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조아라의 좌절한 얼굴.
그것을 보자마자 성필의 심장에 가시가 꽂혔다. 과거, 어떨 때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조아라는 말라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었고, 성필은 그녀를 달래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아라야, 안 그래. 오해야.”
달라붙은 몸을 통해 전달되는 온기.
따스함은 사람의 마음을 옮긴다.
성필과 조아라도 그러했다.
다만.
“아, 아저씨 미쳤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성필의 정신도 돌아왔다.
아니, 사실 조아라를 안는 순간 돌아왔었다.
어딘가 성필이 아는 감촉과 많이 달랐기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어?’
순간적으로 전생과 현재의 경계가 무너지며, 성필은 어떻게든 조아라를 달래주기 위해 가장 익숙한 방법을 사용했었다.
포옹.
그러나 조아라를 안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온전히 사라지고, 현재가 제대로 자리 잡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라가 왜 이렇게 말랐지?’
아, 맞네.
지금의 조아라는 아이돌이니까.
그리고 지금의 조아라는…….
“놔요! 놓으라고요!”
당연하게도, 전생의 조아라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성필을 기겁하며 떨어지고, 어떻게든 자신의 의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라야 내가 정말 너한테 이상한 감정이 있어서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니까 제발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
“당연하죠?! 이상한 감정이 있었으면 안지도 않았겠지!”
리카처럼, 조아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필을 안거나 안기지 않는다.
어느 사람이건 그럴 것이고, 성필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웬만큼 친하더라도 별다른 이벤트가 없고서야 이성끼리는 포옹하기 쉽진 않다.
그런데도 성필이 조아라를 위로해준다는 이유만으로 안은 건.
“뭐 내가 아직도 애새끼로 보여요?! 난 리카가 아니라고요!”
“애, 애새끼라니…….”
“맞잖아요! 뭔 사람을 유치원생 정도로 봐요?! 사, 사람을, 여자를 뭐 이렇게 가볍게 안아?!”
조아라는 얼굴이 붉어져서 성필에게 온갖 비난을 꽂아 넣었다.
성필은 그것을 조용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잘못한 게 맞았으니까.
그런데 조아라는 너무 화가 나고 당황했는지, 분노의 핀트가 조금 이상했다.
그래도 성필은 지적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봐! 이럴 줄 알았어!”
“뭐, 뭘……?”
“하양 언니 끝까지 믿어줬던 것도 이성적으로 보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점수 따보려고 어떻게든 끝까지 밀고 나간 거잖아!”
“어?”
“나만, 나는, 아니고……! 이거 편애야! 프로듀서란 사람이 이래도 돼요?!”
조아라가 많이 흥분한 듯했다.
자꾸만 물러나는 게, 조금만 더 있으면 폭언만 해대다가 도망갈 듯했다.
이 레퍼토리는 익숙하다.
성필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재빨리 그녀의 옷소매를 잡았다.
“아라야 너 미쳤어? 내가 무슨 하양이한테 점수를 따겠다고 계속 밀어줘!”
“그렇잖아요! ‘아라베스크’는 아직 안무 연습한 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바꾸자고 하고!”
조아라는 아무 말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불만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성필은 지금껏 멤버들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생각해왔다.
“‘아니’는 두 달 다 돼가도록 하양 언니 가만 내버려 뒀잖아요! 나랑 아름이가 바꾸자고 건의했었는데도요!”
하지만 조아라가 보기에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성필이 동생 라인을 향해 격의 없이 대하고, 언니 라인을 향해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게.
조아라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동생 라인은 친근하게 대해지기 때문에, 언니 라인보다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뭐 내가 아직도 애새끼로 보여요?!’
조아라가 했던 이 말은 그녀가 품었던 불만을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었다.
성필은 동생 라인을 어린애처럼 대해왔다. 그게 조아라에겐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어린애처럼 취급받기에, 언니 라인보다 말에 실리는 무게가 다를 것이다.
또한 조아라의 대우는 다른 동생 라인과도 조금은 달랐다.
‘그래서 차별받는다고 생각했던 거구나.’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바꾸자고? 그래,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성필이, 임원진이 합의하고 직접 제안할 정도의 사안이다. 안무 수정 제의에 실린 무게감은 조아라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게다가 조아라는 춤에 정통하다. 그래서 점점 깨닫게 될 수밖에 없다.
‘아라베스크’는 멤버들이 완성해낼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조아라도 인정하고, 성필에게 안무를 수정하자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거 같지만.’
하지만 현재의 조아라는 그것을 모른다.
‘바꿔야 하는데’란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그 마음을 표출하지 않는다.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하고 싶단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합리하게도, 성필이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고 있다.
어쩌면 멤버들도 최후엔 ‘아라베스크’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가능성을 성필이 믿어주고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장하양 때도 그랬으니까…….
“이게 편애가 아니면 뭔데요! 그리고 옷 좀 놓으…….”
“아라야,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
조아라가 어이없단 듯 웃었다.
“아저씨가 내 행복을 알아요? 내 행복이 안무를 바꾸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게 행복이잖아요! 아니, 난 지금 불행해요! 존나 불행하다고요!”
“왜?”
“왜, 왜라고요?”
“아라야, 나는 많은 아이돌을 봐왔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소화할 수 있는가.
직접 댄스 가수로 뛰어 본 손혜빈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성필은 그 정도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자, 조아라는 또 기가 막혀서 성필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못할 거라고요? 이제 와서? 그럼 지금까지 믿는단 말은 뭐였어요? 우리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라는 건요? 우리가 하고 싶어서, 우리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인 안무 아니에요?”
“믿고 싶어. 그렇지만, 이대로면 너희들은 AR을 쓰게 될 거야.”
“안 써요.”
“그럴 수도 있겠지.”
성필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이돌이 한 번 라이브를 포기하면 그것에도 관성이 생겨버린다.
계속해서 AR에만 의존하는 버릇이 드는 것이다. 연차가 쌓이고 인기를 얻어, 더는 입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된 아이돌들도 많다.
“자기 관리에 소홀해지고, 더는 연습도 안 하고, 활동 기간에 그럴듯한 모습만 보여주는, 그런 아이돌도 있어.”
뭐든 한 번이 어렵다.
감옥 같은 통제에서 벗어나 쾌락을 맛본 아이돌들은 자꾸만 기획사의 눈을 피하게 된다.
프로 의식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음식과 술을 마음껏 먹으며, 더는 트레이닝도 하지 않고, 결국에는 공고한 팬덤만 믿곤 팬들을 ATM기로 취급하게 된다.
그들은 더는 팬의 기대에 보답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렇게 될 거라고요?”
“아라야, 한 번이 어려워. 물론 내가 그린 건 최악의 미래야. 하지만 AR을 한 번 쓰고 그 편리함을 맛보게 되면, 계속해서 떠오르게 돼.”
AR에는 정말 라이브를 하는 것처럼 가수의 호흡과 현장감마저 녹음된다.
립싱크만 완벽하면 AR이란 것을 들키는 것도 어렵다.
“아라야.”
“뭐요.”
“넌 나중에 이렇게 말하게 될 수도 있어.”
격한 안무와 보컬을 동시에 채택한 곡을 고르고,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AR로 해요. 어차피 AR 쓰면 되잖아요.”
그럼 완성도 있는 춤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한 번 AR에 의존한다는 건, 곧 AR을 고른다는 선택지를 여는 것이다.
옛말대로, 악행은 한 번이 어렵고 두 번은 쉽다. 선택지의 잠금이 해제되는 순간, 버릇처럼 AR만 고르는 아이돌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아라 너도 알잖아. 지금의 ‘아라베스크’는 조화를 포기했어. 숨만 헐떡이면서 겨우 가사만 내뱉는 지금이, 설하가 말한 보컬 퍼포먼스 강화가 이뤄진 모습이야?”
“…….”
“아라야, 다시 말하지만,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 그리고 행복이란 후회를 남기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
조아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후회할…… 거예요. 지금 이 안무로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요…….”
성필은 말은 전혀 답이 되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전부 ‘아니’ 때 장하양의 상황과도 들어맞는다.
만약 장하양이 퍼포먼스를 창작해내지 않았다면 그녀도 후회했을 게 틀림없다.
“왜 하양 언니는 되고, 나는 안 되는데요…….”
거기엔 성필도 그럴듯한 답을 줄 수 없었다.
미래를 봤다, 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성필은 오랜만에 익숙한 쓴맛을 느꼈다. 전생에서, 석세스 엔터의 아티스트들에게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을 때의 씁쓸함이다.
아무도 성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원망하기만 했었다.
“편애, 맞잖아요…….”
성필은 조아라가 듣고 싶은 말이 있단 것을 눈치챘다.
“아라야, 네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성필은 조아라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도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편애 같은 거 안 해. 너희 전부 다 좋아해.”
거짓말이다, 라고 조아라는 생각했다.
성필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조아라에게도 장하양과 같은 믿음을 주어야 할 텐데.
성필은 끝까지 ‘이 안무로 가자’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조아라는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지금 자신의 얼굴 따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조아라가 듣고 싶었던 말은…….
‘내가 하양 언니보다 먼저 가로 엔터에 들어왔는데에…….’
잠깐의 위로라도 좋으니까, 성필에게 원하는 답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성필은 말해주지 않았다.
조아라는 그저 바닥으로만 시선을 주었다.
‘아저씨가 하는 말은 그냥…….’
상황에 논리를 끼워 맞추는 싸구려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보라, 지금 성필의 표정을.
성필도 자신의 설득에 힘이 있으리라곤 생각하는 표정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자기 자신도 설득할 만한 명백한 논리가 없는데도, 성필이 조아라에게 안무 수정을 제안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편애, 맞잖아…….’
* * *
성필은 요즘 들어 백민정과 술잔을 나누는 일이 늘었다.
“아라가 그렇게 싫어해?”
“어.”
“오빠가 좀 달래보지.”
“달래서 어떻게 될 게 아니었다니까. 네가 아라 눈빛을 봤어야 해.”
“학원에서도 저기압이긴 했어.”
백민정은 씁쓸한 기색으로 소주를 삼켰다. 소주 때문인지 그녀가 더욱 쓰게 얼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아라가 훨씬 부드러워졌더라니, 춤에 관해선 얄짤없네.”
“너 저번에도 그 말 똑같이 했어.”
“나? 내가 뭐?”
“아라 부드러워졌다고. 1년 전이었나.”
“아아, 그거? 그때보다 더 부드러워졌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점점 유해지더라. 연애라도 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
“그래?”
“응. 이제 보니 그거 때문은 아닌 거 같지만. 나 진짜 아라가 오빠한테 대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걔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장난치고 그럴 애가 아니거든.”
성필이 안무 일 때문에 학원에 들렀을 때였다.
그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먹고 있는데, 갑자기 조아라가 등줄기를 훑어서 물을 다 뱉었었다.
“그때 아라가 ‘나 잡아 봐라’하면서 막 도망가고 그랬었지? 꺄르르 웃으면서?”
“그거 ‘나 잡아 봐라’가 아니라 ‘복수할 수 있으면 해봐라’였어.”
“복수했어?”
“아니…….”
젊은 애들 체력이 좋긴 하다. 성필은 결국 조아라를 잡지 못했었다.
“그때 내가 아라한테 어떤 일로 조언을 해줬었거든. 그게 마음에 닿았나 보지.”
“글쿠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도, 조아라에 대한 고민은 지워지지 않았다.
둘은 고기를 구우면서 적당히 소주만 마셨다.
“근데 ‘보라색 튤립’ 춤은 어떻게 생각했어? 너 되게 파워풀한 거 좋아하잖아. 신나는 분위기라서 좀 방방 뛰는 느낌으로 만들 줄 알았는데.”
“쌤한테 조언 좀 받았어.”
“서학준 쌤?”
백민정의 스승이자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아니. 서 쌤 아내 분. 민시화 쌤.”
“하긴, 넌 춤 오래 배웠을 테니까 쌤도 많겠지. 그런데 부부 댄서라니, 신기하네.”
“업계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흔하잖아.”
“그런가?”
“어, 그럼 오빠도 업계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가?”
“만날 데가 업계밖에 없잖아. 내가 만나는 사람들 다 거기서 거긴데.”
“소녀연맹?”
“이게 진짜 말을 해도 애들을 꺼내냐.”
“어? 농담인데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하지? 혹시 아이돌과의 로맨스를 꿈꾸고 계십니까? 수상한데.”
“내가 그랬으면 젊었을 때 석세스 엔터에서 뭔 일이 있었겠지.”
“그것도 그렇네. 아니, 진짜 뭔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어디 보자. 친했던 애가 소민이, 였나?”
성필이 젓가락을 테이블에 쾅 내려놨다.
“그만해라.”
“……미안.”
침묵 속에서 고기 굽는 소리만 퍼졌다.
백민정은 그의 기분을 풀게 해주기 위해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사제(師弟)는 닮는다더니, 백민정의 행동은 조아라와 똑같았다.
“오빠 삐졌어? 내가 말 심하게 해서? 왜 이래애. 내가 진심 아닌 거 알잖아. 여기, 고기 큰 거 먹어.”
“……아라 성격이 왜 그런지 알겠다.”
“응? 뭐가?”
술이 몇 잔 더 돌자, 백민정은 옛날을 추억하기 시작했다.
‘얘 자기 옛날얘기는 잘 안 하는데.’
사랑하는 제자인 조아라가 자신의 안무를 싫어한다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필은 그녀의 술잔을 연거푸 채워주며 한탄 듣는 기계가 되었다.
그러다가, 백민정의 이야기는 그녀의 스승인 민시화에게까지 뻗쳤다. ‘보라색 튤립’ 안무를 만들 때 민시화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성필은 술기운이 전부 달아났다.
“민정아!”
“어?”
“그 말 아라한테 그대로 해줄 수 있어?”
“뭐가. 민 쌤이 나한테 했던 조언?”
“응!”
“내가 말해도 임팩트가 있을까? 아라 성격이면 걍 씹을 거 같은데.”
“그럼 민시화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해주면 안 돼?”
“……쌤이 직접?”
조아라의 스승의 스승이라니, 임팩트가 없을 수 없지 않은가.
‘아라를 설득하려면 그냥 말만으로는 안 돼.’
춤에 관련된 강렬한 영감이 필요하다.
* * *
성필이 연습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야 조아라!”
“아 씨 깜짝야……! 아저씨 한 번만 더 이러면 나 진짜 그냥은 안 넘어간……!”
“내 차에 타라.”
“에, 드라이브인가요! 아타시(저)도 갈래요! 이사님이랑 드라이브할래요!”
성필은 조아라만 데리고 나갔다.
“이젠 땡깡부리는 것도 지치네요. 가다가 적당하게 안 좋은 일이나 있으세요.”
“이번 주에 한강 한 번 돌래?”
“네 네네 네네네!”
리카에게 미끼를 하나 던져둔 뒤, 성필은 조아라와 함께 유 노 댄스 아카데미로 향했다.
조아라에게는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학원 가는 거죠?”
“어떻게 알아?!”
“옛날에도 똑같은 일 있었잖아요.”
“그랬어?”
“아저씨가 ‘아니’ 때 나 안무 창작 과정에 넣어준다고 했을 때요. 그때랑 레퍼토리 똑같아요.”
심지어 리카가 했던 말마저도…….
가로 엔터는 몇 년 동안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조아라는 학원 앞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도 그다지 말이 없었다.
아직도 그날의 배신감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 아라가 나한테 너무 차가운데.’
자업자득이라 변명거리가 없다.
거짓말로라도 조아라가 듣고 싶던 말을 해줬더라면, 그녀의 기분이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라베스크’ 안무 수정까지 일사천리로 갔을지도…….
하지만 성필은 끝끝내 그녀의 바람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뭐, 쌤이 나 설득한다고 해요?”
드디어 조아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성필은 대답 없이 목적지를 향해 걷기만 했다.
“난 진짜 그 안무 싫어요.”
“…….”
“쌤 안무 안 받는 한이 있어도 다른 걸로 할래요.”
“…….”
“아저씨 내 말 듣고 있어요? 나는…….”
조아라의 말투에 점점 짜증이 섞이려던 때, 성필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연습실 안에 백민정이 있었다. 그녀를 본 조아라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곧 처음 보는 사람이 있어 표정을 바로 해야만 했다.
“쟤니?”
다운된 우아한 톤의 목소리다.
조아라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살폈다.
30대 중반? 초반? 나이를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하지만 여름이라 노출한 팔과 다리를 보건대, 오래 춤을 춘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기품이나 아우라가 나왔다.
“네, 쟤가 아라예요.”
조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이 물러났음에 놀랐다.
도대체 왜?
“아라야, 들어가자.”
성필이 조아라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털컥, 문이 닫히고 연습실 안에는 네 사람이 있게 됐다.
“아라야, 이분은 민시화 선생님이셔. 내 쌤.”
“쌤쌤? 아, 아니, 그, 서학준 쌤 아내…….”
“그래. 내가 민시화야.”
말 하나하나에 에고가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눈빛 한 줄, 손짓 하나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평생 신체를 단련하고 몸 쓰는 법을 익힌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었다.
“너니? 조아라.”
사람의 가슴을 파는 듯 공격적인 어투에, 조아라는 방어적인 태도가 되었다.
“……네.”
“그래, 너구나. 쉬운 안무라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한 아이돌이.”
민시화도 그 이야기를 들었구나.
백민정이 말한 것일 테지.
‘날 설득하려고 쌤이 쌤쌤까지 데려왔어?’
영문을 모르겠다.
백민정보다 나이 든 사람에다가 춤을 오래 췄다는 배경이 있으면, 조아라 자신이 더 쉽게 설득되리라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어린애라도 이런 방법은 안 쓸 것이다.
‘날 뭘로 보고…….’
게다가 듣자 하니, 민시화란 사람의 전문은 댄스 스포츠라고 했다. 남편인 서학준과 같다.
어반 스타일을 깊게 파고들지도, 하물며 스트릿 댄스 경력조차 자신보다 모자라는 사람에게 설득당할 생각 따위는 없다.
‘게다가 아이돌도 아닌 사람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도 없어.’
조아라는 눈빛에 날을 세웠다.
민시화에게서 어떤 말을 듣더라도 설득되지 않으며, 또한 겁먹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쉬우면 퍼포먼스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지?”
“네. 그런데요.”
“미국에서 컨템포러리 댄스도 배웠다면서.”
“네.”
“껍데기만 배웠네.”
‘당신이 뭔데’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참은 게 용했다.
“보니까 컨템포러리 댄스가 뭔지도 모르고 배웠나 본데.”
“내가 춤추는 거 그쪽이 보기나 했…….”
“테크닉에만 집중하면 춤이 서커스랑 다른 게 뭐니?”
공백.
조아라의 머리가 텅 비었다.
민시화의 말은 총알과 같았다. 너무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조아라의 머리를 쏘고, 터뜨렸다.
겨우겨우 남은 뇌가 민시화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테크닉에만 집중하면.’
춤의 기술적인 측면.
더 어렵고, 정교하며, 세밀하고, 아름다운, 그런 춤을 구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테크닉.
모든 댄스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테크닉의 연마이다. 테크닉으로부터 시작해서 테크닉으로 끝난다.
고난도의 테크닉을 소화하는 게 곧 댄서로서의 자격 증명이나 마찬가지다.
‘춤이.’
춤.
신체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갈래.
흔히 단련되고 정제된 인간의 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한다.
춤은 그 예술품으로 선과 면, 혹은 그 자체를 선보여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서커스와 뭐가 다르니?’
서커스, 는, 재미를, 추구한다.
사람들이 놀라도록,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그야말로 감탄이 저절로 나오도록.
재밌고 신기한 묘기에 집중한다.
사람을 향해 칼을 던지고,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한 각도로 다리를 찢고, 줄 위에서 수십 미터를 튀어 오르고.
‘테크닉에만 집중하면 춤이 서커스와 뭐가 다르니?’
안타깝게도, 조아라는 그 말에 반박할 말을 찾는 게 불가능했다.
“어려우면 아름답고 멋지니? 그럼 넌 아크로바틱을 해야지. 열심히 수련해서 ‘태양의 서커스’에나 가. 왜 춤을 춰?”
이어진 민시화의 말은 대포였다.
그나마 이전의 말에는 빈약하나마 반박할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방금 말은 정말로 단 한마디도 반론을 꺼낼 수 없었다.
“아아, 굳이 춤이어야 해? 중국의 발레단 중엔 그런 사람도 있다더라. ‘백조의 호수’를 중국식으로 어레인지한 건데, 발레리나가 발레리노의 정수리에 발끝으로만 서서 아라베스크를 한대. 그럼 넌 중국에 가서 발레를 해야겠다.”
아니다. 그런 건 춤이 아니다.
아크로바틱이나 묘기라고 부를지언정, 사람들의 기립박수와 평단의 감탄을 자아낼지라도.
그런 건 춤이 아니다.
발레리노의 정수리에 선 발레리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백조의 감정들은 개박살이 나고 스토리 또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춤이, 아니야.
“맞니? 그러니까, 내가 들은 대로면, 조아라 너는 아크로바틱 선수나 서커스 단원, 혹은 중국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거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니?”
“…….”
“왜 말이 없어, 아크로바틱 선수야. 할 말이 없니, 중국 발레리나야. 아니면 목이 쉬었나, 서커스 단원아.”
“…….”
“아니면, 아직도 넌 너를 댄서라고 생각하니?”
“선생님.”
성필은 황급히 조아라를 팔로 감쌌다.
조아라를 바라보는 민시화의 눈빛이 너무나도 살벌했다. 또한 조아라의 표정도 백치처럼 멍해져만 갔다.
민시화가 이 이상 폭언을 하게 두었다간, 조아라가 민시화의 머리칼을 쥐어뜯거나 혹은 울면서 바닥을 구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하시는 게 좋겠어요.”
민시화는 성필을 바라보더니, 고아한 투로 등을 돌려 백민정에게 다가갔다.
“애가 나랑 말을 안 하네.”
“보통 쌤이랑 말하려는 사람 없어요.”
“난 안에 간다.”
민시화가 사라지자, 백민정은 하하 웃으면서 조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야, 그게, 내가 ‘보라색 튤립’ 안무를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설명해주려고 민 쌤을 불렀는데…… 아라야?”
조아라는 넋이 나간 듯했다.
그녀는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였지만, 말하라고 하면 하진 않았다.
결국 조아라는 백민정과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학원을 나와야만 했다.
성필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회사를 돌아가는 길에도 불안하기만 했다.
‘삼국지에서 주유가 제갈량 편지를 받고 죽었다지? 너무 화가 나서…….’
설마 조아라도 그렇게 된 건가.
사람이 말로만 죽는단 게 가능한가?
촌철살인(寸鐵殺人)이 가능한 거였나?!
“아, 아라야.”
성필은 조아라의 어깨를 쿡 찔렀다.
반응이 없다.
목덜미를 찔렀다.
반응이 없다.
뺨을 찔렀.
“끄에엑……!”
조아라가 성필의 손가락을 낚아채서 비틀었다. 성필은 고통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저씨.”
“놔! 놔아……!”
“나, 그 안무 찬성할게요.”
“놓고 말해애……!”
“그 안무로 해볼래요. 아니, ‘아라베스크’도 백 쌤이 바꾼 버전으로 할게요.”
“아파아, 제바알……!”
“맞아요. 춤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컨템포러리 댄스 배울 때 배운 건데. 춤의 목적은, 근본적인 목적은 행복이에요. 행복해지기 위해 추고, 행복을 주려고 추는 건데.”
“놔줘어어엇……!”
“찬성할게요. 그리고 나중에 댄스 스포츠도 배우고 싶어요. 민시화 쌤한테.”
“흐에, 에엑, 으에, 헤아악……!”
* * *
신아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내가 악역을 도맡아야 해?’
‘아니’를 연습할 때도, 신아름이 조아라를 꼬셔서 성필에게 안무 난이도를 낮추자고 요청했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이번에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조아라 그 미친년의 머리에 이게 잘못된 거란 건 알려줘야지.’
신아름은 동지를 포섭하기로 했다.
첫 번째 타깃은 가장 만만한 리카였다.
“에, 에에…… 아타시(나)는 지금 안무가 좋은데…….”
“거짓말 마. 너 조아라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잖아.”
“지가우(틀려)!”
“…….”
신아름은 어제 찍은 퍼포먼스 연습 영상을 보여주었다.
리카가 좌우로 웨이브를 타면서 프리코러스를 소화하는데, 고음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서 목소리가 거세게 흔들렸다.
폭풍우 위에 뜬 돛단배에서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리카는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라서 눈을 가렸다.
“빨리 꺼줘! 이런 거 보고 싶지 않아!”
“봐! 보라고! 지금 이게 네 상태야!”
“연습하면 나아질 거라니까! 할 수 있어!”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리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조아라가 죽을 기세로 ‘아라베스크’의 현재 안무를 밀고 있으니, 그에 반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 심지어 리카는 조아라와 가장 친하니까.
신아름은 타깃을 바꾸었다. 소녀연맹 최고의 상식인인 백설하였다.
“음, 아름아, 그래도 끝까지 해보는 게 어떨까? 나중에 가서 수정해도 늦진 않을…….”
“쌤 그런 생각은 물러요!”
“어?!”
“나중 언제요? 이거 안무를 수정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내야 할 거예요. 언제 수정하고 또 언제 연습할 건데요?”
“아…….”
“지금 해야 한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백설하는 쭈뼛거리며 변명했다.
“우리를 믿자…….”
“…….”
이렇게 심약한 인간이 리더라니.
백설하도 조아라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조아라도 백설하가 주장했던 보컬 퍼포먼스 강화에 동의했으니, 조아라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건 힘들 터다.
‘리더면 묵직하게 버티면서 할 땐 하는 게 필요한데.’
백설하는 묵직하기만 하지 할 때 하질 못한다.
저래선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도 금방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게 분명하다.
‘내키진 않지만.’
마지막 타깃, 장하양에게로 향했다.
장하양은 진지하게 신아름의 요청을 듣더니,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름아, 믿자.”
“누굴요. 우리요? 아니면 조아라?”
“아니, 박 이사님을, 가로 엔터를.”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받아들인 건 가로 엔터다. 소녀연맹의 의사가 최우선이라지만,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도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메인 프로듀서인 박 이사님이 아직까지 내버려 두고 계셔. 우리도 이사님을 믿자.”
“하필 걸고넘어져도 팀장님을…….”
성필은 담당 아이돌한테는 한없이 유약한 사람이다.
리카한테 하는 것만 봐도 견적이 나오잖는가. 그녀가 부담스럽게 달라 붙어와도 혹여나 상처받을까 강하게 밀어내지 않는다.
“하아, 알겠어요.”
“응. 아름아 우리 힘내자.”
“저는 별로. 하양 언니가 연습 열심히 해야죠.”
“…….”
장하양은 주먹을 꽉 쥐면서 미소를 띠었다.
신아름은 먼지 나게 얻어맞기 전에 재빨리 연습실에서 도망갔다.
‘결국 나쁜 역은 또 내 차지야.’
신아름은 결심했다.
오늘 조아라가 성필과 함께 학원에서 돌아오면, 그녀의 자존심을 산산이 박살 내기로.
‘이건 팀을 위한 거야. 아라베스크 안무는 바꿔야 해.’
다들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꿈에 부푼 조아라를 향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말한다.’
신아름을 조아라를 향한 언어의 칼날을 벼려냈다. 누구도 반박 한 줄 못 할 만큼 논리적인 체계로 설득의 탑을 쌓아 올릴 것이다.
모든 건 소녀연맹을 위해서.
성필의 꿈을 위해서니까.
“다녀왔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오랜 기다림 끝에 성필과 조아라가 회사로 돌아왔다.
“팀장님, 조아라. 잠깐 할 말…….”
“아름아 미안. 지금 사장님 뵈러 가야 해.”
성필과 조아라는 쌩하니 사장실로 올라갔다.
“……뭔데?”
잠시 후,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 전원을 연습실로 불러 모았다.
“얘들아, ‘아라베스크’ 안무 수정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민정이가 바꾼 버전으로.”
모두의 눈이 조아라에게로 향했다.
조아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찬성했어요.”
멤버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 안무가 아니면 혀 깨물고 죽겠다던 조아라가, 갑자기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거지?
“……아.”
리카가 소심한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아타시모(나도)…….”
신아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아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방금 설득할 때는 어떻게든 해보겠다던 애가 조아라의 말 한마디에 태도를 바꾸다니?
“아, 아라야. 괜찮은 거 맞아?”
“네.”
백설하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큰 결정을 내렸단 듯 조아라를 포옹했다.
‘뭔데?!’
신아름이 설득할 때는 ‘우리를 믿자’라고 했던 백설하마저도 이러는 건가?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심지가 약하지?
이 정도면 소녀연맹의 리더는 조아라가 아닌가? 물론 ‘아라베스크’ 안무 관련해선 가장 입김이 강한 게 조아라이긴 했지만, 다들 너무 무르잖아…….
“…….”
신아름은 마지막으로 장하양을 흘겼다.
장하양은 화사한 미소를 띠더니.
“저도 찬성이에요.”
진짜 뒤통수 한 번 세게 때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진짜 때릴 수는 없으니, 말로라도 때리기로 했다.
“언니, 아까는 팀장님을 믿…….”
장하양이 신아름의 발목을 발굽으로 빠르게 찼다. 신아름이 끄윽 거리면서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