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소녀연맹은 HPT 뮤직 어워드 시상식 무대를 두고 맹연습에 돌입했다.
‘아라베스크’의 백댄서들에게도 시상식 무대란 큰일이었다. 성공적인 무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의 커리어에도 한 줄이 늘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모든 댄서가 늦게나마 매일 모이는 것으로 스케줄을 조정하여, 소녀연맹의 성공적인 무대에 일조하기로 했다.
여느 때와 같은 연습실.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거기, 2열에 세 번째 댄서분.”
조아라는 첫 번째 연습이 끝나자마자 댄서를 한 명 지적했다.
“벌스1 끝나고 들어가는 코러스에서 각도가 안 맞았어요.”
“네?”
조아라는 문제가 되는 동작을 직접 춰보았다.
“고개가 덜 돌아갔어요. 시선도 순간적으로 사선으로 들어갔고요.”
“아…… 네.”
“그리고 2열에 첫 번째 댄서분.”
“네, 네.”
평소에는 나이가 있어서 만나면 반말로 인사했던 댄서들도 갑자기 뒤바뀐 분위기에 절로 경어가 튀어나왔다.
“브리지 들어가기 직전에…….”
조아라는 실수가 눈에 들어왔던 댄서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문제점을 짚어주었다.
이름이 불리는 이들만이 아닌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적되는 게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아라베스크’를 연습할 때야 지도자인 백민정에게 여러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다들 춤이 몸에 익은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숙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댄서들도 그 시점까지는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
조아라의 지적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작은 실수긴 해도, 프로라는 이름을 달고서 실수의 딱지를 붙여선 안 됐다.
“시작할까?”
“네, 쌤.”
백설하의 인도에 따라 다시 안무 연습에 들어갔다. 멤버들은 목을 아끼기 위해 약한 가성으로나마 라이브를 재현했다.
두 번째 연습이 끝나고.
“마지막에 코러스가 반복되는 구간, 다 같이 옆으로 찢어질 때요. 양옆 가장 안쪽 줄에 서 계신 분들.”
조아라는 다시 댄서들을 지적했다.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러자 댄서들의 분위기도 점점 변해갔다.
‘뭐 이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짚어?’
‘아니, 누가 알아본다고?’
‘그냥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야?’
조아라가 문제시하는 파트들은 전부 사소한 것들이었다. 보통 사람이 본다면 문제라고 느낄 수도 없을 수준이다.
하지만 조아라는 그것을 귀신처럼 찾아냈다.
“저기요, 아라 씨.”
연습이 한 시간쯤 다다랐을 무렵, 기어코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 나왔다.
이명철이란 남자 댄서였다. 그는 댄서들의 사이에서 나와 조아라의 앞에 섰다.
군중에 숨어 불만만 토하지 않은 것으로도 그의 기백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백댄서이지만, 댄서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아까부터 자꾸 지적하시는데요,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라고 하는 부분들이 너무 소소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무슨 댄스 대회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돌 군무잖아요. 대회 심사위원들처럼 초 단위로 춤을 뜯어보는 게 아니에요.”
어째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가.
바로, 지적하는 사람이 아이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아라에게 지목될 때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이돌이 아무리 춤을 오래 연습했다 하더라도, 그건 프로로 활동하는 댄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아이돌은 춤과 노래, 연기, 예능감, 팬과의 커뮤니케이션, 이미지 형성 등 수많은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댄서에게는 춤이 전부다.
그런 댄서에게, 비록 무대의 주인공이더라도 감히 무어라 하는 건 힘들다.
“지금 저희 완성도가 굉장히 높아요. 그건 아시죠? 첫 음방 나갔을 때보다 더 나아졌어요.”
조아라는 이명철을 물끄러미 보더니 옆으로 돌아 몇 걸음 걸었다.
다들 그녀의 움직임을 의아하게 보았다. 그녀는 마치 평형봉 위를 걷듯이 일자로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돌이 이렇게 대인원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까, 군무예요. 저는 군무를 평행봉을 걷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조아라는 어쩐지 설렁설렁한 태도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발을 사선으로 하더라도 어떻게든 평행봉을 건널 수는 있어요. 그런데.”
조아라는 발의 방향을 정면으로 두었다. 만약 평행봉이 있었다면 봉과 일자가 되는 포지션이었다.
그 상태로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다.
“봉이 가늘수록 더 조심스럽고 세밀한 동작이 요구돼요. 제가, 저희가 바라는 건 바늘처럼 가는 봉 위를 걷는 거예요.”
조아라는 흉내를 멈추고 이명철을 돌아보았다.
“다들 댄서시잖아요. 지금까지 의식하진 않았지만, 의식하면 할 수 있어요.”
조아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의 백업 댄서들은 70도의 기준에 맞추고 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물은 70도에서 끓지 않는다.
“저는 군무의 아름다움을 ‘아라베스크’로 보여주고 싶어요. 수만 명이 현장에서 지켜보는, 텔레비전으로는 수십만 명이 보는 무대에서요. 완벽한 무대를.”
100도의 기준에 맞춘 무대를 재현하고 싶다.
온갖 사소한 문제점을 제거한 군무를 세상 모두에게 보여줄 것이다. 케이어스를 압도하는 무대를 만들어야 하기에.
누구도 소녀연맹이 피날레란 것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사람들은 충분히 좋게 봐요. 예, ‘사람들’이요.”
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이들이야 무엇을 보여주던 좋아할 것이다.
애초에 아이돌 팬들이 보고 싶은 건 춤 따위가 아니라…….
‘아이돌, 너잖아.’
이명철은 아이돌을, 조아라를 보았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눈빛이었다.
그의 기색을 예민하게 캐치한 조아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댄서분…… 성함이?”
“이명철이요.”
“명철 님. 이해가 잘 안 된단 표정이시네요? 저희는 최고를…….”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 퍼포먼스는 올해 데뷔한 걸그룹치고 상당히 격렬해요. 지금 상태로도 차고 넘치도록 주목을 모을 거예요.”
‘걸그룹치고’란 발언에 조아라는 심기가 뒤틀린 듯 눈매를 세웠다.
일촉즉발과 같은 분위기 속, 이명철의 동료인 유선화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야, 왜 그래. 시간도 얼마 안 남았…….”
“네, 이해를 못 하셨네요.”
조아라는 손가락을 까딱해서 신아름을 불렀다. 그런데 신아름은 가만히 서서 오지 않았다.
“야.”
신아름은 여전히 침묵했다.
“……야, 신아름. 이리 와봐.”
신아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조아라가 주먹을 불끈 쥐곤 부들댔다.
“신아름, 이리 와줄 수 있어?”
그제야 신아름이 조아라의 곁으로 왔다. 그러자 조아라는 간단한 춤을 보여주었다.
리리컬한 무용에서 보일 법한 가늘고 고운 춤선이었다. 팔을 부드럽게 뻗으면서 살랑이는 바람을 연상화한 춤이다.
“내가 한 거 타이밍 맞춰서 똑같이 해.”
“왜.”
“……해주겠니?”
“그래.”
곧 두 사람은 완벽히 일치된 춤을 선보였다. 그것을 본 댄서들은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표했다.
조아라와 신아름은 바라보는 각도,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 팔이 휘는 타이밍 등 모든 게 일치했다.
“눈길을 끌죠. 간단한 동작이라도요. 군무란 건 이런 통일성을 극대화한 춤이에요. 제가 보이고 싶은 건 방금 보여드렸던 통일성의 확장이고요. 다들 놀라셨던 것처럼 공연에 온 사람들도 놀라게 만들 거예요.”
이게 현재 조아라가 댄서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소녀연맹 멤버들도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뮤직 어워드 무대에서 케이어스를 이기고픈 마음으로 가득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멤버들은 이제까지와 같은 수준으로는 케이어스와 붙을 수 없겠단 생각을 가졌다.
이명철은 조아라를 바라보다가 시계로 눈을 돌렸다.
“이제, 시간이 다 됐네요.”
그는 구석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조아라의 말에 빠져 있던 댄서들도 시계를 보곤 급한 티를 냈다.
이명철은 밖으로 나가면서 조아라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아무도, 진짜 아무도, 걸그룹의 춤을 그렇게까진 안 봐요. 아라 씨가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해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어요.”
이명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댄서들은 갑작스레 냉각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을 향해서 따뜻하게 작별 인사를 해주었다.
이명철과 같은 크루에 속한 동료인 유선화는 쭈뼛쭈뼛 소녀연맹에게 다가왔다.
“아…… 아라 씨. 아까 걔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런 애예요. 어딘가 모나고, 삐뚤어지고, 어릴 때부터 춤만 춰서 그런가? 하하하.”
유선화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한 뒤 재빠르게 연습실을 나갔다.
그 순간, 조아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여긴 뮤직 어워드까지 계속 빌리고 있어요! 연습하고 싶어지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저희들도 항상 있어요!”
댄서들은 조아라를 돌아보았다가 어색하게 웃고는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연습실이 조용해지자마자 신아름이 장난기를 가득 담아서 말했다.
“야 조아라. 너도 어릴 때부터 춤만 췄잖아. 그래서 너도 이래? 모나고 삐뚤어지고?”
조아라가 손을 들자 신아름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그 손은 신아름에게로 향하는 게 아니었다.
“푸흐…….”
조아라는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아라야, 얘들아, 일단 쉬자.”
백설하의 말에 따라 멤버들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까의 연습을 떠올리면서 개선점을 찾거나 혹은 SNS를 확인하는 등, 각각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했다.
뮤직 어워드 무대는 고작 며칠 뒤다.
“조아라. 너 근데 화를 안 내네? 네 성격이면 그 댄서분 멱살 잡고 달려들었어도 안 이상하지 않아?”
“이해해.”
“뭘? 그 이명철인가 하는 댄서분?”
“어. 아이돌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
“뭔데. 또 아이돌 비하하는 거야? 넌 그냥 중국 발레단 같은 데로 가라. 아무 데나 가서 댄서로 살아.”
“비하 아니거든? 그냥, 옛날에 난 그랬어서. 그 사람도 비슷했구나 싶어.”
“뭔…….”
그때 연습실 문이 활짝 열렸다.
“얘들아 간식 사 왔어!”
성필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 여러 가지가 담긴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박 이사님, 지금 11시 넘었는데…….”
“응? 그냥 너희들 보고 싶어서 왔어. 매일 늦게 연습하는데 나 혼자 발 뻗고 자는 것도 미안하잖아. 하양아, 나 잘했지?”
“아하하.”
“미안. 기분 나빴구나.”
“아뇨. 저도 이사님이랑 같은 마음이었어요.”
“아, 보고 싶었단 뜻?”
“아니요. 이사님 혼자 발 뻗고 주무시는 거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끓어서 마음이 불편했거든요.”
“…….”
“계속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
“……응.”
성필은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다시 방글방글 웃으면서 멤버들에게 요깃거리와 음료를 나누어주었다.
그의 미소를 보면서 리카가 백설하에게 소곤댔다.
“요즘 이사님 괴기하게 친절하시지 않나요?”
“괴, 괴기하다니…….”
“정강이를 차도 용서해주시면서 웃을 거 같다구요.”
“우리를 격려해주시는 거겠…….”
리카가 성필의 정강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리카 뭐 하는 거야아아아아아?!”
백설하가 기겁하면서 리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성필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리카가 잠을 푹 못 자서 정신이 나갔어요! 나쁜 의도는 없을 거예요 아마도!”
“쌤 약하게 쳤다구요! 그리고 친구끼리 우정을 다지는 제스처예요! 남자는 다들 이렇게 친밀감을 높인다고 들었…….”
성필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됐어.”
“정말 죄송, 아니! 삐치시면 어떡하나요! 이사님도 어제 아타시(저)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꾹 눌렀지 않나요! 내로남불이에요!”
“데, 도시로토(그래서 어쩌라고)?”
“히도이이(너무해애)…….”
“뭐, 잘하면 용서해줄 수도 있어.”
“뭘 하면 되나요!”
“마츠다 세이코 노래 불러줘.”
“박 이사님 사실 일본인이죠?!”
잠시 후, 멤버들은 80년대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리카를 보곤 얼이 빠졌다.
“아나타오 아우타비니(당신을 만날 때마다), 스베테오 와스레테시마우노오(모든 걸 잊어버리는 거야아).”
“최고다 리카쨩!”
“진짜 환장하겠네.”
조아라는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리카의 무대를 즐겁게 감상했다.
수월하게 무대를 마친 리카는 콘서트장의 솔리스트처럼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성필을 붙잡고 중앙에 세웠다.
“이제 이사님 차례예요!”
“하아.”
“앗, 빠지시면 안 돼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안 빠져. 보고 반하지나 마라.”
춤을 출 준비를 하던 성필은 조아라를 보더니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노래 부를게.”
“뭐 부를 건가요?”
“소녀연맹의 ‘아니’.”
약 3분 후.
“와, 아저씨.”
조아라가 질색했다.
“유우토랑 같이 노래방 간 뒤로 전혀 성장을 안 했네.”
짝짝짝짝.
장하양만이 연신 환호를 보냈다.
“언니 그러지 마요. 아저씨 버릇 나빠져요.”
“잘 부르셨잖아.”
“뭔, 색안경을 얼마나 낀 거예요. 근데 아저씨 집에 안 가봐도 돼요? 곧 12시인데.”
“너네 연습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요즘 수면 패턴 박살 나서 집에 가도 잠을 못 자거든.”
“그럼 뭐, 있으세요. 아까부터 배고팠는데 올 거면 빨리 오지. 이 시간까지 뭐 하다 왔어요?”
“일하다 왔지.”
그리 말하는 성필의 표정은 어딘가가 굳어 있었다. 다들 그의 이상을 눈치챘다.
가장 먼저 치고 들어온 건 신아름이었다.
“흠, 연말 밤늦게 만날 사람이라면…….”
“일하다 왔다고 했잖아.”
“여친? 썸?”
“손나(그런)! 우리는 늦게까지 죽도록 일하고 있는데 이사님만 재미 보고 너무해요! 같이 괴로워해 주세요!”
“심보 한번 고약하네.”
“얘, 얘들아. 이사님이 곤란해하시잖아.”
백설하는 성필을 몰아붙이는 멤버들을 제지하려 했다.
“사생활을 자꾸 여쭈는 건…….”
“리카 말이 맞아요.”
입구에서 장하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어느새 문을 등으로 막고 있었다.
“저희만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건 불공평해요.”
“고통 속에 몸부림쳤어?”
“저희랑 영원히 괴로워해 주세요.”
“하양아, 옛날에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잖아.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은 거야……?”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요. 고통의 절반은 제가 받아 갈게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데.
“업계 사람 만나러 갔었어. 내 처지에 무슨 연애야.”
“음…….”
“이제 나 행복해도 돼?”
“아뇨.”
“어?”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잖아요. 오늘은 저희랑 계속 괴로워하면서 고통을 나눠요.”
이젠 집에도 못 가게 생겼다.
“근데 너희 정말 언제 갈 거야? 나는 상관없긴 한데.”
“언제냐뇨.”
조아라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요.”
“그렇구나…….”
“반응 왤캐 떨떠름해요.”
조아라는 성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필이 손을 잡자, 그녀가 순식간에 힘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케이어스 때려눕히는 거 아저씨 소원이잖아요. 그거 이뤄줄 정도가 되면 갈게요.”
“……응, 고마워.”
* * *
“저희 이만 가볼게요.”
새벽 2시.
백설하가 지친 기색을 띠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서 조아라를 제외한 멤버들도 슬슬 몸을 일으켰다.
“쌤도 늙었네요. 우리 데뷔 전에 매일 새벽 3, 4시까지 연습하던 열정 어디 갔어요?”
갑자기 연습실에 한기가 감돌았다. 겨울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백설하는 이름에 걸맞은 싸늘함으로 조아라를 응시했다. 그러자 당황한 조아라가 시선을 회피하면서 말했다.
“아, 아니이, 장난이죠 쌤. 20대에 늙고 젊고가 어딨어요? 다 비슷비슷한데…….”
콩.
장하양이 백설하를 대신하여 조아라의 머리에 약한 꿀밤을 먹였다.
“아라야, 타인이 기분 나빠할 말은 하면 안 되지.”
“죄송해요…….”
조아라는 맞은 부위를 문지르면서 울상을 지었다. 동시에 장하양에게 감사를 표했다.
만약 백설하와의 사이에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면, 조아라는 그룹 결성 최초로 리더에게 공격당한 멤버란 타이틀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잘 가.”
조아라가 연습을 마칠 때까지 같이 기다리기로 한 성필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나머지 네 멤버들이 당황했다.
“박 이사님 같이 안 가세요……?”
“내가? 나 아라 연습 기다린다고 했잖아.”
“어, 그게, 여기 오신 게 저희 데려다주려고 오셨댔잖아요.”
“……아.”
성필은 지갑에서 2만 원을 꺼내 백설하에게 넘겼다.
“나 술 먹고 왔어. 생각해 보니 여기 올 때도 대리 불러서 왔네. 취해서 아무 말이나 했나 봐. 하하!”
“뭐예요 아저씨. 그럼 술 마신 아저씨랑 나만 연습실에 남아? 좀 수상한데.”
“나도 가야겠다. 얘들아 같이 택시 타고 가자.”
조아라는 입구로 우직하게 걸어가는 성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져서 겨우 나가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재밌겠다고 여긴 리카가 성필에게 달라붙었다.
성필은 루돌프처럼 두 아이를 끌고 연습실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아, 속 아파. 술 올라오는 거 같아…….”
“운동하셔서 그래요! 혈액순환이 빨라지면 더 빨리 취해요!”
조아라를 제외한 멤버들은 연습실을 나갔다.
사람이 20명 가로로 서도 공간이 남을 법한 커다란 연습실에 남은 건 두 남녀뿐이었다.
“아저씨 나 연습 언제 마칠 줄 알고 남는댔어요.”
“몰라. 난 구석에서 자고 있을 테니까 연습 끝나면 불러라.”
“그럴 거면 가요!”
새벽 2시가 넘었음에도 조아라는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울을 보면서 동작의 디테일을 점검하는 그녀의 눈에는 귀기(鬼氣)마저 엿보였다.
구석에 찌그러져서 조아라의 연습을 바라보는 성필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이토록 무언가에 열중하는 건 오랜만에 본다.
“아라야.”
성필은 몇 분 전부터 바닥만 관찰하고 있는 조아라를 불렀다.
“왜요.”
“컨디션 조절도 필요하지 않을까? 뮤직 어워드까지 매일 이렇게 할 거야?”
“잠은 죽어서 자도 돼요.”
“기특하다.”
“어허!”
“어, 왜?”
“나 애처럼 대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새 까먹었어요?”
“기특해서 기특하다고 한 거야. 근데 뭐 하는 거야?”
조아라는 이제 아예 무릎을 꿇고 바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녀는 바닥과 거울을 자꾸만 번갈아 보았다.
“댄서분들 서는 위치 보고 있어요.”
“왜?”
“다음에 오셨을 때 더 정확하게 알려드리려고요. 오늘 연습 영상도 보니까, 위치가 미묘하게 안 맞는 곳들 있었어요.”
성필은 저 ‘미묘하다’는 말이 참으로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안이상 매니저에게도 전해 들었지만, 조아라가 태클을 걸고넘어지는 부분은 모두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서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는 세세한 동작들 말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해야죠. 우리가 케이어스보다 떨어지면 인민이들이 고생할 거예요.”
성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아라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HPT 뮤직 어워드가 방영된 후, 아이돌 팬 사이에서는 특혜 논란이 불 수도 있다.
어째서 성적이 훨씬 높은 케이어스가 1부의 피날레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다가 홍규헌과 홍연헌의 관계를 알아내는 사람까지 나오겠지.
절대 소녀연맹에게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압도적이지 못하면 인민이들한테도 미안해요. 그런 일은 없어야죠.”
행복하려고 우리를 좋아해주는 건데 속상한 일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 말을 듣고 성필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할 수만 있다면 조아라에게 뽀뽀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아저씨도 보고 싶잖아요?”
조아라가 바닥에서 무릎을 떼고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시원한 미소를 성필에게 던졌다.
“우리가 케이어스 묵사발 내는 거요.”
성필의 감동이 더욱 진해졌다.
조아라는 발언이 과격하단 것을 제외하곤, 혹시 성필 자신을 꼬시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진 말만 하고 있다.
“작년에 우리가 상 못 받아서 좀 그랬죠? 이번에도 뭐…… 케이어스 때문에 여러모로 놓치는 상이 많겠지만. 적어도 무대 퀄리티는 우리가 더 높을 거예요. 아저씨는 박수 칠 준비만 하고 있어요.”
“와…….”
“감동했어요?”
“왜 매일 리카가 너한테 붙어서 캇코이(멋져)라고 하는지 알겠다.”
멋지고, 고맙다.
팬과 소녀연맹, 회사, 성필을 위해서 새벽 연습도 마다치 않고 하다니.
“내가 도울 거 없어?”
“뭐가 있어요. 걍 옆에서 박수나 쳐줘요.”
라고 했던 조아라는 10분 뒤, 성필에게 부탁을 하나 해왔다.
“편의점에 가서 마스킹 테이프 좀 사 와줄 수 있어요?”
“테이프는 왜?”
“댄서분들 위치 표시하게요. 이왕이면 색깔 다르게요. 마카랑 같이 사 오면 더 좋고요.”
“위치?”
설마, 이 넓은 곳에 전부 마스킹 테이프를 붙일 생각일까?
영상으로 보면서 작업해도, 영상과 현실은 원근감이 달라서 하기에 쉽지 않을 텐데.
“대강만 표시하려고요. 신아름이 있었으면 할 수도 있겠는데……. 뭐, 없으니까 내일 하죠.”
성필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새벽인데도 복도에 불이 켜진 것을 보니, 이 빌딩에는 밤에도 일이 있는 가게들이 꽤 입점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성필은 정신이 점차 노곤해졌다. 술을 마신 데다 늦게까지 잠을 못 자고 있으니 당연했다.
‘아라가 하려는 건 그건가?’
성필도 전생에서 본 적이 있다.
무대에 서는 모든 댄서의 포지션을 순서에 따라 마스킹 테이프로 표시하는 것이다.
안무가인 조아라는 그 테이프와 조금이라도 위치가 다르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었다.
‘댄서들이 뒤에서 아라 뒷담을 엄청 깠었지.’
조아라 자신이 맡은 이상 자그마한 실수나 부족함도 허용할 수 없다고 했던가.
불만을 많이 샀지만, 그 결과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때의 아라도 백업 댄서들의 도움이 있고서 할 수 있는 작업이었는데.’
직접 사람이 서서 포지션을 점검하지 않고서야, 동선을 따라 바닥에 표시한단 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아라도 아름이가 있었으면 한단 거였고. 아름이는 댄서분들의 위치와 동작을 다 외웠을 테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성필의 몸을 거칠게 훑었다.
‘보니까 한 시간 전후해서 가겠네. 아라도 대강 밑작업만 해두고…….’
“팀장님.”
노곤하게 감겨 있던 성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름아?”
연습실을 나갔을 때의 복장 그대로인 신아름이었다. 시간을 고려하면, 그녀는 숙소로 가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신아름이 고개를 빼서 성필의 뒤를 살폈다.
“뭐예요. 팀장님만 가요?”
“어, 아니. 아라가 부탁할 거 있대서 사러 가는 길이야.”
“지가 뭔데 팀장님을 맘대로 부려. 어이가 없네. 걔 말 듣지 말고 걍 다시 올라가요.”
“아름이 넌 왜 다시 왔어?”
물건을 놔두고 왔나?
“조아라가 불러서요.”
“응?”
“아니, 택시 타고 가고 있는데 톡으로 안 피곤하면 오라는 거예요. 별 말도 안 되는 소릴…….”
“싫으면…… 왜 왔어?”
아까부터 계속 짜증에 차 있는 것을 보니 신아름도 기분이 썩 좋진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착실하게 연습실로 온 것이다.
성필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왜 왔냐’는 질문을 들은 신아름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왜 왔냐뇨. 조아라가 불러서 왔다니까요?”
“그게 끝?”
“이유가 더 필요해요?”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성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왔다. 이건 마치 소설에서나 보던 우정 같은 게 아닌가?
세상 어떤 친구가 이런 새벽에 ‘와라’라는 문자 하나로 오고 갈까? 이성 간의 관계라면 몰라도, 어지간한 신뢰가 없고서는 있을 수 없다.
“아름아 너 아라 좋아해?”
“뭐래는 거예요. 팀장님 리카랑 똑같은 소리 하네. 리카랑 오래 놀더니 비슷해졌단 게 사실이네요.”
“친구로서 말야.”
“친구 아녜요. 비즈니스 파트너지.”
“아, 그래…….”
“팀장님 살 거 있다면서요. 언제까지 엘리베이터 안에 있으려구요.”
성필과 신아름은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연습실로 돌아왔다.
조아라는 신아름을 보자마자.
“아이잉, 아름아앙, 와줘서 고마워요오.”
“아 미쳤냐 또 왜 이래?!”
“고마워서 그러지잉.”
“꺼져!”
“그래.”
조아라는 성필이 사 온 물건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테이프와 마카를 신아름의 손에 쥐여주었다.
“뭔데. 뭐 하라고?”
“우리의 천재 신아름 씨.”
“뭐.”
“바닥에 댄서분들 포지션 찍어줘. 한 명 한 명, 동선 하나 빼지 않고 순서대로. 정확한 위치에.”
“미친년.”
조아라는 떠나려는 신아름의 허리를 껴안고 또 애교를 부렸다.
“아이잉 아름아 왜 그래앵. 내가 같이할 테니까 도와주라아.”
“아 좀 꺼져어!”
리카가 있었다면 ‘아라쨩 너무해! 왜 아름이한테만 애교부려주는 거야! 나도 해줘!’라고 했을 법한 광경이었다.
실제로도 ‘롱 포’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비즈니스 파트너의 모습일까.
“팀장님.”
거의 바닥에 달라붙어 테이프를 붙이던 도중, 신아름이 목소리를 낮춰서 성필을 불렀다.
“응.”
“무슨 일 없었죠?”
“무슨 일?”
“저 팀장님 걱정돼서 온 거예요.”
“걱정은 무슨 걱정.”
신아름이 뒤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백댄서들이 섰던 위치를 점검하는 조아라가 있었다.
“뭐, 아라가 나 부려 먹고 그럴까 봐? 부려 먹으면 어때서 그래.”
“팀장님 술 먹었잖아요.”
“야, 내가 술을 사발로 먹어도…….”
“내가 본 게 있잖아요.”
“석세스 엔터 얘기는 하지 말아주라…….”
“그거 말고도, 우리 팬미팅 마치고 회식 때…….”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해!”
“팀장님 취하면 가드 너무 낮아져요. 그러다가…….”
신아름은 말을 이으려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리고 원래 하려던 이야기 대신 다른 것을 내놓았다.
“앨범 활동 기간인데 조아라한테 배달 음식 사주거나 하면 큰일이잖아요. 그리고 조아라 쟤가 갑자기 홱 돌아서 술 마시자고 하면…….”
“야 신아름. 여기도 와서 위치 봐줘.”
“야 조아라! 사람 이름에 야, 야, 야 붙이지 말랬잖아!”
신아름은 투덜대면서도 조아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자리를 옮겼다.
성필은 옥신각신하는 둘을 바라보면서 방금 신아름이 꺼냈던 말을 곱씹었다.
‘아름이가 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신아름과 술잔을 나눠본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신아름은 취한 성필의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돼서 왔단 말은 변명일 것이다.
‘내가 걱정됐다고? 거짓말하긴.’
조아라를 도와주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좋을 텐데. 그녀를 좋아한단 사실을 밝히는 게 그리도 부끄러운 것일까.
“아니, 걸음마다 테이프를 붙인단 게 말이 돼? 그냥 포지션 호흡마다 따로 해.”
“안 돼. 완벽해야 한다고 했잖아.”
“진짜 조아라 너는…….”
신아름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이거 효과 없기만 해봐라.”
“어차피 해줄 거면서 튕기긴.”
“진짜 죽여버릴까.”
세 사람은 아침 해가 뜨도록 작업을 이어나갔다. 잠도 거른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꾸준히 바닥을 테이프로 뒤덮었다.
케이어스를 압도하는 무대란 목표 하나만을 가슴 속에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