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에리카는 마이크를 쥐기만 하고서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분명 음방 1위는 1년 전에도 해봤을 텐데, 에리카는 1위의 감동이 익숙해지지 않는지 한껏 떨리는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마저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여린 풋풋함이다.
“어, 어어…….”
진소유가 에리카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녀의 격려에 정신을 차린 에리카는 눈물이 아름답게 번진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에리카가 환희를 담아 말했다.
“‘유스’ 고마워요! 정말 감사합니다!”
에리카가 팬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뒤로도 감사 인사 목록이 쭈욱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KS 엔터의 임직원분들 감사드립니다.”
케이어스가 허리를 숙이자 다시 한번 꽃가루가 터지며, 그녀들의 컴백곡인 ‘가이아’가 흘러나왔다.
무대에 출연했던 아이돌들은 박수를 치면서 퇴장하거나, 케이어스와 인사를 나누면서 축하를 전했다.
‘후보였어.’
소녀연맹은 1위 후보였다. 그래서 케이어스의 바로 옆에 있었기에, 뒤에 선 이들과는 다르게 바로 무대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케이어스와 마주치지 않고 떠나길 바랐으나, 그럴 수는 없다.
‘언니’라며, 에리카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그녀의 부름은 백설하를 향해 있었다.
넋이 나가 있던 백설하는 기계적으로 미소를 만든 뒤 팔을 펼쳤다.
이내 백설하와 에리카가 서로를 안았다. 백설하의 뒤에선 소녀연맹 멤버들이 박수를 쳤다. 그렇게 한동안 감동적인 포옹이 이어졌다.
“축하해.”
“고마워요 언니.”
앙코르로 노래를 부르던 김민주가 에리카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했다.
에리카는 포옹을 풀곤 백설하에게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소녀연맹마저도 무대에서 퇴장하고 케이어스만의 앙코르 무대가 이어졌다.
“이상해요…….”
무대를 내려가던 중, 신아름이 분을 이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신아름은 몇 걸음 더 앞서서 백설하를 막아섰다.
“이상하지 않아요? 왜 우리가 지는 건데요?”
현재 상황은 소녀연맹에게 유리하다.
케이어스는 초동판매량이 잡히지 않았고, 소녀연맹은 사전예약 판매량이 잡혔다.
“그럼 우리가 앨범 판매량이 훨씬 많은 거잖아요! 왜 우리가 지는 거예요?”
“아, 아름아…….”
리카는 누가 들을까 걱정하는 기색으로 신아름의 어깨를 쓸었다. 겨우 진정한 신아름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하지만 여전히 분노를 담아 물었다.
“이거 조작 같은 거 아니에요? 음원 성적도 몇 위 차이 안 나잖아요. 그래, 걔네 음원 차트 1위인 건 아는데 우리도 TOP10 안에 있어요. 근데 이게, 대체 왜…….”
백설하는 어떻게 동생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야, 백설하도 신아름과 같은 마음가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아름아, 이 방송에서 음반 판매량은 성적의 5%밖에 안 돼.”
“……5%요? 겨, 겨우 5%?”
“가장 높은 음방도 10% 정도뿐이야.”
그러니 현시점에서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이 더 높게 잡힌다 해도, 케이어스에게 이기기는 힘들다.
“음원 점수는 50%야. 그리고 케이어스는 음원에서 이기고 있고…….”
신아름은 음악방송이 여러 기준으로 1위를 선정한다는 것만 알았지, 그 기준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고 살아왔다.
막연히 좋은 곡을 만들면 1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토록 목을 맸던 앨범 판매량이란 기준이 겨우 5%의 비중밖에 없다니?
최소 20, 30%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왜…….”
신아름은 충격을 받아서 말을 더듬었다.
충격받은 건 신아름만이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도 방송 순위 기준을 모르고 있었기에, 백설하의 설명으로 얻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그러면, 그럼, 나머지 기준은 뭐예요?”
“전문가 점수, 방송 점수, 시청자 투표.”
“그걸로는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시청자 투표 비율이 10%야. 그러니까 아름아…….”
시청자 투표의 비율이 10%라면, 케이어스는 그것만으로도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 점수와 시청자 투표 점수를 깔아뭉갤 수도 있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는 국내 팬덤 크기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에.
“정말 아쉽지만.”
데뷔 당시의 백설하라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을 거야!’라며 용기를 북돋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용기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게 필요하다. 괜한 희망으로 남은 6주 동안 고통받는 것보다야, 지금 희망을 일찌감치 버리고 멘탈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케이어스를 이기는 건 힘들어.”
음원 차트에서 케이어스를 이기지 못한다면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음원으로도 케이어스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기에, 사실상 음방 1위란 목표 또한 이룰 가능성이 없다.
“그렇게…… 된 거 같아…….”
담담하게 말하던 백설하의 말에 기어코 물기가 서렸다.
“이번에도 우리는 졌어…….”
멤버들은 느릿느릿한 백설하의 걸음을 따라 대기실로 향했다. 무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경섭과 매니저 안이상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다음에는 1위 할 수 있을 거다.
이번 점수 차이는 아까웠다.
다음에도 힘내자 등등.
백설하는 웃으면서 답했지만 마음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앞으로 남은 게 패배뿐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거품처럼 느껴졌다.
“아.”
그런 마음은 대기실 바로 앞에 왔을 때 극대화됐다. 문 앞에서 성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아쉬움을 잔뜩 담았다.
“얘들아, 수고했어.”
성필이 따스한 위로를 전했다.
그 말을 듣자.
“흑…….”
기대했던 양만큼의 커다란 아쉬움이, 백설하의 심장을 거세게 강타했다.
* * *
내일은 오랜만에 음방이 없는 날이다.
무대를 위한 연습도 오늘만큼은 접어두고, 소녀연맹 멤버들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거실에 모인 그녀들의 분위기는 안 좋기만 했다.
“다들 왜 죽상인가요!”
오늘의 요리사가 된 리카가 활기차게 외쳤다. 그녀는 프릴이 잔뜩 달린 앞치마를 한 채 머리에는 두건을 둘렀다.
“제 특제 초밥을 먹고 힘을 내세요!”
리카는 마트에서 생연어를 2kg이나 사 와서 초밥을 즉석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대체 저 연어를 언제 다 먹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어쨌든 리카는 열심히 초밥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초밥을 겨우 하나 집어먹은 백설하가 젓가락을 놓았다.
“나, 이번에는 될 줄 알았어.”
백설하가 분하단 듯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년간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여겨왔다. 마침내 정규 앨범으로 보기 좋게 한 방 먹이리라고 생각했다.
그야 앨범 판매량이 무려 12만 장이니까. 소녀연맹의 머리 위로는 손에 꼽히는 숫자의 걸그룹밖에 없다.
천하의 케이어스라도 따라잡기 힘든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음방에서 이기는 것도 기대해볼 만하지 않았던가.
팬덤도 늘어났을 테고…… 음원 차트 순위도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고…… 비율은 낮아도 앨범 점수가 크게 앞설 테니…… 혹시라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에, 졌어, 또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또 케이어스에게 져버렸다. 또한 에리카에게 져버렸다.
물론 백설하는 자신이 에리카를 뛰어넘는 미래 따위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12만이라는 숫자가 희망이라는 콩깍지를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정말 기대했는데.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나간 음방마다 속속들이 져버렸다. 스포츠 경기로 따진다면 5연패(敗)를 달성한 것이다.
“박 이사님 실망하셨겠지? 우리, 정말 높이 올라왔는데, 그런데도 또…….”
역시 대형기획사는 이길 수가 없는 걸까.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백설하를 장하양이 달래주었다. 백설하는 등을 부드럽게 쓰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니, 박 이사님이 그러셨잖아요. 저희가 이룬 업적은 전무하다고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으응…… 그치만 박 이사님 내심 실망하셨을지도 몰라…….”
소녀연맹은 자신들의 가능성을 의심하던 날이 많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던 건 성필이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다들 그 믿음에 보답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니, 그만큼이나 소녀연맹을 믿었던 성필의 실망감은 헤아릴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멤버들보다 성필이 더욱 슬프겠지.
“언니 뚝.”
“흐으, 으응…….”
“여기 초밥 드세요. 리카가 고향 음식이라서 그런지 잘 만들어요.”
“인종차별인가요? 애매하네요. 그리고 저 초밥은 처음 만들어보는 거예요!”
“언니, 맛있으세요?”
“마히혀…….”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기분 푸세요.”
“응…….”
신아름은 어처구니가 가출한 듯한 눈길로 백설하를 흘겼다. 저 인간이 정말 23살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백설하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컴백 전까지만 해도 우직하게 뿌리 내린 나무처럼 동요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멤버들이 불안해할 것을 알아서였다.
하지만 컴백하고 성적이 나오자, 그녀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실들이 순간적으로 풀린 것이다.
그래도, 신아름은 백설하의 이런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고 싶진 않았다.
“쌤 진짜 배가 불렀다.”
“으, 응?”
“우리 목표 예약판매량이 4만이었잖아요. 그거 3배나 되는 성적 올려놓고도 울상이에요?”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팀장님이 우리 보고 우는 거 못 봤어요? 컴백날 음방 가기 전에 차 앞에 무릎 꿇고 오열했었잖아요. 팀장님이 그렇게 기뻐하는데 까짓거 1등 못 하면 어때요. 체급 차이라는 게 있잖아요.”
1년 만에 대형기획사가 만들어낸 걸작, 케이어스를 이기고 1등에 오른단 게 말이 안 되는 목표이긴 하다.
“내가 팀장님 오래 봐서 아는데, 팀장님 저렇게 기뻐한 적 많이 없어요. 쌤도 팀장님이랑 오래 지내다 보면 알…….”
장하양이 그만하란 듯 신아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신아름이 입을 다물자, 장하양은 계속 백설하의 입에 초밥을 넣어주었다.
“하, 하양아 내가 먹을 테니까 그만…….”
“언니 제가 손 떼면 또 우울해하실 거잖아요.”
‘우울한 건 하양 언니 같은데.’
신아름이 보기에, 장하양은 백설하에게 음식을 먹이면서 마음을 달래는 듯했다.
사람들이 먹방을 보면서 멍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면서 기뻐하는 거거나.
“그래도요오.”
캔맥주 마시는 것을 허락받은 조아라는 조금 취해선 혀가 풀렸다.
“저희가? 앨범 판매량은 이기겠죠? 12만 장이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오…… 판매량은 이기겠지. 암, 그럼, 이기고말고.”
“…….”
멤버들은 조아라의 기괴한 텐션에 맞춰주는 게 지쳐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아라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한의사님한테에, 전화해야지이.”
밤 11시 45분, 한구인을 향한 발신음이 들렸다.
“여보세요오? 한의사니임? 나 이번에 시상식에서 상 받을 수 있겠…… 네. 술 마셨…….”
갑자기 조아라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흔들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끊었네?”
“저기, 아라쨩,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아저씨한테 해야지이.”
뚜르르르, 발신음 한 번 만에 성필이 받았다.
“아저씨이? 저 아라인데요오. 저희 이번에…….”
[꺄아아아아아악!]
괴성 뒤, 성필이 전화를 끊었다.
“……뭐야. 아저씨 괴수한테 습격이라도 당했나?”
보다 못한 백설하는 조아라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맥주 한 캔이 전부 비워지자 조아라의 기분은 더더욱 좋아졌다.
“아, 케이어스 그 쌔끼들 초동 나왔겠다. 기사 떴죠? 얼마래요? 한…… 저번보다 조금 올라서 13만 장 정도 되나아? 그 정도면 뭐…….”
“19만 장이래.”
“에이 씨팔 술맛 떨어지네.”
잠시 후, 조아라는 장하양에게 기절당하여 침을 흘린 채 바닥을 뒹굴었다.
* * *
“헉!”
조아라는 악몽이라도 꾼 사람처럼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엄습했다.
가슴이 추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아으, 머리야. 어제 술 너무 많이 마셨나.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없네…….’
기분이 들떴었던 것까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만, 갑자기 세상이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이 끊겼었다.
술이란 게 정말 무섭다.
‘가슴도 무겁…….’
리카가 조아라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목에 깍지를 끼며 안고 있어서, 조아라가 몸을 일으켰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라쨩 영원히 함께야…….”
조아라는 지체없이 리카를 떨쳐낸 뒤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방을 나섰다.
‘오늘 일정이 뭐더라. 오전에 멤버들이랑 회사에서 개인 연습하고, 오후에는 아라베스크 연습하러 댄서분들이랑 외부에서 만나고…….’
미리 술을 조절했어야 하는데, 실수했다.
안 그래도 곧 시상식 무대라 타이트한 연습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날 중 하나에 이런 컨디션 난조라니.
“하아.”
조아라는 거실 의자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타 마셨다. 속이 싹 씻기는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음원 사이트에 접속했다.
‘음원 사이트의 순위가 갱신 시작되는 건 아침 6시부터지.’
지금은 7시를 막 넘은 시각이다.
‘어차피 케이어스가 1위일 거고. 우리는 5위권 내에 진입했으려…….’
조아라의 손에 들린 커피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굴렀다.
검은 커피가 바닥으로 서서히 번져가 곧 카펫에 닿을 지경인데도, 조아라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핸드폰 액정에 나타난 사태를 이해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힘들었다.
“왜, 우리가…….”
조아라의 떨리는 손은 기어코 핸드폰마저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떨어진 핸드폰에서 창백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1위’란 글자를 토해냈다. 1위 옆에 쓰인 단어는.
[1위: 아라베스크 - 소녀연맹]
조아라는 황망하게 성필을 향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 시각이면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저씨? 일어났…….”
[끼아아아아아아악!]
“나 술 다 깼어요.”
[무슨 일이야?]
“워터 멜론 차트 봤어요?”
[너도 봤구나.]
성필의 목소리에 열띤 흥분이 감돌았다.
[이거 진짜 보통 일이 아니야.]
닫힌 줄 알았던 1위로의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