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10화 (210/760)

210화

“홍연헌이시면…….”

“음?”

홍연헌이 조심스레 다가오는 성필을 눈에 담았다. 그녀의 눈이 밝게 빛났다.

“우와, 배우세요?”

“네……?”

“막 그렇게 생기셨는데? 음, 그거,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서브 조연……. 평범하게 자기 일 하면서도 여주인공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막 그런 느낌!”

칭찬하는 건가?

아니면 사람을 멕이는 건가?

살면서 배우 같단 말은 처음 들어봤다.

“앗, 맞아요! 이사님은 일에 진심이고 부하들한테도 싸늘하고 집에 있는 가구는 전부 모던한 검은색일 거 같아요!”

“뭐라는 거니? 한국어 맞아?”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리카가 쭈그러들었다.

일반적인 사람이 상대라면 리카는 붙임성 있게 달라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연헌에게는 쉽게 대하기 힘든 아우라 같은 게 있었다. 장난을 걸었다가는 당장이라도 뼈와 살이 분리될 듯하다.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저, 그.”

성필이 다급히 명함을 꺼냈다.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라고 합니다.”

“와아, 이사셨구나. 제대로 일하시죠?”

“네?”

“그런…… 규헌이한테 공적인 업무 외의 일로 이사 자리에 앉아 계신다던가?”

“…….”

“아하핰! 장난친 건데 너무 정색하신다! 친해지고 싶어서 농담 좀 해본 거예요. 이제 호감도 좀 올라가셨나?”

어이가 없는 성격이지만, 성필은 홍연헌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허허 웃었다.

홍연헌은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지 헤헤 웃으면서 명함을 꺼내 주었다.

“저는 이런 사람. 잘 부탁드려요.”

“네, 그러니까, ‘시지프’의…….”

시지프?

“시, 시지프 사장님이세요?”

“네, 맞아요. 시지프의 사장 홍연헌입니다!”

공연 기획사 시지프.

거대 문화 그룹 H&P의 콘서트 사업부가 독립하여 세워진 회사다.

H&P가 왜 굳이 사업부를 독립시켰는지 여러 구설수가 돌았었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시지프에 H&P 일가의 인물이 들어서고는 세간의 흥미도 식어갔었다.

‘홍 회장이 자식에게 자산을 물려주는 거였으니까. 신기할 일도 아니지.’

그런데 그때 시지프의 정상에 앉혀진 사람이 성필의 눈앞에 있다.

‘아니 잠깐만.’

홍연헌? 아마 홍규헌의 언니겠지.

그리고 홍연헌이 시지프의 사장이라면, 홍규헌도 H&P 가문의 사람이란 게 된다.

성필의 등줄기로 냉기가 쭉 훑고 지나갔다.

‘사, 사장님 재벌가야?’

부자란 건 알고 있었지만, H&P 회장의 딸이라면 성필과 아예 사는 공간이 다르지 않은가.

재벌이다, 무려 재벌인 것이다!

현대판 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아가씨?”

뒤에서 들리는 한구인의 목소리에, 성필은 황급히 그를 보았다.

그가 갑자기 나타났단 것보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더 놀라웠다.

현실에서 저런 호칭이 쓰이는 건 처음 들었다.

“오, 구인이 안녕.”

“오셨으면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오늘 온다고 했잖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셨으면…….”

“서프라이즈라도 해주려고 했어? 됐어! 동생 보러 오는데 무슨 서프라이즈야.”

할 생각도 없었다.

“모시겠습니다.”

“아냐. 여기 좀 있다가 갈게. 으음, 동생이 어떤 애들이랑 같이 사업하나 보고 싶기도 하고. 네가 리카지?”

“하이(네)…….”

“왜 이렇게 굳어 있어? 긴장 풀어도 돼! 언니 나쁜 사람 아니야!”

홍연헌의 거대한 손이 마치 사과를 쥐듯 리카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정말 그녀가 힘을 주면 자신의 머리가 부서질 듯했기에, 리카는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다스케테구다사이(도와주세요)…….”

성필도 리카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홍연헌이 리카를 놓아주지 않았기에 도와줄 방법도 없었다.

1층 입구 옆의 휴게 공간이 소란스럽자, 여기저기서 무슨 일인가 보러 온 직원들이 늘어났다.

특히 점심 휴식을 즐기고 있던 소녀연맹 멤버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홍연헌은 한 명씩 나타나는 소녀연맹 멤버들을 눈에 담았다.

“다 예쁘다. 아, 화장 좀 더 빡세게 하고 올 걸 그랬어. 그렇죠?”

왜 성필을 보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

“아뇨!”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도리질을 쳤다.

“지금도 아름다우십니다!”

무려 H&P 문화 그룹을 다스리는 일가의 인물이다. 심기를 거슬렀다간 콘크리트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언니?”

2층 난간으로, 드디어 홍규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도저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홍연헌은 기쁘게 손을 흔들면서 동생에게 인사했다.

“규헌아아! 오랜만이야!”

“……바로 오지.”

“왜. 내가 네 사람들이랑 얘기하니까 기분이 안 좋아? 알았어 알았어, 빨리 올라갈게.”

홍연헌은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어깨에 메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제야 리카도 홍연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성필은 자연스럽게 홍연헌의 뒤를 따랐다.

‘또 홍지헌 사장님이 오셨을 때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

홍연헌이 이곳에 온 이유를 들어야 한다. 이왕이면 같은 자리에서 말이다.

“박 이사님.”

그때 한구인이 성필의 걸음을 막았다.

“홍연헌 아가씨는 순수하게 사장님을 보기 위해 온 겁니다.”

“아, 그런가요?”

“맞아요! 동생 보러 온 거예요!”

어느새 2층까지 올라간 홍연헌이 1층을 향해 소리쳤다.

저 멀리서도 성필과 한구인의 대화를 들은 것이다. 두 사람이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는데도 말이다.

청력이 일반적인 인간 수준이 아니다.

“규헌아, 가자.”

“…….”

홍연헌은 홍규헌에게 팔짱을 끼고 사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한 이사님 잠시 시간 있으세요?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마침 저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필과 한구인은 묘하게 급하게 걸으며 휴게실 안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성필이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댔다.

“사장님이 재벌가였어요? H&P?”

“그렇습니다.”

“왜 안 가르쳐 주셨어요.”

“굳이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없다.

홍규헌이 재벌가든 아니든, 가로 엔터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H&P의 힘을 빌린다면 회사 사정이 훨씬 더 좋아지겠지만.’

홍규헌이 아직 별다른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도 사정이 있는 듯했다.

옛날이 홍지헌이 했던 말로 유추하건대, 홍규헌이 받은 지원이라고는 금전적인 부분이 다였을 것이다.

“홍규헌 사장님의 집안이…… 중요하십니까?”

한구인이 불안함을 담아 물어왔다.

그는 현재의 관계가 깨지거나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혹시나 성필이 홍규헌의 배경을 보고 지레 겁을 먹어서, 훗날 큰 결정을 할 때도 괜히 사릴까 불안한 것이다.

“아니요. 사장님은 사장님이잖아요.”

“……굳이 말할 필요가 있냐고 말은 했습니다만, 어쩐지 숨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

한구인이 말한 대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일이다.

“한 이사님이 하신단 말씀은 뭐예요?”

“홍연헌 아가씨께서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알고 계세요?”

“모릅니다. 하지만, 홍지헌 형님과 같은 일이 없으리라곤 할 수 없습니다.”

“아까는 순수하게 사장님 만나러 오셨다고 했잖아요.”

“‘순수하게 만나러 왔다’고 한 건 괜히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가씨를 보며 수군대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상처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상처받나요? 그렇게 보이시진 않는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홍규헌이 기획사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녀를 지지했던 건 홍지헌뿐이었다.

그런 그마저도 홍규헌은 온전히 믿지 못하고 가로 엔터를 삼키려 하지 않았던가.

‘가족 사이의 정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한 처사이긴 했어.’

홍지헌이 벌이려던 일은 정상인의 생각을 벗어나 있었다.

동생을 돕기 위해 동생이 손에 쥔 것을 빼앗는다니. 그러고도 홍규헌이 만족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두 분의 대화가 끝나면 저희가 바로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리카 귀여워어어!”

“다스케테(도와줘)!”

리카가 홍연헌에게 잡혀서 어떤 짓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 이사님.”

“예.”

둘은 밖으로 나갔다.

리카를 구해주러 간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휴게실을 나왔을 땐, 홍연헌에게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리카만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홍연헌은 이미 회사를 나갔다.

“이사님, 저, 망가졌어요…….”

“안됐네.”

“뭔가요 그 관심 없단 태도는?!”

리카를 놔둔 채, 성필과 한구인은 조바심까지 드러내며 사장실로 향했다.

‘또 홍지헌 사장님이 오셨을 때 같은 일이 생겼을 수도 있어.’

홍규헌도 오빠가 저지르려던 일 때문에 경계심이 생겼겠지만, 같은 일이 두 번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한구인은 사장실 문을 규칙적으로 노크했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어, 어, 들어와.”

문을 열자 어째선지 뺨이 달아오른 홍규헌이 보였다.

성필과 한구인은 근엄한 얼굴로 홍규헌의 앞에 섰다. 평소와 다른 두 사람의 기세에 홍규헌은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왜 그래?”

“홍연헌 사장님이 어떤 제안을 했나요? 홍지헌 사장님 때 같은 거?”

“아냐. 얘기만 했어.”

“사장님.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홍규헌의 상기된 얼굴이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분명 어떤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성필과 한구인에게도 공유하지 못할 것이니, 심각한 사안이 틀림없다.

“저희한테 말해주세요. 사장님 혼자 속에 묵혀두고 끙끙 앓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아니…….”

“사장님, 어떤 위기가 와도 저는 사장님의 편입니다. ……음, 박 이사님도 그럴 겁니다.”

“‘그럴 겁니다’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거든요? 왜 고민하세요.”

“아니, 정말 아무런…….”

“아, 박 이사님도 그렇답니다. 사장님, 저희를 의지해주십시오.”

“별로 큰일 없…….”

“작은 일은 있단 거잖아요! 빨리 말씀해주세……!”

“칭찬받았어!”

홍규헌은 얼굴이 붉어져선 크게 소리쳤다.

성필은 한동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칭찬, 받았다고…….”

내막은 이러했다.

홍연헌은 가로 엔터의 매출을 확인하곤, 순수하게 소중한 여동생을 칭찬해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홍연헌은 달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홍규헌은 기획사를 차린다고 했을 때 뜯어말린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뜯어말리면서 여러 험담을 늘어놓기까지 했었다.

“매출을…… 홍연헌 사장님이 저희 매출을 어떻게 아셨는데요?”

“투자사에서 받았대.”

BG인베스트먼트는 가로 엔터에 수십억을 투자했었다.

그들은 가로 엔터의 주주이기에 재무 자료도 분기마다 받는데, 그것을 홍연헌에게 제공한 것이다.

“연헌 언니는 BG인베스트먼트에 돈도 넣고 있거든. 투자 상품 찾는다면서 달라고 했대.”

“……그래서, 옛날에 욕했던 언니가 칭찬해줘서 기뻐하고 계셨단 거네요? 얼굴도 막 붉어져서.”

“안 그랬어!”

라고 외치는 홍규헌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리 소리친 후, 소심하게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까지 했다.

“조금, 그냥, 그랬던 거야…….”

뭐가 그랬단 건지, 주어랑 동사가 전부 없다.

하지만 홍규헌이 기뻐한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귀여우시네. 사장님도 이런 면이 있구나.’

* * *

백설하가 연습실을 나서자 로드매니저인 김수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쌤, 열심히 배워 오세요!”

“응, 열심히 배울게.”

리카의 배웅을 받으며 백설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설하 기타 배우러 가?”

1층에는 어딘가 가려는 듯한 성필과 손혜빈이 있었다.

“네.”

“수희 씨. 가는 길이니까 저희가 설하 태워줄게요.”

“아, 아니요. 제가 하겠…….”

“기름값 아껴야 하잖아요.”

“아…….”

김수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다시 매니저 대기실로 향했다.

“야호, 설하랑 같이 차 탄다!”

손혜빈이 자연스럽게 백설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린 시절의 우상이던 손혜빈이 어깨동무를 해주다니, 감격할 만한 일이다.

만약 팬미팅 다음 날 깨어났을 때, 손혜빈이 백설하의 셔츠 안에 손만 안 넣고 있었다면…….

‘순수하게 손 이사님이랑 친해진 걸 기뻐할 텐데…….’

말하진 못했어도, 무서웠다.

아직도 조금 무섭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성필의 차로 향했다. 그런데 차 앞에서 백설하와 손혜빈의 동선이 겹쳤다.

둘 다 조수석 문 앞에 선 것이다.

“아.”

백설하가 재빨리 비키려 하자, 그 짧은 순간 장난을 생각해낸 손혜빈이 씨익 웃었다.

“어머 뭐야, 설하 성필이 옆에 타고 싶어?”

“네?!”

“내가 들어가려는데 길을 막네. 그렇게 성필이가 좋아?”

“비, 비켰는데에……!”

“아냐 아냐. 내가 뒤에 탈게. 설하가 성필이 옆에 타. 안 그래도 요즘 성필이랑 있을 시간 없잖아. 내가 양보해야지, 안 그래?”

백설하는 너무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서 입만 뻐끔댔다.

“뭐해? 안 타고?”

손혜빈은 이미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곤 계속 백설하를 놀려댔다.

“누나 설하 좀 그만 괴롭혀.”

“귀엽잖아. 이런 아저씨랑 엮었다고 얼굴 다 빨개졌어.”

“…….”

성필은 ‘아저씨’라는 말에 상처받았다.

조아라한테 아저씨라고 불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러고 보니 하양이도 나한테 아저씨라고 했었지.’

신아름이 처음 가로 엔터로 들어왔을 때, 그녀의 집으로 가면서 들었던 이야기다.

신아름이 ‘왜 아라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 가만히 두면서 제가 팀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안 돼요?’라고 묻자, 장하양이 ‘박 이사님은 아저씨가 맞잖아’라고 했다던가.

“…….”

“성필아 출발 안 해?”

“어? 어, 해야지.”

성필은 괜히 다운된 기분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가면서도 백설하는 분이 안 풀렸는지, 계속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하지 않아서 더더욱 외로웠다.

떠드는 건 뒷자리에서 백설하를 놀리는 손혜빈밖에 없었다.

목적지까지 절반쯤 남았을 무렵, 참다못한 백설하가 반항을 시도했다.

“그, 그만하세요……. 이, 이사님한테도, 그게, 실례잖아요…….”

“뭐가 실례야. 성필이는 기뻐해야지.”

백설하는 눈을 질끈 감고 화를 삭이는 듯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럴수록 손혜빈은 더욱 신이 났다. 역으로, 백설하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더해갈 때마다 성필은 실시간으로 상처가 늘어갔다.

이 끔찍한 사이클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설하야 강의 잘 받아!”

백설하는 손혜빈에게 대답도 없이 후다닥 지하의 합주실로 들어갔다.

“설하 진짜 화났나? 하긴, 너랑 자꾸 엮으니까 화날 만도 하겠지. 상대가 이사라 말도 못 하고.”

“그걸 아는데 왜 자꾸 해…….”

그 때문에 성필도 상처를 받아버렸다.

손혜빈은 백설하가 탔던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 아직 따뜻하다.”

“누나 변태 같아.”

“뭐가? 사실이잖아. 근데 좌석 서열 네가 가르쳐줬어? 설하가 고민도 없이 조수석에 가던데.”

“그거 상식 아니야?”

“모르는 애들 많아. 그럼 혹시 테이블 자리 서열도 가르쳐줬어?”

“문에서 멀수록 상석인 거? 알려주긴 했는데…….”

“으윽, 꼰대.”

“꼰대가 아니라 예절이거든? 설하가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대뜸 상석에 앉아 봐. 나중에 문제 될 수도 있잖아.”

“웨엑, 꼰대.”

“…….”

둘은 조정훈 감독의 회사로 향했다.

조정훈은 반갑게 둘을 맞아주었다. 이미 그는 가로 엔터의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테이블 가득 채운 고급 다과가 그것을 증명했다.

“이번에 런던 쪽으로 뮤비 촬영 갔었거든요. 그때 사 왔어요. 유서 깊은 베이커리 거래요.”

“소녀연맹 말고 다른 뮤비를 맡으셨어요?”

“아, 그렇죠. 뮤비는 저희 주요 밥줄이니까요. 소녀연맹 덕분…….”

“배신이얏!”

“…….”

정다운 대화를 마치고, 언제 장난을 쳤냐는 듯 세 사람의 표정에 진지함이 감돌았다.

“비주얼적으로 고려해야 할 게 많아요. 세트의 장식하며 분위기라던가.”

아직 가로 엔터에는 비주얼 팀이 없기에, 손혜빈이 비주얼 파트를 전적으로 맡고 있다.

스타일링의 대부분을 그녀가 책임진다.

뮤비의 컨셉도 비주얼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결국 ‘아티스트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논의의 주역은 손혜빈이었다.

“발레 극장을 섭외해야겠네요. 옛날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걸 세트로 구현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조아라의 아이디어 덕분에 ‘아라베스크’의 뮤비 비주얼과 서사는 옛날 옛적에 결정됐다.

러시아 혁명에서 약자로 몰렸던 발레단이 혁명가라고 칭하는 이들에게서 끝까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사투하는 게 큰 뼈대다.

혁명은 선한 의도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필연적으로 생긴다.

소녀연맹은 그 피해자를 구하는 것이다.

그로써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 그리고 ‘문화는 죽지 않는다’는 키워드를 재현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제정 러시아 분위기를 내야 하거든요. 뮤비 시점이랑 맞춰야 하잖아요. 과하게 현대적인 분위기는 지양해야 해요.”

“한국에 그런 곳이…….”

셋은 실시간으로 레퍼런스를 모으면서 회의를 진행했다.

다행히 뮤비 촬영장으로 삼을 만한 곳이 몇 군데 나왔다.

“서울에도 발레단이 공연하는 예술극장이나 국립극장이 있네요. 휴관일에 섭외 요청을 하면 받아줄 거 같아요.”

대중음악을 제외한 한국의 공연 업계 규모는 1조를 넘기지 못한다.

예술 중에서도 작은 시장에 속하는 것이다.

“극장 홍보도 될 테니까요.”

한국 대중음악의 기수나 마찬가지인 아이돌이 정당한 대가와 함께 섭외를 요청하면, 극장 홍보를 위해서라도 대부분은 받아줄 게 틀림없다.

“일단 제가 극장 쪽은 미리 섭외를 받아둘게요. 뮤비 컨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예,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성필과 손혜빈은 건물을 나왔다.

손혜빈은 몇 시간이 걸린 회의를 마치자 개운히 기지개를 켰다.

“으아, 진짜 힘들었다.”

“그래도 뮤비 진행은 빨리 될 거 같아.”

“응. 아라가 뮤비 아이디어를 빨리 준 덕이지. 애들이 ‘아라베스크’ 안무만 완전히 숙달하면 바로 뮤비 찍으러 가자. 진짜 끝이 다가왔단 느낌이 들어.”

어쩌면 컴백까지 여유가 꽤 생길 수도 있다.

“이래서 너무 유능하면 곤란하다니까. 좀 쉬엄쉬엄해야 하는데.”

“응.”

“……반응 왤캐 차가워? 내가 안 유능하다는 거야? 그런 의미야?”

“응.”

“허, 이게 나이 좀 먹었다고 목 빳빳하게 세우네?”

“응.”

손혜빈이 장난스럽게 성필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둘은 앨범 작업이 빨리 끝날 수 있단 기대감 때문에 평소보다 기분이 몇 배는 좋았다.

성필도 드물게 손혜빈의 장난을 기쁘게 받아주었다.

둘은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회사로 돌아갔다.

* * *

[촬영장으로 괜찮겠다고 생각한 곳을 다 다녀봤거든요. 극장들요. 근데…….]

조정훈이 전한 소식은 손혜빈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 안 된대요?”

[진짜로, 제가 웬만한 데는 전부 연락했거든요? 규모 있는 발레 공연이 펼쳐지는 곳들이요. 근데 전부 다 안 된다고 해서요…….]

한국에서, 소녀연맹의 뮤비 촬영장으로 쓸 수 있는 극장은 한 곳도 없다.

“왜요? 이유는 뭔데요?”

[그, 그게…….]

“말해봐요. 뜸 들이지 마시고요. 괜찮아요.”

[…….]

이야기를 들은 손혜빈은 부서질 듯 강하게 핸드폰을 쥐었다.

핸드폰 케이스가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아아, 이제 알겠네. 아이돌 따위한테 고귀하신 발레 극장을 빌려줄 수가 없다? 굳이 써야겠다면 좌석표를 전부 다 사고 무대 대관비에 관리비까지 지급해라? 그런 의미네요?”

[그렇게 강하게 말하지는…….]

“그거랑 똑같은 말이잖아요.”

극장이 돌아가지 않는 휴관일조차 대여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조정훈은 정말로 노력했다. 발품을 팔아 극장 소유자나 감독을 찾아가 사정해보아도, 돌아온 대답이라고는 전부 다 거절뿐이었다.

그래, 인정해야 한다.

손혜빈의 말이 맞다.

3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발레라는 예술. 그것이 펼쳐지는 고풍스러운 극장을, 감히 아이돌 따위에게 빌려줄 수 없단 말이나 마찬가지다.

[저, 그래서 죄송하지만, 세트장을 짓거나 CG로 때워야 할 거 같아요. CG로 때우더라도 최소한의 세트는 필요하고요. 돈이 좀 많이…….]

세트를 세우는 데만 해도 몇억이 들어갈 게 확실하다.

거기에다가 뮤비에 쓰일 배우나 스태프의 인건비, 의상비 등을 고려하면 몇억이 무엇인가. 아예 0의 자리가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촉박하다.

지금까지 짰던 계획은 모두 극장을 빌릴 수 있단 전제하에 돌아갔었으니까.

[아니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조정훈이 미안하단 기색을 풀풀 풍겼다.

[아예 뮤비 컨셉을 바꾸는 건…….]

‘아라베스크’ 뮤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발레 극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극장을 구할 길이 요원해졌다.

지금부터 세트장을 짓는다더라도, 과연 만족스러운 퀄리티로 제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가로 엔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혀버렸다.

[사실 발레 말고도 ‘문화’란 키워드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많…….]

“안 돼요.”

이 아이디어는 조아라의 것이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조아라(손혜빈의 생각)가 용기를 내어 말해준 의견이다.

세상에, 항상 세계관을 오글거려 하던 조아라가 이런 아이디어를 내다니?

창피해하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하던 조아라가, 손혜빈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부끄럼을 많이 타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라가 내준 아이디어야.’

그것을 돈과 시간이란 이유로 뭉개고 싶진 않다.

‘벌써 포기할 마음은 없어. 최선을 다한다.’

“저희 쪽에서도 알아볼게요.”

손혜빈은 전화를 끊은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분노의 열기가 눈꺼풀을 뚫고 나올 듯했다.

화가 나지만, 화를 내는 건 나중이다. 손혜빈은 먼저 성필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럼 어떡하지?”

성필도 조아라의 아이디어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가로 엔터가 원하는 한국의 모든 극장이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대규모 발레 공연을 할 만한 극장은 한국에서도 몇 개가 되지 않으니, 아예 발품을 팔면서 무릎이라도 꿇고 다닐까?

성필과 손혜빈은 침묵 속에서 수십 분을 보냈다. 저마다 뮤비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다가, 성필이 한숨을 쉬며 어렵사리 말했다.

“누나, 그냥 세트장을 만들자. 지금부터 시작하면 때맞춰 완성할 수는 있을 거야.”

대극장 규모의 세트장이니 분명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조정훈 감독의 노하우를 믿는 수밖에 없다.

“빨리 결정해야 해. 지금 바로 임원 회의로 의제 올리고…….”

“아니야.”

손혜빈은 이제야 결심이 선 듯 성필의 말을 끊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검색하기 시작했다.

“누나 뭐 해?”

대답은 없었다.

곧 손혜빈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낸 뒤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

“즈드라스트부이쩨(안녕하세요).”

손혜빈이 러시아어로 말했다.

“누나……?”

성필이 놀라서 부르자, 손혜빈은 그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누, 누나, 어디에 전화 건 거야?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볼쇼이.”

“……뭐?”

“볼쇼이 극장.”

손혜빈은 발레의 본고장, 러시아로 연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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