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성필의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날 중 하루가 아마 오늘인 듯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이돌 그룹인 케이어스, 그중에서도 진저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니.
게다가 노래도 불러준다고 한다.
“좋은 일 있으셨슴미까?”
“그럼요.”
“뭠미까?”
“진저 씨 연주 듣는 거요.”
“아님미다. 오래 배운 것도 아니라 잘 못 함미다. 에리카가 더 잘함미다.”
성필이 기대하는 티를 잔뜩 내자, 진저는 어떻게든 그의 기대치를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피아노를 배운 건 고작 몇 개월이니, 자신은 발음이 안 좋아서 보컬 실력이 떨어진다느니,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다느니.
의도가 뻔히 보여서 귀엽기만 했다.
“진저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심미까.”
진저는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했다. 대부분 KS 엔터의 직원이었고 가끔은 유명한 아티스트가 보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성필은 마음이 살짝 불편해졌다.
‘적진 속에 들어온 병사 같은 마음이야.’
혹시 KS 엔터 직원들이 성필을 의심하면 어떡하지? 무언가 비밀을 캐가기 위해서 온 거라고 생각하면?
‘나도 KS 엔터 콘텐츠 기획팀 사람이 왔을 때 경계했었으니까.’
하지만 직원들은 성필을 보고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긴, 목에 외부인 출입증을 걸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관심이 쏟아지겠냐마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슴미까.”
4층으로 온 진저는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서류철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서류에 적힌 목록을 읽었다.
“뭐 보시는 거예요?”
“작업실 예약자 목록임미다.”
“작업실요……?”
“레코딩 장비랑 악기 같은 걸 두는 곳임미다.”
“아, 여기 A&R팀 소속 프로듀서분들이 쓰시는 곳인가요?”
“아님미다. 그분들은 따로 위층에 공간이 있슴미다.”
“…….”
그렇다면 이곳 4층은 온전히 아티스트만이 사용하는 공간이란 뜻인가?
성필은 보면 안 된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진저가 손에 든 서류를 흘끗거릴 수밖에 없었다. KS 엔터쯤 되는 회사이니 예약자 목록 양식마저도 궁금했다.
절반쯤은 상시 사용자가 있는 작업실이었고, 나머지는 예약을 받아 로테이션이 돌아가는 듯했다.
‘대부분 가수네.’
이름은 작업실이지만 가수의 연습실 역할도 하는 것이다.
성필은 기다란 복도로 시선을 돌렸다.
묵직한 금속제 문이 몇 개나 보였다. 모퉁이를 돌면 방이 저보다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10개를 넘을 수도 있다.
‘아티스트에게는 이런 공간을 제공하는 거구나.’
빈방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용율은 높지 않은 듯했다.
과도한 투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KS 엔터가 아티스트 지원에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정호환 이사님의 입김이 닿았을까.’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아니다’라며 딱 잘라 말했던 정호환은 가수에게는 이런 시설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진저 씨. 아이돌분들도 여기 자주 써요?”
“음, 아마 아이돌…….”
“진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수척하다,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몸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밥을 잘 먹지 않는 건지, 수척한 볼과 대비되는 튀어나온 광대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형형한 안광을 가진 것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구유한 이사님.”
진저가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반백발의 중년 남자, 그의 이름은 구유한이었다. 성필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 여긴 어쩐 일이며 또 옆에 분은?”
“가로 엔터테인먼트 박성필 이사님임미다. 여기 온 건…….”
“대답 순서가 바뀌었어.”
“아, 죄송함미다…….”
구유한이 됐단 듯 성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사 구유한입니다.”
“예,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입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구유한의 손은 그의 얼굴처럼 살이 없고 차가워서 마치 뼈를 잡는 듯했다.
“박성필…… 이사……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성필의 이름을 곱씹던 구유한은 갑자기 화색을 띠었다.
“제 이름을 말씀이십니까?”
“예. 소녀연맹 ‘롱 포’ 때문에 저희 회사가 한동안 시끄러웠었거든요. 밴드 사운드를 이용한 걸그룹은 오랜만이었어요. 그나마 메탈을 베이스로 삼은 그룹은 있었지만, 그건 마니악한…….”
구유한은 어째서 ‘롱 포’ 때문에 KS 엔터가 놀랐었는지 한동안 말하였다.
음악과 시장에 관련된 식견을 보아하니, 아마 구유한도 프로듀싱 계열의 이사인 듯했다.
“……때문에, 박 이사님의 이름을 자주 들었습니다.”
구유한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명함을 꺼냈다.
명함을 교환한 후, 성필은 예의에 따라 3초 정도 명함을 유심히 보았다.
직책은 그냥 ‘이사’라고 나와 있었다.
“진저, 여긴 왜 왔다고?”
“박 이사님한테 연주를 들려드릴 검미다.”
“네가 먼저 하겠다고 했나?”
“그렇슴미다.”
구유한은 입꼬리만 올리곤 진저를 지나쳐갔다. 그러면서 성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중에 또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 그럼 저야 영광이죠.”
“하하, 언제가 좋을까요.”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구유한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층수를 입력한 그는 여전히 입꼬리만 올라간 채 말을 이었다.
“박 이사님이 사업적 혜안이 생기셨을 때라던가, 그때 볼까요.”
“……예?”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무기질의 음성이 들려오고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성필이 그의 말에 답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구유한은 입매를 일자로 되돌렸다.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진 입이 그에 어울리는 무거운 목소리를 뱉었다.
“진저, 치앙여우얼(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구유한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성필은 그가 했던 말을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나한테 사업적 혜안이 생겼을 때 보자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투자해주겠단 뜻 같다.
혹은 KS 엔터로 오라는 건가?
하지만 직접적인 제안은 아니었으니 무엇이든 진심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리라. 그리고 진심이면 성필이 뭐 어쩌겠는가.
‘우리 애들 놔두고 뭘 할 수는 없지.’
“진저 씨, 아까 구 이사님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예? 아, 별거 아님미다.”
진저는 어째선지 풀이 죽어선 다시 작업실 예약 명단만 들여다보았다.
“혹시 저 때문에 한 소리 들은 거예요? 원래 외부인이 이런 데 오면 안 되는데, 제가 진저 씨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거나…….”
“아님미다! 안 곤란함미다! 여기 선배님들이랑 친한 뮤지션분들도 자주 오심미다!”
진저는 어떻게든 성필의 죄책감을 없애주려는 듯 4층에 얼마나 많은 외부 인원들이 드나들었는지 설명했다.
“그, 그리고 제가 곤란하면 어떻슴미까. 박 이사님 때문이면 곤란해져도 괜찮슴미다…….”
성필이 감동하여 답을 돌려주려 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진저는 부끄럽기 때문인지 재빨리 명단으로 눈을 돌렸다.
“4번이 비어 있슴미다.”
빈방을 확인한 진저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성필도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진저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든 말씀하셔도 됨미다.”
“구유한 이사님은 어떤 일을 맡고 계세요?”
진저는 방금 구유한에게 들었던 말 때문에 움찔했다.
무엇이든 물어도 된단 말이 무색하게도 한참을 머뭇거린 진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작게 말했다.
“경영 쪽이심미다.”
“아, 경영이구나.”
그렇다면 성필보다는 한구인과 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얘기해줬단 거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됨미다.”
“어차피 이사 명단은 인터넷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어요. 뭐 하시는 분인지도요.”
“……그렇슴미까?”
“네.”
작업실 안쪽은 깨끗했다.
최근에 사람이 사용한 티는 나지 않았으나 규칙적으로 청소된단 느낌이 들었다.
진저는 키보드의 전원을 켜고 음향을 조율했다. 여러 음향 모드를 시험해보던 진저는 ‘그랜드 피아노 모드’를 골랐다.
“뭐 연주해주실 거예요?”
“이름은 없슴미다.”
성필은 열심히 키보드의 설정을 조작하는 진저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옛날에 내가 은인이라고 하셨었지.’
으레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선입견이지만, 중국인은 허풍이 심하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KS 엔터로 온 성필에게 직접 연주까지 해주려는 것을 보니, 진저는 진실로 성필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듯했다.
세상에, KS 엔터에 속한 아이돌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연주까지 해주다니.
‘정말이었구나, 내가 은인이란 거.’
성필은 ‘진저 씨는 예의가 너무 발라서 자그마한 도움을 받아도 보답하려는 성격이다’란 프레임을 만들어두었었다.
괜히 진저에게 무언가 기대했다가 상처받으면 안 되지 않은가.
예를 들어, 오늘 KS 엔터로 와서도 성필 혼자 신나 진저에게 인사했다가…….
‘아, 예, 안녕하심미까.’
같은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면, 성필은 한가득 슬픔을 머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진저의 호의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근데 언제 시작하시는 거지?’
진저는 자꾸만 건반에 손을 올리고 떼고를 반복했다.
몇 마디 두드리곤 성필을 흘끔거리는 등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저…….”
진저가 소심한 투로 말했다.
“다른 곳 봐주시면 안 됨미까?”
성필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던 까닭이다.
그는 마치 일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기 직전인 클래식 애호가와 같은 태도였다. 고개를 쭉 뺀 채 진저를 바라보며 두 손은 기대감을 쥔 듯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진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성필은 몸의 방향을 사선으로 틀었다.
그제야 진저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저 연습 많이 했슴미다. 쇼케이스에서 팬들한테 들려줄 검미다.”
“오, 팬 쇼케이스도 해요? 기자 쇼케이스 다음에요?”
“인터넷으로지만……. 팬들이 좋아할…… 좋아할지는 모르겠슴미다. 급하게 배운 거라…….”
“당연히 좋아하죠.”
비록 실력이 뛰어나진 않더라도, 진저의 팬들은 좋게 보아줄 것이다.
팬을 위해 연습을 했다는데 나쁘게 볼 사람이 있을 리 없잖은가.
‘아이돌이 무언가를 준비해서 팬에게 보여주는 건,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부모님에게 보여주는 거랑 비슷하지.’
부모님이 칭찬해줄 게 당연하다. 그리 생각하니 기쁜 마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팬도 아이돌이 열심히 준비했단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아이돌의 마음씨를 봐서라도 기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설령 진저의 실력이 크게 부족하더라도, 성필은 눈의 초점을 흐려서라도 그녀를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진저 씨가 하시는 건데 싫어할 수 없죠.”
진저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한 뒤 건반의 첫 음을 눌렀다.
이어서 흘러나오는 반주는 수려했다. 적어도 못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저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입술을 뗀 순간.
“잠깐만요!”
성필의 외침에 진저가 화들짝 놀랐다.
“므, 왜 그러심미까?!”
“그, 그으, 이게요, 저한테 들려줘도 되는 거예요?”
“예? 뭐 이상한 거라도 있슴미까?”
“아니…….”
진저가 연주하는 멜로디는 익숙했다.
성필에게 익숙하단 것이었다.
‘케이어스 바로 다음 컴백곡이잖아.’
전생에서도 성필이 가장 좋아했던 곡이었다.
컴백곡을 타 회사의 사람에게 미리 들려주다니? 스포일러나 마찬가지인 행위이며 계약상으로도 문제가 발생할 게 틀림없다.
“이거 쇼케이스 때 팬들한테 들려줄 거라고 하셨죠? 그럼 기밀 같은 거니까 저한테는…….”
“이 곡 아님미다.”
“……아니라고요?”
“이건 그냥 정호환 이사님이 알려주신 검미다.”
“…….”
성필의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진저 씨가 뭐라고 하시는 거지?’
아니, 방금 진저가 연주한 건 케이어스의 컴백곡이잖아.
당장 일이 주 뒤에 발표할 예정일 텐데, 그렇다면 쇼케이스에서 발표될 텐데.
왜 쇼케이스 때는 이 곡을 안 들려줄 거라고 하는 거지?
“아.”
진저는 성필의 고민을 짐작했다. 그리고 안심하란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설마 케이어스의 앨범에 담길 곡을 미리 유출하겠슴미까? 계약 위반임미다. 저도 그 정도는 암미다.”
“…….”
“이건 연습곡 같은 검미다.”
성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스스로는 어떻게도 하지 못할 만큼 빠르고 거칠게.
이 박동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왔다.
“안심하고 들으셔도 됨미다.”
진저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데뷔 당시보다 확연히 나아진 한국어 발음의 노래가 작업실을 가득 메웠다.
가사는 성필이 알던 것과 다르지만, 곡만은 확실히 성필의 기억과 같았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을 곡.
다시는 듣지 못할 곡.
앞으로는 영원히 성필의 기억 속에만 있을.
케이어스의 곡이 울려 퍼졌다.
* * *
연습한 지 2시간 30분째. 이제는 김민주도 스케줄을 소화하러 가봐야 한다.
김민주와 신아름은 땀방울을 닦아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신아름은 절망을.
김민주는 분노를.
“야.”
김민주가 타올을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럴 거면 나오지 마.”
신아름은 지친 얼굴로 김민주를 바라보았다. 지쳤지만, 눈빛에 새겨진 불길은 아직도 타오르는 중이었다.
“뭐?”
“나오지 말라고.”
“지랄하…….”
“이딴 식이면 내가 창피할 거야.”
신아름이 입술을 꽈득 물었다. 옅은 피가 입술의 주름을 타고 거미줄처럼 번져갔다.
“너랑 설 바엔 차라리 혼자 서는 게 나아.”
자괴감.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어떻게든 김민주를 향해 적개심을 세우고 있으나, 그것마저도 시야가 흔들리고 흐려져선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알아.’
알고 있다고.
‘네가 하는 말 다 알아.’
신아름도 김민주의 말에 공감했다.
같이 설 바에야 김민주 혼자 서는 게 나을 듯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내일까지…….”
“내일까지 어쩌게? 네가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웃음거리가 되는 건 못 피해.”
‘웃음거리가 된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사람들은 그 정도로 신아름을 낮게 평가하진 않으리라.
‘라우더’에 관한 지식이나 춤에 대한 식견이 없고서야, 신아름과 김민주의 수준을 쉬이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소한 두 사람은 그 차이를 안다.
바로 당사자인 신아름과 김민주였다.
“이딴 식이면…….”
김민주가 분하여 열기와 함께 숨을 들이쉬었다.
“차라리 나오지 마.”
“너, 네가 무슨 권리로……!”
그 순간 연습실의 문이 열리며 진저와 성필이 들어왔다.
신아름과 김민주는 같은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하필 지금 돌아오다니…….
“민주 언니, 이제 갈 시간임미다.”
“…….”
김민주는 신아름을 한 번 흘리곤 연습실을 나갔다. 그녀의 싸늘한 태도에 진저는 의문을 띠었으나, 이내 신경 쓰지 않고 성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주셔서 감사했슴미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박 이사님 노래도 잘 들었슴미다.”
“부끄럽네요…….”
“저도 부끄러웠슴미다.”
“……네. 음,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네요.”
“진짜 만나고 싶은 거 맞슴미까?”
“네?”
“한국인들은 가식이 심하다고 들었슴미다.”
“인종차별이에요 그거!”
“그럼 됐슴미다. 다음에 꼭.”
진저가 연습실을 나가자마자 성필은 길게 숨을 뿜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신아름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아름아?”
신아름은 잔뜩 화난 기색이었다.
“민주 씨랑 싸우기라도 했어?”
신아름이 김민주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단 건 알지만, 같은 방에 고작 세 시간 두자마자 싸우다니.
심지어 이렇게 화가 날 정도로…….
“팀장님.”
“응.”
성필이 신아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저…….”
그 순간, 신아름이 이상한 낌새를 발견했다.
“팀장님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응? 아니, 없는데.”
“이제 보니 눈가도 조금 빨가네?”
“아냐, 내가 무슨…….”
“팀장님 울었어요?! 진저가 그랬죠! 돌았나 진짜 팀장님을 울려?! 죽여버릴……!”
“아냐 아냐 울긴 했는데 안 좋은 이유로 운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그냥, 별거 아니야.”
“말해요.”
성필은 말해야만 했다.
지금의 신아름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누구든지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정말 사람 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찌를 듯한 기세였다.
“왜 울었냐면, 어…….”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요. 진저인지 생강인지 하는 년이 팀장님한테 욕했어요?”
“……진저 연주 듣고, 울었어.”
신아름이 성필의 멱살을 잡은 뒤 자신의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성필은 신아름과 코를 맞대게 됐다.
“다시 말해봐요.”
“아, 아름아…….”
“생강년이 연주하는 거 듣고 울었다고요? 케이어스 데뷔 때처럼? 케이어스가 그렇게 좋아요?”
“…….”
대답이 없자, 신아름은 그의 멱살을 또 거칠게 놓았다.
“됐어요.”
어차피 성필도 한때의 감정이리라.
아까 김민주에게 폭언을 들었을 때도 결심했지만, 신아름은 다시금 의지를 다잡았다.
“우리 컴백하면 생강년 따위 생각도 안 날 테니까.”
“에이, 지금도 너희들 생각하느라 케이어스 분들은 떠올릴 틈도 없지.”
“말은 잘하시네. 이번에 케이어스 앨범 예구 몇 장이나 했어요?”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야. 암튼 너 기분 왜 안 좋은 거야? 정말 민주 씨랑 싸웠어?”
“하아.”
신아름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의자에 걸어두었던 패딩을 들었다.
“걔랑 나랑 싸우는 거 하루 이틀 아니잖아요. 오늘도 자기가 춤 더 잘 춘다면서 뻗댔어요. 그거 때문에 말다툼 좀 했어요.”
“아…….”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는 어디로 간 것일까.
성필은 점점 케이어스를 향한 콩깍지가 벗겨지는 듯했다.
“내일 무대에서…….”
신아름이 입술을 짓씹었다.
“진짜 박살 내 줄 거예요.”
* * *
“……민주 언니.”
“왜.”
밴을 타고 스케줄 장소로 가던 도중, 진저가 드물게 가라앉은 톤으로 물었다.
“우는 건 무슨 의미임미까?”
“슬프단 거지. 또는 기쁘구나. 넌 그런 것도 몰라?”
“그럼 노래를 듣고 우는 건 기쁜 쪽임미까?”
“보통은 그렇겠지. 얼마나 노래를 못 부르면 울겠어. 아니, 아무리 끔찍한 곡도 듣고 울진 않아.”
그녀의 답을 듣고, 진저의 입술 사이에서 자꾸만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심하게 창가를 보고 있던 김민주의 눈이 갑자기 커다랗게 변했다.
“박 이사님 우셨어?”
“네?”
“네 연주 듣고?”
“아…… 네에…….”
앞 좌석에서 수면을 취하던 에리카도 번쩍 눈을 떴다.
“무슨 소리야? 진저 네 연주? 키보드 말하는 거야?”
“그렇슴미다. 그게, 갑자기 박 이사님이 제가 노래하던 도중에 울었슴미다.”
“그럼 내 연주 들으시면 기립 박수 갈채 오열하시겠다.”
김민주는 에리카를 무시하고 진저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뭐 불렀는데?”
“그거, 정호환 이사님이 만드셨다가 폐기한 곡 있잖슴미까.”
“너 연습하라고 주신 곡?”
듣고 울 만한 노래는 아니다.
멜로디와 기본적인 반주만 붙었을 뿐 정교하게 다듬어졌던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가사가 감동적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감동적인 것도 아니었다.
진저가 어릴 적에 배웠다던 민족 전통 노래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었으니까.
“으와, 뭔데. 박 이사님 너 팬이라고 했을 땐 걍 그런갑다 했는데 좀 이상하시다.”
“박 이사님 욕하지 마십시오!”
진저가 외침에 김민주는 화가 돋았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언니한테 소리를 질러?
“야 진저…….”
“민주 언니 슬픔미까?”
화내기 직전이었는데, 진저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지금도 언제 소리쳤냐는 듯 걱정을 가득 담아서 김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저의 태도에 김민주는 화내려는 것도 잊고 한숨만 쉬었다.
“슬프긴 뭐가. 빡친 거야.”
“아름 씨랑 일 있으셨슴미까?”
“있었지. 걔, 내일 특별 무대 안무를 잘못 외웠어.”
“그런 일도 있슴미까?”
“애초에 방송국에서 다른 파일을 보낸 거야.”
“그럼 어떡함미까?”
“뭘 어떡해.”
안 나와야지.
“아, 하긴. 하루 연습한 안무로 올라가도 창피당하는 게 끝이겠슴미다. 아름 씨도 안쓰럽슴미다.”
“……너 말야. 성격 되게 나쁘네? 신아름 걔한테 꼭 창피를 줘야 해? 꼭 창피당하라는 식으로 말하네?”
“그럼 어떡함미까. 나온다고 약속한 무대에 안 나올 수 있슴미까?”
“방송국 실수잖아. 그쪽에서 어떻게든 해야지.”
“그거 때문에 슬프셨던 검미까. 아름 씨가 창피당할까 봐.”
“…….”
“케이어스 멤버들이나 지극정성으로 챙기시지 그러심미까.”
김민주와 진저의 다툼으로 뒷좌석이 소란스러워지자 에리카가 목소리를 높여서 다툼을 멈추었다.
그러자 개구리 수면 안대를 끼고 있던 진소유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안대를 낀 채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헛소리를 주절거렸다.
“뭐야, 에리카 왜 화내. 나 샤워 안 하고 있어.”
“소유 너는 더 자.”
“나도 샤워실에서 자지는 않아…….”
진소유는 금세 다시 잠들었다.
* * *
“미친, 개인 대기실이다!”
신아름은 방송국 대기실로 들어오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민주랑 같이 쓰는 데잖아.”
“꼭 팀장님은 초를 쳐요. 어차피 걔는 리허설 때까지 오지도 않잖아요. 그럼 제 개인 대기실이죠. 여기서 제가 이불 깔고 누워…….”
“아름아 의상 더러워져 누우면 안 돼!”
스타일리스트들이 기겁하면서 신아름을 붙잡았다.
오늘 신아름은 하이웨이스트 슬랙스에 어깨와 목을 훤히 내놓은 크롭티 차림으로, 그 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다.
만약 신아름이 장난으로라도 바닥에 앉거나 누웠다면 스타일리스트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리라.
“근데 김민주 진짜 리허설 직전에 와요? 1년차 아이돌 주제에 버릇이 없네.”
“케이어스는 바쁘니까.”
“차애가 잘돼서 좋겠네요? 그렇겠네요?”
“…….”
“왜 대답이 없지? 정곡 찔렸나?”
신아름은 한동안 성필을 놀렸다.
결국은 ‘민주보다 네가 훨씬 좋아’란 대답을 얻어냈다. 신아름은 그것을 녹음까지 했다.
“김민주 오면 들려줘야지.”
“그걸 왜 들려줘!”
“팀장님.”
갑자기 신아름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오늘 잘 지켜봐요. 제가 김민주 이기는 거. 팀장님 그렇게 좋아하는 케이어스, 내가 며칠 연습한 걸로 때려눕히는 거요.”
때려눕히는 건 보고 싶지 않지만, 성필은 신아름의 기세가 마음에 들었다.
최고를 향한 마음가짐은 중요하니까.
“그래. 완벽한 무대를 보여줘. 케이어스 팬들이, 세상 사람들이 다 놀라게.”
신아름이 성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익숙한 앵글이다.
성필이 무심코 뒤로 물러나려 할 때, 신아름이 성필의 뒷목을 붙잡고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무대, 꼭 제대로 봐요.”
“볼 거야.”
“그리고 울어줘요.”
“울어야 해?”
신아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농담한다고는 볼 수 없었다.
“팀장님이 울 정도로, 노력할게요.”
신아름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언제 붙어 있었냐는 듯 재빨리 성필에게서 멀어졌다.
“아름아 카메라 리허설!”
문밖에서 민경섭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아름이 물음표를 띄우면서 문을 열었다.
“오빠, 왜 카메라를 먼저 해요? 드라이 리허설은요?”
“민주 스케줄 맞추느라고 미리 상태 점검하신대. 이거 맞추고 또 어디 간다더라. 빨리 나와!”
“진짜 케이어스면 다인가. 자기들이 상전이야 아주.”
“됐고 빨리 가자. 형, 다녀올게요!”
신아름과 민경섭이 대기실을 나섰다.
그러자 헤어, 메이크업 스태프가 은근한 투로 성필에게 물어왔다.
“아름이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아, 그렇죠.”
“아까 아름이가 이사님 목 잡고 당기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보통 사람들이 보면 놀랄 만하다.
회사의 이사를 아이돌이 맘대로 붙잡고 당겼다 밀었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 ‘소녀연맹 비긴즈’ 챙겨보고 있거든요. 거기서 아름이 옛날얘기도 나오잖아요. 박 이사님 얘기랑요. 정말 가족 같아요.”
“하하, 네.”
가족 같아요, 라는 말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냥, 가족이니까.’
* * *
신아름은 민경섭과 함께 무대로 향했다.
무대로 가는 좁은 복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까 성필에게 무대를 보고 울어달라고 했었다. 그가 감동할 정도로 완벽한 무대를 해야겠지.
‘아름아, 네가 민주를 뛰어넘었어. 네가 케이어스보다 더 나아. 대단하다. 프로듀서를 한 보람이 있어…….’
신아름은 눈을 반쯤 감고 걸으면서 성필에게 듣고 싶은 말들을 되새겼다.
‘넌 네 꿈을 이뤄줄 게 분명해.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야…….’
스스로에게 거는 약속이자 저주.
그것을 수십, 수백 번 곱씹으면서 걷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무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카메라 리허설.
신아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김민주가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바퀴벌레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진 채였다.
“방송국 인간들 일 제대로 하는 거야? 제대로 된 안무를 어제 받은 애를 무대에 세워? 넌 그걸 또 나왔어?”
“그래.”
신아름이 외투를 접어서 공처럼 모았다. 그리고 옷을 받으러 온 민경섭에게 넘겼다.
무대 위는 대기실보다 히터 바람이 약했다. 배와 팔이 드러난 옷차림으로는 추웠다.
하지만 몸은 떨리지 않았다.
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진짜 방송국은 정신이 반쯤 나간 인간들만 일하나. 어떻게 너한…….”
“말 안 했으니까.”
바퀴벌레를 보듯 일그러져 있던 김민주의 표정이 이제는 경악으로 뒤덮였다.
“뭐? 말을…….”
“안 했어.”
리허설 시작 1분 전입니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자리를 잡고 장비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곡, ‘라우더’가 재생될 준비를 마쳤다.
“아무도 몰라.”
신아름이 안무를 잘못 받았다는 사실을.
“너 진짜 미쳤어?! 어떻게 하루 만에 안무를 외웠단 거야!”
아니, 외울 수는 있겠지.
문제는 김민주와 격이 안 맞으리란 것이다.
수십 일 동안 ‘라우더’를 소화해왔던 김민주와 비교하면 신아름은 목각인형이나 다름없을 터다.
그것은 어제의 연습에서도 증명이 됐다.
2시간 동안 최대한 리믹스 안무를 맞춰보았으나, 신아름은 김민주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했다.
일주일만 있었다면, 아니 나흘만이라도 더 주어졌다면 어느 정도 됐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아니다. 아니야…….
“말을 안 했으면, 너, 리믹스 안무를…….”
“너랑 연습했던 두 시간 동안 본 게 전부야.”
신아름은 사소한 일이란 투로 말했다. 그럴수록 김민주는 더더욱 안색이 안 좋아졌다.
‘신아름이 안무를 잘못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단 건, 제대로 된 안무와 곡 영상도 받지 못했단 거잖아.’
그럼 그동안 연습을 어떻게 했단 거지?
정말 신아름의 말대로, 어제 김민주 자신과 합을 맞춰본 두 시간이 전부였다.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서만 연습했단 거야?
“너, 너…….”
김민주가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올렸다.
“이거 직캠 올라가면 너 그냥 좆되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신아름이 안무를 외우는 속도는 김민주마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배움의 속도가 빠르더라도 김민주의 완성도는 따라잡지 못했었다.
심지어 이 자리에 서기까지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해서 연습했다고 하니, 연습해도 얼마나 제대로 연습했겠는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리라. 허나 춤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아이돌들은, 관계자들은 알아챌지도 모른다.
‘역시 케이어스의 김민주다. 신아름보다 훨씬 낫네’ 같은 말을 지껄일지도.
“두고두고 비교당하……!”
“어쩌라고.”
“뭐?”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는데. 어제 말했으면? 아님 오늘 말하면? 어차피 난 여기에 올라야 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성필을 걱정시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신아름은 그리 판단했다.
신아름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라우더’의 시작 자세를 잡았다. 김민주도 흠칫하며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취했다.
“아, 내가 안무 하루 만에 외웠단 거, 이제 한 명 더 아네.”
곡이 시작되기 전의 틈을 타, 신아름이 가벼이 말했다.
“너.”
그러니 보아라, 내 모습을.
‘라우더’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춤을 추었다.
정교한 기계 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