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안이상 매니저는 장하양에게 달려들 것처럼 기세를 세운 아버지를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장하양은 아버지의 삿대질과 폭언에 벌벌 떨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잘됐으면 부모부터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 고작 몇백만 원 쥐여주면, 하이고 내가 참 감사합니다 거리면서 떨어질까 봐?”
“아, 아, 저…….”
“야 이 불효막심한 년아! 지금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년!”
장하양은 심장에 사슬이 꽂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어머니에게 돈을 송금한 후로 천륜을 끊어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마음만은 부모에게서 벗어난 줄 알았다.
아니었다.
천륜은 끊을 수 없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너 그렇게 돈 벌고 다니는 거 다 내가 키워준 덕 아니냐고!”
장하양이 드디어 움직였다.
뒤로.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성필과 한구인은 건물에서 뛰쳐나와 아버지의 앞을 막았다.
매니저 안이상, 성필, 한구인, 세 사람의 남자가 막아섰음에도, 아버지는 기세가 무뎌지긴커녕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네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낳지 말 걸 그랬어! 어, 그래, 그때 그냥 확 없앴어야 했어!”
몸을 떨거나 눈을 자꾸만 굴리는 등, 혼돈과 공포를 그대로 나타내는 반응을 하던 장하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뚝, 무기질과 같이 움직임이 사라졌다.
“니 애미 뱃속에 있을 때 지웠어야 했는데…….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네까짓 년을 낳으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 쓰레……!”
“닥쳐 이 시발 새끼야!”
외친 건 성필이었다.
원초적인 욕설과 하늘 높이 뻗어나갈 듯한 외침에, 기세등등하던 아버지마저도 말을 멈추었다.
한구인과 안이상은 성필이 욕설을 썼단 것을 믿을 수 없단 듯 그를 쳐다보았다.
성필의 뒤에서 불안하게 사태를 관망하던 리카도, 본인이 욕을 먹은 것도 아닌데 화들짝 놀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아라는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입만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빠른 발소리가 퍼졌다.
그것을 깨달았을 땐, 장하양은 이미 저 멀리 달려 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잡을 엄두를 못 냈다.
단지, 술에 취해 돈밖에 생각하지 않던 장하양의 아버지만이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저년이 어딜……!”
성필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놀라서 뒤로 엉거주춤하더니, 곧 술기운을 받아 날카롭게 인상을 썼다.
“놔 어린놈에 새끼야!”
“꺼져. 다시 여기 오지 마.”
“오지 말긴 뭘 오지 마! 저년 저거 돈 버는 거 우리한텐 한 푼도 안 주고 지네끼리만 쓰는 거, 저거 저거, 천륜을 어긴 거야! 부모인 나한테도 돈을 줘야지! 고작 삼백만 원으로 누구 코에 붙이라고!”
삼백만?
장하양이 부모님에게 삼백만 원을 보낸 건가?
가로 엔터가 장하양에게 지급해왔던 생활비를 다 합친 것보다는 낮다. 하지만 그녀가 생활비를 거의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이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럼, 장하양은 그만한 돈을 어떻게 마련했지?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뭐?”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왜인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그는 분에 겨워 울기까지 했다.
“나도 앞길이 창창했는데, 시발 애새끼 하나 까서 평생 저년 수발이나 들고…….”
“…….”
“장하양 저년만 없었어도 나는……!”
성필은 그의 멱살을 더욱 강하게 쥐고 크게 휘둘렀다. 그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남자가 허리를 짚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성필은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네가 뭔 수발을 들어. 네가 하양이한테 뭘 해줘.”
“스, 스무 살까지 입히고 먹여줬……!”
“부모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면 고아원이랑 뭐가 다른데.”
남자는 다가오는 성필이 두려웠다.
술기운이 있더라도, 자신을 내동댕이친 건장한 남성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 공포는 당혹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고아원이 낫지. 거긴 밥이라도 세 끼 다 주니까. 부모란 건 먹히고 입혀주는 것보다 더한 걸 해주니까 부모잖아.”
성필은 울고 있었다.
얼마 전, 장하양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을지 상상됐기에,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장하양의 아버지가 처음 가로 엔터로 왔던 날, 성필은 그녀와 상담했었다.
홀로 받아들이기엔 거북하리만큼 끔찍한 말들이, 장하양의 입으로부터 나왔었다.
“항상 배고팠었어요.”
장하양은 집에서 식사다운 식사를 해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에게 밥이란 부모님이 먹고 남긴 것.
냉장고의 바닥난 반찬통에서 긁어먹는 것.
쌀벌레가 기어 다니는 통에서 건져낸 쌀을 씹어먹는 것.
그게 장하양의 밥이었다.
밥하는 법을 알게 된 중학교 3학년 가정 시간까지, 그녀는 생쌀을 씹거나 불려서 먹었다.
그런 것도 못 먹는 날이 더 많았다.
“저는 부모님한테 도덕도 못 배웠어요.”
부모는 장하양에게 ‘어떡하면 맞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떤 행동이 부모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지’ 정도만을 가르쳤다.
몸을 통한 가르침이었다.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장하양은 배운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구석에서 가만히 몸을 말고 있어야 하는구나.
그런 장하양이 처음으로 도덕을 배웠던 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문방구에서 뭘 사 먹는 애들이 부러웠는데…….”
혹시라도 뭔가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문방구를 돌아다니던 때, 바닥에서 200원을 주웠다.
그녀는 신이 나서 불량식품을 사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우리 가게에서 주운 거지?’라며,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당연한 거라며 가져갔다.
그땐 그게 무슨 기분인지 몰랐으나, 커서 생각하니 알 수 있었다.
그건 수치심이었다.
그로부터 장하양은 도덕을 배웠다.
“만족하는 법도 못 배웠어요.”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것’이란 개념을 배운다. 적더라도 자신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장하양은 가진 게 없었다.
배고픔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장하양은, 어느 날 친구가 선심 쓰듯 나눠준 빵 한 조각으로부터 만족을 배웠다.
배가 너무 고팠던 터라 더 먹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상했다.
‘아, 오늘 과식했어. 살찌겠네.’
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장하양 인생 최초로, 거짓되나마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도…….”
장하양은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고학년 때. 국어 시간에 연극을 하게 됐다.
장하양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대충 준비하지 않았다. 최대한 대사를 외우고, 나름 분위기를 살려 연기했다.
선생님이 따뜻하게 칭찬해주었다.
장하양 인생 최초로 받아본 사랑과 관심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따르게 됐어요, 많이…….”
꿈을 배우로 정할 정도로, 선생님이 준 관심은 장하양에게 강렬히 다가왔다.
하지만 장하양은 곧 깨달아야 했다.
사랑은 정반사가 아니었다. 주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
선생님은 장하양을 부담스러워했고, 이내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데다 용모가 단정치 못하고 애정결핍까지 있는 아이니까, 교사마저도 감당하기 버거웠던 것이다.
그때 장하양은 사랑받는 기분과 함께 다른 것을 배웠다. 무언가 받으려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무엇도, 아무것도 부모님한테 못 배웠어요. 인간이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걸요.”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만 했다.
매일 헌 옷을 입으며 굶주리고 가난한 아이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은혜를, 갚으라고.”
그렇게 살도록 둔 게 은혜라면, 장하양은 그딴 은혜는 잊어버리고 싶다 했다.
“살고 싶지 않았어요.”
왜 태어나게 한 거야.
왜 나를 만든 거야.
“그딴 게 삶이면……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 * *
장하양은 다리가 얼얼했다. 얼마나 뛰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도망쳤던 건 본능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말을 계속 들었다면, 인간으로서의 무언가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장하양은 멍한 정신으로 앞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느 공원이었으나, 장하양은 그것조차 알지 못하고 단지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벤치에 앉았다.
“…….”
아무런 말도, 생각도 나오지 않았다.
말라버린 우물 같았다.
백치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뇌가 생각을 거부하고 있었다. 무언가 떠오르는 순간, 그것은 가족과 관련된 것일 터다.
그러면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처에 칼날을 박아넣는 게 된다.
그래서 장하양은 입도, 머리도, 심장도 침묵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보다는 감촉이 먼저였다.
장하양은 아래를 보았다.
아기가 있었다. 아이인지 아기인지, 그것은 아장아장 걸어와서 장하양의 다리에 매달렸다.
“얘야, 누나 귀찮게 하면 안 되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머쓱하게 웃으며 아기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기는 의미 없는 옹알이를 해대면서 장하양의 다리에 얼굴을 부볐다.
장하양은 아기의 겨드랑이를 잡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아?”
아기가 흥미롭다는 듯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도 아기를 보았다.
‘작다.’
드디어 그녀의 머리가 생각을 시작했다.
‘가벼워.’
장하양이 아기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따뜻해.’
아기의 웃음이 바람에 스치는 솔잎의 찰랑임처럼 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따뜻해…….’
한 달 정도 전이었나, 신아름이 버킷리스트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기를 안 낳을 거라고 하자 신아름과 리카가 오두방정을 떨며 무어라 했었다.
그에 장하양은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응수했었는데…….
‘알겠어.’
인간이면 모두 아기를 사랑하게 되는 거구나.
자기 자식이면 더 그렇겠지.
왜냐면.
‘아기는 귀엽고, 가볍고, 작고, 따뜻하고…….’
행복해.
“저, 저기요?”
남자가 당황하는 것과 동시에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장하양이 우는 것을 보아서였다.
그녀는 우는 아기를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급하게 자리를 떴다.
‘아기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그럼 자신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랬을까?
비록 장하양이 가진 최초의 기억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잔뜩 화난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최소한 태어났을 때만큼은 행복을 느꼈을까? 자신을 사랑해주었을까?
“흐…….”
자신도 아기였을 때, 부모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더라도.
자신을 안아주고 사랑했을까?
아주 자그마한 사랑이라도 좋으니까…….
“사랑받고 싶어어…….”
사랑받고 싶었어.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받으면서 크고 싶었단 말야아…….”
영원히 채워지지 못할 공백.
* * *
입구가 소란스러워진 것을 인지하자마자 조아라가 경찰을 불렀기에, 성필은 그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대신 성필과 한구인은 장하양을 쫓았다.
그녀가 워낙 빨랐던 터라, 길모퉁이를 돌면 금방 금방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그녀의 흔적을 쫓은 결과, 근처의 공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양아!”
“하양 씨!”
두 남자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장하양의 앞에 도착했다.
장하양은 둘의 부름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양아.”
다행히 반응이 있었다.
눈동자가 성필에게 향했다가,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성필과 한구인은 사태가 어떻게 풀렸는지 설명했다. 그러나 장하양은 입 밖으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두 남자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하양아…….’
성필은 가슴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서 ‘죽였어야 했어’란 말을 들었으니, 자식으로서 고통이 얼마나 클까.
비록 천륜을 끊기로 결정했더라도 충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든 위로해주고 싶으나, 방법이 없다.
‘말이라도 했으면.’
위로란 말을 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고뇌를 줄일 수가 있다.
하지만 장하양은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양 씨, 설마.’
한구인은 특유의 방대한 지식으로 인해, 성필과 비슷한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는 장하양이 함묵증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됐다. 막대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아예 말 자체를 제한해버리는 병이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양 씨.”
그래서, 한구인은 그녀를 위로해주자고 마음먹었다. 최대한 그녀에게 위로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는 오래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성필도 감명을 받았는지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남자가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있던 말들을 마치자, 장하양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아, 하하…….”
장하양이 눈물을 쏟았다.
슬퍼서는 아니었다.
* * *
“하양 씨, 의지할 곳이 없는 느낌은 저도 익히 압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냈습니다. 친부모에게 버려졌던 겁니다.”
주기적으로 한구인이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가고, 일정 금액 기부하는 이유.
그가 보육원 출신이기 때문에, 보육원 아이들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후에는 독일의 부모님께 입양이 되어 유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고민이 생겼다.
“저는 독일의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학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 어떤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독일인 아이가 있다.
그는 매일 어느 철창으로 놀러 간다.
철창의 반대편에는 줄무늬 옷을 입은 아이가 있었다.
둘은 매일 즐겁게 놀았다.
그런데 어느 날, 줄무늬 옷을 입은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철창 너머의 건물에서, 무언가를 태우는 듯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줄무늬 옷의 친구는 끝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유대인 학살 이야기입니다. 나이대에 맞는 수준에서 받아들이도록, 독일의 모든 학생은 이 역사적 사실을 배웁니다.”
한구인은 독일인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본격적으로 역사를 배우면서였다.
독일의 역사. 독일인의 역사.
‘내가 독일인인가?’
‘내 선조들은 모두 동양인이고. 내 선조들은 독일의 역사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나는 독일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이 지겹게도 배우는 유대인 학살 이야기는, 나는 물론이고 내 선조들이 한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죄책감을 가지는 게 맞나?’
‘나는.’
‘생긴 것마저 독일인이 아닌데.’
학교에서는 동양인이란 이유로 차별도 당했다.
한구인은 무리에서 동떨어져 갔다.
“저는 소속감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를 알게 됩니다. 진정한 저의 나라. 저의 민족. 저의 진짜 핏줄이 있는 곳.”
한국어를 공부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가 입대했다.
수능을 치러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제 자리는 없더군요. 같은 민족이라 불릴 혈통일 텐데도, 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책으로만 배운 말투가 이상해서였을까.
아니면 사고방식이 독일인이라서?
알 수 없었다.
한구인은 진정한 고향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인종의 용광로. 민족을 담는 그릇.
그곳에서라면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 대한 충성심만 있다면, 누구든지 미국인으로 대우해준다는 땅으로 향했다.
“아니었습니다. 저는 동양인이었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동양인.”
한구인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은 슬픔 혹은 분노 때문에 떨려왔다.
“저는 뿌리가 없습니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신기하게 보는 시선조차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지역, 국가, 인종, 민족으로 가르지 않고.
인간을 그저 인간으로 본다.
그러면 한구인 자신도 그저 인간이니까.
뿌리가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아니게 된다.
보통 사람은 민족이나 국가에 속해 있단 정체성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정체성이 없는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한구인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저는 인간을 어느 정체성에 묶어두고 판단하며, 말하고, 조롱하는 것을 혐오합니다. 저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 생각하고 살았지만, 뿌리가 없단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더군요.”
영원히 채워지지 못할 공백.
하지만.
“홍규헌 사장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더군요. 회사를 뿌리라고 생각해달라고. 회사를 나가지 않는 한, 사장님은 영원히 저의 가족일 거라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 모두가…….”
한구인은 그 말을 믿기로 했고, 홍규헌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회사가 쓰러질 위기에 처했을 때도 홍규헌은 한구인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회사를, 한구인의 뿌리이자 홍규헌의 꿈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저는 회사가, 저희가 하양 씨의 뿌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 * *
“하양아. 설날에 숙소 찾아갔을 때 네가 우리 친가에도 와 보고 싶다 했었지? 그때 내가 네 말을 못 들었던 게 아니라 무시했던 거거든. 그렇다고 속상해하지는 말고……. 음, 그게, 난 부모님이 안 계셔.”
성필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성필이 친구의 집에서 놀던 때, 부모님은 두 분만의 오붓한 데이트를 하던 때.
부모님은 운전하던 중 갑자기 달려든 트럭에 부딪혔다.
사상자 2명.
아니, 3명.
“어머니가 임신하고 계셨거든. 내 동생이지. 초음파 검사 때 따라갔더니, 의사가 분홍색 옷이 잘 어울리겠다고 했어. 여동생이었겠지.”
성필은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즉사. 어머니는 몸에 주렁주렁 의료 기구들을 달고 있었다.
사람은 슬픔이 극에 달하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더니, 그때의 성필이 그러했다.
지금 가만히 앉아 있는 장하양처럼.
“근데 갑자기 엄마가 깨어나셨어. 날 보더니 손을 까딱이더라고. 의사들이 엄마 입에 귀를 대보래. 그렇게 했지. 엄마가 말하더라.”
동생을 잘 부탁한다.
이미 동생은 유산된 후였는데도.
성필은 대답했었다.
“네, 제가 잘 보살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바이탈 사인이 꺼졌다.
성필은 천애 고아가 됐다. 그렇지만 성필의 마음속에선 어머니의 말이, 여동생이 살아 있었다.
“나는 말이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이를 가지고 싶어. 생명을 내 몸에 품고 싶단 얘기야.”
성정체성이 바뀌었단 이야기는 아니다.
“정신과 상담도 받아봤는데, 역시 엄마의 유언이 원인인 거 같다고 하더라. 근데 그러더니 뭐라는 줄 알아? 결혼하래. 그리고 애를 낳으래.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닌데.”
생명을 만들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대로 잘 보살펴줄 것이다. 가족이니까.
“그런데 불가능하잖아. 태생적으로 불가능하잖아. 영원히.”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백, 이지만.
“아마 그때부터 난 아이돌을 만들고 싶었나 봐.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무언가, 세상 사람들이 열광과 환호를 마지않는 보석이자 빛.”
문화.
세계를 가로지르는 가장 거대한 힘.
“내가 아이돌을 프로듀싱하는 데 집착하는 건, 내 힘으로 온전히 가치 있는 걸 만들지 못하기 때문인가 봐. 내가 만든 아이돌을, 너희를, 너를, 난 가족이라고 생각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왔어.”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하여.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혹시 하양이 네가 나와 같은 구멍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말야.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해줄래?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원한다면, 나도 최선을 다할게.”
* * *
“아, 하하…….”
장하양은 눈물을 흘렸다.
성필과 한구인은 당황해서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다.
둘은 동시에 장하양의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그녀의 어깨로부터 3cm 정도 떨어진 높이였다.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기에, 신체적 접촉을 하기 힘들었다.
“아하하, 하하, 아하하하…….”
“하양아?”
“하양 씨?”
장하양은 눈물을 닦던 것을 그만두었다. 닦아봤자 계속 나올 듯했다.
대신 양옆에 있는 둘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아까 안았던 아기처럼.
다른 점은, 성필과 한구인은 울지 않는단 것이었다.
“아하하…….”
장하양은 이날 또 다른 것을 배웠다.
‘나, 기쁘면, 너무 기쁘면 우는구나…….’
9월이 지나간다.
햇볕은 수그러든다.
여름이란 이름도 꺾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