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미야모토 슈이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슈이치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와 악수했다.
슈이치는 일본의 웨벡스 사무소에서 보내온 파견 사원이었다.
가로 엔터의 프로듀싱, 매니지먼트와 관련해서 웨벡스 사무소의 의견을 전달하며, 일본 활동 계획 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케이팝의 정수를 배워가겠다.’
웨벡스 사무소는 가로 엔터에게 1억 엔을 선지급했다.
그 대가로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 관리권, 가로 엔터 A&R팀과의 협업권을 손에 넣었다.
동시에, 웨벡스는 슈이치라는 눈과 귀를 통해 케이팝 산업을 속속들이 알아낼 속셈이었다.
“이곳이 슈이치 씨의 자리예요.”
성필이 안내해준 곳은 한구인의 옆이었다.
아무래도 일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까 싶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미야모토 씨. 재무팀장이자 최고 운영 책임자이자 이사인 한구인이라고 합니다.”
“예?”
“재무팀장이자 최고 운영 책임자이자 이사인 한구인이라고 합니다.”
“아…….”
원래 한국의 기획사는 여러 직책을 홀로 맡는 건가?
뭔가 이상하다.
‘아니!’
선입견을 가져선 안 된다.
슈이치는 일본 최고라는 도쿄대학교의 문학부 출신이다. 과거 일본에서 ‘인문학적 상상력’ 돌풍이 불었을 때 웨벡스 사무소에 고용됐다.
아쉽게도 전공을 그다지 살릴 기회가 없었기에, 이번 임무로 ‘먹물만 먹은 샌님’ 이미지를 탈피할 속셈이었다.
‘한 이사님이 여러 직책을 맡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다!’
그래, 아마도.
한국 기획사는 일본의 계열화, 체계화, 분업화된 관료제와는 달리, 소수의 헤드가 여러 인원을 거느리며 사업을 해나가는 구조일 것이다.
중세의 봉건 영주와 같이 각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게 분명하다!
‘확실히 해당 사업 분야에서는 추진력이 있겠군. 그리고 헤드의 폭주를 막는 기제가 분명 있을 거다.’
슈이치는 자리에 앉아 사무실의 풍경을 관찰했다.
“한 이사님. 우리 홍보팀이 계획한 건데요, 정규 앨범 때 스트리밍 이벤트를 하려고 하거든요? 이거 가능할까요?”
“확인해보겠습니다.”
“딱딱하게 굴지 말고 바로 답줘요옹.”
“……예, 1시간 이내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땡큐.”
슈이치는 그 광경을 감명 깊게 보았다.
‘저분은 손혜빈 이사님이라고 하셨지. 이사급끼리는 허물없이 사업을 논의하는 건가? 구구절절한 단계별 회의 없이 바로 전략을 실행할 수 있다라…….’
사실, 흔한 중소기업의 주먹구구식 일 처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슈이치의 머리는 그 모든 것을 포장하고 미화하려 했다.
‘그런가! 굳이 사업상의 회의와 논의 없이 일을 각자 결정하는 건, 중세 봉건 영주처럼 후일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다! 본인의 영역 영향력을 줄이는 대신, 다른 부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안이군!’
이 무슨 정글이란 말인가!
이런 구조로 회사가 돌아간다고?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면, 회사는 암투의 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회적 자본을 희생해서까지 이 구조를 유지하는 이유가 뭘까. 역시 생산성을 위한 부서 영역별 경쟁이 목적일까? 아니면, 이 모든 파트를 총괄하는 자가 있는 걸까?’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처럼…….
어째선지는 본인도 몰랐지만, 슈이치는 중세에 꽂혀버렸다. 학부생 때 중세 문학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캔터베리 이야기 재밌었는데.’
일도 없이 가만히 있으려니, 슈이치는 슬슬 좀이 쑤시려고 했다.
“슈이치 씨, 저희 A&R 회의하는데 오세요.”
“아, 예.”
드디어 본업을 할 기회가 생겼다.
슈이치는 넥타이를 바로 매고, 전장에 나서는 사무라이처럼 손혜빈의 뒤를 따랐다.
A&R 회의는 지하 작업실에서 열렸다.
이미 성필과 정지음, 엘릭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
슈이치가 의문을 표했다.
성필의 뒤에 A&R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 리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앗! 내 나라 사람!”
“아, 하이(네), 아니, 네, 미야모토 슈이치입니다. 이시카와 씨?”
“리카라고 불러주세요!”
“하, 하이(네).”
회의가 시작되었다.
슈이치는 회의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도 리카를 흘끗거려야만 했다. 그가 성필의 뒤에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거나, 어깨를 토닥이거나,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기 때문이다.
‘……뭐지? 여기가 시장판이라도 되나?’
아니, 아니!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
고뇌를 거듭하던 슈이치의 뇌는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A&R팀은 케이팝 산업의 정수! 모든 음악과 비주얼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일부러 예술가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만드는 거군!’
게다가 리카가 성필을 정신산만하게 가지고 노는 데 비해, 회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성필도 리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일상적인 풍경인 듯했다.
“정규 앨범 곡이 8개가 나왔잖아. 거의 절반 정도는 그림이 그려졌는데, 여전히 콘서트용 곡이 부족해.”
앨범에는 ‘듣기 위한 곡’과 ‘공연용 곡’이 적절히 분배되어 있어야 한다.
콘서트를 도는 가수라면 곡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적절히 구성하는 게 관건이다.
“사람들이 따라 부를 수도 있고 신나게 방방 뛸 수 있는 그런 거.”
“근데 그게 어쩔 수가 없어요.”
정지음이 변명하려 했다.
“애들이 너무 개성적인 곡만 찾아요.”
“첫 앨범이라서 그런가.”
“네. 약간, 신나고 방방 뛰는 느낌은 가볍다고 생각하나 봐요.”
“하아, 그러네.”
음원 시장을 노리는 ‘듣기용 곡’이 지금은 더 좋아 보일 것이다. 멤버들은 콘서트 경험이 없으니, 대국적인 시선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멤버들의 선택도 당연히 ‘듣기용 곡’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콘서트용은 설하랑 하양이 유닛곡 정도지?”
“네. 나머지 개인곡들은 각자 개성을 많이 반영해서요…….”
“콘서트 세트리스트 짜기 힘들겠네. 조진만 대표님한테는 곡 들려드렸어?”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의 대표, 조진만.
가로 엔터는 후일의 콘서트 기획도 그에게 맡길 작정으로, 앨범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아틀라스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네. 조 대표님은 유닛곡이나 개인곡보다 단체곡을 더 내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초반에 콘서트를 강렬하게 잡을 메들리를 만들 게 없다고요.”
“지금 있는 게 ‘아니’랑 ‘롱 포’, ‘팅글’ 정도가 단체곡인데…….”
회의는 오랜 시간 진행되었고 어느 정도 결론을 보았다.
이제는 마지막 결정만이 남았다.
“정규 1집 앨범 ‘아라베스크’…….”
성필은 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피로감이 엄습했다.
“다들 알겠지만, 하이라이트 변주에서 랩 라인과 보컬 라인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잖아. 그걸 마찬가지로 오버랩되게 갈지, 아니면 랩과 보컬 라인을 분리해서 더 선명함을 줄지.”
이 문제를 결정하지 못해서, 아직도 ‘아라베스크’는 가사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안무보다 가사가 늦게 나온다는, 가로 엔터 초유의 사태마저 발생한 것이다.
“다들 오늘까지 고민은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해.”
정지음과 엘릭, 두 작곡가는 한 달을 넘어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었다.
“지음이는 오버랩.”
“예.”
랩과 보컬을 겹친다. 즉, 두 가사를 겹치게 하는 건 이점이 있다.
일단 곡의 흐름이 변했다는 것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가능하다.
‘여기서 바뀌겠는데?’ 싶은 랩 파트의 말미에서, 아직 랩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보컬이 치고 들어오는 건 확실히 임팩트가 있을 것이다.
“엘릭 씨는 보컬이랑 랩을 분리.”
“네.”
엘릭은 랩과 보컬이 오버랩됐을 때, 그것이 과연 퍼포먼스로 제대로 소화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그의 신념 중 하나는, 아이돌 노래는 혼자서도 어느 정도 부를 수 있어야 한단 것이다.
그렇기에 최소 두 명의 가사가 겹치는 일은 죽어도 피해왔다.
‘홀로 부르기 힘들거나 어려운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듣기에도 안 좋다고 느낄 가능성이 있어.’
엘릭은 곡의 임팩트보다, 곡 자체가 강처럼 유려하게 흘러가길 바랐다.
정지음과는 달리 그쪽이 더 듣기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럼, 임원 회의 최종결정 사항을 말씀드릴게요.”
엘릭과 정지음이 성필의 입만 바라보았다.
힘든 결정을 발표하는 건 언제나 성필의 몫이었다. 메인 프로듀서란 타이틀이 있으니까.
성필은 볼펜을 똑딱이며 뜸을 들였다.
누구 한 명의 편을 들어준다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보컬이랑 랩, 분리합시다.”
그 결정에 정지음은 실망을 표했고, 엘릭은 테이블 아래에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보컬 메인 디렉팅은 엘릭 씨가 맡아주세요.”
“예, 당연히 그래야죠.”
엘릭이 보란 듯이 정지음을 흘겼다. 정지음은 기분이 상해서 시선을 피했다.
슈이치는 그 광경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롱포와 아니를 만든 작곡가가, 예술가가 이사의 말 한마디에 수긍하는 건가?’
A&R은 케이팝 산업의 정수.
그렇기에 A&R팀의 핵심인 음악 프로듀서도 힘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지음은 성필에게 반박도 한 번 하지 않았다.
‘아!’
슈이치는 직감했다.
그는 성필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가로 엔터의 중추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돌인 리카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는 성필이.
정지음과 엘릭의 분쟁을 한마디로 잠재울 수 있는 그가.
가로 엔터에서 가장 강한 자가 틀림없다.
‘이 사람을 관찰해야 해. 결국은 박 이사님의 손에서 소녀연맹이 나온 거니까.’
케이팝의 정수는 성필에게 있다!
“리카, 이제 됐어.”
“드디어 해방이다!”
리카가 기다렸단 듯이 작업실을 뛰쳐나가려다가, 멈춰서서 물었다.
“시원하셨나요?”
“응, 고마워.”
“더 해드릴까요?”
“아니.”
“좋았던 거 맞나요?!”
리카는 찜찜한 기색으로 작업실을 나갔다.
“근데 리카 왜 저래?”
“친구 계약 어겨서.”
친구 계약 조항 1번, 거짓말은 없다.
성필은 피곤해 보이는 리카에게 ‘어제 또 늦게까지 텔레비전 봤어?’라고 물었었다. 그런데 리카가 무의식적으로 ‘아니요!’라고 답했었다.
그 거짓말은 금방 들통났다.
신아름이 ‘얘 밤마다 이상한 거 봐요’라며 거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리카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잘 논다. 애들이야 애들.”
“응애, 나 애기 성필.”
“아하하하하핰!”
“어때, 재밌었…….”
“으핰하하흐헿하핳 병신이흐핳헿!”
“…….”
성필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슈이치 씨. 저기 재호 씨한테 요청하면 저희 앨범 관련한 자료 얻으실 수 있어요.”
멍하니 놀림당하는 성필을 보고 있던 슈이치가 섬찟하며 물었다.
“재호오 씨? 이 방에 다른 누군가가…….”
“여깄습니다.”
어둠 속에서 나온 이재호를 본 슈이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브어, 어…….”
“앨범 관련해선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웨벡스 사무소 측의 의견도 제가 받고 정리해서 보고합니다.”
“아, 예, 예…….”
닌자인가?
아무튼, 슈이치는 겨우 첫날임에도 많은 것을 배웠다.
[슈이치의 케이팝 포인트
1. 케이팝은 경쟁적 환경 속 치프 프로듀서 중심으로 제작된다.
2. 아이돌과 직원은 친한 편.
3. 리카는 실물이 더 대단하다. AKH48 총선에 나오면 한 번에 순위권까지 들 것 같다. 키레(예뻐).]
* * *
반장은 넓은 물류창고를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외쳤다.
“다들 자기가 어떤 역할인지 확실하게 인지하세요! 사고 안 나게 조심하고요!”
마치 군대의 행보관 같았다.
그의 눈은 자그마한 실수나 잠깐의 지체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임무를 하던 도중, 반장의 눈이 장하양에게로 향했다.
항상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다녀, 이곳에서 ‘이상한 여자’로 통했다.
‘잘하는군.’
심지어 혼자만 잘하는 것도 아니라, 분류 업무가 처음인 병아리들도 잘 가르쳤다.
물류창고에는 처음 일해보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들어온다. 일이 고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많아, 업무 숙련도는 전체적으로 낮은 편이다.
‘보통 이쯤이면 분류 쪽에 일 못 하는 애들을 빼 와야 하는데.’
분류를 처음 하는 사람들도 장하양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인력 교체 없이 수월히 돌아갔다.
4시간이 지나고 반장이 일의 끝을 선언했다. 그는 돌아가려는 장하양에게 말했다.
“계속 여기 나올 거예요?”
여전히, 장하양은 인위적인 하이톤으로 말했다.
“당분간은요.”
“일하는 걸 보니 썩 잘하던데. 정기적으로 나오기만 하면 더 중요한 일을 맡길 수도 있어요. 당연히 페이도 더 주고요. 평일에도 나오면 좋겠는데…….”
반장이 은근한 투로 말했다.
“여기 오래 일하면 아예 직장이 될 수도 있어요. 돈도 나쁘지 않게 주니까 생각을…….”
“괜찮아요. 저는 본업이 있어서요.”
반장이 아쉬움을 삼켰다. 그는 사라져가는 장하양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반장님. 저분이 뭐래요?”
“본업이 있대.”
“돈이 부족한 걸까요.”
“그러게. 차라리 이 일을 했으면, 아주 먼 후일이지만 관리직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대한민국 유통계는 귀중한 인재를 한 명 잃었다.
하지만 아이돌계는 큰 별을 지켰기에, 대한민국의 손해는 아닐 것이다.
장하양은 여느 때처럼 숙소로 돌아와 씻고, 백설하가 모르도록 은밀히 침대에 누웠다.
아주 짧은 시간 후.
“하양아, 일어나.”
“……네, 언니.”
장하양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깨작 씹었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옛날에 이렇게 일했으면 진작 졸도했을 텐데.’
세상에, 물류창고 알바를 하고 한두 시간도 못 잤는데도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니.
장하양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몸이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만지면 젤리 같았던 팔뚝이나 배는, 이젠 탄탄한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하양은 자신의 배를 슬슬 문질렀다.
‘그리고, 이런 고생을 엄마 아빠 때문에…….’
장하양의 웃음은 본인이 달라져서 나온 게 아니었다.
새벽에 험한 일을 하는 고생이, 모두 부모를 위한 것이란 데서 나온 웃음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흐.”
신아름이 실소를 머금자 장하양이 그쪽을 보았다. 신아름은 변명하듯 빠르게 말했다.
“언니가 자기 몸 만지면서 웃길래요. 언니도 그런 거예요? 나르시시스트? 거울 보면 막 황홀해요?”
“아하하, 그런 거…….”
그때, 장하양은 직감했다.
지금이다.
지금이 유머를 꺼낼 때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장하양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필터 없이 꺼냈다.
“그런 거 맞아. 나 거울 보면 흥분돼.”
“네?!”
신아름은 세상이 떠나갈 듯 놀랐다.
“언니!”
조아라가 수저를 쾅 놓으며 크게 소리쳤다.
“농담 같은 거 하지 말랬잖아요!”
옛날, 장하양이 ‘이사님이 내 가슴 만졌어. 아니, 내 가슴으로 이사님 종아리를 만진 거지.’라는 희대의 개그를 내뱉은 뒤. 그녀는 아직도 농담 통제를 당하고 있었다.
“……아하하, 미안.”
“그러고 보니 소유 언니도 항상 샤워 시간이 길었어요! 혹시 아름이가 말했던 나르시스트가 아니었을까요!”
“나르시스트가 아니라 나르시시스트야. 나르시(Ci)시(si)스트란 스펠링이니까.”
“시, 시, 에에, 시이, 시…….”
“‘시’ 발음이 힘들어? 일본어에도 시 있잖아. 시가 연속되는 단어가 일본어엔 없나?”
“시네(죽어)!”
리카가 장난스럽게 신아름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신아름은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졌다.
“에, 아름이 괜찮아? 머리 안 다쳤어?!”
리카가 깜짝 놀라서 다가오자, 신아름이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뜨렸다.
“아쿳?!”
“나 간지럽히지 말랬지!”
신아름이 리카의 위로 올라가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놀랍게도, 리카는 전혀 간지러워하지 않았다.
“어?”
리카가 피식했다.
“아타시(나)는 아무 데나 만져도 자지러져서 바로 함락당하는 누구누구 씨랑 달라! 나는 난이도가 높다구!”
“그럼 시네(죽어)!”
신아름이 리카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꽉 눌렀다.
“다스케테(도와줘)……!”
아무도 리카를 도와주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장하양은 리카와 신아름의 장난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식사를 마쳤다.
방으로 돌아온 장하양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 했지만, 일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특별 무대 연습하기로 했었지.’
곧 있으면 성필이 장하양을 데리러 올 것이다.
주말에 잡힌 일정이라 장하양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했으나, 성필이 자진해서 픽업을 맡아주었다.
그것을 떠올리니 피곤이 조금 가셨다.
‘이제 곧 있으면 목표 금액도 모으니까…….’
장하양은 양치를 한 뒤 기본적인 화장을 마쳤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자니, 백설하가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걸어왔다.
“하양아. 소유란 분은 어때?”
“소유 언니요?”
진소유의 나이는 놀랍게도 24살이었다. 데뷔할 때는 23살이었다. 일반적인 아이돌의 데뷔 나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말은 실례지만, 신인 아이돌로 치기에는 고령이다.
“응, 소유 님.”
백설하는 예전도 그랬지만, 지금은 훨씬 더 케이어스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케이어스의 에리카와 친구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에리카는 핸드폰을 매니저가 관리하기에 연락도 할 수 없으나, 마음만은 연결되어 있길 바랐다.
그 관심은 자연스레 에리카만이 아닌 케이어스 전체에게로 넘어갔다.
“소유 언니는…….”
톡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간섭한다.
매일 연습해서 영상을 올리란 건 물론, 그 영상을 초 단위로 분석하여 피드백을 해준다.
본인도 힘들겠지만, 그 피드백을 받는 효민과 라희는 죽을 맛일 것이다. 당연히 장하양도 피드백을 받았으니, 마찬가지로 죽을 맛이다.
“리더 같아요.”
“리더? 케이어스 리더는 에리카잖아.”
“네, 그런데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지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으세요.”
“아아, 카리스마. 리더로서의 그런 거?”
그리 말하는 백설하는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장하양은 그 기색을 빠르게 캐치했다.
“네, 설하 언니처럼요.”
“아, 아니이, 내가 뭘 카리스마가 있다구…….”
장하양은 수줍어하는 백설하를 보며 미소만 돌려줄 뿐이었다. 딱히 그녀의 겸손 섞인 부정에 답해 주진 않았다.
“아, 이사님 앞에 오셨대요. 언니, 저 가볼게요.”
“응, 우리 하양이 열심히 하고 와!”
백설하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평소보다 포옹하는 힘이 더 강했다.
장하양도 그녀의 기분에 어울려주었다.
둘은 몇 초 동안 서로를 안고 이마를 맞댔다.
“다녀올게요.”
“응.”
백설하와 함께 있으면 포근한 기분이 된다.
녹은 젤리가 손끝에 달라붙어 쭉 늘어나듯이, 백설하의 포근함은 그녀와 떨어졌음에도 희미하게 몸에 남아 있다.
여자 형제가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면, 어머니가…….
“하양아.”
숙소 밑으로 내려가자 성필이 보였다.
장하양의 전신을 휘감던 포근함이 씻겨가고, 새로운 기분이 그녀의 몸이 덮었다.
“잠은 잘 잤어?”
“네. 휴일인데 죄송해요.”
“아냐. 나도 오후 즈음엔 회사로 가려고 했어.”
“앨범 준비가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남 일처럼 이야기하네. 너희 앨범이잖아.”
“아하하.”
장하양은 성필의 차를 타고 연습실로 향했다. 도중에 또 톡이 왔다.
[진소유: 다들 오고 있지?]
장하양은 방금 온 톡만이 아니라, 그 위로 늘어선 대화 전체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행간을 곱씹었다.
‘소유 언니는 분위기를 못 읽나.’
톡이라는 단순한 문자에도 분위기와 의미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대답하는 사람들의 말투, 혹은 대답까지 걸리는 시간 등.
‘라희랑 효민이가 불편해하는 게 보이지 않나?’
자신이 귀찮은 존재로 보인다는 걸 모를까…….
장하양은 하라고 시켜도 진소유와 같은 역할을 못 할 것이다. 아마 진소유는 천성적인 성격 자체가 안하무인인 것이겠지.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 줘.”
“네.”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니, 라희와 효민은 진작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20분도 넘게 남았는데 말이다.
“아, 언니!”
고작 몇 번 봤을 뿐인데도 라희는 반갑게 달려와 장하양에게 인사했다. 그러곤 그녀의 뒤를 흘겼다.
“오늘은 민 매니저님 안 오셨어요?”
“응. 대신 박 이사님 오셨어.”
“팀장님이요? 어디 계신데요?”
라희는 성필을 찾는 듯 자꾸만 장하양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밑에서 기다리셔.”
“아…….”
“이 시간 끝나고 얼굴이라도 볼래? 이사님도 라희 오랜만에 보면 좋아하실 거야.”
“아, 그럴래요!”
라희는 활기찬 아이다. 하지만 어딘가 무거운 부담과 슬픔을 숨기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세 사람은 진소유가 오기까지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했다. 일상적인 주제가 오가다가, 라희와 효민은 짜기라도 한 듯 진소유를 주제로 올렸다.
“소유 언니 스파르타식이지.”
진소유의 간섭이 너무 심하다, 혹은 불쾌하다. 거기까지 말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맥락적으로는 그와 다르지 않았다.
둘은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대화에 껴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장하양은 미소만 지었다.
“안녕.”
약속 시간이 15분 남았을 때, 진소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잔뜩 꾸민 차림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다들 일찍 왔네.”
네가 빨리 오라고 했잖아……. 라희와 효민의 눈빛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진소유는 주변을 신경 쓰지도 않고 옷을 마구 벗었다. 마치 볼 테면 보란 태도였다.
챙겨온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진소유가 활기차게 외쳤다.
“자, 시작하자.”
연습을 이끄는 건 진소유였다.
사실 그러는 게 바람직했다. 이번 특별 무대의 곡은 KS 엔터가 제공했으며, 안무 또한 KS 엔터의 인력이 만들었다.
방송국에서 섭외한 작곡가와 안무가의 수준이 어떨지를 모르니, 아예 정호환이 먼저 제안했던 것이다.
“하나, 둘, 셋, 아니. 그거 아니야.”
네 명 중에서도 진소유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 나름 연습생 생활 기간이 길다는 라희와 효민도, 진소유의 경험과 직감에는 뒤처졌다.
모든 면을 고려해도 진소유가 팀의 리더로 있는 게 많았다.
“흐음…….”
하지만.
“얘들아. 내 피드백이 전혀 반영이 안 됐는데? 연습한 거 맞아?”
진소유는 타인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단 점에서, 리더의 자질이 없었다.
그녀는 리더보다는 트레이너와 비슷했다.
“라희야, 춤춰봐. 혼자서.”
그 요구에 라희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무리 실력이 가장 좋은 진소유라도, KS 엔터를 배경으로 업은 케이어스라도, 이 팀은 동등한 관계이다.
누가 누구보고 당연하단 듯 ‘춤춰봐’라고 명령할 권리는 없다.
“왜 그래. 힘들어? 더 쉬어야 해?”
그렇지만, 라희는 진소유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라희는 홀로 춤을 추었다.
그동안 진소유는 춤추는 라희의 사진을 수십 장 찍었다.
“이리 와.”
진소유는 라희의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이 동작은 팔이 90도야. 그런데 이 사진에 찍힌 너를 봐. 이게 90도야?”
“…….”
“춤은 물처럼 흐르는 거지. 그렇다고 사람들이 순간을 포착할 수 없는 건 아니야. 움직임은 정지의 합이니까. 힘들다고 대강 넘어가지 마.”
“……대강 넘어간 거 아닌데요.”
“그래? 그럼 이게 원래 네 실력이구나. 미안. 연습이 더 필요하겠네.”
라희가 울컥했다.
누가 보아도 라희는 화가 났다. 그렇지만 진소유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와, 사진으로 보니까 확실히 심하구나. 너도 보이지 이것들? 각이 엉망이야.”
진소유는 라희가 말대답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인신공격에 가까운 피드백을 주었다.
더 짜증 나는 건 그녀의 피드백이 대부분 옳단 것이었다.
라희는 화가 났다. 회사 외부 사람에게 받아보는 평가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억울함도 몰려왔다.
그래도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진소유는 연장자이며, 케이어스고, KS 엔터의 사람이었으니까. 척져봤자 좋을 게 없다.
“이런 실력으로 특별 무대에 서면 큰일이겠다. 그렇지?”
“…….”
“우리 더 열심히 하…….”
“언니.”
진소유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장하양은 어느새 바닥에서 일어나 진소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응?”
“그만 하세요.”
“뭘?”
“피드백이요.”
“아…….”
진소유는 살짝 주눅 든 모습이었다.
“그러면…… 하양이가 대신 할래? 그런데 어떡하지?”
주눅 들었다, 는 건 착각이었다.
진소유의 표정은 어느새 생글생글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하양이는 남을 가르칠 실력이 없는데. 의욕이 있는 건 좋지만, 이건 내가 맡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자, 라희야 다시 보자. 이건…….”
장하양이 핸드폰을 든 진소유의 손목을 붙잡았다.
“언니, 그만 하세요.”
진소유는 놀라서 손을 빼려 했다.
빠지지 않는다.
그러자 진소유도 장하양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강하게.
곧 두 사람의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붉게 물들었다.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마치 남자의 자존심 싸움 같은 광경에, 모욕의 당사자였던 라희는 물론이고 우효민마저 덜덜 떨었다.
“……특이하네.”
진소유는 픽 웃더니 힘을 뺐다. 장하양도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조금 쉴까. 아, 하양이 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산책이라도 하면서.”
진소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연습실을 나갔다.
“어, 언니…….”
라희가 불안하게 물어왔다. 장하양은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곤, 진소유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에선 진소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복도를 함께 걸었다.
장하양은 진소유와 척지거나 사이가 나빠질 생각은 없었다.
단지, 아까는 정도를 넘어서서 간섭했을 뿐이었다. 말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하양은 먼저 사과하기로 했다.
“언니, 아까는 죄송…….”
“하양아, 너 집에서 학대당했니?”
시간이 멈춘 듯했다.
장하양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도 못했고, 듣자마자 뇌가 반죽으로 변한 듯해서, 몸조차 굳어버렸다.
진소유가 멈춰선 장하양을 돌아보았다.
“가정폭력인가?”
“……뭐라고요?”
“보통 여자는 물리력으로 싸움을 막으려거나 우위에 서려고 하지 않아.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더라도 말야. 그런데 넌 상황이 뜻대로 안 돌아가자마자 내 손목을 잡았잖아.”
진소유는 헤실헤실 웃었다.
“아버지…… 구나?”
진소유가 낮게 말했다.
집에서 배운 게 그거니까, 그런 행동이 나온 거겠지.
“여러 번 그런 일을 해본 것 같았어. 일진이었니? 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면 그런 행동을, 물리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여러 번 봤던 거겠지. 누군가에게 배운 거야. 오랫동안.”
진소유는 굳어 있는 장하양의 손을 잡고 다시금 걷도록 이끌었다.
“하양아, 손은 이렇게 쓰는 거야.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따뜻함을 주고, 이끌어주려고 있는 거야. 아까 네 행동은 정상적이지 않았어. 그래도 이해해.”
넌 가정환경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았을 테니까.