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41화 (241/760)

241화

성필의 차 안은 따뜻했다. 장하양이 올 것을 예상해 미리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두었던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혹시 몰라 장하양에게 온도는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그래. 일단 내가 한 이사님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한테는 다 연락을 돌려봤거든?”

“어떤 분이요?”

“사장님.”

“그리고요?”

“끝이야.”

“…….”

아무튼, 홍규헌도 한구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었다. 게다가 한구인은 홍규헌의 연락마저 받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정말 뭘 하고 계시는 걸까요?”

“음…… 내 예상인데, 한 이사님이 디지털 웰빙을 하고 계시는 거 아닐까?”

“그게 뭐예요?”

“요즘 스마트폰 중독인 사람이 많잖아. 그래서 뭐, 아예 하루는 스마트폰을 놓고 생활한다든지 그런 거야.”

장하양은 스마트폰 중독이 아니라 디지털 웰빙이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할 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란 게 존재할…….

‘아, 리카가 그랬지.’

리카는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만진다. 밥 먹을 때도, 가만히 누워 있을 때도, 심지어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핸드폰을 켜두고 있다.

그 정도면 중독이라 불러도 충분할 것이다.

“휴일이니까 전화를 안 받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 그게 당연한 거고.”

“그렇네요. 그럼 어떻게 찾죠?”

“한 이사님이 계실 만한 곳으로 가자.”

성필이 첫 번째로 향한 곳은 도심의 피트니스 센터였다. 상당한 고층 건물의 중앙, 눈이 휘둥그렇게 떠질 정도의 피트니스 시설이 있었다.

성필은 카운터에 양해를 구하고 주변을 살폈다.

“한 이사님이 여기 다니시는 거예요?”

“응. 최근에 사장님 권유로 나랑 한 이사님이 여기 등록했거든.”

“운동하시게요? 그런데 박 이사님은…….”

“어. 나도 홈트하고 있지. 근데 좀 본격적으로…… 할 마음은 없었는데 사장님이 하자고 하셨어. 내년 여름쯤에 바디 프로필 찍는 게 목표야.”

“그럼 박 이사님도 바디 프로필 인쇄해서 집에 걸어두고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그 정도로 자기애가 강하지는 않아…….”

집에 근육질인 자신의 사진을 걸어두고 산다고? 손님이 오기라도 한다면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 게 분명하다.

“내가 하양이 얼굴 반만 따라갔어도 집을 내 사진으로 도배했을 텐데.”

“아하하, 나중에 꼭 보여주세요.”

“고려는 해볼게.”

“여기서 약속해주세요.”

왠지 모르게 끈질긴 장하양의 부탁에 억지로 수긍해준 뒤, 성필은 다음 목적지를 찾아갔다.

한구인이 자주 온다는 서점이었다.

“바깥 공기 마시고 싶으실 때는 여기 자주 오신대. 저기 의자에서 주로 잡지를 읽으신다더라.”

현재 한구인이 아끼는 벤치는 여러 사람들에게 점거당해 있었다. 심지어 벤치 뒤쪽의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책을 읽는 사람들도 보인다.

“왜 저렇게까지 여기서 책을 읽는 걸까요?”

“글쎄다. 공짜라서 그럴까. 난 잘 모르겠네.”

“온 김에 책 구경 하실래요?”

“한 이사님 찾아야지.”

“아, 맞다.”

장하양은 자기도 모르게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금세 의지를 다잡은 장하양은 다음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

[날 가질 수 있는 넌, 인간 이상이거나 이하야―.]

장하양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롱 포’를 울려댔다. 서점에 있는 수십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박혔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받고도 주변으로 목소리가 퍼지지 않게 소곤거렸다.

[하양아.]

“아, 언니.”

[저녁에는 오는 거지? 연말 라이브.]

“네, 네. 저녁까지 갈 거예요.”

[응. 저, 지금 어디…….]

“죄송한데 지금 서점이라서…….”

[아, 미안. 끊을게.]

“네. 죄송합니다.”

장하양은 통화를 종료하곤 재빨리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다음 목표는 서점 지하에 있는 문구점이었다. 하나의 문구점이라기보다는, 여러 매점이 함께 입주해 있는 작은 상점가에 가까웠다.

성필이 들른 곳은 음반매장이었다.

“여긴 클래식 음반도 많이 들어와. 한 이사님이 자주 오신댔어.”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3년 넘게 한 이사님이랑 같이 지냈잖아.”

둘은 매장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가 메인 가판대에 놓인 소녀연맹의 앨범을 보았다.

Girls’ Union의 다섯 버전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장하양은 그중에서 O버전, 자신의 개인 사진집이 든 버전을 물끄러미 보았다.

“하나 사줄까?”

“아뇨. 숙소에 있잖아요.”

“아님 케이어스 앨범은 어떠…….”

“괜찮아요.”

“음원보다 CD가 음질이 더 좋…….”

“괜찮다니까요.”

결국 음반매장에서도 한구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둘은 차로 돌아와서 고민을 이어갔다.

“한 이사님 뭐 하고 계신 걸까. 아직까지 연락을 안 받으시네.”

“디지털 웰빙이 맞는 거 같아요.”

“트렌드에 민감하신 분이니까.”

트렌드에 민감한(클래식 애호가, E―book 안 사고 종이책만 삼, 클래식 정장 선호함) 한구인을 찾는 일은 저녁이 가깝도록 소득이 없었다.

슬슬 지쳐갈 무렵, 장하양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쩍 지나갔다.

“보육원…….”

“응?”

“보육원에 계신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냐는 듯 장하양만 물끄러미 보던 성필의 표정에 갑자기 놀라움이 번졌다.

“아아, 연말!”

“봉사 가신 걸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나온 제안 중에서 가장 그럴듯했다. 성필은 재빨리 홍규헌에게 연락을 돌렸다.

[한 이사가 봉사활동 가는 보육원이면…… 잠시만 기다려봐. 그런데 아직도 한 이사 못 찾은 거야?]

“네. 연락 자체를 안 받으세요.”

[그건 특이하네. 웬만해선 핸드폰을 잘 안 놓는 게 한 이사인데. 아, 찾았다. 연락처 불러줄게.]

성필은 연락처를 받은 후 그것을 인터넷에 검색하여 보육원의 주소를 알아냈다.

성필과 장하양은 이번에는 찾을 수 있겠단 기대감에 부풀어 보육원으로 향했다. 근처 동네에 도착하니 한눈에 보기에도 시선을 끄는 건물이 있었다.

“와, 이게 이런 동네에 생기는구나.”

7층 높이는 될 법한 다목적 문화 센터였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듯 보였으나, 건물의 외관은 거의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이 문화 센터에 힘입어 주변의 건물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는 중이었다. 밀어버리고 새로 지었을 게 분명한 세련된 인테리어의 건물들이 몇몇 개 눈에 띈다.

성필과 장하양은 번듯한 건물이 늘어선 대로에서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보육원이 있어야 할 땅에는 휑한 평지와 공사 자재들만이 있었다.

“여기 맞는데?”

“그러게요.”

“……아, 설마.”

문화 센터로 동네의 분위기가 바뀌니 보육원이 사라진 것일까. 주민들의 반발에 못 이겨 아예 보육원이 빠져나갔다거나.

아예 없을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하아…….”

이제 저녁이고 태양도 떨어졌다.

성필은 지쳐선 바닥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낮부터 한구인을 찾았음에도 꼬리조차 잡지 못했단 게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죄책감이 가득 담긴 장하양의 사과를 듣자마자 성필은 벌떡 일어나서 미소를 띠었다.

“뭐가 죄송해. 그냥, 배가 좀 고파서 그랬어. 가는 길에 간단하게 뭐라도 먹을까?”

성필과 장하양은 잠입하는 형사처럼 도넛과 커피를 삼키면서 차 시트에 푹 기댔다.

이대로 가다간 달이 중앙에 뜨더라도 한구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옛날 보육원 주소만 나오고. 정말 아예 없어진 걸까.’

서울에 있는 보육원을 전부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순간 성필의 뇌로 전기가 튀었다.

‘민정이는 알지 않을까?’

한구인과 조아라의 첫 만남이 바로 이 자리에 있던 보육원에서였다.

조아라가 적을 두었던 유 노 댄스 아카데미는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갔었고, 그곳에는 보육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필은 백민정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아, 거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고 들었어. 주소 보내줄까?]

드디어 그럴듯한 단서를 잡아냈다.

성필은 바뀐 보육원 주소로 급히 차를 몰았다. 이번에야말로 있겠지, 그런 기대감을 담아서.

새롭게 자리 잡은 보육원은 이전의 부지보다 훨씬 넓단 게 느껴졌다. 휑한 공사 자재만 있던 곳보다야 확실히 넓을 게 분명했다.

성필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장하양과 함께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누런 흙이 채워져 있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로로 길게 늘어선 보육원 건물로 향하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여기 마음대로 들어와도 될까요?”

“일단 직원실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할까.”

그런데 불이 켜진 곳이라곤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밖에 없었다. 아마 보육원 아이들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공동 공간이지 싶었다.

“연말이니까 이벤트 같은 거라도 하나 봐. 직원들이랑 애들이 다 모여서.”

보육원은 하나의 입구가 중앙에 있는 형식이 아니라, 각각의 방마다 두 개의 문이 있는 형식이었다.

성필은 공동 공간의 뒷문으로 생각되는 곳을 열었다.

“실례합…….”

문을 열자마자 십수 명의 시선이 성필과 장하양에게로 꽂혔다. 개중에는 한구인의 것도 있었다. 붉은색 선명한 산타클로스 복장의 한구인이…….

“박 이사님……?”

흰색 수염을 단 한구인도 충격적이었으나, 더 충격적인 것도 있었다.

루돌프 잠옷을 입은 슈이치였다. 그는 흰색의 선물 보따리를 든 채 우뚝 굳어버렸다. 코에 낀 빨간코 장식이 돋보였다.

“…….”

극적인 가로 엔터 직원들의 상봉에 침묵이 감돌던 것도 잠시.

“하양이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거의 비명과 같은 수준으로 소리쳤다.

“소련 하양이야!”

그에 아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응했다. 선물 받을 차례란 것도 잊어버리고 장하양에게로 몰려든 것이다.

“안녕하세요!”

“티비에서 매일 보고 있어요!”

“공연 온 거예요?”

“사인해주세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장하양은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그 손길들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붙임성이 적은 남자애들이나 나름 철이 든 고등학생들은 조금 떨어져 있었으나, 눈동자에 새겨진 동경의 빛마저 없애기란 어려웠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저녁의 여가란 텔레비전 정도가 전부였고, 음악을 원할 때 들을 수단도 적었다. 그래서 음악 방송은 보육원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 인기는 장하양에 대한 인지도로 귀결되었다.

“얘, 얘들아. 누나가 곤란해하잖니.”

한구인은 아이들을 장하양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다가왔다. 그 모습에 성필과 장하양은 강렬한 충격을 받아서 눈을 크게 떴다.

한구인이 반말을 쓰는 건 처음 보았다. 성필과 장하양은 마치 아이가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말한 것을 본 신혼부부처럼 변해버렸다.

“일단 진정하고…….”

한구인이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다가갔지만 아이들은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한구인이 밀려나서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아이고!”

“한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루돌프(슈이치)가 달려와서 산타클로스(한구인)를 부축했다.

장하양의 등장으로 인한 소동은 10분 넘게 이어졌다.

* * *

장하양은 거의 한 시간에 이르는 연말 기념 공연을 마쳤다.

이 정도면 거의 소녀연맹의 콘서트 레퍼토리를 확립하지 않았나 싶을 수준으로, 장하양은 자신의 온갖 기교를 사용해서 관람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겨울이란 날씨에 맞지 않게 그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배어 있었다.

“고마워요.”

원장은 응접 테이블에 다과와 차를 내왔다. 그는 중년 특유의 푸근함을 지니고 장하양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정말 최고의 연말 선물이 되었습니다.”

“아니에요. 도움이 됐다니 기뻐요.”

원장은 호탕하게 웃고는 이번엔 성필을 보았다.

“박성필 이사님? 구인이랑 같은 회사에 다니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하, 훤칠하십니다. 그 회사에는 다 빼어난 사람만 있나 봅니다.”

“으하하! 제가 좀 잘생기긴 했죠?”

“구인이보다는 아니네요!”

“……네.”

성필의 기가 푹 죽어버리자 원장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농담으로 넘길 줄 알았는데 이토록 극명하게 반응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성필은, 3년 내내 한구인이란 사람과 붙어있다 보니 자신감을 잃게 된 것이다.

원장의 말은 성필의 자존감을 다시 한번 떨어뜨려 버렸다.

“왜 그러세요. 박 이사님이 어때서요.”

“아, 그렇죠? 하하하!”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장하양의 칭찬에 원장도 재빨리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성필은 새벽 비를 맞은 사막의 튤립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박 이사님도 개성적으로 더 잘생긴 부분이 있으세요. 여기, 눈매 끝이라던가.”

심하게 구체적이라 오히려 사람을 멕이는 게 아닌가 싶은 발언이었다. 굳이 성필의 눈매를 검지로 콕콕 찌르는 게 더 놀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턱선.”

“하양아 그만해도 돼. 난 괜찮아…….”

그때 한구인과 슈이치도 응접실로 들어왔다. 한동안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둘도 장하양 못지 않게 땀을 많이 흘렸다.

“어, 구인이 수고했어. 올해도 열심히 했네. 크리스마스에 못 왔다고 산타클로스 옷도 입고. 진짜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도움이 됐다니 기쁩니다.”

“거기 슈이치 씨도 먼 땅에 와서 고생하시네요. 와서 좀 들어요. 이거 비싼 과자거든요.”

“잘 먹겠습니다.”

네 사람은 원장에게서 짧은 대접을 받고 보육원을 나섰다. 작별 인사를 하는 원장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고마움이 뚝뚝 떨어졌다.

“구인아, 매년 고맙다. 아니, 매년이 뭐야. 매달 고마워.”

“제 즐거움입니다.”

한구인의 딱딱한 번역체 한국어를 들은 원장은 호감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구인에게 다가와선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매주었다.

“장가는 언제 가고.”

“아직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네가 생각이 없는 거겠지. 너 같은 애면 누군들 데려가고 싶어서 안달일 거야. 결혼식에는 나도 꼭 불러라.”

“예, 그러겠습니다.”

“축의금은 한 30만 원이면 되나?”

“그 돈이 있으시면 애들한테…….”

“얘는 돈 준대도 마다하네.”

원장은 마지막으로 한구인의 등을 팡팡 때려주곤 손을 흔들었다. 마치 손자나 아들을 대하는 듯한 애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네 사람이 보육원의 운동장에 발을 디디고 돌아가려던 때,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중학생 정도 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가 한구인의 앞에 섰다.

수많은 아이 중 이 소녀는 성필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장하양에 열광하던 다른 이들과 달리 구석에서 초조한 듯 시계만 보고 있던 아이다.

“구인 오빠!”

한구인은 무릎을 살짝 굽혀서 그 소녀와 눈을 맞추었다.

“응, 마리아.”

기독교식 이름을 지닌 소녀는 반질반질하게 포장된 작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오빠가 구인 오빠한테 전해달랬어요. 오늘 시간 맞춰서 못 오면요…….”

그리 말하는 소녀의 음성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장하양 혼신의 공연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초조한 티를 냈던 건, 오빠가 오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다.

한구인은 소녀가 전해준 선물을 당황스럽단 듯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가 마련해준 정성이 허무하지 않도록, 한구인은 조심스레 선물을 받았다.

“사무엘한테는 이제 나한텐 이런 거 안 줘도 된다고 전해줘.”

“네. 그, 항상 감사합니다.”

“아니야. 공부 열심히 하렴.”

마리아는 쭈뼛쭈뼛 인사를 마치고 다시 건물 안으로 향했다.

보육원 운동장을 빠져나가며 성필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슈이치 씨는 왜 같이 계세요?”

한구인이 산타클로스 복장을 입고 보육원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슈이치는 왜 루돌프 복장으로 한구인을 도와주고 있던 것일까.

“소노(그게), 어쩌다 보니 한 이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오늘 한 이사님과 약속을 잡은 김에 도와주기로 했고요.”

“약속이요?”

“오페라 하우스에서 유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거든요. 공연으로는 드문 쇤베르크의 곡이 포함되어 있기에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12월 31일, 연말에 남자 둘이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간다니. 두 사람에게 애인이 없을 거란 확신이 더욱 짙게 다가온다.

같이 연말까지 같이 보내고 취미까지 공유하니, 둘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친해진 듯했다.

한구인은 은근히 기대하는 어조로 성필과 장하양에게 말했다.

“유스 오케스트라라서 푯값이 삼천 원밖에 안 합니다. 두 분도 괜찮으시면 가시겠습니까?”

성필은 클래식에 그다지 조예가 없다. 가볍게 거절하려던 때.

“네, 갈게요.”

장하양이 곧장 대답하곤 긍정을 바라는 듯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은 우물쭈물하다가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의도치 않게 오케스트라 관람 파티는 네 명이 되었다.

장하양은 일행이 늘어 들뜬 한구인을 향해 동경 어린 시선을 보내었다.

“대학생부터 이 보육원에서 봉사하셨다면서요. 대단하세요.”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선행을 지속할 수 있다니. 장하양으로선 따라하기도 힘든 일일 것이다.

한구인은 마리아가 전해준 선물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슬픈 기색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빨간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앤은 커스버트네에 입양되어 활기차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죠. 어려서 부모가 죽고, 같이 살던 일가에 재앙이 닥쳐 버려졌음에도, 그 순박한 천성을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부모 잃은 이들이 앤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구인은 보육원의 벽 너머로 나오는 빛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제가 하는 일 따위, 아이들에게 아주 적은 위로밖에 되지 않겠습니다만. 그 위로를 아이들이 커서까지 간직해준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미 험난한 삶에서 오늘을 떠올리면서 희미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기만 한다면 저도 기쁠 겁니다.”

그의 이야기는 네 사람이 성필의 차 앞에 오는 것과 동시에 끝났다. 그리고 한구인을 제외한 셋에게는 공통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그건 한구인을 향한 일종의 동경과 감동이었다. 착한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이토록 마음씨 자체가 흰색의 도화지 같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구인은 천사의 표본으로 박물관에 박제시켜두어도 세상 누구들 반박하지 못할 게 틀림없다.

“분명 아이들도 오늘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거예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착한 일을 한 한 이사님한테 선물.”

장하양은 차의 글로브 박스에서 박스를 두 개 꺼내어 한구인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은 한구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스에 새겨진 브랜드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하양 씨…….”

“선물이에요.”

“이, 이렇게 비싼 걸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제 성의를 무시하시게요?”

“…….”

“이전에 저를 위로해주셨던 보답이에요.”

한구인이 불안한 눈초리로 성필을 흘기자, 성필은 안심하란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한구인도 장하양의 선물이 ‘그때’의 보답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성필도 받았을 선물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한구인은 눈물을 훌쩍이면서 선물을 품에 꼭 안았다.

“이번 생일엔 좋은 일이 많군요. 아라 씨한테도 어제 선물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아라가요? 무슨 선물인데요?”

“편의점 기프티콘입니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구인은 그 기프티콘을 받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아무튼 네 사람은 따스해진 가슴과 함께 오케스트라 공연을 감상하러 갔…….

“아.”

공연장으로 가는 중 장하양은 잊고 있던 약속을 떠올리고 말았다.

* * *

소녀연맹의 숙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큰 방이 있었다. 만약 숙소가 가정집이라면 부모님이 사용할 법한 곳이었다.

멤버들이 관례적으로 ‘큰방’이라고 부르는 곳은, 숙소에서도 라이브 방송을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조명이나 테이블은 물론이고, 멤버들이 쓰지 않는 기묘한 물품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장하양을 제외한 이들은 연말 기념 라이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인이에요! 하양 언니는 애인을 만나러 간 거라구요! 배신이야!”

라이브 시각이 다가올수록 멤버들도 점점 심각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광기 어린 리카의 외침은 멤버들의 불안을 대변해주고 있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침에 나가서…… 밤에 전화를 수십 통 씹을 일이…… 뭐가 있죠……?”

신아름의 물음에 백설하는 마땅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니, 답은 이미 머릿속에 있다.

‘하양이가 연애를 하고 있어? 어떡하지? 기절시킨 뒤에 핸드폰을 빼앗아서 기록을 확인해야 하나? 아니, 근데 다른 걸그룹분들 이야기 들어보면 멤버들이 연애하는 거 도와준다고 하던데…….’

기획사에 들키지 않도록, 특수 작전을 방불케 하는 알리바이 조작과 말맞춤으로 멤버의 연애 전선을 돕는다고들 한다.

일종의 계모임이다. 수고를 감소하고 자신도 훗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니야. 이건 큰일이야. 회사에 보고해야 해.’

고민만 씹고 있자 팬들과 약속한 라이브 시간이 다가왔다.

백설하는 불안한 눈빛을 억지로 숨기면서 파티용 고깔모자를 썼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모든 연락을 씹어버리는 장하양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백설하는 팬들과의 약속을 어기기보다, 일단 라이브를 켜기로 결심했다. 실낱같이 남은 장하양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채로.

“늦어서 죄송해요.”

달려온 듯 호흡이 거친 장하양이 미닫이문을 열면서 등장했다. 당연하게도 멤버들의 시선이 총알처럼 박혔다.

백설하는 몇 시간 동안 응축해왔던 분노를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빠르게 일어났다. 그녀가 앉은 의자가 바닥에 끌려 험한 소리를 뿜어냈다.

백설하가 다가오자 장하양은 움찔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하양아.”

“네, 언니.”

“왜 전화 안 받았어?”

“중간에 무음으로 해둬서…….”

“어디 갔다 온 거야?”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장하양은 차근차근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꽤 긴 설명이었으나 백설하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 경청 끝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란 거야?!”

백설하가 격노했다.

뒤에 앉아 있던 동생 라인의 어깨가 동시에 파도처럼 떨릴 만큼 큰 고함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백설하의 분노. 그것을 직격으로 받은 장하양은 거의 혼이 나간 듯했다.

그녀가 변명을 이어나가려던 것보다 빠르게 백설하가 말을 쏘았다.

“한 이사님을 찾으러 다녀? 봉사활동? 보육원에서? 산타클로스 옷 입은 한 이사님이랑 루돌프 잠옷 입은 슈이치 씨랑 같이?! 너, 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말이 돼? 변명을 준비하려면 그나마 논리가 있는 변명을 하든가! 방금 네가 한 말이 나를 무시한 거랑 뭐가 달라? 내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아?”

장하양은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어 성필에게 전송받은 영상을 재생했다.

그것을 본 백설하의 입을 쩍 벌려졌다.

“이게 왜 진짜……?”

“죄송해요 언니. 그, 늦게 와서 정말 죄송…….”

백설하는 정신이 가출한 것처럼 거의 10초를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백설하가 장하양을 안았다.

“하양아, 소리 질러서 미안. 네 말 안 믿은 것도. 진짜 미안해.”

“아, 아니에요. 저라도 안 믿었을 거예요.”

장하양과 백설하는 한동안 서로를 꼭 안고 있었다.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도, 백설하는 동생에게 화를 낸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지 이윽고 눈물까지 흘렸다.

결국 멤버 전원이 달려들어 백설하를 달래야만 했다.

“하양아 미안.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안 됐는데. 믿었어야 했는데. 네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에…….”

“아니에요 언니. 정말 괜찮아요. 늦은 제 잘못이잖아요.”

백설하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 누군가에게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단, 프랑스에서의 성필을 제외하고 말이다.

소리를 지르면 성대가 상한다는 매우 실용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습관은 백설하의 인생을 크게 바꾸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 깨진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멤버들은 백설하를 걱정하기 바빴다.

‘언니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 이사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나……?’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멤버들은 다 함께 자리에 앉아 라이브를 준비했다.

백설하는 화장을 수정하여 눈물 자국을 감추고, 라이브를 켜기 전 깊이 심호흡했다.

그 직전에 장하양이 백설하의 손을 잡았다.

“하양아?”

“언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다. 하지만 백설하는 장하양의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떨림으로부터 그녀의 감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새해 전날,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하는 날 장하양은 백설하를 울게 만든 것이다. 새해의 시작에 일어난 이벤트로는 썩 좋지 못하다.

장하양은 그게 미안하고, 또한 백설하의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응, 나도 잘 부탁할게.”

백설하는 단순히 서로 손을 잡은 것을 넘어, 장하양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로써 온기와 사랑을 전달했다.

“둘만 분위기 잡지 말고 빨리 라이브나 켜요! 벌써 20분 오버라구요!”

“아, 미안.”

백설하가 라이브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미 대기자가 만 명 가까운 단위였기에, 라이브가 시작하자마자 채팅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팬을 향해 백설하가 진심이 담긴 미소를 띠었다.

“인민이들 안녕하세요! 올해도 고생 많았어요!”

* * *

성필은 장하양을 숙소에 데려다준 뒤, 홀로 목적지인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아직 공연 시작 전인 듯, 홀에서 한구인과 슈이치가 기다리는 중이었다.

“때맞춰 오셨습니다. 방금 입장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공연 시작 전, 성필은 뷔라이브에 접속해서 멤버들의 라이브를 잠깐 보았다.

시청자 방문 기록이 벌써 만 단위를 찍었다. 미리 예고를 한 라이브인 탓도 있겠으나, 소녀연맹의 늘어난 팬덤을 확실히 표시하는 수치였다.

‘리카는 방송 시작 10분 만에 울고 있네.’

12월 31일.

1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멤버들은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어느새 추억으로 미화시킨 투쟁의 나날들을 복기했다.

‘힘들었지.’

그만큼 의미 있었고.

성필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린다. 동시에 사방에서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밝아졌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쇤베르크라고 했었지. 누군진 모르지만.’

티켓값이 싸서 그런지 어린이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집에 가고 싶어’, ‘언제 끝나?’, ‘얘, 뛰면 안 돼!’, ‘자리에 앉아!’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성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내일은 1월 1일이니까 쉬고, 이튿날은 쇼가츠(설날) 맞아서 리카 부모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야하고.’

남정네 둘과 오케스트라를 관람하면서, 성필의 32살도 저물었다.

* * *

이시카와 유우토, 18살(한국식 나이), 고등학교 2학년, 밴드부.

그는 새해 이튿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가로 엔터의 성필을 공항에 마중하러 가는 리카.

“누, 누나…….”

“응? 유우쨩 왜?”

누나가, 힐을 신고 치마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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