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너희 친구니’의 1부 촬영이 끝났다.
이제 서로의 관계성을 탐색하는 질문 타임과 우정을 시험하는 게임 타임이 남았다.
신아름과 김민주는 잔뜩 지친 모습으로 세트장을 걸어 나왔다.
두 사람 다 서로를 우회적으로 엿 먹이려 하고, 또한 그 엿 먹임을 중화시키느라 진을 다 뺐다.
“아름아 고생했어.”
“네…….”
신아름은 의자에 앉아 쉬면서도 김민주를 흘끗거렸다. 그때, 마찬가지로 신아름을 보던 김민주와 시선이 맞았다.
둘은 못 볼 꼴 봤단 듯 재빨리 눈을 돌렸다.
“팀장님도 봤죠? 김민주 쟤 그냥 내 욕만 죽으라고 하는 거.”
그걸 욕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둘은 서로의 단점을 끊임없이 쏟아냈었다.
헐뜯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친구를 놀리는 느낌이었다.
격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패널들은 물론 스태프들도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너도 비슷했어.”
“팀장님 지금 김민주 편드는 거예요? 진짜 쟤가 차애예요?”
“아냐. 근데 아름이 많이 컸다. ‘죽고 못 사는 친구’ 때보다 멘트가 훨씬 나아.”
아무리 아이튜브 영상 촬영이었다곤 하지만, 그때 신아름의 말투는 너무도 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성필이 회초리까지 들지 않았던가.
신아름도 그것이 떠올랐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건 왜 말해요…….”
“잘했단 거지. 진짜 잘했어. 오늘 거 방송으로 나가면 난리 날 거야. 다 웃겨 죽을걸?”
“과즙미 뿜뿜인지 뭔지, 김민주가 한 짓들 보면 웃긴 하겠죠.”
성필은 설핏 미소 지었다.
신아름은 김민주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진짜 싫어하는 사람에겐 이러지도 않는다.
그녀도 김민주와 친해지고 싶은 게 틀림없다. 자존심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현은 못 하지만 말이다.
“근데 힘 너무 빠지네요. 지금까지 촬영한 것만큼이나 더 촬영해야 한단 거잖아요. 2부는…….”
성필은 신아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길은 PD 쪽으로 주었다.
김민주의 매니저는 PD와 대화 중이었다.
흘깃 들으니, 김민주의 이미지에 타격이 될 만한 장면은 커트해달라는 요청을 하는 듯했다.
‘민주가 오늘 폭주하긴 했지.’
상대가 신아름이기 때문인지, 김민주는 여태껏 팬들에게 노출된 것보다 훨씬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아름의 말을 막으려고 그녀의 팔을 붙잡고 제압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나도 슬슬 말해야겠네.’
성필은 신나게 떠드는 신아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병 음료가 든 에코백을 내밀었다.
“아름아, 패널분들한테 인사 다니자.”
“아, 인사. 네.”
신아름은 가볍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예능 신인이니,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예능 쪽에 입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며 인사하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성필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니면서, 첫 예능이라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말해. 멘트 잘 받아줘서 감사하다고.”
“……제가 뭐 잘못했어요?”
“네 태도가 필터 못 거치고 나온 게 많아.”
패널들의 말을 끊고 김민주나 효민에게 말을 건다거나. 혹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거나.
특히, 짓궂은 질문을 자주 던졌던 개그맨 권기철이 ‘책 안 읽게 생겼는데’라고 했을 때는 성필마저도 간담이 서늘했었다.
신아름이 싸늘한 태도로 ‘예’라고만 답했던 것이다.
“특히나 권기철 선생님한테는 그거 죄송하다고 꼭 말하고.”
“아니, 제가…….”
“아름아.”
단호한 부탁이 담긴 성필의 부름에, 신아름은 반박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러곤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네.”
신아름은 성필의 손에서 에코백을 받아 패널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감사하다, 미안하다 그런 인사를 전했다. 마지막으로는 권기철의 앞에 서서 자신의 무례에 대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행히 권기철은 신경 안 쓰는 기색이었다.
“무슨 선생님이야. 그냥 기철이 오빠라고 불러. 아, 이 나이에 오빠라고 불리는 건 좀 그런가?”
권기철은 오히려 신아름을 격려했다.
“잘하고 있어. 예능 진짜 처음 맞아? 내가 멘트 던지는 보람이 있어.”
“감사합니다.”
“내가 이상한 말 해도 너무 속에 담아두지 말고. 방송이라서 그러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신아름은 인사를 마친 뒤 다시 성필의 앞으로 돌아왔다.
“됐어요?”
“잘했어.”
“패널분들 뭐 신경 쓰지도 않더만…….”
“아름아, 네가 방송에서 가면을 쓰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가면을 써.”
예능에선 심기가 불편한 발언이 나와도 하하 웃는다.
다들 웃고 떠드는 예능 세트장이라 해도, 엄연한 일터이니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그 가면 안에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일이지만, 예능이지만, 네가 한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야. 그걸 푸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혹시 모르니 말이다.
“카메라에 비치는 건 성격 그 자체가 아니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지.”
그에 비해 신아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토크나 태도에서 그게 여실히 드러난다.
“네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그렇다고 네 성격대로 대하면 안 돼. 이 업계에서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야 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지금은 아니라도, 1년 뒤나 2년 뒤가 아닐지라도, 정말 의외의 곳에서 관계가 안 좋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온다.
전생과 합쳐 수십 년 동안 연예계를 구른 성필은 그 진리를 진작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촬영에선…….”
“다시 촬영 들어갈게요!”
PD의 말에 성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신아름도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그녀의 심기가 상하여 방송 텐션이 내려갈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아니, 민주 씨랑 아름 씨 친구라면서 서로 생일도 모르는 거예요?”
“네, 몰라요.”
신아름은 심드렁하게 김민주를 바라보더니.
“알아야 해?”
“몰라도 돼. 나도 너한테 선물 같은 거 안 주고 싶거든.”
“둘이 친구 맞아요……?”
신아름과 김민주는 여전히 환상적인 케미를 보여주었다.
“그럼 이번에 둘이 생일에 어디 놀러라도 가요. 관광지라던가요. 같이 어디 간 적도 없다면서요. 좋지 않나?”
“아름이랑 놀러 갈 바엔 연습이나 더 하는 게 낫죠…….”
김민주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단 말투였다.
“리얼. 너랑 같이 다닐 바에야 걍 종일 눈 감고 있는 게 낫지.”
어이가 없는 건 신아름도 같았다.
그건 패널들도 마찬가지였고, 두 사람의 앙숙 같은 대화가 나올 때마다 세트장엔 웃음이 휘몰아쳤다.
* * *
촬영을 마쳤을 때는 밤이었다.
신아름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서 세트장을 나왔다. 마치 시체가 걸어가는 모양새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바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출연진과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며 인사를 해야 했으니까.
그들도 모두 가자, 그제야 신아름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아름아 수고했어.”
“팀장님 저 어깨 좀 주물러줘요. 계속 앉아 있었더니 뭉쳤나 봐요.”
“회사 이사한테 어깨 주물러달라고 하네.”
“이사? No. 팀장 앤드 패밀리.”
“오케이, 패밀리.”
성필의 손놀림을 만끽하던 신아름의 시야에 우효민이 잡혔다.
우효민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인사를 마치곤 매니저와 함께 스튜디오를 나갔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
“그런데…….”
복도 저 끝에 있어 둘의 대화는 잘 들리진 않았지만, 매니저가 우효민을 달래는 듯했다.
‘분량을 많이 못 따서 그런가.’
촬영 초반에는 우효민도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으나, 후반은 완전히 신아름과 김민주에게로 페이스가 넘어왔다.
두 사람의 케미가 워낙 좋아서 방송 분량으로 딸 게 많았기 때문이다.
김민주도 초반에는 우효민과 토크를 섞으려고 했었지만, 후반엔 자신과 신아름의 케미가 좋단 것을 눈치채곤 신아름 한 우물만 팠었다.
사실상 우효민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쟤 우는 거야?’
우효민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를 닦곤 힘차게 걸었다.
기분 전환이 매우 빠르다.
신아름은 우효민이 걱정됐다.
‘……아니지. 나도 힘든데 누굴 걱정해줘.’
2부 촬영은 성필의 충고를 지키느라 더 힘들었다.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말에 필터를 놓고, 눈치도 더욱 많이 보았다.
‘나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 누구 걱정할 처지가 아니야.’
신아름은 혹여라도 우효민을 따라잡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신아름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우효민을 따라잡아서,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어버렸다.
“효민아.”
우효민이 깜짝 놀라 뒤로 돌아보았다.
“오늘 촬영 수고했어. 너 예능 많이 나온 티가 나더라. 나 네가 나온 프로그램 많이 찾아봤었거든. 어째 점점 성장한다?”
신아름 나름 우효민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것을 들은 우효민의 안색은 급격하게 굳어갔다.
“응, 고마워.”
그러곤, 우효민은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매니저마저 당황할 만큼 싸늘한 태도였다.
성필은 신아름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다.
“야 우효민.”
신아름은 성필의 손이 닿기도 전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우효민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데뷔 때 연습실에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근데 그건 네가 먼저 시비 건 거잖아.”
“…….”
“아니면 내가 포유 나간 거 때문에? 김명운 대표님도 괜찮다고 했는데 네가 왜 그래. 내가 나빠? 미워? 원망스러워?”
“…….”
“뭐라고 말이라도…….”
우효민은 어깨를 확 빼서 신아름의 손을 털어냈다. 맹수에게 습격이라도 당하여 급히 도망가는 초식동물의 모양새였다.
우효민은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신아름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대답은 해주었다.
“아니야. 안 미워. 내가 어떻게 그래.”
“거짓말하지 마. 대체 왜…….”
우효민은 답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매니저와 함께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왜.”
포유를 나갔던 게 그토록 원망스러웠나?
그럼 어떻게 해야 했지? 계속 포유에 남아서 활동을 해야 했나?
“팀장님. 내가 나쁜 년이에요?”
“아니야.”
“…….”
방송에선 그렇게 친했었는데.
고작 멀리 떨어진 것만으로도 무너질 우정이었구나.
그래, 방송이니까.
성필의 말마따나 모두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이다. 우효민도, 포유의 멤버들도 말이다.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태도 정도는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예능 촬영처럼, 연예인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건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 * *
김민주의 ‘너희 친구니’ 촬영에 동행했던 매니저는 기합이 바짝 들어 있었다.
KS 엔터의 누구든, 그의 앞이라면 기합이 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미지에 안 맞는 부분은 커트해달라고 했고…… 그게 다야?”
KS 엔터의 매니지먼트 계열 이사, 남홍범.
1990년대 초반부터 매니저 생활을 시작하여 KS 엔터의 이사급까지 오른, 매니저 세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KS 엔터의 매니저들 사이에서는 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예.”
매니저는 진땀을 닦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부동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평소대로 1팀장에게 보고할 줄 알았건만, 설마 남홍범에게 직접 불리다니.
김민주의 첫 예능 촬영이라서 그런가…….
“민주가 이상한 말은 안 했어?”
“예. 교육받은 대로, 전부 잘 소화했습니다. 태도나 말투, 워딩까지 완벽했습니다. 신아름이랑 대화할 땐 조금 무너지긴 했는데, 귀엽게 봐줄 수준이었습니다.”
“야.”
“예……?”
“너무 굳어 있잖아. 편하게 있어. 군대야?”
“예, 예. 죄송합니다…….”
드디어 매니저는 자세를 풀었다.
“선편집 끝날 시기 되면 1차장한테 직접 ‘너희 친구니’ PD 만나보라고 해. 뭐 이상한 거 없나 계속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민주는 어떤 거 같아?”
“괜찮습니다.”
예능을 치른 아이돌들은 급격히 멘탈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분량을 따내지 못해서, 실언을 한 것 같아서 등,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남홍범이 걱정하는 게 있었다.
“피로도는 어떤데?”
예능 피로도는,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상상을 초월할 수준까지 올라간다.
예능 한 편을 찍으면 며칠 골골댈 정도로 말이다. 평소의 자신과 카메라 앞에서의 자신을 분리해내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오자마자 웨이트 트레이닝하는 거 보면 괜찮은 거 같은…….”
“뭐?!”
안 그래도 김민주의 근육이 계속 조각처럼 변해가는 게 탐탁지 않던 남홍범이었다.
이러다간 김민주가 팔이나 등을 드러내는 옷조차 못 입을지도 모른다.
“당장 그만하라고 해!”
“예.”
“걔는 뭔 운동을 스케줄 이외 시간에도 하고 그러냐 진짜.”
아무튼, 김민주가 멀쩡한 건 다행이다.
‘데뷔조 때 계속 연기를 가르친 효과가 있던 걸까.’
연기에서도 중요하게 가르쳤던 게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는 방법’이었다.
아이돌이란 인간의 긍정적인 부분만 모아둔 우상이다. 하지만 아이돌 본인은 인간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본인과 아이돌을 분리해내는 게 어려우면 결국 한계가 와.’
공황장애, 불안장애, 기타 등등의 정신병이 생겨버린다.
남홍범은 그런 예를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케이어스 멤버들에게 연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으며, 현재는 전문적인 멘탈 케어도 받게 하고 있다.
‘병 때문에 활동 중단이 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다행히, 남홍범의 리스크 대비 전략은 어느 정도 먹혀드는 모양이다.
아니면 김민주 자체가 신경줄이 굵은 인간이던가.
* * *
신아름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한창 여물었을 때였다.
귀찮단 이유로 저녁 식사도 하지 않은 신아름은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배는 고프지만 너무 피곤했으니까.
그런데 거실로 들어가니 장하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이 왔어? 밥 먹어.”
장하양은 텔레비전 앞에서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그녀는 미리 식탁에 차려두었던 반찬들을 데우고 밥을 펐다.
“아뇨, 언니, 저…….”
“응?”
오늘의 저녁 당번은 장하양이다.
장하양이 직접 만들었을 반찬의 향내를 맡자, 신아름의 배가 요동쳤다.
“……아녜요.”
신아름은 장하양이 차려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막상 수저를 드니 밥이 계속 들어간다.
장하양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니 할 말 있어요?”
“아니. 너 다 먹으면 치우고 설거지하게.”
“제가 할게요. 언니 들어가서 쉬세요.”
“아냐. 아름이 피곤하잖아. 내가 할게. 이것도 먹어봐. 맛있어.”
“……네.”
밥을 먹던 신아름은 어느 순간 장하양의 목에 집중하고 있었다.
장하양의 목은 새하얗고 가늘다. 그 가운데에 은색의 목걸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늘 질리도록 보았던 성필의 목걸이. 장하양이 선물로 주었던 목걸이가, 장하양의 목에 오버랩되었다.
“언니.”
성필에게 준 선물에 대해 물어보려던 신아름은 그냥 말을 삼켰다.
“아니에요.”
괜히 그에 대해 말했다간 기분만 상할 듯했다.
장하양이 성필에게 선물을 주었다. 기쁜 일이다. 왜냐면 성필도 기뻐했으니까.
그런데 어째선지, 신아름은 그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신아름도 알 수 없었기에, 기분이 두 배로 안 좋았다.
“잘 먹었어요.”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신아름은 곧장 씻었다.
샤워하다 보니 얼마 전 손혜빈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앨범에, 곡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뭔가가 없다고?’
다시 생각해도 얼굴에 열이 오른다.
하필 사람을 꼽 줘도 성필 앞에서…….
샤워를 마친 신아름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에도 머리는 쉬지 않고 생각을 거듭했다.
‘효민이 그년이 나를 미워해? 도대체 왜? 내가 이끌어주고 서사 넣어준 덕에 상위권에 진입했으면서.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짜증 나서 죽겠네.
나중에 만나면 욕이나 한 바가지 해줘야겠다.
그런데 성필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네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그렇다고 네 성격대로 대하면 안 돼. 이 업계에서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야 해.’
신아름은 눈을 질끈 감고, 우효민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려 노력했다.
그래, 두루두루 친해야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말이다.
‘이제 나는 아이돌이니까. 연예인이야.’
신아름은 방문을 열었다.
“조아라. 아침에 옷장에 내 블라우스 없던데 네가 입고 나갔…….”
리카가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신아름이 화들짝 놀라며 말을 삼켰다. 그녀는 몸을 크게 떨었기에, 조아라와 리카도 눈치를 못 챌 수 없었다.
“아름이 무슨 일 있어?”
“리카 너 방송 중이야……?”
“이에(아니). 아라쨩이 추천해준 남자 아이돌 영상 보고 있어! 세쿠시(섹시)해!”
조아라가 리카를 향해 중지를 들었다.
리카는 밝게 웃으면서 다시 핸드폰을 보았다.
“……허.”
신아름은 낮게 웃었다.
‘뭐지?’
지레 놀라서 몸이나 떨다니.
뭐 하는 짓인지.
‘내 집에서, 숙소에서…….’
숙소에서조차 꾸미고 있어야 하나?
‘손 이사님은, 혜빈 언니는 뭔데. 나 보고 뭘 하라는 거야.’
곡에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넣으라고?
나 자신이 아니라 억지로 무언가가 되어야 하나?
‘효민이 그년도 또 뭐고.’
얼마나 착해져야 하는데.
포유를 나가면 안 됐어?
계속 너희들이랑 같이 있어야 했어?
그래야 안 미워했을 거야?
‘팀장님은 어울리지도 않는 목걸이를 왜 자꾸 하고 다니는 거야.’
장하양에게서 선물로 받은 거라서?
평생 몸에 지니고 있을 생각일까? 잘 때도, 샤워할 때도, 일할 때도?
‘피곤해…….’
예능이니 방송이니, 그냥 피곤할 뿐이다.
말이나 행동도 마음대로 못 하고.
아니, 그건 언제나 마찬가지다.
밖에서도, 무대에서도, 방송에서도, 숙소에서도.
모든 곳에서, 신아름은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
자기 자신으로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아.”
그럼 뭘까 그게.
진짜 자신은 어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거지?
세상 모든 곳에서 가면을 써야 한다면, 그 안에서 진짜 자신이 있는 걸까?
“아…….”
신아름의 감각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빛은 어지럽게 산란하고 소리는 시끄럽게 증폭하고 냄새는 선명하게 풍겨오고 촉각은 거지같이 가렵고 미각은 좆같이 쓰다.
“…….”
신아름은 입을 열고, 목소리를 토해냈다.
* * *
집으로 돌아온 성필은 소녀연맹의 프로모션 스케줄을 점검했다.
‘이번 정규 앨범은 홍보가 제대로 되겠네.’
11월 말에 방영이 시작될, 백설하가 나왔던 예능인 ‘음악을 위한 동행’.
몇 주 뒤에 방영될 ‘너희 친구니’.
거기에 장하양의 연말 특별 무대까지.
‘미디어 홍보만 해도 두 개나 돼. 특별 무대에도 하나 올라가고. 여기에 우리 애들이 컴백 기간에 예능 하나 더 들어가면 좋을 텐데.’
하지만 연말에는 온갖 날고 기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오니, 소녀연맹이 그 기간에 방송에 나오는 건 힘들 터다.
‘내가 돌아다녀 봐도 어떻게 될 일은 아닌데. 뭐 방법이 없으려나.’
이미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나지만, 성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가로 엔터는 이번 정규 앨범에 사활을 걸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확정된 것만 해도 홍보력은 엄청날 거야. 정규 앨범은 역대급 성적이 될 게 분명해. 문제는 과연 어디까지 올라가느냐야.’
케이어스의 발끝이나마 쫓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껏 중소, 중견 기획사가 메이저 회사의 걸그룹을 따라잡았던 전례는 없다.
‘전례가 없지. 그러니까 우리가 최초의 전례가 될 거다.’
한 손에 꼽을 기획사만이 뚫을 수 있던, 전설의 영역에 들어설 만한 업적.
걸그룹 초동판매량 10만 돌파.
‘보이그룹이 아니고서야, 메이저 기획사가 아니고서야, 서바이벌 그룹이 아니고서야, 어떤 걸그룹도 들어가지 못한 관문이야.’
이 목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필의 욕심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루는 게 불가능한 그 목표를 떠올릴 때마다 성필의 가슴은 세차게 떨려오곤 했다.
전인미답의 경지를 자신이, 소녀연맹이 밟는다.
생각하기만 해도 설렌다.
“후우.”
성필은 한숨을 삼키며 홍보팀에서 제출한 프로모션 기획서들을 다시금 검토했다.
‘협찬 홍보도 있으면 좋겠…….’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시각은 12시에 가까웠다.
“어, 설하야.”
[팀장, 아니, 이사님!]
백설하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름이가 울어요! 계속 울어요! 왜 우냐고 물어도 ‘팀장님’이라고만 하고! 왜, 이렇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갈게!”
성필은 외투만 하나 걸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에 불 다 끄고 아름이 혼자만 둬! 아무 소리도 안 나게 하고!”
[아름이 혼자요?]
“그렇게 두기만 해! 또, 어딨을진 모르는데 아름이가 약이 있을 거야. 그거 찾아서 먹일 수 있으면 먹여!”
[야, 약? 무슨, 어디, 어디에요?]
“찾아!”
[네, 넵!]
시동을 걸면서도 성필은 조급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왜?’
왜 갑자기 신아름의 병증이 나타난 거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성필은 만나는 운전자마다 욕할 만큼 거친 운전 솜씨를 자랑하며 숙소로 향했다.
도착한 후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로 올라갔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현관에서 신아름을 제외한 멤버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님, 아름, 아름이가…….”
“조용히 있어. 아름이는 어디에 있어?”
“리카랑 아라 방에…….”
성필은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겠지.’
일단 신아름이 망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충격을 줘야 한다.
성필은 심호흡한 뒤 문을 벌컥 열었다.
“신아름 너 갑자기 또 왜……!”
무언가 성필의 몸을 거칠게 들이박았다.
신아름이었다.
성필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버텨 섰다.
“팀장니임…….”
그녀는 성필을 꽉 안은 채 흐느끼기만 했다.
“……어? 어, 나야.”
성필은 자연스럽게 신아름을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그럴수록 신아름은 더 강하게 성필을 안았다.
“응, 나야, 괜찮아, 나 왔어.”
성필은 평온한 어투였지만, 그의 마음은 당황으로 인해 거칠게 이지러지고 있었다.
신아름이 갑자기 자신을 안았다.
전생에서도, 그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