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뭐야.”
충격받은 건 신아름만이 아니었다.
“다들 바로 찬성해요……?”
조아라도 어안이 벙벙했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안무를 힘에 부쳐 한단 건 알았지만, 조아라로부터 수정 제안이 나오자마자 전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이다니.
“힘들면, 말을 하지…….”
다들 하하 웃기만 했다.
진짜 말했으면 조아라와의 전투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아름이는 어때?”
신아름은 장하양에게 맞은 부위를 거칠게 문지르며 답했다.
“물어서 뭐 해요. 오늘 조아라 돌아오면 바로 말하려고 했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두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힘겨워했었다.
그러니 조아라가 먼저 말을 꺼내준 게 고맙기만 했다.
조아라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던 건, 조아라를 믿고 존중한다는 표시였으니까.
이토록 믿음을 주는 동료들을.
‘나는, 이용하려고 한 거야…….’
조아라는 멤버들의 믿음을 무기처럼 휘둘러왔다.
* * *
어릴 적, 조아라는 잘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공부는 물론 부모님이 보내준 미술과 음악 학원에서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능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던 도중 친구를 따라 댄스 학원에 가게 된 것이다.
“와, 아라 너 잘한다.”
댄스 학원의 선생이 칭찬해주었다.
코 묻은 돈을 계속 쥐고 있기 위해 하는 가벼운 칭찬이 아니었다.
조아라에게는 정말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을 계속해서 갈고 닦으니 또래 중에선 따라잡는 이가 없다시피 했다.
“춤 그거 언제까지 출래?”
하지만 조아라의 부모님에게는 그 빛나는 재능이 고깝기만 했다.
조아라는 고등학생이 되었음에도 공부는 뒷전에다가 매일 춤이나 추러 다녔다.
부모님이 학원비를 끊어도, 조아라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계속해서 학원에 다녔다.
“네 맘대로 해.”
결국 부모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조아라가 듣고픈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네 맘대로 해’가 아니라, ‘네가 하고픈 걸 해’란 말이 듣고 싶었다.
인정받길 바랐던 것이다.
“아라야, 이번에 우리 크루 공연하는 데 올래?”
학원과 연이 닿은 댄서들로부터, 조아라는 인정을 받아왔다.
그럴수록 조아라는 연습에 몰두했다.
파편처럼 쏟아지는 인정과 관심은 어린 조아라에게 너무도 달았으니까.
하지만 조아라의 모든 열망을 채우지는 못했다.
“아라야, 아이돌 음방 백업 댄서 자리 하나 비었는데 대타 좀 뛰어주라.”
쉽게 받을 수 없는 제안이자, 조아라를 신뢰해서 나온 부탁이다.
이런 부탁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 조아라라는 존재를 인정해주기에 부탁해오는 것이었으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나라서 오는 제안이 아니야.’
굳이 조아라일 필요는 없는 일들이다.
조아라와 비슷한 실력만 있으면 되니까.
춤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꼭 조아라가 필요한 자리란 건 없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위치라는 건, 사실상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서밖에 없다.
하지만 조아라는 가족 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그에 대한 갈망이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아라야, 가로 엔터라고 있는데…….”
하지만 어느 날, 조아라는 가로 엔터와 만나게 됐다.
“조아라, 다시 한번 생각해주면 안 돼? 뭐 불편한 거라도 있었어?”
단기 트레이닝 기간을 마치고 ‘안 한다’고 했던 조아라에게, 성필은 어린아이처럼 달라붙어 애원했었다.
한구인은 어찌나 슬퍼하는지,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도망가기까지 했었다.
리카도 그러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단 말야!”
그건 반드시 조아라여야 하는 제안이었다.
조아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터다.
그런 생각은 소녀연맹이 만들어지고 확고하게 굳어졌다. 조아라가 빠진 소녀연맹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더 빛나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근데 아저씨, ‘우리 아라’라고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잖아.”
“나한테 유독 자주 쓰잖아요.”
성필은 조아라를 향한 태도가 특이했다.
동생 라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녀들과 비교해서도, 조아라를 대하는 낌새는 달랐다.
그래, 어떤 벽이 있는 듯했다.
‘나랑만 거리를 벌리잖아.’
그러다가 조아라가 장난스레 서운한 티를 내면, 그제야 실수했다는 듯 부끄러운 말들을 잔뜩 쏟아낸다.
‘우리 아라’라는 말도 벌어진 판자를 메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쏟아넣는 접착제와 같은 것일 게 분명했다.
들을 때야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 성필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어쩌면…….’
귀찮은 게 아닐까.
그다지 신경을 쏟고 싶지 않은 멤버라서.
키도 가장 작고, 얼굴도 아이돌 중에선 평범한 축이고, 특기도 춤뿐이다.
“걸그룹한테 춤은 뭐랄까,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야.”
옛날에 백민정이 그렇게 말했었다.
걸그룹의 팬들은 보이그룹의 팬들처럼 퍼포먼스를 아주 작은 단위까지 뜯어보진 않는다고 말이다.
걸그룹 팬들이 바라는 건 매력이지 퍼포먼스의 완성도가 아니라고 말했었다.
“차별…… 이라고 하면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네. 그냥 현상?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암튼, 그래서 가장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춤이지. 잘하면 좋지만, 좋은 거 이상은 없어. 반면 노래는 좋으면 빵 뜨잖아? 노래는 잘하면 할수록 계속 좋아져.”
그럼 조아라는 소녀연맹에서 뭐가 되는 거지?
춤을 가장 쉽게 포기할 수 있다면, 조아라도 가장 쉽게 포기될 수 있는 멤버인가?
불안하다.
백민정의 그 말이, 성필의 태도와 겹쳐져서 불안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 안무로 계속 갈 거예요.”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고집했다.
춤은 조아라의 유일한 특기이자, 다른 멤버들보다 유일하게 나은 것이니까.
춤으로 돋보이고 싶었다.
춤으로써 자리를 찾고 싶었다.
다들,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나를 믿어줘. 인정해줘.’
그런 기대를 담아서 연습을 강행했다.
당연히 멤버들은 잘 따라오지 못했다. 그 광경을 불안하게 바라보면서도, 조아라는 기대했다.
성필이 끝까지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지켜주리라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아라 자신이 그의 믿음을 얻고 있단 증명이 되니까.
하지만.
“아라야, ‘아라베스크’는 수정해야 해.”
그로써 결판이 났다.
조아라의 짐작들이 맞았다.
성필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그녀를 하찮게 보고 있던 것이다.
다른 멤버들과 다른 온도 차의 이유가 밝혀졌다. 화가 났다. 그래서 멤버들의 믿음을 분노의 무기로 휘둘렀다.
“안 바꿔요. ‘아라베스크’는 계속 이대로 가요.”
멤버들의 후광을 등에 업고, 성필에게 분노를 발산해버렸다.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리고 증명할 것이다.
‘아저씨가 틀렸다고, 증명할 거야.’
나를 봐줘.
나는 대단해.
나는 할 수 있어.
리카처럼 다재다능하진 않지만.
백설하처럼 노래를 잘 부르진 않지만.
장하양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신아름처럼 대단한 재능도 없지만.
나도 다른 멤버들처럼 빛날 수 있단 말야.
있단 말이에요…….
* * *
조아라가 자기 고백을 끝냈다.
듣는 성필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뭐, 이 정도예요.”
“……그러니까 요약하면, 관심받고 싶었던 거네?”
“그따위로밖에 요약 못 해요?! 뭔가, 좀 더, 감정적인 흐름이라던가 있잖아요!”
“음, 청소년 특유의 인정 욕구 때문에 괜히 ‘아라베스크’ 안무를 계속하자고 고집을 부렸단 거지?”
“됐다. 말을 말자.”
조아라는 툴툴대며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그녀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해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점은 조아라의 고민이 리카에게서도 발견되었단 것이다.
‘리카도 자신만의 자리를 못 찾아서 자꾸만 뭘 배우려고 했었지.’
정작 리카는 조아라를 부러워하고 있었건만, 조아라는 리카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걸 가지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럼 그 열등감을 이겨내고…….”
“열등감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뭐 이상한 사람 같잖아요.”
“아니면 이젠 내 칭찬에 구애받지 않게 된 거야?”
“……하아.”
조아라는 불량한 태도로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네, 그래요. 아저씨한테 칭찬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뭐? 어차피 안 해줄 건데.”
“…….”
“뭐요. 발 내리라고? 내가 왜요?”
“아니, 한 이사님도 있잖아.”
“이거 한의사님한테도 말했어요.”
한구인은 칭찬 자판기였다.
조아라가 고민을 말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아는 온갖 문학적 수사를 사용하여 조아라의 용기를 북돋아 줬었다.
“뭐라고 하나, 좀, 한의사님은 나를 진짜 유치원생처럼 생각한다고 해야 하나. 엄마처럼…….”
인정과 위로를 받긴 했는데, 조금 기분이 묘했었다.
“뭐 아무튼, 마음은 갑자기 왜 바꾼 거야? 민시화 선생님 때문에?”
“마음 안 바꿨어요.”
“어?”
“‘아라베스크’ 안무를 바꾸자고 한 건, 음, 그냥 계기가 필요했던 거예요.”
물론 민시화의 독설은 조아라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그녀의 춤을 본 적도 없지만, 무심코 그녀를 동경해버릴 정도였다.
‘테크닉에만 집중하면 춤이 서커스와 뭐가 다르냐’라니.
조아라의 편견을 단박에 깨부수는 말이었다. 민시화의 일침에는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아라의 말마따나 그녀는 단지 방아쇠가 필요했었다.
“내 실수를 인정할 계기요. 아저씨 말이 맞아요. ‘아라베스크’는 난이도가 높고 너무 댄스에 치중했잖아요. 보컬을 포기하면 몰라도, 저희가 숙달할 수는 없죠.”
“그렇지.”
“……그래도 우리가 실력 쌓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거든요?”
1, 2년 정도는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계기가 필요했단 건 알겠는데, 네 마음이 안 바뀌었단 건 무슨 뜻이야?”
“아저씨가 편애한다는 거요.”
“야, 아니라니까. 내가 왜 그래.”
“나 안은 걸로 증명 끝났어요.”
“……그게 왜?”
포옹은 오히려 친근함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닌가?
“너 미국에서 미아 됐을 때도…….”
“그거는 예외죠! 내가 심적으로 미약했을 때를 노려서 아저씨가 마음대로 안은 거잖아요!”
“네가 먼저 안았잖아!”
조아라의 주장에 따른다면, 성필이 포옹을 한 멤버라고 해봐야 리카와 신아름이 전부다. 게다가 포옹도 두 사람이 먼저 한 것이다.
성필이 먼저 안으려고 한 건 확실하게 조아라가 처음이다.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는 애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되는 거죠. 막말로, 설하 쌤이나 하양 언니 안으라면 안을 수 있어요?”
“……아라야, ‘안는다’ 말고 포옹이란 말 쓰면 안 돼?”
“왜요?”
“어?”
“……?”
“아니다…….”
조아라는 소설을 많이 안 읽는 모양이다.
“내가 설하랑 하양이한테 포옹을 왜 해. 둘은 성인이잖아.”
“나도 성인인데요.”
“어?!”
“뭐가 ‘어’예요. 팍 씨 그냥 주먹 날려버릴까.”
조아라의 말투가 점점 손혜빈을 닮는 듯했다.
“아니라니까. 나 진짜 편애 같은 거 안 해. 소녀연맹은 다 소중하잖아…….”
“그럼 증명해봐요.”
“증명을 할 수 있어?”
“아저씨가 나한테 벽 쳐왔잖아요. 그래서 다른 멤버들한텐 했는데 나한테는 안 한 것들 많아요.”
“그랬나?”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뭐 있는데.”
“먼저, 리카처럼 나도 목말 태워줘요.”
“그건 리카한테만 해줬던 거잖아?!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해줬어!”
“리카만 편애하는 거 맞네.”
“……하아, 천장 잘 봐라.”
성필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목 위로 조아라가 발을 걸쳤다.
“흡!”
성필이 전신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
“……의외로 별거 없네요.”
“그렇지 뭐.”
“리카는 좋아서 자지러지던데.”
“내려올래?”
“네.”
조아라가 내려와선 발을 툭툭 털었다.
“다음은 설하 쌤.”
“설하는 진짜 뭐 없는데.”
“손잡아요.”
“설하가 그것도 말했냐?!”
옛날에, 백설하가 ‘가로 엔터가 망하면 성필이 자신을 미워할까 무섭다’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잡고 본심을 말했었는데, 그것까지 소녀연맹에 알려진 건가?
둘만의 비밀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희들 여러 얘기를 하는구나.”
“그래서, 못 해요?”
“맥락도 없이 잡으라면 부끄럽잖아…….”
“쌤만 편애하는 거 맞네.”
“……손 내밀어.”
성필과 조아라가 손을 맞잡았다.
“이게 뭐예요.”
“또 뭐.”
“악수잖아요 이건.”
성필과 조아라가 서로 옆에 서서 손을 잡았다.
“아저씨 손 뜨겁네요. 긴장했어요?”
“나 원래 손발이 뜨거워.”
“설하 쌤 같네.”
“이제 됐어?”
“네.”
조아라는 손을 놓은 뒤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다음은 하양 언니.”
성필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장하양과는 뭘 했지? 뭔가 한 게 있나?
“다음에 아저씨 집 한번 가게 해줘요.”
“왜? 뭐 하려고! 내 집에 왜 오는데?!”
“왜 기겁하고 그래요 사람 놀라게…….”
“아, 아니…….”
“진짜 싫은가 보네.”
그게 아니라…….
“내 집은 와서 뭐 하게?”
“아저씨 시에이스 콘서트 영상 있죠? 도쿄 콘서트판으로.”
“어케 앎?”
“아저씨 웬만큼 유명한 그룹 콘서트 블루레이 다 있잖아요. 하양 언니가 그랬어요.”
“그냥 빌려줄…….”
“하양 언니 편애하는 거 맞네.”
진짜 저 말은 가드 불능이다.
성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생이랑은 다르니까…….
“마지막으로, 신아름.”
가장 두려운 차례가 와버렸다.
성필과 신아름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멤버들에게도 보여준 스킨십의 정도가 다르다.
성필이 두려움에 떨고 있자니, 조아라가 피식 웃었다.
“나 업고 연습실 순회해줘요.”
“…….”
잠시 후.
“이사님 뭔가요! 왜 아라쨩만 업어주는 건가요! 아타시(저)도 해주세요!”
조아라를 업은 성필의 뒤를 리카가 졸졸 따라다녔다.
“드디어 조아라 네가 돌았구나.”
의외로 신아름은 혀를 차며 비웃기만 했다.
백설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장하양은…….
“아니, 언니. 아저씨가 해준댔다니까요?”
“그래도 안 돼. 내려와. 아라 네가 억지로 부탁해서 하시는 거잖아.”
“이게 그나마 제일 재밌는데…….”
“하양아, 정말 괜찮아. 내가 아라한테 해준다고 했…….”
“쓰읍, 빨리 내려놓으세요. 자꾸 이런 거 해주면 이사로서의 체면이 없어지잖아요.”
“그런 거야……?”
장하양에게 혼난 조아라는 풀 죽어선 연습실을 나갔다.
“이사님 히도이(너무해)! 왜 아라쨩만 편애하는 거예요! 저도 해주세…….”
“리카, 이사님 곤란하시잖아.”
“하이(네)…….”
성필은 장하양에게 제지당하는 리카를 뒤로하고, 조아라를 따라 연습실 밖으로 나섰다.
아직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라야 이제 증명 끝이지? 편애 안 한단 거 믿어줄 거야?”
“아직 남았어요.”
“또?”
“마지막으로.”
조아라가 처음으로 살짝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나한테만 할 수 있는 칭찬 하나 해줘요. 다른 멤버들한테는 한 적 없는 걸로.”
“아라는 춤신춤왕…….”
“아 그거 말고요! 나라서 할 수 있는 거요!”
조아라라서 할 수 있는 거?
그런 게 뭐가 있지?
전생까지 따진다면 차고 넘치겠다만, 지금의 조아라에게만 할 수 있는 칭찬이란 게 있을까.
“……없어요?”
오랫동안 답이 없자, 조아라가 불안한 듯 반문해왔다.
그러자 성필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아라는…….”
“나는?”
“그, 내적 친밀감이, 있어.”
“……그게 칭찬이에요?”
“어, 어어. 뭔가, 아라는 친밀감이 막 생겨.”
조아라가 실없이 웃었다.
“진짜 대충 지어냈네. 내가 칭찬할 게 그렇게 없는 인간인가.”
“아냐! 진짜 많아!”
“됐어요. 내적 친밀감은 뭔. 흥 다 식었네.”
말투는 저래도, 조아라는 화난 기색은 없었다.
후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알겠네. 아저씨 편애…….”
“안 한다고!”
“네, 안 해요.”
“어?”
“멤버들마다 다가가는 속도랑 대하는 방식이 다른 거지, 다 똑같아.”
인간적인 거리와 위치는 달라도, 아이돌로서는 같은 선에 서 있다.
성필은 사적인 감정을 일에 대입할 만한 인간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안무 바꾸는 것도 나만 설득하려고 했었잖아요. 내가 가장 ‘아라베스크’를 좋아하는 걸 아니까요.”
지금 보면, 조아라 자신도 참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렸다.
괜히 혼자 성필에게 화나서 기 싸움 해보겠다며 억지로 어려운 안무를 밀고 갔으니 말이다.
“아, 아라야……. 내 마음이 전해진 거니……?”
“근데, 이제 알겠는데요.”
“뭐가?”
“제일 가까운 멤버는 나 맞죠?”
성필이 말한 ‘내적 친밀감’이란 말은 그저 궁여지책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아저씨 옛날부터 묘하게 나한테 관심 없는 거처럼 보였는데, 알아요?”
“내가?”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성필은 다른 멤버들이 말할 때는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운다.
과한 제스처로 그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티를 마구마구 낸다.
그리고 그녀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분석하려 한다.
하지만 조아라에겐 아니었다.
“뭔가, 무심하죠. 친구 대하는 것처럼. 아니면 오래 본 사람이나. 진짠가 봐요, 나한테 내적 친밀감 있다는 거. 왜 그러지?”
“그거야 아라 네가 너무 매력 있고…….”
“그거 그만해요. 가식 떠는 거. 이제 아저씨가 꾸며내는 거 보여요.”
“…….”
“나한테 주접 안 떨어도 돼요.”
조아라에 대한 성필의 무심한 태도는 차별이 아니라 특별대우 같은 것이었다.
“다른 멤버들처럼 막 잘해줄 필요도 없고요. 걍 아저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하.”
숨긴다고 숨겼는데, 보이는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회귀하기 직전에 헤어졌으니까.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더라도, 아라를 대하는 게 바로 바뀌진 않겠지.’
사람을 잊기란 게 좀처럼 쉽지가 않다.
비록 성필이 알던 조아라보다 훨씬 나이가 적지만, 조아라는 조아라였다.
무심코 그녀를 대했던 버릇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버릇이 조아라에게는 차별로 느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아라도 알게 됐다. 성필의 대우는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우대였다는 것을.
“뭐, 이제 끝난 거지? 부모님을 벗어나서 처음으로 인정을 얻었던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뭔데요 그건?! 나 뭐 소설 주인공이야?!”
“그거 아냐?”
“……비슷하긴 한데요. 더 섬세한 감정이라고요. 그냥, 하아, 네, 멤버들한테 열등감도 좀 있었고. 근데 이제 됐어요.”
“민시화 선생님이 큰일 해주셨네. 덕분에 아라가 마음도 열게 되고.”
“뭔…… 그딴 말투 그만두라고 했잖아요. 어린애 대하는 것처럼 칭찬하지 마요. 걍 아저씨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요.”
성필이 조아라의 어깨를 두드리려 격려해주려다, 손의 방향을 바꾸었다.
전생처럼.
“악?!”
정신 차리란 의미로 등을 한 대 세게 쳐주었다.
“뭐, 뭐예요!”
“내적 친밀감 표현.”
“왜 여자를 때려요!”
“어? 방금 가부장적 발언한 거야?”
“때리는 거 자체가 범죄거든요?! 애초에 왜 때리는데요!”
“때린 게 아니라 격려야. 정신 차리고 살아라, 아라야. 뭔 되지도 않는 안무를 한 달이나 붙들고 있어.”
“나, 나는 했어요! 멤버들이 못한 거지!”
“그룹은 하모니야. 조화라고. 그걸 무시하면 아이돌이 아니지.”
“임원 회의에서 허가 낸 건데 왜 나한테만……!”
청소년기.
소속 욕구가 극대화되는 시기다.
이 시기, 사람들은 학교와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간다. 그리고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조아라에게 가로 엔터는 처음으로 ‘자신이기에 빛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스포트라이트가 점점 줄어든다는 착각에 빠져 방황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빛을 더 받기 위해 무리한 길로 멤버들을 이끌었고, 자신이 그 길을 헤쳐 인정받으려 했다.
‘그래도, 아라는 이미 알고 있었어.’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단 것을 알았기에,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필요했던 건 계기였다.
무엇이든 좋았으리라.
조아라가 인정을 받고팠던,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가로 엔터 내부에서의 계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맞다, 아라야 졸업 축하해.”
“네? 나 졸업한 지 거의 1년 다 돼가는데 뭔 졸업이요.”
“그날 네 졸업식에 못 갔잖아.”
“아, 그러네. 아저씨 신아름 졸업식에 갔었죠. 진짜 너무하다.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은 나한테 왔었는데.”
“그럼 아름이한테는 누가 가주는데.”
“아 몰라요. 뭐, 그래서 지금 축하한다는 거예요?”
“응. 축하, 받아줄래?”
타인의 인정은 이정표일 뿐이지, 길을 걸어서 목적지를 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자신의 가치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단 사실을 아는 것으로, 어지럽고 찬란했던 청소년기도 막이 내린다.
청소년기의 끝은 이렇게 찾아온다.
늙어 죽을 때까지 청소년에서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조아라는.
“네, 뭐, 받아줄게요.”
그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면…….”
조아라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능청스레 웃었다.
“졸업 기념으로 춤이나 출까요?”
“나한테 뭘 시키려는 거야!”
“……춤 싫어해요?”
“어?”
“싫으면 그냥 말하지 또 소리는 왜 질러요.”
“아니, 아, 춤 좋아해.”
성필은 조아라가 아이돌 춤을 춰보라고 할까 봐 겁이 났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겁났다.
혹시나 조아라가 다시 자신에게 반할까 봐. 도끼병이나 왕자병이라 생각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미 조아라는 전적이 있었으니까.
“‘보라색 튤립’ 하이라이트 춰봐요.”
‘보라색 튤립’의 하이라이트는 한 번만 봐도 머릿속에 입력될 정도로 쉽다.
조아라는 좌우로 발을 옮기면서 가슴께에 둔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처음 봤을 때 조아라가 막춤이라고 부르면서까지 혹평했던 춤이다.
“빨리해봐요.”
성필도 피식 웃으면서 춤을 추었다.
둘은 안무를 맞춰본 것도 아닌데 동작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만큼 쉽고, 즐겁고, 춤의 본질에 충실하다.
조아라와 성필의 동작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 안무에서 벗어나 웨이브를 타거나 현란한 발재간을 보이는 등, 자신들만의 매력을 한껏 보였다.
“오, 아저씨 좀 추는데?”
“너도 꽤 하네.”
“난 아이돌이잖아요.”
둘은 탱고 댄서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탱고 같은 건 모르지만, 영화에서 본 것을 어떻게든 흉내 냈다.
음악 하나 없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춤이라도, 춤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
흥을 돋우고 함께 추는 사람과의 마음을 이어준다.
이내,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면서 배를 부여잡았다.
“아저씨 뭔데요? 오리야? 퍼덕 퍼덕 퍼덕.”
“춤을 배워본 적이 있어야 잘 추지. 너무 불리한 게임이잖아.”
“그렇긴 하죠. 나는 아이돌이고.”
또한, 댄서다.
“아저씨 춤도 그럭저럭 멋졌어요.”
빈말 하나 없이,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춤이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그 목적만 달성될 수 있다면 테크닉은 필요 없다.
춤이란 건 태생 자체가 개성과 감정의 표현이다. 테크닉이 없어도 춤은 춤인 것이다.
‘굳이 어렵지 않아도, 춤은 그 자체로 멋져.’
춤을 추는 사람이 즐겁다면, 고난도 묘기와 같은 테크닉이 없더라도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민시화의 독설이 없었다면 깨닫지도 못했겠지만,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늦게 깨달았을까.’
진작 깨달았다면, 어려운 퍼포먼스를 하겠다면서 기를 바락바락 쓰지도 않았을 테고.
멤버들이 완성하지도 못할 춤으로 한 달 가깝게 시간을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쉽다.
아쉽지만.
‘지나간 일이야.’
미래를 보자.
멤버들이 자신을 믿어주었으니, 그만큼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답해야 한다.
“아저씨.”
“응?”
“아까 어린애 대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근데, 마지막으로 해줘요. 나 앞으로 잘할 거라고요.”
성필이 조아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넌 언제나 잘해왔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네, 믿을게요. 그리고, 미안해요. 고집부려서.”
조아라는 자신의 머리를 쓰는 손길을 느꼈다.
따스하다.
* * *
리카는 영어로 적힌 룰 북을 장장 30분 동안이나 읊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보드게임판에는 병사와 대포 모형이 가득했다.
“자, 이런 게임이에요!”
“……그렇구나. 이제 시작할까?”
“룰 제대로 아신 건가요? 모르는 게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성필은 대답도 없이 병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사양하실 필요 없어요! 마음껏 질문하셔도 돼요!”
질문하는 순간, 리카는 저 룰 북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할 것이다. 성필은 차라리 당하면서 배우길 택했다.
병사 배치가 끝나자, 리카가 위풍당당하게 선언했다.
“아타시(저)는 일본의 병사로 한반도를 공격할게요!”
“또? 또 침략하는 거야?!”
“에엑?! 그, 그럼 러시아로…….”
“그만해! 평화를 지켜줘!”
“에, 에, 동남아시아…….”
“꺄아아아아악!”
“어쩌란 건가요 잇타이(대체)?! 한 이사님 부르기 전에 인종차별을 멈추세요!”
“…….”
“그렇다고 조용하시면 어떡하나요!”
그때,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로 엔터의 사람이라면 굳이 노크할 필요 없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될 텐데.
“누구…….”
성필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가로 엔터의 경비견 리카가 문으로 호다닥 뛰어갔다.
문이 열리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열렸…….”
쾅!
“누구신가요!”
그녀가 발을 들이밀기도 전에, 리카가 힘껏 문을 막으면서 외쳤다.
이미 리카는 110(일본의 112)를 누를 준비를 마친 직후에다가, 경계심을 잔뜩 세우고 있었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어어어어억?!”
리카가 들이 막은 문이 힘으로 열리고 있었다.
문을 쥔 손에서 뿌드득 소리가 들리며, 리카가 힘껏 밀고 있음에도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것처럼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반동에 리카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위, 위급상황이에요!”
리카가 110을 눌렀다.
[국민권익위원회입니다.]
“손나(그런)!”
리카는 신경을 바짝 세우며 가로 엔터로 들어온 침입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가볍게도 문을 열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뭐야, 여기도 덥네.”
리카가 그녀를 보고 처음 느낀 감정은.
‘크다.’
가슴이 아니라, 물론 가슴도 크지만, 여자는 키와 몸 전체가 커다랬다.
정장 바지에 반들반들 닦인 구두. 그리고 그에 맞지 않은 면 나시 차림 안으로는 검은색 브래지어가 그대로 비쳤다.
여자는 위압적인 풍채를 자랑하며 리카에게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그에 따라 리카는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살이 많은 건가?’
리카보다 부피가 몇 배는 큰 팔은 마치 남자와 비슷했다.
그러나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살이 찐 게 아니다.
‘뼈가 큰 거야!’
남자를 압도하는 180cm가 넘는 키에 무인(武人)을 연상시키는 풍채.
“누, 누구신가요!”
그녀는 몸에 걸맞지 않은 순둥한 얼굴로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규헌이 있지?”
“규헌…… 이?”
“아, 맞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으음, 홍규헌 사장 있어? 아니다, 사장님 계시니?”
“누, 누구…….”
“아 참. 나도 깜빡하고 자기소개를 안 했네.”
그녀가 활기차게 말했다.
“홍연헌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