데…….”

아이돌의 연애가 미치는 영향은 내적 문제와 외적 문제로 나뉜다. 사람들이 주로 고려하는 건 외적 문제이지만, 내적 문제도 만만치 않다.

일단 아이돌이 연애를 하면 아이돌 본인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

‘좀…… 정신이 풀리지…….’

모든 사람이 알겠지만, 연애를 하는 사람의 머릿속은 꽃밭이다. 그게 20대 초반이라면 말할 나위 없으리라.

자나 깨나 애인 생각밖에 없다.

밥을 먹을 때도, 일할 때도, 여가를 보낼 때도 오로지 상대만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 정신 상태로 아이돌 업무에 매진할 수 있을까? 시간마다 핸드폰이나 안 보면 다행이지, 연습에도 게을러지고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애들 나이를 봐도 연애에 신경 뺏기기 딱 좋죠. 다들 모솔인 건 불쌍하지만…….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남자를 만나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정신적인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데이트를 하러 가면 무엇을 하겠는가. 일단 먹는다. 그게 애인의 집이든, 식당이든, 아니면 숙소의 옥상이든 입에 무엇이 들어가긴 할 것이다.

애인에게 시간이 빼앗기면 자연스레 자기 관리를 할 시간은 줄어든다.

세상에 일과 행복의 밸런스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젊은 시절은 물론이요, 늙어서도 밸런스 잡기에 허덕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괜히 워라밸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팬들이 느낄 배신감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팬만 문제겠는가? 일반인도 문제다.

거의 30년을 이어온 대한민국의 아이돌계는 대중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온바, 일반 대중도 아이돌의 연애를 곱게 보지 않는 게 사실이다.

“저기…….”

눈치를 보고 있던 한구인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이 기회에 허락해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결국 선례가 없단 게 문제 아닙니까. 소녀연맹 분들을 아티스트로 존중해준단 기조를 따라서, 아예 대외적으로 연애 금지를 푼단 것을 공표하면…….”

“회사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어요?!”

“아, 그, 첫 단추를 끼우면 이후에도…… 멤버분들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구인이 시무룩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성필에게로 향했다.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다들 주목하게 됐다.

“사장님. 연애 금지가 3년 걸려 있죠?”

“그렇지.”

“그 뒤로도 기본적으로는 비밀 연애고요.”

“맞아.”

“조건부 허락은 어떨까요?”

“조건부?”

이 일은 성필의 말실수로 비롯되었다.

그가 즉각적으로 멤버들에게 사과할 것을 수긍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안을 해오다니.

“어떤 조건. 6개 음방 전부 제패? 그 정도가 되려면 당연히 3년 이상 경력의 걸그룹일 텐데?”

“이 조건은 가로 엔터의 목적과도 연관이 있어요. 소녀연맹의 지향점과도 닿아 있고요.”

“정확히 어떤 건데.”

“제 생각은…….”

* * *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들을 회의실로 불렀다. 다들 어제 침대에서 연애 금지 해제 이야기만 했는지, 회의실로 들어올 때부터 막연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건데 기대될 만도 하지. 상대가 없더라도 자유가 생기는 거니까.’

“다 앉았지?”

그가 용건을 말하려던 순간, 리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희 연애할 수 있는 건가요!”

리카가 묘하게 들뜬 호흡으로 말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녀의 눈은 조아라를 향하고 있었다.

“왜 날 봐.”

“이사님한테 바로 물어보는 건 무서워서…….”

“용기를 내. 나 보지 말고.”

“아라쨩 싸늘해!”

“잡담 좀 그만해. 팀장님 저희 연애해도 돼요?”

역시, 연애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분위기가 확 살아나는 게 보인다.

동생 라인은 올해 21살이다. 얼마나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겠는가.

꽃밭에서 남친과 뒹굴며 서로 화관을 씌워주는 상상을 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다.

“클럽 가야지!”

백설하가 리카의 머리를 잡고 테이블에 쾅 박았다.

“이타이(아파)!”

“바, 박 이사님 리카 얘가 아파서 이래요. 리카도 진심이 아니었을 거예요.”

“아타시(저)는 이제 자유에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고 할 수 없어요!”

살짝 고개를 든 리카의 이마가 다시금 테이블과 키스했다.

“이타이(아파)…….”

“그, 그게, 이사님, 하아, 그으, 저희, 여, 연애, 할 수 있는, 흐으, 있는, 헤아, 있는, 건가요?”

“설하 과호흡 아니야?”

“아, 아니에요.”

“숨 좀 골라.”

“스읍, 후읍.”

성필은 미소를 머금으며 멤버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었다.

“우린 너희 연애 금지 풀어주려고 생각하고 있어.”

멤버들의 어깨가 거칠게 떨려왔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가로 엔터가 연애 금지를 이토록 쉽게 풀어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백설하는 얼굴부터 귀, 목까지 전부 붉어져서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말을 뱉어냈다.

“이, 이이, 이사님, 저희, 정말 안 들키고, 연애 잘, 할게요. 정말로. 아무한테도 안 들켜요. 안 들키도록 해, 아니, 할게요.”

“바로 풀어주는 건 아니야.”

“거짓말쟁이!”

방금 말은 리카가 아니라 백설하가 했다.

“조건이 있어.”

그리 말한 성필은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서 큼지막하게 글자를 썼다. 성필은 그것을 또박또박 읽었다.

“욕 안 먹는 아이돌의 연애!”

이제부터, 성필은 아이돌이 연애에 관한 리스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말할 것이다.

“물론 이건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야. 대한민국에서 아이돌을 시작한 이상, 연애 관련으로 욕을 먹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해.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아이돌 산업이 시작된 지 거의 30년. 꽤나 데이터가 쌓였지. 먼저, 아이돌은 어째서 연애를 하면 욕을 먹는가?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아이돌이 유사 연애를 강점으로 삼기 때문인가요?”

“음…… 그 요소가 크지. 일단 한국 아이돌의 역사를 말하자면 일본을 빼놓을 수가 없어. 일본은 서구의 보이밴드와 걸그룹 모델을 수입했거든. 거기에 귀여움과 섹스 어필을 첨가하고, 이상적인 연인으로서의 아이돌이라는 사업 모델을 만들어냈어.”

멤버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리카에게 꽂혔다.

“……이건 진짜 인종차별이에요 다들. 애초에 그런 모델을 사용하는 쪽에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 90년대 한국의 발 빠른 기획자들은 일본을 보고 입을 쩍 벌리지. 돈이 저렇게 벌려? 한 명이 앨범을 4, 50장씩 산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야? 곡이 잘 못 뽑혔는데도 판매량이 수십만이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일본의 아이돌 모델은 사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건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한국의 걸그룹이 몇 년 후의 미래에서나 닿을 초동 100만이란 앨범 판매 기록을, 일본의 걸그룹은 오랜 과거부터 간간이 달성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아이돌은 글로벌화에 실패하고서도, 글로벌화된 케이팝 아이돌보다 나은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다.

“일본 음악 시장이 엄청 커. 미국 다음이야. 그러니 내수만으로도 잘 팔리는 모델을 굳이 글로벌화시켜서까지 팔 이유가 없는 거지. 아무튼 한국의 초기 아이돌도 그런 일본 모델을 가져와서 성공을 거둬.”

앨범을 수백만 장씩 팔아버리는 1세대 아이돌의 탄생이었다.

“한국에선 여러 사건이 있고, 케이팝 시장 자체가 글로벌화되다 보니 연애에도 관대한 시선이 조금씩 생기게 돼.”

그게 아니었다면, 일본처럼 연애가 들키는 순간 삭발을 해버리는 아이돌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아이돌은 연애에 완전히 관대하진 못한 시선을 견디고 있어. 이건 하양이 말처럼 유사 연애적 요소가 커. 그걸 강점으로 어필하는 그룹이 있으니까.”

“근데 아저씨. 우리는 뭐, 딱히 낯간지러운 사랑 노래나 살랑거리는 옷도 안 입었잖아요. ‘보라색 튤립’ 빼고는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우리가 이용하는 이벤트가 그런 성질을 띠고 있어. 팬사인회, 하이터치(하이파이브)회, 영상 통화권, 화상 팬미팅 등, 아이돌과의 인간적인 거리감을 줄이는 게 돈으로 가능하잖아.”

아이돌과의 만남 자체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두는 것 자체가 유사 연애적 요소를 이용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이 도입된 뒤 사회 전반적으로 거친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합법적인 룸살롱이나 캬바레와 뭐가 다르냐고 말이다.

돈을 소비하면 아이돌과 스킨십, 교감이 가능하단 데서 그런 비판이 나올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린 아직 팬사인회를 겸한 팬미팅뿐이었지만, 일본에선 하이터치회도 있을지 몰라. 이후 팬사인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거고.”

즉, 아이돌은 수익을 내는 통로 자체가 팬들의 애정에 호소하고 있다.

“그럼…… 이제 팬사인회 금지?”

“…….”

“농담이에요.”

“뭐, 그것도 추후에는 너희들의 의견에 따라 안 할 수도 있지.”

“지, 진짜요?”

“아무튼, 팬들의 사랑이란 그런 거야. 물론 무조건적인 연애 감정으로 묶을 수는 없어. 팬들의 애정은 뭐랄까……. 아이돌 좋아해 본 사람?”

백설하와 리카가 손을 들었다.

“그래, 설하야. 네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연애하면 어떨 거 같아?”

“응원할래요.”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에요.”

“누구 좋아했었는데?”

“손 이사님이요.”

“아…….”

가로 엔터의 모두는 손혜빈을 응원한다. 빨리 짝을 찾아서 결혼할 수 있기를!

“리카는?”

“아라쨩이요!”

“아라가 연애하면 어떨 거 같아?”

“죽여버릴 거예요!”

“돌았냐 너?!”

조아라가 황급히 리카에게서 멀어졌다.

“리카, 왜 죽이고 싶어?”

“아저씨는 그걸 왜 또 받아줘요?!”

“음, 뭔가, 유대감이 깨지는 거 같아서요. 나를 배신했어! 같은 느낌?”

성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그거야. 그런 감정이야.”

조아라가 황망한 시선을 던졌다.

“이를테면 아이돌과 팬은 하나야. 너희가 소련이고 팬덤명이 인민인 거에서도 알 수 있잖아. 다 함께 어딘가로 가고 있어. 어디로 가고 있지?”

“최고의 아이돌!”

“그래. 그런데 갑자기 소련에서 한 명이 쏙 빠져나와서 ‘아, 나 더 중요한 게 있어. 일단 너희들끼리 가고 있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봐. 어떨까?”

깊은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함께 영차영차 팀을 잘 꾸려나가고 있는데, 핵심 멤버가 빠져나와서 ‘나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겼어’라고 하면 당연히…….

“배신감이 들죠.”

조아라도 팬의 감정을 이해한 듯 자그맣게 읊조렸다.

“팬들은 행복하기 위해 너희를 좋아하는 거야. 행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팬이 바라는 너희의 행복은 바로 성취감이야.”

성공으로서 얻는 성취감.

크게는 소녀연맹의 목표인 최고의 아이돌이 있겠다. 구체적으로 가자면 방송 3사 음방 3관왕 정도가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아이돌은 팬을 위한 검투사인 것이다. 아이돌은 빛나는 무대 위에 서는 것으로 팬의 상승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준다.

“내가 생각하는 연애에 대한 팬의 배신감은 이런 느낌이야. 전우애로 영차영차 가고 있는데 혼자 놀러 가는 느낌?”

“케이어스가 연애하면 팀장님도 그런 기분일 거예요?”

“하하, 뭔 소리야. 난 케이어스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

“김민주 연애한대요.”

“어떤 새끼야?!”

시선이 모이자, 성필은 몇 초 정도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러곤 갑작스레 씨익 웃었다.

“봐, 이런 배신감.”

“저부터 팀장님을 죽이는 수가 있어요.”

“어쨌거나 처음 주제로 돌아오자. 그럼 욕을 안 먹고 연애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일단 연차가 쌓이면 된다.

“슬슬 4, 5년 정도 되면 팬들도 관대해지지. 실적을 쌓았으면 더욱 그렇고. ‘열심히 했으니까 연애 정도야 할 수 있지’ 같은 상태가 되는 거야.”

“우리한테 연애하지 말란 거잖아요.”

“내가 제시할 방법은 당연하게도 시간 따위가 아니야. 오랫동안 아이돌을 분석할 결과, 연애해도 욕을 덜 먹거나 안 먹는 아이돌이 있어.”

성필은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었다.

“첫 번째, 능력이 확실하다. 아이돌을 그만두고도 연기자나 가수로도 커리어를 쌓아갈 만하다. 그만큼 능력캐다. 그런 아이돌은 연애해도 타격이 덜하더라고. ‘능력이 있다’란 평가를 받는 것부터가 본업에 충실했단 거니까.”

“그럼 아타시(저)는 문제가 없겠네요!”

“리카, 아까부터 간 보는 거 같은데 누구랑 연애하고 있기라도 해?”

“클럽 갈 거예요!”

백설하의 손이 다가오자 리카가 기겁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농담인데 왜 자꾸 그러나요?! 저는 순수한 사랑을 원해요! 욕망의 구덩이로 들어갈 마음은 없다구요!”

“설하야, 리카한테 징계하는 건 회의 끝나고 하자.”

“방관인가요?!”

두 번째, 매우 코어한 팬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진짜 길거리에서 나신으로 돌아다녀도 실드를 쳐줄 만한 신화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으면 연애든 뭐든 상관없지. 팬덤도 오히려 응원할 만큼 공고하고 코어한 팬덤을 말하는 거야.”

문제는, 그런 팬덤을 쌓으려면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력이 좋아서 온갖 시상식을 휩쓸고 본인의 능력을 증명할 수준. 그 수준이 되어야 신화적인 팬덤을 보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단계에 이르면 팬들이 도리어 아이돌의 상대한테 ‘우리 언니, 오빠 잘 부탁해요’라면서 인사해. 드물게 결혼식에서 화환도 오더라.”

“박 이사님 1세대 아이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30대가 됐으니, 결혼해도 팬들이 화환은 보내줄 수 있겠지.

”딱히 1세대 아이돌 말하는 건 아니야. ‘팬덤이 공고하다’의 예시를 들자면…….

예시를 들은 멤버들의 얼굴에서 기대감이 사라졌다. 그가 읊은 아이돌들은 2세대와 3세대 아이돌의 탑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탑의 자리에 오른 아이돌이라면 팬덤이 엄청나겠지.

“자, 그럼 세 번째.”

연애할 거 같이 생겼다.

“그게 뭔가요?!”

“말 그대로지 뭐. 생긴 거나 태도부터가 좀…… 불량한 느낌?”

“아라쨩처럼요?”

“처음으로 욕먹고 신나네. 그럼 아저씨 나 연애해도 돼요?”

“아라만큼 순박한 애가 어딨다고 그래.”

“뭔…….”

장난스런 답에도 조아라는 썩 기분이 괜찮은지 픽 웃었다.

“‘불량한’이란 말은 좀 그렇다. 사람들이랑 두루두루 친할 거 같고 노는 거 좋아하는 티가 나는 아이돌이라고 하자. 이런 아이돌이 연애하면 팬들도 ‘음 그렇구나’하고 지나가.”

“아하하, 데뷔할 때부터 배꼽이나 혀에 피어싱 좀 할 걸 그랬어요.”

시선이 장하양에게 모였다. 그러자 그녀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농담!”

조아라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언니 내가 농담 같은 거 하지 말랬잖아요!”

“……아하하.”

장하양, 농담 통제 연장!

“마지막 유형. 이건 첫 번째 유형과도 연결되는데…….”

성필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모든 글자를 거칠게 지워내곤, 한 글자씩 섬세하게 적어나갔다.

[아티스트.]

“아티스트 그 자체다.”

성필의 말에 멤버들도 무언가 깨닫는 게 있는지 눈동자에 총기가 감돌았다.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물론 나는 아이돌도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이 아티스트라고 인정할 만한 커리어를 쌓았다. 그럼 팬들도 관대해.”

성필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티스트를 빠는 것과 아이돌을 빠는 건 다르다’라며 열애설 실드를 치는 팬들을 많이 보아왔다.

“아이돌이 아티스트로서 인정받는다고 하면, 주로 한 분야의 탑클래스를 찍었다고 보면 돼. 보컬, 랩, 댄스, 모델 등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이돌의 의지와 ‘프로듀싱’ 능력.”

아이돌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계획하고 실행할 만한 역량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럼 팬들도 더 이상 그를 아이돌이라는 테두리에 가두지 않는다.

성필은 동의하지 않지만, 팬들은 이 경지에 이른 아이돌을 ‘탈(脫) 아이돌’이라고 한다.

아이돌답지 않다는 건데…… 아이돌을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분류하는 한국의 정서가 드러난 거 같아서, 성필로서는 씁쓸할 따름이다.

‘안타까운 건, 나도 그런 개념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지.’

지금도 멤버들에게 ‘일반적인 아이돌’의 이미지에서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 아이돌은 연애를 하건 클럽을 가건 아무런 비난도 없어. 그게 그 사람의 삶이니까.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이 작업물로 나타나는 거니까. 당연히, 아예 비난이 없다는 게 아니야. 사람들의 의견이란 항상 균일하진 않잖아.”

성필은 이야기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빈말이 아니라, 나는 너희가 정말로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라. 그렇다고 리카처럼 클럽에 가길 바라는 건 아니야.”

“안 가요!”

“클럽에 가면 남자는 99퍼센트 성적인 목적이고, 여자는 남자들한테 관심받길 원해서 가는 거니까. 그런 욕망의 양동이로 스스로 발걸음하진 않길 바란다.”

“안 간다니까요?! 그리고 박 이사님 그거 편견이에요! 안이상 매니저님이 클럽은 자유로운 영혼을 춤으로 표현하려고 가는 거랬어요!”

안이상 네 이놈!

“너희 자유가 있지만, 어른으로서 충고 정도는 해두고 싶어서 말하는 거야. 리카는 자유로운 영혼을 춤으로 표현하는 건 무대만으로 해줘.”

“이사님이 부탁하면 어쩔 수 없네요!”

“너희가 자유롭게 살길 바라고, 사람다운 20대를 보내길 바라서, 연애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돈 벌려면 당연히 수도사처럼 팬의 기대에 응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진 않아.”

“팀장님 방금 김민주 연애한다니까 상대 죽여버리려고 했잖아요.”

“진심이 아니었어.”

“그럼 여기서 ‘케이어스 싫어’라고 말해줘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성필은 황급히 화제를 되돌렸다.

“나는 너희가 아티스트십(Artistship)을 얻길 바라. 항상 말했었지, 너희가 아티스트가 되길 바란다고. 거기엔 너희에게 자유를 부여하려는 목적도 있었어.”

“팀장님 말투 무거워진 거 보임?”

“어, 보임. 아저씨 진짜 김민주한테 남친 있었으면 눈물 흩뿌리면서 도망갔겠는데?”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말할게. 얘들아, 아티스트가 되어줘. 현재를 넘어서는 최고의 아이돌, 최고의 아티스트가. 너희가 스스로 길을 개척할 능력을 지니길 바라.”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그냥, 저희 연애 금지 안 풀어주신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아니! 절대 아니야!”

드디어 이 장광설의 마지막에 도달했다.

“‘아니’, ‘롱 포’, ‘아라베스크’와 ‘보라색 튤립’으로 이어진 소녀연맹의 3부작 서사가 끝났어. 세계관이 종결된 거야.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뭘까? 짐작 가는 거 있는 사람?”

있을 리가 없다.

프로듀서의 생각을 아이돌이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도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고 방향성을 정하리란 게 그나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다음 프로젝트명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야.”

프로젝트명을 듣자 멤버들은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정지음이 처음 이 이름을 듣자마자 보였던 반응과 같았다.

백설하가 옅은 불안감과 그와 상반되는 기대감을 함께 담아 물었다.

“박 이사님, 혹시, 저희한테 프로듀싱 권한을 주시려는…… 거……?”

“맞아. 소녀연맹 다섯은 돌아가면서 프로듀싱 권리를 얻는다.”

“……!”

“일본 데뷔가 무사히 끝나고 말해줄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먼저 말하게 됐네. 약 1년에서 2년의 이 프로젝트로, 너희는 온전히 아티스트의 자리에 오르게 될 거야.”

멤버들이 저마다 흥분을 나타냈다.

이제껏 그녀들은 의견을 한데 모아 구체적인 작업물을 만들어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멤버 개개인에게 온전한 권한을 부여한다고?

그야말로 멤버들의 창의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성필의 말마따나, 소녀연맹의 멤버들이 아티스트십을 획득할 기회이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팬덤 전체에,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일반에게도 공개될 거야. 다들 너희의 프로듀싱 능력에 주목하겠지. 좋은 성과를 올린다면, 너희는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라 아티스트란 이름을 대중에게서 얻을 수 있어.”

멤버들의 의지가 더해진다.

비단 연애 금지가 풀린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프로듀싱이 가능하단 데서 오는 기대감이었다.

소녀연맹은 3년에 걸쳐 성필의 의견을 받아들여 왔다. 항상 ‘아티스트가 되어라’, ‘최고의 아이돌이 되어라’ 같은 말을 들어왔고, 이제는 그 생각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런 기회가 기껍지 않을 리 없었다.

“…….”

신아름을 제외하고는.

성필은 그런 그녀의 기색을 읽곤 미소를 지어주었다. 신아름의 무관심은 훗날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자, 이게 내가 건 연애 금지 해제의 조건이야. 소녀연맹이 아티스트십을 얻었을 때, 자연스럽게 연애 금지라는 구시대적인 계약도 빛을 잃어. 다들 동의해?”

멤버들이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양만을 제외하고.

그녀는 또 질문이 있는 듯 손을 올렸다.

“박 이사님.”

“응, 하양아.”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1, 2년 걸리는 프로젝트라고 하셨잖아요.”

“응.”

“연애 금지도 3년 차에 풀리는데, 시기상으로 딱히 이득 없는 거 아닌가요?”

“좋아.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 질문 없으면 이만 나가볼게.”

성필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 초라한 퇴장에, 멤버들은 할 말을 잃고 삐걱거리는 회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성필이 슬금슬금 들어와서 무릎을 꿇었다.

“괜한 말로 기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정말, 할 말이 없다, 진짜 미안…….”

장하양은 천사처럼 우아하고 피어나는 꽃처럼 여유로운 몸짓으로 성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성필의 어깨를 잡아서 숙인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박 이사님, 괜찮아요. 어차피 저희 다 연애 생각은 없었거든요.”

“……진짜?”

“네. 일에 매진해도 모자랄 시기잖아요. 클럽에 가고 싶은 리카 빼고는 다 아이돌 활동이 더 중요해요.”

“안 간다고 했잖아요?!”

장하양은 미소와 함께 성필을 아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더러워진 그의 무릎을 털어준 뒤 활짝 웃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하양아…….”

“아저씨 뭘 그렇게 미안해하고 그래요. 보는 내가 다 쓰리네.”

“리얼. 팀장님 괜한 데서 섬세해. 어차피 우리 전부 ‘롱 포’ 컴백 때 일 기억하지도 못했는데.”

신아름과 조아라도 성필을 위로해주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 백설하는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어깨를 늘어뜨렸다.

‘연애 금지…… 풀리는 줄 알았는데…….’

* * *

다음 날, 장하양은 리카에게서 작곡 프로그램의 기초를 배웠다.

“여기를 누르면 드럼이 나와요!”

“음, 그렇구나.”

“그리고 여기로 옮기면 드럼 소리가 나요!”

“아.”

“쉽죠?”

“어려워…….”

“벌써 어려우면 어떡하나요?!”

어려웠지만, 장하양은 끈기를 가지고 리카의 작곡 강의를 들었다. 리카도 귀찮아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장하양을 가르쳤다.

“작곡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같이 힘내요!”

“응, 고마워 리카.”

장하양은 작곡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란 일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작곡 능력이 필요할 듯 보였기 때문이다.

작곡은 성필이 말했던 아티스트십을 획득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진정으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아티스트로 다가가는 한 걸음이다.

장하양은 숭고한 목적의식과 꿈을 품으면서 전의를 다졌다.

작곡 레슨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니, 성필과 홍규헌이 나란히 회사를 나가는 중이었다.

“사장님, 박 이사님, 안녕하세요.”

“그래, 늦게까지 고생이 많네. 작곡 배운다면서?”

“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홍규헌은 드물게도 장하양의 어깨를 직접 두드려 격려해주었다. 장하양은 뿌듯함을 느끼면서 볼에 홍조를 띠었다.

사장에게 직접 받는 칭찬이란, 프로듀서인 성필의 칭찬과는 또 의미가 남달랐다.

“이제 두 분 다 집에 가시는 거예요?”

“아니.”

“그럼요?”

“공연 보러 가.”

“……두 분이서요? 두 분만요?”

“응.”

장하양의 뺨에서 홍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