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16화 (216/760)

216화

음악세상 생방송이 끝났다.

출연자 대기실이 주욱 늘어선 복도. 그곳을 PD인 박재환이 황제라도 된 것처럼 거만하게 걸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PD님!”

“그래.”

박재환은 줄을 선 아이돌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어느 정도 급이 있고 유명한 이들은 음방이 끝나고도 PD에게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떠날 수 있다. 박재환도 그런 이들에게 이딴 짓은 시킬 수가 없다.

하지만 음방 출연 한 번이 간절한 아이돌은 아니었다. 박재환이 지나가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어, 너희들 이번에 좋았다.”

“감사합니다!”

아이돌과 매니저는 간이라도 빼줄 기세로 감사를 외쳤다.

박재환은 그 꼴을 보며 원초적인 쾌락을 느꼈다. 권력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쾌감이었다.

‘이 맛에 PD 하지.’

권력.

타인이 원치 않는 행동을 강제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권력을 가진 이에게 비위를 맞추게 하며, 때론 굴욕적인 행위조차 감내하게 만드는 것.

출연진 결정권을 지닌 음방 PD는 만인이 우러르는 아이돌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잘 좀 춰라.”

“죄, 죄송합니다.”

“무대 내보내 주는 보람이 없어.”

“다음에는 더 잘하겠습니다!”

이렇듯 박재환의 별 마음이 담기지 않은 소리에도, 아이돌과 매니저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비굴한 태도를 취한다.

한 번 맛보면 그만둘 수가 없다.

박재환은 황제 행세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PD님.”

“어.”

기분이 좋아진 박재환은 부하에게도 친절했다. 하지만 그가 뒤에 꺼내는 말을 듣곤.

“시발 그걸 말이라고 해!”

부하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허리만 꾸벅꾸벅 숙였다.

“다리를 삐어? 이 타이밍에?!”

김민주와 함께 연말 특별 무대를 꾸미기로 했던 아이돌이 부상을 입었다.

그 아이돌은 컴백 기간임에도 멤버들과 안무를 맞추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노래만 부를 것이라 한다.

“다음 주가 특별 무대야! 거기 김민주 혼자만 내보낼 수는 없잖아!”

특별 무대에 올라갈 곡은 탑티어 걸그룹의 유닛곡인 ‘라우더’였다.

두 명의 멤버가 신기에 가깝도록 합을 맞추는 댄스가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었다.

“다른 아이돌을 구하…….”

“어떻게 구할 건데? 어? 그걸 어떻게 구해?!”

‘라우더’의 난이도는 상당히 높다.

춤의 장르는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면 따라 하는 것조차 힘든 ‘보깅’과 ‘텃팅’이다.

‘라우더’의 원곡자들조차 따로 춤을 배우느라 고생했었다. 김민주와 합을 맞췄던 아이돌도 연습마다 맥을 못 추었다고 한다.

“어, 어떻게든, 연락을 다 돌려서라도 구하겠습니다.”

“…….”

박재환은 화를 가라앉혔다.

그래, 화를 내봤자 되는 건 없다.

앞에서 부하를 혼내기보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연락을 돌리게 하는 편이 낫다.

“그래, 최대한 빨리 구해.”

“네!”

박재환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주일이나 남았어. 라우더를 커버한 적 있는 아이돌도 몇 있을 테니까, 그런 애들한테 연락을 돌리면 대타도 쉽게 구해질 거야.’

그의 예상대로, 구해지긴 했다.

문제는 대타의 실력에 있었다.

“이딴 애를 무대에 세워야 해……?”

김민주와 즉흥으로 합을 맞춰본 아이돌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전에 ‘라우더’를 커버해보았다던 아이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팬들에게 애교 삼아 보여주려고 적당히 연습하여 아이튜브에 올렸던 것일 뿐, 결국 커버는 커버였다.

‘라우더’를 완벽히 익힌 김민주의 옆에 세우면 상대는 목각인형으로 변해버린다.

“다른 애…… 다른 애를 구해.”

만약 김민주의 상대를 구하지 못한다면.

‘원곡자라도 불러야 할 판이야…….’

무대를 비울 수는 없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박재환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라우더의 원곡자, 아이돌은 KS 엔터에 있어.’

아이돌의 머리 꼭대기에 선 음방 PD라도 대형 기획사는 상대할 수가 없다.

점점 미디어의 파워는 떨어지고 있다.

이 세계는 미디어가 아니라 스타가 지배한다. 특히 수많은 스타를 보유한 대형 기획사라면 그 힘은 방송국을 넘어선다.

‘내가 감히.’

정말로, 감히 KS 엔터의 탑티어 걸그룹을 마음대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대를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추태는 보여줄 수 없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특별 무대 사흘 전.

“이게 최선인 거지…….”

“네, 네. 이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안 그래도 케이어스의 스케줄은 바쁘다.

언제까지고 김민주가 대타와 함께 안무를 맞춰볼 수는 없다. 대타가 김민주의 실력을 따라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데…….

“한 명도 민주를 못 따라잡잖아.”

김민주의 상대역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것이다. 목석이나 뚝딱이로 불릴 게 틀림없으니까.

“저, PD님. 그리고, 그게.”

“또 뭔데.”

“민주 대타로 뛰겠다던 애들이요. 걔네들 회사가 웬만하면 물려달라고…….”

“하아, 미친 가지가지 한다.”

그들도 김민주와의 실력 차이를 알아버린 것이다.

“어떡할…….”

“개소리 말고 나오라고 해! 제일 잘하는 애 골라서 빨리……!”

“PD님.”

무대의 구석에서 목청을 높이던 박재환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카메라 감독과 소녀연맹의 앵글을 논의하러 왔던 민경섭이었다. 그가 사람의 호감을 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연맹을 맡고 있는 민경섭입니다.”

“소녀연맹?”

박재환의 머릿속에 성필이 떠올랐다.

얼마 전이었나. 그에게 비싼 술을 얻어먹고 무대를 두 타임 할당해주기도 했었다.

박재환은 조금 표정을 풀었다.

“아, 그래요, 소녀연맹. 그런데요?”

“저희 ‘라우더’ 할 수 있는 애가 있습니다. 완벽하게요.”

박재환과 그의 부하가 서로를 보았다.

이제 와서 또 대타를 바꾸라고?

‘시간이 없는데.’

만약 지금 대타를 쓴다면, 그 대타는 김민주와 겨우 몇 시간 합을 맞추고 무대에 오르게 된다.

김민주는 사흘 뒤의 생방송까지 스케줄에 빈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작 몇 시간의 연습으로 무대에 세울 만한 모습이 갖춰질 리 없다.

심지어 특별 무대에서 보일 ‘라우더’는 이벤트성의 리믹스 버전이다. 일정 파트에서의 안무도 원곡과 다르다.

그것을 부하인 FD가 말하려던 때, 박재환이 재빨리 물었다.

“완벽하게?”

“예.”

“데려와서 보여줄 수 있어요?”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민경섭은 박재환의 허락을 받고 부리나케 스튜디오를 나갔다.

“PD님, 설마 지금 바꾸자는 건…….”

“완벽하다잖아. 보기만 하는 건데 손해 볼 것도 없고.”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말하려면 네가 좀 대책을 내놓던가!”

“죄, 죄송합니다.”

1시간이 더 지나서, 컴백 연습이 한창이던 신아름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아름아, 할 수 있지?”

“네, 할 수는 있는데. 파트너 없이요? 여기서?”

“응. PD님한테 보여드려.”

신아름이 차에 타고 오면서 보았던 ‘라우더’를 준비했다.

박재환은 의자를 가져와 신아름의 앞에 앉았다.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찾았던 대타들보다 나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신아름의 춤은 기대 이상이었다.

‘진짜 상대가 있는 거 같잖아?’

신아름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라우더’의 합을 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박재환은 눈을 비벼야만 했다. 정말로 신아름의 앞에 파트너 댄서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찾아봤던 대타들 중에선 제일 좋아…….’

박재환의 감탄에 민경섭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신아름은 춤을 마치고도 멀뚱히 있기만 했다. 사람들의 놀란 반응은 질리도록 보아 왔기에 딱히 감흥은 없었다.

“사흘 뒤 바로 나와줄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PD님!”

“우리가 ‘라우더’ 원곡을 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어, 그게, 어이 FD!”

FD가 무대를 점검하다 말고 헐레벌떡 따라왔다. 요즘 박재환에게 ‘대타를 구하라’며 시달린 터라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이쪽에 바뀐 안무 영상 전달해드려.”

“알겠습니다, PD님.”

“그거 보고 외워주세요. 바뀐 부분 그다지 없어. 사흘 만에 외우려면 힘들긴 하겠지만, 실력 보니까 쉽게 하겠더만. 민주랑 연습할 시간도 하루…… 뭐, 몇 시간은 있을 거고요. 잘할 수 있죠?”

민경섭이 신뢰를 가득 담아 신아름을 보았다.

신아름은 PD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어요.”

“그래! 아이돌이면 이렇게 패기가 있어야지!”

그렇게, 신아름은 특별 무대 자리를 하나 얻어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FD는 걱정을 가득 담아 물었다.

“PD님, 정말 괜찮을까요?”

“안 괜찮으면 어쩌게. 김민주랑 춤춰보고 지레짐작 꼬리 빼는 년들보다야, 저 아름이란 애가 훨씬 낫겠지.”

“하지만 민주랑 연습할 시간이 고작 몇 시간이잖아요.”

‘라우더’는 듀오 댄스다.

홀로 연습해서 완벽해졌다고 다가 아니다. 두 사람이 합을 맞춘단 건 상황이 전혀 다르다.

혼자 연습해서 춤이 몸에 익었다가, 오히려 둘이 추었을 때 자꾸만 동작이 엇나갈 수도 있다.

“뭐 어쩌라고 그럼. 방법 있어?”

“……아닙니다.”

“나도 할 만큼 했어. 그리고, 설마 신아름이 김민주랑 비교돼도 우리가 욕먹겠냐?”

PD인 박재환은 판을 깔아줄 뿐, 그 판 위에서 춤추는 건 신아름이다.

“욕을 먹어도 걔가 먹겠지.”

그와 동시에, 민경섭은 스튜디오를 나가며 자기가 무대에 서기라도 하는 듯 호들갑을 떠는 중이었다.

“오빠 그만 좀 해요. 제가 다 부끄러워요.”

“아, 미안. 근데 기쁘잖아.”

“호들갑 떠는 건 팀장님 닮지 말지. 그거만 빼면 되는데.”

“……내가 그렇게 형이랑 비슷해?”

민경섭도 성필의 기행을 익히 보아 왔다.

아이돌이 관련됐을 때, 성필은 감정의 고저가 밀물과 썰물처럼 달라지곤 한다.

그런데 자신이 성필과 비슷하다니…….

어쨌거나, 두 사람은 승전보를 가지고 회사로 돌아가게 됐다.

“잘했다 경섭아!”

너무 기뻐서 실신하기 직전인 성필의 포옹은 승전보의 덤과 같았다.

“팀장님 나는요?”

성필이 신아름은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신아름은 아까 민경섭에게 오버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성필이 기뻐해 주자 그에 맞춰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단순히 성필이 기뻐하기 때문에 들뜬 게 아니었다.

‘김민주.’

신아름은 항상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성적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3, 4년 뒤 팬덤이 안정적으로 다져지고, 소녀연맹이 꾸준히 우상향을 그린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먼 미래야.’

신아름은 한시라도 빨리 소녀연맹의 우위를, 아니.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고 싶었다.

‘팀장님.’

그녀는 자신을 안고 360도로 회전하는 성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1년 전의 그가 겹쳐 보였다.

케이어스의 무대를 보고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던 성필이다.

그 순간부터, 신아름의 목적이 하나 늘어났다.

‘증명해줄게요.’

자신도 케이어스에 뒤지지 않는단 사실을, 성필의 눈앞에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 * *

박재환에게서 업무를 받았던 FD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컴퓨터에서 ‘라우더’의 리믹스 음원과 안무 영상을 찾았다.

‘이거다.’

전송을 마친 FD는 안도의 한숨을 뿜었다.

일주일 동안 특별 무대를 망칠까 봐 전전긍긍했던 게 다 날아갔으니, 오늘은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자리를 떠난 FD의 뒤로 메일 전송 완료 메시지가 창백한 빛을 내며 떠 있었다.

[라우더 리믹스 버전 음원]

[라우더 리믹스 버전 안무]

‘라우더’는 곡과 안무가 여러 차례 수정됐다.

KS 엔터의 요청 때문이었다.

김민주의 무대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정호환이 직접 곡과 안무에 손을 여러 번 댔었다.

그런데 FD가 전송했던 건 최종수정본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가로 엔터로 잘못된 안무와 곡을 전송한 것이다.

* * *

“에에, 아름이만 먼저 컴백하는 거야? 즈루이(치사해).”

“그럼 리카 네가 할래?”

리카가 도리질 쳤다.

며칠 만에 안무를 외우는 건 신아름이나 가능할 일이었다. 물론 리카도 짧은 시간 내에 안무를 외우는 건 자신 있었다. 하지만 신아름과 같은 완성도를 얻을 자신은 없었다.

“혼또니(정말로) 새벽 동안 연습할 거야?”

“어.”

신아름은 자리에 앉아 방송국으로부터 얻은 안무를 계속해서 확인했다.

리카는 퇴근 시각이 되어 연습실을 나갔다.

모두가 사라진 연습실에서도, 신아름은 몇 시간이고 같은 안무 영상을 보았다.

‘어려워.’

신아름마저도 그렇게 인정할 안무였다.

그저 따라 추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파트너와 춤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간단한 안무가 아니야.’

멤버들끼리 질리도록 추었던 아이돌의 군무와는 차원이 다르다.

‘라우더’는 두 명의 댄서가 완벽에 가까운 합을 맞춰야 한다.

신아름은 ‘라우더’의 원곡자인 아이돌이 헤드캠(머리에 다는 카메라)을 착용한 영상을 보곤 헛웃음까지 지었었다.

‘합이 말 그대로 완벽해야 해.’

보깅과 텃팅.

팔과 손의 섬세한 움직임을 극대화한 춤의 장르다. 그런 춤을 베이스로 창작한 ‘라우더’의 안무 또한 팔과 손이 중요했다.

한 명의 시야에서 상대를 보면, 두 사람의 팔과 손이 절대로 겹치지 않는다.

둘의 팔은 서로의 팔을 기묘하게 비껴가고 파고들며, 잠시도 서로의 위로 지나가는 법이 없다.

‘톱니바퀴처럼.’

톱니바퀴는 맞물릴지언정 겹치지 않는다.

‘라우더’를 추는 두 사람의 팔과 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서로를 바라보며 춤을 추는 파트에서는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단 생각마저 들었다.

‘나 혼자라면 문제는 없어. 몇 시간만 줘도 당장 무대에 오를 퀄리티로 완성해낼 수 있어. 하지만 둘이니까, 상대가 있으니까 어려운 거야.’

관객들이 볼 때 그럴듯한 정도라면, 신아름은 노력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다.

박재환 PD도 그 정도를 바랐겠지.

하지만 상대는 김민주다.

부족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보여줄게.’

자신은 고작 이틀 만에 이 어려운 안무를 숙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김민주에게 증명할 것이다.

새벽 2시.

신아름은 안무 영상 보길 멈추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팔을 펼쳤다.

‘시작.’

무대에 설 때까지 김민주를 볼 수 있는 기회는 고작 한 번.

그것마저도 3시간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나 혼자 연습하면서 보내야 해. 김민주에게 뭔가를 기대할 수는 없어.’

합이 완벽하게 맞을 때까지.

홀로 재현해낼 것이다.

* * *

“안 가.”

오랜만에 연락이 온 어머니에게, 김민주는 싸늘하게 답했다.

[그래도, 민주야. 올해 정도는…….]

“나 바쁘다니까. 알잖아.”

어머니도 딸이 얼마나 바쁜지는 안다.

하지만 연습생이 되고 나서 집에 한 번도 얼굴을 안 비춘 건 너무하지 않은가.

[올해는 같이 가자 민주야. 아버…….]

“끊을게.”

김민주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다음에 무어라 말할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빠한테 가자고 하겠지.’

아버지의 묘소로.

김민주는 아버지를 보고픈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민주야.”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을 갈아입고 나자, 문으로부터 1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종일 스케줄 있어. 조금이라도 자둬야지. 안 그래도 새벽에 깨서 샵에 갈 텐데.”

“괜찮아요. 연습할게요.”

“‘라우더’는 충분히 연습했잖아. 선배들한테 강의도 받고.”

김민주는 ‘라우더’의 원곡자뿐 아니라 그 안무의 창작자에게도 강의를 받았다.

“너 완벽해. ‘라우더’ 춘 애들도 인정했는데 왜 그래. 어차피 이벤트성 무대인…….”

“‘어차피’란 말은 없어요. 무대는 다 똑같은 무대예요.”

1팀장은 김민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웬만해선 1팀장의 말을 따랐으나, 유달리 말을 듣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경쟁심이 생겼을 때였다.

김민주의 비정상적인 경쟁심은 그녀의 단점임과 동시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강점이었다.

그녀는 마치 승리를 위해 태어난 인간 같았다. 1팀장도 그런 김민주를 존경할 지경이었다.

“……그래. 3시간 뒤에 샵이니까, 다른 데 가려면 매니저한테 연락하고 가.”

“네.”

1팀장이 나간 연습실에서, 김민주는 스피커로 ‘라우더’를 재생시켰다.

원곡이 아닌 리믹스 버전이었다.

김민주는 몸에 익을 대로 익은 안무를 기계적으로 추었다. 아니, 추었었다.

이제는 영혼을 담아 안무를 소화했다.

‘안 질 거야.’

오늘 연락을 받았다.

상대는 소녀연맹의 신아름이다.

‘소녀연맹보다, 신아름보다 떨어질 수는 없어.’

김민주는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도 확인했다.

소녀연맹은…….

‘이겨야 해.’

여느 때와 같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예정이다.

작년 400미터 계주에서 받았던 굴욕을 갚아주고 확실한 상하관계를 구축할 것이다.

‘신아름.’

김민주가 신경 쓰는 아이돌이다.

신아름이 잘됐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넘는 건 못 봐.’

그 어느 아이돌도 자신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을 테니까.

* * *

“언니, 피곤하심미까?”

“……아니.”

김민주는 매니저가 가져온 에너지 드링크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진저가 경악하면서 김민주의 팔목을 잡았다.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면 어떡함미까!”

“뭐가.”

“거기 카페인 많이 들었슴미다! 많이 많이 들었슴미다! 심장이 고장남미다!”

“별…….”

김민주는 진저의 손길을 차갑게 내치고 드링크를 마저 마셨다.

고작 수십 분밖에 자지 못해서 눈앞이 핑핑 돌았었는데, 드링크 덕분에 조금은 살 것 같다.

벌써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니, 억지로라도 눈은 감을 수 없을 듯했다.

“……진저 너 또 왜.”

진저는 무슨 이유에선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녀는 김민주의 부름에 토라진 투로 시선을 살짝 내렸다.

“아님미다…….”

김민주는 한숨을 쉬며 진저의 목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자신에게 끌어당겨 등을 토닥였다.

“손 쳐낸 거 미안.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래. 아니, 신경 곤두서 있어도 그러면 안 됐는데.”

“……그렇슴미까?”

“어.”

“역시 피곤한 거 맞잖슴미까! 왜 안 피곤하다고 거짓말함미까!”

“거기서 화내는 거야……?”

어이가 없다.

김민주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멤버들과 함께 잡지 촬영 현장까지 갔다.

케이어스는 이번 달 ‘메트로폴리탄’이란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다.

“오오, 좋아요 좋아. 민주 씨, 에리카 씨한테 팔 둘러주세요. 조오아요, 그런 식으로 더 눈을 나른하게 뜬 느낌으로!”

케이어스 전원이 사진작가의 디렉션을 기대 이상으로 소화해냈다.

“좋아요! 됐어요!”

잡지의 편집장급이 사진들을 확인하고는 OK 사인을 보냈다. 김민주는 즉시 에리카의 어깨로부터 팔을 떼어냈다.

매니저가 편집장과 해맑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케이어스 멤버들은 저마다 개인 의자를 펴놓고 휴식을 취했다.

“민주 언니. 돌아가자마자 연습함미까?”

“그러려고.”

“내일이 특별 무대인데 무리하시면 안 됨미다.”

“컴백 기간에 더 열심히 안 하면 언제 열심히 해.”

“저도 같이 있으면 안 됨미까?”

“언제부터?”

“세 시에 4번 연습실에 있지 않슴미까? 그때부터 다음 스케줄까지 있겠슴미다.”

“야, 다른 애들이랑 연습이나…….”

그러고 보니, 에리카와 진소유는 저녁까지 개인 스케줄이 있다.

진저는 시간이 비게 되는 것이다.

“진저, 나 3시부터는 신아름이 와서 ‘라우더’ 연습해. 너 있어봤자 할 것도 없어. 연습실 대여 스케줄 확인하고 다른 데 가 있어.”

“아님미다.”

김민주는 진저의 생각을 손바닥 안처럼 읽을 수 있었다.

‘얘가 외로움을 타네.’

진저는 귀여운 동생이다.

때론 싸가지가 없기도 하고 중국인이라 대화의 핀트가 안 맞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귀여운 동생인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 같이 있어라. 매니저님한테 꼭 말하고.”

“알겠슴미다!”

진저는 어찌나 기뻐하는지 대답도 우렁찼다.

김민주는 그런 진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친근하게 여겨준다는 건,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에리카와 진소유가 개인 스케줄 때문에 떠나가고, 김민주와 진저만이 연습실에 남게 된 3시.

‘진저 이년이…….’

김민주는 어째서 진저가 자신과 남길 바랐는지 알 수 있었다.

“박 이사님 안녕하심미까!”

“아, 진저 씨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슴미다!”

케이어스의 스케줄이 곧이라, 김민주와 신아름이 따로 연습실을 잡아 연습하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다행히 가로 엔터 측이 시간을 맞춰주었다.

그리하여 성필과 신아름이 직접 KS 엔터로 찾아온 것이다.

“박 이사님은 계속 연습실에 계심미까?”

“아뇨. 방해될 테니까…….”

“그럼 제가 회사 안내해드리겠슴미다. 아, 저 건반도 배웠슴미다.”

“오 진짜요?”

“듣고 싶슴미까?”

“네 네네 네네네!”

김민주가 이를 빠득 갈았다.

‘진저 저 거짓말쟁이가…….’

김민주 자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같은 연습실에 남았나 했는데, 그냥 성필을 볼 명분을 만든 거 아닌가.

미국에서 3주 정도를 같이 지내면서 성필이 도움을 많이 줬다곤 들었다. 하지만 무슨 도움까지 줬기에?

‘진짜 중국인답다. 아니, 소수민족이랬나, 암튼.’

듣자 하니 진저가 속한 민족 문화 중에 애인에게 버려지면 복수하는 풍습이 있다던데.

정말 그럴 거 같다.

저렇게 거짓말을 뻔뻔히 하고(한 적 없음)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니, 복수는커녕 무엇을 못 하겠는가.

“뭐해. 시작 안 하게?”

진저에게 이끌려 사라지는 성필을 보고 있던 김민주는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음속으로 진저를 욕하고 있을 때가 아니긴 하다.

“해야지.”

신아름과 ‘라우더’를 함께 연습할 수 있는 건 고작 3시간 정도니 말이다.

“연습은 많이 해왔지?”

“너나 걱정해.”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옷을 갈아입고 포지션을 잡았다.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듯, 선명한 적개심이 각자의 목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시작한다?”

“어.”

‘라우더’의 초반부가 흘러나왔다.

쿵, 쿵, 쿵, 쿵.

고막을 때리는 명확하고도 경쾌한 베이스 드럼과 함께, 두 사람이 허리에 얹은 손을 천천히 위로 움직이며 교차했다.

이로써 ‘라우더’가 시작된다.

흔하지 않은 댄스 장르로 만들어진.

듀오인 두 사람의 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아이돌 중 누구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안무.

그렇기에 서로의 실력을 비교하기 가장 좋다.

김민주와 신아름은 서로를 향한 명백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라이벌로서의 역량을 파악할 기회는 없었다.

‘그 기회가 지금이다.’

판매량과 같은 숫자로 말해지는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노력과 재능이 쌓아 올린, 보여지는 영역.

즉, 지금부터 서로의 역량을 파악하는 기준은 외적인 요소를 전부 덜어낸 순수한 힘.

아이돌로서의 실력이다.

‘간다.’

마음을 쥐어짜는 듯한 긴장감.

보통 사람이라면 불안함에 혈관이 다 쪼그라들 만한 압박감이다. 허나 김민주는 그것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된다.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락.

‘승리를 향해.’

김민주의 팔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그와 대비되는 신아름의 발동작은 여름을 맞아 피어오르는 초목과 같이 산뜻했다.

최초의 합(合).

직후, 두 사람이 동시에 인정했다.

‘잘하네.’

하지만 이제부터다.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경쟁의식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3분의 곡 안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라이벌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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