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경쟁만이 지상의 가치였다.
김민주의 집안은 그러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친척들도. 김민주를 둘러싼 환경에는 경쟁의 승자만이 있었다.
다들 누군가를 짓밟고 위로 올라온 자들이었다.
“누구에게도 지면 안 된다.”
아버지가 버릇처럼 해온 말이었다.
“승리만이 네가 가져야 할 전부야. 네가 입는 것, 먹는 것, 이 집이나 네가 바라는 것, 전부 나와 네 엄마가 승리로 얻어온 것들이다.”
말이 트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김민주는 승리만이 삶의 목적인 양 살아왔다.
“자본주의, 이 사회에서는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게 미덕이다.”
언어가 정교해지고 풍부함이 더해졌을 무렵, 김민주에게 이 세상은 더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 세상은 정글이었다.
어린아이의 탈을 벗은 김민주는 더 이상 승리만으로는 칭찬받을 수 없었다.
“100점이 아니야? 이게 점수냐?”
김민주는 압도적이어야만 했다.
“문제라는 건 결국 풀 수 있게 만들어진다. 100점이 아니란 건 네 의지가 모자랐단 뜻이다. 언제든 너보다 의지가 강한 놈에게 질 수 있다는 뜻이고.”
근처의 누구보다도 뛰어나야만 부모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모욕이라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회였으면 넌 벌써 도태된 거야.”
김민주는 유치원 때부터 온갖 학원에 다녔다.
부모는 김민주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과 세상 만물을 향한 흥미를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배운 건 세상을 증오하는 법이었다.
유능한, 그러나 삭막한 인간으로 자라났다.
그러던 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중학교 1학년 첫 시험.
“1등.”
하지만.
“공동 1등.”
칭찬받으리라 생각했다.
1등은 1등이니까.
공부 잘하는 학군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둔 중학교였다.
주변에는 김민주와 비슷한 아이가 가득했다.
그런 아이 중에서 1등인데. 비록 공동 1등이라도, 1등인데…….
“실망스럽구나.”
김민주의 기대감이 잔뜩 담긴 성적표를, 아버지는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날부로 김민주는 어긋났다.
정확하게는, 부모가 깔아준 길에서 벗어났다.
“체육? 그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김민주는 반항했다.
부모가 뭐라 해도 공부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운동장에서 멀리 뛰기만 반복했다.
왜 하필 멀리뛰기냐.
실은 종목 따위 상관도 없었다.
단지 학교에 그 시설이 있었고, 어긋난 김민주의 눈에 가장 먼저 띄었을 뿐이다.
“…….”
1년이 지날 무렵, 김민주의 아버지는 더는 딸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가끔 보면 혐오감이 담긴 눈빛만 주었다.
그렇더라도, 김민주는 이전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모욕의 말은 없었으니까.
“여보, 민주가 또 대회에서 1등을 했어요.”
어머니는 딸을 응원해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1등을 무더기로 쓸어와도, 아버지는 따스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낮게 혀만 차는 게 전부였다.
“김민주 선수. 차세대 올림픽 선수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김민주 선수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부탁…….”
지역 신문이나 인터넷 언론에서도 가끔 김민주를 취재하러 왔다.
그럴 때마다, 김민주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1등은 당연한 거예요.”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가 했던 말을, 김민주는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 차라리 앵무새가 김민주보다 더 나을 것이다. 앵무새는 말만 따라 할 뿐이지, 김민주는 생각마저 아버지의 판박이였으니까.
중학교 3학년이 됐다.
그해 처음으로 열린 전국 대회에 평소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참가했다.
평소와 같이 중등부에서 우승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중등부 육상 멀리뛰기 우승자는……!”
김민주는 2등이 됐다.
항상 김민주의 뒤에 있기만 했던, 주변 사람들만 라이벌이라며 수군댔던, 지금껏 신경도 써보지 않던 아이에게 져버렸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김민주는 멍한 기분으로 집으로 갔다. 그날 저녁 식사에서, 아버지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그럴 줄 알았다.”
“…….”
김민주의 속에 쌓인 검은색 찌꺼기가 불쾌한 울음을 토해냈다.
더는 떠밀려 갈 하수구도 없었다. 마음 밑바닥에 쌓아두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아빠는, 아빠 같은 건, 그냥……!”
죽어버려.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았을 것이다.
딸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을지.
김민주는 패자의 상징인 눈물을 닦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죽어, 죽어버려, 아빠는 그냥, 나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으면서…….’
슬펐다. 그래서 울었다.
정신이 찢어질 정도로 슬프다. 하지만 김민주의 몸은 정직하게도 새벽 연습에 나갔다. 그리고 착실히 다음 대회를 준비했다.
하계 전국 대회.
김민주는 다시금 그 아이와 만날 것이었다. 항상 2등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김민주의 앞에 서 있는 그 아이와.
김민주는 복수의 칼날을 갈며 시간을 보냈다.
인간의 증오로 얼룩지고 벼려진 칼날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어둠만을 담았다. 김민주의 속마음처럼 새까만 찌꺼기로 가득 찬 칼날이었다.
“미안, 민주야, 미안해…….”
어느 날, 어머니는 왠지 모르게 미안하단 말만 했다. 그녀는 딸을 끌어안은 채 계속 울었다.
“급성 심근경색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웠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과로와 음주, 흡연이 겹쳐서, 이렇게…….”
의사의 말에, 김민주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항상 스트레스를 받아 담배를 태우고.
거래처 사람과의 자리였다면서 불콰하게 취해서 들어오고.
언제나 휴일도 없이 일했던 아버지가.
‘나 때문이야?’
죽으라고 빌어서.
아빠 같은 거 죽어버리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죽은 것일까.
‘나 때문이구나.’
말에는 힘이 있다.
‘나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김민주는 그것을 믿게 됐다.
그녀의 아버지는 항상 경쟁의 승자로 있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끝없이 자신을 착취하여 승리의 전리품을 가족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결과 목숨을 잃었다.
인생의 승자는 죽기 직전 떠올렸으리라.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았으나, 정작 자식에게 존경받지 못했던 아버지란 사실을.
평생을 왕관만 쓰고 살아온 그는 자식에게 ‘죽어버려’란 말을 듣는 삶을 완성해냈다.
“아빠아…….”
그런 아버지가, 김민주는 불쌍하여 참을 수 없었다.
한때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란 존재는 김민주의 머릿속에서 미화를 거듭했다.
차가운 왕관 대신 화관을 씌워주었다.
아버지는 죽은 뒤에서야 김민주의 영웅이 되었다. 일그러지고 왜곡된 기억 속에서야 영웅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김민주는 영웅의 가치를 답습했다.
승리.
이 세상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 * *
리허설이 끝나고, 신아름은 숨을 고른 채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김민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무대 밖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김민주가 혀를 찼던 건, 아마도 할 말을 전부 내뱉을 시간이 없어서일 게 틀림없다.
그녀의 속에 있는 말을 전부 했다간 시간이 얼마나 있어도 모자랐을 테니까.
“이야, 잘했다 잘했어!”
“와, 진짜 잘하는데요?”
“그러게. 옛날에 민주 파트너였던 애보다 잘하는 거 아냐?”
“에이, 그건 걔한테 실례잖아요.”
“이거 방송 나가면 반응 좋겠다.”
무대를 내려가는 도중, 속 모르고 좋아하기만 하는 스태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았다고?
잘해?
방금 무대를 제대로 본 거야?
눈이 달려 있기나 해?
누가 봐도…….
“아름아!”
어두운 무대 준비 공간.
여러 장비가 쌓여 있고 항상 먼지와 사람이 오고 가는 곳에서, 민경섭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거 네가 연습했던 버전이 아니잖아. 어떻게 된 거야?”
“…….”
신아름은 답 없이 민경섭을 지나쳐갔다. 그러자 민경섭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짐짓 험악한 투로 말했다.
“언제 바뀐 거야?”
“애초에 잘못 받은 거예요.”
“잘못 받아?”
민경섭이 곧바로 상황 파악을 끝냈다.
“수정 버전이 여러 개 있었구나…….”
“네. 어제 김민주랑 연습하다가 알게 됐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잘한 거야?’
민경섭은 이런 같잖은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아?”
민경섭은 신아름과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다.
업계의 사람들만큼 아이돌의 춤을 평가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김민주와 신아름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격차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아름의 기분은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분노, 슬픔, 좌절, 짜증,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얼굴에 뭉쳐두고 있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거지? 그렇지? 하아, 방송국 이 미친 새끼들. 안 그래도 연습할 날이 고작 사흘이었는데 영상이랑 곡도 잘못 보내? 당장 가서 따져야…….”
신아름이 민경섭의 손목을 잡았다.
“오빠, 하지 마요.”
“뭔 소리야! 이걸 왜 말 안 하는데! 아니, 어제 알았으면 말해줬어야……!”
“말해도 달라질 게 없잖아요. 괜히 걱정만 시킬 거예요.”
성필이 걱정할 것이다.
신아름이 생방송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몇 시간 동안, 성필은 가슴에 납덩이라도 매단 듯 초조할 게 틀림없다.
그녀는 성필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서, 단 몇 시간의 고민조차도 없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무대에 올라야 하니까, 팀장님한테는 말하지 마요.”
“아름아…….”
신아름은 민경섭의 옷자락을 놓고 터덜터덜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끄윽…….”
신아름이 눈을 미친 듯이 문지르며 눈물을 쏟아냈다. 민경섭이 다급히 다가가니, 그녀는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죽고 싶어요…….”
어제 김민주와 합을 맞춰본 뒤, 신아름은 가로 엔터로 돌아가 아침까지 계속 연습했다.
하지만 오늘 다시 김민주와 춤을 추니 자신의 모자람만 보일 뿐이었다.
“죽어버리고 싶어어…….”
인지(認知)가 즉시 심동(心動)으로 바뀌는 재능.
쉽게 말해, 본 것을 복사해내는 능력.
처음 이것을 본 한구인은 신아름이 천재가 틀림없다며 찬사를 보내왔다.
물론 흔치 않은 재능이다. 세상 그 누구도 신아름과 같은 능력은 없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분해서 죽고 싶어요……!”
홀로 추는 춤이라면 신아름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 있는 게 신아름 혼자일 땐 누구도 부족한 점 따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듀오 댄스는 아니다. 특히 두 댄서의 합이 중요한 ‘라우더’는 더더욱 그렇다.
무대 아래의 관객이 보았을 때보다, 함께 추는 서로가 서로의 문제점을 더욱 잘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춤 자체가 서로의 신체를 시야에서 겹치지 않게 하는, 묘기의 극에 달한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창피해서, 이딴, 이딴 실력으로 나는……!”
춤을 추는 내내 김민주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신아름이 생각하기에, 이유는 자명했다. 김민주의 실력을 신아름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듀오 댄스를 홀로 연습했기에, 서로 합을 맞춰본 적이 고작 3시간 남짓이기에, 신아름은 춤을 숙달하지 못했다.
천재적인 재능마저도 시간만은 이길 수가 없었다.
“아름아, 사람들은 모를…….”
“모르겠죠! 그래도 아는 사람도 있어요! 팀장님이나 김민주나! 다 알 거라고요!”
김민주는 ‘라우더’의 원곡자로부터 춤을 배웠다. 거기다 그 안무의 창작자에게도 테크닉을 전수받았다.
이벤트성 무대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그녀는 어떤 무대든 진심인 것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무대에 선 사람의 상대가 바로 신아름 자신이다.
농담 하나 없이,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연습 시간이 적었다, 그런 핑계는 댈 수 없다. 그 적은 시간을 감수하고 무대에 오른 게 신아름이니까.
“창피하고, 부끄럽고, 미치겠어요…….”
민경섭은 신아름을 위로할 엄두도 못 냈다.
“아름아…….”
왜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거야?
김민주를 향한 신아름의 적개심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이건 단순한 라이벌 의식 정도가 아니다.
어딘가 뒤틀려 있다.
신아름은 진심으로 김민주를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야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땅을 내려치고 눈물을 흩뿌리며 흐느낄 정도까지, 어떻게 고작 리허설에 이토록 분해할 수 있지?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민경섭은 우두커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신아름과 김민주의 스태프만이 있는 대기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는 스타일리스트와.
이렇게 끼리끼리 모여 한창 이야기꽃을 피웠다. 성필도 매니저와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일은 몇 년 하셨어요?”
“4년이요.”
“아. KS 엔터 쪽은 로테이션이 어떻게 돌아가요?”
“그럭저럭요.”
“…….”
KS 엔터의 매니저들은 입이 무겁나?
‘음악을 위한 동행’ 때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던데.
아무튼, 이 매니저는 성필과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자세도 무슨 군인처럼 각을 잡고 앉아 있는 데다가, 허공을 바라보길 즐기는 듯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성필은 뻘쭘해져서 수첩을 꺼냈다.
‘어디 보자. 뮤직 스테이지에서 컴백 무대를 하고, 다음 날 음방은…….’
이젠 민경섭에게만 온전히 맡겨도 되련만, 성필은 매번 습관처럼 가로 엔터 전원의 스케줄을 검토했다.
심지어 소녀연맹만이 아닌 직원들의 스케줄도 꼼꼼히 보았다.
‘전부 한 이사님 덕분이지.’
한구인은 외국에서 많이 쓴다는 협업 프로그램을 인당 십수만 원씩 들여 사 왔다.
그 프로그램에는 직원들의 스케줄과 맡은 업무, 프로젝트 업무의 진행도 등이 전부 표시되었다.
사실상 업무 CCTV였다.
직원들 스스로 업무 진척도를 갱신했던 회사 내부 전산망보다 훨씬 편했으나, 어쩐지 직원들이 초췌해져만 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런데 그것도 이제는 비었네.’
소녀연맹의 컴백까지 업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빨며 기다리는 게 일이라면 일이겠지.
성필이 수첩을 주르륵 넘기자 그 사이에 껴 있던 사진이 팔랑 떨어져 내렸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사진을 잡아챘다. 그리고 바람을 불어 먼지를 털어내고 소중히 손에 쥐었다.
‘어디 찢어지진 않았지?’
신아름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신아름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성필이 활짝 웃으면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아름의 손에는 주황색의 꽃다발이 화사하게 빛났다.
‘아름이…… 아이돌 끝내면 뭘 할까.’
혹시 사업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요식업이라든가, 아니면 의류업이라든가.
‘대학에 가기엔 너무 늦었을까.’
성필은 자신이 대학을 못 갔기 때문인지, 은근히 신아름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하곤 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에게 투사하여 해결하려는 건 저열한 욕망이었으니까.
‘그래도 아름이가 캠퍼스 생활을 해봤으면 좋겠어.’
청춘과 낭만을 즐기고, 때론 공부에 스트레스도 받고, 좋은 남자도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성필은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사진을 수첩 안에 끼워 넣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김민주가 들어왔다.
“민주…….”
그녀의 매니저가 리허설이 어땠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김민주가 성필의 바로 앞으로 왔다.
“박 이사님.”
성필을 부르는 그녀의 말투는 절대 곱지 않았다. 마치 성필이 무언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서 주변의 이목이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네?”
“신아름 곡이랑 안무 잘못 받은 거 알고 계셨어요?”
“잘못 받았다뇨? 오늘 특별 무대요?”
“네. 최종본이 아니라 옛날 버전으로 받았어요. 모르고 계셨어요?”
김민주는 화난 투였다.
성필은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톡을 확인했다. 민경섭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특별 무대의 곡을 잘못 받았다면, 신아름은 여태껏 잘못된 버전으로 연습했단 뜻이 된다.
민경섭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알아채고 성필에게 연락했어야 한다.
“……진짜 모르네.”
김민주는 헛웃음을 흘리며 성필에게서 살짝 물러났다.
“신아름 걔는 어제 알았어요. 다른 버전으로 받은 거.”
그 순간, 혼란만이 가득했던 성필의 정신이 탁 트였다.
“당장 PD님한테 가서 말해요. 이 무대 불합리하고, 못 하겠다고요. 특별 무대는 내가 어떻게든 올라가서 자리 채울게요. 솔로 버전 무대도 그럭저럭할…….”
“아뇨. 그냥 둘 거예요.”
김민주는 자신의 귀가 맛이 갔나 의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방금 성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매니저로서 담당 아이돌이 사실을 숨긴 데 부끄러워하지는 못할망정, 당당하게 사후 수습도 포기하겠단 발언을 하고 있다니?
‘진저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길래 어떤 인간인가 했더니.’
PD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게 두려워서 아예 충돌도 피하겠단 건가?
뭐 이딴 인간이 다 있지?
김민주는 당장 그를 비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성필이 말했다.
“아름이는 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어제 다른 버전을 받았는데도 말 안 한 거겠죠.”
“그래서요? 그냥 두자고요?”
“네.”
“……하.”
김민주는 명백히 사람을 깔보는 태도였다.
자칭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가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대기실의 스탭들조차 처음 보는 김민주의 모습에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아름이는.”
성필은 그런 김민주를 향해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생방송이 시작될 때까지의 몇 시간이나마 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거예요. 어차피 밝혀질 걸 알았겠죠.”
아마 민경섭도 신아름의 기분을 파악하고 지금까지 성필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이리라.
성필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그가 거의 발광하며 방송국을 여기저기 쏘다닐 것을 알아서였다.
신아름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괜히 제가 티를 내면 더 불안할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모른 척할 겁니다. 최소한 생방송이 끝날 때까지요.”
김민주는 얼이 나가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아름이건 성필이건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성필의 눈동자는 너무도 맑고 또 밝으며, 신아름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진짜…….”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신아름 걔 표정이나 봤어요?!”
김민주가 성필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매니저가 말리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잡았으나, 그녀는 거칠게 털어내곤 성필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냥 둬? 그냥 둬서 어쩌게요? 걘 자기 수준에 만족도 못 해요! 나랑 리허설 끝내고 당장 뛰어내릴 거 같은 표정이었다고요! 나랑 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면 걔가 당당하게 활동이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소녀연맹의 목표는 케이어스를 이기는 것, 이라고 들었다.
아니, 실은 들은 적도 없다.
단지 김민주가 그리 망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망상은 옳았다.
“나랑 뻔하게 비교된 영상이 활동 내내 남을 텐데 그걸 둬요? 적어도 동등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무대에 오른 거면 몰라! 당신 매니저잖아!”
기어코 김민주의 입에서 ‘당신’이란 호칭까지 튀어나왔다.
거기선 매니저도 참을 수 없었다. 완력으로 김민주를 붙잡고 성필에게서 떼어냈다.
그럼에도 김민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매니저는 담당이 좋아하는 걸 해주는 사람이 아니야! 담당이 잘될 길로 안내해주는 사람이잖아! 나도 봐요! 매니저님이 나 붙잡고 끌고 가고 있잖아! 이렇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제지하잖아!”
“알면 좀 얌전하게 따라와!”
“당신도 해! 하라고! 신아름 무대에 못 나오게 하란 말야!”
성필은 매니저에게 끌려가는 김민주를 바라보며 당혹을 금치 못했다.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
반발이 있으리란 것까진 예상했지만, 왜 이렇게까지? 아니, 김민주는 신아름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거 아니었나?
왜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가면서까지 저토록 화내는…….
쿵!
문이 거칠게 닫혔다.
김민주와 그녀를 따라온 KS 엔터의 스태프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남은 건 성필과 신아름의 스태프들뿐이었다.
다들 멍하니 김민주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이사님 방금…….”
“얘기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해요.”
띠동갑인 어린애한테 면전에서 ‘당신’이라고 불려놓고 고함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성필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성필은 의자에 앉아 수첩의 표지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에 해답이 있기라도 한 듯이.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스탭들도 원래대로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아름이가 안무를 잘못 받았단 걸 어제 알았단 거지?’
그럼 신아름이 제대로 된 안무를 볼 수 있던 건, 어제 김민주와 연습했던 3시간이 전부였다는 뜻이다. 거기다 조금 덧붙이면 방금 카메라 리허설 때가 고작이겠지.
‘그건 문제가 안 돼. 아름이는 안무를 보자마자 전부 외웠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성필은 수첩을 꾹 쥐었다. 낡은 표지에 성필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말 정도는 해주지. 어차피 올라야 할 무대니까 날 걱정시키고 싶지 않단 마음은 알지만.’
거기다 사태는 안 좋게 돌아가고 있다.
신아름이 무대를 망칠 일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하루의 시간으로 김민주의 완성도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래서 김민주도 신아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아마도 신아름의 표정에서 절망과 좌절이 전부 드러났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아름이는 무대에 서길 택했어.’
그녀의 판단이 맞다. 어차피 올라가야 할 무대다. 지금 무대에 오르지 않는 것을 택할 수는 없다. 설령 어제 이 정보를 접했더라도 결과는 똑같다.
어차피 올라가야 할 무대니까, 정해진 대로 올라가서 김민주에게 패배해야 한다.
‘패배…….’
과연 그럴까?
김민주는 신아름이 커다란 상처를 받으리라고 예측했었지만, 성필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전생의 신아름까지 모두 보고 온 성필은 결과를 쉬이 점칠 수 없었다.
성필은 신아름을 믿는 만큼 신아름의 재능을 믿는다.
‘아름이는 감각을 증폭해서 받아들여. 때론 그게 병이고, 때로는 재능이야.’
행동을 복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움직임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서 몸이 따라가는 게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예측하는 것이다.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춤과 같이 언어에 비견되는 것일 때에만 신아름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 수많은 감각을 취합하여 서사에 맞게 조합하는 것이다.
‘아름이는 어떻게 할까?’
“이사님 어디 가세요?”
“아, 목이 말라서요.”
성필은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으나 신아름이 걱정되어 죽을 것만 같다.
무대를 망치리란 생각은 안 들지만, 본인이 원하는 수준이 되지 않으면 깊이 절망할 게 틀림없다. 그런 아이니까 말이다.
‘그럼 아름이의 선택은…….’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도출해낸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예 듀오 댄스의 수준을 맞출 수 없으면, 민주 씨를 넘어서는 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동등해지려고 할 거야.’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을 시, 신아름은 김민주의 춤을 그대로 복사해낼 것이다. 타인에게 들려주면 꿈같은 이야기라면서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생의 신아름을 보아온 성필은 그게 꿈이 아니란 것을 안다.
‘아름이의 재능은 숙련도가 빨라지는 게 아니야.’
타인의 경험을, 그 경험이 쌓일 때까지의 서사를 읽어내고 훔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이라고 읽지 못할 리 없지.’
무대 위에서 김민주의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베껴내는 것이다.
지금의 신아름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가능성은 있다.
“자, 그럼 나는…….”
성필은 열심히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스태프들에게로 향했다.
‘누가 아름이한테 곡이랑 안무를 잘못 줬는지 찾으러 가볼까. 일이 어그러질 때를 대비해서.’
신아름은 성필이 걱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성필의 일은 신아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녀의 바람이 이뤄진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무대, 꼭 제대로 봐요. 그리고 울어줘요. 팀장님이 울 정도로, 노력할게요.’
성필은 그 말에 답변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이나마 마음속으로 말한다.
‘믿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