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일본 의류 브랜드 ‘어바이비’는 저가형 의류부터 시작하여, 현재는 프리미엄 라인까지 출시한 굴지의 기업이다.
어바이비의 창립자인 남매는 누나의 사업 감각과 남동생의 디자인 감각만으로 동네 구멍가게로부터 전 일본을 강타한 브랜드가 된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로 나아간다!”
어바이비는 아시아 각지로 진출하여 직접 매장을 세우고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본이란 이름값이 먹히는 동남아에서 성공을 거둔 뒤, 다음으로 만만한 타깃인 중국에서마저 자리를 잡았다.
“다음은 한국이다!”
그 슬로건 아래 한국에도 매장을 내게 됐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의류 산업이 발달한 한국에마저 터를 잡는다면, 앞으로 어바이비의 미래에는 빛만이 있으리라.
그것을 위해 하시모토란 매니저가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시모토는 한국인 직원들을 불러 모아 일장 연설을 펼쳤다.
“저희의 목표는 어바이비란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겁니다.”
수많은 패션 기업이 격돌하는 일본의 하라주쿠.
그곳의 어바이비 매장에서 수년간 매출 신기록 신화를 세운 하시모토는, 후일 어바이비의 임원 자리가 내정되어 있다시피 한 인물이었다.
“반드시 성공합시다.”
그런 그가 한국 어바이비 매장의 총괄 매니저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하시모토의 매장에 주목했다.
서울의 번화가에 5층의 매장을 새롭게 세우고, 인테리어와 매장 디렉팅마저 하시모토가 직접 감독했다.
어바이비의 성공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들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적자겠지? 이번에도.”
“예.”
하시모토는 이마를 짚었다.
계속 그 행동을 반복하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부서지라 때리기 시작했다.
“3년 연속 적자. 적자. 장부에는 붉은빛밖에…….”
이대로면 한국에서의 사업을 철수해야 한다.
그리고 하시모토는 어바이비의 임원직을 잃어버리게 되겠지…….
‘난 수백억을 까먹은 쓰레기로 취급받고, 변방으로 추방당하게 될 거다.’
어째서? 대체 뭐가 문제지?
라고 하기엔, 계속해서 한국인 관리자들이 지적해온 부분들이 있었다.
“정말로 매장 디자인 때문인가? 오직 그거?”
“오직 그것뿐만은 아니겠지만, 이상한 디자인이긴 합니다.”
“한국 빼곤 다 먹혔다고!”
어바이비의 전략은 이러했다.
일단 3층 이상의 건물을 세운다. 그리고 층별로 가격 라인을 구별해두는 것이다.
1층에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초저가 라인을 배치하고, 2층에는 중저가, 3층부터 고가 라인을 둔다.
고객들은 자신의 지갑 사정에 맞춰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는 게 어바이비의 전략이었지만.
“우리 매장이 어떤 구조인지 홍보가 덜 됐나?”
“대부분 알 겁니다.”
“한국인들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서열화하는 거. 쇼핑도 편할 텐데.”
“구조를 아니까, 1층에서 쇼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겠죠.”
“뭔…….”
“1층 유리벽에 커튼이라도 칠까요?”
“의류 매장이 폐쇄적이면 어쩌자는 거냐!”
한국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매장 디자인이라, 고객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강점이었건만.
“그럼 다른 이유는…… 광고를 잘못했나?”
어바이비 매장 밖 벽면에는, 일본에서 발탁된 모델이 브랜드의 옷을 입은 거대 광고판이 있다.
모델은 일본인만이 아니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모델들을 기용했다.
“한국인들 서양인 좋아하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의 모델이 서양인인 건 그다지 감흥이 없을 거 같습니다.”
“오카시이(이상해)…….”
“한국 연예인을 기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배우라던가.”
하시모토도 광고에 쓸 배우 풀을 검토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는 몸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얼굴값을 하는군.”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이젠 그만한 배우를 쓸 돈도, 미디어 광고를 할 돈도 없다. 본사에 그딴 요청을 보냈다간 바로 돌아오란 소리나 듣겠지.”
하시모토는 통유리 벽면으로 다가갔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한데, 어바이비로 들어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국인들은…… 잘 모르겠군.”
솔직히, 하시모토는 분했다.
일본은 아시아 패션의 중심이다.
1970년대 일본에서 개념적 디자인이란 조류가 창조된 이후에서야, 아시아는 서양으로부터 패션 산업의 주도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의 패션이, 어바이비가, 한국에선 도저히 통하지 않는다.
“도시테(어째서)…….”
“그냥 매니저님이 매장 관리를 잘못하신…….”
“다마레(닥쳐라)!”
직원은 손을 등 뒤로 돌린 채 중지를 펼쳤다.
“이제 어떡하시겠습니까. 뭔가 수가 있습니까?”
“있다.”
“이제부터라도 매장 구조를 바꾸는 겁니까?”
“아니. 본사에서 부를 때까지, 나는 한국 관광이나 다니겠다.”
“네?”
“사라바다(작별이다), 키무 쿤. 난 부산으로 가서 해수욕이나 즐기겠다.”
“겨울에요?”
“날 찾는 전화가 있으면 영업을 나갔다고 전해라.”
“아니, 그럼 저는 어떡…….”
“앞으로 못되는 건 내 탓이고, 잘되는 건 키무 쿤의 덕이다. 잘해보도록.”
하시모토는 매니저실을 나갔다.
김상명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 혼자서 어쩌라고? 네 허가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얼이 나가서 가만히 있던 게 몇 분 정도다.
잠시 후, 하시모토가 다시 들어왔다.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더군. 그냥 남은 예산을 잘 관리해서 홍보에 힘 써보는 게 어떨까.”
“탁월하신 판단입니다. 마침 프로모션 담당자에게서 점심 즈음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무슨 일로?”
“어느 아이돌이 협찬을 요청했습니다.”
“고작 아이돌이 어바이비를 협찬받겠다고? 배우도 아니고?! 설령 어울리더라도 중저가형이나 줘버렷!”
직원은 다시 허리 뒤로 손을 돌리고 중지를 펼쳤다.
‘배우들은 우리 옷 협찬받지도 않는다고 이 인간아.’
* * *
서울 어바이비 매장으로 들어가는 강지혜의 걸음이 떨려왔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건만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다.
모든 회사의 홍보팀 직원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도 가혹한 신고식이다. 누가 이 압박감을 버티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냥 까이면 어떡하지?’
그때 손혜빈이 강지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혜 씨 너무 긴장하지 마요. 까이면 걍 다른 데 알아보면 되죠. 생수 회사라던가.”
“생수 좋죠? 생수 회사 괜찮죠?! 저도 진짜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박 이사님이……!”
“비꼰 건데요?”
“…….”
두 사람은 가장 위층의 매장 매니저실로 들어왔다.
가로 엔터의 사장실보다 더욱 크다.
매니저가 쓰는 듯한 고급 원목 탁자 뒤엔 통유리 벽이 보였다. 그 유리 너머로는 서울의 거리 풍경이 환하게 비쳐 들어왔다.
‘이런 공간을 지을 거면 창고나 만들지.’
아, 이러면 안 된다!
이곳은 거래처가 아닌가!
“어서 오세요. 김상명입니다.”
“반갑습니다.”
강지혜가 김상명의 악수를 받았다. 손혜빈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강지혜였다. 웬만해선 모든 협상을 그녀가 이끌어가야만 한다.
어디까지나 이건 교육이니까.
설령 소녀연맹의 커다란 이익이 걸려있다 해도, 손혜빈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분이 매니저인 하시모토 님입니다.”
“가로 엔터 홍보팀 강지혜입니다!”
하시모토는 밝은 미소와 함께 그녀들을 응접용 소파로 안내했다.
‘진짜 일본인이 매니저구나.’
자리에 앉으니 김상명이 차를 내왔다.
“저, 저희가.”
꼴깍.
강지혜는 긴장감에 말을 더듬어버렸다.
“저희가 제안드릴 건…….”
그녀는 홍보 계획을 줄줄 읊었다.
먼저, 양상헌의 도움을 받아서 기획한 소녀연맹의 홍보 콘텐츠가 있다.
소녀연맹은 어바이비 매장의 1층부터 4층 라인을 순서대로 올라가며 코디를 하나씩 완성한다.
멤버별로 총 4가지의 코디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어바이비 의류의 홍보가 될 겁니다.”
멤버들이 직접 옷을 코디하는 콘텐츠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물론 팬들에게 그렇단 뜻이었다.
“홍보와 재미 둘 다 잡겠습니다.”
두 번째로, 소녀연맹 멤버들은 어바이비 의류만으로도 무대 의상을 한 세트 코디할 것이다.
“음악 방송 무대에서 직접 어바이비의 의류를 보이겠습니다. 스타일에 따라 수선을 해야 하겠지만, 홍보가 될 겁니다.”
아이돌이 무대에서 입은 기성복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아예 아이돌이 입은 옷만을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이 있을 정도다.
아이돌이란, 이름 그대로 젊은이의 우상이란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연예인 중 가장 신세대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
“시청률 1%, 언뜻 적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 2, 30만 명은 어바이비의 옷을 보게 되는 거죠.”
세 번째, 멤버들은 일상에서도 어바이비의 제품을 착용한다.
“소녀연맹은 SNS에 사진과 영상을 자주 올립니다. 다른 아이돌보다 훨씬 상품 노출도가 큽니다. 항상은 아니어도, 음방 출근길 같은 곳에선 어바이비의 제품을 착용할 겁니다.”
이상이 소녀연맹이 제안할 홍보 방법이다.
그것을 다 들은 하시모토는 처음과 똑같은 미소를 내걸고 있었다.
내심 비웃으면서.
‘무슨 엠베서더가 받을 법한 협찬을 바라는군.’
브랜드 엠베서더.
어느 브랜드가 자신들의 이미지에 알맞은 세계 각지의 연예인을 선정하여 무제한 협찬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연예인의 급에 따라 전용 차량을 제공하거나, 신상 컬렉션을 모두 공짜로 주기도 하며, 혹은 브랜드 시즌 쇼에 초청한다.
‘자기들이 뭐 대단한 걸 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어. 소녀연맹? 작은 아이돌이 우리의 옷을 입어도 얼마나 홍보가 될까. 또 우리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될까.’
소녀연맹은 당장 매장 벽면에 걸린 모델과 비교해도 뒤떨어질 게 분명하다.
하시모토는 그리 생각했다.
‘모델이란 옷을 입기 위한 존재다. 아이돌이 그보다 나을 리 없어.’
그나마 작은 아이돌답게 한 줌뿐인 팬들이 어바이비에 관심을 가질 정도겠지.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뿐이었지만, 하시모토는 긍정적인 기색을 보였다.
“그렇군요. 확실히 홍보가 되겠습니다.”
“그, 그렇죠?”
강지혜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일단 소녀연맹의 컴백 기간에 맞춰 컬래버레이션 이벤트를 매장에서 열었으면 합니다. 포스터나, 입간판이나, 그런 걸 세워두고 상품을 구매하면 소녀연맹 굿즈를 제공하는 거예요.”
“아…… 굿즈.”
무슨 시장판도 아니고.
하시모토는 계속하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장 벽면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소녀연맹 컴백에 맞춰서 광고를 걸어주셨으면 합니다.”
“아…….”
모델 사진을 치우고 소녀연맹을?
정말 가지가지 한다.
‘우리가 돈을 받아야 할 지경인데?’
어바이비 매장이 있는 곳은 서울의 번화가다.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매장의 벽을 보고 지나칠 것이다. 그 홍보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수준이다.
‘그런데 고작 옷 몇 번 입어주는 걸로 이런 제안을 해? 괘씸한…….’
하시모토는 벌써 거부할 마음을 굳혔다.
소녀연맹. 그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룹이다. 애초에 한국 아이돌에 관심이 없긴 하지만.
그나마 하시모토가 이름을 아는 아이돌은 3세대 탑티어 아이돌이나 케이어스가 전부였다.
“저희가 결정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준비해온 게 있는데요.”
강지혜는 지금껏 지니고 있던, 지관통 치고도 기다란 지관통의 뚜껑을 열었다.
너무 길어서 안에 든 것을 손혜빈과 함께 꺼내야 할 지경이었다.
‘또 뭐야 저건.’
시간만 낭비한 것 같은데, 빨리 가주지 않으려나.
하시모토는 ‘또 뭘 하나 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저희 애들이 어바이비 옷을 입고 찍은 프로필이에요. 그걸 브로마이드로 뽑아온 건데요. 아, 일단 이거…….”
강지혜가 손혜빈과 힘을 합쳐, 세로 길이만 1m가 넘는 장하양의 브로마이드를 펼쳤다.
“소녀연맹 멤버인 하양이가 1층의 저가형 라인으로 코디한…….”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하시모토의 입에서 일본어가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강지혜가 깜짝 놀라 손이 굳었다.
“손나(그런), 콘나(이런)…….”
하시모토는 덜덜 떨면서 브로마이드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장하양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장하양은 어바이비가 겨울을 노리고 출시한 터틀넥 스웨터와 진청색 보온 바지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그저 나무 스툴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가 하시모토를 삼켜버렸다.
눈빛으로 전해지는 기세는 메두사와 같았다.
‘이런 사람이 아이돌?’
하시모토는 수많은 모델을 보아왔다.
수많은 아이돌을 보아왔다.
수많은 유명 인사를,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보았다. 그런데도 이만한 충격을 받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시모토는 메두사를 본 인간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우라가 흘러넘친다.’
어바이비 한국 매장 총괄, 하시모토.
그는 노름으로 이 위치에 오른 게 아니었다.
그런 하시모토가 판단하기에, 장하양이 옷을 입고 소화하는 능력은 여타 아이돌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분은 알고 있는 거다. 자신이 어떡해야 가장 빛나는지! 그렇기에 아는 거다. 옷 또한 어떻게 가장 돋보이게 만들지!’
사진집만 분기마다 발매해도 1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는 일본의 탑급 아이돌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하시모토가 그리 판단했다.
“마, 마음에 드시, 는지?”
강지혜의 떨리는 물음을 들은 하시모토는.
“이분이, 어바이비를, 입어주시는 겁니까?”
“네, 네. 그렇죠. 저희의 제안을 받아주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시모토가 단언했다.
“단, 매장 벽에 걸릴 현수막은, 그 촬영은 제가 맡겠습니다.”
“매니저님이요? 직접?”
“예. 제가 스튜디오를 잡고 사진작가를 고용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일류급 작가를 불러올 생각이다.
“아, 네…… 그래 주시면 저희도 좋죠…….”
하시모토는 한동안 홀린 듯, 아니, 정말 홀려서 장하양의 브로마이드를 쓰다듬기만 했다.
강지혜는 브로마이드를 들고 있느라 팔이 아프고, 또 하시모토가 기분 나빴다.
‘대체 얼마나 쓰다듬는 거야……?’
계약이 성사된 건 기쁘지만,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다행히 계약 관련 대화를 나누고 1시간 뒤에 탈출할 수 있었다.
“지혜 씨,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야, 이거 사장님이 들으면 보너스 주실지도 모르겠는데? 연봉도 팍팍 올라가는 거 아니야?”
손혜빈의 말에 강지혜의 표정이 매장을 나왔을 때보다 더 밝게 변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금방 어두워졌다.
“팀장님, 실은요…….”
어바이비의 협찬을 노리자는 건 성필의 생각이었다.
이만한 공을 얻어먹고 입을 닦을 수는 없다.
“말하지 마요.”
그러나 손혜빈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미 아니까.”
“네, 네?”
“기획안에서 성필이 느낌이 나더라고요.”
공적인 문서라도, 양식에 맞춘 기획안이라도, 쓴 사람의 흔적이 남게 된다.
마침표나 쉼표를 쓰는 방법이라던가 어미와 사용하는 단어 등. 어떤 사람이 썼는지 특정하는 건 의외로 쉽다.
그게 성필이라면, 손혜빈은 수백 장의 서류 안에서도 그가 쓴 것을 가려낼 수 있다.
“그래도, 홍보 방법을 생각한 건 지혜 씨잖아요? 상헌 씨랑 협의해서 잘 정했어요. 매니저팀이랑 얘기 나눠서 촬영 스케줄 미리 얻어낸 것도 좋았고요.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이렇게 잘하면 앞으로는 어떡해? 막 우리 회사 버리고 가는 거 아니야?”
손혜빈이 웃으면서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자, 강지혜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그녀는 이윽고 상사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아, 감사합니다아…….”
“진짜 잘했어요.”
이로써, 소녀연맹의 컴백은 더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어바이비 매장에 걸릴 소녀연맹의 사진.
그것을 하루에 수십만 명, 일주일에 수백만 명이 보게 될 것이다.
“우리 꼭 성공해요.”
“네에…… 끅, 꼬, 꼭, 성공해요…….”
소녀연맹을 성공시킬 것이다.
그게 곧 강지혜의 성공이었다.
* * *
11월 중순, 슬슬 연말이 다가온다.
그 말은 즉 소녀연맹의 컴백도 가까워졌단 뜻이었다.
소녀연맹의 데뷔 1주년 이벤트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가로 엔터는 훨씬 더 바빠졌다.
매일 컴백 준비로 신경이 곤두세워진 나날이 이어지던 와중, 성필은 한 소식을 듣게 된다.
[진짜라니까.]
성필의 친구인 다른 기획사의 매니저, 유하음으로부터 온 정보였다.
[‘음악세상’ 12월 넷째 주 무대가 하나 비었대.]
“갑자기 왜? 그 시기에 음방 나오기도 힘들잖아. 굳이 뺄 이유가 있나?”
[굳이 뺀 게 아니라 빠진 거지. 나오기로 했던 그룹이 있는데 기획사가 도산했대.]
듣기만 했는데도 안타까움이 절로 흘러나온다.
조금만 더 버티지…….
[그래서 너한테 연락했거든. 음악세상 PD한테 쌰바쌰바 잘 해봐. 혹시 알아? 너네 무대 두 개 받을 수 있을지. 타이틀이랑 서브 타이틀.]
“수상하네. 그걸 왜 나한테 말해주지? 뭐 원하는 거 있어?”
[임마, 네가 내 대타 뛰어줄 때 말했잖아. 은혜 갚겠다고.]
성필이 유하음의 소속사 배우의 매니저 대타를 뛰어줬던 때의 일이다.
하필 성필이 소녀연맹의 데뷔 영업을 시작할 때라서 강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했었지만, 그 배우가 나석문 PD의 ‘여가 시간’에 출연한단 것을 알곤 재빨리 제안을 받아들였었다.
덕분에 나석문과 친분을 다지며 이유이 스타일리스트와 만나는 계기가 됐으니, 성필에게는 이득밖에 없던 일이었다.
[이거 소식 받자마자 바로 너한테 알려주는 거야. 소녀연맹 컴백 무대도 그때쯤이라며?]
“비슷하지.”
[그 말은?]
“사랑한다 새끼야…….”
[잘되면 비싼 거 함 쏴라.]
“은혜 갚는 거라며?”
[더 큰 은혜로 갚았잖아.]
“오케이.”
성필은 즉시 음악세상의 PD에게 연락했다.
박재환 PD는 성필의 연락을 받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또 냄새 맡았구나?]
“뭐가요? 저는 그냥 형님과 우애를 다지고 싶어서 전화했는데요? 오랜만에 술이나 드실래요? 비싼 걸로.”
[하아, 나 시간 없는데.]
“아 형 왜 그래요! 매일 고생하시는데 좋은 거 드시는 날도 있어야지!”
[쯧, 어디?]
그렇게 성필은 박재환과 가라오케에서 만남을 가졌다.
안 그래도 연말이라 돈 나갈 곳이 많은데 이렇게 또 지출이 생기다니.
어차피 회사에 비용을 청구할 테지만, 회삿돈이 성필의 돈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아니, 그래도 안 아까워.’
박재환이 좋아하는 술과 안주를 잔뜩 시키고, 흥을 돋워줄 게스트까지 불러 노래와 마술 혹은 춤을 구경했다.
“어, 이 친구 재밌네!”
박재환은 춤을 추던 게스트의 말빨이 마음에 들어 술까지 따라주면서 옆에 앉혔다.
성필도 그 게스트의 언변에는 참을 수가 없어서 거의 10초에 한 번씩 웃음을 터뜨렸다.
예능인처럼 정제된 솜씨는 아니지만, 날것이기에 더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
“진짜 신기해. 저런 사람이 개그맨 해야 하는데 이런 곳에 있고.”
“개그맨도 제한 풀리면 아까 그 사람처럼 할걸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재밌단 사람만 모은 게 개그맨이잖아요.”
“그른가?”
박재환은 술에 취해 나른해졌다. 하지만 성필의 정신은 취할수록 더욱 날카로워졌다.
“PD님. 이번에 무대 하나 비었다면서요?”
“언제 얘기 꺼내나 했다. 그래, 비었어. 이번에 소녀연맹이 무대 두 개 쓸래?”
“……이렇게 허락을?”
“어차피 너 연락 오는 순간부터 주려고 했어.”
“무대 바라는 사람 많잖아요.”
“쏟아지게 왔지. 뭔 며칠 밤 동안 황제처럼 모시겠다는 미친놈도 있었어. 별, 내가 그런 거 받을 인간이냐?”
박재환은 양주를 병째 들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저한테 얻어먹는 건 괜찮고요?”
“네가 우애 다지자며.”
“아 참.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미친……. 암튼 너 쓸래? 근데 다른 데서도 무대 두 타임 쓰게 해준다고 했나 보다?”
성필이 떨떠름한 미소를 보였다. ‘못 받았다’는 무언의 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재환은 더더욱 기가 살아 생색을 냈다.
“나 말고는 자리 주려는 인간 없지?”
“제가 계속 딜을 하고 있죠. 근데 없을 거 같아요. 공중파에선 절대 안 되고요.”
“미치지 않고서야 안 받겠지.”
“감사함다!”
“그래 그래 쭉 감사해라. 지금에야 말하는 건데, 원래 석세스 엔터 쪽에서 먼저 나한테 연락이 왔었거든.”
행복으로 가득했던 성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런데…… 안 주셨네요?”
“어. 일이 있었어. 걍 좀 그렇더라고.”
* * *
“……뭐요?”
“나랑 음방 PD 좀 만나러 가자.”
김태훈의 비굴한 태도를 보고도 윤상열은 인상을 펴지 않았다.
“상열이 네가 유명하잖아. KS 엔터 출신이고, 히트 작곡가고, 이젠 우리 프로듀서고. 직접 얼굴 비춰서 우리 글로브가 어떤 애들인지 말도 해주고, PD 얼굴도 익히고 그러자는 거야.”
“저한테 방송국 놈들 시중들라는 거예요?”
“아니 아니! 무슨 시중이야! 그냥 술만 마시는 거야, 술만.”
김태훈이 평소대로의 온화한 웃음을 보였다. 그는 웬만해선 윤상열에게 이런 부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젠 영업도 이 형이 직접 뛰어?’
밑의 매니저에게만 시키는 데는 한계가 왔나.
‘박성필 그 새끼가 있었을 땐 사장실에서 엉덩이만 붙이고 있더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글로브에 무대가 두 타임 할당될 수도 있는 듯하다.
“너 계속 타이틀곡 고민하다가 겨우 하나 찍었잖아. 아쉽지 않아? 아예 무대를 두 개 써서 다 보여주자. 어때?”
“……하아.”
윤상열은 다크서클이 짙은 눈가를 문질렀다.
“진짜 술만 마시는 거죠? 저 사람 비위 맞추는 거 못해요.”
“알아 알아. 진짜, 그냥 우리 프로듀서로서 얼굴만 비춰달라는 거야.”
그렇게 윤상열은 김태훈과 함께 술집으로 갔다. 그러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형이랑 술 마시러 가는 건 오랜만이네요.”
“어? 어, 그렇다 진짜. 옛날엔…….”
성필이 있었을 때는 자주 갔었는데.
윤상열도 흐린 채 끝난 김태훈의 뒷말을 짐작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둘은 룸으로 들어가 박재환을 기다렸다.
“여기 여자들 안 나와요? 조용한데.”
“여기 소프트야. 그냥 룸 술집. 박 PD가 그런 거 안 좋아해.”
“별…….”
얼마나 대단한 도덕심을 가지고 있기에 접대도 가려서 받으시나.
윤상열은 허 웃으면서 안주나 집어 먹었다.
그때 뒤늦게 박재환이 등장했다. 윤상열과 김태훈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상석은 박재환을 위해 남겨두었다.
“오랜만이다 박 PD!”
“김 형도 오랜만이야. 이게 얼마 만이지?”
“오래됐지.”
“오늘은 성필이 안 왔…… 아.”
성필은 다른 회사로 갔다. 한발 늦게 그것을 떠올린 박재환이 뻘쭘한 미소를 지었다.
“이쪽은?”
“윤상열 총괄 프로듀서입니다.”
“오, 글로브 만드신 분이 여기 계셨네! 노래 잘 듣고 있어요!”
“네.”
술자리는 김태훈의 넉살과 언변 덕분에 흥겹게 진행되었다.
다만, 윤상열은 기분이 안 좋았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엉덩이를 붙이고 웃고만 있다는 게, 도저히 버티기 어려웠다.
‘박성필은 이딴 짓을 계속하고 다닌 건가?’
딱 자기 주제에 맞는 일이다.
그런 놈이 지금은 프로듀서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그런데, 지금 자신도 그러고 있지 않나?
“그쪽 프로듀서님은 왜 입 꾹 다물고 있지?”
윤상열은 자꾸만 ‘그쪽’이라고 부르는 박재환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아아, 내가 불편한가 보네! 형 어째?”
“으하하! 뭐가 불편하다 그래! 쟤가 그냥 숫기가 별로 없어! 상열아, 우리 애들 얘기나 해드려. 재환아, 이번에 얘가 만든 곡이 진짜 기가 막히거든.”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쪽도 PD네.”
PD.
프로듀서.
제작자.
그래, 자신은 프로듀서다.
프로듀서가…….
‘술잔이나 처받고 있어?’
윤상열은 잔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태훈과 박재환이 당황했다.
“갑니다.”
윤상열은 대답도 듣지 않고 룸을 나섰다.
가게를 나오고 나서야 외투를 벗어두고 왔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윤상열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네온사인이 어지러이 비치는 거리를 거닐었다.
‘난 프로듀서다.’
프로듀서는 웃음을 팔지 않는다.
예술가니까.
콧대가 높은 아티스트.
돈이 있으신 사장님들.
높은 의자에 앉아 계신 방송국 PD들.
그런 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사탕발림이나 칭찬만 해주는 일을, 윤상열은 경멸한다.
그렇다, 경멸한다.
‘난 그딴 건 필요 없어.’
김태훈은 화가 났을 것이다.
박재환은 어이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윤상열에게 유도리가 없다니,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니, 혹은 성격이 더럽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상열은 그딴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역겨워서 참을 수 없어. 이제 알았다.’
뭐라도 얻으려고, 뭐라도 하나 더 건지려고.
이익을 얻기 위해 웃음과 아부를 판다.
‘님’을 붙이기도 싫은 인간에게 존대를 쓰고,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오는 인간의 말에 ‘네’란 대답만 하며, 신체와 마음을 닳게 만드는 일은.
윤상열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건 하나다.’
음악을 만드는 것.
그것을 아이돌에게 부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음악과 아이돌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것.
아티스트건 사장이건 PD건 결국에는 예술가에게, 프로듀서에게 기생하며 사는 인간들이다.
창작자의 피를 쪽쪽 빨아 먹고 사는 놈들 주제에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꼴이라니.
“나는 프로듀서다.”
그러니 음악을 판다.
감정을 팔진 않겠다.
윤상열은 그 말을 곱씹으면서 겨울의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 * *
박재환은 수십 분이나 윤상열을 욕했다.
‘이 인간, KS 엔터한테 줄을 만들어두고 싶었구나.’
윤상열이 KS 엔터의 수석 프로듀서였단 말을 듣고 인맥의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려던 것이겠지.
그래서 기분이 상한 것이다.
만약 윤상열이 조금이나마 유도리가 있었다면, 성필은 박재환을 만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처럼 만나줬는데 말야. 뭐가 기분이 나빠? 내가 뭐 더러운 짓이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고, 희한한 새끼 다 봤다니까.”
박재환은 기획사 인간들에게 비싼 술 얻어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인간이다.
술자리에 아이돌을 부르거나 아예 본격적인 접대를 받는 놈들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대접 자체를 바란단 점에선 박재환도 그리 떳떳하진 않다.
‘다 구상준 PD님 같은 분들만 있으면 좋을 텐데.’
성필은 뮤직 스테이지의 PD인 구상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막무가내인 성격이긴 해도, 그는 본업에 진심에다가 사적인 영업 따위는 받지 않는다.
만약 성필이 그에게 이런 곳에 오자고 했다면, 구상준이 미쳤냐며 욕을 해댈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와의 만남은 방송국 근처 맛집 정도가 전부이곤 했다.
‘나도 박 PD님 앞에 앉아 있는 시점에서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지만.’
“너도 윤상열한테 많이 당했지? 석세스 나온 것도 그 인간 때문 아니야?”
그건 맞다. 그래도 성필은 누군가의 뒷담을 받아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설령 그 대상이 윤상열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네, 그 새끼한테 많이 당했죠.”
성필은 박재환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술을 몇 병이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성필은 쓰린 위와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술만으로도 힘든데, 박재환의 말을 들어주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아.’
소녀연맹을 위해서라면, 건강과 마음 정도야 상식선에서 얼마든지 팔아줄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닳아버리든 상관없다.
소녀연맹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라면, 자신 따위 얼마든지 써버릴 수 있다.
‘나는 프로듀서니까.’
따스한 히터 바람을 맞으며 술을 위 안에 퍼부으니, 밤도 서서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