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31화 (231/760)

231화

소녀연맹.

공중파 음악 방송, ‘뮤직 스테이지’ 1위 1회.

“벌써 위키에 추가됐어.”

손혜빈은 질리지도 않는지 소녀연맹의 컴백 무대를 반복 재생하면서 커뮤니티를 탐방했다.

근무 시간에 딴 일을 한다며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팬 매니지팀이 따로 없는 가로 엔터에서 팬 반응을 살피는 건 홍보팀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커뮤니티를 보면서 게시글 중계를 달리는 건 홍보팀의 일이 아니었다.

“성필아 이거 봐봐. 제목이 ‘우리 성적에 연연하지 말자’거든? 근데 게시글 내용은 ‘성적에 연연해라! 이번이 마지막 컴백이라고 생각하고 팬질해라!’야. 웃기지 않아?”

“누나. 인터넷 좀 그만하고 일하면 안 돼?”

“아 쫌만 기다려 봐. 이것만 읽고 할게.”

“…….”

저런 손혜빈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현재 소녀연맹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케이블도 아니고 공중파 음방에서 1위를 했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심지어 역대급 앨범 판매량을 자체 갱신한 케이어스를 누르고 1위를 했단 건 역사에 남을 대기록임이 틀림없다.

‘다른 공중파 음방에서도 1위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안 됐었지.’

소녀연맹의 뮤직 스테이지 1위 다음 날.

다른 공중파 음방에서 케이어스는 귀신처럼 1위를 가져갔다. 음원 차트에서도 1위를 금방 탈환해냈다.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가 케이어스를 밀어냈던 건 ‘음악을 위한 동행’의 역할이 지대했었다. 주류 타깃인 10, 20대뿐 아니라 30대와 40대의 관심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약발이 떨어지고는 소녀연맹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걸그룹은 앨범을 1만 장 정도로 적당히 팔고 음원으로 인기를 얻으면 공중파 음방 1위가 가능하다.

앨범 판매량 10만이 넘는 그룹이 음방에 출연하는 건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대사건이다.

케이어스와 같은 시기에 컴백한 다른 그룹은 그냥 ‘올해 농사는 망했구나’라며 눈물을 삼켜야 할 지경이니 말 다 했다.

‘하지만 우리는 1위를 따냈어.’

누군가 ‘미디어 프로모션 덕분이다’, ‘한 때의 바람이었다’, ‘운이다’라고 말해도,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한 번 이겼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대형 기획사라는 거대한 벽을 쓰러뜨렸단 업적은 쉬이 사라질 수 없다.

‘게다가 케이블 음방 3관왕도 달성했고.’

상당수의 케이블 음방들은 ‘출연하지 않으면 1위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을 갖고 있다.

게다가 케이어스는 컴백 첫 주차에 스페셜 컴백 무대만 하곤 나오지 않았다. 케이블 음방엔 대형 아이돌이 연속해서 나오지 않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인지도가 낮거나 후배 아이돌을 위해 길을 열어준다고 해야 할까.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그런 문화로 인해 대형 아이돌은 케이블 음방에 잘 출연하지 않는다.

“뭐야. 성필이 너도 딴 일 하고 있잖아.”

커뮤니티 탐방을 마친 손혜빈은 성필의 의자 뒤에 섰다.

그의 모니터에서는 뮤직 스테이지의 생방송이 나오는 중이었다.

“오늘은 경섭이랑 수희 씨, 이상 씨만 보냈잖아. 잘되는지 체크는 해야지.”

“경섭이가 어련히 잘할까.”

“그냥, 걱정되잖아.”

성필도 슬슬 소녀연맹의 음방에 따라가는 습관을 고쳐야 한다.

매니지먼트 팀장인 민경섭이 버젓이 있는데 계속 성필이 동행하다간 매니저팀의 위계를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안이상과 김수희가 경험을 쌓는 것에도 차질이 생긴다. 성필이 그들의 일거리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 근데 오늘 케이어스 나오잖아. 케이어스에 걔…… 누구더라?”

손혜빈이 실실 웃으면서 성필을 응시했다. 사람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소유.”

“아, 그래 소유. 미안. 나는 케이어스 팬이 아니라서 이름은 안 외우고 있거든.”

성필은 대답 없이 한숨만 쉬었다.

“어, 지금 나오네. 소유.”

진소유와 장하양, 포유의 우효민, 글로브의 라희가 모니터 화면에 비쳤다.

오늘은 장하양이 몇 달 동안 공을 들여왔던 연말 특별 무대가 하는 날이다.

“우와, 하양이 되게 예쁘다.”

“그러게. 우리는 이런 옷 안 입히니까.”

손혜빈은 의자를 가져와 성필의 옆에 자리했다. 두 사람은 싱글벙글 특별 무대를 감상했다.

그러던 도중, 성필의 뇌리에 무언가 스쳤다.

‘케이블 음방 3관왕…….’

어째선지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생각을 쥐어짜던 성필은 곧 한 가지 기억에 다다랐다.

‘옛날에 내가 애들한테 무슨 약속을 한 거 같은데. 케이블 음방 3관왕 하면 뭘 해주겠다고. 내가 뭘 약속했지?’

* * *

연말 특별 무대 생방송.

무대에 오르기 직전, 진소유가 다른 무대 멤버들을 붙잡았다.

장하양을 비롯한 이들은 또 진소유가 지겨운 일장 연설을 펼치리란 것을 직감했다.

“마지막으로 이미지 트레이닝 시간 가지자.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머릿속에 이미지가 들어 있어야 표현력이 높아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들도 곡에 이미지를 부여하곤 한다.

단순히 느리게, 빠르게, 여리게 등만을 지시하면 연주자들은 방어적으로 변한다. 스스로 표현의 한계를 단정 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람처럼 빠르게, 황량한 대지에 핀 꽃처럼 아련하게, 이런 이미지를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거야. 그럼 실제로 표현력이 높아져.”

“그럼 저희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나요?”

“여자친구.”

그거야 이미 알고 있다.

그녀들이 연말 특별 무대로 펼치는 곡 자체가 러블리함을 잔뜩 강조한다.

가사도 ‘너랑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해’란 주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너희들의 기량이 드러나는 거야. 원래 사랑이란 지속된 관계와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아이돌은 그 사랑을 한순간에 강요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해.”

진소유가 장하양의 뒷머리를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귀자.”

“싫어요.”

“이렇게 되면 안 돼. 아이돌은 무대가 펼쳐지는 몇 분만으로도 사람들의 심장을 저격하는 존재야. 그냥 냅다 고백을 박아도 ‘알겠습니다’란 답을 들을 수 있을 만한 매력이 필요해. 물론 난 그런 건 잘 모르지만.”

“……?”

진소유는 라희와 우효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희들은 잘 알 거야. 약간…… 너희들 그룹 색깔이 그렇잖니?”

“걸리시한 컨셉이요?”

“아, 그래. 유사연애적으로 팬들한테 팔아먹는 거. 팬들한테 아양 떨고…… 그런 거 있잖아.”

라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짜 이 무대만 끝나 봐라. 진소유 이 썅년 눈 찔러서 실명시키고 도망갈 거다.’

본인의 안구가 위험하단 사실을 모르는지, 진소유는 설명만 이어갔다.

“케이어스는 그런 쪽으론 안 나가거든.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이미지 트레이닝은 잘 돼 있어. 너희들에게도 그런 걸 부탁하는 거야. 좋아, 그럼 상황을 짜보자. 무대 위에 올라간 우린 어떤 상황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무대 2분 전!

스태프의 외침을 들은 장하양이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라희와 우효민은 진소유의 손을 떼어내고 병아리처럼 장하양을 따라갔다.

“그럼 이건 어떨까?”

진소유는 빠르게 장하양의 옆에 붙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대학을 안 가봐서 모르지만, 대학 동아리 미팅…… 미팅인가? 회합? 그…… 정기집회. 집회 뒤풀이에 동경하던 선배가 나온 거야. 우연히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됐어. 마주 앉은 주변이 하얗게 변하고 이 세상에 단둘만 남게 된 것 같은 느낌. 알겠니 얘들아?”

“네.”

장하양은 짧게 대답하고 무대의 중앙에서 진소유에게 눈짓했다.

진소유는 아까의 장난스러운 말이 다 거짓이었단 듯 진지한 얼굴로 가장 앞에 섰다. 아니, 그녀는 언제나 장난스러웠던 적이 없다.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한 인간이다.

무대 1분 전!

진소유가 가장 앞에서 가련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아련한 마음을 형상화한 듯 갈 곳 없이 떠나려는 손을 꼭 붙잡았다.

그녀의 주위로 남은 세 사람이 자리했다.

“와…….”

그것을 지켜보는 방청객들이 할 말을 잃었다.

무대 위에 천사들이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케이어스의 진소유와 소녀연맹의 장하양이었다.

항상 강한 컨셉만 해오던 그녀들의 복장은 프릴이 잔뜩 달린 순백의 드레스였다.

“쟤가 소녀연맹에…….”

“하양이.”

“나 오늘부터 인민이야…….”

남자 방청객들은 넋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장하양이 무대 오프닝을 위해 슬쩍 미소를 짓자, 그들의 심장이 차례로 총에 맞은 것처럼 피를 울컥울컥 뿜어댔다.

저 얼굴은 무기다. 저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은 턱 밑에 총구를 들이댄 사람처럼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저쪽은 케이어스…….”

“소유.”

“나 지금부터 유스야…….”

“하나만 해.”

메인 파트를 차지한 진소유도 장하양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 연기는 장하양을 뛰어넘었다.

10년 넘게 짝사랑해 온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서글프고도 여린 기쁨이 만면에 배어있다.

진소유를 처음 마주치는 사람도 그녀를 보는 순간 장편 로맨스 소설이 머릿속에 그려질 법한 비주얼이다.

“…….”

그런 방청객의 반응을 라희와 우효민도 감지했다. 둘은 뻘쭘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마음이라도 맞았는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그러자 둘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무대가 시작되었다.

가장 첫 파트는 진소유. 그녀가 새끼손가락에 감은 실을 입술로 살짝 물었다.

[착각할 수밖에 없잖아, 꿈속에서만 보던 네가 바로 앞에 있는걸…….]

그 가사를 받아서 장하양이 앞으로 나왔다.

결혼식의 신부 입장 때처럼 조심스럽게, 또한 기대를 담아 한 발자국 내디뎠다.

[다른 곳은 보지 말아 줘요. 나는 당신만 보고 있잖아요…….]

그렇게, 한동안 아이돌판을 뜨겁게 달굴 전설의 무대가 막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실시간으로 직접 보고 있는 매니지먼트 팀 팀장 민경섭.

“최고다 하양아!”

“팀장님 그만 좀 하세요. 마이크에 잡음 섞이겠어요!”

“야 이상아 팀장님 잡아서 뒤로 끌고 가!”

민경섭은 두 매니저에게 붙잡혀 스튜디오 밖으로 끌려갔다.

* * *

KS 엔터 사옥의 4번 연습실.

진저는 김민주와 함께 앉아 쉬었다. 그런데 김민주는 정말 앉아 쉬는 게 목적인 듯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케이어스의 분위기 메이커(자칭) 진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언니, 그거 들었슴미까. 뮤직 스테이지가 방통위에 경고받았다고 함미다.”

“…….”

“소련의 설하 언니가 ‘인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해서 그렇다고 함미다.”

“…….”

“이상하지 않슴미까? 저는 존재 자체가 공산주의 국가의 국민인데 무대에 서도 괜찮슴미다. 그런데 한국인이 ‘인민 여러분’이라는 말은 하면 안 된다니.”

“…….”

“민주 언니 아직도 그거 신경 쓰는 검미까?”

얼마 전, 뮤직 스테이지에서 케이어스가 1위를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다음 날의 공중파 음방에서 바로 1위를 탈환해냈다.

그러자 김민주는 자신만만하게 신아름에게 말을 걸었는데.

‘으응? 뭐가 그렇게 좋아? 넌 연승이 꺾인 게 행복한 거야? 아아, 뭐,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네. 꺾인 연승이라도 행복하다면 얼마든지 축하해줄게.’

신아름은 김민주의 신경을 거하게 긁어놨다. 그러자 화가 난 김민주가 ‘다음 음방에서 승부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신아름이.

‘안 할 건데? 너 개못하잖아!’

정말, 그때 김민주는 너무 열받아서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었다.

뒷목을 잡고 쓰러졌으니 말 다 했다.

“한 번쯤 질 수도 있지 않슴미까. 상황이 안 좋았슴미다. 저희는 싱글 앨범으로 컴백했는데 소녀연맹은 정규 앨범이었슴미다. 저희가 정규 앨범 아니, 미니 앨범만 됐어도 계속 1위 했을 검미다.”

“…….”

“그리고 이번에도 음방 명예의 전당 들 수 있을 검미다.”

최근 음악 방송들은 한 곡의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 3주에서 5주 연속 1위를 한 곡을 순위에서 배제하곤 한다.

그 대신 명예의 전당에 기록하여 위신을 올려주는 것이다.

“겨우 한 번의 패배는 우리가 세운 기록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미다.”

“…….”

“그러니까…….”

“겨우 한 번?”

진저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김민주의 목소리가 너무나 무섭기도 했고, 그녀의 눈에 핏발이 돋았기 때문이다.

“겨우 한 번? 상황이 안 좋아? 우리한테 안 좋은 상황 같은 건 없어. 여기가 어디야? 우리가 딛고 선 여기가 어딘지 알아?”

KS 엔터다.

“겨우 한 번도 없어. 한 번 지는 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를 듯했던 김민주는 갑작스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정의 불순물을 내보내는 것처럼 천천히 숨을 쉬었다.

“진저.”

김민주가 진저의 팔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네 말이 맞아.”

“예……?”

뭐지? 이중인격인가?

“소녀연맹이 1위를 한 건 행운과 행운이 겹친 데 불과해. 겨우 한 번으로 우리의 명예에 흠집이 나진 않겠지.”

하지만.

“고작 한 번이라고, 그게 패배를 태연하게 넘길 이유가 될 수는 없어. 알겠어 진저? 패배에도 관성이 있어. 패배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고 납득하는 순간 계속해서 지게 되는 거야. 그쯤에서 멈춰버리는 거라고. 진저 넌 그렇게 되고 싶어? 어?!”

화를 가라앉힌 줄 알았던 김민주는 진저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당장 땅에 머리를 박아버릴 듯한 기세였다.

“얘들아 안녕.”

그때 연습실로 정호환이 들어왔다.

진저는 그가 때마침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방금 상황이 조금 더 이어졌다면 어떤 일을 당했을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좋은 소식이 있어서 전해주려고 왔다.”

“좋은 소식임미까!”

진저는 일부러 벌떡 일어나 정호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예의 바른 행동에 비해, 김민주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게 끝이었다.

“좋은 일이 뭠미까?”

“너희 21개국 애플튠즈 1위 달성했어. 역대 1년 차 걸그룹 중 최고인데, 주요 국가는…… 그런데 다른 애들은 어디 있지?”

“소유 언니는 도수치료 받으러 갔슴미다. 이제 곧 25살이라 많이 아픈가 봄미다.”

“진저, 언니한테 그런 말 하면 못쓰지.”

“음…… 익숙하지 않게 프릴 달린 드레스 입더니 내상이라도 입은 것 같슴미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젊어 보이는 옷을 거부하는 거 아니겠슴미까.”

“나아진 게 없잖냐. 그럼 에리카는?”

“에리카 언니는 모름미다. 회사 어딘가에 있을 검미다. 핸드폰을 주시면 이럴 때 편할…….”

“너희 먼저 들어. 주요 국가는…….”

그때 정호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인상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확인한 그는,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얼굴이 더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나중에 말해야겠다, 진저.”

“그냥 말해주시면 안 됨미까. 소설 같은 거 보면 이사님처럼 말한 뒤에 꼭 안 좋은 일을 당함미다.”

“꽤 많이 쓰이는 클리셰지. 책을 많이 읽나 보구나. 하지만 너처럼 난 아는 척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너희 성적이 궁금하면 인터넷에 쳐보렴.”

“핸드폰이 없는데 어떻게…….”

정호환은 진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뒤 연습실을 나섰다.

그의 걸음은 KS 엔터 사옥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최상층의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공기가 정호환을 짓눌렀다.

U자형의 기다란 회의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KS 엔터의 이사급들이었다.

모인 인원은 총 5명. 몇 명은 오지 않았으나, 가장 힘 있는 자들은 대부분 모였다.

그중 하나, 경영 이사 구유한이 말했다.

“앉으시죠, 정호환 이사님.”

정호환은 그의 재수 없는 낯짝을 보며 생각했다.

‘지랄 났구만.’

그깟 음방 1위 한 번 내준 걸로 다른 이사들을 불러 모은 거냐.

여하튼 속 좁은 놈이다.

“정 이사님, 이번 결과는…….”

“시상식 싹쓸이하고 있잖습니까. 그걸로는 모자랍니까? 남은 상도 케이어스가 다 받아 갈 건데.”

“…….”

“12월 31일, 모든 시상식이 끝나면 케이어스는 8개 시상식 모든 곳에서 주요한 상을 챙겼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럴 거고. 음방 1위 한 번 주면 어떻습니까?”

케이어스가 정점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 *

연말의 HPT 뮤직 어워드를 앞두고,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들을 회의실로 불렀다.

멤버들은 회의실로 가면서 성필이 어떤 말을 해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리카가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았다.

“칭찬해주시려는 거예요! 이사님은 항상 이런 시간을 가졌었어요!”

‘아니’로 데뷔했을 때도, ‘롱 포’로 컴백했을 때도, 성필은 성과가 나오곤 멤버들을 불러 모아 공치사를 했었다.

소녀연맹이 이룩한 성적의 의미나, 이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설명하곤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이사님이 저희들을 칭찬해주실 거예요!”

“아하하, 그러면 좋겠다.”

멤버들은 공중파 음방 1위를 한 뒤, 매일 꿈에서 사는 것만 같았다.

항상 케이어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본인들의 성과를 깎아내리던 그녀들이다.

하지만 음방 1위라는 가시적인 업적을 달성하곤 그 열등감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이제는 순수하게 성공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설하 언니, 이번엔 저희도 상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컴백을 좀 늦게 해서 시상식 몇 개는 놓쳤지만…… 가능성은 있어.”

이제 소녀연맹이 겨루는 영역은 신인상이 아니다. 엄연한 데뷔 1년 차의 걸그룹으로서 여러 분야의 상에 도전할 권한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인민이들 덕분에 HPT 뮤직 어워드에서도 음악상 후보에 꼽힐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러니 인민이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하리라.

“아저씨가 우리 앨범 만들기 전에 그랬잖아. 정규 앨범 목표는 ‘올해의 음반상’이라고.”

올해의 음반상.

말 그대로 그 해를 빛난 앨범에게 주는 상이다. 그저 인기만 있는 게 아니라 앨범 자체의 완결성과 예술성을 따진다.

그리고 소녀연맹 정규 앨범인 Girls’ Union은 앨범 완성도가 상당하다. 수많은 아이돌 앨범을 들어본 정지음과 엘릭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15개의 곡으로 하나의 서사가 쭉 이어진다.

멤버들도 따로따로 녹음했던 곡이 하나의 앨범 안에 배치되어 이야기로서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을 보곤 깜짝 놀라지 않았던가.

“팀장님이 우리 칭찬해주고 시상식 관련해서 얘기 좀 하지 않을까? 후보로 예상되는 건 어떤 상이다, 뭐 이런 얘기.”

“올해의 아이돌 브랜드 대상?”

“조아라 너 미쳤냐?”

“아니, 꿈은 꿔볼 수 있잖아…….”

멤버들은 희망을 품으면서 회의실 안에 발을 들였다. 그녀들이 자리를 잡은 후, 성필이 태평하게 말했다.

“일단, 우리가 앨범 만들기 전에 목표가 ‘올해의 앨범상’이라고 했는데 그건 힘들겠다.”

“우소츠키(거짓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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