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40화 (240/760)

240화

HPT 뮤직 어워드 본상 수상. 그 업적은 대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마련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상은 한 해 최고의 아티스트, 최고의 앨범, 최고의 곡에 수여하는 것이다. 대상이라는 이름 대신 최고의 아티스트상, 음반상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이런 시스템에 대해선 불만도 존재한다. 당연히 한 해 최고의 아티스트는 최고의 앨범을 냈을 테고, 그 앨범에는 최고의 곡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셋을 분리해서 시상하는가?

이런 이유로 아예 ‘대상’ 하나만을 지정하는 시상식도 있지만, 종류를 세분화한다고 상들의 무게감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HPT 뮤직 어워드 본상을 받은 거지, 우리가.’

진저는 정호환이 알려주었던 시상식 관련 정보를 떠올리면서 본상의 무게를 가늠했다.

HPT 뮤직 어워드의 본상은 아티스트, 앨범, 곡으로 종류를 구분해두지 않는다. 이 모든 기준이 통합되어 단 10개의 본상만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HPT 뮤직 어워드의 본상은 다른 시상식의 본상들보다 권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케이어스가 1년 차에 본상을 받았단 건…… 그야 선배님들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는 거지만.’

대형 기획사의 신인들은 데뷔 1년이 되지 않고도 본상을 우르르 받는 경우가 많았다.

케이어스도 그 전례를 따른 것이지만, 그게 본상을 받았던 위업을 흐리게 만들지는 않는다. 케이어스는 본상에 오른 후보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성적이었으니 말이다.

‘1년 내내 음원 차트 탑10에 머물렀던 곡으로 받은 거니까.’

웬만한 음원 강자들도 흉내 내기 어려운 대성과였다. 케이어스가 본상을 받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이라 보아도 좋았다.

만약 케이어스가 아티스트로서의 커리어가 높고 연차가 쌓였다면 대상 후보로도 거론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케이어스의 본상은 케이팝의 첨단에 이른 그룹으로서 받아야 할 당연한 대접이었다.

그런데.

[본상, 소녀연맹 ‘롱 포’!]

소녀연맹 또한 본상을 받았다.

진저는 그것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기만 했다.

시상식 무대에 조아라와, 소녀연맹과 함께 올랐단 게 기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진저는 조아라의 팬이었으니까.

‘아라 씨, 멋졌어.’

‘아라베스크’의 무대를 보자마자, 진저는 소녀연맹이 얼마나 고된 연습을 소화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연맹 멤버들뿐 아니라 백댄서들과의 합마저도 완벽했다.

‘30명이 넘는 인원의 눈동자가 단 한 번도 옆으로 돌아가지 않았었어.’

눈으로 춤을 맞추고 있던 게 아니었다. 서로의 호흡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춤이었다.

보통 아이돌이 무대의 공백을 채우려고 백댄서를 쓰는 것과는 격을 달리하는 퍼포먼스였다. 소녀연맹과 백댄서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 함께 호흡하고 빛을 발했었다.

‘아라 씨는 진정한 의미의 군무를 습득한 거야.’

수와 일치된 움직임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개성을 죽이고 통일성을 중시한, 그야말로 아라베스크의 주제인 연대를 형상화한 군무(群舞).

‘아라 씨는 언제나 저보다 멀리 나아가네요.’

진저는 만면을 기쁨으로 채웠다. 동시에 그녀는 춤을 더욱 열심히 연습할 동기를 다졌다.

언젠가 조아라가 진저 자신의 춤을 보고 감탄하며 칭찬해주었으면 한단 바람을 품었다.

“진저.”

그때, 옆에서 김민주의 부름이 들려왔다.

주차장으로 빠져나가는 복도. 백색광이 복도를 가득 채워 엄청난 수의 인파를 비추는 공간 안이었다.

사람의 수와 그에 따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소음을 뚫고, 김민주의 짧은 부름은 날카롭게도 진저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어쩐지 걸음이 느려진 것만 같다, 그런 착각을 느끼면서 진저가 답했다.

“네, 민주 언니.”

“이렇게 큰 무대는 오랜만이라 들뜬 건 알겠는데…….”

진저가 흠칫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김민주의 눈빛이 절대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빛에도 힘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김민주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너무 낮았던 까닭일까.

앞서가던 진소유도 고개를 흘끔 돌려 뒤를 바라볼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다.

“무대에서도 그러면 안 되지.”

“네……?”

“너 혼자 춤에 도취하면 우리가 무슨 쓸모야. 우리가 너 받쳐줘야 할 단계는 지났잖아. 케이어스로 데뷔하고 1년이야.”

진저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김민주가 이러한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상을 받고 기분 좋게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나? 김민주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오늘 무대에서 넌 아이돌이 아니었어. 그렇게 퍼포먼스를 할 거면 솔로로 데뷔하던지.”

“어, 언니, 왜…….”

“더 높이 뛰고. 더 빨리 움직이고. 더 화려하게 펼치고. 사람들한테 ‘날 봐라’란 듯이 춤췄잖아. 그래, 그게 더 멋지게 보일 수 있지. 네 개성을 살려서 각을 맞추고 선을 살리는데 안 멋질 리 없지. 그런데 군무로선 0점이었어.”

김민주는 명백하게 화가 나 있었다.

“군무는 함께 하는 거야. 너 혼자 돋보이겠다고…….”

“도, 돋보일 생각은 없었슴미…….”

“들어.”

“…….”

“넌 무대에서 즐거웠을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폐였어. 같이 추는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짜증 나는지 몰라? 관객들이라고 좋게 받아들였을 것 같아?”

진저는 할 말이 없었다. 김민주의 지적을 듣다 보니 짐작 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오늘의 진저는 춤에서 힘이 더욱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만 명의 관객이 바라보았고, 또한 조아라와 성필이 자신을 본다고 생각하니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군무의 틀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춤을 추는 동안은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알 수 없었지만, 같이 춤을 추던 케이어스 멤버들은 불협화음을 느꼈을 것이다.

“죄송…… 함미다…….”

진저는 사과를 입에 담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또한, 평소라면 김민주도 직접적으로 진저에게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민주는 소녀연맹의 무대를 보았기에 이런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퍼포먼스에서 케이어스는 1등이 아니었다.

‘나 때문에…….’

진저 때문에 1등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퍼포먼스의 통일성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김민주가 이렇게 말해야 했을 정도면 눈에 띄긴 했던 모양이다. 그 말은, 케이어스의 리더인 에리카에게서도 질책이 뒤따르리란 뜻이다.

무언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사과해야 한다.

“저, 에리카 언니, 죄송함미다…….”

진저의 사과를 듣고, 멍해져 생기가 없던 에리카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한 박자 늦게 에리카가 되물었다.

“응, 뭐가?”

“오늘 공연…… 민주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아, 그거?”

에리카는 배시시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답했다.

“뭐 어때? 활기차서 좋던데?”

김민주가 발작이라도 하듯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미쳤냐는 듯 에리카를 노려보았다.

“‘활기차서 좋던데’라고? 에리카 너 나랑 같은 무대 섰던 거 맞아?”

“그게 무슨 질문이야? 당연히 같이 섰지.”

“일본에는 반어법도 없어? 오늘 우리 무대가 완벽하지 않았단……!”

“그게 어때서 그래.”

김민주가 우뚝 멈춰 섰다.

‘완벽하지 않은 게 괜찮단 거야?’

음방 1위를 한 번 내어주다 보니 패배에 면역이라도 생겼나?

“너, 아무렇지도 않아? 소녀연맹은 그런 무대를 보여줬는데…….”

“민주 너는 뭐든 딱딱 끊어서 생각하는 게 문제야.”

“……뭐?”

“시상식 무대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딨어. 너 혼자만 이해할 기준으로 사람들을 재단하지 마. 너 혼자한테만 중요한 선이잖아, 그거.”

“…….”

“네 마음속에만 있는 심판 데려와서 진저한테 뭐라고 하지 말라구.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기뻐하고 끝내면 되지 굳이 왜…….”

에리카가 김민주의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귓속말.

“분위기 개 같이 만들고 그래?”

“…….”

에리카는 김민주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진저, 이리 와.”

에리카는 쭈뼛쭈뼛 다가온 진저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를 먹여주었다.

“진저, 다음에는 더 잘하자. 오늘도 잘했지만,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지?”

“아, 네, 네에…….”

짧고도 긴 대화를 마쳤을 시점, 케이어스는 마침내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정 거리를 따라 주홍색의 가로등이 서 있어 수많은 차들을 밝혀주었다. 에리카는 그 빛의 아래를 살피다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아, 저깄다. 매니저님, 저 5분 정도만 다녀올게요.”

“어딜?”

“소녀연맹한테요.”

“잠…….”

매니저가 에리카를 말리기도 전에, 그녀는 기쁜 걸음으로 가로 엔터 인원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에리카는 성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 그의 등을 찔렀다. 그가 돌아보자 에리카는 주먹을 내밀었다.

“토모다치(친구).”

* * *

‘음악을 위한 동행’ 마지막 날.

그 새벽에, 성필과 에리카는 숙소의 옥상에서 긴긴 담소를 나누었다. 아니, 담소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제 말 이해하셨어요?”

“……네.”

둘은 옥상에 마련된 허름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서로를 옆에 두었다.

에리카가 성필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목을 쥐고 있는 것만 빼면 특이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다.

“요컨대, 제 일상에는 자극이 없어요.”

“그래서 담배를…….”

“호기심이 생겨서요.”

에리카도 담배란 게 아이돌에게 얼마나 큰 이미지 타격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언제나 인간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넘어서곤 했다.

에리카는 애초에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을뿐더러, 회사에 대한 신뢰와 성실한 태도보다 본인의 무료한 삶을 달래줄 자극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입에 댄 담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짜르르 울리면서 정신은 멍해지는……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어요.”

그럴 것이다.

담배가 가져다주는 화학적 쾌락은 처음 겪어보는 사람에게는 신선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마약을 해보지 않았단 가정하에, 삶에서 겪었던 다른 쾌락과는 궤가 달랐을 터다.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면…….”

“아, 아녜요. 자세하게 표현 안 해도 돼요.”

성필은 에리카와 함께 있는 시시각각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에리카는 그야말로 천사의 화신. 이를테면 장하양과 비슷하기까지 한 고운 심성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으니까.

갑자기 장하양이 담배를 꼬나물고 연기를 뱉는다고 생각해보라. 에리카였기 망정이지, 성필은 담배를 피우는 게 장하양이었다면 당장 졸도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솔직히 저는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삶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행복을 위한 역치가 올라가기만 해요.”

모든 게 너무도 쉽게 손에 들어오기에, 에리카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고 소망한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게 20살이 된 에리카는 어딘가가 망가진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에리카는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었다.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방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절제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다.

“제 인생에서 행복이라곤 남지 않을까 봐요.”

에리카는 말하는 동안에도 무의식적으로 연기를 이어갔다. 아니, 연기라기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랑받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내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사여구를 덜어내면 담배를 피우다가 들켰을 뿐인 아이돌이지만, 그녀의 고민과 합쳐지면 고뇌를 태우는 예술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에리카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미소를 띠며 성필을 바라보았다.

“보물 더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보물의 가치를 가슴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잖아요.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그게 두려워요. 언젠가 제 마음이 싸늘히 굳어버릴까, 그게 무서워서 하루하루 견뎌내는 게 힘들어요.”

“음…….”

성필은 고개를 돌려 에리카를 보았다. 아마 위로나 동정 섞인 말이 나오겠지, 라고 예상한 에리카의 생각은 틀렸다.

“잘됐으면 좋겠네요.”

성필의 반응은 이제껏 겪어본 적 없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에리카는 혼란에 빠져야만 했다.

에리카는 사랑받는 법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그 본능에 따른 에리카의 행동은 상대의 기대를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하면 기뻐하겠구나’ 싶은 언행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을 역으로 말하자면, 에리카를 대했던 모든 사람은 그녀에게 모종의 기대와 소망을 품었단 뜻이다.

다들 귀여운 에리카를, 아름다운 에리카를, 착한 에리카를 바라왔다. 그래서 에리카는 그런 사람으로 행동해왔다.

그런데…….

‘박 이사님은 나한테 어떤 기대와 소망도 품고 있지 않아.’

그녀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에리카라는 인간 자체를 존중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실은 에리카에 대한 환상이 깨질 대로 깨져서 기대의 조각조차 남지 않은 것이지만, 에리카가 성필의 고통과 실망마저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 이사님의 눈에 담긴 건 아이돌을 보는 빛이 아니야.’

처음 받아보는 존중에 에리카는 혼란에 빠져 행동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녀도 상황에 맞춰 움직였다.

본능을 제거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행위. 미소가 에리카의 입에 걸렸다.

에리카의 삶에서 드물기 그지없는 것,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다.

“박 이사님, 눈감아주시는 대가로 설하 언니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셨죠?”

“네, 그랬죠.”

“싫다면요?”

“싫으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알리시려고요?”

“아뇨. 정말 어쩔 수 없단 거예요.”

성필도 담배를 피우는 아이돌을 꽤 보아왔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혐오스러운 시선을 주는 대신, 성필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해왔다.

예를 들어 바지 주머니에 네모난 곽 형상이 튀어나와 있으면 주의 주거나, 외투 주머니 속으로 갑이나 라이터가 보이면 알려주는 등. 그들의 삶을 존중했다.

아이돌도 사람 아닌가.

보통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가만히 넘기곤 하는데, 성필은 꼭 담배를 피우는 아이돌에게 처신 잘하라며 한마디씩 했었다.

혹시나 담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으면 인터넷에서 안티들한테 평생 조리돌림당할 테니 말이다.

“담배 피우는 게 대수인가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설하 언니랑 친구 될 테니까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강물에 떠내려가는 거 살려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에리카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면서 주먹을 들었다. 때리려는가 싶었는데, 그녀는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토모다치(친구).”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람 마음 다루는 데는 선수구나.’

만약 성필이 아닌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묘한 감동이나 흥분을 느낄 터였다. 물론 에리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성필도 감격에 겨웠을 것이다.

케이어스의 에리카가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다니? 그녀의 꾐에 넘어간 사람을 죽을 때까지 담배에 관한 사실을 비밀로 남길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성필은 아니었다. 에리카의 속내를 알고 있지만 속아주었다. 그녀가 안심하고 잠이 들 수 있도록.

“토모다치(친구).”

성필은 그녀와 주먹을 맞추었다.

“그럼 친구 된 김에 맞담이나 피울까요?”

성필이 농담 삼아 말하자.

“네.”

에리카가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

성필은 마음속으로 울상을 지으면서 담배를 꺼냈다. 아직도 더 깨질 환상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 * *

성필과 에리카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주차장의 인적이 드문 공간으로 향했다. 도중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들이 탄 밴을 흘끔거렸다.

리카는 정읍사(井邑詞)의 화자처럼, 성필이 멀리 떠나갈 것을 염려라도 하듯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쩐지 미안하다…….

“잘 지내셨어요?”

주홍색의 가로등 아래에서 에리카가 멈췄다. 그녀는 저 멀리 떨어진 소녀연맹의 밴을 바라보면서 짙게 웃었다.

“리카랑은 잘 지내세요?”

“네? 어, 그렇죠. 잘 지내고 있죠.”

에리카의 웃음이 더욱 더 진해진다. 리카가 잘 지낸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세요? 프랑스에서.”

“아…… 네.”

“알았어요, 저.”

이루고 싶은 목표, 혹은 삶의 목적.

에리카는 목표가 없는 길을 달리는 삶을 살아왔다. 아무 곳이나 걸어가도 주변에서 환호하고 박수를 쳐주며 보물을 마음껏 사방에 쌓아두었다.

그런 에리카의 마음은 성필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티를 내주었다.

“오, 다행이네요. 뭔데요?”

“박 이사님, 저는 아무것도 손에서 놓지 않을 거예요.”

“……네?”

에리카는 사려가 깊고 천사 같으며 여름철의 초목보다 싱그럽고 고통 없이 자랐기에 매사 밝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가져왔기에 무엇이든 타인을 위해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니에요. 제 손에 들어온 건 제 손을 펴서 줄 수는 있더라도, 누가 피게 만들 수는 없어요. 아무한테도 넘겨주진 않을 거예요.”

에리카는 본인의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손에 쥔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번에 소녀연맹한테 음방 1위 넘겨주고 보니 알겠더라구요. 당연히 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걸 놓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요.”

“……많이 분하셨나 보네요.”

소녀연맹의 프로듀서인 성필에게 이런 말까지 하는 것을 보니, 당시에 굉장히 화났던 게 분명했다.

“아뇨, 딱히.”

“거짓말 같은데.”

“케이어스가 받을 수십 개의 1위 중 고작 하나잖아요?”

“화난 거 맞지 않아요? 제 속을 아주 박박 긁어놓으시네…….”

“하하, 1위 정도야 몇 개 정도는 내놓을 수 있죠. 아예 음방 몇 개 출연 안 해드릴까요?”

“진짜 사람 속 긁어놓네?!”

“하지만 최고의 자리는 안 돼요.”

장난기로 차 있던 에리카의 표정에 진지함이 머물기 시작했다.

“박 이사님. 저는 바다처럼 넘치는 행복 속에서, 마침내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걸 찾았어요.”

그건 바로 빛이었다.

“제가 걸어가는 길에서, 저보다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은 없었어요. 최고에 이른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빛이요.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거예요. 제 손에서 뺏어갈 수 없어요.”

에리카는 간접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소녀연맹은 절대 케이어스를 넘을 수 없으리란 것을.

그 말을 듣는 성필도, 이제는 에리카의 선언을 20살의 장난이나 패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2, 3년만 지나 보세요. 우리 애들이 케이어스랑 에리카 씨를 넘을 거예요. 오늘도 본상 받았잖아요. 나중에 우리 애들이 대상 받을 땐 저한테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에리카가 선선히 수긍하자 성필이 오히려 놀라버렸다. 하지만 에리카는 수긍으로 끝내지 않았다.

“저희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죠. 크흠, 크흠.”

에리카는 목청을 가다듬고 자세를 곧게 세웠다.

“에리카 씨, 설마 여기서 노래 부르시…….”

성필이 주변을 살피기도 전에, 에리카가 백설하와의 합작곡인 ‘World on fire’의 하이라이트를 불렀다.

아니, 그건 쏘아낸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에리카의 목소리는 겨울의 밤공기를 뚫고 주차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것을 바로 앞에서 듣는 성필은 전신이 감전된 듯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 눈발이 섞인 바람마저 녹여버릴 듯한 강렬한 에너지. 에리카의 목소리에는 태양과 같은 따사로움과 선명함이 담겨 있었다.

전신공명(全身共鳴).

자연스레 주차장의 이목도 이쪽으로 몰렸다. 에리카의 노래를 듣고 보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그녀는 노래를 마치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박 이사님, 친구로서 말해주세요. 프랑스에서의 설하 언니랑 지금의 저, 차이가 있나요?”

“…….”

“아, 바뀌었다.”

에리카가 ‘해냈다’란 뜻으로 손뼉을 마주쳤다.

프랑스에서 봤던 대로, 어떤 기대감도 품고 있지 않던 성필의 얼굴에 무언의 소망이 새겨졌다. 그건 미래의 케이어스에 대한 기대였다.

에리카는 성필의 어깨를 장난스레 팍팍 두드리곤 만족스런 기색으로 그를 지나쳤다.

성필이 멍하게 서 있는데,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곧 핸드폰 받을 거 같아요. 그때 한 번 봬요.”

성필은 몇 분인지 모를 시간 동안 가로등 아래에 못 박혀 있었다.

에리카의 보컬은 명백히 프랑스 때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천재.’

그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성필은 비척비척 소녀연맹이 탄 밴으로 돌아왔다. 차 밖으로는 백설하가 나와 있었다.

“이사님…….”

백설하는 떨어진 거리에서 에리카의 노래를 들었음에도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던 모양이다. 아니, 먼 거리라서 더 와닿았을 수도 있다.

거리를 초월하고 전달되는 에리카의 호소력이 가슴을 후벼팠겠지.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백설하와 성필 사이의 진지함에 동참해주지 않았다. 차 밖으로 고개를 뺀 리카가 핀잔을 담아 말했다.

“에리쨩이 노래도 불러주는 건가요! 대체 왜!”

“저 정도면 아저씨랑 에리카랑 사귀는 거 아니냐. 굳이 여기서 불러내서 노래까지 불러줘?”

“KS 엔터는 연애 금지라구요! 심지어 연습생도! 박 이사님 에리쨩의 앞길을 막을 건가요!”

성필은 동생 라인의 호들갑에 어울려주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에리카만이 가득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에리카에게선 뮤직 어워드 무대에서도 볼 수 없던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단순히 실력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에너지였다.

‘열망.’

물 흐르듯 살아왔던 천재는 이제 물을 거스르며 올라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성필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케이어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샘솟는다. 그것은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었다.

동시에 경쟁심이 생겨났다.

여태까지 성필이 경쟁자로 그렸던 케이어스는 숫자였다. 10만 장, 19만 장, 그리고 음원 차트 1위 등, 오로지 숫자만을 벽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으로서 그려졌다.

벽에 선 건 케이어스란 이름이 아니라 에리카, 김민주, 진저, 진소유란 개개인의 사람이었다.

“설하야.”

성필의 부름에 백설하가 움찔했다.

“내년에도 힘내자.”

반응이 없던 백설하는 어느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네, 이사님.”

소녀연맹의 리더는 승리를 다짐했다. 오늘에서야 금을 낸 케이어스란 벽을 향해, 추후 반드시 저 벽을 무너뜨리겠단 의지를 품었다.

* * *

오늘은 12월 30일. 그리고 내일은 한구인의 생일이다. 그에 따라 장하양은 그에게 선물을 주기 위한 작전에 도입했다.

일단 내일은 가로 엔터의 휴일이다. 회사에서 한구인을 만날 수 없으니, 그의 내일 일정을 알아내야 한다.

“하루사메야

코이소노코가이

메루루하도.

(봄비 내리네

물가의 작은 조개

적실 만큼만).”

한구인은 1층의 소파에서 웨벡스의 파견사원, 슈이치와 시 낭송회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시의 주제는 하이쿠였다. 일본 정형시의 일종으로 5, 7, 5의 음으로 이루어진다.

참가자는 한구인과 슈이치, 그리고 싱글싱글 앉아 있는 리카였다. 낭송회를 진행하는 한구인의 표정에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충만감이 가득했다.

‘한 이사님, 친구를 찾으셔서 다행이야.’

한구인은 회사 내에서 그와 취향이나 취미가 같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슈이치가 들어옴으로써 그도 관심사를 나눌 사람이 생긴 것이다.

장하양은 낭송회가 이루어지는 소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부손은 봄비와 관련된 하이쿠를 많이 썼죠. 한 이사님이 준비해온 데 보태자면…….”

슈이치는 장하양이 다가오자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한구인의 고개도 장하양에게로 자연스레 향했다.

“하양 씨?”

“저도 옆에서 들어도 될까요?”

“아, 당연히 됩니다.”

장하양은 낭송회에 은근슬쩍 참여하면서 한구인에게 정보를 캐내었다.

“내일이 31일이네요. 1년도 다 지나갔어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1년이었습니다.”

“한 이사님은 내일 뭐 하세요? 특별한 일정이 있으시다거나.”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이로써 장하양은 공작은 끝났다. 내일, 한구인의 생일에 적당히 연락하여 만난 뒤 선물을 전해주면 될 것이다.

장하양은 선물은 생일 당일에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성필의 선물도 그러했으니, 한구인의 선물도 그러해야 하리라.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슈이치는 미리 프린트해 온 종이를 꺼내 낭송하기 시작했다.

“별 헤는 밤, 윤동주.”

리카가 움찔했다. 반면 슈이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를 읽어 내려갔다.

장하양은 조금 더 자리를 지키다가, 윤동주의 시에 관한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낭송회에서 빠져나왔다.

리카는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 대해 토론하는 두 남자의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다음 날.

장하양은 숙소에서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아침을 먹으러 나온 백설하는 그런 장하양을 보고 살짝 불안해했다.

“하양아 어디 가?”

“네. 일이 있어서요.”

가로 엔터는 공적인 자리에서 선물을 전달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가 있다. 타인에게 한구인의 선물을 주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서 좋을 게 없다.

백설하는 장하양의 행선지를 알아보기 위해 간접적인 미끼를 몇 개 던졌으나, 장하양은 걸려들지 않았다.

“으, 응……. 저, 저녁에 우리 연말 라이브 할 거니까 일찍 와야 해?”

“네, 저녁 전까지는 꼭 돌아올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백설하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장하양은 숙소를 나오자마자 한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번이나 연속해서 걸었음에도 한구인은 받지를 않았다.

“……아직 주무시나?”

그렇다면 계속 전화를 거는 게 폐일 수도 있다. 장하양은 문자를 보낸 뒤, 근처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때웠다.

2시간이 지났다.

“…….”

왜 반응이 없는 거지?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아직까지도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장하양은 자그마한 불안을 품으며 밖에서 가볍게 점심을 해결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서, 또 카페에 들어가서 시간을 때웠다.

오후 2시.

“…….”

이젠 정말 위험하다.

장하양은 성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는 장하양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한 이사님이 연락이 안 돼?]

성필은 연락이 닿으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0분 후, 그도 모르겠단 답을 주었다.

[사장님도 모르신대.]

“아…….”

이렇게 되면 생일에 선물을 전달한다는 계획은 폐기해야 한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건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알겠습니다. 휴일에 연락드려서 죄송…….”

[같이 찾으러 가자.]

“네?”

[지금 어디야? 데리러 갈게.]

의례적으로 거절하려던 장하양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옷을 점검했다.

‘좀 꾸미고 나올걸.’

아쉽지만, 별수는 없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30분 후, 성필이 장하양이 머물던 카페 앞으로 차를 가지고 왔다.

“가자. 반드시 오늘 안에 드리는 거야.”

“네.”

“자, 파이팅.”

“파, 파이팅?”

열정이 가득한 성필의 손바닥과 애매한 장하양의 손바닥이 짝 소리를 내며 격돌했다.

“가자!”

성필은 장하양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한구인은 그녀의 감사를 생일 당일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

장하양은 그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들뜬 성필의 뒤를 따랐다.

12월 31일, 한구인 탐색대 결성.

목표, 오늘 안에 한구인에게 선물 전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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