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33화 (233/760)

233화

“아, 머리 깨질 거 같아…….”

신아름은 조아라를 한심하단 투로 바라보았다.

요즘 조아라는 컴백 직전의 긴장감을 어느 정도 덜어냈는지, 음방이 없는 날이면 자유롭게 술을 마셨다.

‘어제도 뭔 맥주를 세 캔이나 마시고.’

신아름의 시선을 느낀 조아라가 곧바로 도끼눈을 떴다.

“뭐.”

“아냐 아무것도. 맥주 세 캔 먹고 기절한 애는 뭔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봤어.”

“어젠 공복에 먹어서 취했던 거거든? 그리고 기억은 멀쩡해.”

“아유, 그러셨어요? 너 우리 컴백 첫째 주에 술 먹고 기절했던 건 기억하세요?”

“계속 말하는데, 나 기억은 멀쩡…….”

“설하 쌤이 말하지 말래서 안 했는데, 너 한 이사님한테 전화했던 건 아냐?”

“……내가? 내, 내가 뭐라고 했는데?”

“걍 개소리 지껄이니까 한 이사님이 알아서 끊더라.”

조아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아직 취해서 흑역사를 만든 적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 번밖에 없다.

아무도 모르는 흑역사이지만 조아라의 기억 깊은 곳에는 잘 저장되어 있다.

덕분에 가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걷어차고 싶은 갈망을 느끼곤 한다. 만약 항상 리카가 옆에서 자지 않았다면, 조아라의 이불은 진작에 넝마가 되었을 것이다.

“또 팀장님한테도 했어.”

“아저씨한테?!”

“어. 근데 팀장님이 괴성 지르더니 끊더라.”

“……괴성?”

대체 성필은 뭘까.

보통 술 취한 사람이 전화 오면 괴성을 지르면서 전화를 끊지는 않을 텐데.

‘아, 아저씨가 뭘 아나?’

조아라는 두려움에 가득 찬 채 연습실로 들어왔다.

가로 엔터에서 외부에 따로 잡아준 대형 연습실. 그 안에는 거의 30명에 이르는 댄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백설하가 대표로 인사하면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오는 멤버들도 연신 댄서들에게 허리를 굽히면서 자리를 찾았다.

그녀들은 컴백하고도 일주일에 2번, 하루 1시간 30분 정도씩 백댄서들과 연습했다.

30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한 자리 같은 시간에 모으기란 쉽지 않기에, 연습 시간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안무 영상을 찍을 겁니다.”

회사에서 비디오카메라를 챙겨온 안이상이 그것을 설치하면서 설명을 이었다.

“아이튜브에 올릴 거예요. 이번에는 안무에 여유를 남겨두지 말고 실전처럼 부탁드릴게요.”

‘아라베스크’의 안무는 격렬하다.

1시간 30분의 연습이라도, 매번 전력을 다해서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포지션을 잡거나 스탭을 점검하는 등, 안무의 전체적인 부분을 숙련하는 데 중점을 뒀다.

“자아, 시작.”

곧 연습실 내부는 수십 명의 인원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채워졌다.

소녀연맹을 포함한 백댄서들은 모두 워커를 신고 있었기에, 다 같이 스탭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소리는 귀청이 떨릴 정도였다.

조아라는 춤을 맞추면서 생각했다.

‘방금 거기, 발소리가 어긋나는 게 몇 개 있었어.’

소리로만 찾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앞의 전면 거울로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댄서마저 식별해낼 수 있었다.

물론 보통 사람은 인식하지 못할 차이였으나, 조아라는 박자를 수십 개로 쪼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박자와 타이밍에 민감하기에 작은 실수라도 그저 넘겨보는 건 힘들었다.

첫 번째 녹화가 끝나고 영상을 돌려보았다.

“아라야, 어때?”

매니저 안이상의 질문에 다른 멤버들의 눈도 조아라에게로 향했다.

“음, 한 번 더 찍어 봐요.”

그 뒤로도 적당한 휴식 간격을 두며 두 번의 녹화를 거쳤다.

조아라는 마지막으로 촬영한 버전을 보며,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연습할 때부터 느꼈지만, 안 맞네.’

소녀연맹이 백댄서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기에 이런 불만을 가지는 것도 처음이다.

‘완벽하게 합이 맞지 않아.’

소녀연맹 멤버들은 컴백 전에 매일 10시간을 아득히 넘도록 함께 연습한다.

그래서 컴백할 정도가 되면 진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싶을 정도의 통일성을 자랑한다.

‘그건 그냥 연습을 오래 해서 그런 게 아니야.’

멤버들은 3년이 이르는 시간을 함께 보아왔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발소리나 호흡만으로 서로 합을 맞출 수 있는 경지다.

댄스 실력이 부족한 장하양마저도,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조아라의 페이스에는 따라올 수가 있다.

‘그런데…….’

백댄서들은 다르다.

저들은 ‘아라베스크’를 위해 급조해서 모인 이들이다. 저들 중에선 출신 학원이나 크루가 다른 경우가 많다.

애초에 접점이 거의 없는 30명을 데리고 완벽히 합을 맞춘단 것 자체가 꿈같은 얘기다.

그러니까.

“네, 이제 됐어요. 이거 아이튜브에 올리면 되겠네요.”

조아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이상이 반색하면서 카메라가 있는 위치로 돌아갔다.

이후로는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연습이 이어졌다.

“얘들아 수고했어!”

“잘 가.”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볼게요.”

“다음에 봬요.”

30명의 댄서가 짐을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다들 말투도, 목소리도, 어조도 달랐다. 소녀연맹을 대하는 거리감과 친밀감도 모두 제각각인 것이다.

“우리도 가자.”

멤버들은 안이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로 엔터로 향했다.

가는 와중, 조아라는 창문을 보면서 아까의 무대를 계속 떠올렸다.

‘지금도 좋아. 좋지만, 더 좋아질 수도 있을 텐데.’

군무가 갖는 장점은 규모와 기세다.

수십 명이 동시에 같은 동작을 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볼거리이다.

춤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에서 군무를 펼쳐도 여기저기서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런데 관객이 춤에, 아이돌에 관심이 있기까지 하다? 군무의 효과는 더욱 클 것이다.

조아라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이 정도로 충분해.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는…….’

“리카, 어제 조아라 개웃기지 않았냐?”

“나니가(뭐가)? 너무 많아서 뭔지 모르겠어.”

“그 있잖아. 하양 언니가 안아서 침대에 옮겨주고 얘가 한 말. ‘언니이 샤량흐에……’.”

조아라가 신아름의 목을 졸랐다.

“아라쨩 그만해! 싸우는 건 용서 못 해!”

리카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신아름의 목을 살폈다. 조아라가 조른 목에는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애초에 진심도 아니고 장난삼아 붙잡은 데 불과했고, 약한 압박만 전해져 조금 뒤면 사라질 자국이었다.

“앗!”

“왜? 목에 자국 심하게 남았어?”

“아름이 목에 초커 찬 거 같아. 사진으로 찍어두면 안 돼?”

“기분 나빠.”

“에엑?!”

“리카 넌 사람 목에 난 자국을 그렇게 봐? 너 변태야?”

“에, 에에, 아닌데, 아닌데에…….”

왠지 모르지만, 리카는 평소에 당황할 때보다 더 당황한 티를 냈다.

* * *

성필은 차창에 팔꿈치를 괴고 한 손으로만 핸들을 잡았다. 아니, 이제는 핸들을 잡지도 않고 시트에 등을 편히 기댔다.

“죄송해요.”

조수석의 장하양이 사과를 전했다. 성필은 그녀의 우울한 어조에 깜짝 놀라면서 쾌활히 답했다.

“아니야. 하양이가 왜 미안해. 그냥…….”

길이 너무 막힌다.

전후좌우 전부 차가 꽉꽉 막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차와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냥……?”

“그냥, 음, 생각보다 훨씬 차가 더 안 빠지네.”

성필은 장하양을 편히 해주기 위해 하하 웃었다. 그녀도 좋은 마음으로 나온 걸 텐데 괜히 가슴에 짐만 지워줬나 싶다.

‘나도 참 신경이 없다.’

도로가 막힌다고 지루한 티나 내다니.

오늘, 장하양은 한구인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간다. 도움을 주기 위해 성필이 동행했다.

처음에는 성필도 거절했다.

이제 장하양은 길거리를 거닐기만 해도 인파가 모일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남자와, 비록 그게 회사 임원인 성필일지라도 함께 다니는 게 목격되기라도 했다간 언론에서 신나게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 설명에 납득하지 않았다.

‘박 이사님, 도와주시기로 했잖아요.’

그 말엔 성필도 답할 거리가 없었다.

장하양이 성필에게 생일 선물을 주면서 했던 약속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장하양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털모자에 선글라스, 마스크, 롱패딩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변장이었다.

이 정도라면 가로수길을 걸어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듯했다.

“제가 노래라도 불러드릴까요?”

“아냐 아냐! 하양이 노래 들으려면 한 1,000만 원은 내야 할걸? 공짜로 들을 순 없지.”

성필은 자연스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랐다.

그렇다. 현재 장하양, 소녀연맹의 몸값은 그야말로 천의 단위를 넘어섰을 것이다. 그야 공중파 음방에서 1위를 한 건 물론 케이블 음방 3관왕을 달성했으니까.

내년 축제철이 되면 소녀연맹의 공연료는 3,000만 원 이상으로 책정될 게 틀림없다.

“우리 스타님의 노래를 공짜로 들으면 미안하지.”

“항상 연습실에서 공짜로 들으시잖아요.”

“그러네. 내가 월급을 받을 게 아니라 돈을 주고 회사에 다녀야겠네.”

“아하하.”

분위기가 아까보다 풀어졌음에도 장하양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 무릎 위에 손을 공손히 모아두었다.

원래는 성필도 차를 안 가지고 오려고 했다. 목적지인 백화점 앞 역에서 보기로 했는데, 장하양이 중간 지점에서 만나 같이 가길 바랐다.

심지어 성필이 교통체증이 심할 거라고 했는데도 차가 편하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사람들 눈에 띌 수도 있어요.’

그런 논리였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휴일에는 아이돌도 편히 쉬고 싶은 법이다.

성필도 장장 몇 시간에 이를 차에서의 대기 시간을 감내하고, 장하양의 바람을 이루어주려 차를 몰고 왔다.

“아, 드디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성필이 앓는 소리를 냈다.

행운이었다. 오늘 같은 날에 주차장에 자리가 있다니.

둘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면서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이사님 선물로 뭐가 좋을까요?”

“내가 다 알아봤지. 네가 나한테 선물 주고 난 다음 날 바로 한 이사님 떠봤거든.”

성필은 그때 한구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재현해주었다.

‘한 이사님, 요즘 넥타이 바리에이션이 간소해지셨네요.’

‘아, 요즘 넥타이를 다르게 코디하는 데 그다지 마음이 쓰이질 않더군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점점 보수적이 되는 거 같습니다.’

‘지금 정치 성향 드러내신 거예요?’

‘아, 아닙니다!’

“아하하, 정말 한 이사님 같으세요.”

“내가 성대모사 좀 하지?”

성필은 만약 스탠딩 코미디 무대에 오른다면, 한구인의 경직된 말투를 거의 100% 재현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한 이사님이 넥타이를 가지고 싶은 거 맞나요? 방금 대화대로면…….”

“더 들어봐.”

‘넥타이란 게 마음먹고 사기가 힘든 종류의 의류입니다. 제가 젊을 때부터 정장도 꾸준히 구매했던 터라 종류도 많습니다.’

‘항상 정장만 입는 폐해네요. 유행에 맞게 옷을 살 필요가 없어서 복장이 단일화되는…….’

‘저, 제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한 달 동안 매번 다른 정장으로 입었는데…….’

‘정장이 30벌 넘게 있으세요?!’

‘그렇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복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취향도 굳어갔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박 이사님이 제 넥타이가 비슷한 걸 알아챌 정도까지 가다니, 솔직히 충격적입니다.’

‘충격적일 정도예요……?’

‘기회가 되면 쇼핑을 해야겠습니다.’

“라고 말한 한 이사님은, 여전히 넥타이 바리에이션이 별로 안 바뀌고 있어.”

“한 이사님을 굉장히 자세히 보고 계시네요.”

“어? 아니, 매일 8시간 이상 같이 있잖아. 보일 수밖에 없지.”

“음…….”

“이상한 드립 치지 마. 뭐, 가격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넥타이로 확정된 건가요?”

“그렇다니까. 나 한 번 믿어봐.”

“믿을게요.”

성필은 추천하는 브랜드의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구석에 넥타이를 가지런히 달아둔 코너가 있었다.

뒤에서 공손히 대기하는 직원에겐 눈길을 주지 않고, 둘이서만 신중하게 넥타이를 보았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거 없으면 다른 데로 가자.”

“가격표가 없네요.”

“30만 원이야.”

“……?!”

장하양은 목소리도 못 내고 입만 뻐끔거렸다. 이런 작은 천 조각이 30만 원이나 한다고?

성필이 선물을 넥타이로 확정했을 때, 장하양은 ‘너무 싼 선물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계절에 맞는 카디건이나 코트 정도는 사야 성의를 보일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 그 돈이면 다른 옷을 사겠어요…….”

“그러니까 기쁜 거지. 큰돈을 써서 사기 힘든 의류니까 비싼 걸 받으면 더 좋아.”

“아!”

장하양은 무언가 깨달은 듯 넥타이를 더 자세히 살폈다.

“이거 어떨까요? 한 이사님한테 어울릴 거 같아요.”

“슬림 타이네.”

“종류가 따로 있나요?”

“그냥 폭이 넓고 좁은 정도야.”

“남자들은 어느 쪽을 선호하나요?”

“젊은 사람들은 캐주얼 수트에 슬림을 선호하지. 한 이사님은 대부분 클래식 수트를 입으시니까 클래식 넥타이를 사야 어울릴 거야. 여기, 넓은 쪽. 하지만 하양이의 안목이 중요하니까, 그것도 괜찮아.”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슬림 넥타이를 고를 수는 없다. 장하양은 클래식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너무 넓은 거 같아요.”

“젊은이가 보기엔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

“박 이사님도 젊으세요.”

“아냐. 난 아저씨인 걸 뭐…….”

“음.”

“부정 안 하는 게 더 열받네.”

“아하하.”

이후, 성필은 정장 관련 지식을 어필했다.

장하양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튜브에서 보았던 어느 영상이 떠올랐다.

‘남자가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한다면, 관심이 없어도 대단해! 신기해요! 같이 맞장구를 잘 쳐주세요.’

장하양은 곧장 실행에 옮겼다.

“와, 잘 아시네요. 대단해요. 패션에 관심이 많으세요?”

“아니, 이건…….”

갑자기 성필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했다. 아주 미묘한 차이이지만, 장하양은 성필의 기분 변화를 민감하게 느꼈다.

성필은 무언가 씁쓸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추억이라고 불릴 만큼 소중한 기억이지만, 어딘가 쓴맛이 감도는 느낌.

“정장에 관해선, 음, 그냥 알게 됐어.”

장하양은 괜히 더 묻지 않았다. 들어도 좋은 이야기는 아닐 듯했기 때문이다.

전 여자친구나 그런 거겠지. 딱히 듣고 싶진 않다.

그녀는 성필의 조언을 듣고 두 개의 넥타이를 골랐다. 슬림과 클래식 하나씩이었다.

“두 개나?”

“네. 이전에 박 이사님이랑 한 이사님한테 받은 돈이니까요. 안 아까워요.”

“아깝다는 게 아니라…….”

이전에, 성필과 한구인은 가진 돈을 모아 장하양에게 300만 원을 주었었다. 장하양이 부모와의 연을 끊겠다는 생각으로 그 돈을 송금했었기 때문이다.

장하양은 그 돈을 성필과 한구인의 선물 비용으로 지출했다.

“대단하네, 하양이는.”

원래 돈이라는 게 손에 쥐면 남에게 쓰기가 아까운 법이다.

남에게 베풀고 갚는 법을 어린 나이에 배우기란 어렵다. 하지만 장하양은 수백이나 되는 돈을, 비록 성필과 한구인에게 받았던 돈이라 해도, 아낌없이 그들을 위해 쓴 것이다.

“아하하, 아니에요. 두 분께서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한 이사님도 기뻐하실 거야. 언제 드릴 거야?”

“한 이사님 생신 때요. 12월 31일에 직접 드릴 거예요.”

“그렇구나.”

장하양이 성필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래?”

“오늘 목걸이 하셨어요?”

성필은 터틀넥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걸이를 할 이유가 없는 복장이다.

“응, 여기.”

하지만 성필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예상외의 전개에 장하양이 놀랐다.

“아, 정말 하고 계셨네요.”

“했을 줄 알고 물어본 거 아니야?”

“아뇨. 안 하셨으면 곤란하실 때까지 놀리려고 했어요. 아쉽네요.”

“아하하.”

“……저 따라하신 거예요?”

“아하하.”

장하양이 픽 웃었다. 그리고 성필의 성대모사로 장난을 되받아치려던 때, 그녀의 시선이 벽면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벽면의 전광판이었다.

가로로 18m가 넘는 길이의 대형 전광판에 진소유의 얼굴이 떠 있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소유야’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어서, 생일 축하 광고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이 소유 언니 생일이었네요.”

“아냐.”

“네?”

“어제가 생일이야.”

“……?”

“그냥 며칠 더 걸어둔 거 같은데?”

“어제가 생일인 걸 어떻게 아세요?”

“어?”

“생일까지…… 케이어스 멤버들 생일까지 외우시는 거예요……?”

“아, 그게 아니라, 어제 기사를 봐서…….”

“아라 생일 말해보세요.”

만약 소녀연맹 멤버들의 생일을 모르면서 케이어스 멤버의 생일을 외우고 있다면, 장하양은 진심으로 성필에게 화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필은 질문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답을 토해냈다.

“6월 19일!”

“아시네요.”

“알지 당연히! 내가 설마 케이어스 생일만 알고 너희를 모르겠어? 그럼 내가 진짜 나쁜 놈 되잖아…….”

장하양은 성필에게서 힐난의 눈빛을 거두고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케이어스는 이런 것도 올라오네요. 새삼 차이가 느껴져요.”

“하양이도 올려줄까?”

“아하하, 이사님 자비로요?”

왜 인민이들은 이런 것을 해주지 않느냐, 라며 아쉬운 게 아니다.

이런 홍보가 올라온다는 건 케이어스 팬덤의 크기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겠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팬의 수가 많을수록 이런 팬심 광고가 많아지는 법이다.

“생일에 원하면 올려줄게.”

“괜찮아요.”

장하양은 성필과 대화하면서도 시선은 전광판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네요.”

“응?”

“시상식 무대가 곧인데, 이렇게 행복하게 보낼 순 없어요.”

“행복해?”

“아니, 놀면서 보낼 수…… 아하하, 네.”

장하양은 말실수를 포장하길 그만두었다.

“행복하죠. 이사님이랑, 가족이랑 있잖아요. 저는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때 가족이랑 보내는 게 항상 소원이었거든요. 가족이랑…… 같이 놀러도 가고. 쇼핑도 하고.”

“…….”

“행복하지만, 이럴 때는 아닌 거 같아요. 연습하는 게 맞겠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 놀아도 돼.”

“한 이사님이 달콤한 말만 하는 사람을 피하라고 했어요.”

“날 아첨꾼 취급하는 거야?!”

“대신.”

장하양은 오랫동안 못 박혀 있던 시선을 떼어냈다. 이제 그녀의 시야 속에 담긴 건 경쟁자가 아니라 꿈이었다.

그녀는 성필을 보며 말했다.

“오늘 오후 일정은 킵해 둘게요. 다음에 또 같이 와요.”

“……그래. 연말 스케줄 다 끝내면 다시 나오자.”

둘은 원래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차로 돌아왔다. 장하양은 차에 타자마자 진소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회사에 맡겨두고, 오늘은 휴일이니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하양아 웬일이야?]

“언니, 어제 생일이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뭐야 뭐야. 하양이가 내 생일도 기억해줘? 어떡해, 나 너무 기뻐. 나 방금 스케줄 끝났는데 같이 놀러…….]

“즐거운 생신 보내길 바랄게요.”

[생일은 어제…….]

“이만 끊을게요.”

장하양은 핸드폰을 패딩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소유 씨가 많이 바쁘신가 보네.”

“네. 케이어스니까요.”

“회사로 갈까?”

“부탁드릴게요. 박 이사님은 앞으로 뭐 하세요?”

“음. 딱히 약속은 없는데. 아마 친구…….”

“약속 없으시면 저 연습하는 거 봐주세요. 혼자 적적하게 있으면 저도 이사님도 힘들잖아요.”

“아니, 친구…….”

“친구분들은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거의 다 결혼하셨다면서요.”

“시간이 빈 친구가 있지.”

“……어떤 분이신데요?”

“누구냐면.”

잠시 후, 가로 엔터 연습실.

“아앗, 박 이사님! 하양 언니도 왔네요!”

“리카 하이.”

“둘만 어디 놀러 갔다 온 건가요! 너무해요! 아타시(저)도 데려가 주세요!”

“리카 너 콘텐츠 찍으러 왔다며. 일 내팽개치고 어디로 가려는 거야.”

“저도 놀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정 안 내키시면 편의점까지 산책이라도 가요!”

“싫어.”

“히도이(너무해)……. 내가 이렇게나 비는데에…….”

장하양은 리카를 놀리는 성필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친구란 게 리카였구나.’

장하양은 울상 짓는 리카와 팔짱을 꼈다.

“리카, 나랑 가자. 점심 아직 안 먹었지? 편의점에서 고로케라도 먹을래?”

“네 네네 네네네!”

둘은 팔짱을 끼고 연습실을 나섰다.

나가기 전, 리카가 성필을 향해 홱 돌아보면서 열받는 미소를 지었다.

성필은 빈 연습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박성필, 친구 뺏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