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06화 (206/760)

206화

성필은 무언가 정강이를 쓰는 느낌이 들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방금 카페로 들어온 터라 몸이 다 녹지 않았는데, 또 소름 돋는 감각이 찾아오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버렸다.

재빨리 테이블 아래를 보았다.

조아라의 발이 성필의 정강이를 위아래로 쓸고 있었다.

다시 테이블 위로 고개를 들자.

“뭐 해.”

“장난이요.”

선글라스를 쓴 채 실실 웃는 조아라가 보였다.

그녀는 롱패딩으로 몸을 김밥처럼 감싼 채 편히 앉은 모습이었다.

“그만해.”

“싫은데.”

테이블 아래에서 성필과 조아라의 격렬한 발 싸움이 벌어졌다.

테이블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 흔들렸다. 싸움은 성필의 아메리카노가 조금 쏟아지는 것 때문에 마무리되었다.

“너 발 좀 그만 놀려.”

얼마 전, 소녀연맹이 저마다 도전 과제를 달성하는 영상을 찍었다.

조아라에게 주어진 과제는 ‘발로만 사탕 까기’였는데, 정말 해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조아라는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장점은 더 살려야 되는 거잖아요.”

“발놀림을 어디다 살리…….”

성필은 흠칫하더니 몸이 굳었다.

무언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사람 같았다.

“어디 살리긴요. 춤출 때 쓰지.”

“……응. 그건 됐고, 너 목마르다고 해서 왔잖아. 왜 한 모금도 안 마시고 있어.”

“쓰읍, 아이스로 시키지 말 걸 그랬어요. 안 그래도 추운데, 이거 마시면 더 추워질 거 아니에요.”

“다른 거 마실래?”

“됐어요. 몸 좀 녹으면 마시죠 뭐.”

그 순간, 나른하게 앉아 있던 조아라의 시선이 번쩍 돌아갔다.

그녀의 눈은 카페의 모서리에 설치된 스피커로 향했다. 그곳에서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아라야?”

초조해하는 조아라의 태도를 보곤, 성필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던 조아라는, ‘아라베스크’가 흘러나오는 내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상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든 건 ‘아라베스크’가 끝났을 때였다.

“아, 이제 쫌 따뜻하네.”

조아라는 언제 이상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기쁘게 포도 에이드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건 평정을 꾸며내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성필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신경 쓰는 걸까.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작년에 소녀연맹이 냈던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 아라베스크.

결국 소녀연맹은 아라베스크의 퍼포먼스를 완성해내지 못했다.

‘누나가 러닝머신 위에서 노래 부르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곡이랬지.’

그 말대로였다.

백설하와 리카를 제외한 이들은, ‘아라베스크’를 완벽히 구현할 수준의 체력 배분에 번번이 실패했다.

‘멤버들의 파트 부담을 덜려고 리카랑 아름이가 많이 노력했는데도 그랬지.’

메인 보컬과 서브 보컬을 잇는 포지션, 그게 바로 리드 보컬이다.

신아름과 리카는 어떻게든 퍼포먼스의 정상화를 위해서, 부단히 자신들이 소화해야 할 파트를 늘려갔었다.

‘하양이랑 아라는 파트를 줄여야만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 신아름은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었다.

장하양과 조아라의 파트는 다른 멤버들과 비교해서 확연히 적어졌다.

‘아니, 하양이는 랩 파트라도 있었지만 아라는…….’

소녀연맹은 AR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써 퍼포먼스의 과중함을 덜고 나서야, 소녀연맹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소녀연맹은 최초로 라이브를 포기한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할 만한 건 아니야.’

무대의 완성도를 위해서 곡에 보컬을 삽입하는 건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라이브는 그녀들의 정체성이자, 홍규헌이 꿈꿔왔던 그룹의 필수 조건이었으니까.

“아라야, 아직도 신경 쓰는 거야?”

그 질문에, 조아라는 피식 웃었다.

“‘아라베스크’요? 내가 그걸 왜 아직도 신경 쓰고 그러겠어요.”

다 옛날 일이다.

그런데도…….

‘아라베스크만 들으면 죄지은 듯 고개를 숙이는 거야?’

조아라는 과거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옛날의 그녀는 소녀연맹의 퍼포먼스를 완성하지 못했단 죄책감에 한동안 시달렸다.

시간이 지나니 나아졌다고 생각했으나, 아닌 모양이다.

“아라야.”

성필은 그녀를 위로하려다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조아라는 위로를 위로로 듣지 못할 테니까.

“왜요?”

“……너, 음료 턱 부분에 흘렸어.”

“어, 진짜네.”

“칠칠치 못하게 왜 이러냐. 뭐 마실 때 천천히 좀 먹어.”

“닦아줘요.”

성필이 중지를 들었다.

조아라는 툴툴대면서 티슈를 가지러 떠나갔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성필도 아까의 조아라와 같이 고개를 깊이 내리깔았다.

‘아라는 얼마나 괴로울까.’

창작자가 겁이 나서 본인의 작품을 듣지도 못한다는 건 어찌나 비극적인 일일까.

아티스트가 부모라면 작품은 자식이다.

그런데 아티스트가 그 자식을 볼 때마다 후회하고 괴로워한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조아라는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빨리 안무를 바꾸자고 했다면.’

조아라의 반발을 감수하고서라도, 멤버들이 소화할 수준까지 난이도를 낮추기만 했어도…….

이렇게 후회를 곱씹더라도, 당시의 성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아라를 설득할 말이 없었어.’

조아라의 미소를 바라보면 언제까지고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아니’ 때, 성필이 장하양을 믿어주었던 것처럼. 성필은 조아라를 향해서도 믿음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장하양 때와는 달랐다.

소녀연맹은 라이브 퍼포먼스를 포기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조아라의 가슴에는 상처마저도 덧씌워졌다.

“아저씨, 어디 아파요?”

성필이 고개를 들자 환히 웃는 조아라가 있었다.

“뭐, 갈 때 운전은 내가 할까요?”

조아라의 미소는 밝고 아름답다.

저 미소에 때때로 구름이 끼고, 그녀의 마음에 가끔씩 밤이 드리워진다고 생각하면.

성필의 가슴으로 고통이 깊이 고인다.

* * *

“박 이사님?”

한구인의 부름에, 성필은 미래의 풍경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슴을 가득 채운 후회와 입 안을 감도는 쓴맛은, 방금 보았던 게 확정된 미래란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

“……성필이 너도.”

손혜빈은 미안함을 잔뜩 담아 말했다.

“생각이 있을 거야.”

그녀는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연맹이 ‘아니’란 곡으로 데뷔를 준비할 때, 다들 장하양의 퍼포먼스 난이도를 낮추자고 했었다.

하지만 성필이 허리를 숙이면서까지 장하양에게 시간을 주자고 간청했었고, 홍규헌이 그것을 받아들였었다.

“생각이 있겠지만, 내 의견도 가볍게 생각하진 말아줘.”

오로지 부정확한 믿음에 근거했던 성필의 고집이었다.

그 믿음은 결국에 빛을 발했으나, 성필이 원하던 형태는 아니었다.

장하양이 퍼포먼스를 수정했었으니까.

최후의 최후까지, 장하양은 원래 정해져 있던 안무를 구현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네가 얼마나 애들을 신뢰하는진 알아.”

성필의 믿음에 가치가 없던 건 아니다.

소녀연맹 전원이 그 믿음에 보답해주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불사르게 되었으니까.

그건 성필의 믿음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었고, 현재의 소녀연맹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다.

“아니까, 네 결정을 기다릴게.”

이제 와서 성필에게 ‘안무를 수정해야 해’라고 말하는 건, 그에게 ‘애들을 믿지 마’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손혜빈은 미안할 수밖에 없…….

“어, 바꿔야겠다.”

“응, 그렇겠지. 네가 그…… 어? 바꿔?”

손혜빈과 한구인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혹시나 성필이 ‘바꾼다’는 말의 뜻을 오해하고 있진 않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바꿔야 해.”

‘애들한테만 믿고 맡길 순 없어’란 뜻이다.

그리 말하는 성필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듯 할 텐데, 분명 그럴 텐데.

“성필아?”

성필의 표정에선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손혜빈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바꿔야 해.’

후회할 테니까.

조아라가 후회 속에서 몸부림치는 삶을 사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조아라는 소녀연맹의 정규 1집을 들을 때마다 창피함을 느낄 것이다. 아예 정규 1집 같은 건 보지 않고 살지도 모른다.

정규 1집을 흑역사로 규정하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아라가 그런 꼴이 되는 건 못 봐.’

자신의 실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후일에는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길 바란다.

실수가 들춰질 때마다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 따위, 성필의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볼 수 없다.

“박 이사님, 진심이십니까? 그럼…….”

“네, 진심이에요. 알아요, 저도.”

조아라랑 대립하게 될 게 분명하다.

성필이 지금까지 했던 ‘믿는다’는 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조아라를 철저히 논파해야 한다.

“‘안 좋아’가 아니라, ‘불가능해’로 설득의 중심을 잡아야 해요.”

불가능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니까.

장하양 때, 성필이 끝까지 그녀를 믿었던 이유도 후회할 미래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보았다면 주저할 틈이 없다.

성필은 방금 보았던 미래를 질게 씹으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익숙한 일이잖아.’

전생에서도, 성필은 수많은 아티스트와 배우의 요청을 물리쳐왔다.

그들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얻는 행복보다, 잘못 선택함으로써 얻는 불행이 더 클 때마다.

‘거절하는 거야.’

모든 신화나 전설, 소설에서 예언자의 말로는 좋지 못하다.

그들은 미래를 보는 대가로 사람들의 믿음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사람들은 예언자를 이상하게 볼 뿐이다. 예언자의 말은 현실과 엇나가 있으니까.

‘그 엇나감을 설득하는 게 내 역할이고…….’

조아라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다.

비록 그녀는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필을 원망하며, 종국에는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성필이 마땅히 져야 할 짐이다.

“성필아, 설득할 수 있겠어?”

손혜빈은 자신이 꺼낸 이야기이지만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벽이 다름 아닌 조아라니까.

춤에 관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안무를 지킬 명분도 충분하다.

“지금까지 댄스 퍼포먼스 관련해선 자기 의견도 포기해왔던 애야. 그런데 이제야 자기 의견 제대로 내기 시작했고. 그런 애한테 무슨 말이 먹힐지, 난 모르겠다.”

“그러게…….”

성필에게도 힘든 일이다.

이제껏 소녀연맹에 관련해서 미래를 본 경우는 두 번이다.

첫 번째, 장하양.

성필은 진심을 다한, 거의 구애에 가까운 말로써 장하양을 설득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리카.

성필이 ‘아무 말 말고 한 번만 믿어줘’라고 하니, 리카가 정말 아무 말 않고 믿어주었다.

“아라를 어떻게 설득할까.”

세 번째, 조아라.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인가?

* * *

‘이건 된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백민정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춤을 마치고 엔딩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엔, 큰일을 달성한 것 같은 만족감이 은은히 서려 있었다.

“와, 나도 아이돌 해볼까?”

같이 춤을 춘 댄서들이 말없이 백민정을 흘겼다.

‘농담이야……’라고 말한 백민정은 쓸쓸히 캠코더를 켰다. 그리고 다시 ‘보라색 튤립’의 안무를 추었다.

“잘 나왔다. 이건 진짜 되겠지? 먹히지?”

댄서들은 무조건 ‘최고예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춤이 좋았기도 했고, 자그마한 흠집이라도 잡는 순간 또 새벽을 지새며 안무 창작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안무 정리는 시안이 채택되고 난 뒤에 해도 되겠지…….

“다들 수고했어!”

댄서들을 돌려보낸 백민정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안무 시안을 확인했다.

‘역시 쌤이다.’

상담 한 번 받았을 뿐인데도 아이디어가 마구마구 뿜어져 나왔었다.

덕분에 지지부진했던 ‘보라색 튤립’의 안무까지 일사천리로 만들지 않았던가.

‘뭐, 상담이라기보다는 험담을 들은 데 불과했지만.’

스승이 도움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시안을 가로 엔터에 보내기만 하면…….

“음.”

백민정은 핸드폰을 켜서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확인했다.

계속 보아도, 이건 소녀연맹이 해내기엔 어려울 것 같다.

‘춤만 추면 몰라도, 노래까지 부르라니.’

허들이 너무 높다.

그 허들을 뛰어넘은 백설하는 대체 뭘까.

밤마다 좋은 거라도 챙겨 먹나?

‘뭐, 젊으니까.’

인간은 21세에서 23세 정도가 신체 능력의 절정기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백설하는 딱 23세였다.

전성기의 힘을 빌려, 경험과 배움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성공시킨 게 아닐까…….

“뭔 소리래.”

그냥 백설하가 아이돌로서 뛰어난 거겠지.

하지만, 다른 애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나마 리카나 신아름 정도가 아슬아슬하게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

백민정은 한참 동안 ‘아라베스크’의 안무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영상이 나오는 액정을 손으로 쓸었다.

‘멋지다.’

스승인 서학준이 만든 안무가 섞이고, 그가 직접 여러 시안을 편집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조금이라도 안무를 바꾸는 순간, 서학준이 만든 안무의 미(美)는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백민정으로서는 수정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

정말 그럴까?

이게 정말 완벽한 ‘아라베스크’일까?

두 스승 중 하나인 서학준에 대한 후광과 백민정이 쌓아온 안무가로서의 경험이 어지러이 뒤섞이며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결론.

‘완벽하지 않아.’

고객이 소화할 수도 없는 안무를 주는 건 안무가로서 실격인 짓이다.

서학준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건 그의 실수가 확실하다.

그리고 그 실수를 깨달은 백민정.

안무가는.

‘수정하자고 해야 해.’

결정을 내렸다.

소녀연맹을 맡아온 정과 의리가 있다.

자신의 손을 떠났단 이유로 방치하긴 싫다. 비록 사랑스러운 제자인 조아라와 싸우게 된다 해도, 이건 강하게 주장해야만 한다.

“야.”

백민정은 동료 댄서에게 연락했다.

“그, 아이돌 백업으로 설 만한 애들 좀 모아줄 수 있냐?”

몇 명? 이란 답이 돌아왔다.

백민정은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30명?”

상대편은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고, 백민정의 계획을 듣곤 허탈하게 웃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백민정은 시원하게 웃었다.

‘내가 설득해야 하는 거니까.’

그만한 성의는 보여줘야겠지.

비록 돈은 못 받더라도 시안을 하나 가져다가 가로 엔터에 바쳐야겠다.

백민정은 시원하게 스트레칭을 하곤 여느 때처럼 거울을 노려보았다.

거울로 서학준이 떠올랐다. 그의 우아한 몸짓이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이어갔다.

저 안무를, 지금까지 하늘 위의 존재로만 여겼던 서학준의 춤을.

‘내가 바꾸는 거야.’

백민정은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우상을 향해.

* * *

‘아라베스크’의 안무가 나오고 난 뒤, 가로 엔터는 주간 평가 시스템 체제에 들어갔다.

멤버들은 주마다 퍼포먼스 완성도를 평가받았다.

첫째 주.

“음, 괜찮네.”

둘째 주.

“저번보다 낫네.”

셋째 주.

“음.”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갔다. 그러면서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거 애들이 할 수 있는 수준 맞아?”

동작의 정교함이나 동선을 바꾸는 속도 등은 점점 나아진다.

나아지긴 하지만, 그게 꼭 완성에 다다를 수 있단 뜻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춤의 난이도가 상당하다. 서학준이 찍은 안무 영상과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보면 괴리감이 상당하다.

“덜어내기를 했는데도 이 정도야?”

이건 가로 엔터에서 자체적으로 다시 퍼포먼스를 수정해야 할 수준이다.

댄스 퍼포먼스 강화는 조아라의 의견이라, ‘아라베스크’의 안무에는 조아라의 피드백이 잔뜩 들어가 있다.

당연히 그 기준은 조아라였다.

“이게 아라 나름 양보를 많이 한 거래요.”

“그런데도 이 정도라고…….”

홍규헌은 서학준의 댄스 영상과 방금 찍은 소녀연맹의 퍼포먼스 영상을 비교했다.

“사장님, 계속 하양이만 보고 계신 거예요?”

“어? 어, 음, 아니.”

말은 그렇게 했다만,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서학준과 장하양.

가장 잘하는 사람과 가장 못 하는 사람이니, 그 차이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굳이 장하양이 아니더라도, 조아라를 제외한 이들이 서학준의 춤을 온전히 따라가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감히 ‘바꾸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뭐어, 기다리자.”

만약 ‘바꾸자’고 하면, 성필이 당연하게도 책상에 이마를 처박고 ‘믿어주세요!’라고 할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미 ‘아니’ 때 겪었던 일이다.

이게 가로 엔터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손혜빈이 직접 ‘아라베스크’를 시연하고 안무 수정을 건의한 뒤, 그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임원 전체가 안무 수정을 논의했다. 이어서 홍규헌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아, 드디어.”

홍규헌은 도리어 안심하는 듯했다.

홀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손 이사가 그렇다면야.”

댄스 가수로서 상당한 경지에 오른 그녀가 포기하자고 말할 만큼 어려운 안무다.

그렇다면 존중해주는 게 맞을 터다.

하지만 그녀를 존중하는 것과 안무를 바꾸는 건 다른 이야기이다.

홍규헌은 성필을 흘끔거렸다.

“저도 동의했어요.”

“그럼 됐네. 그런데 애들한테는 어떻게 말하게?”

지금부터 그걸 연구해야 한다.

홍규헌을 포함한 임원들은 며칠 동안 조아라를 회유할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녀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회상하고, 주고받은 톡과 문자를 분석하고, 한구인의 도움을 받아서 조아라의 성격을 감정해보고…….

심지어 조아라의 설득에 쓰일 대본까지 작성했다.

“결행은 내일입니다.”

그 노력의 끝에 결행일이 정해졌다.

성필은 피로가 짙게 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일은 민정이가 ‘보라색 튤립’의 1차 시안을 보여주는 날이에요. 직접 보러 오라고 했을 정도니까, 꽤 잘 뽑혔을 거예요.”

조아라는 백민정의 안무를 좋아한다. 그녀가 시안을 만들 때마다 직접 보러 갈 만큼 말이다.

“아라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어떤 말이든 하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하기 힘든 부탁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분이 좋을 때를 노리는 것도 방법이다.

“거기에다가.”

손혜빈이 며칠 전에 산 ‘야자수 프렌즈’ 굿즈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제가 친구한테 부탁해서 구한 한정판 굿즈예요.”

조아라는 야자수 프렌즈를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한다. 그 굿즈를 받으면 기분이 2배로 좋아질 것이다.

“제가 아라한테 선물로 줄게요. 이유는 적당하게 붙여서요.”

자,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상황에서, 성필이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무릎 꿇을 기세로 아라한테 부탁하는 거죠. 실패하면 한 이사님은 며칠 굶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무릎을 꿇으세요.”

“……박 이사님은 무릎 꿇을 기세고, 저는 무릎을 꿇는 겁니까?”

“잘생긴 남자가 무릎 꿇고 애원하는 건 보편적인 판타지예요. 아라도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지 않을까요?”

“나는 못생겼단 거야?!”

“성필이 너도 잘생겼지. 한 이사님보다는 아니지만.”

“…….”

조아라만 설득하면 다른 멤버들까지는 일사천리다.

춤에 가장 정통한 건 그녀이니, 조아라가 바꾸자고 한다면 멤버들도 반발은 없을 터다.

“애초에 멤버들도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아라베스크’를 연습하면 할수록 안무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지 깨닫기만 할 뿐이다.

“연습으로 어찌할 수준이 아니란 건 애들도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누구도 조아라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다. ‘아라베스크’는 조아라의 소망이 담겼고, 리더인 백설하와 멤버들의 지지로 이뤄진 춤이니까.

그나마 신아름 정도가 툴툴거리는 게 불만의 전부였다.

“하지만 저희가 이 부탁을 꺼내면, 그때부터 소녀연맹 내에서도 퍼포먼스에 관한 논의가 진지하게 오고 갈 거예요.”

그때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멤버들 사이에서 그럴듯한 합의가 나오기까지, 가로 엔터는 기다려야 한다.

“자, 그럼.”

성필이 손을 내밀었다.

홍규헌, 손혜빈, 한구인이 그 위에 손을 겹쳤다.

“해냅시다.”

가로 엔터 파이팅!

열띤 구호 뒤, 피로에 절어버린 임원들 사이의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설하가……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사실, 이 모든 일은 백설하가 ‘아라베스크’ 퍼포먼스를 해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학준마저도 ‘어케 했냐?’라며 놀랐었다.

백설하의 작은 날갯짓이 현재를 만들었다.

“설하는 나중에 진짜 솔로 앨범 내줘야 해.”

“그러게. 설하가 누나의 적법한 후계자 아냐?”

어쩌면, 죽어버린 한국 솔로 가수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설하의 실력에 관한 대화가 장난스레 주제로 오르고, 밝은 분위기로 대화하면서도, 다들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들은 내일, 조아라의 소망을 꺾어야 하니까.

성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라야.’

미안해.

* * *

“힘내십시오.”

성필이 결연한 태도로 한구인과 악수했다.

지금부터, 성필은 백민정의 ‘보라색 튤립’ 시안을 보러 그녀의 학원으로 향한다.

‘시안을 보고 난 뒤, 아라가 기분이 좋아지면 말하는 거야. 말해야 해, 말하자, 말해라 박성필!’

성필은 기대감과 걱정을 안고 손혜빈, 멤버들과 함께 백민정의 학원으로 향했다.

일단 1차 시안을 본 뒤 멤버들이 의견을 내어 그것을 반영하고, 그렇게 완성된 1.5차 시안을 A&R과 임원들이 심사할 것이다.

“어서 와.”

학원의 연습실로 들어서자, 백민정은 기다렸단 듯 네 명의 댄서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바로 시작하는 거야?”

“차라도 타 줄까?”

“아냐. 바로 보여주는 게 우리도 편하지.”

가로 엔터 인원들도 의자에 앉아 백민정과 댄서들의 시안을 기다렸다.

특히 조아라는 눈이 빠져라 백민정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안무는 조아라가 가장 기대하는 프로덕션 파트였다.

“시작할게.”

하지만 실제로 시안이 선보이자, 조아라는 당황을 금할 수 없었다.

“어때?”

백민정은 기대에 차서 성필을 보았다. 그리고 제자의 반응도 기대하는 듯 조아라의 기색을 살피기도 했다.

조아라는 백민정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고도 도저히 긍정적인 반응을 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보라색 튤립’은 안무를 짜기 어려운 곡이라고 듣긴 했다. 하지만 조아라는 백민정을 믿고 있었다.

백민정이라면 어떻게든 좋은 안무를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는데…….

‘대체, 하이라이트가, 이건.’

다른 부분은 괜찮다.

감각적이고 좋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하이라이트에 들어서면, 백민정과 댄서들은 편하게 선다. 그리고 좌우로 가볍게 발을 옮기는 것을 반복한다.

동시에 느슨하게 쥔 주먹을 가슴께에 두고, 박자에 맞춰 흥겹게 위아래로 흔든다.

그게 전부다.

그게, 하이라이트 안무의 전부인 것이다.

‘이건 그냥 아무한테 노래 틀어주고 춤추라고 할 때 나오는 막춤 같잖아!’

발을 좌우로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손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

어린애한테 막춤을 추래도 저 비슷한 춤을 출 게 분명하다.

그나마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거나 박수를 치는 등의 변화는 있지만, 그것도 안무라고 보긴 뭐했다.

‘이건, 진짜로, 걍 막춤이잖아…….’

이딴 거, 안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이야, 좋은데?”

“좋다고요?!”

손혜빈의 감탄에 조아라는 경악으로 되돌려주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손혜빈의 망막에 상처가 생겨서 시력이 안 좋아졌나?

“에에…… 그게, 하이라이트 안무는 그게 전부인가요?”

리카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소녀연맹 멤버들도 당혹스럽긴 매한가지였다. 그런 걱정을 향해, 백민정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응, 이게 다야. 익히기도 쉬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익히기 쉬운 건 눈에 보인다.

할아버지를 데려와서 춰보래도 출 수 있을 테니까…….

“야, 성필아 이거 좋…….”

손혜빈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아, 그렇지. 오늘 아라한테 말하는 거였지.’

성필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손혜빈의 질문에 답할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그도 ‘보라색 튤립’의 시안은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그가 바랐던 상황이 아니었다.

‘분명 곡에 잘 맞춘 안무이긴 한데.’

그것을 보는 조아라의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인다.

조아라의 기분이 좋을 때를 노려 ‘아라베스크’ 안무 수정을 요청하려 했는데, 그 계획이 다 무너져버렸다.

아니, 무너진 건 아니더라도 계획의 난이도가 몇 배는 올라가 버렸다.

안 그래도 ‘보라색 튤립’의 시안을 보고 심기가 불편해진 조아라에게 ‘아라베스크’ 안무까지 바꾸자고 하면…….

‘살해당할지도 몰라!’

성필은 덜덜 떨면서 백민정을 보았다.

백민정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싱글싱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빠는 어때? 좋아?”

백민정, 네가 밉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