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아버지의 장례가 정신없이 끝나고, 김민주는 어머니와 함께 그의 유품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박스를 하나 발견했다.
침대 아래에서 먼지만 맞고 있던, 개봉도 하지 않은 박스였다.
열어보니 운동화가 있었다.
김민주의 사이즈와 딱 맞았다.
“…….”
영수증을 보니 김민주가 전국 대회에서 2등을 한 바로 다음 날의 것이었다.
선물로 주려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김민주는 그 운동화를 신지 않고 하계 전국 대회에 나갔다.
“민주야.”
항상 2등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1등인 아이가 스트레칭을 하는 김민주에게 다가왔다.
“우리 열심히 하자.”
승자의 여유인 것일까.
김민주는 누군가에게 ‘열심히 하자’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 그녀의 마음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무시했다.
그 아이는 쓰게 웃으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1등, 해야 할까.’
이제는 1등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는데.
김민주는 무난하게 예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예선에서 발목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다.
“안타깝다. 그래도 하늘이 돕네. 이번엔 민주 네가 1등이야.”
코치가 그리 말했다.
하늘의 도움인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김민주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라이벌의 부상에 기뻐하거나 슬퍼하기엔, 그녀는 마음의 여유 자체가 없었으니까.
머릿속은 아버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민주야.”
본선이 시작되기 전, 그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간이 목발을 짚고 힘겹게 김민주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쉽다. 나 연습 많이 했는데.”
얼핏 들었다.
이 아이가 부상당하자, 코치와 동료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노력을 설명하며 울분을 토했었으니까.
매일 늦게까지 연습했다던가. 그래서 본 게임에서 무리가 온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컨디션 관리도 선수로서의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는 자질이 부족했다.
“너랑 붙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
김민주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꼭 우승해. 나 있잖아. 너 이기고도 기쁘지 않았어. 운이었거든.”
대답하지 않고 운동화의 착용감을 확인했다.
“나, 이번이 마지막이야.”
허나 그 말에는 김민주도 아이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보다 더 잘해. 나 계속 기록을 재도 너를 이겼을 때만큼 안 나와. 정말 운이었어. 그리고, 음…….”
아이는, 그 애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미소를 활짝 피워냈다.
“난 이제 그만하려구.”
* * *
‘김민주────!’
아직도 신아름의 외침이 귓가에 선명히 꽂혀 있다.
김민주가 넋을 놓을 때마다 환청이 들려온다.
신아름의 외침은 너무나 강렬하고, 분노에 차 있고, 또한 경쟁심이 흘러넘쳐서, 아름다웠었다.
‘걔는 뭘까.’
운동은 제대로 해본 적도 없을 인간이, 어떻게 김민주 자신을 앞지른 것일까.
어떻게 앞지를 수 있었을까.
신아름도 승리로써 무언가를 얻고 싶었을까.
자신과 같이…… 바라는 게 있겠지.
그때 김민주는 확신했었다. 신아름과 자신은 같은 상처와 무기를 가지고 있구나…….
김민주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나한테 욕이란 욕은 다 먹고도, 결국엔 무대에 나왔구나.’
나온 것을 넘어서, 이미 생방송은 진행되고 있었다.
곡도 1절을 넘어섰다.
‘박 이사님이 신아름을 내보냈어. 이 애를.’
신아름. 너도 나와 똑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어느 순간 넘을 수 없는 벽을 보게 되면 무너져내리게 된다.
승리를 향한 직각의 벽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그 벽에 손과 발을 박아넣으며 필사적으로 위를 향한다.
그리고 한 번 무너지면, 원래 있던 자리로 올라오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진다.
‘난 너랑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서, 네가 어떻게 될지 알아.’
사람들은 김민주와 신아름의 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알기 어려우리라.
하지만 두 사람만은 안다.
두 사람에게는 격의 차이가 있다.
‘시간이 적었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도 그러겠지.’
신아름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곡과 안무를 잘못 보낸 방송국의 실수더라도, 자신이 바란 상황이 아니더라도, 신아름은 자괴감을 느낄 게 분명하다.
‘2절까지는 어떻게든 되더라도 리믹스 파트로 넘어가서는 안 돼.’
김민주는 느꼈다.
지금 자신의 춤은 연습 때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말이다. 연습 때보다 더욱 정교하고 정밀하다.
원곡자보다 더욱 완벽에 가까워진다.
그녀의 각은 마치 기계와 같았다.
셀 수 없는 시간의 연습으로 인해 도달한 완성의 경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아름이 따라온다.
2절.
‘이게 듀오 댄스.’
둘이서 하나가 되어 추는 춤.
김민주는 케이어스 멤버들과 함께 군무를 추었을 때도 느끼지 못한 일체감을 느꼈다.
듀오 댄스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이건 경쟁자와 있기에 느끼는 기분이다.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다.
김민주의 심장이 불꽃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 불꽃은 스스로 꺼져갔다.
‘어차피 곡이 브리지에 들어서면…….’
브리지.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김민주와 신아름만을 비춘다.
곡의 흐름도 느려지며 베이스가 강해진다. 가슴을 울리는 베이스와 함께 둘의 춤은 완성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여기서 무너진다. 여기서 신아름은 무너지…….’
김민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신아름을 바라보면, 즉 무대의 측면을 바라보면, 신아름은 정면을 보아야 한다.
그런 안무다.
그런데 신아름은.
‘왜 날 보는 거야?’
둘은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무는 두 사람이 달라야 하는데.
‘왜 나랑 같은 춤을 추는 거야?’
거울 같다.
김민주는 우습게도 그리 생각해버렸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눈을 부릅뜬 신아름은 거울처럼 김민주의 춤을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날 따라 해서 어쩌게?’
이어서 3초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실수구나.’
리믹스 안무에 숙달하지 못했단 이유로 실수까지 해버린 건가.
실수를, 해버렸구나…….
김민주는 입술을 꽉 물곤 춤에 집중했다. 동정에 빠질 시간은 없다.
3초가 지났다.
안무대로, 김민주는 정면을 보았.
“읏!”
“저게……!”
“어……?”
방송사고.
무대에서 실수.
스태프들의 탄식과 신음.
동시에, 이번에야말로 김민주도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정면을 바라본 김민주를 신아름이 마주 보고 있다. 즉, 신아름이 카메라를 등지고 섰다.
‘얘, 신아름 이 애…….’
리믹스 안무를 포기했다.
‘그럼, 얘, 지금…….’
보고 추고 있는 건가?
단 1초의 오차, 아니. 0.01초의 오차도 없이, 춤을 본 즉시 따라 추고 있는 건가?
‘말도 안 돼. 이런 건…….’
인간이 아니잖아.
* * *
신아름은 정신이 멍했다. 그녀는 오로지 김민주만을 바라보며 춤을 추었다.
곡이 브릿지에 들어선 순간부터, 신아름은 단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드러난 김민주의 팔과 다리, 배의 근육을 집요하게 쫓았다.
김민주의 미세한 근육의 떨림으로부터 움직임을 예측해낸 뇌는, 생각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기 신호를 신아름의 몸 곳곳으로 전달했다.
그리하여.
‘거울이다.’
김민주가 거울을 본다고 착각할 만큼, 신아름은 그녀의 춤을 완벽히 모방해낸다.
아니, 모방을 넘어 예측하여 따라가고 있다. 사소한 습관 하나마저도.
신이 내린 능력. 또한, 저주다.
* * *
‘■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의 이 재능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얻게 된 걸까요. 분명 ■■ 적 기억에선, 이런 편리한 능력 같은 건 없었는데요. 하지만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점을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재능 혹은 능력 또한 저의 강■이겠지요. 편리하게 쓰면 그만일 뿐입니다.’
‘거울 같다’는 김민주의 생각은 매우 정확했다. 그녀뿐 아니라 무대를 바라보는 모든 스태프도 그리 여겼으니까.
허나 김민주만큼 여실히 깨닫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움직임을 구사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통일성을 강조하는 아이돌의 군무에서도 멤버들의 춤이 이토록 똑같은 경우는 없다.
아무리 합을 맞추어도 인간이기에 완벽한 통일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저마다의 개성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우쭐댄 적은 없습니다. 그저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보다 적은 ■력으로 열매를 딸 수 있다니. 누구나 바라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말했다시피, 우■댄 적은 없습니다. 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고, 저는 타인보다 ■한 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 자랑할 만한 게 아닙니다.’
김민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웃음 이후, 그녀는 재빨리 아이돌다운 표정 연기를 이어갔다.
‘그래, 따라 한다는 거지’라는, 인정인지 질투인지 분노인지 모를 생각과 함께 김민주는 안무에 복잡성을 더했다.
전 세계 수십 개국에서 펼쳐진 KS 엔터의 오디션. 그로부터 영입된 수십 명의 연습생.
그리고 수십 명으로 추려질 때까지 탈락한 수천수만 명의 연습생.
김민주는 재능과 노력이란 채에서 거르고 걸러진 보석 중의 보석이다.
그 보석이 더욱 찬란히 빛을 뿜었다.
‘하지만 깨닫게 되었습니다. 손혜빈 ■■님으로부터, 너는 표현하고픈 게 없구나라는 말을 들은 이후였습니다. 춤에서도, 노래에서도, 저는 저만의 ■■■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없으면 안 되나요? ■■적인 것만이 아이돌의 가치인가요? 목 끝까지 걸린 그 말 안에서, 저는 깨달아버렸습니다. 저는 저의 재능을, 무언가를 보고 베끼는 것뿐일 재능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노력, 이라는 말이 사용되곤 한다.
김민주는 그 말을 정당하게 수식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였다.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정도로 노력해왔고, 누구나 인정할 재능을 품었다.
고전 무용, 팬터마임, 현대 무용, 어반 스타일, 모던 댄스, 연기 등. 모든 분야를 일류에게 배워왔고, 그 일류 모두 김민주를 칭찬했다.
천재다, 너는.
동시에 이렇게 들었다.
안무에서 너무 튀면 안 된다. 네 재능과 노력을 숨겨야 한다. 아이돌의 안무는 군무니까. 조화가 중요하다.
조화가 중요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니다.
김민주는 조화를 포기하고 자신의 춤에 지금까지 쌓아왔던 노력의 정수를 담았다.
‘저는 저의 재능으로 인정받아왔습니다. 누구도 저를 따라잡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격이 다르기에, 격 아래의 사람들은 우러러보기만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님도 칭찬해주었습니다. 아, ■■님. 저는 항상 당신에게 조용히 외칩니다. 침묵과 동등한 외침 속에는 ■■함이 있습니다. 만약 제 외침을 치장할 언어의 옷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언제든지 저의 ■■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런 당신이 칭찬한, 당신이 좋아해 준, 모두가 우러러본 재능이, 고작 ■■■이 없다며 평가절하당하다니. 아이돌이 대체 뭐기에? 아이돌 따위가?’
춤은 언어다. 그렇기에 쓰인다.
허공에는 두 사람의 춤이 쓰이고 있었다. 동시에, 같은 필체로, 같은 속도로, 완벽히 일치한다.
김민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건 그녀의 눈에서 나온 게 아닌 바로 앞에 선 거울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거울, 신아름.
0.1초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모방하고 있는 그녀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거울은 물에 잠긴 인간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불꽃은 물의 어두움을 머금으면서도 끝없이 위로 연소되기 위해 빛을 토해냈다.
김민주는 타올랐다.
더는 물이 자신의 빛을 삼키지 못하도록,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도록.
다행히 김민주의 노력엔 성과가 있었다.
거울이 깨져간다.
‘분합니다. ■현하고픈 게 없는 재능이 무시당한다는 사실이. 그러니 증■하고 싶습니다. 누구도 ■시하지 못하도록, ■의 재능이 한계까지 닿은 모습을 보여■려 합니다. 마음껏 짖■십시오. 마음껏 욕하■시오. 그럼에도 저의 발치는 ■신들에게 잡히지 않을 겁니다. 보고, 서서, 감탄하면 될 뿐, 그게 당신들이 ■■난 이유일 겁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멈추게 해야 할까?
무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고민했다.
왜냐하면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카메라가 있단 것도 잊어버린 듯, 그녀들의 측면만이 생방송 전파를 타고 이어졌다.
이런 거, 이미 무대라고 부를 수도 없다.
시청자들은 둘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서로만 바라보며 카메라에는 눈길도 주지 않을 둘을 보고서 무어라 생각할까?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단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리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거라고 말입니다. 헛■리입니다. ■■넘어야 하는 건 언제나 타인입니다. 자■ ■신을 이긴다는 건, 싸우기도 전에 ■■를 말고 도망가거나 혹은 ■하여 ■■ 위로가 필■한 ■■입니다. ■는 그렇게 될 ■■이 없습니다. 그러니 ■■넘겠■니다. ■앞의 ■■을, 독■성 ■는 ■ ■■가 없■고 하는 ■■들을, ■■의 시■을.’
명백히 방송을 무시하는 듯한 무대였다. 하지만 아무도 욕을 할 수 없었다.
신아름과 김민주는 대칭이었다.
대칭은 오래전부터 미의 기준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대칭이란 매우 희귀하여 인간에게선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대칭의 미를 갈구해왔다.
빅뱅 이전, 한 점에 모여 있던 완벽한 균형의 상태. 그것이 폭발함으로써 완전한 미(美)는 우주 곳곳으로 흩어졌다.
인간이 대칭을 구현할 수 있는 건 인위적인 미술품 정도에서였다.
허나 그 대칭이 춤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 ■■.’
김민주는 흠칫했다. 거울이 흔들린다.
아니, 그건 김민주 자신이었다.
신아름은 김민주의 동요마저도 재현했다.
어째서 무너지지 않는 거야? 이것도 따라 할 수 있는 거야? 어디까지 할 수 있지?
넌 어디까지 나를 따라올 수 있어……?
기쁨과 불쾌함, 흥분이 동시에 차오른다.
‘없■■■ ■■.’
비가 오나. 아니면 땀이 너무도 많이 나는 건가.
햇볕이 쏟아지나. 아니면 조명이 너무 강한가.
김민주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신아름의 몰골 때문이었다.
브리지가 시작되고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은 신아름의 눈가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한계에 달한 팔과 다리가 떨려왔다.
허나 신아름의 움직임은 게걸스럽게도 김민주를 따랐다.
거울의 금이 벌어진다.
‘없■버■ ■■.’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더 따라와!
김민주는 신아름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 붉게 상기되어 흥분한 자신이 비쳤기 때문이다.
이토록 즐거워하는 자신은 처음 본다.
김민주의 기대를 눈동자 속에 담아, 신아름의 춤은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이미 원곡의 안무를 벗어난 움직임으로.
‘없■버■ 거■.’
탓, 신발이 거칠게 바닥을 훑는 소리. 그와 함께 무대도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은 전신을 땀으로 덮곤 춤을 멈추었다. 그녀들의 몸에 조명의 빛이 흘러들어왔다.
곡이 끝나곤 침묵만이 남았고.
침묵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곳에 세워졌던 게 거울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무대에 있던 건 두 명의 사람.
아이돌이었다.
아이돌이 소리 없이 외쳤다.
‘없■버릴 거야.’
죄다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꽃이다.
잡초가 아무리 많아봤자, 나무가 아무리 높아봤자, 꽃 앞에서는 빛을 잃고 배경이 될 뿐이다.
나는 정점에 올라 끝없이 높이 비상하여, 기준에 차지도 않는 놈들을 잡초 무리처럼 바라볼 것이다.
무슨 말을 지껄여봤자 발아래에 선 잡초들의 팔랑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인간들, 나를 쫓아오는 놈들, 나를 헐뜯는 새끼들, 전부 내 재능 앞에 무릎 꿇리고 좌절할 때까지 몰아세울 거야.
난 나만의 것이 없는 게 아니야.
뭐든 될 수 있는 거야.
같잖은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는 인간들 전부 다, 그 시답잖은 생각 모두, 내 재능으로.’
“없애버릴 거야…….”
신아름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것을 김민주가 받아냈다.
* * *
아이가 하이파이브를 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다음 올림픽 때 꼭 볼게. 믿고 있어.”
김민주는 하이파이브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아이는 뻘쭘하게 웃으며 떠나갔다.
“아.”
멀어지는 그녀를 보고서야 김민주는 실감했다.
“가지, 마…….”
김민주의 목소리는 끝끝내 닿지 못했다. 멀리 사라지는 아이를 향해 공허히 울리는 게 다였다.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김민주는 저 아이 덕분에 더 열심히 했다.
누군가와 자웅을 겨룰 수 있단 게 기뻤다.
경쟁이라는 정글 속에서 살아온 김민주는 누군가의 옆에서 걸어본 적이 없었다. 다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적들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김민주의 뒤를 따랐으나 적이 아니었고, 어느 순간 옆으로 다가왔으며 그저 김민주와 함께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김민주도 그러했었다.
악의에 차서 자신의 등만 바라보는 인간이 아닌, 페이스를 맞추며 함께 나아가는 사람을 바란다.
페이스를 맞출 수 있는,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그래서 친구일 수 있는.
“나, 실은, 사실…….”
함께 나아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구나.
[김민주 선수]
모든 것은 잃은 뒤에 소중함을 알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그리고 아버지가 남겨주신 진정한 유산인 김민주의 경쟁심처럼.
김민주는 경쟁과 승리를 사랑했다.
항상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에게 칭찬받길 바랐다.
경쟁의 승자는 전리품을 받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김민주가 바랐던 1등 성적표도.
1등의 상징인 메달도.
올라가는 용돈도.
주변 사람들의 찬사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의 격려였다.
[준비]
탕.
김민주는 뛰었다.
그리고 달리면서 깨달았다.
‘나, 앞으로 멀리뛰기는 못 하겠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함께 나아갈 친구도, 칭찬해줄 아버지도 없으니까.
이제는 자신만의 새로운 영역을 찾아야 하리라. 과거의 흔적이 발목을 잡는 이곳에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다.
김민주는 마지막으로 발을 힘차게 내디디고.
[중등부 신기록입니다!]
날아오르며 과거를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