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07화 (207/760)

207화

“그…… 나는 좋다고 보는데. 고생했네, 민정이.”

성필의 칭찬에 백민정이 뿌듯해하는 것과 동시에.

“아, 아니, 이건 아니죠!”

조아라가 격렬하게 항의해왔다.

“하이라이트 저게 뭐예요! 아이돌이 아니라 길 가던 사람 붙잡고 춰보라고 해도 추겠어요!”

“그걸 노리고 만든 건데?”

“……진짜요?”

그럴 거면 아이돌의 춤이 퍼포먼스라고 불릴 이유가 있나?

이런 춤을 무대에서 하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것이다.

혹시나 음방에서 진저를 만나기라도 하면.

‘아라 씨. 이번 소녀연맹 춤 뭠미까?’

라는 질문이나 받겠지.

굳이 남과 비교된단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런 건 춤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다.

“이상하잖아요……!”

백설하가 로켓처럼 일어나기 직전인 조아라의 손목을 잡아서 진정시켰다.

“저기, 아라 말에 저도 동감해요. 아이돌 퍼포먼스라기엔 너무…… 그으…….”

“쉽다?”

“네, 네에.”

백민정은 ‘보라색 튤립’이 너무 심심한 곡이라서 안무를 만들기 힘들다고 했었다.

이런 곡에 세밀히 박자를 쪼갠 안무나 화려한 포인트 안무를 넣어도 각이 안 살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래서 아예 곡처럼 심심한 안무를 만들어버린 건가?

“‘보라색 튤립’의 주제가 ‘엔딩’이란 느낌이잖아.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고 향수가 느껴지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은은한 축제 같은 분위기.”

성필이 백민정 대신 변호를 시작했다.

“뮤비 콘티도 봐서 알겠지만, 너희들이 놀이동산이나 탁 트인 들판에서 춤추는 장면도 있어. 배경은 몽환적이고. 그런 분위기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정교한 춤을 넣으면 오히려 이상해지지. 말 그대로 다 함께 추는 춤이야, 춤 그 자체.”

춤이란 원래 혼자 추기보다 같이 춰야 즐거운 법이다.

태초의 춤도 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누구든 쉽게 출 수 있도록 간결함을 추구했다.

“아라도 음악사 시간에 팝송 파티 음악 많이 들어봤었잖아. 팝스타들 중에선 댄스를 익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이 콘서트 돌 때 자기 노래에 어떤 춤을 붙였는지 알잖아?”

“……알죠.”

사람들이 따라 추고 쉽게 기억에 남도록 간단한 안무를 붙인다.

당연하게도, 쉬운 안무는 유행하기 쉽다.

클럽에서도 그러한 팝송이 나오면 다 같은 춤을 추는 진풍경을 볼 수 있기도 하다.

간결한 춤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다. 소녀연맹의 콘서트에서도 ‘보라색 튤립’은 단골 레퍼토리가 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래도 저희는 아이돌이잖아요. 이런 건, 이런 춤은…… 퍼포먼스도 아니에요…….”

조아라는 진심으로 이 안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성필과 백민정이 씁쓸한 미소를 교환했다.

“난 좋다고 생각해.”

그때 소녀연맹 내에서 성필의 아군이 등장했다. 장하양이었다.

“곡 분위기랑도 어울리잖아. 신나고.”

‘아라베스크’의 안무가 조아라의 영역이라면, ‘보라색 튤립’은 그 전체가 장하양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장하양의 주장으로 태어난 곡이기 때문이다. 초기 컨셉부터 후반의 곡 작업까지, 장하양의 숨결이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아라는 별로야?”

즉, 장하양의 ‘좋다’는 말은 그 어떤 것보다 무게감을 가질 수 있다.

조아라는 장하양을 보며 입만 뻐끔댔다.

그리고 할 말이 많지만 안 한다는 듯, 한숨만 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음, 일단 멤버들 내에서 투표만 해볼래? 그다음에 과반수가 동의 안 하면, 일단 하이라이트를 조금 더 고민해보는 걸로 하자.”

“……네.”

투표 결과를 보고, 조아라는 뒷목을 잡았다.

찬성 3, 반대 2였다.

반대 한 표는 당연히 조아라 자신이었다.

“어…… 그럼 시안 찍어서 A&R이랑 임원 회의로 올릴게.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그렇게 첫 번째 시안 공개는 떨떠름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

마무리됐어야 했는데.

“아라야.”

백민정이 그녀답지 않게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소심한 학생이 학급 회의 때 발언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너한테…… 아니, 너희 다한테 할 말이 있는데. 이건 오빠랑 손 이사님도 들어주셨으면 좋겠거든요.”

“아, 말해. 뭔데?”

“‘아라베스크’ 안무 수정하자.”

조아라가 2차 충격을 받았다.

후일 그녀가 오늘을 떠올리게 될 때, 이보다 더 자주 놀란 날은 없으리라.

놀란 건 조아라뿐 아닌, 이곳에 모인 가로 엔터 인원 전부였다.

특히 성필과 손혜빈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네……?”

“지금 너희한테 간 ‘아라베스크’는 덜어내기가 덜 됐어. 디테일이 너무 심하고 간략하질 못해.”

“당연하죠! 그걸 바라고 받은 안무잖아요!”

“아라야. 아이돌이 보여줘야 할 건 춤 자체가 아니라 춤을 추는 자신이잖아. 춤이란 건 매력을 보여주는 도구야.”

조아라가 적의를 잔뜩 담아서 백민정을 바라보았다.

백민정은 목구멍으로 바늘이라도 삼키듯 괴로운 미소를 띠었다.

“그 도구가 도리어 소녀연맹에게 해를 입히면, 바꾸는 게 맞잖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겠지.”

소녀연맹이 춤을 더 배운다면, 언젠가는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그럼 어쩌자고요!”

당장이라도 백민정에게 달려갈 것만 같은 조아라였다. 그런 그녀를 백설하가 겨우겨우 붙잡는 중이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될 것 같지만.

‘내가 말 안 해서 다행이다…….’

만약 성필이 안무를 바꾸자고 했다면, 조아라가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라베스크’가 멋진 이유는 백 쌤이 없애자고 하는 디테일 때문이에요!”

아이돌은 댄스 가수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건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고난도의 기술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멤버들과의 파트 배분을 잘 고려하거나, 보컬의 난이도를 낮추거나, 동선을 체계적으로 설정해 호흡을 벌 시간을 갖는다거나.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전문 댄서가 만든 안무 자체를 간략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덜어내면 ‘아라베스크’가 아니에요!”

다섯 명만이 무대에 올라간다.

그 다섯이 전부 카메라에 잡힌다.

그렇기에 모두를 눈에 띄게 만들 개성적인 움직임이 필요하고, 그 개성은 난이도로부터 나온다.

허나, 난이도를 낮추지 않으면 그룹이 죽어버린다.

‘아니’ 때도 겪었던 딜레마다.

딜레마는 그때보다 더욱 커져서 다가왔다.

“이 상태에서 디테일을 더 덜어내면 그저 그런 춤이 돼요! 그럼 소녀연맹만의 차별점도 없고요! 그걸 어떻게 채울……!”

“군무(群舞).”

군무. 여럿이서 추는 춤.

“군무진으로 보강할 거야. ‘아라베스크’는 보컬 난이도도 높으니까, 너희가 퍼포먼스를 완성하려면 댄스 난이도를 낮추는 건 필연적이거든.”

거기서 나오는 공백은 군무로 채운다.

백민정은 영상을 하나 틀어주었다.

가운데에 백민정이 서서, 그 옆과 뒤로 서른에 가까운 인원들이 선 게 보였다.

‘시안을 짠 거야?’

가로 엔터에서 따로 시안비도 준단 말이 없었는데, 백민정은 댄서를 서른 명이나 써가면서 시안을 만들어왔다.

‘그렇구나.’

성필은 백민정이 이해됐다.

조아라는 사랑스러운 제자다.

그녀의 꿈과 소망, 바람을 꺾는다는 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심지어 그 소망은 가로 엔터가 승인한 것이니, 줬던 물건을 뺏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정이도 가로 엔터랑 같은 고민을 했구나.’

그렇기에 시안을 찍어왔다.

영상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군무진의 움직임에, 다들 입 다물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수십 명이 만들어내는 일체된 행위.

팔이 그려내는 거침없는 선과 현란하게 펼쳐지는 스텝.

그로써 발생하는 압도적인 기세의 벽.

서른 명이 채워낸 움직임의 성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아라베스크’의 주제 중 하나인 연대를 춤이라는 형태로 빚어낸 듯한, 인간 개개인이 하나가 된 것만 같은 통일성이다.

영상이 끝나고, 백민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아라에게 다가갔다.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

고전 무용에서 말하는, 극과는 상관없는 개인 혹은 다수의 기교적인 춤을 말한다.

디베르티스망은 무용수의 독무대, 기교와 힘을 마음껏 발산하는 솔리스트의 카덴차와 같다.

굳이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댄스 브레이크.

“이걸로 봐주면 안 될까?”

걸작을 탄생시킨 안무가가, 그 업적과 맞지 않는 비굴한 투로 부탁을 입에 올렸다.

* * *

‘보라색 튤립’ 1차 시안은 A&R 회의를 순조롭게 통과하여 임원 회의까지 올라갔다.

성필과 손혜빈이 백민정의 시안에 긍정적이니, 사실상 A&R에서도 통과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긴 했다.

정지음과 엘릭도 이 안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야 지음아, 이거 나도 출 수 있겠는데? 나도 아이돌 해봐?”

“…….”

“너 할 말 있냐?”

“아뇨. 네, 뭐, 형 아이돌 하세요. 제가 앨범 한 장 사드릴게요.”

어쨌든, 1차 시안은 임원 회의에서도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긴 했다.

첫 번째로 한구인이 난색을 표했다.

“하이라이트만 따지면 연습 시간도 필요 없겠군요. 저도 지금 바로 따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해봐.”

“…….”

홍규헌의 명령에 따라 한구인이 삐걱삐걱 춤을 추었다.

의외로 본격적으로 하려면 각을 살리기 쉽지 않은 춤이었다.

“음, 일단 느낌은 알겠네. 역시 문제점은 임팩트가 없단 점인가.”

사람들이 감탄을 흘릴 테크니컬한 안무도, 시선을 사로잡는 포인트 강한 안무도 아니다.

‘보라색 튤립’의 하이라이트 안무는 정말 ‘그냥 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른 부분은 다 괜찮은데 말야.”

“임팩트는 백댄서로 해결할 생각이래요.”

“백 안무가가 백댄서 쓰는 건 처음이지 않나?”

“네. 백댄서는 하이라이트에만 등장하는 식으로 한대요. 이런 춤은 여럿이서 출 때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될 거라고 했어요.”

“그것도 그렇겠네.”

홍규헌은 1차 시안을 여러 번 돌려보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지속적으로 경청하여 결정을 내렸다.

“나는 좋아. 다들 같은 생각이겠지만. 그런데 조아라가 동의를 안 하는 분위기라며.”

“네. 아라가 많이…… 음, 싫어해요.”

“그럼 1차 시안 채택됐고, 곡 맞춰서 수정할 거란 것만 전해줘. 거기서도 조아라가 반발하면 아예 다른 시안도 받아보는 걸로 하자. 백 안무가 말고도 다른 안무가들한테서도.”

“알겠습니다.”

홍규헌은 지친단 듯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보라색 튤립’도 그렇고, ‘아라베스크’의 수정 안무도 조아라의 마음에는 안 드는 건가.”

어쩐지 점점 조아라에게 미안해지기만 한다.

“‘보라색 튤립’은 장하양에게 주도권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아라베스크’는 정말…….”

백민정의 수정 안무 시안을 보고, 홍규헌은 계속 입을 벌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멋지다.

그런데 멋져서 넋이 나갔던 건 아니었다.

홍규헌은 컴백까지, 그리고 앨범 활동 기간 중 백업 댄서 한 명에게 쓰는 돈이 얼마인지 알고 있다.

‘30명이면 돈이 얼마야…….’

하지만 굉장히 좋은 안무가 뽑혔으니, 조아라도 수긍해주리라 여겼다.

그런데 조아라는 극구 반대했단 모양이다.

“제가 계속 아라한테 말해볼게요. 다른 멤버들은 그날 이후로 마음이 기운 거 같아요.”

“‘아니’ 시즌 2네. 서로 갈라져서 안무로 갈등 일어나는 거 아냐?”

“……애들도 답을 찾을 거예요.”

결국에는 소녀연맹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미 안무 수정을 향한 바퀴는 구르고 있었다.

“그럼 저는 ‘보라색 튤립’ 시안 관련해서 알리러 갈게요.”

소녀연맹에게 시안에 관해 알리는 건 성필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구인도 같은 짐을 져주기로 했다.

“아라 씨가 화나서 짐승처럼 달려들면 제가 말려드리겠습니다.”

“아라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둘은 멤버들을 연습실로 불러 모아, 백민정의 1차 시안이 채택됐음을 알렸다.

멤버들의 시선이 조아라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무섭도록 경직된 표정으로 성필을 노려보았다.

“진짜요? 그게 됐다고요?”

“응.”

“안무를, 이런 안무 시안을 받아들인다고요? 아저씨 진심이에요?”

“…….”

아까 한구인이 했던 말처럼, 조아라는 당장이라도 짐승처럼 달려들 기세였다.

한구인이 성필을 흘기자, 성필이 작게 항변했다.

“뭐요.”

“……아닙니다.”

백설하가 조아라를 위로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조아라가 성필의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성필이 기겁하고, 한구인이 재빨리 조아라를 막아섰다.

“난 싫어요.”

조아라가 명확한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저요, 지금까지 참았어요. 데뷔 안무도 전체적인 난이도를 생각하자면서 안무 쉽게 만들었잖아요.”

장하양에게는 쉽지 않았으나, 조아라에게 ‘아니’의 안무는 너무도 쉬웠다.

그나마 백설하 정도가 익히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녀도 어렵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롱 포’도요. 춤이 멋지지만, 테크닉이 강조되진 않았잖아요.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언젠가 우리 멤버들 실력 올라가면 어려운 퍼포먼스도 도전하자고요.”

“아라야…….”

“지금은 안 돼요? 정규 1집이잖아요! 정규란 이름은 아무 데나 붙이는 거 아니라면서요! 저희, 소녀연맹 스토리가 끝나는 앨범이고, 역사적인 앨범인데, 이런 춤으로, 아니.”

춤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하이라이트 안무를 한다고?

‘아라베스크’를 어려운 안무로 채웠으니까, ‘보라색 튤립’은 이토록 대충 해도 된단 건가?

“저는 싫어요. 춤에 관련해선 멤버들 중에서 제가 제일 잘 아는데도, 지금까지 저는 의견 별로 안 냈어요. 제가 의견 냈던 안무들도 어렵단 이유로 잘렸었잖아요. 그러니까 정규 1집은, 이번에는, 이번만은 이걸로 하기 싫어요.”

연습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조아라는 어리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의견은 존중받을 가치가 충분했다.

비록 멤버 과반수가 현재 시안을 지지하고, A&R팀과 임직원 회의마저 통과했더라도, 조아라는 아티스트니까.

또한 춤에 누구보다 진심이니까.

“그래, 그럼 일단 보류할게. 사장님이 다른 안무가분들한테도 시안을 받아보라고 하셨거든. 아라 네가 싫어하면 말야. 1차 시안은 일단 킵해두자. 다른 시안들 왔을 때 다시 보고.”

“……네.”

자존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새 시안을 받기로 했음에도 조아라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사님.”

성필이 나가려던 때, 장하양이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응?”

“‘아라베스크’ 안무 수정은 어떻게 됐나요?”

겨우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금 짙게 깔린 안개처럼 칙칙해졌다.

“그건 아직…….”

“사장님이랑 임원분들의 의견을 알고 싶어요. 결정 사항이 아니더라도, 찬반 정도는 나뉘지 않았나요?”

장하양의 눈빛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수함 안에서, 성필은 어느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하양이는 알고 있어.’

임원진들의 의사가 수정 쪽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을, 장하양은 이미 안다.

그래서 굳이 이 자리에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 오늘 말하기로 했잖아.’

시안을 보러 갔더니, 백민정이 선수를 쳐서 말하지 못했었지만.

오늘 성필은 조아라에게 할 말이 있었다.

장하양은 그녀 나름 성필에게 용기를 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멤버들이 모두 모인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조아라에게 말할 것인가.

“나뉘었지.”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합의가 났어.”

조아라의 눈이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성필의 목소리가 절대로 호의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저, 씨…….”

“아라야, ‘아라베스크’는 수정해야 해. 서학준 안무가님도 차도가 없으면 최대한 빨리 수정하라고 언질을 주셨었어. 혜빈 누나도 이건 너희들이 할 수 없는 퍼포먼스라고 했고. 그리고, 오늘 민정이도…….”

거기에 더해서, 가로 엔터의 사장인 홍규헌과 임원 전체가 수정 쪽을 지지했다.

“물론, 강제로 바꾸진 않을 거야. 너희 중 과반수가 동의하지 않으면 수정은 없어.”

데뷔곡인 ‘아니’에서도 그러했으니까.

장하양의 퍼포먼스 난이도를 떨어뜨리자고 요청했던 건 두 명뿐이었다.

신아름과 조아라.

그랬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필이 장하양을 믿어줄 수 있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더 동의했다면, 장하양은 퍼포먼스는 강제로 바뀌었을 것이다.

“판단은 너희들 몫이야.”

거기까지 들은 조아라는.

“끅…….”

입술을 물며, 억지로 울음을 참고.

“아라야!”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 * *

조아라가 가출했다, 같은 일은 없었다.

세면장에 좀 오래 있다가 아무 일 없단 듯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멤버들과 잠시 대화하더니.

“안무 안 바꿔요.”

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성필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는 수밖에.

‘그래도 설득은 계속해야지.’

조아라가 후회하는 미래를 보았다.

그런 미래를 조아라에게 안겨주고 싶진 않다.

그녀에게 미움받더라도, 성필은 그녀의 가슴 속에 쌓일 검은 퇴적물을 하나라도 줄여주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아라 안 왔어?”

저녁에 조아라의 상태를 보러 갈 겸 연습실로 갔는데, 그녀는 없었다.

밥을 먹고 잠시 산책이라도 하러 나갔다는 것 같다.

가로 엔터 야근왕이란 타이틀을 받은 성필은 느긋하게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라가 전화를 안 받아요!”

그런데 기어이 일이 터졌다.

조아라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일단 너희는 연습하고 있어.”

“저희도 같이 찾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백설하는 자식이 집이라도 나간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괜찮아. 최악의 사태에는 경찰을 부르면 돼.”

“……그, 그러면 아라가 너무 수치스럽지 않을까요?”

심지어 경찰이 찾아내면, 앞으로 얼굴도 못 들고 다닐지도 모른다.

마치 미아가 된 꼴일 테니까.

“농담이야. 찾으러 갔다 올게.”

“네…….”

성필은 가볍게 뜀박질했다.

조아라가 있을 법한 장소로 추측되는 곳이 있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또 혼자 술 마시고 있어?”

옛날, 진저가 가로 엔터로 찾아온 후 조아라는 홀로 근처 편의점 테라스에서 술을 먹었었다.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다.

성필은 자연스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습은 어쩌게.”

조아라는 성필을 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꺼져라’라는 사인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성필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혼자 있고 싶었으면 굳이 여기로 올 필요가 없지.’

조아라는 자신을 찾아달라고 외치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성필을 무시하는 것도, 계속해서 말을 걸어달라는 표시였다.

어린아이들이 삐치면 흔히 하는 행동 같은 것이다.

“미안, 아라야. 일이 이렇게 돼서. ‘아라베스크’ 안무 있잖아, 막상 받으니까 느낌이 전혀 다르더라. 너도 조금씩 느끼고는 있지?”

멤버들이 따라오는 게 느리단 것을, 조아라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춤에 대한 그녀의 직감은 정확하다.

‘아니’를 연습할 때도, 신아름이 꾀어내서긴 했지만 장하양이 퍼포먼스를 완성할 수 없으리라고 의견을 내기도 했었다.

정말로 장하양은 퍼포먼스를 완성하지 못했었다. 대신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만들어냄으로써 해결했었다.

“아라야, 이건 내 잘못도 있어. 프로듀서로서 너희의 역량을 잘 파악했어야 했는데…….”

성필은 ‘소녀연맹의 역량이 낮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나도 너무 들떴었나 봐. 진작 냉철해졌어야 했어. 미안, 정말로.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자. ‘아라베스크’는…….”

“왜 안 믿어줘요.”

긴 침묵 끝에 나온 조아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어두웠다.

“응?”

“왜, 하양 언니처럼 안 믿어줘요.”

“……어?”

“하양 언니는, 사장님이랑 전부 다 반대했는데도 끝까지 믿어줬었잖아요.”

드디어 조아라가 고개를 들었다.

성필은 심장이 바닥 끝까지 철렁이는 듯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내가 하자는데, 나는 안 믿어줘요? 내가 못 미더워요?”

“아니, 아냐, 난…….”

“정말 못하겠으면 나중에 바꿔도 되잖아요.”

조아라는 맥주캔을 꽉 쥐었다.

반쯤은 맥주가 차 있을 캔이 조아라의 손 모양을 따라 우드득 찌그러졌다.

맥주의 거품이 탄산을 안고 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저씨는 그냥…… 내가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거죠……?”

“…….”

“내 주장에 스스로 책임도 못 지는 어린애…….”

“아니야 아라야. 그렇게 생각 안 해.”

“……하.”

조아라는 목 막힌 웃음을 뱉었다.

“그래요? 그럼 뭔데요. 하양 언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거면.”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차 있었다.

“나보다 하양 언니를 더 좋아하는 거예요? 편애죠? 그렇겠죠,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끝까지 믿어주겠어.

장하양보다 뭐가 낫다고 좋아하겠어…….

“이제 됐어요…….”

성필은 할 말이 없었다.

아주 옛날, 조아라는 ‘아저씨 리카 편애하는 거죠?’라거나, ‘왜 설하 쌤만 그렇게 신경 써요?’ 같은 말을 자주 했었다.

물론 장난이다. 진심이 10%쯤 들어간 장난.

그때 성필은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 했었다. 편을 가르게 되는 촉매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저씨 말 듣기 싫어요…….”

테라스의 테이블 위에는 ‘야자수 프렌즈’의 케이스를 끼운 핸드폰이 올라와 있었다.

성필이 조아라에게 훈계한 뒤 주었던 선물 중 하나. 조아라가 성필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을 때 매몰차게 쳐낸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

동시에, 조아라가 자신이 차별당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해서 준 선물이었다.

“이제, 그냥, 가요.”

조아라는 화를 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모두가 자신이 밀고 있는 안무를 수정하자는 데서 나온 분노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야 성필은 조아라가 굳이 울음까지 터뜨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별, 이라고 느꼈겠구나.’

왜 장하양은 됐는데, 자신은 안 되지?

왜 자신은 끝까지 안 믿어주지?

어째서.

아, 그렇구나.

자신이 장하양보다 못하니까, 더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으니까, 믿음을 받지 못하는구나.

“안무를 바꾸든 말든, 걍 아저씨 맘대로…….”

성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라야.”

조아라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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