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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42화 (242/760)

242화

쇼가츠(설날)의 이튿날, 1월 2일.

유우토는 성실한 학생답게 학교생활의 리듬에 따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씻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여유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의 구성에 누나인 리카가 포함되어 있단 것이었다.

“그래서 있잖아 내가 어떻게 했냐면…….”

활기차게 식탁 위의 대화를 주도하는 리카의 모습은 그녀가 일본에 살았을 적과 달라진 게 없었다.

몇 년 전의 리카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전부 털어놓곤 했으니 말이다.

부모님도 오랜만에 딸의 재롱과 같은 재담을 듣자니 입이 귀에 걸린 모습이다.

‘누나는 나이 먹고 외모만 달라졌지 옛날이랑 똑같구나.’

누나가 없는 삶은 이미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유년기는 항상 다정함과 따스함이 있었고, 그 지분의 다수는 누나인 리카 덕이었다.

그런 리카가 없는 하루하루는 유우토에겐 자그마한 쓴맛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누나가 돌아왔을 때, 자신의 기억과 달라지진 않을까 하는 어린애 같은 불안도 있었단 것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전혀 바뀐 게 없잖아.’

유우토는 남모르게 안심하며 식사를 마쳤다.

아침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기타나 연습할까 생각하던 유우토는, 연습에 꼭 필요한 물품인 커피를 가지러 1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현관에서 나갈 준비를 마친 리카와 마주쳤다. 동시에 유우토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누, 누나.”

“응? 유우쨩 왜?”

뒤돌아 환하게 미소 짓는 리카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었다.

“힐…… 신은 거야……?”

리카가 힐을 신었다.

“아, 이거?”

리카는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등을 올리곤 콧대를 높였다.

“어린애인 유우토에겐 낯선 모습이겠지! 누나는 어른이라서 힐도 신어! 유우토가 보는 학교의 여자애들이랑 다르게 어른이니까!”

데뷔 직전, 힐을 신고 춤을 추는 게 고통스럽다면서 찡찡대던 리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힐을 신으면 허리와 다리가 아프긴 했다.

하지만 이제 리카는 21살의 유능한 커리어우먼이 된 자신에게 취해 있는 터라, 힐의 고통 따위 얼마든지 잊을 수 있었다.

“어디 놀러 가는 거야? 중학교 때 친구라던가 만나러?”

유우토는 어쩐지 조심스러움을 담아서 물었다. 리카가 힐을 신고 만나러 갈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리카가 힐을 신는 고통까지 감내하게 만들 수 있을까?

“박 이사님!”

유우토의 가슴 속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남자를 보러 가는데 힐을 신어?!’

이제 보니 치마도 입었다.

“공항에 마중하러 가는 거야! 조금 돌아다니다가 같이 집에 올 거니까 내 점심은 생각 안 해도 돼!”

말을 마친 리카는 현관문을 열었다.

“누나…….”

유우토는 현관을 넘어 사라지는 리카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문은 매정하게도 닫힐 뿐이었다.

“…….”

누나가 옛날 그대로라고?

‘유우쨩, 놀이터 가자!’

‘뽑기 비싸! 유우쨩 돈 있어?’

‘에, 유우쨩 기타도 배운 거야? 멋져!’

‘패션 잡지인데 왜 성인만 살 수 있는 걸까. 이 안에 뭐가 있길래.’

‘이거 봐 유우쨩! 여기 성인 잡지가 묶음으로 버려져 있어! 하나 들고 가자!’

“…….”

어쨌거나, 이제 유우토가 알던 리카는 없다.

21살,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우토는 커피로도 가셔내기 힘든 쓴맛을 머금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순수했던 옛날의 리카와 현재의 리카가 겹쳐 집중하기 어려웠다.

‘역시 사람은 변하는 거구나. 언제까지고 내 기억 속의 누나만을 남길 수는 없겠지.’

다들 제각기 길이 있는 것이다.

유우토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 전에 기타를 잠깐 치겠단 생각은 없어졌다. 지금은 공부를 해서 심란함을 없애야 할 때였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유우토도 휴식을 취하려던 참이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리카가 있었다.

그리고.

“박 이사님?”

성필이 어깨가 축 늘어진 리카를 붙잡고 당당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우토 씨.”

그 인사를 듣고 유우토는 적잖이 놀랐다. 1년 사이 성필의 일본어 발음이 상당한 정도로 나아졌기 때문이다.

아마 현지인인 리카가 항상 근처에서 생활하니, 그에 힘입어 일본어 구사력이 높아진 듯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누나가 놀고 온다고 했는데……. 공항에서 바로 오신 건가요?”

“그래야죠. 리카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일본에 온 거니까요.”

“이사님 나빠! 저랑 노는 것보다 일이 중요한가요!”

“일이 아니야. 예의지. 그리고 너랑 놀지도 않을 거야. 어디까지나 네 부모님한테 인사드리러 온 거잖아.”

“너무해…….”

유우토는 깨달았다.

‘박 이사님이면 누나를 맡길(애정적 의미가 아님) 수 있어!’

리카가 탈선하는 것을 막고 그녀의 순박함을 유지시켜 줄 선생이 될 게 틀림없었다.

* * *

올해의 쇼가츠(설날)에는 한구인 대신 성필이 리카의 본가로 인사를 왔다. 이쯤 되면 가로 엔터의 연례 행사라 보아도 무방했다.

타국에 자식을 맡겨주는 리카의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행사인 것이다.

리카의 부모님이 그녀의 한국 체류를 허가해줄 때, 가로 엔터는 리카를 향한 인간적인 보살핌을 약속했었다.

그건 단순히 회사로 연습생을 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른 집의 아이를 맡아 키우는 수준의 신뢰를 주어야만 성립되는 계약이었다.

그 증표 중 하나가, 작년 리카가 합격했던 일본의 ‘고등학교 졸업정도 인정 시험’이었다.

‘너무 쉽네요. 한 이사님이 저한테 공부시키셨던 양을 원망하게 될 정도로 쉬웠어요…….’

라고 리카가 말했던가.

어쨌든 그로써 가로 엔터는 리카의 부모님에게 했던 약속을 하나 지킬 수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필은 약 1시간 30분에 이르는 면담을 마치고, 한구인에게 배운 예법을 한껏 살려 거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뒤에는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리카가 덤처럼 붙어 있었다. 그녀는 거실을 나오자마자 기대감을 잔뜩 담아 말했다.

“이제…….”

“이제 난 가볼게. 가족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와.”

“벌써요?!”

“한국은 설날이 아니잖아. 지금도 가로 엔터 식구들이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그건 알지만요! 이왕 일본에 오셨으니 조금은 더 있으셔도 되잖아요!”

“조금?”

“6시간 정도?”

리카는 무소의 뿔처럼 곧게 현관으로 향하는 성필에게 질질 매달렸다.

“한 이사님은 아타시(저)랑 놀이터도 가고 도쿄에 같이 놀러도 가줬다구요! 박 이사님 너무 쌀쌀맞아요! 회사에 가봤자 일도 없으면서!”

“날 무슨 월급도둑처럼 말하네……. 엄연히 나도 한 회사의 이사야. 일이야 산더미처럼 많지.”

때마침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성필은 보란 듯이 액정에 뜬 ‘혜빈 누나’란 글자를 리카에게 보여주었다.

“봐, 업무 전화도 와.”

“뭔가요. 취업한 걸 자랑하는 사회 초년생 같은 말투는.”

성필은 리카의 딴지를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하이. 리카네에 잘 도착했어?]

“응. 이제 인사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려고. 시간 맞출 수 있을 거 같아.”

[아아, 그거. 업체에서 샘플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고 연락을 줬거든.]

“어? 벌써?”

[응. 그래서 안 기다리고 바로 사장님이랑 보러 가게.]

“아, 아니, 나는…….”

[걱정하지 마. 내가 회사로 어련히 챙겨올까. 나간 김에 아예 거래처들 사장님이랑 다 둘러볼 생각이거든? 넌 이왕 간 김에 도쿄 관광이라도 하다가 와.]

“하지만…….”

[시간이 돈이잖아. 사장님이 너 배려해서 일부러 시간 빼준 거니까 고맙게 받아. 샘플 확정은 내일 다 같이 확인하고 내리자.]

“그…….”

[고마워 죽겠지? 항상 천사 같은 사장님한테 감사하도록. 하아, 나도 일본 가고 싶다. 내년에는 내가 리카네에 간다? 알겠지? 그럼 이만.]

뚝. 전화가 끊겼다.

오후 일정인 굿즈 업체들의 샘플 확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필은 리카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월급도둑.”

할 말이 없군.

* * *

귀국에 실패한 성필은 리카의 방으로 끌려왔다. 벽면, 천장, 눈이 가는 곳곳마다 벚꽃을 연상시키는 분홍빛으로 가득하다.

성필은 책장으로 다가갔다.

“보자, 리카는 방에 뭘 두는지 한 번 볼까.”

이제 일본어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됐다. 리카의 책장에 꽂힌 것의 절반은 중학생용 교과서와 참고서였고, 나머지 절반은 잡지와 연극 대본이었다.

“대본 많네.”

“원래는 한류 배우가 목표였으니까요!”

일본인이 한류 배우를 꿈꾸다니. 성필이 알기로, 외국인 출신으로 순수 배우에 도전해서 성공한 예는 없다시피 했다.

리카의 외모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겠으나, 희박하기 그지없는 꿈이었다.

성필은 눈에 띄는 하나를 뽑아냈다. 프린트한 A4 용지를 책으로 한데 묶은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연기 학원에서 단골 레퍼토리예요!”

리카는 성필의 옆에 어깨를 착 붙였다.

“리카, 떨어져.”

“에에, 설마 부끄러운 건가요? 어린애처럼?”

“그래.”

“에엑?!”

리카가 화들짝 놀라면서 급히 거리를 벌렸다.

“이제 누가 부끄럽지?”

“속았다!”

성필은 필기가 가득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본을 빠르게 넘겼다. 한눈에 보아도 대본을 상당히 연구한 티가 났다.

중요한 대사에 줄이 쳐져 있고, 그곳에 리카의 해석이 덧붙여져 있었다.

“세쿠시(섹시)한 느낌이 나게……. 이게 그런 장면이야?”

“사랑의 맹세를 나누는 장면이잖아요! 줄리엣이면 묘한 색기를 담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줄리엣은 미성년자야.”

“방금 박 이사님은 UN이 채택한 청소년 인권 선언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어요! 미성년자도 사랑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구요!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국제 조약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

성필은 한구인의 수제자인 리카의 지식 자랑을 한 귀로 흘렸다.

‘인물 해석에 창의성이 넘치네.’

리카가 해석한 줄리엣은 무대에서 어떻게 다가올까.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쩌면 틀에 박힌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극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다줄지도 모르겠다.

성필은 줄리엣의 대사를 찬찬히 읽어내렸다.

“아아, 로미오 님. 그 사랑을 달에다 걸고 맹세하지 말아줘요. 매달 모양이 바뀌어져 버리는 그 변덕스러운 달에는. 그래도 꼭 하셔야겠다면 로미오 님 자신을 걸고 맹세해…….”

으아, 진짜 오글거린다.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쓸 수 있었을까? 골방에 박혀서 소녀의 마음을 나름 재연해보기라도 했을까?

고전 작품에 나오는 사랑의 맹세들은 보통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어 어쩐지 현실과는 괴리된 듯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성필이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대본에 적힌 리카의 필체 때문인지 이 대사를 리카에 대입했기 때문이다.

리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진짜, 줄리엣은 첫사랑이 맞았나 봐. 아니면 이런 말은 당사자 앞에서 못하지. 어린애만 할 수 있는 말이야.”

“줄리엣을 모욕하지 마세요!”

“모욕한 게 아니야. 그냥, 대단하다고. 난 젊은 사람을 보면 부럽거든.”

“뭐가 부럽나요?”

“리카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아타시(저)는 어른이에요!”

“그래, 아직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사랑은 우물 같은 거거든.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어. 그래서 첫사랑이 가장 애틋하고 행복하다고들 하잖아.”

꽉 차 있는 우물을 퍼 올리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단 거 자체가 축복이지. 그런 의미에서 리카 넌 축복받은 거고. 앞으로 좋은 남자 만나라.”

“뭔가 늙은이가 할 법한 말이네요. 아, 이사님은 이제 30대 중반이죠!”

“…….”

“스미마셍(미안합니다). 그으, 그럼 이사님은 고백할 때 어떻게 할 건가요!”

“나? 고백이라고 하면…….”

성필이 피식 웃었다. 이 나이에 칼처럼 말로 사랑을 자르고 분류할 수는 없잖은가.

그냥 분위기를 따라 되는 것이다.

“분위기? 그럼 마음을 표현하는 말도 없나요? 어른들은 분위기만으로 어떻게든 되는 건가요? 초능력?!”

“그건 또 아니지.”

“그걸 알려주세요! 자, 제가 상대라고 생각하고 해보세요!”

“하아, 리카 제발 끼 좀 그만 부려! 난 네가 백 번 유혹해도 안 넘어가!”

“진짜 어이가 털려서 돌아올 생각이 안 드는 발언이네요.”

“너 가끔 나한테 정색하는 거 알아? 은근히 상처받고 있어…….”

리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기대감을 가득 담아 성필을 응시했다.

성필도 고심하면서 그녀와 마주 보았다.

“음……. 그럼 해볼게.”

“하이(네)!”

“우리 집에에…….”

“평범하네요.”

“슬라임 만지러 올래?”

“가기 싫어어어어어어!”

리카가 절규했다.

“뭔가요 ‘슬라임 만지러 올래’는! 어떤 여자가 그런 나사 빠진 제안에 응하는 건가요!”

“슬라임 싫어?”

“좋아하지만요! 빵점이에요!”

“알겠어, 제대로 해볼게.”

“이번에는 잘하세요!”

“음, 우리 집에…….”

“지금까진 좋아요.”

“파스텔 후르츠 슬라임 만들러 올래?”

“전혀 안 나아졌잖아요?! 슬라임 종류만 바꾼다고 넘어가진 않아요!”

“왜 그래. ‘금붕어 보러 올래’나 ‘동그랑땡 먹으러 올래’랑 비슷한 맥락이잖아.”

“그나마 ‘금붕어 보러 올래’가 낫네요…….”

리카는 성필의 손에 들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본을 빼앗고 책장에 넣었다.

“놀러 가요.”

“이 야밤에 어딜 가.”

“오후 2시를 야밤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옷 입을 테니까 나가세요!”

성필은 리카의 방에서 쫓겨났다. 복도에서 리카의 환복을 기다리고 있으니, 유우토의 방 쪽에서 기타 소리가 났다.

‘일렉 기타…… 잘 치네.’

간단한 브릿팝 곡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헤비메탈 곡으로 바뀌었다.

‘말도 안 되게 잘 치잖아?!’

백설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유우토는 중학생 때부터 밴드부였다고 했지. 그럼 기타는 4년 넘게 쳤다는 거니까, 저 정도 치는 것도 이상하진 않나?’

듣자 하니 전교 1등도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동아리와 학업을 병행하자면 많이 힘들 텐데, 참 대단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필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20분이나 지났는데…….’

옷 입는 데 20분이나 걸리지는 않을 텐데. 설마 화장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성필이 노크하려던 때, 문이 열렸다.

“이제 가요!”

놀랍게도 리카는 운동복 바지에 후드 티, 그리고 패딩을 걸쳤을 따름이다.

“이런 거 입느라고 20분이나 쓴 거야?”

“신경 쓴 코디라구요! 여기에다가, 짠.”

리카가 선글라스를 씀으로써 코디를 마쳤다.

“이제 밖에 다녀도 안심!”

“나가도 아무도 너 못 알아볼 텐데.”

“아타시(저)는 초(超)인기 아이돌이거든요?!”

“누나 어디 가?”

리카가 호들갑을 떨고 있던 도중, 유우토가 방을 나왔다.

“박 이사님 돌아가시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지!”

“추억……? 어디 가는데?”

“도쿄! 아, 아니, 여기도 도쿄나 마찬가지지만, 그으, 도심! 그래, 도심에 가는 거야! 나도 외국에 왔으니 즐겨야지!”

“어?”

유우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누, 누나. 일본은 외국이 아니잖아…….”

“……아?”

“누나 고향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야…….”

리카는 일순 당황했으나 곧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어린애를 대하듯 유우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우쨩, 나한텐 모든 곳이 외국이야.”

“하지만 일본은……!”

“중세 시대를 알아, 유우쨩? 혈통으로 권한이 계승되는 체제를 어떻게 생각해? 현대에도 그런 게 있다면?”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지만, 유우토는 성실하게 누나에게 어울려주었다.

“안 좋다고…… 생각하지…….”

“바로 그거야! 국적도 마찬가지야!”

“에엑?!”

“혈통으로 권리를 세습하는 거야! 국적이란 건 세습재산이라구! 그래서 사람들이 그 재산을 나누기 싫어해서 외국인을 몰아내려는 거야! 고작 핏줄과 태어난 땅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사자한테 잡아먹히고 어떤 사람은 전기와 기름을 펑펑 쓰면서 살아! 이건 무작위 계급제도와 다를 바가 없잖아!”

“그런(손나)!”

“나는 세계시민으로서 국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어. 오히려 저항할 거야!”

“그냥 ‘외국’이란 말이 헛나왔다고 인정해! 창피한 것도 아닌데 왜 숨기려는 거야!”

“유우쨩, 나는 세계시민이야. 그럼 이만!”

유우토는 일본을 외국이라고 부르는 지경이 되어버린 누나를 절망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유우토를 뒤에 두고, 리카는 성필을 끌며 1층으로 내려갔다.

“리카, 유우토 말대로 그냥 말실수한 거잖아. 왜 굳이 포장하는 거야?”

“저는 완벽한 누나예요.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요!”

희한한 자존심이다.

동생 앞에서는 말실수조차 하지 않는 완벽한 누나를 연기하고자 한 것일까.

“세습재산이니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한 이사님이요!”

한 이사님, 보고 계십니까.

당신이 만든 거짓된 세계시민을!

“박 이사님도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선 여러 국적을 취득하는 게 좋아요. 일단 일본 국적부터!”

한구인의 죄는 깊다.

리카의 아무 말에 논리를 붙여주었으니…….

* * *

일본의 설날이 끝나고 리카도 가로 엔터로 복귀했다. 멤버들은 월요일의 음방 대기실에서 성필에게 일주일의 스케줄을 전달받았다.

“설하는 오늘 힘들겠지만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 촬영하고 귀가하자.”

기어코 리카가 기획한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은 소녀연맹의 공식 시리즈물로 채택되었다.

홍보팀 양상헌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이미 5회 분량의 예산과 스케줄을 할당받아 두었다.

“네. 저, 근데 리카. 정말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는 거야?”

“물론이죠! 설하 쌤의 소원은 리카쨩에게 맡겨두라구요!”

“복권 당첨 같은 건?”

“제발 현실적으로 생각해주세요.”

그럼 소원을 이뤄주는 게 아니잖아.

“대본이 없다지만, 이것도 프로페셔널한 예능이에요. 목표는 일주일 조회 수 50만이에요!”

“꿈도 크네.”

리카는 경쟁심을 담아서 신아름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경쟁심이 있느냐면, 신아름의 아이튜브 시리즈인 ‘뭐든지 가능한 아름이’ 때문이었다.

신아름은 2, 3주에 한 번씩 해당 시리즈를 촬영한다. 영상의 주제는 신아름이 온갖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저번 주에 업로드된 ‘뭐든지 가능한 아름이’는 페인트탄 서바이벌에 도전했는데, 나름 경력이 긴 서바이벌 동호회 5인을 홀로 전멸시킴으로써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물론 신아름이 그 성과를 내기까지, 소녀연맹 멤버들은 페인트탄 범벅이 되어 흙바닥과 진흙탕을 4시간 동안 굴러야만 했다. 멤버들이 제발 그만하자고 해도, 신아름은 ‘이길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다’며 계속 도전했던 것이다.

“아름이가 그렇게 뻗대는 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가로 엔터 채널의 효녀는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이 될 거니까!”

“그것도 2, 3회쯤에서 폐기될 듯.”

“이사니임…….”

리카는 훌쩍이는 흉내를 내면서 성필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아름이가 괴롭혀요오…….”

“아름이가 그럴 수도 있지 왜 이르는 거야 이 고자질쟁이야!”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닌가요?!”

편애는 리카가 당하고 있는 듯했다.

성필과 리카의 인연이 3년을 넘어선 지금 이 시점, 둘은 정말 친구나 마찬가지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만약 이 상태에서 반말까지 허용하면, 둘은 피시방과 노래방까지 같이 가는 단계까지 발전할 가능성도 보였다.

“아타시(저) 케이블 음방 3관왕이라구요! 네, 3관왕이요! 그만한 대우가 필요해요!”

“아, 곧 드라이네. 무대 확인하고 올게.”

“…….”

성필이 나가자 대기실로 평온을 되찾았다.

요즘 소녀연맹의 대기실은 대화보다 침묵이 더 자연스러웠다. 멤버들은 24시간 거의 항상 붙어 있기에, 시간을 때우려 대화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대화를 하려 해도 할 내용이 없다.

책이나 잡지, 핸드폰을 보면서 멤버들이 시간을 보내던 때.

“……음?”

리카의 뇌리에 거대한 영감이 번뜩였다.

‘케이블 3관왕. 케이블 3관왕? 케이블…….’

그 단어가 오래전의 과거를 상기시켰다. 한구인도 인정할 만큼 기억력이 비상한 리카의 뇌는 순식간에 기억을 되새김질시켰다.

‘케이블 3관왕, 뭔가, 있었…….’

“아아아아아!”

리카가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리, 리카 왜 그래?”

백설하가 당황하면서 묻자, 리카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과학자처럼 흥분했다.

“케이블 3관왕!”

“으, 응. 그게 왜?”

“‘롱 포’ 활동 기간에 박 이사님이 그러셨어요! 저희 케이블 3관왕 하면 연애 금지 풀어준다구요!”

“……박 이사님이 그러셨다구?”

백설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때 장하양이 손에 든 책을 놓쳤다. 책 내부의 흰 종이가 더러운 바닥에 닿았음에도, 장하양은 책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떨며 말했다.

“그, 그러셨어요. 박 이사님이.”

“어어…… 그, 언제 그러셨는데?”

“아라가 시에이스 규영 선배님이랑 악수한 날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멤버의 머리에 전류가 내리꽂혔다.

잊혀진 과거의 맹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진실.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금지된 규율.

“저희, 연애 금지 풀 수 있는 조건 만족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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