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그래 난 거짓말쟁이다!”
성필이 당당하게 선언했다.
“손나(그런)!”
리카가 충격받곤 비명을 내질렀다.
“미안. 5, 6월쯤에는 정규 앨범 제작이 꽤 빨리 될 줄 알았거든. 그래서 올해의 음반상도 노려보자고 했던 건데…….”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엘릭과 정지음이라는 유능한 음악 프로듀서들을 둔 데다가, 가로 엔터 사상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원하는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12월에 컴백한다’는 말은 일종의 마지노선이었어. ‘진짜 죽어도 12월에는 컴백해야 해’란 뜻이었거든. 실은 더 빨리 컴백할 수 있으면 좋았지.”
하지만 앨범 작업 속도를 보건대, 도저히 12월 이전에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필은 눈물을 머금고 음방 출연 스케줄을 12월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올해의 음반상이 그냥 많이 판다고 주는 게 아니거든. 만약 그랬으면 음반상은 탑티어 보이그룹이 전부 싹쓸이했겠지.”
거의 대부분의 시상식이 상업성과 흥행을 기준으로 상을 수여한다 해도 그 정도라는 게 있다.
그저 ‘많이 팔렸다’만 기준으로 잡는다면 시상식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연간 앨범 차트가 시상식의 스포일러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음반상 후보에 오르고 음반상을 받기 위해선, 음반이 나오고 시간이 꽤 필요해.”
음반상을 위해서는 대중과 전문가의 인정이 차곡차곡 쌓여갈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 발매는 12월이었으니, 사람들이 씹고 뜯을 시간조차 부족했다.
“판매량에선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팬 투표와 전문가 투표에선 점수를 얻기 힘들어. 결과만 말하자면, 올해의 음반상을 받는 건 불가능하단 거야.”
성필이 멤버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는 사죄의 표시였다.
멤버들은 시상식에 어떤 상이 있는지 잘 몰랐다. 물론 본상, 대상, 아티스트상 등 유명한 상의 존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그런 굵직한 상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올해의 음반상’만은 기대했다. 왜냐하면 성필이 정규 앨범 제작 시작부터 목표로 삼았던 상이기 때문이다.
올해의 음반상은 엄청나게 큰 상이지만, 성필이 목표로 삼았으니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멤버들은 가망이 적다 해도 그런 꿈을 꿔왔다.
그런데 성필의 입에서 부정이 나오다니.
멤버들은 고개 숙인 성필만큼이나 어깨가 축 처졌다.
“왜 아저씨가 사과해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 멀쩡한 한 명이 있었다.
조아라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평소대로의 상태를 유지했다.
“어차피 우리가 ‘올해의 음반상’ 받을 리 없잖아요.”
“아, 아라야, 왜 그런 말을…….”
“아니 쌤, 그렇잖아요. 올해 컴백한 대단한 선배님들만 해도 몇이에요. 라이츠 선배님들은 앨범 사전 예약 판매량만 130만 장이었어요. 그리고 또 시에이스 선배님들은요? 우리가 그런 분들 꺾고 음반상 받는단 거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아무리 음반상이 앨범의 작품성과 완성도도 평가 기준이 넣는다 해도, 소녀연맹이 100만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앨범과 대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체급 차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득하다.
“기대하는 쪽이 잘못한 거죠. 쌤도, 언니도, 너희들도.”
“아라쨩은 기대 안 한 거야?!”
“어.”
조아라의 즉답에 리카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다 같이 드높은 꿈을 함께 꾸어 나가는 줄 알았는데, 설마 조아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니.
“아저씨가 말 꺼냈을 때부터 직감했어. 아저씨가 그런 거 잘하잖아. 우리가 상처받을까 봐 일부러 구구절절 이유 붙여주는 거. 12월에 컴백해서 그러니 뭐니, 다 우리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얘가 왜 이렇게 저돌적이지?
백설하는 혹여나 조아라가 성필에게 화가 난 게 있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짚이는 게 없었다.
“맞죠?”
“아라야…….”
“아저씨. 우리도 이제 데뷔한 지 1년 넘었잖아요. 언제까지 꽃밭만 보여줄 거예요.”
그 말에 다른 멤버들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조아라가 말한 ‘꽃밭만 보여준다’는 건 상당히 현실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성필은 어떤 사건에서든 상징과 의미를 찾고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런 성필의 능력은 멤버들이 지칠 때마다 일으켜주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러한 위로만 들을 수는 없다.
“‘아쉽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 말고, 냉정하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만 알려줘도 돼요.”
성필은 멍하게 조아라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투는 언뜻 들으면 너무 저돌적이고 예의가 없기도 했으나, 선명하게 본인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조아라의 이 의견은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린애처럼 대하는 거 그만해달라고 했었지.’
성필은 조아라가 대견하여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 이렇게 어른스럽게 자랐나 싶어 놀랍기도 했다.
‘맞아. 난 항상 애들이 희망찬 미래만 보게 만들어줬으니까.’
그래서 올해의 음반상에 관련해서도, 소녀연맹이 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외적인 요인에 돌렸었다.
그녀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상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아라 네 말이 맞아. 경쟁자들이 쟁쟁해서 그런 것도 있지.”
성필은 옛날에 조아라가 부탁했던 대로 가식의 벽을 덜어냈다.
“하지만 12월에 컴백해서 사람들에게 어필할 시간이 부족했단 것도 사실이야. 너희 정규 앨범은 앨범 자체의 서사나 곡의 배치, 완결성이 매우 뛰어나. 애초에 곡을 받고 앨범에 넣은 게 아니라, 앨범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곡을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처음부터 올해의 음반상에 수상될 만한 퀄리티를 노리고 만들어진 앨범이다.
“컴백이 여름이었다면 좋은 승부가 됐을지도 몰라. 대중음악 평론가들이나 전문가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게 가능했겠지. 그래서 12월에 컴백한 게 안타까워.”
“경쟁자가…….”
“그래 그래, 경쟁자 문제도 있고…….”
어떻게 사전 예약만으로도 앨범을 130만 장 판매한 그룹과 승부를 벌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너희들이 너희의 성과를 낮게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얘들아, 이미 수도 없이 말했지만 너희들이 이룬 성적은 비정상적이야.”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성공이다.
대형기획사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정도이다.
“아하하, 칭찬 너무 자주 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장하양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멤버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 몇 주 동안, 성필에게 들은 칭찬은 말 그대로 셀 수조차 없었으니까.
“응, 몇 번으로 해도 모자라지. 정말 잘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회사에 다시는 없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성필의 칭찬은 자주 들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 회사에 다시는 없을 성공’이란 게 무슨 뜻일까.
“나를 5년 전 과거로 데려다 놓고 손에 100억을 쥐여줘도, 이런 성공을 다신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무슨…….”
“기적이야.”
성필의 말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게가 실렸다.
수도 없이 들어온 칭찬과는 격을 달리하는 힘이 그의 목소리에 깃들었다.
“너희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같은 그룹에 속했단 건, 기적 이외의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
시대를 풍미한 밴드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보며, 성필은 항상 생각해왔다.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인물들이 한날한시에 모여서 밴드를 결성한 것일까?
심지어 그들이 만난 건 동네의 술집이나 허름한 소극장, 혹은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면서나 동네 친구의 소개를 통해서라고 한다.
운명이라고 부르기에도 소박한 이야기들이다.
“소녀연맹의 성공은 가로 엔터의 모두가 힘내줬기 때문도 있어. 하지만 너희가 한곳에 모였단 게 가장 큰 요인일 거야.”
비틀즈. 너바나. 퀸. 메탈리카. 산타나. 오아시스 등등.
혹은 뉴 키즈 온 더 블록, 백스트리트 보이즈, 앤싱크, 스파이스 걸스, 데스티니 차일드 등등.
어떻게 그들 그룹에 속한 여러 명의 인원 모두가 그토록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것일까?
누구도 합리적인 이유를 내놓을 수 없다.
그저 운명이 그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는 설명밖에 존재할 수가 없다.
“너희들도 그래.”
“아, 아니, 아저씨 우리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에요?”
조아라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서 곧장 성필에게 반론을 던졌다. 반론이라기보다는, 더 듣고 있다간 부끄러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성필의 입을 막고 싶었다.
“아저씨가 예시로 드는 그룹들 전부…….”
“물론 너희들은 그분들 발끝도 못 따라가지.”
“…….”
발끝도 못 따라간다니…….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팍 상한다.
“너희들 하나하나는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다 같이 모였을 때의 케미는 누구도 부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해.”
소녀연맹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통일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예로부터 보이밴드나 걸그룹, 혹은 락밴드들이 가졌던 고질적인 문제점은 바로 관계성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성공을 달성하고 함께 오래 지냈더라도, 성격이 맞지 않아 헤어진 사례가 무수하게 존재한다.
갈라진 관계는 퍼포먼스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너희는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키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주…….”
그때 성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다른 멤버들보다 눈에 띄게 멀리 떨어져 있는 조아라와 신아름이었다.
“아껴주고 있지?”
“그럼요.”
“네.”
조아라와 신아름이 동시에 대답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던데, 어쨌거나.
“너희가 함께 모였다는 기적이 이번 성과를 만들어냈어. 자랑스러워해도 돼.”
상식적인 궤를 벗어난 성필의 공치사에 다들 마음이 들떴다. 아니, 들떴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백설하는 케이어스가 생각나서 온전히 성필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성필이 그 기색을 읽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도 너희가 케이어스를 신경 쓴다는 걸 알아. 그래서 너희들의 성공을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한다는 것도. 그런데 말야…….”
12만 장이란 판매량을 걸그룹이 달성하는 건 대형 기획사라도 쉽지 않다.
데뷔 1년 차 걸그룹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만약 이런 성과를 이룬 게 다른 그룹이었으면 벌써 난리 났을걸? 멤버들이 건방지게 사장님 책상에 발 올리고 난리를 부려도, 회사 직원 아무도 뭐라고 못할 정도야.”
“발 올려도 되는 건가요!”
“리카, 예를 든 거야.”
“하이(네).”
“그러면…….”
장하양이 곧게 손을 들었다.
“만족해도 되는 건가요?”
성필은 장하양의 의도를 단숨에 파악했다.
옛날에, 장하양의 꿈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했었다. 성필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 꿈은 성필이나 장하양만이 가진 게 아니다. 멤버들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케이어스를 이기지 못한 이번 컴백이 쓰라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음방 1위를 한 번 빼앗았다고 ‘우리가 케이어스를 이겼어!’라고 날뛰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축구에서 1:20으로 졌다면, 그 한 골에라도 기뻐하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이 정도의 성공에 만족해도 괜찮을까요?”
최고가 되지 못한 성공에 만족하는 것만으로 괜찮느냐.
장하양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에 성필이 답했다.
“나는 데뷔 때도, 첫 번째 컴백 때도 이렇게 말했었지. 너희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건 엄청난 성공이다. 이러면서 말야. 이번에도 다르진 않지만, 지금은 조금 시점을 바꿔서 얘기를 해볼까 해.”
성필은 복사해 온 HPT 뮤직 어워드의 세트리스트를 돌렸다.
멤버들은 세트리스트의 중간, 1부의 피날레에 자신들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곤 놀랐다.
그리고 바로 위, 피날레 직전 무대에 케이어스가 있는 것을 보곤 더더욱 놀랐다.
“아까 내가 기적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분해.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케이어스를 이기지 못한 게 분해.”
동요가 회의실에 퍼져나갔다.
성필이 방금 한 말은 간접적으로 ‘실망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멤버들에게 처음으로 꺼낸 ‘실망’이란 감정이었다.
후회도 아쉬움도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실망’.
“말도 안 되는 욕심이란 건 알아. 그래도 분해, 정말로 분해. 과분하게도 너희들에게 주어진 그릇보다 더 큰 기대를 줘서, 그래서 실망도 더 큰가 봐.”
“이사니임…….”
리카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 그래도 멤버들은 케이어스를 이기지 못했단 사실에 항상 커다란 좌절을 맛보았었다. 심지어 이번에도, 조아라는 술을 먹고 ‘에이 씨팔’이란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성필의 입으로 ‘너무 기대했다’는 말까지 들으니, 리카는 아예 정신이 헤집어지는 듯했다.
“죄…….”
리카가 ‘죄송’이란 말을 올리기 직전.
“그래도 한 번 더 믿어볼까 해. 또 너희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주고 싶어. 비록 성적에서는 못 이겼지만, 무대에서는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너희들이 못한대도 믿을 거고, 그만한 수준을 요구할 거야.”
회의실에 퍼졌던 동요는 갑작스레 강렬한 열기로 바뀌었다.
지금껏 성필이 케이어스를 공식적인 경쟁 상대로 지명했던 적은 처음이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파괴력이 남달랐다.
항상 숙소에서 ‘타도 케이어스’를 외치던 것보다 수천 배는 더 강한 동기였다.
“너희는 케이어스를 제치고 1부 피날레 무대를 맡았어. 이 무대에서만큼은 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 너희들은 어때?”
“할 수 있어요.”
백설하는 에리카를 떠올리면서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케이어스에게 졌다면서 울상을 지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한마디 한마디에 그림자를 지우는 태양과 같은 선명함이 깃들어 있다.
“말해 뭐해요.”
조아라는 진저를 떠올리면서 답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애매한 앉음새는 그녀의 투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이 자리가 끝나기만 하면 곧장 연습이라도 하러 갈 태세였다.
“어차피 대형 기획사란 배경만 없으면 케이어스보다 우리가 못한 게 뭐예요. 당연히 할 수 있죠.”
신아름은 김민주를 떠올리면서 답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다시 김민주와 자웅을 겨룰 수 있게 된 것이 기뻐서 참을 수 없단 기색이었다.
“…….”
장하양은 성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찬란함을 눈동자에 품은 성필의 모습을, 아까부터 미동도 없이 보기만 했다.
“언니.”
장하양의 얼음 땡이 끝난 건 조아라가 옆구리를 쿡쿡 찌른 뒤였다.
“으, 응?”
“아저씨가 언니 보는데요?”
“아……. 네, 할게요.”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양은 다시 성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성필은 리카를 바라보았다.
리카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
“좋아. 다들 파이팅 한 번 외칠까?”
“왜 아타시(저)는 무시하나요?!”
“피날레에 걸맞은 무대를 보여주자. 아무도 우리가 피날레를 맡은 데 불만이 없도록!”
“히도이(너무해)…….”
리카는 머릿속으로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의 대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필이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아서 말할 기회도 없었다.
그녀는 축 늘어져서 중앙으로 손을 펼쳤다. 그 위에 다 함께 손을 모으고 하늘 높이 들었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그리고.
“가로 엔터 파이팅!”
마지막은 박수였다.
가열한 기세의 박수는 오래도록 끊이질 않았다. 다들 케이어스를 때려눕힐 의지가 가득했다.
“저 질문 있어요!”
“어, 리카.”
“승패는 어떻게 정하나요?”
“응?”
“실시간 투표랑 관객분들의 함성인가요!”
“어…… 아마, 뭐, 그렇지 않을까.”
“에헤헤, 그럼 저흰 못 이기지 않나요? 케이어스 팬덤이 훨씬 크잖아요! 공연장에도 케이어스 팬분들이 더 많을 거예요! 음원 차트도 지금 1위구요!”
“…….”
성필이 리카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꾸우욱 눌렀다.
리카는 버둥거리면서 탈출하려고 했으나, 양팔을 조아라와 신아름이 붙잡고 있어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다.
“아타시(나)는 무죄야아아앗!”
“불신은 죄야!”
“이성적인 거뿐인데에에엣!”
죄의 대가를 받은 리카는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혹시나 머리카락이 빠지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잔뜩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회의가 끝나려는 분위기가 감돌자, 백설하는 타이밍을 노려 성필에게 질문했다.
“그으, 그럼 저희 이번에 노릴 만한 상이 없나요……?”
“있어. ’넥스트 스타’ 상이야. 내년의 활동이 기대되는 사람이나 그룹이 받는 상이거든. 뭐랄까, 데뷔한 지 시간이 지나도 받을 수 있는 신인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엄청 격 없어 보이네요…….”
“아니야, 이거 엄청 중요한 상이야.”
성필은 ‘넥스트 스타’ 상을 받았던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열거했다.
그러자 ‘격 없어 보인다’고 했던 백설하의 눈빛에도 생기가 감돌았다. 성필의 입에서 나온 아이돌 그룹들은 현재 다들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내년의 넥스트 스타를 꼽는 상이야.”
“…….”
“아라 왜?”
조아라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주변을 눈치를 보아 입을 꾹 다물고 있단 게 느껴졌다.
성필이 몇 번 더 찔러보자, 조아라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런 상이면 케이어스가 받는 거 아니에요?”
“아, 케이어스는 그거 안 받을걸?”
“네? 우리가 뭐 케이어스보다 더 나은 게 있어요? 그래서 걔네들 누르고 넥스트 스타 상 받을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조아라가 기대를 담아서 물었다.
“아니. 케이어스는 본상 받을 거 같거든.”
본상.
한 해의 가장 인기 있었던 곡들을 10곡 내외로 선정하여, 그 곡의 원곡자에게 주는 상이다.
10곡 내외라 하여도 보통 10명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준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한테나 뿌리는 상 같겠지만, 1년 동안 나온 노래의 숫자만 만 개가 넘는다. 그중에서도 10개보다 적은 숫자의 곡을 꼽는 것이다.
1개월마다 하나씩 한 달을 빛낸 곡을 선정해도, 2개 곡은 본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본상에 오르기 위해선 수천수만의 곡을 이겨야 한다. 그야말로 본상이란 이름이 걸맞다.
“너희가 넥스트 스타 상 받을 확률은 꽤 높아. 케이어스가 본상으로 빠질 거니까 말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마.”
“……야 리카.”
“나니(왜)?”
“아저씨 때릴래?”
“난데(왜)?”
“우리가 케이어스한테 지는 게 당연하단 듯이 말하잖아. 기분 나쁘지 않아?”
“산세(찬성)!”
“아라 너 아깐 꽃밭만 보여주지 말라며!”
성필은 한동안 리카와 조아라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 * *
사장실.
성필은 홍규헌과 독대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책상 위 재떨이에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장실에서 담배 냄새가 별로 안 나네.’
재떨이에도 꽁초가 얼마 없다. 옛날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 이상 줄어든 것 같다.
“박 이사…….”
“사장님…….”
“박 이사 먼저…….”
“사장님 먼저 말씀…….”
말이 동시에 두 번이나 겹쳤다. 이것도 이심전심이라 할 수 있을까.
홍규헌은 옅게 웃고는 먼저 말하라는 듯 고갯짓했다.
“사장님 요즘 담배 줄이셨네요.”
“요즘은 그다지 당기지 않아서.”
“금연이라도 결심하신 거예요?”
“그런 건 아냐.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점점 생각이 잘 안 나더라.”
“다행이네요.”
“다행…… 인가?”
“담배란 게 몸에 좋진 않잖아요. 사장님은 뭐 물어보려고 하셨어요?”
“별 건 아니고.”
홍규헌은 버릇처럼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할 게 있다기보다, 성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인 듯했다.
“그게, 박 이사는 선물 받으면 뭘로 받고 싶어?”
“저는…… 아. 한 이사님 생일 선물 때문에 그러세요?”
곧 있으면 한구인의 생일이다.
성필의 예상으로, 홍규헌과 한구인은 꽤 오래 관계를 지속한 듯했다. 어쩌면 10년 이상일지도 모른다.
생일 선물을 챙겨준다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홍규헌도 선물을 주려면 남자가 좋아할 만한 것을 주고 싶을 게 틀림없다.
“그냥 직설적으로 물으시지. 굳이 저한테…….”
“그런 거 아니야. 곧 명절이잖아. 직원들 선물 뭘로 줄까 고민하고 있었어. 임원급한테는 더 좋은 걸로 줘야 하잖아.”
“아…… 정말 직설적으로 물으신 거였네요. 보자, 저는 명절 선물이면…….”
“명절 선물 말고. 정말 받고 싶은 거 딱 하나만 말해봐.”
“정말 받고 싶은 거요?”
성필은 오랜만에 자아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과연 자신이 정말 받고 싶은 게 무엇일까?
놀랍게도, 성필은 신아름에게 주고픈 것이 떠올랐다. 이번 명절에 신아름의 본가로 가서 시간을 보내고, 선물도 따로 챙겨주고 싶은데…….
‘아니. 내가 받고 싶은 걸 말해야지.’
그런데 정말 받고 싶은 게 없다.
“그냥 뭐, 한우 세트? 명절이니까요.”
“조촐하네. 알겠어.”
“어, 정말 주시게요?”
“박 이사가 진심을 숨기고 있는 걸 알겠다고. 받고 싶은 거 하나 시원하게 못 말해?”
“…….”
홍규헌이 본제로 넘어갔다.
“애들한테는 말했어?”
“네.”
“애들 반응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어요.”
“이상한 점은 눈치 못 챘나 보네.”
“그렇죠. 제가 노력했으니까요.”
HPT 뮤직 어워드의 1부 피날레 무대를 소녀연맹이 장식하게 됐다. 심지어 그 이전 무대가 케이어스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누르고 피날레 무대를 쟁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들이 괜히 불안감 가지지 않도록 잘 포장했어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사태다.
어떻게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제치고 1부 피날레를 맡을 수 있겠는가?
가로 엔터나 KS 엔터가 아니더라도, 아이돌 팬들은 이 사태를 이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상함을 넘어서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피날레는 이름에 걸맞게 그만한 무게감을 가진 아티스트가 출연해야 한다. 그리고 무게감으로 따진다면,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을 앞선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홍규헌은 안심한 듯 보였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면 무대를 준비하는 데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
“애들이 최상의 상태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무대를 소화해야 해.”
사람들이 무대 순서에 반감을 가지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 납득이라도 시켜야 한다.
소녀연맹이 피날레에 어울리는 무대를 펼쳤노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다.
“괜한 불안에 머리를 싸잡고 고민해선 안 되지.”
“……사장님.”
“어.”
“HPT 뮤직 어워드를 기획한 게…….”
“맞아, ‘시지프’.”
홍규헌의 언니인 홍연헌이 사장으로 있는 곳이다. 아마 소녀연맹을 피날레에 둔 건 홍연헌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동생을 향한 사랑의 표현일까?
하지만 사랑이라기엔…….
“악의가 느껴지지.”
대놓고 소녀연맹을 욕받이로 만들 생각일까. 혹은 케이어스 팬덤이 소녀연맹을 공격하길 바라는 것일까.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해. 내 언니야가…… 언니가 손을 썼으리란 건 추측이야.”
마음 같아서는 홍연헌에게 연락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고 싶다.
하지만 홍규헌이 언니에게 연락하는 순간, 추측뿐이었던 상황에는 둘이 연락했다는 증거가 생겨버린다.
혹시나 미래에 ‘홍규헌이 혈연을 이용해서 무대를 따낸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홍규헌은 시원하게 ‘언니에겐 연락도 한 적 없다’는 말도 못 하게 돼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할 건 하나야.”
“예.”
악의가 느껴지는 홍연헌의 손길.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건 둘도 없을 기회다.
사람들은 소녀연맹의 무대에 주목할 것이다. 아이돌 팬들의 이목이 집중된 그곳에서.
“소녀연맹은 무대로 증명할 겁니다.”
피날레를 장식할 실력이 충분하고 넘친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 전제 조건은 소녀연맹의 퍼포먼스가 케이어스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