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23화 (223/760)

223화

김채현은 소녀연맹 컴백 사전녹화 방청 신청에서 떨어졌다.

이전엔 ‘아니’와 ‘롱 포’ 두 개 다 성공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덕질의 가호가 붙었나 생각했었지만, 단순히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이번 방청 신청 경쟁 빡셌잖아.”

“응…….”

친구인 이선주가 김채현을 위로해주었다.

비록 사녹 방청은 놓쳤으나 우울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규 앨범이 도착한 날이기 때문이다.

“에휴, 똑같은 걸 왜 다섯 개씩이나 샀는지…….”

김채현의 어머니는 혀를 차며 깎은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안 그래도 점심 즈음에 배달된 커다란 박스 다섯 개에 허파가 뒤집혔었다.

거기다가 딸과 그 친구는 야자를 마치자마자 날 듯이 뛰어와 호들갑을 떠는 꼴이라니…….

“똑같은 거 아니야! 다 다른 거란 말야!”

“다 소녀연맹 걔들 거라면서?”

“그렇긴 한데…… 달라!”

그 순간, 김채현은 이상 현상을 눈치챘다.

“엄마, 소녀연맹이란 이름 아네?”

“응? 알지 그럼. 엄마를 뭘로 보고. 요즘 예능에서 많이 나오잖아 걔네들.”

김채현의 가슴으로 처음 겪어보는 뿌듯함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렇구나. 이제 소련이들이 이 정도 급이구나!

실은 어머니가 딸이 미쳐 사는 소녀연맹이 궁금해서, 티비에 나올 때 주의 깊게 본 데 불과했다. 그러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채현이 얘는 좋아해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네……. 제대로 된 애인지 모르겠어.’

똑같은 앨범을 다섯 개나 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대체 요즘 아이돌의 상술은 어떻게 되먹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

김채현과 이선주는 검게 포장된 앨범 패키지를 보면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 일단 포스터부터 까볼까?”

“그래, 지관통 먼저…….”

“아!”

김채현이 갑자기 소리치자 이선주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비, 빌자. 뮤비 1회 시청하면서 소녀연맹한테 빌어야 해!”

제발 최애인 장하양 스페셜 포토 카드와 손 편지와 브로마이드와 스탠딩 카드와 미니 포스터와 기타 등등이 나와달라고!

소녀연맹의 정규 1집인 Girls’ Union은 랜덤 구성품이 다양하다.

전체적인 구성품은 알차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엔 더 힘들어졌다.

“맞네, 일단 뮤비부터 보자!”

이미 수십 번도 더 보았건만, 김채현과 이선주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손을 꼭 모은 뒤 ‘제발 하양이 제발 하양이 제발 하양이’라고 빌었다.

잠시 후 소녀연맹의 타이틀곡 중 하나, ‘아라베스크’가 재생되었다.

* * *

1917년, 러시아의 황제는 마린스키 극장에서의 발레 공연 관람을 마쳤다.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그는 일렬로 선 발레리나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들에게 직접 황실에서 만든 초콜릿과 과자를 선물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선물을 받은 발레리나들은 들뜬 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러시아 그 자체인 황제의 자애로운 눈길을 자랑스레 받았다.

마린스키 극장.

황립 극장의 무용수들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들이며, 또한 러시아 문화의 총화라 불릴 만한 이들이다.

황실의 관심 또한 지대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러시아다.’

황제의 찬사에 발레리나와 스태프들은 흐느끼며 눈물조차 감추지 못했다.

아, 이 고귀한 인간이야말로 러시아 그 자체이신 분. 문화의 수호자이자 영원토록 어머니 대지 위에 군림하실 분이다…….

동시에, 1917년.

러시아 제국은 종말을 맞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민중들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혁명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경찰서를, 소방서를, 도서관을, 공기관을 습격하여 황제의 상징물들을 파괴했다.

‘인민 만세! 공산주의 만세! 위대한 레닌 동무 만세!’

붉은 물결이 도시를 휩쓸었다.

전제군주정의 가호를 받았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평등이라는 지상 가치를 위한 거름으로 변했다.

거름이 되어야 할 것 중에는 마린스키 극장도 있었다.

‘내일이 공연이야! 어딜 간다는 거냐!’

‘여기 계속 있다간 폭도들에게 죽을 거요! 지금 공연이 문제란 건가!’

‘감독님이 가시면 극장은 어떻게 되는……!’

수백 명에 이르는 극단원들이 점점 사라져갔다.

무용수, 스태프, 감독들, 극장의 중요 인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발레를 지워버리고 떠나갔다.

남은 건 고작 수십 명의 인원이었다.

개중에는 공연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을 처지에 놓일 어린 발레리나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불길이 번져가는 도시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이 사태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폭도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기어코 마린스키 극장도 혁명의 표적이 되었다.

봉건제의 유산, 전제군주정의 호의를 등에 업고 찬란함을 뽐내었던 발레 문화는 이젠 인민의 적이 되었다.

‘가거라, 최대한 멀리 도망가거라!’

극장주와 그 측근들은 무용수와 스태프들을 떠나보내려 했다.

‘그럼 여러분들은요?’

‘우린 끝까지 이곳을 지킨다.’

마린스키 극장, 러시아 문화의 첨단이 폭도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이 위대한 유산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다면, 후세에 다신 갚지 못할 죄를 저지르는 게 되리라.

‘저들을 설득할 거야.’

‘무모해요!’

‘죽을 거예요’라는 말은 삼켰다.

이미 목이 잘려 장대에 꿰어진 자본가와 귀족들, 군주제에 호응했던 하급 관리가 길가에 싸늘히 전시된 마당이었다.

이 호화스러운 극장의 단원들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몇몇이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고작 30명이 되는 인원뿐이었다. 끝까지 남아 극장을 수호하길 바라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극장의 거대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밖의 복도로부터 다급한 발소리와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온다.

봉건제의 마지막 숨결을 끊으러 온 혁명의 사자들이다.

수십 개의 문이 동시에 열리며 인류에 대한 애정에 가득 찬, 그리고 분노를 공기처럼 마시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과 갈퀴를 든 수백 명이 좌석을 지나 무대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라.’

민중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포박하고 밖으로 데려가겠다. 너희의 운명은 인민들에게 달려 있다.’

민중의 손에 들린 횃불은 마린스키 극장을 태워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반백 년에 이르는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그 위에는 공산주의의 기념물이 들어설 게 틀림없었다.

이건 인류를 위한 일.

인류의 자유와 평등, 형제애를 위한 과업.

후세가 드높이 평가할 위업이니까.

‘어서 무릎을 꿇어.’

총과 칼을 쥔 이들이 점점 무대로 다가온다.

그러자 무대 위에 선 극단원들은 팔짱을 끼고 표독스러운 눈길을 세웠다.

그 기세에 민중들도 걸음이 멈추었다.

‘살아서 나가지 않겠다면 죽이는 수밖에.’

혁명 단원의 명령, 고함, 외침.

그에 따라 민중들이 괴성을 지르며 무대로 돌진했다. 그럴수록 극단원들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진다.

이윽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칼날에 동정은 없었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타인의 목숨 또한 쉽게 취할 수 있었다.

칼질 한 번에 수십 년간 쌓아온 문화적 경험과 지식이 허망하게 빛을 잃었다.

총질 한 번에 몇 년 동안 쌓아왔던 발레적 기교가 세상에서 사라진다.

극단원들이 사라질수록 러시아 문화의 빛도 점차 약해졌다.

‘마지막, 이다.’

민중들은 살육의 열기에 취해 있으면서도, 아직 저항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다섯 명의 소녀들이다.

그녀들은 피를 뒤집어쓰고 서로의 팔짱을 굳게 걸고 있었다.

‘무릎을 꿇어라.’

한 소녀가 말했다.

‘극장을 태우지 말아주세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 건, 누구보다 소녀가 가장 잘 알았다.

발레는 혁명가들이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는 봉건제도의 잔재였으니까. 인민을 등한시하는 추악한 문화이며 오염된 문명이었다.

칼과 창이 높이 올라가 서늘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간다.

폭력을 향해, 문화가 손을 내민다.

다섯 명의 소녀들은 고아한 몸짓으로 ‘아라베스크’를 취한다.

부드럽게 펼친 손끝, 하늘로 우아하게 솟아오른 다리.

짧은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춤.

그리고, 검이 아래로 내려쳐진다.

무대 위로 수십 구의 시체가 쌓였다. 그 피는 나무 바닥의 결을 따라 기어코 좌석으로까지 내려왔다.

‘…….’

참혹한 광경이다.

혁명의 사자들은 한참 동안 인류에 대한 사랑이 저지른,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혁명의 위업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죽음으로 짜인 카페트다.

민중들은 강처럼 흐르는 피를 향해 횃불을 들이댔다. 피를 머금은 불꽃이 꺼져간다.

하나, 둘.

그리고 전부.

이제 그들의 손에 들린 건 칼과 총뿐이었다.

‘우리는 신념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저들은 신념을 위해 자신이 죽었다.’

혁명단원이 말했다.

‘우리가 야만적이라 불렀던 봉건의 잔재들은 그러했다. 하지만 진실로 야만적인 건 누구인가.’

분노에 차 있던 자들은 등을 돌려 극장을 빠져나갔다.

피가 흐르는 소리와 이제는 끊긴 숨결만이 가득한 극장의 밖으로는, 여전히 분노에 찬 고함이 어지러이 들려온다.

하지만 극장 안은 고요했다.

시간은 지나간다.

100년 뒤, 마린스키 극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수만 명의 관객 앞에서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과 같은 빛 속에서 그녀는 만인을 향해 ‘아라베스크’를 취한다.

백 년 전, 피와 시체가 가득했던 무대 위로 박수갈채가 빗발처럼 몰아쳤다.

* * *

KS 엔터 A&R팀 전용의 거대한 회의실.

프로젝터에 떠오른 소녀연맹 ‘아라베스크’의 뮤비가 끝났다.

침묵 속에서 모든 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호환을 향했다. 그는 상석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그래, 그만한 성적이 나올 수준은 되네.”

정호환의 입에서 인정이 떨어졌다.

KS 엔터의 A&R은 ‘롱 포’부터 소녀연맹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케이어스에 대한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김에 소녀연맹의 뮤비도 챙겨봤던 것인데…….

“이거 드라마타이즈가 미쳤어요.”

“어, 진짜. 이야, 이거 ‘아니’ 때 서사를 이렇게 끌고 올 줄은 몰랐네. 영화를 만들어놨어.”

“뮤비 만든 사람 누군지 아시는 분?”

“JJH에서 만들었대요. 그쪽 포폴 확인해보면…….”

“곡에 뭄바톤 넣는다기에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이런 식으로 변주를 줄지는 몰랐어요.”

“확실히 걸그룹이 쌩으로 소화하기에 과격하긴 하지.”

“다들 가사는 들었어요? 제가 소녀연맹 데뷔 때부터 봤는데요, 이거 세계관이…….”

어느새 A&R팀 회의는 소녀연맹 감평회로 변해버렸다.

당연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누구보다 아이돌을 브랜딩하고 서사를 짜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이 정도로 특이한 뮤비와 곡, 안무를 보았는데 흥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정호환은 산으로 가는 회의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말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느라 바빴다.

‘태섭아, 보고 있냐.’

오랜 옛날, 음악계에서 떠난 친구의 이름을 되새겼다.

정호환이 아이돌을 프로듀싱하게 된 계기인 친구다.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진 모르겠다만, 아이돌이란 게 이렇게도 발전했어.’

분명, 그는 아이돌의 흥기를 목격하곤 ‘인더스트리 베이비’라며 독설을 퍼부었었다.

‘인더스트리 베이비라도, 이쯤 되면 인정해줘야 할 거다.’

태섭아.

넌 ‘유지태와 친구들’의 등장으로 힙합의 흥기를 점쳤었지.

하지만 틀렸어.

그들이 일으킨 음악 혁명의 적법한 후계자는 힙합 래퍼가 아니라 아이돌이었다.

‘현재가 그걸 증명한다.’

아이돌은 여러 세대를 거치고서야, 마침내 세계 시장과 격돌할 수 있는 적절한 토양을 마련하게 됐다.

* * *

소녀연맹 정규 1집.

Girls’ Union.

트랙 8 ‘Skit: 불안’.

가사.

[(튀는 마이크 소리와 장비를 조정하는 소리)]

[리카: 크흠, 크흠, 소리 제대로 녹음되고 있나요?]

[아라: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리카: 뭐 어때. 어차피 앨범에 들어갈 건 편집하잖아.]

[아라: 그런가?]

[설하: 얘들아, 시작할게.]

[(백설하가 멤버들을 조용히시키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설하: 우리, 이번 앨범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아름: 그러게요. 많이 노력했는데. 준비 기간만 거의 10개월 다 돼가잖아요. 미니 앨범 전부터도 깔짝깔짝…….]

[하양: 아름아. ‘깔짝’이란 말 쓰면 안 될 거 같아. 비속어 아니야?]

[아름: 비속어요? 야, 조아라. 이거 비속어냐?]

[아라: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아름: 너 인터넷 자주 하잖아. 인터넷 용어 많이 알 거 아냐.]

[아라: 아니, 내가 뭔 커뮤니티 죽순인 줄 아냐?]

[아름: 우와, 죽순이란 말 진짜 오랜만에 듣네. 뭐냐 너, 늙은이야?]

[(조아라와 신아름이 말싸움하는 소리.)]

[리카: 모오 야메로(이제 그만해)! 아타시(나) 때문에 싸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설하: 그, 그래 얘들아. 빨리 녹음하고 끝내자. 크흠, 다시 시작할게. 우리, 이번 앨범으로 성공할 수 있겠지?]

[하양: 그러면 좋겠네요. 팬 분들이 좋아해주시면 바랄 게 없겠어요.]

[설하: ……하양아, 방금 그거 너무 대본 읽는 거 같았어.]

[아름: 하양 언니 연기 배운 거 맞아요?]

[하양: …….]

[아라: 에이 씨. 걍 처음부터 해요 처음부터!]

[리카: 벌써 다섯 번째야……. 이제 지쳐…….]

[아름: 고작 1분짜리 녹음하는데 어떻게 한 시간이나 쓰냐. 잘 좀 해라 리카.]

[리카: 아타시노 세(나 때문)?!]

[(5초 정도 침묵)]

[리카: 그러게요…… 안 팔리면, 실패하면 어떡하죠오…… 정말, 연습 많이 했는데에…….]

[설하: 리, 리카 울면 안 돼! 울면 또 쉬어야 하잖아! 나 10분 뒤에 기타 강의 받으러 가야 해!]

[리카: 그치마안…… 무서워요…….]

[하양: …….]

[설하: 하양이 넌 또 왜 그래?!]

[하양: 아니요 아니에요…….]

[아름: 또 눈물바다야? 걍 대본 쓰고 해요! 애드리브로 하니까 다 울잖아요!]

[아라: 그니까. 당연히 성공할 거잖아. 성공 못 할 리가 없는데…….]

[아름: 진짜 돌겠다. 이젠 조아라까지 이러네.]

[(네 명이 우는 소리)]

[(아니, 다섯 명)]

[설하: 우리 열심히 했잖아. 성공할 거야. 성공하자.]

트랙 8 ‘Skit: 불안.’

끝.

트랙 9 ‘Title: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

시작.

* * *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의 뮤비 촬영이 막을 내렸을 시점.

장하양은 뮤비 촬영을 위해 만들었던 조형물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회전목마였다.

총천연색의 조명을 쏘고 사람을 매혹하는 듯한 회전목마.

뮤비 촬영이 끝난 지금, 장하양에게 이 회전목마는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재료였다.

‘놀이공원, 재밌었지.’

소녀연맹의 데뷔 전, 홍규헌은 멤버들에게 놀이공원 프리패스권을 주었다.

장하양은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혹시 자신이 회사의 배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미없게 시간을 보낼까 봐.

하지만 예상은 산산이 깨졌었다.

“리카 리카! 이거, 이거 타고 싶어! 이거 타자!”

“롤러코스터요?!”

장하양은 도망가려는 리카를 억지로 잡아끌어 롤러코스터에 태웠었다.

안전장치를 매고도 리카는 한동안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즐거움에 물든 장하양에게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사람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롤러코스터 위에서, 리카는 비명을 지르다 목이 쉬어버렸었다.

“왜 아타시(저)의 시간과 돈을 써서 무서워해야 하는 건가요오……!”

즐거웠다.

“후룸라이드? 재밌겠다.”

“아타시(나)는 절대 안 타!”

장하양은 조아라와 함께 후룸라이드를 탔다.

롤러코스터와 비슷한 느낌을 기대했었는데, 아래로 내려갈 때를 제외하곤 그다지 재밌지도 않았다.

하지만 재밌는 꼴은 보았다.

“아하하!”

“……언니, 내가 홀딱 젖은 게 그렇게 재밌어요?”

“아하하하핰!”

“…….”

즐거웠다.

“하, 하양아. 호러하우스 이거 별로 재미없대. 평도 별로 안 좋아.”

장하양은 방방 뛰면서 백설하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어쩐지 굳어 있는 백설하를 데리고 호러하우스로 들어갔었다.

귀신이 튀어나왔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백설하는 귀신 역할의 직원이 사과할 정도로 연신 비명을 질러댔었다.

후반부에 가서는 소문이 퍼졌는지 귀신들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도 소극적으로 모습만 드러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백설하는.

“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

그녀는 장하양의 팔을 쥐고 목이 쉬어라 비명만 질러댔다.

역시 보컬 트레이너였어서 그런가, 고음이 아주 잘 올라갔었다.

늦은 밤, 멤버들은 지쳐서 벤치에 앉아 쉬었다. 하지만 장하양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즐거움에, 장하양은 주변의 눈치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마지막 놀이기구는 회전목마였다.

다들 금속 말에 타고 회전목마의 속도를 즐겼다.

“엄마, 저기 누나들이 목마 타고 있어.”

“쉿!”

장하양을 제외한 멤버들은 수치심을 느끼면서 고개를 푹 늘어뜨렸다.

주변에는 나이가 어린 이용자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하양은 어린이들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며 회전목마를 즐겼다.

즐거웠다, 정말로.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언니.”

신아름이 장하양의 어깨를 툭 치자, 그녀는 회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념 촬영한대요. 여기 제일 앞에 가서 서요.”

회전목마 앞에 백 명은 될법한 인원들이 느슨한 줄을 만들어 위치했다. 당연히 가장 앞에는 소녀연맹 멤버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감독해야 할 조정훈도 앵글만 맞춰두곤 헐레벌떡 무리 안으로 들어왔다.

“한 이사님은?”

“안 오신대요.”

장하양은 성큼성큼 한구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카메라의 뒤, 세트장을 벗어난 곳에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한구인이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하양 씨. 저는 괜찮습니다.”

“마지막이잖아요. 오세요.”

“아닙니다, 저는…….”

장하양이 억지로 한구인을 끌고 돌아왔다.

180cm 중반의 건장한 남자가 장하양에게 끌려오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신기한 볼거리였다.

한구인은 촬영에 도움을 주지 않은 자신이 나오는 게 미안한지, 기어코 줄의 가장 뒤로 가서 섰다.

“자, 이제 춤추면 됩니다! 촬영이 끝난 행복함을 가득 담아서 소녀연맹 먼저!”

멤버들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 같이 미소를 지으며, 조아라가 스타트를 끊었다.

발을 좌우로 가볍게 움직이면서, 주먹을 가슴께에 쥐고 위아래로 경쾌하게 흔든다. 그리고 리듬을 타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보라색 튤립’의 하이라이트 안무다.

이어서 바로 뒷줄의 사람이, 그리고 또 뒷줄의 사람이, 마침내 백 명의 사람들이 똑같은 춤을 추었다.

다들 처음 느껴보는 일체감에 활짝 웃은 채였다. 곳곳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조정훈 감독의 지휘 아래서 이뤄지는 지옥 같은 촬영이 끝나서 행복한 게 가장 컸다.

기념 영상 촬영이 끝나고, 멤버들은 회전목마 앞에 섰다.

“이거 부수죠?”

“철거해야지. 뮤비는 다 찍었으니까.”

장하양은 그리 답하면서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회전목마 안으로 들어가 플라스틱 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난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제일 좋아해.”

“에에, 하양 언니 어린애 같아요!”

“아하하, 그런가.”

“……잠깐. 회전목마를 좋아하셨으면 왜 저랑 놀러코스터를 다섯 번이나 탔던 건가요?!”

“리카가 소리 지르는 게 재밌었어.”

“이지메예요! 괴롭힘이에요!”

장하양은 말의 목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왜 회전목마를 제일 좋아하는데?”

백설하가 물었다.

“회전목마는 끝이 없어요.”

놀이공원 자체가 꿈의 세계와 같다.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는 곳. 하지만 그곳의 모든 놀이기구는 끝이 존재한다.

롤러코스터도. 후룸라이드도. 호러하우스도. 모두 끝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놀이기구다.

하지만 회전목마는 아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아요.”

빙글빙글 돌며 언제까지고 이 순간이 계속될 것만 같은 황홀함을 준다.

놀이공원처럼, 장하양은 멤버들과 함께하는 매일이 꿈만 같다.

“영원히, 저는, 나는, 언니랑, 너희들이랑, 행복하고 싶어.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아.”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그때 느꼈던 행복함을 선물하고 싶다.

뮤비로 전해질 수 있을까, 이 마음이.

그러길 바라며, 장하양은 회전목마로부터 나왔다.

* * *

석세스 엔터.

윤상열은 어두운 작업실에 틀어박혀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의 뮤비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윤상열의 눈에는 소녀연맹의 비주얼이나 아트, 영상미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귀의 감각만 증폭되어 윤상열의 머리를 어지러이 흩뜨려 놓았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이 새끼들, 케이팝을 부정하는 거냐.’

케이팝은 차갑다.

수만 개의 기계장치가 정교하게 맞물리며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인간다운 따뜻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케이팝을 벗어나려고 일부러?’

케이팝에는 록밴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손길이나 날 것의 느낌이 없다.

재즈 밴드의 독창성과 흥겨움, 금속 악기가 인간에게 불려 나오는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인간미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첨단에 이른 제작 방식과 현대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케이팝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오버 프로듀싱.

3분 남짓한 곡에 투입되는 인원과 아이디어, 기술의 과다함.

‘여유나 틈, 인간미 따위 허락하지 않는 과잉성과 빽빽함이 케이팝의 미덕인데…….’

소녀연맹의 타이틀곡 중 하나, ‘보라색 튤립’은 그러한 케이팝의 미덕으로부터 탈출했다.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음악 그 자체의 순수함에만 치중한 곡이다.

이건 차라리 팝이란 이름을 붙이기보다 록이나 재즈 같은 장르 음악의 단계로 내려가야 할 지경이다.

그만큼 이질적이고, 이상하고, 또, 새롭다…….

“담백한…….”

다 듣고 나서도 귀에 이물질이 남지 않는다.

쨍쨍하게 귀를 뚫을 듯 울려 퍼지는 효과음도, 여러 차례 변형을 거친 사운드 이펙트도, 그 무엇도 사용하지 않고 악기 그 자체의 순수함만을 짜내어 순도를 유지했다.

윤상열의 말마따나, 담백한.

“맛…….”

그는 오래도록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

소녀연맹은 더블 타이틀 사전녹화를 마친 뒤, 거의 모든 힘이 빠져서 대기실에 늘어졌다.

하지만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얘들아, 앨범 돌리고 인사하러 가자.”

백설하의 말에 멤버들이 주섬주섬 앨범을 챙겨서 일어났다.

핸드폰만 보고 있던 성필도 일어나 그녀들의 짐을 덜어주었다.

“아저씨, 곧 케이어스 사녹인데 보러 안 가요?”

“응.”

“왜요?”

“그냥.”

설마, 매일 멤버들이 케이어스를 들먹이며 성필을 놀려서 그런가?

성필이 케이어스에 애정을 보이는 게 꼴 보기 싫긴 했다만, 그토록 기다리던 케이어스의 컴백인데 무대도 안 본다니.

멤버들은 성필의 무미건조한 태도에 일단 수긍하면서도, 복도를 걷는 내내 불편함을 감추기 힘들어했다.

“팀장님. 케이어스 안 보러 가는 거요. 혹시 저희가 자꾸 뭐라고 해서 그런 건 아니죠?”

“아니야. 그냥, 오늘은 좀 그렇네.”

“에, 이사님 탈덕하신 건가요!”

“아냐.”

“그런데 왜 무대를 안 보나요?”

성필은 계속 이유를 물어도 ‘그냥’이라고 할 뿐이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조금 슬픈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멤버들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아니,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냥…… 어차피 나중에 다시 보기로 보면 되잖아. 오늘은 대기실에 있고 싶어.”

소녀연맹은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다들 성필이 케이어스를 얼마나 애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매일 케이어스로 갈궈서 무대도 못 본다니.

“저, 이사님…….”

리카가 성필에게 ‘케이어스 보러 가도 괜찮아요!’라고 말하기 직전, 복도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멤버들의 눈길이 정면으로 꽂혔다.

케이어스 멤버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가봐, 얘들아.”

언제 씁쓸한 기운을 보였냐는 듯, 성필은 소녀연맹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녀들의 첫 목적지도 케이어스의 대기실이었다. 하지만 복도에 마주쳤으니 수고를 덜었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는 서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 보고 섰다.

데뷔 때와 비교해서, 사람은 같지만 상황은 달랐다.

“안녕, 에리카.”

“네, 설하 언니.”

백설하가 앨범을 내밀자 에리카는 그것을 소중히 받았다.

앨범이 교환되는 중, 백설하는 예전처럼 케이어스의 이름값을 듣고 미리 꼬리 내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 정규 앨범이야.”

“감사합니다.”

에리카가 싱긋 미소 지었다.

“오셨네요.”

무슨 뜻인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백설하는 즉각 그 뜻을 이해하고 수줍게 답했다.

“응, 왔어.”

1년.

1년 만에.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를 따라잡았다.

그야말로 전무(全無)한 기록.

이로써, 소녀연맹은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그룹이 되었다.

* * *

소녀연맹 정규 1집 Girls’ Union.

사전 예약 판매량.

[십이만육천백구십이(126,19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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