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30화 (230/760)

230화

가로 엔터 1층에는 모든 직원이 도란도란 모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모공 하나하나까지 비출 듯한 QLED 화질의 텔레비전에선,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고 흐느낌만 내보내는 백설하의 모습이 나왔다.

그녀의 뺨을 따라 흐르는 눈물은 지금까지의 불안과 갑갑함을 덜어내어 한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다른 소녀연맹 멤버들의 상황도 백설하와 다르지는 않았다.

리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땅바닥만 바라보면서 오열하길 벌써 십수 초째다.

어찌나 크게 우는지 백설하가 든 마이크까지 울음소리가 전해져와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생중계되는 중이었다.

조아라는 뒷짐을 지고 서서 울음을 참으려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리였다.

그녀는 기어코 눈을 가리면서 뒤로 돌았다.

장하양은 그런 조아라를 보곤 재빨리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조아라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입으로는 ‘고생했어’, ‘잘했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장하양은 남을 달래줌으로써 몰아치는 감정의 격류를 달래려는 듯 보였다.

조아라는 언니의 위로를 받자 본격적으로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아예 장하양의 가슴에 눈을 박고 마음껏 울음을 터뜨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신아름이었다.

백설하가 수상 소감을 말하지 않아 방송 시간이 한계에 다다랐다. 곧 있으면 앙코르 ‘아라베스크’가 흘러나올 텐데, 그 시각이 되도록 신아름은 김민주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김민주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자신의 정수리에 입술을 맞춰대는 신아름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중이었다.

그 곁에서, 에리카는 동요 없이 미소를 지으면서 손뼉을 쳤다. 하지만 진소유, 진저와 비교하면 에리카의 박수는 언뜻 기계적인 면이 있었다.

[저, 시간이 다 돼가는데요!]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한 남녀 MC가 미소를 지으면서 백설하를 재촉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백설하는 떨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몸 자체가 흔들리는 배 위에 선 듯 진동했다.

하지만 눈물과 함께 당황을 같이 뽑아낸 듯, 백설하는 정신을 차리곤 한마디를.

첫 1위의 기쁨을 담아 외쳤다.

[인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제야 MC가 안심하면서 클로징 멘트를 쳤다. ‘아라베스크’가 흘러나오고 아이돌들이 퇴장을 시작했다.

공중파 음악 방송, 뮤직 스테이지 1위.

소녀연맹.

“…….”

그 광경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가로 엔터 직원들이 감격에 겨워 울었다.

하지만 홍규헌과 한구인, 손혜빈은 아니었다. 그들도 물론 인간승리와 같은 광경에 감동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의문이 더 컸다.

“우리 애들…… 어떻게 1위 했지?”

손혜빈은 얼이 나간 와중에도 사장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애들한테 일부러 말은 안 했거든요. 어제 일이 있었으니까요.”

성필이 ‘1위 할지도 몰라!’라며 멤버들에게 바람을 넣었는데, 그날도 소녀연맹은 1위를 하지 못했다.

그 결과 멤버들은 엄청나게 실망하지 않았던가. 물론 성필이 수십 명 앞에서 눈물을 짠 덕분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뮤직 스테이지는 음원 점수가 65%예요.”

소녀연맹의 음원 차트 성적은 나날이 상승해왔다. 케이어스와 1위와 2위를 다툴 정도이니 말 다 했다.

대부분은 져왔으나, 며칠 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소녀연맹이 승기를 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어요. 워터 멜론은 밤 12시에서 6시까지 음원 성적 집계를 멈추거든요. 그래서 7시부터 변동된 차트가 보이는데…….”

이때 많은 아이돌의 노래가 차트 밖으로 튕겨 나간다. 팬들의 무한 스트리밍이 밤 동안은 막히기 때문이다.

아이돌 팬덤의 기형적인 스트리밍 반복이 막히고 표시되는 7시의 순위에서 드러나는 건,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는 곡뿐이다.

“거기서도 ‘아라베스크’랑 ‘보라색 튤립’은 10위권 언저리에서 놀았어요. 그에 비해 케이어스의 ‘가이아’는 30위 밖이었고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케이어스는 이번 곡으로 대중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어요.”

거대한 팬덤이 주중에는 ‘가이아’를 1위로 끌어올려 두지만, 그 성적은 대중과 괴리되어 있다.

“그게 어제부터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케이어스는 저녁 동안 소녀연맹에게 1위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다.

소녀연맹 팬덤이 케이어스 팬덤보다 클 리는 없으니, 이는 온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데서 비롯한 성적이다.

“물론 이 인기는 일시적일 거예요. ‘음악을 위한 동행’ 덕분에 펌핑 효과를 받은 거니까요. 사장님도 아시죠?”

“어. 백설하가 라이브한 편이 대박 났다잖아.”

‘음악을 위한 동행’의 백설하와 에리카 합동 버스킹 영상의 조회 수는 300만을 넘었다. 지금도 몇만 단위가 우습도록 시각마다 조회 수가 갱신되는 중이다.

다른 영상에 비해 압도적인 조회 수임이 틀림없다. 그만큼 입소문을 많이 받았다.

“네, 이런 상황에서 음원 점수가 65%인 음방에 출연하면…… 1등을 하죠.”

홍규헌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앙코르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백설하와 장하양이 마이크를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부르지만, 동생 라인은 정신을 차릴 마음도 없는 듯했다.

김민주를 향한 애정 공세를 끝낸 신아름도 어느새 현실 파악이 끝났는지, 조아라와 안으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리카는 여전히 무릎 꿇고 오열 중이다.

“그것만은 아닌 거 같아. 음원만으로 케이어스를 이긴다는 건…….”

“글로벌 투표 점수일 겁니다.”

한구인은 손수건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뮤직 스테이지는 글로벌 투표 점수가 있습니다. 전 세계 50개국 이상에 생중계되고 전용 어플로 투표를 받습니다.”

“그게 이유라고? 케이어스도 해외 팬 많잖아.”

그러니 뮤비가 공개 24시간 만에 조회 수 3,000만에 근접했지 않겠는가.

케이어스는 해외의 케이팝 팬들에게도 엄청난 인지도가 있다.

“예, 케이어스도 해외 팬이 많습니다. 하지만 팬덤도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홍규헌의 머리도 퍼뜩 뜨였다. 이미 ‘롱 포’ 때 논의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소녀연맹은 데뷔부터 아이튜브를 이용한 프로모션을 진행해왔다.

중소 기획사의 한계로 미디어 홍보가 제한된 터라 어쩔 수 없이 택한 전략이긴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롱 포’ 이후에는 해외 팬을 위한 자막 서비스도 제공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팬덤을 끌어모으려 했다.

“케이어스가 제공하는 콘텐츠의 대부분은 뷔라이브의 추가 결제로 이뤄집니다. 아이튜브로는 안무 연습 영상이나 뮤비 정도가 올라옵니다. 애초에 케이어스는 아이튜브에 그토록 공을 들이지 않으니까요.”

해외 팬들은 케이어스에게 호감이 있더라도 덕질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맞아, 한 이사가 그랬었지. 소녀연맹이 세계에 알려지기 전까지, 소녀연맹의 프로모션은…….”

초저가 전략.

세상 곳곳으로 뻗어나갈 때까지, 소녀연맹의 콘텐츠는 거의 대부분 무료로 제공된다.

한국보다 1인당 국민 소득이 낮은 나라에게 소녀연맹보다 덕질하기 편한 케이팝 그룹은 없을 터다.

‘롱 포’ 때도 그 효과를 체감하고 계속해서 해외 팬 인프라를 확대하지 않았던가.

“이로써 확실해졌습니다. 저희의 원래 목적대로 소녀연맹은 해외 팬덤을 확립한 겁니다.”

해외의 케이팝 팬들은 대부분 멀티―팬덤, 즉 잡덕이다. 어느 그룹의 팬이라기보다는 ‘한류팬’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

“소녀연맹의 팬덤이 생겼다고 확언할 수 있겠습니다.”

소녀연맹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그야말로 팬덤이라 불리기 아깝지 않은 집단이 해외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홍규헌은 그제야 소녀연맹의 음방 1위에 납득할 수 있었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라는 거인을 물리친 이유가 드러났다.

‘박 이사 말이 맞았네.’

성필은 멤버들이 데뷔하기 전부터 아이튜브와 SNS 채널을 개설하고 활발하게 운영해왔다.

당시 가로 엔터 사람들은 성필이 괜한 곳에 힘을 뺀다고 생각해왔으나.

‘괜한 짓이 아니었어.’

그때 뿌린 씨앗은 착실하게 자라나 높이 뻗어가고 있었다.

* * *

“앨범 사전 예약을 안 하셨다구요?!”

20살의 러시아 ‘인민’, 로자는 플레하노브의 발언에 깜짝 놀랐다.

플레하노브는 근육질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다.

“그렇다. 난 소련(Soryeon)이들이 컴백한 후에 앨범을 15장 구매했지.”

“왜, 왜요? 사전 예약 구성품 안 받으시게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플레하노브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군대 시절 익힌 언행 때문인지 때론 로자를 하급자처럼 대하곤 했다.

로자가 심기 불편한 티를 내니 플레하노브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미안하다. 내 말투가…….”

“알아요. 딱히 고치라곤 안 해요.”

“고맙군. 어쨌거나 난 사전 예약 구성품보다 바라는 게 있다.”

“뭔데요?”

“승리!”

“승리?”

“소련이들이 케이어스를 이기는 걸 보고 싶었다. 데뷔 때부터 적이었으니.”

“케이어스가 왜 소녀연맹의 적인데요?”

“적이지. 신인상을 못 받게 만들었으니까.”

“SNS 보면 친한 거 같던데요.”

“그거랑 이건 달라. 아무튼 나는 승리를 바랐다.”

그거랑 사전 예약을 안 한 거랑 무슨 상관일까?

“소련이와 케이어스는 컴백 타이밍이 거의 똑같아. 그러니 음악 방송에서의 음반 점수는 케이어스의 초동판매량, 그리고 소련이들의 사전 예약 판매량이 격돌하겠지.”

안타깝지만, 소녀연맹 정규 앨범의 사전 예약 기간이 길다 하여도 케이어스의 초동판매량을 이길 수는 없으리라.

“그럴 바에야, 케이어스의 앨범 수요가 초동판매량으로 전부 빠져나간 후에 싸우는 게 더 이득이 아닌가?”

“플레하노브 씨 혼자만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요. 소련이들 앨범 수요도 사전 예약으로 다 빠져나갔을 텐데…….”

“그래서 선전관이 일을 열심히 했다.”

“선전관님이요?”

플레하노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선, 약 한 달 동안 인터넷의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던 선전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일 폐인처럼 노트북만 붙잡고 있던 선전관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각국의 소녀연맹 팬덤 커뮤니티로 가서 해당 전략을 설명했지. 그래, 지령을 내린 거다.”

앨범 사전 예약을 하지 말고, 소녀연맹이 컴백한 이후 초동판매량에 힘을 모아달라고 말이다.

“만약 인민이들의 뜻이 모인다면, 컴백 2주 차에 케이어스를 한 번이라도 이기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누가 사전 예약 구성품 포기하고 컴백한 후에 앨범을 사요.”

“너는 소련이들의 1위보다 스페셜 브로마이드가 너 탐나나 보지?”

“……저도 물론 소련이들이 1등 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죠.”

“그럼 지금 당장 앨범을 추가로 구매해라!”

로자는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이번 주는 좀…….”

“그래, 대학생은 가난하니 이해한다. 술자리, 옷, 화장품, 데이트 등으로 쓸 데가 많겠지.”

“아, 맞아요. 옷 때문이에요. 이거 보실래요?”

로자가 노트북 화면을 돌려 플레하노브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 떠오른 건 ‘케이팝 클로즈’라는 의류 쇼핑몰이었다.

“이거 보세요. 인민이들이 음방에서 입었던 옷이에요!”

“오, 정말이로군. 생긴 건 좀 다른데?”

“소련이들은 무대용으로 수선을 했을 테니까요. 근데 기본적으로 같은 옷이에요. 이거 보세요, 여기 이것도 셋째 날 음방에서 입었던 거예요.”

“음…….”

옷을 둘러보던 플레하노브가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

“다 같은 브랜드로군.”

어바이비.

* * *

하시모토는 매장 매니저 집무실에 하릴없이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사람들의 복장에 민감했는데, 요즘 들어 거슬리는 일이 하나 생겼다.

‘이 나라 인간들은 어떻게 된 게 다 비슷비슷한 외투만 입는군.’

김밥처럼 몸을 돌돌 감싸는 검은 패딩.

이른바 롱패딩이다.

좀 꾸민다는 사람들은 추운 날씨에도 모직 코트나 스웨터 등,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어 코디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롱패딩으로 전신을 갑옷처럼 감싸고 있었다.

‘이 유행은 내년까지 이어질까? 어바이비는 롱패딩을 만들진 않지만, 내년에는 라인업에 추가될지 모르겠군. 일본에 가본 적이 없으니 사정을 잘 모르겠어.’

자진해서 한국 총괄 매니저가 되긴 했으나, 때때로 고향인 일본이 그리워진다.

특히 살을 에는 바람이 뼈를 울리는 추운 겨울엔 더욱 그립다.

“매니저님!”

그때 부매니저인 김상명이 집무실을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하시모토가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보는 것보다도 빠르게, 김상명은 날 듯이 뛰어와 책상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키무 군 뭔가! 내가 적자만 낸다고 예의마저 잊어버린 건가!”

“큰일입니다!”

“큰일? 설마 본사에서 사업을 철수하라고 한 거냐! 큿소(젠장)……!”

이대로라면 일본으로 돌아가 변방의 매장 매니저로 임명될 게 틀림없다.

최소한 어바이비 임원들에게 변명할 성과라도 만들어야 했는데…….

“제기랄, 지금이라도 부산에 해수욕을 즐기러 가야겠다! 키무 군, 내 자리를 부탁…….”

“발주가 들어왔어요!”

“발주?”

확실히 큰일이긴 하다.

“어떤 머리가 텅텅 빈 놈들인지는 몰라도 소매 매장으로 발주를 넣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딴 거 말할 때가 아닙니다! 빨리 읽어보세요!”

하시모토는 퉁명스레 김상명이 가져다준 서류철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깜짝 놀랐다. 그 반응에 만족한 김상명은 열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매니저님, 드디어 저희한테도……!”

“이런 쓰레기 같은 양식은 처음 보는군! 이 녀석들 어디에 사는 촌놈들이냐? 무슨 연 매출 몇천만 원짜리 스타트업 쇼핑몰인가?”

김상명은 하시모토의 뒤통수를 쳐버리고 싶은 열망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발주 물량을 보세요!”

발주 물량을 본 하시모토가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어…….”

사실, 깜짝 놀란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양은 어바이비 본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하시모토에겐 별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시할 만큼 적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어째서 어바이비의 서울 매장으로 이런 제안이 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 양을 우리가 판다면 그럴듯한 실적은 올릴 수 있겠지만…… 요청한 라인업 물량이 부족하군. 이상한 건 소수 종류에만 발주가 집중되어 있단 점이야. 기준이 뭐지? 가격…… 은 아니고. 디자인이나 타깃층이 일치하지 않는 옷들이야. 그나마 여성복이란 점이…….”

“소녀연맹이 입었던 옷이에요!”

“뭐?”

김상명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양팔을 펄럭이면서 말했다.

“소녀연맹이 음방에서 입었던 옷! SNS에 자주 노출했던 옷! 음방 출근길에 입었던 옷! 여기 적힌 요청 전부 소녀연맹과 관련 있어요!”

“…….”

하시모토는 발주한 기업의 이름을 보았다.

‘케이팝 클로즈’라는 곳이었다.

“여긴?”

“본사는 미국에 있지만 주요 국가의 언어로 된 사이트를 제공하는 인터넷 쇼핑몰입니다. 케이팝 아이돌이나 한국 배우들이 입은 옷을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에요. 제가 각국 사이트로 접속해봤는데, 소녀연맹이 입었던 어바이비 옷들이 다 매진…….”

하시모토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키무 군, 나는 가겠다.”

“부산으로요?!”

“아니, 본사로. 이건 내가 먹어야 해. 어바이비의 다른 임원이나 매니저들이 알기 전에 내가 처리해야 한다.”

“그냥 저희가 본사로 물건을 주문해서…….”

“그럼 누군가 눈치챌 거다. 어째서 이만한 물량이 한 번에 필요한지 들키면, 이 실적들이 전부 다른 놈들 뱃속으로 갈 수도 있어.”

“그런……! 역시 본사 가까이에서 정치질만 몇 년 하신 분답게 머리 회전이 빠르시군요!”

“뭐?”

“아닙니다.”

“아무튼 난 바로 비행기를 타고 가보겠다.”

하시모토가 외투를 걸쳤다.

김상명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하시모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쁜 일이 벌어졌지만, 김상명은 살짝 불만도 있었다.

‘소녀연맹은 우리 매장 공식 모델이 됐어. 이번 성과도 소녀연맹 덕분이고. 따로 가로 엔터로 인사한다든가 하는 지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이돌이란 이유로 소녀연맹을 깔보고 있는 것일까.

김상명은 하시모토를 향한 옅은 불만을 숨겼다. 그가 시키기 않는다면, 김상명 자신이 알아서 가로 엔터로 감사를 표하면 될 일이다.

“아, 키무 군.”

집무실을 나가던 중, 하시모토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예? 아, 예, 매니저님.”

“브랜드 앰배서더 추천서를 준비해두도록.”

“……예?”

브랜드 앰배서더.

브랜드가 공식적으로 임명한, 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협찬 연예인이다.

앰배서더의 조건은 일단 유명세다. 또한 브랜드의 이미지에도 맞으며, 브랜드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앰배서더로 임명되면 온갖 협찬과 혜택을 부여된다.

하시모토는 앰배서더 추천 권한이 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으, 추천은 누구로……?”

“누구겠나.”

소녀연맹이다.

* * *

소녀연맹 멤버들은 멍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너무 울어서 그런지 다들 눈이 따갑고 메이크업이 흘러서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말 그대로 멍하다.

하지만 그런 불쾌감을 아득히 상회하는 행복감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듯하다.

“축하해요!”

소녀연맹의 대기실 근처로 가니 백댄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몇 달 동안 함께 안무를 연습한 동료들이다.

그들이 박수와 환호성, 휘파람으로 축하해주었다. 소녀연맹은 수십 명의 댄서들이 만든 통로를 걸어가면서 연신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어 얘들아!”

“연습 열심히 하더니 빛을 보네요.”

“회사에 말해서 회식하자고 해봐.”

“축하해요 진짜!”

멤버들이 대기실 입구에 서기까지 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이 소란이 계속되자 다른 아이돌들도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소란의 중심이 소녀연맹이란 것을 깨닫곤 이해하는 눈치였다.

무려 음방 첫 1위다.

그것도 중소 기획사 출신 걸그룹의 1위다.

설령 이곳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파티를 벌이더라도 대부분의 아이돌이 이해할 터였다.

그만큼 음방 1위란 건 커다란 업적이다. 모든 아이돌이 데뷔하는 순간부터 꿈꿀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케이어스를 꺾고 얻어낸 1위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백설하는 거의 90도로 허리를 접다시피 하며 복도를 지나갔다.

댄서들은 그런 백설하와 멤버들을 귀엽단 듯 바라보았다.

마침내 멤버들은 대기실 입구에 도착했다. 열린 문 안쪽으로는 스타일링 스태프와 안쪽에 자리를 얻은 백댄서들, 그리고 성필이 있었다.

“1등 축하해!”

역시나 대기실 안쪽의 사람들도 축하를 전해주었다. 이렇게 자주 듣는다면 별다른 감흥이 없을 법도 하건만, 멤버들은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얘들아.”

의외로 성필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멤버들이 서로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대기실 정중앙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고생했어. 그리고 축하한다.”

성필은 가장 앞에 있던 조아라와 악수했다.

조아라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곤 별 무리를 담은 듯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그녀의 눈으로부터 자부심이 은하수처럼 또렷이 흘러내렸다.

“우리 아라, 기가 많이 살았네? 1등 했는데 울지도 않아?”

“아저씨도 생방송 봤잖아요. 무대에서 평생 흘릴 눈물 다 흘렸어요.”

“그래.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정신 말고 몸이 컸단 얘기야.”

조아라가 성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가 ‘아아악!’ 고통을 호소하자 조아라는 옅게 웃으면서 손을 놔주었다.

성필은 자신의 손을 쓸면서, 다음으로는 신아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조아라와 마찬가지로 악수를 청했다.

신아름은 그것을 보곤 픽 웃더니, 그의 손을 쳐낸 후 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성필도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포옹했다.

“아름아 많이 힘들었지? 5년 넘게 연습생으로 사느라 궂은일도 많았지만, 결국 이렇게 데뷔해서 1등을…….”

“아저씨 사람 차별해요? 나한테는 이상한 말만 하더니 신아름한테는…….”

“조아라 닥쳐. 팀장님이 말하고 있잖아.”

“…….”

“그래, 아무튼, 네가 1등 하는 거 보니까 기분 좋다.”

“그게 끝이에요?”

“정말…… 내 인생에서 대학 안 간 걸 후회했던 적은 많았는데. 오늘만큼 후회되는 건 처음이야.”

“네?”

“대학에 가서 공부 열심히 했으면, 지금 내 기분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었을 거잖아. 아니, 아예 소감문으로 써와서 말해줬을 텐데…….”

“치…….”

성필과 신아름은 한 번 더 강하게 서로를 안은 뒤 떨어졌다. 신아름은 언제까지고 성필과 이 행복을 나누고 싶었으나, 다음 차례가 있지 않은가.

성필이 백설하의 앞으로 왔다.

백설하는 쭈뼛대면서 소심하게 팔을 펼치려고 했는데, 성필이 손을 내밀기에 덜컥 그 손을 잡아버렸다.

악수…….

“설하야.”

“네, 네.”

“아니, 설하 씨.”

“네?!”

“하하, 오랜만이네요. 설하 씨라고 부르는 거요.”

“가, 갑자기 왜애…….”

“또 거리감이 생겨서요.”

“네……?”

“음방 1위 한 아이돌이라 그런지 아우라가 남다르네요. 막 다가가기도 힘들어. 내가 너 처음 봤을 때 마음속으로 그렸던 게 오늘 같은 날이었어.”

백설하의 눈가에서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천천히 퍼졌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면서 어떻게든 평소대로 눈을 뜨고 있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눈물 때문에 눈이 감길 듯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무대에 서서, 트로피를 안고, 또 기뻐하며 소감을 말하는 거. 아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렸던 너보다 오늘이 훨씬 더 빛나. 설하야.”

성필이 백설하의 손을 양손으로 포근하게 쥐었다.

“어때. 3년 전에 나 따라오길 잘했지?”

“네, 네에, 정말, 잘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빛은 영원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아이돌을 했다’ 같은 말은 술자리 안줏거리로나 썼겠지. 그리고 가끔 후회를 곱씹으면서 인생을 보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 저를 데려와 주셔서…….”

성필은 따스한 미소를 지은 후 백설하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음으론 장하양의 앞에 섰다.

장하양은 싱긋 웃고 손을 내밀다가, 뒤늦게 자신의 눈가에 번진 화장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성필은 그 악수를 받아주지 않았다.

“박 이사님?”

장하양이 불안한 기색으로 부르자, 성필은 씩 웃으면서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비닐에 소중히 싸인 꽃을 한 송이 꺼냈다.

보라색의 튤립이었다.

그것을 본 장하양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양아. 넌 원래 아이돌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었지. 네 꿈은 배우라고 했었어. 그렇지?”

“……네.”

“항상 목에 가시가 걸린 거 같았어. 다른 꿈이 있는 애를, 괜히 걷기도 싫은 길에 데려다 둔 거 아닌가 하고 말이야.”

“아니에요…….”

“아이돌도 괜찮지?”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최초의 팬으로서 감히 말하는데, 하양이는 극장 무대보다 콘서트 무대가 더 어울릴 거 같아. 밝은 조명과 폭죽, 사람들의 환호성…….”

성필이 튤립을 내밀자 장하양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팬으로서, 고마워. 이 길을 진심을 다해 달려줘서.”

장하양은 튤립을 양손으로 쥐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봄비를 맞고 생기를 펼치는 꽃을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장하양과 같을 것이다.

그녀는 행복과 감동을 어지러이 음미하느라, 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성필은 장하양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마지막으로 리카의 앞에 섰…….

“리카?”

리카는 아직 문 근처에 서 있었다. 다른 멤버들처럼 중앙으로 오지 않은 것이다.

아니, 안 왔다기보다는 도중에 걸음이 멈춘 듯했다. 성필을 보자마자 다리가 떨려서 더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성필은 그런 리카를 이해하고 직접 다가가려 했다.

“오지 마세요!”

그때 리카가 성필을 막았다.

“어?”

“오지 마시라구요!”

“왜, 왜?”

성필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서 기억을 되짚었다.

그의 혼란은 리카가 등을 돌리자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아예 대기실을 나가버린 것이다.

“리카?!”

그때 리카가 멈춰 섰다.

대기실 밖 복도로부터, 그녀는 뒤로 홱 돌아 성필을 바라보았다.

“저, 겨우 악수나 포옹 정도로는 지금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요.”

리카가 달리기 자세를 취했다.

“아타시(저), 지금부터 날겠습니다!”

리카는 전속력으로 성필을 향해 달렸다.

익숙한 상황이다.

2년 전, 성필이 멤버들에게 ‘숙소로 들어가라’고 했을 때와 완전히 같다.

당시의 리카는 드디어 데뷔가 목전에 왔단 사실을 깨닫곤, 그때까지의 고생과 노력을 떠올리며 울었었다.

‘그리고 그때…….’

성필은 리카가 포옹하려는 것을 알자 불안해하면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 당시의 성필은 멤버들과의 거리감 때문에 줄곧 고민해왔으니까.

특히 리카는 자꾸만 달라붙어 왔던 터라, 이래도 되는 건지 싶어서 죄책감 비슷한 것에 시달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와라!”

성필은 친구를 향해 기꺼이 팔을 펼쳤다.

달려오는 리카를 바라보는 성필의 눈에는, 다른 멤버들을 앞에 뒀을 때처럼 현재와 과거가 겹쳤다.

‘에에에에엣?! 키미(당신)!’

처음 만났던 리카.

‘이사님이 옛날에 저 꼬시면서 했던 말 전부 뻥이었으니까!’

서운해하던 리카.

‘아타시(저), 소녀 가장이 됩니다!’

소녀 가장이 된 리카.

‘저, 성공할 수 있나요? 못하면요? 이사님. 성공 못 해도 사장님이랑 이사님들 탓 안 할게요. 그러니까, 망하면요, 저도 이사님 안 싫어할 테니까요. 이사님도 저 싫어하지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이해해주셔야 해요. 알겠죠?’

맹장염에 걸렸던 리카.

‘에이, 그냥 친구해요 그럼. 이사님이 그걸로 좋으시면요!’

친구가 된 리카.

‘아타시(저),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가 됩니다! 폭력 유혈 혁명이에요!’

코뮤니스트가 된 리카.

‘그럼, 저, 제가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아타시(저)는 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라구요! ……저는 애예요!’

어른에서 애가 된 리카.

‘아타시(저)는, 이사님이 저를 처음 봤을 때 기대했던 것 같은 아이돌이 됐나요?’

불안해하던 리카.

그리고.

리카는 천장 가까이 날아 성필의 품에 안착했다. 성필은 리카를 꽉 안고는 360도로 5회전 했다.

“1등이다!”

리카는 웃으면서 울었다.

“1등이에요!”

한국에 와서 아이돌을 꿈꾼 지도 4년이 넘었다. 리카는 아이돌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음방 1등이라는 숙원을 이루었다.

“응, 1등이야.”

리카를 붙잡고 도는 성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더는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리카 네가 1등이야!”

“아타시(제)가 1등이에요!”

리카를 만난 지 3년.

성필은 그녀와 함께 자신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아니, 이제 성필만 꾸는 꿈이 아니다.

모두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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