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13화 (213/760)

213화

어쩌다 보니 성필과 강지혜는 카페로 오게 됐다.

성필은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일종의 입막음 비용으로, 성필이 계산하고 직접 가져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케이어스의 브로마이드가 든 지관통을 끊임없이 응시하는 강지혜를 믿기란 어려웠다.

성필은 지관통을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의자 아래에 고이 모셔두었다.

“스킨이랑 로션이 떨어져서 오랜만에 매장에 들렀어요.”

“네.”

“가보니까 케이어스 행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음.”

“3만 원 이상 구매해야 한다고 해서 간 김에 많이 담아왔어요. 팩도 좀 샀는데 드릴까요?”

“괜찮아요.”

“…….”

더는 이사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겠단 판단이 섰다.

성필은 아예 자신의 덕심을 고백하기로 했다.

“케이어스 팬이에요, 저.”

“알아요.”

“알아요?”

“멤버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요.”

“손나(그런)…….”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던 모양이다.

“저, 그럼 브로마이드 좀 확인해 봐도 될까요? 이게 랜덤으로 주는 거라서요. 아까부터 궁금했어요.”

허락을 받은 뒤, 성필은 조심조심 지관통 뚜껑을 열었다.

펼쳐 보니 진저의 것이었다.

성필은 다시 조심스레 브로마이드를 말아 지관통 안에 넣었다.

“이런 이벤트 자주 하나요?”

“자주 안 가요! 애초에 케이어스는 이벤트랄 게 많지가 않거든요! 이번에 ‘에이징영’이랑 콜라보한 것도 정말 드문……!”

“아뇨, 케이어스 같은 아이돌들이 이벤트 하는 거요.”

“아…….”

지레짐작하고 변명하다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 숨을 텐데.

“대형 매장의 콜라보 행사는 기업 측에서 제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인지도가 높아야 해요. ‘에이징영’ 정도로 시장 장악력이 큰 기업은 더 그렇고요.”

그냥 높은 정도로는 안 된다.

한 해를 휩쓴 정도는 되어야 한다.

화장품이나 의류는 외견과 관련되는 상품이니, 모델이 되는 그룹의 이미지나 유명세가 매우 중요하다.

“소녀연맹은 힘들까요?”

“우리 애들이요?”

힘들겠지.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그쪽 기업이 가로 엔터에 컨택을 줄 리가 없다.

“그런가요…….”

강지혜는 씁쓸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아까부터 그녀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성필의 배신 행각 때문인가 싶었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다.

“이사님, 실은요…….”

강지혜는 성필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 시작했다.

손혜빈으로부터 프로모션 협찬을 받아오란 업무를 맡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모르겠단 이야기였다.

그녀 나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교육이구나.’

손혜빈도 강지혜가 그럴듯한 협찬을 받아오리라고 생각하진 않을 터다.

이 업무를 준 목적은 홍보팀 교육일 것이다.

‘누나가 지혜 씨 처음 들어왔을 때 했던 말마따나, 홍보팀 직원은 기획자니까.’

사람들의 눈에 띌 홍보를 기획하고 실현시켜야 한다.

그것을 입사 1년도 안 되는 강지혜가 해내기란 어렵겠지만, 그 고생이 훗날의 경험이 될 터다.

마침 프로모션이나 마케팅 기획도 자리를 잡아 가는 시기이니, 강지혜의 스케줄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그 기회를 이렇게 활용한 건가.’

손혜빈은 교육 목적이라지만, 당사자인 강지혜는 구석에 몰린 심정일 게 분명했다.

“지혜 씨. 일단은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필요로 할 만한 브랜드를 찾아야 해요. 어디 알아본 곳은 있어요?”

“지금 찾아보는 데는 생수 회사인데…….”

“생수 회사요? 왜요?”

“맑고 청량한 이미지가 있지 않아요? 소녀연맹도 비슷하니까 회사에서도 좋아할 거 같아요.”

생수 회사가 왜 아이돌을 모델로 쓸까.

애초에 아이돌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생수를 주로 사는 사람들도 아닐 텐데 말이다.

주로 주부들이 생수를 묶음으로 사는 일이 많을 것인데, 그들이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보고 생수를 사진 않는다.

‘우리 애들이 청량한 이미지도 아니지.’

항상 회사에서 밝은 모습의 소녀연맹만 보아온 강지혜는 대중에게 보이는 소녀연맹도 비슷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지혜 씨는 머릿속에 우리 애들의 브랜드 이미지가 거의 없구나.’

교육받은 것이라곤 언론 쪽 홍보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누나도 이걸 노리고 이 업무를 맡긴 건가? 확실히 업무가 끝나면 지혜 씨가 얻어가는 게 있겠네.’

그런데 홀로 깨닫기엔 난이도가 너무 높다.

A&R팀의 이재호도 그렇고, 손혜빈의 교육방식은 스파르타식이다. 뭐든 난관에 부딪히게 만들어서 배우게 만드니까 말이다.

“지혜 씨. 홍보가 뭔 거 같으세요?”

“홍보요?”

선문답에 가까운 질문이다.

사전적 의미로 답할 수도 있겠으나, 성필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알리는 거 아닌가요?”

“네. 그게 프로모션이죠. 그럼 마케팅은요?”

“어…… 음…… 소비자에게 기업이 바라는 이미지를 알려주는 거죠.”

“아뇨. 알리는 게 아니에요.”

“네?”

“소비자에게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를 때려 박는 거예요. 그냥 알리는 게 아니라요. 소녀연맹의 이미지가 어떻죠? 아니, 이건…… 소녀연맹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죠. 누구죠?”

“주로 여자고, 10대에서 20대죠.”

“그분들을 주요 타깃으로 노리는 상품이 뭐가 있을까요?”

10대에서 20대의 여자가 주로 소비하는 상품.

당장 떠오르는 게 많았다.

그때 강지혜는 성필의 옆에 놓인 종이백으로 시선이 갔다. 표지에는 화장품 매장의 마크가 인쇄돼 있었다.

“화장품이요.”

“그렇죠. 관심이 많을 시기죠.”

“그런데 대형 매장이 소녀연맹을 모델로 쓸 리가 없잖아요. 아까 이사님이 말씀하셨던 대로요.”

작은 화장품 메이커조차도 비싼 돈을 들여서 아이돌을 모델로 세우지도 않을 테고.

비용에 비해 얻는 게 적다.

게다가 소녀연맹도 화장품을 협찬받아서 뭐 어쩌겠는가. 홍보를 제대로 해줄 방법도 없다.

“화장품 말고 다른 건 뭐가 있을까요?”

“의류요.”

하지만 의류도 협찬받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특히 프로모션이 될 법한 브랜드 상품은 더욱 더 받기가 어렵다.

“의외로 의류 브랜드 매장은 종류가 다양해요. 여러 개를 떼와서 파는 매장이 아니라, 한 메이커만 취급하는 곳이요.”

“그런 곳은 다 유명한 데잖아요. 광고 모델로는 진짜 모델을 쓰는 곳이요. 아니면 유명 배우나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매장은 정말 많다고요. 밖에 보세요.”

두 사람이 앉은 카페 자리는 2층의 창가였다.

강지혜는 밖을 보았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길가를 거닐고 있다. 길가의 벽에는 마찬가지로 수많은 가게와 간판이 존재하고 있다.

당장 강지혜의 눈에 띄는 의류 매장은…….

“저긴 보세 옷 파는 데네요.”

“저기도 브랜드 상품을 취급해요.”

“정말요? 본 적이 없는데…….”

“보세라고 부르는 것 중에서도 이름을 가진 게 있어요. 굳이 저기가 아니더라도, 그냥 옷가게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게 의류 브랜드 이름인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저희가 그런 옷들을 어떻게 홍보해주죠?”

순수한 의문에서 나온 질문이다.

강지혜의 그 모습을 보고, 성필은 자신의 과거가 떠올라 설핏 미소를 지었다.

“거기가 홍보팀원으로서의 기획력이 드러나는 데죠.”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강지혜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듯했다.

“너무 혼자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상헌 씨한테도 도와달라고 해봐요. 같은 홍보팀이니까 뭔가 생각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상헌 씨는 바빠서 부탁하기 미안해서…….”

“그러니까 뭐라도 좀 사주면서 부탁해보세요.”

슬슬 갈 시간이다.

“저는 다른 매장도 가봐야 해서 일어나볼게요.”

성필은 지관통과 종이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몇 개 매장은 더 돌아봐야 한다.

인천의 매장에서도 저녁에 행사를 열기에 서둘러야 했다.

강지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저기, 이사님.”

“네?”

“덕질이란 거 재밌나요?”

솔직히, 강지혜는 곧 30대 중반에 접어들 남자가 아이돌에 시간을 쏟는 게 어이가 없었다.

보통 저 나이대 남자의 관심사란 부동산이나 주식, 차나 전자제품 정도니까.

슬슬 기호(嗜好)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다.

“재밌어요.”

“네…….”

“방금 눈 피했어요?”

“아, 아니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방금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선 피했잖아요.”

“아,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성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혜 씨는 아이돌 좋아한 적 없으세요?”

“저는, 어, 중학생 때 좋아했었어요.”

“지금은 아니고요?”

“네…….”

“그때 즐거우셨어요?”

즐거웠다.

사랑하는 아이돌 오빠와 관련된 물건은 무엇이든 모으려고 노력했었고, 앨범이 나오기라도 하면 기뻐서 눈물을 줄줄 흘렸었다.

재밌었지만, 이 나이에도 즐길 문화는 아니다.

“제 친구들이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제, 제가요?”

“네. 제 친구들도 모이면 DTI(Debt To Income)니 펀드니 주식이니 그런 말만 하거든요. 항상 마지막은 저 까면서 끝나요. 나이가 몇인데 아이돌이나 붙잡고 있냐면서요.”

강지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성필을 같은 이유로 무시했단 것을 들으니, 새삼스레 자기 객관화가 됐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좋아하든 그거야 자기 마음인데.

“근데 그런 말을 하는 친구들은 별로 즐거워 보이지가 않아요. 저희 나이가 적었을 때는 지나가다 만난 여자 얘기, 축구에서 어느 팀이 이긴 얘기, 술 먹다가 저지른 일 얘기, 그런 사소한 거에도 세상 떠나갈 듯이 즐거워했었는데 말이에요.”

“…….”

“나이 먹고 돈을 더 많이 번다고, 딱히 그때보다 행복하진 않은 거 같아요. 돈 벌어서 얘기하는 게 결국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지에 관한 거니까.”

이제는 술 마실 때도 안줏값이나 술값에 벌벌 떨지도 않고.

택시 할증 요금에 눈물을 머금지도 않고.

돈이 어느 정도 있어서 젊었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도.

성필의 친구들은 나이에 따라 점점 시들어갈 뿐이었다.

“딱히 아이돌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지혜 씨는 아직 젊으니까, 뭔가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세요. 취미요. 할 때마다 가슴 뛰고 행복한 그런 일이요.”

어렸을 적, 아이돌을 좋아했을 때 느꼈던 설렘과 같은 일을 찾길 바란다.

“……이사님은 그럼, 그러세요? 아이돌을 좋아하면요.”

“저요? 네, 그래요. 저는 아이돌을 사랑해요. 앨범이 나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SNS에서 사진을 확인하고,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으면서 행복해해요. 뭔가를 사랑한다는 건 좋은 일이죠.”

그리 말하는 성필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강지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비웃었어요? ‘아이돌을 사랑할 시기가 아니라 결혼할 여자를 찾아서 사랑할 때인데 뭔 어린애처럼 그딴 짓이나 하고 있냐’고 생각하면서?”

“아, 아니요! 이번엔 진짜 아니에요!”

“‘뭐 이런 철도 안 든 인간이 다 있지?’라고 생각했죠? 진짜 애새끼 같다고?”

“아니라니까요?!”

카페를 나가며, 성필은 지켜보겠단 뜻으로 자신의 눈과 강지혜의 눈을 번갈아 손끝으로 가리켰다.

‘찍혔다…….’

하필 회사의 이사에게 찍혀버렸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더 열심히 해보자.’

서울에 있는 모든 브랜드를 찾아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하루도 일에 바쳐야겠다.

강지혜는 지관통을 멘 채 사라지는 성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 * *

“후우.”

양상헌이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누가 보아도 일이 끝난 직장인의 제스처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양상헌을 향해 성필이 물었다.

“상헌 씨 일 끝나셨어요?”

“아, 네.”

“웬일로 초과 근무예요.”

양상헌은 퇴근 시각까지 일을 끝내두기로 유명했다.

소녀연맹의 컴백 시즌이 되면 모르겠으나, 여태까지는 그 시각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출근하고 나서 일 외의 다른 곳에는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성필이 보아온 사람 중에서도 업무 효율이 정점에 가깝다.

“리카 씨가 시리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좀 손 보느라요.”

“아, 그거. 제목이 뭐였죠?”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입니다.”

“……다시 말씀해주실래요?”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이요.”

그 괴기한 제목을 들으니 어떤 영상 콘텐츠였는지 한 번에 기억이 났다.

리카가 멤버들의 소원을 이뤄준다는 컨셉이다.

“리카 씨가 엔딩송까지 만드셨는데, 들어보실래요?”

귀여운 멜로디에 리카의 보컬이 얹어졌다.

[안녕 멤버들

(소녀연맹~)

행복하게 해줄게

(소중하니까~)

리카쨩이 이뤄줄게

(사랑받아야 해~)

행복해질 수 있어

다시 일어나자

안녕 멤버들

(소녀연맹~)

뚜비두비 뚜바밥…….]

“……귀엽네요.”

“그렇죠? 컨셉도 확실한 거 같아서 마음에 들거든요. 곧 기획안 제대로 작성해서 올릴게요.”

“네, 힘내세요. 근데 리카쨩, 아니, 리카 다른 시리즈도 있잖아요. ‘자정의 인터뷰’는요?”

총 5회까지 제작되며 리카 팬덤에게서 기이한 호응을 얻고 있는 시리즈다.

“리카 씨가 이제 소재가 없대요.”

1회 가로 엔터 사장 홍규헌 편.

2회 국밥집 사장님 편.

3회 몰래 자주 갔던(홍규헌한테 들켜서 이제 가끔 감) 가로 엔터 앞 베이커리 집 사장님 편.

4회 가로 엔터 이사 박성필, 한구인, 손혜빈 편.

5회 일본에 사는 이시카와 유우토(인맥 추천 아님) 씨 편. 일본어 자막 탑재.

“벌써요?”

“나중에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하시겠대요.”

“그렇구나.”

양상헌은 짐을 싸고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같은 홍보팀 직원인 강지혜가 밟혔다.

“지혜 씨는 퇴근 안 하세요?”

“네. 일 있어요.”

“일?”

별거 없을 텐데.

양상헌이 뒤에서 그녀의 모니터를 보니, 웬 의류 브랜드 사이트를 살피고 있었다.

‘전기 요금을 못 내고 있나? 쇼핑을 회사에서 하고 있네.’

양상헌은 한마디 하려다가 그냥 퇴근하길 택했다. 성필도 가만히 있으니 양상헌이 무어라 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사무실에는 야근이 확정된 강지혜와 성필만이 남았다.

일에 미친 성필은 거의 매일 회사에서 초과 근무를 한다.

홍규헌이 추가 수당 그만 좀 받아먹으라고 말해도, 성필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런 성필의 눈앞에서는.

[박성필: 리카 잘하고 있니?]

[박성필: 리카 왜 내 메시지 무시해?]

[박성필: 리카 리카 리카]

[박성필: 리리리자로 시작하는 말은~ 리카 리카 리카 리카 리카~]

[Rika Ishikawa: 촬영 중이니까 디엠 그만 보내세ㅛㅛㅛㅛㅛ!]

[(셀카)]

[Rika Ishikawa: 이제 혼자 노세요!]

[박성필: 굿]

“흐.”

10분간의 짧은 휴식을 끝낸 성필은 다시금 일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홍보팀 자리에 있는 강지혜가 신경 쓰였다.

성필은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와 멤버들이 자주 사용했던 연습실로 들어갔다.

“음.”

바닥의 나무 향이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

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여기 환기를 잘 안 시키나?

성필은 환풍기를 켜둔 다음 바닥을 대대적으로 청소했다. 그러고 나서 구석에 앉아 업무를 이어갔다.

‘며칠 뒤에 앨범 사전 예약이 시작돼. 한 달 조금 더 뒤가 컴백이고.’

사전 예약 기간이 한 달을 훌쩍 넘는다.

이번에는 유통사가 초동판매량을 공개해줄 때까지 조마조마 기다릴 필요도 없다.

소녀연맹의 팬덤이라면 이 기간에 앨범을 모두 구매할 테니까. 컴백 전에 유의미한 판매량이 집계될 것이다.

‘사전 예약 기간에 얼마나 팔릴까.’

얼마 전, 한구인이 두렵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성필은 가슴 안쪽이 점점 무거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번 정규 앨범에 가로 엔터가 투자한 금액은 수십억이다.

감히 중소 기획사 주제에 대형 기획사를 따라가려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투자한 금액의 효율은 대형 기획사보다 훨씬 못하다.

‘예산집행을 전문적으로 관리할 프로듀서 팀도 없어. 퀄리티를 보장할 관리 감독 부서도 없고. 모르는 새에 돈이 물처럼 샜을 거야.’

시간과 인력이 더 있었다면, 같은 비용으로도 더 높은 퀄리티의 앨범을 뽑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중소 기획사, 가로 엔터의 한계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가 이번 컴백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한계가 상상 이상이라면, 가로 엔터는 다시금 비약할 힘을 얻는다.

‘회사는 더 확대되고 개편될 거야. 1년 동안 소녀연맹이 이룬 성과를 가지고 수십억 규모의 투자도 받을 수 있겠지. 그럼 소녀연맹은 훨씬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간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저 그런 성공에서 머문다면…….

‘정규 앨범에 들인 돈은 비수로서 돌아온다.’

그 책임은 메인 프로듀서인 성필에게 있다.

[Rika Ishikawa: ㅎㅇ]

성필답지 않은 감상에 빠져 있던 때, 리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Rika Ishikawa: 촬영 끝났어요!]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12시가 넘었다.

연습실에 들어온 후로 4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Rika Ishikawa: 내일도 촬영이에요! 이사님 나빠! 스케줄이 너무 타이트해요!]

[(사진)]

[Rika Ishikawa: 안녕히 주무세요!]

대답도 안 기다리고 대뜸 자라니.

정말 리카답다. 그리 생각하며, 성필은 웃음과 함께 그녀가 보내준 사진을 열었다.

뮤직비디오의 스태프, 댄서팀, 출연 배우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언뜻 보아도 수십 명이다.

‘오늘이 뮤직비디오 하이라이트 촬영이었나.’

잘 끝났다니 다행이다.

성필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박성필: 이번 앨범이 끝나면 다 같이 여행이라도 가자. 가로 엔터 인원 전부 다 같이 야유회라던가. 재밌을 거야. 많이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줘. 나도 죽을 만큼 열심히 할게. 항상 고마워.]

노트북을 닫자마자 메시지 효과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Rika Ishikawa: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Rika Ishikawa: 다신 그러지 마요!!]

[Rika Ishikawa: 알겠나요!!!]

“……여행 가기 싫나?”

하긴, 앨범이 끝나면 왜 나이도 많은 회사 직원들이랑 여행을 가고 싶겠어.

멤버들이랑 가고 말지…….

‘리카, 난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냉혹한 매니저 박성필로 돌아가는 수밖에.’

[박성필: ㅇ]

메시지에 답해주고 노트북을 껐다.

성필은 퇴근을 준비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강지혜가 보였다.

“지혜 씨?”

대답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니 미약하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모니터에는 수십 개의 인터넷 페이지가 떠 있고, 메모장엔 브랜드의 이름과 주류 타깃 등의 기본 정보가 적혀 있다.

‘이 시간까지 협찬사 알아본 건가?’

각 기업의 협찬 담당자에게 연락도 많이 돌려보았는지, 전화번호 목록 중 수십 개에 ’안 된다‘는 뜻의 선이 좍좍 그어져 있었다.

성필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강지혜를 깨우려다가, 그녀의 옆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혜빈 누나가 지혜 씨한테 준 일이니까, 내가 도와주면 안 되지만.’

성필은 눈여겨보던 기업의 정보를 정리하고, 그에 상응하는 프로모션 전략을 간략한 기획으로 만들어 문서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강지혜의 컴퓨터로 옮겨두었다.

* * *

새벽 1시, 알람이 울려서 강지혜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는 눈을 끔뻑이며 한숨을 쉬었다.

“뭔, 알람, 이야…….”

모니터에는 대학 수강 신청 때나 써보았던 시간 알림 사이트가 떠져 있다.

그 사이트의 정각 알림이 울린 것이다.

‘내가 자기 전에 해뒀나?’

에휴.

강지혜는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를 딸각거렸다.

수십 개의 인터넷 페이지, 십수 장의 메모가 눈에 띄었다.

이 중에서 단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또한 실현될 가망도 없어 보인다.

“어떡하지…….”

아까 써두었던 메모를 다시 읽으려니 눈에도 잘 안 들어온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응?”

생소한 문서가 보였다.

‘내가 쓴 게 아닌데?’

그곳에는 하나의 의류 브랜드와 그 기업의 현재 상태, 매장의 위치나 타깃층 같은 게 상세히 나와 있었다.

강지혜는 홀린 듯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문서의 말미에는 어떻게 협찬을 얻어낼지에 관한 내용마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아직 디테일한 부분은 공백이지만, 강지혜가 상상력만 발휘하면 충분히 실현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요정인가?”

정말 요정이 써둔 건가?

서늘한 냉기가 강지혜의 등골을 쓸며 지나갔다. 분명 좋은 일이 벌어졌건만 무섭기 그지없다.

슬금슬금 모니터에서 떨어지던 중, 마우스 옆에 놓인 에너지 드링크가 보였다.

드링크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파이팅! ― 박성필]

“……이사님?”

그럼 이 문서도 성필이 만든 건가?

고맙다. 고마운데…….

“이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진작 그냥 시키시지 그랬어요?!”

시키기만 했으면 바로 실행했을 텐데.

왜 굳이 사람을 이렇게 궁지에 모냐고…….

“아, 아니야.”

이건 기회다. 기회를 얻은 거다.

진정한 홍보팀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발자국이, 강지혜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조금 비겁하지만, 강지혜는 한 발을 내디딜 힘을 성필에게서 얻었다.

‘그래도 전부는 아니야.’

프로모션의 구체적인 기획을 설립하는 건 강지혜의 역할이다.

시각, 새벽 1시 8분.

“…….”

강지혜는 자세를 바로잡고 에너지 드링크를 개봉했다.

‘홍보가 될 거야.’

알릴 것이다, 소녀연맹을.

‘한 명에게라도 더.’

소녀연맹이란 이름을 뇌리에 박아 넣을 것이다.

* * *

양상헌은 출근하자마자 멈칫했다.

처절한 몰골의 강지혜가 내민 기획서 때문이었다. 그는 서류를 받아들고도 강지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제 집에 안 가셨어요?”

“근처 사우나에서 씻고 바로 다시 왔어요.”

“네에…….”

“도와주세요.”

양상헌은 서류를 읽었다.

그가 즉시 난색을 표했다.

“이건, 조금, 제 선에서 뭐라고 할 게 아닌데.”

“부탁드릴게요.”

“진짜 부탁이네요. 저한테도 없던 일이 생기는 거니까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거.”

“알아요.”

무려, 컴백 준비로 바쁜 소녀연맹의 시간을 빼앗는 기획이다.

“……점심까지 기다려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강지혜와 양상헌은 손혜빈을 찾았다.

두 사람이 내민 홍보 기획을 확인한 손혜빈은 활짝 웃었다.

“진짜 괜찮다. 진짜 지혜 씨가 생각한 거 맞아? 우와.”

손혜빈은 칭찬으로 한 말이지만, 강지혜는 양심이 찔려왔다.

“아, 하하, 그게…….”

방금 손혜빈의 이야기를 듣고도 성필은 무심한 태도만 유지했다.

성필은 강지혜가 이 기획의 온전한 공헌자가 되는 것을 허락해준 것이다.

강지혜는 확신을 가지고 답했다.

“네, 제가 했습니다. 상헌 씨가 도와주시고요.”

“응. 이건 바로 사장님한테 올려야겠어. 지혜 씨 수고했어.”

강지혜는 뿌듯함으로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 모습을, 성필 또한 따스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 * *

“우리나라다아아!”

리카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조정훈에게 시달렸던 지옥 같은 촬영을 떠올리면 이렇게 우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조아라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힘이 탁 풀려선 긍정적인 말들만 쏟아냈다.

“드디어 좀 쉬겠네요.”

“아직 촬영 남았잖아.”

“그래도요. 세트 다시 섭외하는 데 일주일은 걸린댔으니까 그때까지는 쉬겠죠.”

“……그럴까?”

“네.”

“헤헤, 그럼 좋겠다.”

백설하도 쉴 생각에 들떴다.

그런데 회사로 오자마자 손혜빈이 말했다.

“얘들아, 촬영하러 가자!”

멤버들의 표정이 굳었다.

“어, 어, 안 쉬고요?”

“당연히 촬영은 내일이지! 오늘은 일 관련해서 회의를 좀 할 거야. 사진도 찰칵찰칵 쬐끔만 찍고.”

뮤비 촬영을 끝내자마자 또 일이라니…….

또 프로모션 컨셉 포토라도 찍는 건가? 아니면 뮤비 스포일러?

“옷 광고 들어올 거야.”

아마도, 라는 말은 뺐다.

“빨리 가요! 빨리 회의해요!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리카가 흥분해선 손혜빈을 밀어붙였다.

멤버들도 자신들이 광고를 받았단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했다.

조아라가 신아름의 볼을 꼬집었다.

“아파?”

“어…….”

“우리가 진짜 옷을, 광고를 받았어……?”

“아라쨩 뭐해! 빨리 와! 빨리 회의하고 광고 찍으러 가야지!”

멤버들은 뮤비 촬영으로 쌓였던 피로가 전부 다 날아갔다.

손혜빈은 광고가 확정이 아니란 말은 삼갔다.

지금은 멤버들이 행복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나중에 협찬 계획이 어그러지면 그때 슬퍼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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