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11화 (211/760)

211화

예레미야 아트 극장 공연기획부 부장 오영석.

그는 낮에 기분 나쁜 연락을 받았다.

무슨 영상 제작 회사라던가. 아이돌 뮤비를 찍을 테니 극장을 대관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아이돌 뮤비를 우리 극장에서?’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예술계의 별, 이라고 자칭하는 예레미야 아트 극장이다.

그런데 아이돌 뮤비를 찍을 테니 빌려달라?

‘천만금을 줘도 안 하지.’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을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거절했다.

그저 거절도 아니고, 다시는 연락할 마음도 먹지 못하게 모욕적인 말까지 곁들였다.

하지만 기분 나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JJH의 조정훈 사장이란 사람이 기어이 찾아와서 머리까지 숙였다.

하필 부서 사람들과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발이 잡혀버렸다.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니고서야 만나줄 생각조차 없는 인간이다.

“생각 없으니까 가보세요.”

“30분만, 아니, 10분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없으실까요? 지금이 아니라 부장님 편하실 때요!”

“쯧.”

혀를 차는 게 무례한 행동이란 건 안다.

하지만 한 번 거절했는데도 듣질 않다니, 귀가 막힌 건가?

“이봐요. 우리 극장은 뭐 돈 받고 장소를 빌려주는 그런 데가 아닙니다.”

빌려줄 때가 있긴 하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혹은 극장의 품위에 걸맞은 행사가 열릴 때다.

아이돌 따위가 쓴다고 빌려줄 수는 없다.

물론 예레미야 극장과 비슷한 규모라면, 다른 극장들도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빌려줄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건 아니야.’

3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술인 발레를 주로 무대에 올리는 게 바로 이 극장이다.

그 고귀한 성전(聖殿)과 같은 이곳에 아이돌이라니?

‘섹스 어필이 전부인 걸그룹 따위가.’

30년 동안 극장을 운영해왔던 선배들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오영석은 끈질기게 따라오는 조정훈을 일관되게 무시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로 오고서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참나, 분수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비록 무용의 시장 규모는 수천억이란 단위에 겨우 걸치고 있지만, 그 자부심은 대중음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케이팝인지 뭔지가 수십조 원 규모의 시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은 천박한 문화에 불과하다.

돈에 미친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위문화 따위가…….

‘우리 극장을 빌린단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

* * *

점심을 먹은 리카는 기분이 좋았다.

일단 그녀는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다. 그 좋은 기분으로 라이브 방송을 켰다.

“인민이들 안녕하세요!”

방송을 켠 지 10초밖에 안 됐다. 그런데도 벌써 몇 명이 들어왔다. 마치 리카가 방송을 켜길 기다렸단 듯한 속도였다.

“30분 정도만 방송할게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지윤 님! 헤헤, 토크는 사람들 모이면 시작할 거예요!”

리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시청자가 모이길 기다렸다.

그런데.

“에?”

10분이나 지나도 시청자의 수는 20명을 넘지 않았다.

리카는 자신의 눈이 망가졌나 의심하면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하게 20명이다.

‘어, 어째서?’

보통 이 정도 기다리면 수백 명은 기본으로 모이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평일이라서? 아니다. 평일에도 보는 사람들은 본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내가 이전 방송에서 말실수라도 했나? 무슨 논란이라도 터진 거야?!’

15분이 지났다.

여전히 시청자의 수는 20명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나요? 나라에서 행사라도 하는 건가요? 다, 다들 퍼레이드를 보러 갔다던가?”

시청자들도 모른다고 한다.

리카는 초조해졌다. 티를 내지 않고 시청자들과 소통을 했지만, 그녀의 속을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에헤헤, 그건요…….”

억지로 활기찬 분위기를 연출하던 리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인상을 강하게 쓰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저어, 저요오…… 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갑자기 리카는 필사적으로 변했다.

겨우 하루 만에 시청자가 수백 명이나 줄어들었다.

리카는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았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으니 사람들이 안 오는 게 분명했다.

“제가 여러분이 싫어할 일을 했나요? 고, 고칠게요, 끅…….”

리카는 울먹이면서 시청자들에게 간청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20명의 시청자를 붙잡고 폭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더, 더 열심히 할게요! 더 예뻐지고, 또오, 아! 더 노력할게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그, 그러니까요…… 저를 싫어하지 말아주세요오…….”

리카의 시야는 눈물에 가려져 채팅창도 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진심을 전할 뿐이었다.

“더어…… 노력…… 할 테니까아…….”

그때 휴게실로 성필이 들어왔다.

그는 리카가 핸드폰을 보고 있자 방송 중이라 생각하여 바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리카의 기색이 이상했다.

“리카?”

리카가 울고 있던 것이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성필을 쳐다보았다.

“이사니임…….”

“왜 그래.”

아이돌이 라이브 중에 회사 직원이 개입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건 에티켓이 아니다.

팬들은 아이돌을 보러 라이브에 접속한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성필은 리카가 우는 것을 보자 그런 당연한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그는 재빨리 리카에게 다가갔다.

“왜 울어.”

“그게, 흐끅, 그게요오…….”

리카는 억울함을 담아 성필에게 하소연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성필은 안타깝단 듯 말했다. 왜냐하면, 리카의 흑역사가 늘어났으니까.

“아름이가 그러던데 뷔라이브에 오류 났대.”

“……하이(네)?”

“라이브가 튕기거나 시청자 수에 제한이 생긴다더라. 리카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

리카는 눈물을 닦고 채팅창을 보았다.

[ㅠㅠㅠㅠㅠㅠㅠ]

[리카 울지마 우리가 잘못했어]

[ㅠㅜ]

[So cute]

[지금 오류 났다고 ㅋㅋㅋㅋㅋㅋ]

“…….”

정신을 차린 리카는 곧 길길이 날뛰었다.

“나빠! 인민이들 나빠! 왜 아타시(저)한테 사실대로 안 말해준 거예요! 저, 저 진짜 인민이들이 저 싫어하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울어버렸다구요! 눈물은 아무 때나 흘리는 게 아닌데!”

곧 뷔라이브의 서버도 복구되어 시청자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그러고도 리카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뒤늦게 온 시청자들도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와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 웃지 마요! 웃지 마세요! 인민이들이 잘못한 거예요! 괴롭히고 웃는 건 사이코패스에요! 으읏, 웃지 말라니까요!”

성필은 놀림당하는 리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휴게실을 나왔다.

‘리카는 진짜 방송 천재다.’

오해해서 울기까지 한 건 불쌍하지만, 그래도 좋게 끝났으니 다행이다.

한구인이 만든 건강즙을 마시면서 1층 홀로 오자, 손혜빈이 가방을 메고 입구를 나서는 중이었다.

“누나, 지금 퇴근 시간 아니야. 이제 월급도둑 되기로 결심했어?”

“나 일 있어.”

“응?”

성필은 수첩을 열어 손혜빈의 일정을 살폈다.

별다를 건 없는데?

“무슨 일? 어디에?”

손혜빈은 손가락으로 V를 그렸다.

“러시아!”

* * *

공연기획부 부장 오영석은 또다시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

각 부서 부장급 회의에서였다.

“이번에 소녀연맹한테 뮤비 장소 섭외 제안 왔다면서요? 그거 받아들이죠.”

운영지원부 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오영석은 허파가 뒤집힐 것만 같았다.

아니, 이 인간은 자신들이 어떤 극장에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나?

“극장주님의 지시입니다. 받아요.”

반박하려던 오영석은 극장주라는 말에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나이도 어린년이 극장 이미지를 망치려고 작정했구만!’

아무리 재벌가에서 오냐오냐 크면서 극장을 증여받았다 하더라도, 예레미야 아트 극장의 위상도 모르는 건가?

고작 아이돌 따위의 뮤비에게 극장을 빌려주다니.

“이유는 이렇습니다.”

오영석의 불만을 읽은 운영지원부 부장이 극장주의 말을 전했다.

“저희 극장이 홍보가 부족하잖습니까. 매진되는 일도 많지만, 애초에 보는 사람만 보러 오니까 말입니다. 이참에 아이돌로 홍보를 해서 새로운 고객풀을 들여보자는 거죠.”

몇 년 전부터 새롭게 극장주가 된 그녀는 확실히 아버지와 달랐다.

순혈주의라고 표현해도 모자랄 경직된 분위기의 극장에, 점점 대중적인 맛을 포함한 극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고객에게 친화적인 프로모션 활동에 나서는 등의 일로, 아버지 세대부터 극장을 이끌어온 이들과는 자주 갈등을 빚곤 했다.

그리고 갈등을 빚었던 인간들은 전부 극장에서 잘려 나갔다.

‘나도 그렇게 될 수는 없으니…….’

오영석은 겨우 불만을 삼켰다.

“연락은 오 부장님께서 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요? 내가?”

“최초의 연락도 공연기획부로 왔고, 거절한 것도 오 부장님이시잖습니까. 거절을 되돌리는 건 당사자가 해야겠지요.”

“그것도…….”

“예. 극장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의를 지키자는 거니, 너무 마음 상할 일은 없길 바랍니다.”

재벌이 아주 벼슬이다.

‘홍연헌 그 새파랗게 어린년이. 자기 아버지 때부터 이 극장에서 일해온 나한테 이딴 짓을……!’

화가 나지만,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오영석은 불만을 담아 헛기침을 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하겠단 의사는 표시됐다.

그렇게 부장급 회의는 소녀연맹 건만 제외하곤 평소와 다름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아.”

오영석은 본인의 집무실로 돌아와서 한동안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마땅한 답이 나올 리는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빨리 끝내자.

JJH의 조정훈을 향해 전화를 건 그는 송신음이 끝나자 짐짓 거만한 투로 말했다.

“어어, 거기 조정훈 사장님 번호 맞죠? 예레미야 아트 극장의 공역기획부 부장 오영석입니다.”

이후로 이어지는 말에도 오영석의 자만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래도 제깟 게 뭘 하겠어? 고맙다고 넙죽 절이나 하겠지.’

극장을 빌려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왕 명령이 내려온 거 자존감이라도 채워야겠다.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극장, 빌려드릴게요.”

[아, 저희는…….]

[감독님 이리 줘봐요. 여보세요? 오영석 부장님?]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손혜빈 이사라고 하는데요, 이제 그쪽 극장이 필요 없게 됐네요.]

“……필요가 없어, 요?”

[네. 다른 극장을 빌렸거든요.]

오영석은 위기감을 느껴서 의자 깊이 묻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극장을 빌려주어서 홍보하라는 건 극장주 홍연헌의 지시였다. 이게 파토가 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어, 어디를? 어디 극장입니까?”

[마린스키 극장이요.]

마린스키 극장.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영석의 뇌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아니, 말이 안 되잖은가.

“마린스키…… 극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오페라, 발레 극장이다.

지어진 건 무려 1860년이다. 제정 러시아의 전폭적인 후원을 입어 지어진 마린스키 극장은 역사만큼이나 화려하고 거대한 시설로 유명했다.

볼쇼이 극장과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 문화의 총화나 마찬가지인 장소다.

‘거, 거짓말이다. 말도 안 되잖아. 어째서 마린스키 극장이 아이돌 따위한테 장소를 빌려줘?’

오영석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생각 자체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조정훈의 제안을 거절했던 건 예레미아 아트 극장의 전통과 위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레미아 극장보다 전통과 위상이 수백 배는 더 큰 마린스키 극장이 장소를 빌려준다면…….

“마, 마린스키, 마린스키가 확실합니까?”

[네네, 확실해요. 마, 린, 스, 키, 극, 장, 이라구요. 귀가 잘 안 들리시나 보네요?]

마린스키 극장은 꿈의 무대다.

오영석도 젊었을 때는 볼쇼이나 마린스키의 스태프로 일하고 싶단 생각을 했을 정도다.

러시아 혁명으로도 쓰러지지 않았던 극장이 아닌가. 쓰러지긴커녕 공산당의 적극적인 후원까지 입어서 더욱 세를 불렸다.

스탈린은 외국의 귀빈이 올 때마다 마린스키와 볼쇼이의 ‘백조의 호수’를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는 ‘백조의 호수’를 너무나 좋아하여 죽기 전까지 수십 번이나 봤다고 한다.

[저희도 미안해서 예레미아 극장은 못 빌리겠더라구요.]

“……예?”

[전통과 역사가 가득한 극장이잖아요! 감히 어떻게 아이돌 따위가 빌리겠어요?]

“아, 아니, 아닌, 저희는…….”

[네, 아닌 게 맞아요. 어떻게 마린스키보다 역사가 깊겠어요? 반어법인데, 알아들으셨어요?]

오영석은 손혜빈의 놀림에 당황했던 것마저 잊고 발끈 화내려 했다.

하지만.

[근데 이제 역사가 깊은 극장이 될 거예요. 저희 뮤비 공개한 뒤에 비하인드로 이 이야기도 알릴 거거든요. 역사와 전통이 깊은 예레미아 극장이! 뮤비 촬영 장소를 안 빌려줘서! 예레미아 극장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을! 뮤비 촬영장으로 잡았다고요! 아주 그냥 동네방네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에 다 말하고 다닐 거야아아!]

뚝.

전화가 끊겼다.

오영석은 멍하니 있다가, 허겁지겁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미 차단당한 듯 통화가 되지 않았다.

‘망했다…….’

손혜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영석은 홍연헌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게 분명했다.

‘이, 이 이야기가 극장주 귀에 들어가면, 아니. 방금 그 여자가 했던 말이 진짜일까? 우, 우리는 극장을 안 빌려주고, 마린스키는 빌려줬단 얘기를 할까……?’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천 냥의 빚이 생길 수도 있다.

오영석은 그 말의 뜻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 * *

“손 이사님…….”

전화를 끊자 조정훈이 질렸단 듯 손혜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싱그럽게 웃었다.

“왜 거짓말하신 거예요?”

“네? 마린스키 극장 맞잖아요?”

정확히는, 마린스키 극장 극동지부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

마린스키란 이름을 달고 있는 만큼 커다란 극장이긴 하지만, 현대에 지어진 것이라 상징성은 부족하다.

“뭐, 그럼 절반쯤 거짓말로 할까요? 일단 마린스키가 맞긴 하잖아요. 자자, 뜸 들이지 말고 들어가요!”

“…….”

손혜빈과 조정훈은 극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무대로 들어갔다.

내부를 본 조정훈은 허허 웃었다.

“현대적, 이네요…….”

그가 바랐던 고풍스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전통적인 느낌이라도 나길 바랐건만, 무대는 너무나 웅장하고 너무나 현대적이다.

“의자는 어떻게든 천으로 덧씌운다 해도 벽이 문제네요. 현대적인 느낌이 너무 많이 나서…….”

조정훈은 무대 곳곳의 사진을 찍었다.

이런 내부로는 러시아 혁명의 분위기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뮤비 촬영 때 빌릴 수 있는 날은 고작 하루뿐이니, 그 사이에 이 넓은 곳을 전체적으로 세팅할 수도 없다.

“관객석은 4층까지 있고. 으음…….”

조정훈의 머릿속에서 대충 견적이 나왔다.

‘뭐, 이럴 줄 알았어. 다른 극장을 빌렸더라도 조치가 필요했겠지.’

좋아, 결정했다.

벽면을 전부 CG로 찍자! 전부 다 노가다로! 인력과 돈의 힘을 빌려서!

“손 이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뭐예요?”

“돈!”

“얼마나요?”

금액을 들은 손혜빈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쳤다.

“블린(러시아 욕설의 순화어, 식빵, 신발, 슈발)……!”

뭐, 어쩌겠는가.

원래 뮤비란 돈을 갈아 넣어서 만드는 것.

그게 아이돌의 숙명……!

* * *

“건배!”

성필과 손혜빈은 회사 건물 바로 앞의 테라스에서 소소한 축배를 들었다.

술이 아니라 건강즙으로.

“누나 대단하다. 결국 촬영장을 잡았네.”

“이 정도는 돼야 이사지.”

조정훈 감독이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모든 극장에게 거절당했단 이야기를 들은 손혜빈이 화가 나서 직접 일을 진행했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발레의 종주국이라는 러시아의 극장을 빌리지 않았던가.

“연봉 인상 인정?”

“인정.”

손혜빈은 며칠 동안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뮤비 촬영에 알맞은 러시아의 극장이란 극장에는 전부 연락을 돌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며칠 동안 러시아에 머무르기까지 하며 섭외에 열을 쏟았다.

그 노력의 결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마린스키 극장을 빌릴 수 있었다.

그녀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잠깐만.”

“왜?”

성필은 갑자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손혜빈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고리가 존재한다.

“누나, 러시아 초청장 북한으로 나왔었다면서? 새로 발급받은 거야?”

손혜빈이 정곡을 찔렸단 듯 일순 표정이 굳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에도 변화가 생겼다.

매일 12시에 울리는 괘종시계를 바라보다가, 12시가 되었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한 사람과 같이.

두 사람 사이에는 위화감과 어색함이 나타났다. 하지만 곧 성필은 해답을 찾아냈다.

“아, 러시아는 며칠 여행 가는 정도면 초청장 필요 없는 거야?”

“그거 거짓말이었어. 초청장 국적이 북한으로 나왔다는 거.”

“……거짓말?”

손혜빈이 허허 웃으면서 건강즙을 원샷했다.

“대한민국으로 떡하니 나왔어. 상식적으로 북한이랑 우리나라를 헷갈리겠냐?”

“뭔…… 왜 거짓말을…….”

어째서 손혜빈이 거짓말을 한 거지?

갑자기 공항에 가니 타국에서 사는 게 두려워졌나? 그래서 가로 엔터에 들어온 것일까?

성필은 그녀가 얼른 대답을 해주길 바랐다.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겠냐.”

손혜빈이 배시시 웃었다.

“너랑 같이 일하고 싶어서지.”

성필의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이게 작업 멘트……?

당장 손혜빈이 고백해온다면, 성필이 엉겁결에 받아줄 정도로 감동적인 말이었다.

손혜빈은 러시아에서 무용을 배우는 게 꿈이었다. 뮤지션으로 살아오면서 항상 가져왔던 꿈.

그것을 포기하고 성필을 위해 한국에 남았으니,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새끼, 또 울려고 하네.”

손혜빈도 성필의 기색을 읽곤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찔러왔다.

“누나, 반지 어디 숨겼어? 나한테 프러포즈하려는 거지?”

“반지 없는데, 그래도 받아줄 거야?”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어디서 하지?”

“‘착한 고양이’ 어때?”

“그딴 데서 스드메 할 거면 결혼 안 하고 말지?!”

‘착한 고양이’는 잡다한 액세서리와 의류를 파는 체인점이다.

가성비가 좋아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곳에서 스드메를 맞춘다면, 손혜빈은 20대 초반의 새내기 대학생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너 ‘착한 고양이’ 무시해?”

“아, 아니, 무시하는 건 아닌데…….”

성필을 진득이 놀리던 손혜빈은 회사에서 나오는 백설하를 보더니 헐레벌떡 달려갔다.

“설하야앙!”

“흐익?!”

“어디 가? 놀러 가? 언니랑 같이 갈래?”

“기, 기타 배우러 가요…….”

“와아, 설하 찐뮤지션 같다.”

“진짜 뮤지션 맞는데요?!”

손혜빈은 아까보다 텐션이 두 배는 올라갔다. 그녀는 백설하에게로 도망가 장난을 치며 괜히 부끄러움을 숨기고 있었다.

성필은 그런 손혜빈을 따스하게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그녀에겐 직접 하기 힘든 창피한 말을 전했다.

‘누나, 고마워.’

성필은 손혜빈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손혜빈이 가로 엔터로 들어온 건 러시아로 가지 못했기 때문일 뿐, 그녀의 진짜 꿈은 무용에 있다고 믿어왔다.

언젠가 손혜빈이 떠나가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누나는 나랑 일하려고 한국에 남은 거야.’

성필의 꿈, 소녀연맹의 성공을 위해서.

손혜빈은 자신의 인생을 성필에게 걸어준 것이다.

‘더 열심히 하자.’

손혜빈의 기대에도 보답할 수 있도록.

성필은 건강즙을 마저 비웠다.

“……이건 마셔도 마셔도 맛이 익숙해지지를 않네.”

성필은 쓴맛을 음미하며, 동시에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입이 써서 그런지 감동이 더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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