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어…….”
일단 분위기에 맞춰 신아름을 포옹하고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뒤에 멤버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성필은 고개를 뒤로 돌려 문고리를 눈짓했다. 문을 닫아달라는 제스처였다.
심각한 표정의 장하양이 천천히 문을 닫아주었다.
이제 빛이 없는 방 안에는 성필과 신아름뿐이었다. 성필은 능숙한 손길로 그녀를 진정시켜주었다.
“아름아, 일단 앉자.”
신아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성필이 엉거주춤 걸어가니 발을 맞춰주긴 했다.
성필은 간신히 침대 바로 앞까지 왔다. 이제 자신이 먼저 앉고 옆에 신아름을 앉힐 생각이었다.
천천히 신아름을 밀어내며 침대에 엉덩이를 붙여갔지만, 그녀는 그냥 힘을 주어 성필과 마주 보고 앉았다.
“…….”
성필은 앉아서 신아름과 마주 보는 상태가 됐다. 즉, 신아름이 성필을 바라보며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그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얘가 왜 이러지?’
전생에서도 신아름은 간간이 병증이 도져 급히 성필을 찾곤 했다.
매번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심각한 상황들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성필이 말레이시아에 있던 와중 갑자기 신아름의 병증이 발발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성필은 업무도 다 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했었다.
‘그때도 그냥 나를 보면 괜찮아졌었는데.’
설마 전생보다 병이 심해진 것일까?
안쓰럽다.
자신에게 안긴 이 가련한 아이는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병을 달고 있다.
원인조차 모른 채 계속해서 병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얼마나 불안할까.’
원인도 모를 증상이 언제 나타날지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신아름에게는 무지막지한 고통일 것이다.
증상이 없을 때도, 병에 대한 걱정 때문에 스트레스를 차근차근 받고 있겠지.
“아름아.”
슬슬 허벅지에 피가 안 통해서 아파질 때 즈음, 성필은 그녀를 불렀다.
“많이 힘들었…….”
“팀장님.”
신아름이 성필의 위로를 끊고 그를 불렀다.
“팀장님 목걸이 걸리적거려요.”
“목걸이?”
그제야 성필은 자신의 목을 감싼 목걸이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성필은 매번 목걸이를 차고 벗는 게 귀찮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항상 하고 다녔기에, 이제는 몸의 일부와 같았다.
신아름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있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친숙해진 것이다.
“자꾸 저한테 닿아서 아파요.”
“……그래?”
성필은 조심조심 목걸이를 벗어서 자신의 옆에 두었다.
목걸이를 벗을 때만은 신아름도 성필의 목에 두른 팔을 풀어주었다. 그 뒤로는 바로 다시 껴안았지만.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촬영 때문에 그래?”
신아름조차 자신의 병증이 언제 발생하는지 모른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건, 성필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신아름은 근래 괜찮았다.
거의 매일 성필과 함께였으니까.
“촬영이 힘들었어? 아님 효민이랑 사이가 안 좋아진 거 때문에 그래?”
성필과 함께 있으면서도 병증이 발생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신아름의 상태를 악화시킬 또 다른 이유가 있단 뜻이니까 말이다.
“모르겠어요.”
역시나, 신아름도 정확한 트리거를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며, 무의식 속에서 여러 불만이 터져 나오고, 갑자기 모든 감각이 증폭한다는 것밖에.
신아름의 기억은 그쯤에서 끊어진다.
“그래도 내가 있으니까 좀 낫나 보네.”
“네.”
전생에서, 성필은 생각했었다.
신아름은 연예인을 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녀는 일반인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과 감성을 지니고 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더라도, 몸 안은 바람만 스쳐도 병들어갈 정도로 여리다.
‘하지만 아름이는 전생보다 스트레스가 더 적을 텐데. 멤버들이랑도 잘 지내고. 윤상열도 없고. 그럼 뭐가 문제지?’
전생과 다른 것이 뭘까?
‘전생에서…….’
신아름은 리더였다.
그것을 떠올리자 성필은 찬물을 갑자기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얼얼하다.
‘아름이는 고분고분 누구 말이나 듣고 있을 성격이 아니잖아.’
옛날에 신아름을 데려올 때 가로 엔터 사람들에게도 설명해주었던 부분이다.
신아름은 리더 기질이 있다.
그녀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자신의 상처를 권위로 감추기 위해, 또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게 힘든 성격 때문에.
신아름은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어 한다.
어떤 인간이 권위를 지닌다면, 사람들은 그 인간 자체보다 권위를 더 자세히 보기 때문이다. 신아름은 그 권위로 자신을 가리길 바란다.
‘이번 생에서 아름이는 리더가 아니야.’
성필이 발견한 전생과의 차이였다. 그건 굉장히 신빙성 있어 보였다.
멤버들과 갈등이 있을 때, 신아름은 권위로 찍어누른 채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소모하여 갈등을 해결해야 하리라.
‘그럼 아름이를 이렇게 만든 건…… 나인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필이 신아름을 가로 엔터로 데려왔기에 그녀의 증상을 악화시킨 것인가.
“이제 됐어요.”
벌써 서로를 안은 채로 수십 분이 지나갔다.
신아름도 진정됐다. 아까 멤버들 앞에서 울며 ‘팀장님’만 외쳤던 게 창피해질 정도로 진정됐다.
“놔주셔도…….”
성필에게서 떨어지려던 신아름을, 그가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안았다.
너무 강하게 안아서 신아름이 폐 속에 있던 공기를 전부 입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아름아.”
“네헤에……?”
신아름이 간신이 폐 안의 공기를 쥐어 짜내 답했다.
“네가 뭘 하더라도, 어디에 있더라도 난 네 편이야.”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신아름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성필을 다시금 강하게 안았다.
아까와 역할이 바뀐 듯했다.
“알아요. 가족이잖아요.”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줘. 새벽에 불러도 돼.”
“그래서 불렀잖아요.”
“응.”
한동안 포옹을 이어가고 나서야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가족끼리라도 낯간지러운 말을 한 뒤에는 불편하고 창피하다.
신아름은 괜히 기지개를 켜거나 목청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워서 성필이 보이지 않음에도 말이다.
“읏.”
불을 켜니 눈이 쨍하게 아파져 왔다.
다행히 아까처럼 빛이 미친 듯이 날뛰지는 않았다. 완벽하게 증상이 사라진 것이다.
성필은 눈가를 가리면서 말했다.
“나 이제 가볼게.”
“네. 빨리 가서 주무세요.”
그때 신아름은 침대에 놓인 목걸이를 보았다. 아까 성필이 벗어두고 챙기지 않은 것이다.
성필은 나가려는 듯 문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
신아름은 이불로 목걸이를 덮으려 했…….
“아, 목걸이.”
“여기요.”
신아름이 급히 목걸이를 집어 성필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성필을 배웅하진 않았다.
방 밖으로 성필을 배웅하는 멤버들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잠시 후, 리더인 백설하가 앞장서서 멤버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장하양의 표정은 특히나 더 심각했다.
“아름아, 방금 그거…….”
신아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 병 있어요. 지금까지 숨겨서 죄송해요.”
* * *
다음 날, 성필은 멤버들과 돌아가며 면담을 진행했다.
주제는 신아름과의 관계와 멤버들이 바라보는 신아름의 상태였다.
“아름이 상태요……?”
백설하는 짚이는 게 없다고 했다.
신아름은 항상 당당하고 마이 페이스에 자기주장이 확실한 아이였으니까.
어디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 수 없다는 모양이다.
“신아름, 그게, 음…….”
조아라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했다. 그녀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아름이가?”
“네. 맨날 뭐, 꺼져라, 음탕한 년, 내 옷 훔쳐 입지 좀 마라…….”
“아름이 옷 훔쳐 입어?”
“훔친 게 아니라 빌린 거예요! 걔가 잊어버려 놓구서…….”
사실상 조아라가 놀림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흔한 친구끼리의 대화다. 하지만 조아라는 어제의 신아름을 보곤, 이제까지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날 싫어하고,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닐까요…….”
“절대 아니야.”
“……확실해요?”
“당연하지. 아름이 너 좋아해. 근데 음탕하단 말은 왜 나온 거야?”
“그거 진짜 유언비어예요! 신아름 걔가 리카한테 옮아서 매일 나한테……!”
성필은 조아라의 설명을 들으며 주억거리기만 했다.
그렇군…….
“에, 에에, 아름이는요……. 싫어하는 게 하나 있긴 했어요…….”
리카는 죄의식 가득한 표정이었다.
오늘 출근할 때부터 그러했는데, 신아름이 그리된 까닭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라이브 방송하는 걸 싫어했어요. 아타시(제)가 휴일에 숙소에서 방송하잖아요.”
“휴일 아침?”
“하이(네). 왜 숙소에서까지 그러냐고…….”
“리카 너 심하긴 해.”
한창 리카가 라이브에 빠져있었을 땐, 신아름에게 애교를 보여달라며 방송을 켠 채 쫓아가기도 했었다.
신아름이 그만하라면서 도망가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아, 아타시(저)는 아름이가 그냥 내숭 떠는 거라고 생각해서…….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어쩌면 이게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성필은 기가 죽은 리카를 위로해주고, 마지막 멤버인 장하양을 응접실로 들였다.
장하양은 성필의 질문을 받곤 오래도록 고민했다. 짚이는 부분을 찾는 게 아니었다.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성필도 낌새를 눈치채고 진중히 기다렸다.
‘하양이는 아름이보다 언니야.’
둘 사이에 갈등이 있더라도, 장하양이 신아름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이기는 건 대부분 장하양이었겠지.
두 사람 다 주관이 강하니, 만약 신아름이 자주 부딪치는 멤버가 있다면 장하양일 게 분명했다.
“아름이는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장하양이 포문을 열었다.
“제가 박 이사님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싫어해요.”
‘싫어하는 것 같아요’도 아니고 ‘싫어해요’다.
무려 장하양이 그렇게 말했다.
장하양은 이유이 어시스턴트가 성필의 번호를 얻어갔을 때도 가장 냉철했었다. 그녀는 진작 이유이의 의도를 파악했었지만, 성필과 다른 멤버들은 데이트라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그녀의 말에는 신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름이가 왜 그러겠어?”
마치 신아름이 질투한다는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그룹의 멤버와 프로듀서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한다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능성이다.
“자기 걸 뺏기는 게 싫은 거겠죠.”
“……자기 거?”
성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장하양이 끄덕였다.
“이사님이요.”
“내가 아름이 거였구나…….”
“아름이 생각인 거죠.”
“응…….”
“이사님은 아름이 거 아니에요.”
“응? 어, 그렇지. 나는 내 거지.”
“그렇죠.”
영 어이가 없는 추측은 아니다.
신아름은 독점욕이 있으니까. 심지어 사람에게도 그러하다.
‘아름이가 자기 사람은 기막히게 챙겼었지.’
전생에서 신아름이 솔로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인기를 얻자, 석세스 엔터에서는 신아름만을 위한 TF팀까지 꾸렸었다.
신아름은 자신의 팀을 유별나게 편애했었다.
그 대상이 현재의 성필인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하양이 너랑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저는 그렇게 느껴요. 아마도 제가 초기에 아름이한테 이사님을 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걸지도요.”
그때부터 갈등의 싹이 텄었구나.
“요즘은 안 그러잖아.”
“네. 이제 화해했어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저를 껄끄러워하는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그럼 방법은…….”
장하양이 재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저랑 이사님이 거리를 벌릴 수도 없잖아요.”
“어?”
“그쵸?”
“어, 어어, 그렇지. 그럴 수는 없지.”
장하양이 끄덕였다.
“시간을 들여서 풀 문제인 거 같아요. 저도 아름이랑 더 친해지려고 노력할게요.”
“그래 줄래?”
“네. 아름이는 소중한 동생이니까요.”
“부탁할게.”
이번 상담으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일단, 신아름은 시도 때도 없이 라이브 방송을 켜는 것을 싫어한다.
‘주변에 CCTV가 깔린 기분일 거야.’
숙소에서도 라이브 방송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야 하리라.
두 번째로, 신아름은 장하양을 껄끄럽게 여긴다. 특히 장하양이 성필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어.’
신아름의 마음이 유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하양아 시간 내줘서 고마워. 연습으로 많이 바쁠 텐데.”
“아니에요. 도움이 돼 드려서 기뻐요.”
“하양이 점점 말을 예쁘게 하네.”
“아하하,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럴까요.”
“책 하니까 생각난 건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다 읽…….”
“덜 읽었어요.”
“천천히 읽어.”
성필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때 장하양이 다시 그를 불렀다.
“이사님은 이사님 거예요. 다른 누구 게 아니라요.”
“어…… 그렇지.”
“아름이가 저희 관계를 싫어한다고 저희가 거리를 벌릴 수는 없어요.”
이미 했던 얘기 아닌가?
아님 회의가 끝났을 때처럼 요점을 짚어서 말해주는 건가?
“아름이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응, 고마워. 부탁할게.”
며칠 후.
성필은 휴게실에서 밥을 먹으며 신아름과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하양 언니가 자꾸 어디 놀러 가자고 해요. 바쁜 데 어딜 가자는 건지. 솔직히 귀찮은데 언니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고민이에요.”
“…….”
신아름과 관계를 더 진전시키겠다는 장하양의 계획은 실패한 듯했다.
그래도 신아름은 요 일주일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잘 지냈다.
‘한 번 터뜨리면 안정되는 건 전생이랑 같구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름아.”
“팀장님이 언니한테 말해주시게요?”
“요즘은 힘든 거 없지?”
“방금 하양 언니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됐어.”
“사람 놀려요?!”
신아름은 전생보다 병증이 악화된 것일 수도 있다.
성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녀와 더 가까이 지내주는 것뿐이리라.
‘근데, 여기서 더 어떻게 가까이 지내지?’
직접 숙소에 들어가서 산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니, 더 이상 가까이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그나마 더 자주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정도가 방법일까. 비록 성필의 개인 시간은 조금 줄어들겠지만…….
‘아름이랑 나는 쌍방보험 관계니까.’
옛날에 학폭 루머 사건이 끝나고 신아름이 했던 말이었다.
다시 떠올리니 느닷없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팀장님 제가 웃겨요? 에휴, 사람 놀리는 데 재미 붙이셨네.”
“아냐.”
신아름은 뾰로통한 티를 내다가도, 성필의 미소를 보곤 배시시 웃었다.
* * *
“자, 이게 가이드 녹음까지 마친 너희들의 타이틀곡이야.”
정규 앨범 첫 번째 타이틀곡인 ‘아라베스크’의 가이드 버전이, 멤버들 앞에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가이드 녹음도 백설하가 맡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게 이런 곡이었구나.”
엘릭이 ‘라라라’라는 가사만 붙이며 불렀을 때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그는 ‘아라베스크’에 들어가는 보컬 기교를 전부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한 가이드 버전을 듣는 멤버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걸로 춤 연습하면 돼요?”
“어. 오늘부터는 ‘아라베스크’ 보컬 연습도 병행할 거야. 하양이는 랩 쪽으로 수고를 더 해줘야겠다. 레코딩은 여유 있게 텀 좀 둘게. 열심히 해야 한다?”
“당연하죠.”
조아라는 다른 멤버보다 열의가 훨씬 강한 것처럼 보였다.
소녀연맹은 가사가 붙지 않은 ‘아라베스크’로 안무를 연습해왔다.
아무래도 가사가 없으니 표현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연습이 더 수월해질 것이다.
“설하야, 잘 부탁할게.”
“네, 맡겨두세요.”
백설하에게 보컬 강의를 맡긴 뒤, 성필은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편히 앉았다.
‘드디어 타이틀 하나 완성하겠다.’
가이드가 붙기 전까지는 ‘아라베스크’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질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하지만 오늘부터 그 걱정도 끝이다.
‘잘 나왔어.’
이제 성필은 멤버들이 잘 소화해주기만 바라며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타이틀곡이 하나 더 남았으니까.’
정지음과 엘릭이 사력을 다해 만들고 있는 두 번째 타이틀,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가 남았다.
‘……제목이 그게 맞나?’
너무 길어서 성필도 가끔 헷갈리곤 한다.
“형.”
앨범 완성도를 체크하던 도중, 정지음이 직접 성필을 찾아왔다.
“어, 웬일이야. 작업실에서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종일 앉아 있어서 허리 아프거든요. 가끔은 걷기도 해야죠.”
“운동 범위가 사무실까지인 건 서글프네.”
“농담이고, 이수연 작사가님한테 연락이 와서요.”
“작사가님이?”
“‘아라베스크’ 관련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회사로 찾아와도 되냐는데요.”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해도 될 텐데, 굳이 왜 찾아오는 것일까.
가벼운 용건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근데 너한테 연락이 먼저 왔네?”
“네? 음, 가사 쪽으로는 저랑 논의를 많이 했었잖아요.”
“……그러냐.”
“형 통해서 연락 온 게 아니라서 좀 그러세요? 좀 위계가 없는 거 같기도 하네요. 앞으론 형한테 연락 돌리라고 전할까요?”
제발 이수연 작사가의 마음을 눈치채 줘, 지음아. 왜, 자꾸, 굳이, 너한테, 업무적으로 연락하겠니…….
“알겠어, 작사가님한테 오셔도 된다고 전해줘.”
“넵.”
사무실을 나서는 정지음을 보며, 손혜빈이 장난스레 혀를 찼다.
“쟤는 누가 말을 해줘야 알려나.”
“냅둬. 지음이가 연애에 관심이 없나 보지. 알면서도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무시하는 걸 수도 있잖아.”
“오, 성필이 너 그런 경험 많아?”
“나는 제발 누가 관심 좀 가져줬으면 좋겠고.”
“불쌍하네.”
“나 40살까지 결혼 못 하면 누나가 데려간다고 했잖아. 그 약속 아직 유효해?”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할 곳이나 미리 알아봐.”
“두 분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한구인은 둘의 대화에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남녀가 장난으로라도 결혼을 입에 올리는 건, 한구인의 감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 시간 정도 후, 성필과 손혜빈은 응접실에서 이수연을 맞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뇨, 택시 타면 금방이잖아요.”
“이번 가사도 너무 잘 써주셔서 고마워요. 사장님도 좋아하세요.”
‘아라베스크’의 가사도 이수연에게 의뢰를 보냈고, 그녀의 가사가 채택되었다.
소녀연맹의 타이틀곡 가사는 전부 그녀가 맡아왔고,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의 작사가를 이겨왔다.
이 정도면 소녀연맹과 영혼의 듀오라 봐도 좋으리라.
“하하…….”
그런데 이수연은 자신의 가사가 칭찬받았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색하게 웃으면서 칭찬을 회피하는 듯했다.
“저, 오늘 온 게 가사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 건데요.”
이수연은 결심한 듯 뜨거운 녹차를 벌컥 마셨.
“아 뜨거어어어어!”
“괜찮으세요?!”
이수연은 한동안 혀를 내밀고 열기를 식혔다.
눈물을 글썽이며 ‘으우우’ 같은 소리만 내는 것이 매우 불쌍하게 보였다.
“흐에, 으, 그헤에…….”
“괜찮아지면 말씀하세요.”
“크흠, 히번, 이번 가사가요.”
마침내 이수연이 진정한 용건을 꺼냈다.
“그, 박 이사님이랑 손 이사님 디렉팅도 따르고. 소녀연맹 애들 의견도 받고, 정지음 작곡가님이랑 협의도 하면서 썼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그게, 저도 ‘아라베스크’ 가사를 써냈고요. 그걸 채택해주신 건 정말 감사하지만요.”
이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요, 인기 없을 거 같아요.”
“네?”
“가사 자체가 아이돌에 맞지 않거든요. 아니, 굳이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가사의 컨셉 자체가요.”
‘아니’의 컨셉은 저항과 자유였으나, 가사 자체는 그 색채가 짙지 않았다.
무언가를 강요하는 이들을 향해 ‘아니’라고 말하는, 이른바 마이 웨이를 강조한 가사였다.
‘롱 포’도 비주얼과 뮤비 컨셉은 저항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가사는 농밀한 사랑을 표현했었다.
그리고 ‘아라베스크’는.
“약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아라베스크’의 주제는 ‘소외된 자와의 연대와 관심’, 그리고 ‘문화는 죽지 않는다’는 키워드다.
그래서 뮤비의 컨셉도 러시아 혁명에선 약자로 몰렸던 발레 문화로 잡지 않았던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대부분의 가사는 약자의 입장에서 쓰이지 않아요. 있다고 해도, 술 먹고 애인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남녀라거나. 뭔가 실수하고 자기 자신을 비웃는 시니컬한 모습이라거나…….”
노래 가사에서 그려지는 약자의 모습이란 그 정도다.
“그런데 ‘아라베스크’는 그걸 넘었잖아요. 소녀연맹 자체가 언더라는, 소외된 사람이라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어요. 소녀연맹 뮤비나 서사가 지금까지 투쟁이나 저항 쪽이었긴 하지만요, 이렇게까지 밑으로 파고 들어간 적도 없었어요.”
한 번 말문이 트인 이수연은 아까의 어수룩한 태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작사를 공부해왔고, 또한 가사를 쓰면서 체득했던 통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렇게 사회비판적? 아…… 맞나요?”
“비판적이라기보다, 음, 그러게요…….”
확실히 그런 색채가 있긴 하다.
“그런 쪽의 가사는 수십 년을 소급해서 ‘유지태와 친구들’까지 가야 찾을 수 있어요.”
유지태와 친구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꾼 혁명가들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그들을 기준으로 딱 반으로 나뉠 수도 있을 수준이다.
아직도 그들을 넘는 파급력을 갖춘 아티스트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분들도 본인들을 언더로 그리지는 않았어요. ‘학교 이데아’ 같은 곡도 학생들에게 충고나 조언을 하는 형태였지, 그분들이 ‘학생들아 함께 싸우자’고 말하지는 않았거든요…….”
즉, 이수연이 하고 싶은 말은.
“‘아라베스크’의 가사는 전례가 없어요.”
그리고 본인을 약자로 그리는 가사가 전례가 없던 건, 당연하게도 이유가 있다.
아이돌이란 모두가 우러러보아야 할 우상이다. 그렇기에 밑바닥에 붙어 ‘나를 도와달라’ 같은 가사를 쓸 수는 없다.
위에 서거나 옆에 서서 ‘이렇게 해’라고 하는 건 되지만, 아래쪽에서 ‘같이하자 부탁할게’라고 할 수는 없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게 가능한 건 주제가 사랑이거나 자조적일 때뿐이에요.”
즉, 아이돌은 자신을 ‘약자’로 그릴 수가 없다. 또한 누구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라베스크’ 가사는 멤버들의 의견을 받아서 만든 거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이라며, 이수연은 말을 끌었다.
“그게, 아이돌한테는 진솔함이란 게 미덕이 아니라서…….”
이수연은 ‘아라베스크’의 가사를 넘기고도 줄곧 불안에 시달려왔다.
이런 가사로 성공할 수 있을까?
가로 엔터가 너무 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걸그룹이 ‘다쳐도 일어서 우린 가시를 헤치고 나아가 손을 묶고 기어서라도’ 같은 가사를 부른다는 게 괜찮을까?
고민에 고민을 겹쳐 끙끙 앓기만 했었는데, 드디어 말하게 됐다.
“가사, 바꾸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오랜 속앓이를 마친 듯, 이수연은 간신히 자신의 주장을 전했다.
길고 긴 고민 끝에 겨우 꺼낸 말이다.
그에 대한 성필의 답은.
“알아요.”
너무도 간결했다.
“……네?”
“제가 작사가님만큼 가사 쪽으로는 깊게 파지 않았지만요, 대중음악사는 어느 정도 알고 있거든요. 작사가님이 걱정하시는 부분, 저도 알고 있었어요.”
이수연 작사가 정도로 정련된 이론으로 알고 있던 건 아니지만.
누구라도 아이돌을 오래 보아왔다면, ‘아라베스크’의 가사를 읽자마자 묘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뭔가 엇나간 느낌을 말이다.
직접 아이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수십 년 동안 보아온 성필에게는, 그 느낌이 더욱 강렬했었다.
“모를 수가 없죠.”
이수연은 눈만 끔뻑이면서 당황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잠깐만, 그럼 박 이사님은 알고서도…….’
“알고서 가사를 컨펌하신…… 거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