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가로 엔터의 명운이 걸린 정규 앨범이다.
그 타이틀곡 가사의 위험성을 알고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서도, 가사를 받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왜요……?”
성필은 곧장 답하려다가, 이내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저희끼리만 얘기해선 안 될 문제 같네요.”
이수연의 걱정은 모두가 들어야 한다.
그에 따라 소녀연맹과 모든 임원, 그리고 사장인 홍규헌마저 회의실로 오게 됐다.
십수 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수연은 아까 성필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니, 그럼…….”
조아라는 한껏 당황해서 반문했다.
“‘아라베스크’ 가사가 망할…… 아니, 전례가 없다는 거죠?”
꼭 망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전례가 없다’는 게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괜히 전통이나 관례에 관성이 생기는 게 아니다. 전례가 없단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맞아. 걸그룹 가사가 이 수준까지 파고 들어간 예는 없어.”
“왜…….”
어째서 성필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길에 제 발로 들어섰는가.
심지어 그 위험성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왜 멤버들에게는 말해주지 않았지?
“‘아라베스크’ 가사는 너희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야. 계속해서 이어진 피드백으로, 마른 수건을 한없이 짜내어 겨우 얻어낸 물 한 방울 같은 거잖아.”
괜히 ‘이런 가사는 전례가 없다’ 같은 이야기를 해서 멤버들의 의욕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위험한 거면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거잖아요.”
조아라의 의견은 타당하다.
성필은 프로듀서로서 미리 리스크를 파악하고 피해 가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
“사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백설하의 질문은 홍규헌에게로 향했다.
의외로 임원들, 즉 성필, 홍규헌, 손혜빈은 그다지 동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위험성을 임원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홍규헌은 알고 있었단 뜻이 된다.
“처음 듣는데.”
“……?!”
설마, 홍규헌은 임원들로부터 정보 통제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바지사장인가?!
“그래도 가사는 우리끼리 협의해서 컨펌시킨 거니까, 대략적인 방향은 알고 있지. 작사가님.”
“네!”
이수연은 홍규헌이 자신을 부르자 아까보다 더욱 기합이 들어갔다.
“음악 들을 때 뭘로 들으세요?”
“……음악이요? 그, 뭘로 듣느냐뇨?”
“스피커라든가 이어폰을 쓰시겠죠.”
“그으, 그렇죠?”
다들 그렇지 않나.
“그 두 개 얼마예요?”
황당한 질문이다.
적어도 이 타이밍에 나올 질문은 아닌 듯했지만, 이수연은 착실하게 답했다.
“이어폰은 17만 원이고, 스피커는 2만 원이요.”
“혹시 수백만 원짜리 스피커로 음악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없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걸로 들으면, 대형 기획사에서 내는 음원은 정말 차원이 달라요.”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수십 명의 인원이 붙어서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이다.
사운드의 정교함과 유려한 멜로디 메이킹, 곡을 가득 채우는 트랙의 풍부함은 중소 기획사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다.
“작사가님. 소녀연맹의 목표가 뭔지 아세요?”
“최…… 최고의 아이돌, 이죠?”
“박 이사. 우리가 음악적으로 KS 엔터를 이길 수 있어?”
홍규헌의 질문에 소녀연맹 멤버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니요.”
성필의 답은 소녀연맹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이사님 히도이(너무해)! 생각도 안 하고 바로 안 된다고 하시는 건가요!”
“팀장님 저희 최고의 아이돌로 만들어준다면서요!”
바로 반발해오는 리카와 신아름은 그나마 상태가 좋았다.
백설하는 수십 년간 같이 살아온 남편이 두 집 살림했단 사실을 깨달은 아내와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성필은 그녀들을 진정시키는 대신 아까 하던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음악의 전문적인 완성도에만 치중해선, 가로 엔터는 한국에서도 정상에 오르지 못합니다.”
KS 엔터의 A&R팀이, 정호환 이사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에는 다를 수 있겠죠. 가로 엔터가 언젠가 거대하게 성장해서 KS 엔터와 비슷한 A&R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렇게 천의무봉(天衣無縫) 같은 음악적 완성을 이뤄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면 KS 엔터와 뭐가 다를 것인가.
“아무리 가로 엔터가 잘나가도 결국에는 KS 엔터의 카피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전생의 석세스 엔터도 그러했었다.
뼈를 깎아가면서, 짧은 준비 기간을 감수하고도 연달아 뮤지션들을 내놓았었다.
그렇게 수익을 얻으면 높은 계약금으로 중견, 탑급 배우를 데려와 매니지먼트했다.
자금의 순환이 일어나고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여러 분야에 도전했고, 지속적으로 투자를 받아 덩치를 불려갔었다.
그 정신없는 나날 끝에 남은 건, 석세스 엔터가 KS 엔터의 시가 총액을 앞질렀단 사실이었다.
‘그렇게, 윤상열 그 인간이 그토록 원하던 방대한 인하우스 시스템을 구축했었지만…….’
석세스 엔터에는 규모에 걸맞은 철학이 없었다.
좋게 봐줘도 KS 엔터의 카피, 혹은 트렌드만을 따라가는 조각배 정도였다.
크기는 혁신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네…… 가로 엔터가 아무리 커져도 말이에요. KS 엔터와는 다른 컨셉을 뱉어내는 카피 정도밖엔 안 되겠죠.”
가수의 발음과 청자의 듣기를 고려한 완벽한 가사? 있으면 좋다.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 캐치한 곡? 항상 그것을 목표로 A&R팀이 돌아가고 있다.
“모든 스테이터스를 극대화해도, 결국에는 KS 엔터를 넘어설 수 없어요. 동등해지기만 하겠죠.”
홍규헌을 포함한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항상 꿈에 부푼 이야기만 들어왔던 소녀연맹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KS 엔터를 넘어설 수가 없다고?
“그럼 우리가 노력한 건…….”
백설하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필요한 거야.”
홍규헌이 소녀연맹에게 말했다.
“소녀연맹만의 이야기가. 너희들의 오리지널리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기에 너희들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무기가.”
소녀연맹 멤버들이 직접 생각해낸 서사야말로, 다른 그룹과의 차별점이며 강점이 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었다고 멤버들의 불안감이 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물론 ‘아라베스크’의 가사는 멤버들이 의견을 내어 쓰인 것이지만, 위험성이 있단 것을 알았다면 진작 수정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 기색을 읽고, 손혜빈이 인자하게 물었다.
“얘들아, 케이팝이 왜 인기가 생겼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누군가는 케이팝의 인기가 거품이라고 하긴 하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유력한 조류인 것만은 확실하다.
“현대성 때문이야.”
곡에 로컬적인 느낌, 즉 국적성을 말소하다시피 한다. 또한 인간의 개인성을 억제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훈련한 아이돌을 내세우고 품질 좋은 음악을 가져다 붙인다.
별을 만들어내는 공장, 스타 시스템이란 이름이 걸맞은 모습이다.
“케이팝은 사실상 전 세계 시장을 석권했어.”
세계 시장에 편입한 지 30년도 되지 않은, 변변한 대중음악의 역사랄 게 없는 나라라곤 생각하기도 힘든 성과다.
손혜빈의 말마따나, 케이팝은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미국과 서구를 제외하고는.”
케이팝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현대성의 첨단에 이른 프로듀싱 시스템과, 완성된 채 데뷔하는 아이돌이란 존재 덕분이다.
아시아 시장은 세련된 팝의 느낌과 익숙한 인종의 결합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런 케이팝의 장점은, 서구의 팝과 경쟁할 때 우위를 잃어버린다.
“그 현대성이란 게 애초에 서구에서 왔잖아. 걔네들 눈에는 케이팝을 보면 ‘이게 뭔가’ 싶은 거지.”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아? 신기하네.
이 정도가 서양 음악 시장의 반응이다.
케이팝은 인지도 있는 마이너 문화에 머무를 뿐, 절대로 메인스트림에는 오를 수가 없다.
우위가 없으니까.
그럼 케이팝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서양 음악의 우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사장님이 말씀하신 ‘오리지널리티’야.”
20세기 말, 서구의 보이밴드와 걸그룹은 절정기를 맞이하고 점점 사그라들었다.
대신 1인 팝스타, 싱어송라이터로 판도가 기울었다. 그들은 자신의 앨범과 곡에 오리지널리티를, 메시지를 넣을 수 있었다.
케이팝이 국적과 개인을 제거한 데 비해, 그들은 자신의 고향을 자랑스레 외치고 개인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그로써 호소력과 개성을 지니고, 음악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혁명적인 곡들이 줄줄이 탄생하고 있다.
“보이밴드나 걸그룹이 내놓는 버블검 팝의 시대는 갔단 거야.”
버블검 팝.
듣기 편하고 심오하지 않으며 들으면 그저 반대쪽 귀로 흘러가듯 사라지는 음악.
특징이 없으며 나이가 어린 이들을 타깃으로 삼는, 아티스트의 개성을 억제한 음악.
서구의 보이밴드와 걸그룹이 추구했던 음악적 방향이며, 현재 케이팝 그룹이 답습하고 있다.
“그 약점을 극복하려고 나온 게 그룹의 서사, 세계관이거든.”
아이돌은 유리 수조 안에서 키워지는 열대어와 같다. 그들에게는 팝스타와 같은 개성이란 게 존재할 수 없다.
무균실에서 애지중지 키워진 이들에게 그토록 강렬한 개성마저 기대하는 건 폭력이다.
게다가 그런 개성을 가져봤자, 기획사 입장에서는 컨트롤하기 어려울 뿐이니까.
“‘무대 아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없으니까, ‘무대 위’의 이야기를 써내는 거야.”
무대 위의 서사, 세계관.
많은 아이돌이 오리지널리티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관을 도입하고 있다.
그 세계관조차도 기획사의 기획물이지만, 소녀연맹의 세계관은 다르게 만들어졌다.
“얘들아, 너희들의 목표가 뭐라고?”
손혜빈의 물음에.
“최고의 아이돌이요.”
장하양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렇지? 최고의 아이돌이야. 한국에서 최고도 아니고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하고 있잖아!”
아직은 머나먼 미래지만,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소녀연맹은 그 꿈을 가슴 한편에 소중히 품고 있다.
“코쟁이들이 케이팝을 무시하는 건……!”
“손 이사님, 그 발언은 인종차별입니다.”
“저 방금 멋진 말 하려고 했는데…….”
“인종차별이얏!”
한구인과 그 수제자인 리카의 태클에, 손혜빈은 자신의 경솔한 발언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래, 케이팝이 일정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건 오리지널리티가 없기 때문이야.”
기획사가 오리지널리티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관을 만든다곤 하지만. 현재 세계관의 취급은 팬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퍼즐 게임 정도다.
아이돌이 세계관 그 자체를 온전히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이돌이 직접 만들고 이해하는 게 아니니까.
팝스타가 지닌 ‘무대 아래’의 서사처럼, 인간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었지?”
‘아니’도 ‘롱 포’도, 그리고 미니 앨범에 들어간 모든 곡들도 소녀연맹의 의견으로 만들어졌다.
이번 정규 앨범도 마찬가지다.
“얘들아, 나중에 유명해져서 외국에 진출했더니 피부 흰 인간들한테 ‘천편일률적이고 어린 애들 코 묻은 돈이나 털려는 댄스 음악쟁이’ 같은 말로 불릴 거야?”
“손 이사님 인종…….”
“아 좀 조용히 해봐요.”
“…….”
손혜빈은 끈질기게도 소녀연맹 멤버들의 답을 기다렸다.
먼저 입을 연 건, 어쩐지 열띠게 흥분한 백설하였다.
“아니요, 안 돼요.”
소녀연맹 중에서 가장 ‘뮤지션’이란 단어에 집착하는 백설하다.
안 그래도 그녀는 얼마 전에 록커에게 아이돌이라며 무시당했던 차다.
백설하는 손혜빈의 감언이설에 홀렸다. 그리하여 이수연 작사가가 냈던 걱정은 이미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럼 어떡해야 해?”
“보여줘야 해요.”
“뭐를?”
소녀연맹을.
개성을 말살한 음악이 아니라, 소녀연맹 멤버들이 보여주고픈 것을 표현하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아까, 아이돌에게 진솔함은 미덕이 아니라고 하셨죠. 맞는 말입니다.”
성필은 담담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의 다른 이사들과 마찬가지로 이수연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멤버들을 설득하려는 듯했다.
“소녀연맹이 데뷔 컨셉으로 잡았던 ‘저항’이나 ‘자유’도, 실은 크게 독보적인 건 아니죠.”
뮤비에서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줬던 아이돌들은 꽤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저항의 대상을 명시하지 않으며, 어째서 저항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한국의 사회적 규범이 그것을 막고 있다.
“‘아라베스크’에서 ‘소수자를 위한 연대’라는 주제를 잡은 순간부터, 소녀연맹은 저항의 대상을 정한 겁니다.”
이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여러 의미로 해석될 것이다.
때로는 소녀연맹이 의도치 않은 영역까지 뻗쳐나가, 소녀연맹의 적을 늘리게 될 수도 있다.
또는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거나, ‘아이돌 따위가’ 같은 말을 들으며 욕만 먹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아이돌이 미덕으로 삼아왔던 ‘건전성’과 ‘순수함’을 포기한 거죠.”
소녀연맹은 지금까지 케이팝 아이돌들이 속해 있던 무균실을 뛰쳐나가는 것이다.
형형색색 꾸며진 화원으로부터, 야생의 숲으로 뛰쳐나간다.
거기서부터 소녀연맹은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게 된다.
“……예, 그렇답니다.”
홍규헌이 의논을 마무리할 요량으로 말했다.
“작사가님, 이게 저희 답이에요.”
“…….”
이수연은 놀랐다.
가로 엔터의 인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이어졌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홍규헌과 임원들은, 성필이 가로 엔터로 처음 들어왔을 때 작성한 기획서를 빠짐없이 읽어보았으니까.
홍규헌이 머리를 부여잡고.
한구인이 감탄하고.
손혜빈이 깔깔 웃었던 그 기획서는.
‘우리의 아이돌이 음악에 담아야 할 건 자신만의 꿈과 생각, 사랑, 삶, 아름다움이다. 팬의 입장에서 교감하고 위로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아이돌은 삭막한 현대 사회에 인간애와 인본주의를 전파할 것이다.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 트렌드다.’
꿈에 잔뜩 부푼, 구름을 잡는 듯한 헛소리들의 집합이지만, 그렇기에 사람의 심장을 불길로 수놓을 수 있다.
가로 엔터는 이미 3년도 더 전부터 이러한 방향을 잡아 왔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다.
“작사가님의 걱정은 이해해요. 그렇다고 가사를 무난하게 바꾸고 싶진 않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연과 악수했다.
이제 이 이야기는 끝났다는 선언이었다.
이수연은 그녀와 손을 맞잡으면서, 마치 세뇌라도 당한 듯 멍한 눈빛이었다.
‘멋지다.’
정말, 이 회사에는 낭만적인 인간들만 모아둔 것 같다.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맞아, 소녀연맹은 항상 자기들 의견을 가사에 담아왔잖아.’
이수연은 자신이 쓴 ‘아라베스크’의 가사를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걸그룹이 소화하기엔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이건 소녀연맹 애들의 이야기야.’
그러니 힘이 있는 것이다.
걸그룹은 이래야 한다, 보이그룹은 이래야 한다. 그런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건, 확실히 기획사의 미덕이라 부를 수 있다.
“맞네요,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이해해주셔서 다행이에요. 그럼 가사는…….”
“앨비스 프레슬리도, 비틀즈도, 마이클 잭슨도, 프레디 머큐리도 그랬으니까요!”
“……네?”
“다들 혁신을 추구해서 불멸의 아티스트가 됐잖아요!”
……그렇긴 한데.
‘비교 대상이 너무 대단하지 않나?’
전부 교과서에 실릴 만한 인물들 뿐이다.
아까까지 소녀연맹의 목표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했던 홍규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너무 과대 포장이 아닌가 싶었다.
“응원할게요, 사장님!”
“아, 네…….”
하지만 이수연은 자신의 비유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다만, 소녀연맹을 응원할 뿐.
* * *
“아저씨, 진짜 ‘아라베스크’ 가사가 이상한 거예요? 난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다고 물으면, 이상하진 않지.”
그저 일반적인 걸그룹이 표현할 만한 가사가 아닐 뿐이다.
하지만 이미 소녀연맹은 일반적인 걸그룹이란 틀을 뛰쳐나갔다.
미니 앨범 타이틀로 밴드 사운드를 택한 것부터가, 그전까지는 누구도 쉽게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음…… 그죠?”
이수연 작사가가 온갖 전문지식을 동원해서 이야기할 때, 조아라는 정말 큰 일이라도 난 것 같은 위기감을 가졌었다.
하지만 회의를 끝내고 다시 가사를 읽어보니, 좋기만 했다.
곡의 분위기와 춤, 뮤비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가사였으니까.
“우리 아라, 걱정됐어?”
“걱정은 무슨, 안 했어요.”
정확하게는, 가로 엔터의 임원들이 서로 이어달리기하듯 피의 실드를 치는 것을 보고 진정한 것이었다.
이수연 작사가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동고동락을 함께 해 온 성필과 임원들의 의견이 더욱 설득력 있었다.
“근데 아저씨, ‘우리 아라’라고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잖아.”
‘우리 하양이’나 ‘우리 설하’는 안 하긴 하는데, 동생 라인에게는 자주 쓰는 호칭이다.
“나한테 유독 자주 쓰잖아요.”
“……그래?”
“네.”
“자의식과잉인 거 같은데.”
“진짜거든요? 애들한테 물어봐요.”
성필은 당장 연습을 마치고 헐떡이고 있는 리카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로도 화낼 기력은 남아 있는지, 성필의 질문을 듣자마자 도끼눈을 세웠다.
“맞아요! 이사님이 아라쨩만 편애하잖아요! 왜 저한테는 자주 ‘우리 리카’라고 안 해주시나요!”
“내가 그런가?”
“말 나온 김에 지금 해주세요!”
“음…….”
“무시인가요?!”
옷소매를 당기는 리카를 무시하며, 성필은 자신의 언행을 점검해보았다.
다시 떠올리니, 정말 조아라에게만 ‘우리 아라’라고 불렀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다.
“아냐, 아라가 자의식과잉인 게 맞아.”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뭐가 그래?! 객관적으로 아저씨가……!”
“아라야, 그만.”
장하양이 조아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나와 같이, 조아라는 뱀에게 붙잡히기라도 한 듯이 몸이 굳어 저 멀리로 끌려갔다.
“하양 언니 무셔…….”
리카도 다시 연습실 중앙으로 향했다.
휴식이 끝나고, 멤버들은 다시금 ‘아라베스크’의 안무 연습을 준비했다.
다들 표정에서부터 피로가 뚝뚝 묻어나온다.
싱글벙글 해맑은 조아라만 제외하고.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안무가 나왔어.’
성필은 근심을 가득 담아 멤버들의 연습을 바라보았다.
“자, 얘들아 다시 갈게. 하나, 둘…….”
그리고 멤버들의 연습을 지도하는 백민정도, 성필과 같은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 * *
성필은 퇴근하고 백민정과의 술자리를 가졌다.
그저 놀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퇴근하고 또 일 얘기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성필은 백민정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잔을 부딪칠 새도 없이, 술을 받자마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보라색 튤립’ 안무는 잘 만들고 있어?”
“모르겠어.”
“너한테 맡겼는데 모르면 어떡해. ‘아라베스크’ 안무 편집 서 쌤한테 맡겼다고 삐친 거야?”
조아라의 열렬한 요청과 멤버들의 지지에 따라, ‘아라베스크’의 안무 편집은 서학준이 맡게 됐다.
서학준은 여러 개의 시안 중, 파트별로 가장 어울리는 것들을 모아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그의 일정이 바빠, 멤버들의 지도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됐다.
바로 백민정이다.
“삐치긴 뭘 삐쳐. 내 나이가 몇인데. ‘보라색 튤립’ 안무는, 하아…….”
정규 앨범 두 번째 타이틀곡,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 줄여서 ‘보라색 튤립’의 안무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려워.”
성필은 백민정의 고민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보라색 튤립’은 케이팝의 범주에 넣기에도 애매한 곡이니까.
케이팝 안무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왔던 백민정에게는 어려운 과제겠지.
“그거 때문에 다운 돼 있는 거야?”
“아니.”
백민정은 다시 소주를 한입에 비웠다. 그리고 은근한 투로 물어왔다.
“오빠. ‘아라베스크’ 안무 그거 괜찮겠어? 너무 어렵잖아.”
사람들이 안무가의 시안을 보면 깨닫는 게 하나 있다.
‘와, 진짜 댄서들은 아이돌이랑 비교가 안 되는구나.’
춤을 전문적으로 배운 그들이 보여주는 댄스 퍼포먼스의 기세는 아이돌과 궤를 달리한다.
같은 동작을 해도 각도와 움직임이 더욱 확연하며, 격하고, 힘이 있고 또한 우아하다.
“서 쌤이 안무를 못 덜어냈어.”
하지만 댄서들의 시안은 오로지 춤만을 고려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노래를 부를 것을 거의 상정하지 않고 춤을 만들기에, 춤의 난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덜어내기’란 편집 작업이 필요하다.
아이돌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수 있도록, 동작을 더 간소화하고 쉴 틈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아라베스크’는 덜어내기를 완전하게 하지 못했다.
안무 편집을 맡은 서학준의 기량이 부족해서?
아니다.
“어쩌겠냐. 이미 해버렸는데.”
성필과 백민정은 침묵을 삼키다가.
“하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뱉었다.
‘아라베스크’의 안무가 이토록 격해진 이유는 서학준의 기량 부족 따위가 아니었다.
백설하 때문이었다.
* * *
“이건 시안 그대로 가면 안 돼요?”
조아라의 물음에, 서학준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당돌한 애네.’
서학준의 제자였던 백민정.
그녀의 제자가 바로 조아라다.
서학준은 손녀를 바라보는 듯 다정한 시선을 조아라에게 주었다.
“이대로 가면 소화하기가 힘들 텐데.”
조아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배려를 가득 담아, 서학준이 말했다.
“할 수 있어요.”
“하하, 그래?”
서학준은 조아라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춤에 대한 열정이 넘쳤고, 또한 서학준에게 의견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능력도 뛰어났으니까.
미래에는 괜찮은 댄서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협의 시간이 길어지고…….
“이것도 시안 그대로 가요.”
“……이것도? 좀 덜어내야 하지 않을까?”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
서학준은 점점 조아라의 참견에 어이가 없어지려 했다.
아니, 이건 참견이 아니라 같이 안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긴 하다. 하지만 조아라는 너무도 분별이 없었다.
“아라야, 만약 네가 하자는 대로 안무를 다 짜잖아. 그럼 첫째로, 노래를 부를 체력이 없을 거야.”
숨을 헉헉대면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소녀연맹은 모든 무대에서 라이브를 고집한다던데, 그럼 AR로 가릴 수도 없으리라.
“그리고 거기에 이어서, 너희들이 완전히 표현해내기엔 동작들이 너무 격해.”
50도 꺾을 걸 30도만 꺾게 하고, 5걸음 갈 것은 3걸음 가게 한다.
이렇게 시안을 덜어내면서 아이돌의 안무로 탈바꿈해야 한다.
아이돌이 보여주어야 할 건 춤 자체가 아니라, 춤을 추는 자신의 매력이니까.
그런데 조아라는 댄스의 멋에 집중하여, 그런 덜어내기 과정을 무시하다시피 했다.
“이대론 못 할 거야. 특히 ‘아라베스크’는 하이라이트의 고음부가 굉장히 힘들어.”
3옥타브 ‘레’로 시작해서 3옥타브 ‘파’까지 올라가는 미친 듯한 난이도의 레가토(음을 부드럽게 이어 부르는 것)가 특징이다.
심지어 가성이 아니라 진성 고음이다.
만약 조아라가 주장하는 안무들로 편집하게 된다면, 백설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실신할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체력이지.”
“……그럼 쌤이 할 수 있으면 해도 돼요?”
“나?”
“아뇨, 백 쌤이요.”
“민정이?”
“아뇨! 백! 설! 하! 쌤이요!”
“아, 설하가?”
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이토록 격한 안무를 하고도 하이라이트의 고음부를 소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룹 메인 보컬들도 고음 애드립을 할 때는 춤을 안 추고 가만히 서 있어. 혹은 춤을 추더라도 상체의 움직임은 최소화하거나. 그런데 아라베스크 하이라이트는 누구 한 명 자리가 빌 수도 없으니.’
서학준은 어떻게 조아라를 설득할까 고민했다.
‘……아니,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지.’
백설하가 못 한다는 것을 증명하면 되니 말이다.
“알겠어. 그럼 설하가 못 하면 내가 편집한 대로 가는 거다?”
“네!”
조아라가 자신 있게 답했다.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기회를 받은 것으로 이토록 기뻐하다니.
서학준은 자신의 계획이 예상대로 진행되었음에도, 조아라가 실망할 게 뻔하여 가슴이 조여왔다.
미리 실패를 점친 건 서학준만이 아니었다.
일단 당사자인 백설하부터 난색을 표했다.
“이, 이건 못 할 거 같아…….”
“쌤!”
조아라가 백설하의 어깨를 꽉 잡았다.
백설하는 데자뷔를 느끼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곧 자신이 조아라보다 힘이 약하단 사실만을 깨달아야 했다.
“쌤은 할 수 있어요!”
“내, 내가?”
“쌤이 못 하면 누가 해요 이걸!”
그러니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안무를 덜어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자신감!”
“자, 자신감…….”
“야 조아라 그만해.”
신아름이 백설하를 조아라의 마수로부터 해방시켰다.
“너 제정신이야? 서 쌤이 안 된다는데 왜 네가 자꾸 그래. 딱 봐도…….”
조아라가 채택한 시안들은 죄다 너무 격렬했다.
멋지긴 하다.
하지만 저런 안무를 연달아 하고도 백설하가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
“쌤이 못 한다고?”
“어. 그니까 그만 괴롭히…….”
“못 해?”
“……그래, 못 한다고.”
“진심이야?”
“못 한다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춤만 추면 몰라도 어떻게 하이라이트 보컬까지 소화하냐고!”
백설하도 자신이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신아름이 단호하게 ‘못 한다’고 말하니, 백설하는 어딘지 모르게 서운했다.
“오케이, 너 이제 베드로야.”
예수를 세 번 부정한 베드로가 되어버린 신아름. 그녀는 조아라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곤 인상을 팍 썼다.
“잘 봐, 이제 부활까지 목격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테니까.”
“진짜…….”
별 난리를 다 치네.
“쌤, 불신자들 콧대 납작하게 해줘요.”
“으, 응?”
조아라가 백설하를 이끌고 연습실을 나서려 했다.
“나 쌤이랑 퍼포먼스 대강 연습하고 올게. 신아름 기다려라. 서 쌤도 약속 잊지 마요.”
연습실의 문이 닫히고, 이제 서학준과 신아름만이 침묵 속에 남겨졌다.
“…….”
“…….”
“……이제 시안 편집 피드백은 누가 줘?”
조아라가 댄스에 가장 정통하기에, 편집 피드백은 조아라가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는 백설하의 부활을 예고하곤 다른 연습실로 사라졌다.
“아름이 네가 해줄래? 일단 아라 올 때까지는 내 나름 시안들 편집할 거거든.”
“……네.”
춤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신아름은, 줄곧 서학준의 말을 듣고 있기만 해야 했다.
‘조아라 걔는 괜히 안 될 거 굳이 쌤 고생이나 시키고.’
여하튼, 아직도 애다 애.
* * *
“……어?”
서학준은 얼이 나갔다.
그 말 외에는 서학준의 상태를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귓가를 가득 채우는 소녀연맹 멤버들의 열띤 환호와 광란의 비명.
쉴 새 없이 감탄을 토해내는 가로 엔터의 A&R팀원들.
믿을 수 없다며 경악하는 웨벡스 사무소의 슈이치.
“백설하! 백설하! 백설하!”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백설하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성필.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백설하는 해냈다.
해내버렸다.
약 3분에 이르는 격한 안무를, 비록 다 외우지는 못했으나 모양이나마 카피하여 추었다.
이미 그 상태에서 백설하의 몸을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종 하이라이트의 미친 고음부를, 백설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했다, 고……?”
거칠어진 호흡으로, 격렬한 춤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고난도의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백설하는 하이라이트 고음부를 완벽히 해냈다.
“쌤 진짜 미쳤어요! 이게 가수다아아앜!”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사도처럼, 조아라는 기적을 목격하곤 미쳐 날뛰었다.
그런 조아라가 찬양을 바치고 있는 백설하는,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안색이 하얗고 입술마저 덜덜 떨고 있었다.
성필이 곁에서 이온 음료를 먹여주고 부채를 부쳐주지 않았다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색이다.
“어때요 서 쌤! 해도 되죠? 우리 설하 쌤이 해냈으니까 안무 그대로 해도 되는 거죠!”
“…….”
서학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로, 인간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었는데.
“어케 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