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05화 (205/760)

205화

“내용물은 미니 앨범보다 더 실하게 담아줄 거예요.”

소녀연맹의 미니 앨범인 Girls’ Craving도 내용물이 후하다며 평판이 자자했었다.

정규 앨범은 그보다 더 담아줄 것이기에, 버전을 다섯 개로 나눠 팔아도 죄책감은 없다.

“앨범은 소장품의 의미가 강하니까요.”

전 세계적으로 앨범 판매량은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상승하는 추세다.

팬덤을 위시한 아이돌이 강세를 보이는 한국에서, 앨범이란 음악을 듣기 위해 사는 게 아닌 소장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써 판매된다.

그렇기에 팬들이 원하는 포토 카드나 사진집을 따로 넣어주는 것이다.

“상품이 늘어나면 팬들도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닐까요?”

성필도 케이어스가 앨범을 열 개 버전으로 발매한다면, 하나도 빠짐없이 살 의향이 있었다.

물론 버전마다 내용물이 개성적으로 차별화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냥 패키지 껍데기만 바꿔서 파는 수준이면, KS 엔터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애들이 사진 찍느라 고생 좀 하겠네.”

개인, 단체 사진집을 10종류나 만들려면 기획에 걸리는 시간을 포함하여, 완성까지 시간이 꽤 빠듯할 것이다.

홍규헌은 처음에는 성필의 의견을 악마 같다고 표현했으나, 정규 앨범이니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는 범위 안이다.

“그쪽은 홍보팀이 고생해주고…….”

“아, 홍보하니까 생각났는데요. 아직 구체화된 건 아니긴 하거든요.”

“뭔데?”

손혜빈은 감탄하라는 듯이 잔뜩 폼을 잡았다.

“저희가 이번 앨범으로 해외 팬을 위한 시스템을 확대하기로 했잖아요. 그런 김에, 외국 팬미팅 응모권도 넣는 거 어떨까요?”

“외국 팬미팅……?”

미국이나 일본에서 또 팬미팅을 열어야 하는 것일까?

해외 전체로 가늠하면, 소녀연맹의 팬덤은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팬미팅의 범위를 국가 단위로 한정한다면, 괜히 가로 엔터가 돈을 더 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팬미팅 안 해주는 나라가 있으면 해외에서 차별 논란도 뜰 텐데.”

“아뇨 아뇨 인터넷 팬미팅이요. 애들은 영어로 말하고요.”

“인터넷으로?”

“네. 일단 응모권이 있으면 접속할 수 있고, 응모권 한 장당 메시지를 한 번 보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메시지의 용량은 100자나 200자 정도로 제한하고, 팬미팅을 진행하는 스태프들이 대표적인 것을 뽑아 멤버들이 읽거나 하면 꽤 그림이 나올 것이다.

“이러면 해외 인민이들도 앨범을 사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생기지 않을까요?”

“구현할 수는 있어?”

“뷔라이브 쪽이랑 연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플랫폼을 찾아야겠죠.”

가로 엔터는 그 정도 기술을 구현하는 데 쓸 돈은 없으니까 말이다.

개발 기간이 얼마일지도 모르고.

“괜찮네.”

홍규헌이 긍정적인 사인을 보냈다.

실행하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겠으나 소녀연맹의 해외 팬덤이 확고함을 확인한 지금, 판매량을 유의미하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외팬들은 앨범 구성품만으로도 만족하려고 샀을 텐데, 그런 이벤트가 있으면 더 좋아하겠지.”

해외팬들은 팬미팅 응모권이 생기더라도 응모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인터넷으로나마 소녀연맹과 교감할 수 있다면 좋아할 게 틀림없다.

“벌써 돈이 벌리는 기분이네. 나는 앨범 사전 구매 특전 같은 것 정도만 생각했는데.”

“어떻게요?”

“뭐어, 어떻게냐니? 그냥 우리 애들별로 스탠딩 카드를 넣거나.”

빳빳한 종이에 그림을 인쇄하여, 평평한 곳에 세워둘 수 있도록 하는 카드다.

“사전예약자에게만 주는 스페셜 카드라거나.”

희소성이 있을 것이다.

인민이들은 스페셜 카드를 위해서 앨범 사전 구매를 택할 수밖에 없다.

“또, 포스터 정도면 사전예약으로 초동판매량 좀 당길 수 있을 거 같았거든.”

그럼 사전예약 보상은 스탠딩 카드, 스페셜 카드, 포스터가 된다.

“그리고 유통사랑 판매처 별로 사전예약 특전도 다르게 하고.”

사람들이 알 만한 앨범 판매 사이트는 3, 4개 정도 된다.

사이트들마다 사전예약 특전이 다르다면, 그것만으로도 앨범을 3, 4개씩 사는 팬도 나온다.

“또 특전들도 다 랜덤으로. 뭐어, 내 생각은 여기까지밖에 안 닿았거든. 근데 확실히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더 나은 생각이 나오네.”

“…….”

“다들 왜 그래?”

이사들은 홍규헌의 상술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전 앨범 예약 상품을 여러 종류로, 그것도 판매처별로 다르게, 랜덤으로 설정하자고?

“악마…….”

“뭐?”

“사장님 저한테 악마라고 할 급이 아니신데요.”

“아니…… 다른 기획사들도 하는 거잖아…….”

“그, 그러면, 여러분의 말씀을 모두 합하면.”

한구인이 공포에 질려서 말했다.

“앨범은 다섯 개 버전으로, 사진집과 패키지 다섯 종류.”

“네.”

“동봉된 포스터와 브로마이드는 랜덤.”

“네.”

“포토 카드와 스티커 종류들 전부 랜덤.”

“네, 맞아요.”

“유통사별 특전 포스터와 카드들도 랜덤.”

“그렇지.”

“그러면, 대체, 올 클리어를 하려면 앨범 몇 장을 사야 하는 겁니까?”

손혜빈이 생각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다가, 하와를 꾀어내는 뱀과 같이 미소 지었다.

“글쎄요. 확률적으론 잘 모르겠는데, 유통사별 특전이랑 버전별 구성품 다 얻으려면 그것만으로도 10장은 사야겠죠?”

“…….”

“거기에 올 클리어까지 노린다면 40, 50장도 살 수도 있겠네요. 아하핰! 그만큼 사는 사람이 있을까?”

손혜빈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미 저건 프로듀서의 눈빛이 아니다.

물건을 팔아먹을 생각밖에 없는 장사치의 눈빛이다.

한구인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성필은 그런 한구인을 안심시켰다.

“한 이사님이 경악하시는 것처럼 사악한 방법들은 아니에요. 저희가 딱히 강매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닙니까? 팬분들의 팬심으로 강매하는 거잖습니까?”

그럴까?

‘좋은 물건이라 살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강매라고 부르지는 않는데…….

“앨범 구성품들은 후하게 넣어주잖아요. 미니 앨범만 산 사람들이 불쌍할 정도로요.”

올 클리어가 목적이 아니라면, 앨범 하나를 사는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큰 만족감을 느낄 터였다.

“……확실히.”

한구인은 악마의 꼬리라도 본 듯 한숨을 쉬었다.

“사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물량으로 손익 분기점까지 도달하는 게 가능할 겁니다. 소녀연맹 팬덤의 충성심이라면…… 그리고 앨범 가격을 동결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미니 앨범의 가격은 20,900원이었다.

해외 팬들의 구매력을 고려한다면, 이 이상 가격을 올리는 건 악수가 될 수도 있다.

올리더라도 아주 조금만 올려야 할 것이다.

“한 이사가 그렇다면야, 검증은 끝난 거지. 대신 앨범 제작비가 많이 올라서 손익 분기점이 더 상승할 거고.”

“아직 안 끝났어요.”

모두 깜짝 놀라서 손혜빈을 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갈 게 있다고?

손혜빈은 어린아이에게 줄 과자를 숨긴 어른처럼 장난스레, 또한 음흉하게 웃었다.

“앨범 패키지도…….”

그러니까, U, N, I, O, N, 다섯 개의 패키지들도.

“랜덤으로 판매하는……!”

“손 이사 진짜 악마야?!”

“손 이사님 그건 너무 심하잖습니까!”

“누나 그만 좀 해! 팬들한테 할 짓이 아니잖아!”

아무리 돈이 좋아도, 세상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란 게 있다.

손혜빈은 방금 그것을 넘으려고 했다.

“왜, 왜 그래애 다드을……. 나, 난 그냥 매출을 올리려고 한 것뿐인데…….”

손혜빈, 1분 동안 회의 발언권 박탈!

오늘도 가로 엔터는 악마의 유혹에 맞서 양심을 지켜냈다.

* * *

백민정은 이번에도 소녀연맹 타이틀곡의 안무를 맡게 됐다.

‘아라베스크’에서는 고배를 마셨지만,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에서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항상 나를 믿고 맡겨주니까.’

가로 엔터가 보내주는 신뢰에는 정말 감사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의욕도 더 났다.

가로 엔터를 위해.

소녀연맹을 위해.

사랑스러운 제자를 위해.

그리고 돈을 위해!

백민정은 이번에도 좋은 안무를 만들려 했다.

“하아.”

하지만 잘 안 됐다.

약칭 ‘보라색 튤립’이라는 타이틀곡이 문제였다.

“……아라야.”

“네.”

구석에서 핸드폰을 만지던 조아라가 백민정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보라색 튤립’ 이게 최종 버전은 아닌 거지?”

“좀 수정하다가 믹싱이랑 마스터링 들어가겠죠. 왜요?”

“아니. 곡이 좀 심심해. 지금까지 받았던 거랑 달라.”

“지음 오빠 혼자 만든 게 아니라서 그런가?”

“그럼 누가 만들었어?”

“엘릭이란 작곡가랑 지음 오빠랑 같이요.”

“흠…….”

그게 문제일 수도 있겠다.

백민정은 정지음의 곡과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합쳐서 안무를 짜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보라색 튤립’에서는 정지음의 냄새가 너무 옅었다.

안무가는 곡의 한 박과 음표 하나에도 민감하기에, 그 차이를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곡이 많이 미니멀해.”

“‘아니’처럼요?”

“‘아니’랑은 달라. ‘보라색 튤립’이 신나는 곡이잖아.”

“아련한 느낌 아닌가?”

“기본적으로는 밝은 분위기야. 그러면 신나게 터뜨려주는 부분이나 분위기가 고조되는 게 있어야 해. 그런데 하이라이트나 프리코러스도 다 심심하달까……. 춤을 짜기가 힘드네.”

일단 안무의 기본적인 골격이 생겨야 멤버들의 의견도 받을 수가 있다.

하지만 백민정은 그 골격조차도 만드는 데 고생을 했다. 다른 댄서들의 의견을 받아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포인트 안무가라도 찾아가 볼까…….”

특히 곡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포인트 안무가 걱정이다.

만약 흥겹게 터뜨려주는 부분이라도 있었다면, 백민정 나름 정교한 안무를 고안하여 멋진 느낌을 줬을 것이다.

그런데 ‘보라색 튤립’은 하이라이트도 다른 곡에 비해서는 심심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정교하고 복잡한 춤을 집어넣으면 분위기가 안 살 것이다.

“마냥 심심한 춤만 넣을 수도 없고.”

“쌤 벌써 포기예요? 아저씨한테 말해줘요? 다른 안무가 찾아보라고?”

“아니 무슨 포기야! 그냥…… 고민이 된단 거지.”

조아라도 백민정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창작 안무를 선보였으나, 전부 곡과는 맞지 않았다.

결국 별다른 결과를 만들지도 못하고, 조아라는 회사로 돌아가 버렸다.

백민정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안무 창작에 매달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몇 시간 동안 본단 건 상당한 중노동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철퍽 앉아 머리를 식혔다.

‘아, 조금 놀고 올까. 안 떠오르네, 잘.’

적당한 안무를 가져다 붙이라면, 백민정은 30분 이내에 안무를 완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소녀연맹의 안무였으니, 최대한 고민하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쌤.”

문득, 백민정은 자신의 스승이 떠올랐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던 서학준이다.

초등학생이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컸냐면서, 서학준은 줄곧 옛날이야기를 했었다.

‘네가 아라베스크 지도를 맡아서 다행이야.’

서학준은 조아라의 의견을 받아 완성한 ‘아라베스크’의 안무에 자부심이 있었다.

만약 그것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걸그룹이 있다면, 그녀들은 곧 정상에 오를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안무 자체에 대한 것일 뿐, 소녀연맹에 꼭 맞는 곡을 주었단 데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다.

‘안무를 줘 놓고도 이렇게 말하는 건 뭐한데, 실수한 거 같아.’

서학준도 본업이 있었고, 그에 신경을 쓰느라 ‘아라베스크’ 안무 편집에 온전히 정신을 쏟지 못했다.

최소한 조아라가 고집을 안 부렸다면, 소녀연맹의 실력에 알맞은 안무를 탄생시켰겠지만.

‘설하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

아무튼, 서학준은 백민정의 앞에서 선선히 실수를 인정했었다.

‘네가 수정을 잘 해줘. 그거, 소녀연맹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데뷔 1년도 안 된 애들이 라이브로 할 만한 게 아니거든.’

은근히 소녀연맹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백민정은 화가 나기도 했으나, 서학준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백민정은 아직도 소녀연맹에게, 정확히는 조아라에게 안무 수정을 건의하지 못했다.

‘……그만 생각하자.’

소녀연맹은 아티스트다.

본인의 한계는 본인이 규정지을 것이지, 남에게 맡겨선 아니 되리라.

백민정이 자꾸만 수정을 요청해봤자 조아라의 신경만 긁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다시 ‘보라색 튤립’의 안무 창작에 매달렸다. 하지만, 역시나 안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쌤한테, 물어볼까?”

백민정의 스승인 서학준. 그리고 그 아내.

그녀의 스승은 둘이다.

‘오랜만에 찾아뵐까?’

* * *

“민정 쌤이 곡이 심심해서 안무 짜기가 힘들다던데요.”

“민정이가 그래?”

성필과 조아라는 회사 밖의 테라스에 앉아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안무 관련 이야기가 나왔다.

“큰일인데. 안무가 빨리 나와야 뮤비 촬영도 들어가잖아. 프로모션 자료랑 앨범 구성품도 그 뒤에 구체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데…….”

정규 앨범 제작 기간이 많이 남았다며 좋아했던 게 바로 얼마 전 같은데, 벌써 몇 몇 달 남지 않았다.

“민정 쌤이 고민이라는데 그런 말밖에 안 나와요?”

“난 춤도 잘 모르는데 또 뭐라고 해줘.”

“그건 그러네요.”

조아라가 은근히 성필을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성필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맞아, 내가 뭘 알겠어. 우리 위대하신 아라 님에 비하면 한낱 미물이잖아.”

“뭐야. 장난 좀 쳤다고 삐친 거예요?”

“아냐 아냐. 내가 뭐라고 아라 님한테 삐치겠어? 감히 나 같은 사람이.”

“재미없으니까 그만 해요.”

“예, 그만하겠습니다 아라 님. 감히 위대한 댄서에게 말대답을 한 점,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

잠시 후, 점심 먹으러 오라고 성필과 조아라를 부르러 온 리카가 깜짝 놀랐다.

“박 이사님 괴롭히지 마! 아라쨩이라도 용서 못 해!”

“아저씨가 나 먼저 놀렸다고!”

조아라가 성필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성필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조아라를 아주 죽으라고 놀렸다.

“영원불멸의 댄서 조아라 파이팅!”

“이, 이이……!”

“아라쨩 참아! 참는 게 이기는 거야! 이사님도 아라쨩 그만 괴롭히세요! 이사님이라도 용서 못 해요!”

리카는 박쥐의 재능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조아라를 달래는 재능은 있었다.

둘이 사라지자, 성필의 웃음도 조금씩 잦아갔다.

‘곡이 심심하다, 라…….’

직접 ‘보라색 튤립’의 안무를 만들고 있기 때문인지, 백민정이 상당히 예리하게 짚었다.

‘일부러 심심하게 만든 거니까.’

곡 자체가 듣기 심심하단 뜻은 아니었다.

단지 ‘보라색 튤립’은 백민정이 들어봤던, 대중들이 들어봤던 케이팝과 다른 느낌이다.

케이팝은 고도로 정교화되고, 기술집약적이다. 수많은 작곡가가 곡 하나에 달려들고, 마찬가지로 많은 편곡가가 곡 하나에 달라붙는다.

믹싱과 마스터링 과정도 마찬가지다.

대형 기획사의 케이팝 곡은 반도체와 같다.

음악의 첨단에 서 있어서, 전문적인 음악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분석한다면 감탄밖에 없을 것이다.

‘케이팝은 복잡하고, 더 겹겹이 쌓이고, 엄청나게 정밀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그렇게 변할 거야.’

오버 프로듀싱.

3분 남짓한 곡에 투입되는 과도한 인원의 집중. 그런 정교한 절차와 과잉성은 케이팝이 좋은 평가를 듣는 이유이자 정체성이었다.

장인들이 모여서 하나의 도화지를 채우고, 또 다른 장인들을 불러와서 그곳에 덧칠하는 것과 비슷하다.

‘곡은 가득 차 있어. 여유가 하나도 없이. 빈틈도 없지.’

하지만 ‘보라색 튤립’은 일부러 그런 과잉을 피했다.

최첨단에 달한 케이팝의 기교를 버리고,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백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보라색 튤립’에서 안무를 빠르게 잡아낼 수 없던 것이다. 지금까지 들었던 케이팝과 다르기에.

‘다른 케이팝 곡들이 제트기라면, 보라색 튤립은 바다를 유유히 항해하는 페리선이지.’

수많은 장치로 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여 단숨에 몰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디테일과 여유로움으로 천천히 끌어당기는 것이다. 확실히 현존하는 케이팝과는 결이 다르다.

과연 그게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을까.

처음엔 A&R팀과 임직원들에게서도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성필과 손혜빈의 설득, 그리고 엘릭과 정지음에 대한 믿음이 합쳐서 타이틀곡으로 통과가 될 수 있었다.

‘도전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닌 거지.’

‘보라색 튤립’에 안무를 붙이는 백민정에게도 새로운 도전일 것이다.

* * *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성필과 한구인은 남몰래 손혜빈에게 호출을 받았다.

장소는 2번 연습실이다.

시간대도 하필 멤버들이 자리를 비운 때라, 두 사람의 궁금증은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누나, 우리 왔…….”

크롭티와 숏팬츠를 입은 손혜빈이 있었다.

“누나 뭐 하는 거야아아아앗!”

성필이 기겁하면서 연습실 밖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도 당황한 터라, 문손잡이를 반대로만 돌려서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변고가……!”

한구인은 두 눈을 손으로 가리면서, 본능에 의지한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런 둘을 향해 손혜빈이 응징을 가했다.

성필을 붙잡고 배에 니킥을 먹였으며, 한구인의 손을 눈에서 억지로 떼어내고 어깨에 스매시를 날렸다.

“컨셉 잡는 것도 적당히 해. 사람 보고 눈 가리면서 도망갈 건 뭐야.”

컨셉 아닌데…….

항상 평상복만 입은 손혜빈만 봤던 터라, 춤이라도 출 듯한 복장을 보니 순간적으로 뇌 정지가 와버렸다.

“손 이사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혀서 춤을 추기로 하신 겁니까? 어찌 이런…….”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한구인에게 다시금 징벌이 내려졌다.

그제야 한구인은 손혜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아니, 똑바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동시에 감탄을 흘렸다.

“굉장히 잘 단련된 신체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성필아, 이거 성희롱이지?”

“예?!”

“100퍼 성희롱.”

“저, 저는 무죄입니다……!”

“장난이에요. 맘껏 보세요.”

손혜빈에게 춤과 노래란 인생과 같았다.

은퇴하고도 계속 춤은 추었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로 엔터로 들어오고선 따로 장하양의 댄스 트레이닝을 봐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색다르죠?”

손혜빈이 양손을 머리 뒤로 모으고 골반을 강조한 섹시 포즈를 취했다.

“…….”

“진짜 둘 다 죽여버릴까. 됐고, 내가 신호 주면 내 옆으로 오기나 해요. 한 이사님, 성필이 너도.”

“뭐 하게?”

손혜빈이 핸드폰을 만지자,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아라베스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성필과 한구인도 감이 왔다.

굳이 두 사람을 부른 건, ‘아라베스크’를 약식으로나마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타이밍 잘 맞춰.”

손혜빈은 춤을 추었다. 동시에 노래를 불렀다.

은퇴한 지 몇 년이 지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대단하다.’

한구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혜빈의 ‘아라베스크’ 완성도가 소녀연맹 멤버들을 뛰어넘고 있었기에.

아이돌은 젊음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는 은퇴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녀들이 보여주는 건 노래나 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돌이기에 매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실력이 다 꽃피우기도 전에 은퇴하는 경우가 많아.’

어느 한 분야에서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10년이 넘는 단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돌은 그 기간을 채우기도 전에 은퇴해버린다.

따라서 아이돌 중에서도 주목받는 이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축복받은 자들뿐이다.

‘손 이사님에게는 재능도, 시간도 있었다.’

댄스 가수로 데뷔하고 10년이 훌쩍 흘렀다. 은퇴를 하고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용을 배우기 위해 러시아 유학까지 준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30살을 넘어버린 나이에 실력이 만개했다.

짧은 연습만으로도 소녀연맹 멤버들을 앞지를 정도로.

“하아, 흡.”

그런 손혜빈마저도 ‘아라베스크’를 소화하면서는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홀로 모든 보컬과 파트를 소화하면서도, 고작 숨이 조금 거칠어진 것을 대단하다고 해야겠지.

하이라이트에 들어섰다.

벌스 2에 이른, 하이라이트로 들어가는 프리코러스.

손혜빈이 두 팔을 옆으로 활짝 펼치는 것과 동시에 성필과 한구인이 그녀의 곁에 섰다.

세 사람은 사슬이 이어지듯 팔짱을 꼈다.

그리고 시작되는 하이라이트 파트.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손혜빈의 진성 고음에, 성필과 한구인의 전신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이거다.’

한구인은 감격에 겨워 확신했다.

‘지금 손 이사님의 모습이, 소녀연맹 분들이 도달해야 할 모습이야.’

‘아라베스크’의 하이라이트 안무는, 모든 멤버들이 일렬로 서서 서로 팔짱을 끼고 전진하는 것이었다.

상체의 동작이 팔짱으로 봉쇄되었기에, 그녀들이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다리뿐.

그 다리와 발의 움직임은, 온갖 고난에도 처절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군인과 같이 절도 있고 박력 있었다.

‘결속’을 상징하는, 아라베스크의 하이라이트라 부를 수 있는 안무다.

“하아, 하아…….”

춤이 끝나고, 손혜빈은 거울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대단하십니다, 손 이사님. 바로 다시 컴백하셔도 될 정도입니다.”

“에이, 너무 띄워주신다.”

“누나 진짜 미쳤다. 왜 은퇴했어? 내가 앨범 100장 살 테니까 다시 컴백해!”

“젊은 애들이 치고 올라오니까.”

“누나 피부에만 몇억씩 썼잖아. 이날을 위해 쓴 거 아니야? 신세연 원장님한테 부탁해서 메이크업도…….”

손혜빈이 성필의 배에 니킥을 날렸다.

“꺼윽, 끅…….”

“뭐, 잘 추긴 했지? 나 이 정도라 이거야.”

“뉴냐…… 냐, 나아, 주글 거 가태애…….”

둘의 칭찬에 손혜빈은 드물게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속절없이 달아오른 뺨이 붉게 떠올랐다.

“뭐, 내가 이거 보여준 건 내 실력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

손혜빈이 깊이 심호흡했다.

“이거, 애들이 죽어도 완벽하게 숙달 못 해.”

방금까지, 고작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감탄과 흥분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연습실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성필아, 한 이사님, 이건 선택해야겠어요.”

소녀연맹에게 말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안무를 바꿔야 해. 이건 애들한테 러닝머신 위에서 노래하라고 강요하는 수준이야.”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도 없었다.

지적하라면 수백 개의 비판점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하겠다면 AR을 틀어야 해. 그럴 거야?”

소녀연맹은 줄곧 라이브를 고집해왔다.

그건 홍규헌의 바람이었다.

그저 노래를 부르고, 또 춤만 추는 게 아닌, 진정한 퍼포먼스를 구현할 수 있는 그룹이어야 한다.

“보니까 성필이 너 AR 사용도 생각하던 거 같은데.”

“…….”

“너 매니지먼트 관리 이사잖아. 애들 상황 객관적으로 사장님한테 보고해야 해.”

아직 소녀연맹이 ‘아라베스크’의 퍼포먼스를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녀들은 결국 완성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건 손혜빈이다.

댄스 가수로서 드높은 업적을 쌓았던, 지금도 소녀연맹 전원의 숙련도를 뛰어넘고 있는, 그런 손혜빈인 것이다.

“나중에 AR 쓸 바에야, 지금 바꾸자.”

한구인이 불안한 눈초리로 성필을 보았다.

‘나도 알아.’

‘아라베스크’의 퍼포먼스가 얼마나 춤에 경도되어 있는지 말이다.

일단 춤에 여유가 좀 생겨야, 백설하가 주장했던 보컬의 강화도 가능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지.’

성필은 조아라를 떠올렸다.

‘아라베스크’를 연습하며, 세상에 더 없는 기쁨을 드러냈던 그녀의 찬란한 미소를.

그러니 성필은 믿어주고 싶다.

‘소녀연맹이 완성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고민을 끝낸 성필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손혜빈은 그의 대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겠지. 얘라면 이럴 줄 알았어. 애들 데뷔할 때도 미친 사람처럼 믿어달라는 말만 했던 애니까.’

이미 손혜빈도 예상했던 바라서, 딱히 아쉬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는 또 무슨 부끄러운 말을 하나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나, 나는…….”

그 순간, 성필의 시야가 검게 변했다.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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