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소녀연맹의 정규 1집 CD가 도착했다.
투명한 앨범 케이스에 담겨온, 말 그대로 CD 한 장일 뿐이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가뿐히 들 수 있을 만한 무게일 텐데, 성필은 아령이라도 쥐고 있는 듯 손이 떨려왔다.
“틉니다.”
성필이 플레이어에 CD를 삽입했다.
플레이어가 CD를 읽는 투박한 소리가 작업실을 천천히 물들였다.
가로 엔터의 사장과 임원진, 민경섭과 정지음은 클래식 감상회에라도 온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트랙 1번이 재생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약 1시간에 걸쳐 트랙 15번에 도달할 때까지,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재생이 끝났다.
성필은 CD를 다시 꺼내어 케이스 안에 소중히 담았다.
“이제.”
운명이란 게 있는 것인지, 소녀연맹의 데뷔 1주년에 맞춰서 샘플 CD가 완성됐다.
멤버들도 같이 들었으면 좋으련만, 그녀들은 현재 숙소에서 1주년 기념 라이브 방송 중이었다.
시청자들 앞에서 직접 요리를 하며 프리 토크를 하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진행되는 방송이다.
아마 오늘까지의 고생을 이야기하며 팬들과 눈물을 나누고 있진 않을는지.
“시작입니다.”
하지만 가로 엔터는 1주년이란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약 한 달 뒤, 소녀연맹은 컴백합니다. 그때까지 다들 힘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프로듀서로서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홍규헌을 시작으로 무거운 박수가 작업실을 꽉 메웠다.
이번 정규 앨범에는 가로 엔터의 명운이 달렸다. 이 앨범에 쏟아부은 돈만 해도 수십억이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만한 자본이 컴백에 투자되었다.
“갑시다.”
소녀연맹 데뷔 D+365.
컴백까지 약 한 달.
* * *
김채현은 곧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란 사실에 적잖은 부담감을 느꼈다.
하지만 반대로 매일이 행복했다.
소녀연맹의 데뷔 1주년 이벤트인 ‘소결기회’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소녀연맹 결성 기념 회합.’
1주년이 되기까지의 1주일간, 소녀연맹은 여러 가지 콘텐츠를 팬들에게 제공했다.
유머러스한 컨셉의 포토 컬렉션.
멤버들의 ‘아니’와 ‘롱 포’ 파트 변경 퍼포먼스.
팬들이 투표로 꼽은 가장 듣고 싶은 커버곡 부르기.
업데이트되지 않아서 섭섭했던, 멤버들의 아이튜브 컨텐츠 시리즈도 줄줄이 업로드됐다.
‘요리왕 장하양 이제 안 나오는 줄 알았는데!’
김채현은 인도식 커리에 도전하는 장하양의 모습을 싱글벙글 감상했다.
분명 즐거워야 할 텐데, 장하양을 바라보는 김채현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멤버들이 ‘소결기회’ 컨텐츠로 기획했던 파트 바꿔 부르기. 그곳에서, 장하양은 하필 ‘아니’의 백설하와 파트를 바꾸게 되어 보컬 실력의 미숙함을 드러냈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했었지.’
그 사과를 들은 김채현은 속상했다.
장하양도 라이브 방송에서 그것을 은근히 신경 쓰는 발언을 몇 번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식 커리를 만들며 즐거워하는 장하양을 보니, 김채현의 속상함도 조금은 가셨다.
‘계속 소결기회 기간이었으면 좋겠어. 매일 컨텐츠를 이렇게나 많이 올려주고…….’
하지만 그것도 내일로 끝이다.
오늘 자정이 지나면 소녀연맹의 데뷔 1주년이 되고, 라이브 방송을 마지막으로 소결기회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김채현은 기대 반 아쉬움 반인 심정으로 자정을 기다렸다.
자정이 되자 SNS 알람이 왔다. 소녀연맹 공식 계정에 무언가가 올라온 것이다.
‘……사진?’
기대와는 다르게 소녀연맹이 준 것은 사진 하나였다.
데뷔 1주년이 되는 날, 고작 사진 하나…….
1주년을 장식하는 마지막 컨텐츠치고는 정성이 없어 보였다.
김채현은 아쉬움을 삼키고 그것이나마 즐기려고 했다.
“아.”
하지만 그 사진을 보자마자, 어째서 이것이 데뷔 1주년에 딱 맞춰 올라왔는지 알 수 있었다.
“가족사진…….”
멤버들은 일상복을 입은 채 사진을 찍었다.
언니 라인은 앞 열의 의자에 앉아 있고, 동생 라인은 그런 언니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서 있다.
정면을 향해 환히 미소 짓는 표정은 진짜 가족과 있는 듯한 따사로움이 느껴졌다.
김채현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훌쩍이고 있었다.
“1년…….”
정말로, 소녀연맹이 데뷔한 지 1년이 됐구나.
1년이나 버텼구나.
“고마워 얘들아.”
이렇게나 멋진 모습을 계속 보여주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줘서.’
김채현은 팬미팅을 떠올렸다.
그녀는 장하양과 손을 잡과 대화를 나누었었다. ‘응원할게요’라는 말에, 장하양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저도 노력할게요. 같이 올라가요.’
장하양의 말마따나, 소녀연맹은 이토록 높이 올라와 주었다.
이번 1년은 팬과 함께 나아간 나날이었다.
* * *
팀과의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유용태는 입사 동기와 함께 산책 겸 회사 근처를 걸었다.
“너 ‘스타의 곁에는’ 봤냐? 거기 손혜빈 나오던데. 너 손혜빈 알지?”
당연히 안다.
유용태가 학생일 때도 유명했으니까.
중학교 수학여행 때 여자애들이 장기자랑 시간에 손혜빈의 곡을 추곤 했었다.
유용태의 세대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알지, 당연히.”
하지만 유용태는 다른 이유로 손혜빈을 잘 알았다.
손혜빈이 가로 엔터의 임원이기 때문이다.
멤버들의 라이브 방송 때도 간간이 이름이 들려오곤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했더니 뭔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더라. 돈이 없나?”
“취미로 하는 거겠지.”
“일을 취미로 해?”
“손혜빈 인기 많았잖아. 돈은 많을걸.”
“부럽다…….”
‘스타의 곁에는’은 스타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자연스럽게 스타를 보조하는 매니저와 같은 인물도 조연급의 대우를 받곤 한다.
“아니, 그래서 너 그거 봤냐고.”
“봤어.”
“웃기지 않냐? 나 그거 보면서 계속 터졌어.”
웃기긴 했다.
가로 엔터의 이사급인 성필이란 사람을, 과거의 매니저였단 이유로 1일 매니저로 부렸었다.
손혜빈의 수발을 드는 성필을 본 소녀연맹 멤버들이 충격을 받는 게 방송의 묘미였다.
“근데 확실히 연예인은 활동 안 하고도 다 돈이 많나 봐.”
방송 후반부, 손혜빈은 과거 연예계 활동을 했을 때의 친구를 불러 모았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홈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이름은 홈파티인데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손혜빈의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성필의 모습이 재밌었다.
‘언제 이렇게 컸냐’, ‘네가 진짜 성필이냐’, ‘이사라고? 네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성필은 묵묵히 고기를 씹었었다.
“손혜빈 집도 그렇고, 거기 사람들 입고 나오는 옷도 다 비싼 거던데.”
“그런가?”
“아, 그리고 거기 소녀연맹인가? 거기에 진짜 예쁜 애 있던데. 무슨 난 배우인 줄 알았어.”
“하양이?”
“어? 아니, 일본인. 그러고 보니 다 예쁘긴 했지.”
“아, 리카구나.”
“……너 걔들 이름을 다 알아?”
동기가 수상하단 눈빛을 띠었다.
보통 20대 후반의 남자가 아이돌 멤버의 이름을 다 꿰고 있으면 이런 취급을 받는다.
소녀연맹은 유명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한 세대를 풍미했던 아이돌 그룹이라도, 일반인이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 아니, 그, 그럼 너 그건 봤냐?”
유용태는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음악을 위한 동행.”
“모르는데 그건.”
“너 락 좋아한다며.”
“아, 글치. 내가 또 대학 때 밴드 좀 했었거든. 축제 때마다 내가…….”
“거기 신홍인 나와.”
“신홍인이? 티비에? 진짜?”
“어. 재밌으니까 봐. 거기 유명한 가수 많이 나오거든.”
유용태는 ‘음악을 위한 동행’의 설명을 이어갔다. 그곳에 나오는 뮤지션을 알리려는 의도보다, 백설하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유용태는 새삼스레 감동이 몰려왔다.
‘이런 아이돌에 관심 없는 애도 소녀연맹이란 이름은 알게 됐구나.’
곧 있으면 소녀연맹의 컴백이다.
그에 따라 가로 엔터도 꽤 손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나 이름이 퍼질 정도면 말이다.
“……해서, 설하가 진짜 노래를 잘하거든. 소녀연맹 ‘롱 포’ 한 번 들어봐. 그게 밴드 사운드라 네 귀에도 맞을걸?”
“너 아이돌 빠냐?”
“…….”
“새끼.”
동기가 장난스레 유용태의 옆구리를 쳤다.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아이돌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아까부터 숨기려고 안달이네.”
“어?”
“그래, 들어볼게. 뭐 앨범도 하나 사줄까?”
“어 어어! 어어어어!”
“…….”
결국, 유용태의 동기는 그날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을 사전 예약 구매하게 됐다.
영업 성공!
* * *
김채현을 소녀연맹 덕질로 끌어들인 친구, 이선주는 묘한 죄책감을 안고 거리로 나왔다.
화장품이 떨어져서 ‘에이지영’에 간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얼마 전에 이벤트를 해서 입간판이랑 포스터가 있다지.’
화장품도 사는 김에 케이어스의 포스터와 입간판도 보고 싶었다.
옛날에 김채현에게 고백했던 대로, 이선주는 잡덕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이거다!’
에이징영 매장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섹션 전부가 케이어스로 도배된 것을 발견했다.
케이어스 멤버들이 립스틱이나 크림 등의 화장품 모델로 나와 있는 사진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김채현은 화장품보다 케이어스에 관심이 더 많았다.
‘진짜 예쁘다.’
‘우리 애들’이 광고한 거니까 하나씩 샀다.
이선주는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매장을 나왔다. 그러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또 케이어스랑 소녀연맹이 비슷한 시기에 컴백하게 됐네.’
덕분에 케이어스와 소녀연맹 앨범을 각각 세 장씩 사전 구매했다.
안타까운 건, 소녀연맹은 이번 앨범을 다섯 개 버전으로 발매했단 것이다. 이선주는 돈이 부족하여 다섯 개를 전부 사지 못했다.
‘이번에는 소련이들도 상 받을 수 있을까?’
하필 또 케이어스랑 컴백 기간이 겹치다니.
왜 항상 이렇게 강력한 적을 만나버리는 걸까.
‘아니! 무슨 적이야! 소련이들이랑 케이어스는 다 친구 사이잖아! 나도 둘 다 좋아하고. 적이 아니야.’
내적 갈등을 이어가던 이선주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은 어느 커다란 건물의 벽면으로 향해 있었다.
항상 보긴 했어도 들어가 본 적은 없던 의류매장. 어바이비의 건물이다.
“뭐…….”
목이 뻐근해질 만큼 고개를 위로 들어야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어바이비의 건물.
그 벽면 전체에 사진이 걸려 있다.
어바이비의 옷을 입은 소녀연맹의 사진이다.
“리카, 설하, 아라, 하양이, 아름이…….”
각 멤버가 모델인 사진이 세로로 긴 형태로, 마치 이탈리아나 프랑스 국기 무늬로 교차하여 걸려 있었다.
그 크기부터 사람을 압도하게 된다.
꽤 많은 사람이 소녀연맹의 사진을 보느라 멈춰 서 있기도 했다.
“저 모델 배우인가?”
“너 쟤 이름 알아?”
“사진 찍자.”
“너 소녀연맹 몰라?”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이선주의 귀를 메웠다.
그녀는 홀린 듯 커다란 사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사전 예약해두었던 케이어스의 앨범 두 장을 취소했다.
대신 소녀연맹의 나머지 두 버전 앨범을 구매했다.
이선주는 핸드폰으로 벽면을 메운 소녀연맹의 광고를 찍었다.
“예쁘다…….”
다들 너무 예쁘다.
이선주는 연습생 때부터 응원해왔던 소녀연맹을 놓을 수 없었다.
작년에는 고배를 마셨으니, 올해에는 시상식 무대만이라도 올라갈 수 있기를…….
* * *
“정말이네.”
이시카와 유우토는 앨범 판매 사이트에 접속하여,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이 판매 중인 것을 확인했다.
‘정말 여기서도 팔잖아?’
처음에는 리카가 거짓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녀연맹의 앨범을 일본에서도 팔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검색해보니 사실이었다.
심지어 아직 사전 예약 기간 중인데도, 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별점 5개 리뷰를 달아놓았다.
[기대했습니다!]
[제발 리카 포토 카드 나오게 해주세요. 제발 리카 포토 카드 나오게 해주세요. 제발 리카 포토 카드 나오게 해주세요. 제발 리카 포토 카드 나오게 해주세요.]
[아라쨩 멋져 아라쨩 너무 잘생겼어 아라쨩 사랑해 아라쨩 영원히 함께야 아라쨩 위험해 아라쨩 너무 미남이야 아라쨩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이상한 사람이 많다.
애초에 이 사람들은 ‘상품 구매 리뷰’라는 말을 모르나? 아직 앨범을 받지도 못했을 텐데 리뷰를 작성하다니…….
바른 생활 사나이인 유우토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래도.”
유우토는 앨범을 사전 구매한 뒤 리뷰를 적었다.
‘이번만이야, 누나.’
[이건 신이 만든 앨범입니다. 소녀연맹 귀여워(카와이)~]
* * *
로자는 헐레벌떡 플레하노브의 카페로 쳐들어왔다.
카페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로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플레하노브 씨!”
“플레하노브는 재료를 사러 잠시 나갔습니다.”
플레하노브 대신, 자칭 러시아 인터내셔널의 선전관이 로자를 맞아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딱히 있는 건 아닌데요. 아니, 큰일이 있죠! 선전관님은 이거 보셨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큰 앨범 판매 사이트.
그곳에 소녀연맹의 앨범이 올라와 있다.
“예, 봤습니다.”
“이, 이거, 이거, 소녀연맹 앨범 가격이 엄청 싸요!”
“네, 싸군요.”
이전에 개인업자들이 유통했던 앨범보다 2, 3배는 싸다.
“이 가격이면 저도 다섯 버전 전부 살 수 있겠어요!”
“앨범이 정식으로 유통된 모양이더군요.”
“선전관님이 쓴 글을 소녀연맹이 본 게 아닐까요?”
선전관은 매주 소녀연맹 멤버들의 SNS에 앨범을 정식 발매해달라는 글을 쓰곤 했다.
어째선지 댓글이 가끔 삭제되곤 했으나, 선전관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꾸준히 앨범 정식 발매를 요청해왔다.
“그런 거라면 기쁘겠습니다.”
“근데 뭐하고 계세요?”
로자는 선전관의 뒤에 섰다.
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로자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가득했으나, 그게 무슨 문자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한글?”
“네. 이번에 소녀연맹 팬클럽 2기를 모집할 거 같아서, 미리 양식을 검토 중이었습니다.”
“선전관님은 이미 가입하셨잖아요.”
“이건 플레하노브의 것입니다.”
소녀연맹의 팬카페.
로자도 가입하면 좋겠단 생각은 했다. 하지만 한글을 못 읽는 그녀는 가입해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어를 할 줄 안다면, 소녀연맹 멤버들이 손 편지까지 올려주는 곳이니 덕질이 더 행복해지겠지만 말이다.
“이번엔 로자 씨도 도전해보십시오.”
“저는 괜찮아요.”
팬카페는 소녀연맹이 SNS에 올리지 못하는 내밀한 속마음도 올라오는 장소다.
진정으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는 팬들에게 감정과 감동을 공유하는 곳이기에, 로자는 허수로 팬카페 인원수를 채우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한국어를 배운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팬클럽 2기부터는 키트도 준다던데 말입니다.”
“……키트요?”
“예. 팬카페 기수 가입자에게만 주는 굿즈 같은 것입니다. 1기 때는 주지 않았지만, 이번엔 1기와 2기 합쳐서 키트를 배포할 것이라 하더군요.”
“뭐, 뭘 주는데요?”
“그건 모릅니다만, 쉽게 구하지 못할…….”
“저도 양식 다시 봐주세요!”
선전관은 미소를 지으며, 옛날에 써주었던 로자의 가입 양식을 다시금 검토해주었다.
팬클럽 키트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앨범을 구매하고, 소녀연맹을 깊이 파지 못했으면 우수수 틀릴 수십 개의 문제를 풀고, 그룹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여 팬카페 정회원이 되지 못하면 얻을 수 없는 보물이다.
‘2기수부터는 팬클럽 회장도 없어진다지.’
팬 매니저를 따로 둘 수 없던 가로 엔터는 카페를 관리해줄 자를 팬 중에서 모집했었으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팬 관리에 돌입할 모양이다.
정규 앨범과 함께, 소녀연맹은 많은 것이 바뀔 게 틀림없었다.
‘정규 앨범이란 상징성. 거기에다가 팬클럽 2기 가입을 위해서라도 이제까지 앨범을 사지 않았던 이들도 사게 될 거다.’
또한 앨범이 정식 유통되어, 바다를 건너와 폭등한 가격에 눈물만 곱씹던 해외 팬들도 앨범을 구매할 것이다.
‘이번 성적은 어느 정도일지.’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소녀연맹이 한국 음방 1위를 하진 않을까.
선전관은 소녀연맹의 비상을 기대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예, 잘 쓰셨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옮겨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뭐요?”
“이번 소녀연맹 앨범에는 팬미팅 참여권도 들어 있습니다.”
“에이, 그거 있어도 저는 못 가잖아요. 한국인데 어떻게 가요.”
“‘응모권’이 아니라 ‘참여권’입니다. 참여권 한 장당 팬미팅 때 메시지를 하나씩 보낼 수 있는 모양입니다.”
“네……?”
“인터넷으로 팬미팅을 진행하는 데 사용 언어는 영어로…….”
로자는 당장 앨범을 추가로 구매했다.
이번 달은 풀만 씹으면서 살 생각이었다.
* * *
“음…….”
유용태는 소녀연맹의 공식 SNS 계정에 올라온 이벤트 글을 읽고 고민에 빠졌다.
‘음원이 나오고 시각마다 인증 릴레이를 하면 친필 사인 CD를 준다는 거지?’
스트리밍을 가장 많이 한 상위권 사람들에게 주니, 아마 유용태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직장인인 유용태는 핸드폰을 쓸 일이 많기에 계속해서 음원을 스트리밍해둘 수 없다.
하더라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시각마다 인증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친필 사인은 가지고 싶은데…….’
유용태는 다리를 덜덜 떨다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중고 핸드폰 판매 사이트에 접속하여 공기계를 하나 구매했다.
‘이걸로 스트리밍 돌리고 인증도 하는 거야.’
항상 소녀연맹 마이너 갤러리에서 총공(시간에 맞춰서 다수가 스트리밍을 동시에 돌리는 것) 인증글을 보고 대단하단 생각을 했었다.
총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음원 어플로 소녀연맹의 곡을 돌렸으니까.
유용태는 그만한 정성은 없었다.
‘이번에는 해보자.’
소녀연맹의 첫 정규 앨범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또 케이어스와 싸우게 된다.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롱 포’는 워터 멜론 24시간 차트에서 10위권 내에 든 적도 있다.
그 기세를 이어간다면, 이번에 케이어스를 이기는 것도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용태는 적진으로 나아가는 정찰병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워터 멜론 차트를 확인했다. 소녀연맹의 적수가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것이었다.
[7위: 케이어스 - Chaos]
“…….”
케이어스 팬덤은 일상생활을 안 하나?
어떻게 발매한 지 1년이 넘은 곡을 10위권 내에 박아두고 있냐…….
유용태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소녀연맹의 앨범을 하나 더 구매했다.
작년처럼, 소녀연맹이 시상식에서 박수 기계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 * *
아침의 임원 회의.
회의실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다음 주입니다.”
다음 주, 소녀연맹이 컴백한다.
그런 상황이니, 이제 가로 엔터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아침 회의도 가만히 의자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게 업무의 전부였다.
“…….”
성필, 홍규헌, 한구인, 손혜빈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구인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저기, 앨범 판매량 확인해보면 안…….”
“안 돼요!”
성필이 단호하게 답했다.
“컴백한 날에 확인해요.”
“……알겠습니다.”
가로 엔터는 현재도 앨범이 몇 장까지 팔렸는지 알 수 있었다.
장장 한 달에 가까운 앨범 사전 구매 기간이 있었다. 살 사람은 다 샀다고 봐야 한다.
“아니 왜 그래야 하는데?!”
손혜빈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냥 봐도 되잖아! 밖에 사람들은 다 아는데 왜 우리만 몰라야 하냐고!”
앨범 판매 사이트에는 ‘구매 지수’라는 게 뜬다. 구매 지수는 몇 명이나 앨범을 구매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다.
그 말은 곧, 가로 엔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앨범의 판매량을 알고 있단 것이다.
“누나.”
“뭐!”
“기쁨은 참으면 두 배, 세 배가 돼.”
“지금 봐도 기쁘거든?!”
“그럼 누나가 봐.”
“……응?”
“누나가 보고, 우리한테 말해줘.”
“…….”
손혜빈이 기세를 가라앉혔다.
정규 앨범에는 가로 엔터의 명운을 걸었다고, 자주 그리 말하고 다니긴 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니 명운을 건 앨범의 판매량을 홀로 확인하는 건 무서웠다.
“다음 주까지만 참자. 박 이사 말대로, 참으면 기분이 더 좋아지니까.”
성필과 한구인이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둘 다 왜 그래. 내가 이상한 말 했어?”
“아니요.”
“아닙니다.”
아무튼, 다음 주까지는 정규 앨범이 몇 장이나 팔렸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가로 엔터 직원들에게도 말해두었지만, 참지 못하고 확인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사람이 정보를 회사 내부에 누설하기라도 하면, 임원들에게서 목숨을 보전할 수 없으리라.
“저희는 아직 더 나아갈 수 있어요. 프로모션이 덜 끝났으니까요.”
‘음악을 위한 동행’ 프랑스 편 하이라이트인 출연진 버스킹이 오늘 방영된다.
백설하의 노래 솜씨를 듣고 앨범을 구매하는 사람이 더 나올지도 모른다.
“컴백 후에 나갈 방송도 잡혔고요.”
소녀연맹은 두 개 음악 방송에서 무대를 두 파트 얻어냈다.
하나는 구상준 PD의 뮤직 스테이지. 또 다른 하나는 박재환 PD의 음악세상이다.
그리고 박재환이 또 힘을 써줬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방송국으로부터 소녀연맹 단체 출연 예능이 잡혔다.
“거기에 하양이의 연말 특별 무대. 여기까지가 프로모션의 끝이에요. 다음은 사후 프로모션과 팬 이벤트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앨범 판매량이 다 잡혔다고 할 수는 없어요. 기다립시다. 다음 주까지. 홍보가 완성될 때까지요.”
모든 광고가 끝나고서야,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이 다 잡혔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기다린다.
계속 기다린 뒤에, 컴백 날에 잡힌 판매량을 보고 축포를 터뜨리고 싶었다.
터뜨리는 게 축포일지 울음일지는 모르겠으나, 다들 기다리는 데는 동의했다.
“……그럼 뭐어.”
홍규헌이 말을 꺼냈다.
“회의는 이대로 끝?”
“…….”
“오케이, 끝.”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형!”
업무가 있어 방송국으로 갔던 민경섭이 회의실 문을 부서질 듯이 열어젖혔다.
그는 어찌나 급히 왔는지 숨이 거칠었고, 이마와 턱으로는 땀이 줄줄 흘렀다.
“경섭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급하면 전화를 하면 될 것을.
“제, 제가, 제가…….”
“천천히 말해.”
“후우, 후욱, 흡! 무대, 잡았어요! 제가! 연말 특별 무대에요!”
“뭐?!”
대체 어떻게?
연말 특별 무대라는 건 미리 출연자가 정해지는 건데, 민경섭이 무슨 수로 또 무대를 잡는다는 건가?
“언제인데?”
“사흘 뒤요!”
“너 돌았냐?!”
단단히 미쳐버린 게 확실했다.
“그게, 그게요!”
민경섭의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어스 민주랑 듀오 댄스를 하기로 했던 아이돌분이 갑자기 다쳐?”
“네. 음방 무대 리허설하다가, 무대 판이 빠져서 발목을 삐었대요. 자기네 그룹 음방에는 의자에 앉아서 보컬만 하는 걸로 나가도, 특별 무대 듀오 댄스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잡아 왔죠! 무대는 내일이고요!”
“그걸 갑자기 우리 애들이 어떻게 하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일이라 저도 모르게 화를 냈던 성필은, 순간적으로 멤버 하나가 떠올랐다.
“아름이.”
그렇다.
신아름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